지난 17일 한국은행 국정감사에서 화폐개혁 필요성이 언급되면서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리디노미네이션이란 한 나라에서 통용되는 화폐의 액면가를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변경하는 조치를 말한다. 찬성론자들은 1달러가 1200원인 현실을 감안할 때, 대외적 위상 제고에 도움이 되고 내수부양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화폐개혁은 최후에 사용하는 수단으로,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했던 역사가 없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 찬성 /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경제위상제고·내수부양 효과…새 화폐단위 도입 이유 충분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은 화폐가치 변동 없이 화폐의 액면단위만 바꾸는 것을 말한다. 지금 실시하면 거래 단위를 간편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수를 부양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한 이유를 우선 대내외 경제 규모가 크게 확대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한 예를 들면 우리나라 전체 금융자산이 2010년부터 1경(10,000,000,000,000,000)원을 넘어섰고, 2015년 3월에는 1경4105조원에 이르렀다. 규모가 이처럼 크다 보니 조 단위로 발표하고 있다. 거래 단위의 편리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또한 한국의 수출이 세계 6위로 대외 규모도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당 1100원대의 환율은 너무 높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대만 통화는 2015년 9월 현재 미 달러당 32.4대만달러, 싱가포르는 1.4싱가포르달러, 말레이시아는 4.2링깃 등으로 단위가 낮다. 중국 통화도 달러당 6.4위안 정도이다. 세계 경제에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간 만큼 환율 표시단위도 같이 가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 물가가 안정되고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물가가 오를 것으로 우려되었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2013~2014년 소비자물가가 1.3% 상승하는 데 그쳤고, 올해 들어 8월까지도 상승률은 0.6%로 더 낮아졌다. 셋째, 내수를 부양할 필요가 있다. 한국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0년 35%(명목GDP 기준)에서 2012년에는 56%(2014년 51%)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54%에서 51%로 하락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현금지급기 등 다양한 기기와 금융거래 관련 소프트웨어가 변경되어야 한다. 그 규모를 쉽게 추정할 수 없지만 상당한 투자와 고용 창출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지하경제를 어느 정도 양성화하고, 세수를 증대시킬 수 있다. 화폐단위를 변경하여 새로운 통화를 발행하면 사장된 돈이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세원이 노출되고 세수가 증가할 것이다.
◆ 반대 /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화폐단위변경은 최후의 선택…필요한 건 경제체질개선 노력
이미 커피숍에서 4500원짜리 커피를 4.5로 표시하여 화폐단위를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국은행 등 정책 당국이 '통일 한국'을 내다보면서 리디노미네이션의 편익과 비용을 분석하고 의사결정을 해야 할 시기이다.
화폐 단위 변경에 관한 논의가 심상찮게 달아오르고 있다. 1000원을 이를테면 '1환'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2004년 이맘때에도 똑같은 논의가 있었다. 환율이 달러당 1150원인데, 제대로 된 나라치고 우리처럼 환율이 네 자리인 나라가 없어 자존심이 상한다는 게 이유였다. 화폐 단위를 변경하면 국민생활이 편해지며, 경기회복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경제 위상이 올라간다는 주장도 그때와 똑같다.
11년 전처럼, 지금도 나는 화폐 단위 변경에 반대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1923년 이후 화폐 단위를 변경했던 50여 개 국가 가운데 절반 정도는 공산주의를 하던 나라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옛소련 지역 국가와 폴란드, 알바니아 등 동유럽 국가, 아시아에서는 북한, 베트남, 라오스 등, 모두 23개 국가가 공산주의 시절 또는 체제 전환기의 혼란 상황에서 한두 번씩 화폐 단위 변경을 했었다. 멕시코, 아르헨티나처럼 경제를 완전히 망가뜨렸던 중남미 약 10개 국가들과, 1·2차 세계대전으로 전쟁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독일과 핀란드, 지금도 전쟁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짐바브웨, 우간다, 튀니지 등 8개국이 명단에 들어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화폐 단위 변경이란 경제체제나 경제정책 실패 또는 전쟁 등으로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지속된 결과 화폐가치가 휴지처럼 하락해 일상생활이 극도로 불편해지고, 다른 정상적 방법으로는 교정이 불가능할 때 어쩔 수 없이 하는 정책이다. 경기 회복과 물가 상승 더구나 경제 위상 제고를 위해 화폐 단위 변경을 했던 나라는 아직 없다.
달러당 환율이 네 자리여서 창피하다면 좋은 회사를 더 많이 만들고 생산성을 높여 지금의 1180원대 환율이 900원, 500원으로 내려오게 만들어야 한다. 30도가 3도로 읽히게끔 온도계의 눈금을 고쳐본들 더위를 물러가게 할 수 없는 것처럼 1180원을 달러당 1환 1전 8리로 부른들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환율이란 그 경제의 실력과 가치를 비춰주는 거울에 불과하다. "당신의 못생긴 얼굴을 거울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격언이 생각난다. 현재의 환율이 네 자리임을 부끄러워 할 게 아니라 11년이 지나도록 환율이 계속 네 자리일 정도로 우리 경제 실력이 하나도 향상되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참고자료: 플라자 합의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최근 세계 경제 상황과 맞물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플라자 합의’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플라자 합의는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 플라자 호텔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의 재무장관이 모여 맺은 환율정책 관련 합의문을 의미한다. 골자는 독일과 일본이 시장 개입을 통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를 높이는 방식으로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 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올라갈 수 있다.
플라자합의 배경에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과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을 급속도로 장악해 가고 있었다. 철강·자동차·전자·섬유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를 이들이 주도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무역 적자가 빠른 속도로 쌓여 갔고, 고질병이었던 재정적자까지 겹치면서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게 됐다. 이에 따라 미국은 5개 나라 재무장관이 모인 자리에서 ‘협박 반(半), 호소 반’의 엔화와 마르크화 절상 요구를 했다.
독일과 일본은 통상압력 등 미국의 보복 우려가 있는데다 미국 경제가 망가지면 세계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공감대를 가진 끝에 미국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후 2년간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50%,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30% 급등했다. 이는 미국 경제에는 도움을 줬지만 일본 장기 불황에 단초를 제공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최근 플라자 합의가 주목을 받는 것은 환율 전쟁으로 유로화와 엔화 가치가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금리 인상 얘기가 나오는 미국의 달러 가치는 계속 상승세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85년처럼 미국이 달러 가치 상승을 막기 위해 유럽과 일본을 상대로 유로화와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라는 요구를 할 것이란 전망이 일부 나온다.
*따라서 지난 중국의 기습 위안화 평가 절하는 일본의 과거를 답습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는 견해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