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순의 풍수이야기 (14)] 월간사람과산 2012년5월호
가문의 번성은 풍수적 노력이 먼저
해룡산과 대구서씨 약봉 서성
포천은 강하고도 길한 기운이 서린 땅이다. 동북쪽에서 남서쪽으로 달리는 한북정맥의
천보산에서 분기한 왕방기맥은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달린다. 축석령을 경계로
한강유역과 임진강유역이 나누어지는데 포천천이 왕방기맥을 감싸면서 한탄강으로 들어
간다. 왕방기맥은 회룡고조형을 만들면서 포천을 감싼다. 해룡산(660.7m) 정기를 통해
명문가의 반열에 오른 대구서씨(大丘徐氏)를 살펴보자.
좌측 봉우리가 해룡산, 우측 봉우리가 왕방산이다. 해룡산 정상에 군부대가 있다. 군부대자리가 감지가 있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해룡산을 뒤져봐도 다른 곳은 감지가 있을 만한 곳이 없다.
해룡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포천 설운동. 용맥들이 평지를 다투며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위의 사각형은 해룡산 정상이고 아래의 사각형은 차의과대학 뒷산봉우리이다. 정상에서 능선이 쉬지 않고 내려오다가
산봉위리를 만들어 잠시 머물면서 숨을 고른 후 여섯 갈래의 능선으로 꽃봉오리 형상을 만든다. 노란 점선 끝에 원이
있는 데 이곳에 대구서씨 중시조의 묘가 있는 곳이다. 풍수는 산과 물을 따라가다가 생기가 머무는 곳을 찾는 작업
인데, 물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용이 몸을 변화 시킨 자리로써 가히 길지이다.
중앙에 있는 사당을 중심으로 좌측이 서성의 조부모와 부모의 무덤이고, 우측이 서성의 무덤이다. 서성의 묘 뒷산에도
대규모의 군부대가 진주하고 있다. 약봉 후손의 무덤 30여기가 부대 안에 있다. 원래 대구서씨 문중산이었으나 국방부
에 수용당했다.
글|사진 김 규 순 (서울풍수아카데미원장)
해룡산 감지의 영험함
해룡산(660.7m)은 천보산과 왕방산 사이에 끼어 있는 간룡이지만 나름대로 자기의 영역을
구축한 산이다. 간룡이란 흘러가는 산, 지나가는 산, 끼어있는 산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커다란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량이 있는 산이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영역을 만들고나서 탁월한 인물을 배출해내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국역:한국고전번역원) 경기 포천현을 찾아보면,
“해룡산(海龍山)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산 정상에 감지(鑑池)가 있는데,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속설에 전해 오기로는, ‘군마(軍馬)가 산 위를 짓밟으면, 비가 오지 않으면
구름이라도 낀다.’ 하였다.” 라고 적혀있다.
풍수학에서는 산의 정상이나 능선에 있는 못을 천지수(天池水)라고 한다.
산정천지(山頂天池)가 있으면 그로 말미암은 용맥은 귀(貴)한 기운이 끊이지 않는다.
귀(貴)란 명예와 벼슬을 의미한다. 산정천지는 깊고 넓어서 항시 차있어야 정기가 발하며,
물이 마른다면 불길한 일이 일어나는 징조로 여긴다. 감지의 영험함으로 대구서씨 가문이
융성해졌다고 본다.
대구서씨의 위상
대구서씨의 큰 인물은 서거정이지만, 조선 3대 명문가의 반열에 올린 사람은
약봉 서성(1558-1631)이다. 조선시대에는 학문을 중시하였으므로 대학자를 배출한
가문을 제일로 여겼으므로 문묘배향 인물과 대제학의 배출이 명문가의 가장 큰 기준이
었다.
대구서씨 약봉가계에서 대제학 5명, 정승 9명, 부마 1명이 배출되어 명실상부한 명문가를
형성한다. 특히 넷째 아들(서경주-선조의 부마) 가계에서 3대 연속 정승(약봉의 고손 종태,
종태의 아들 명균, 그리고 명균의 이들 지수)과 3대 연속 대제학(지수의 아들 유신, 유신의
아들 영보, 그리고 영보의 아들 기순)이 배출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판서가 쏟아져서 선조에서
고종까지 300년간 정계를 주름잡았다. 숙종 대에는 참판이상의 수가 30명이나 되어서
‘큰 쥐가 작은 쥐를 몰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또한 서종제(약봉의 고손)는
영조의 장인이 된다. 그의 딸 정성왕후의 출생지가 포천 동교리(지금 차의과대학 아래)이다.
해룡산은 육산으로 등산로가 융단을 밟는 것처럼 포근하다. 육산은 강한 생기를 머금어서 등산객으로 하여금 쉽게 지치지
않게 한다.
약봉 모친의 풍수적 안목
약봉 서성의 본은 대구이지만, 태어난 곳은 안동이며 성장하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곳은
한양이다. 약봉이 대구서씨의 중흥을 꾀하였지만 이는 모친의 풍수적 선택과 판단에 의존한
결과이다. 약봉의 모친은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성이씨 이고의 고명딸이었다. 그러나
결혼 3년 만에 남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시집식구들이 줄줄이 죽음을 맞이한다. 게다가
친정부모도 돌아가셨고, 어릴 적 홍역으로 눈도 잘 보이지 않아서 남편 없이 천명이나 되는
노비를 부릴 재간이 없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가문의 운명이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약봉 모친은 하나뿐인 아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와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혈연인
중부(仲父) 서엄에게 맡긴다. 한양으로 이사를 위해 친정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처분
하는데, 재산의 1/3은 큰집(임청각)에 주고, 1/3은 1000명이나 된 노비들 대부분을 속량
시키고 재산을 나누어 주었으며, 1/3은 한양으로 가지고 올라온다. 일설에 가난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허구이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약봉풍단기>에 의하면 허백당 성현의 집터가 약봉 서성에게 넘어가고,
다시 오준에게, 오준의 고손인 오광운은 제자이자 사위인 채제공에게 전한다. 그리고 이승훈의 부친인 이동욱이
살았는데, 이승훈 신부는 이곳에서 처형을 당하며 그 후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약현성당)이 세워져 성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서성의 모친은 풍수적인 길지를 선택하고 구입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약초를 재배
했던 곳이라서 붙여진 약봉은 원래 무학대사가 길지로 점지해준 성현(1439-1504)의 허백당
터였다. 이 땅을 모친이 구입하여 집을 짓는다.
앞은 서해의 묘 뒤는 서고의 묘, 부모의 무덤 위에 자식의 묘가 자리한 도장이다.
서성의 묘
그리고 시조부모와 시부모의 묘를 경산에서부터 포천으로 이장하였는데, 이는 시가의 줄초상의
원인을 시조부모와 시부모의 산소가 흉지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에 유골 네 구를
천리가 넘는 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이는 상상할 수없는 작업이다. 문중설화에
의하면 “시조부모와 시부모의 유골을 운구하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어떤 노인이 다가와서 관을
자기 집 앞에 내려놓고 하루 밤을 지내라고 하여 그 집에 유숙하였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은 사라지고 관만 남아 있었다.
살펴보니 관이 놓인 자리가 예사롭지 않아서 그 자리에 모셨다”고 한다. 문중기록에 의하면
율곡선생께서 서해의 무덤자리를 잡아주었다고 하니 그 노인이 율곡선생으로 짐작된다.
약봉의 집을 무학대사가 점지한 길지를 택하여 지었고, 시조부와 시부모 그리고 남편을
율곡선생이 점지한 길지에 모셨으니 이러한 정성과 성심이야말로 약봉과 그 후손을 명문가로
만든 근원이었던 것이다.
대구서씨는 조선 중기에 인조반정을 기회로 가문의 역량이 집중되어 나타난다.
약봉은 1558년(명종13)에서 1631년(인조9)까지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왕을 호종하여 신임을 얻게 되었다. 난세에 가문을 공고히
하였는데 이는 해룡산의 품에 안긴 조상의 음덕이 영향을 미쳤음이다. 이런 길지를
차지하기까지 고성이씨 할머니의 고심과 결정에 무한한 존경심이 우러러 나온다.
풍수적 길지를 얻지 않고서는 명문가로 득세할 수 없으며, 가문에서 풍수적인 감각이
남다른 분이 나오지 않으면 탁월한 재능의 인재가 배출되지 않는다. 지금은 돈을 주면서
일을 시켜도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
지금 해룡산의 감지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해룡산 정상과 약봉의 묘지 봉우리에 중첩하여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해룡산의 정기가 진압된 상황이다. 그와 함께 약봉의 후예들도
소강상태이다. 조상의 음덕은 여기까지이다. 그럼에도 해룡산의 남은 정기가 있어,
서정희(1877-?)와 그의 아들 서범석(1902-1986)과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서정화
(내무부장관), 서동권(검찰총장, 안가부장), 서청원, 서상목 등의 인물이 지난시대를
장식하였다.
서정희와 그의 아들 서범석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부자가 국회의원을 지낸 명사이다. 역대 대통령인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이 다녀간 곳이다. 바로 앞이 서정희, 골프장 바로 옆의 무덤이 서범석의 묘이다.
비문을 김영삼 대통령이 야인이던 시절 썼다. 서정희는 독립운동가이자 제헌국회의원이며, 서범석도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6선)으로 골수야당인이었다. 비문 끝에 금녕인 거산 김영삼이란 글씨가 보인다.
조상의 풍수적인 판단은 보물같이 여기지만, 대부분의 후손들은 풍수적인 선택이란 실없는
짓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조상이 뿌린 열매를 거두기만 하지 후손을 위해 씨를 뿌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명문가의 이름은 역사 속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약봉의 모친과 같은 분이 나타나서 풍수적인 길지를 택하여 가문의 영광을 재현할까
궁금해진다. 진정한 명문가는 무엇일까. 명문가라면 인재를 양성하는 산실이 되어야한다.
가문의 인재가 명문가를 만드는 것이지 명문가가 인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인재는
산의 정기가 만드는 것이다. 그 누가 명문가의 명성을 다시 세울 것인가.
(도움말씀: 서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