鄧麗君私家相冊 덩리쥔 개인 앨범 (1편)
时间:2010-3-24 23:36:37 点击: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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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열독: 덩리쥔_특별주제, 화보집_특별주제/ 金康顯 飜譯 2010-9-14
预读:...权威与私人化,但我们仍然相信“世界史即私人史”的断语。
这套书客观上仍是《世纪华人画传丛书》的一个延续。
我们将重新定义并升级我们对于画传的的新概念,
并力图将其打造成一种新的具有较高阅读力的一套丛书。
我们想创造的是这样一套书: 以私人性来达致公共性。
以私人史来显影公共史。2005年3月
예독: 권위와 개인화는,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계사는 바로 개인의 역사"라는 결론을 믿고 있다.
이 전집은 객관적으로 여전히 [세기적인 중화인의 화보집 전집]의 하나의 속편이다.
우리들은 화보집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개념을 새로이 다시 정의하며 또한 수준높게 생각하면서
아울러 힘을 다하여 이것을 새롭게 만들어 열독성을 높인 하나의 전집을 만들었다 .
우리는 이같은 전집을 새로이 만들려고 생각하였다:
개인성으로 공공성을 만들어 내자. 개인의 역사로 공공의 역사를 밝혀내자. (2005년 3월)
第一部分: 小城故事中的“清贫乐”台北姑娘 小城故事中的“清贫乐”台北姑娘(1)-(图)
제1부분: 작은 도시의 이야기(小城故事) 가운데의 "청빈의 즐거움" 대북아가씨(台北姑娘) (1)
작은 도시의 이야기 가운데의 "청빈의 즐거움" 대북아가씨 (1)
这个女人,天生就是唱歌的女人。1953年出生的邓丽君给家庭带来了欢乐,
茅檐低小,醉里吴音,
她为贫困寂寞的家庭生活带来缤纷的色彩,
就像一个鲜亮的音符一样在父母、兄弟身边游动,身为全家唯一的女孩子,她备受宠爱。
한 여인, 천생 바로 노래를 하는 여인. 1953년 태어난 덩리쥔은 집안에 즐거움을 가지고 왔는데,
집은 초가집으로 처마는 낮고 작았고 오나라 사투리가 흘러 넘쳤으나. (저자주: 辛棄疾 신기질 작품)
그녀는 가난하고 쓸쓸한 집안의 생활에 화려한 빛깔을 가져왔다,
마치 산뜻한 음표처럼 부모 형제 곁에서 뛰놀며 집안의 유일한 여자 아이로 총애를 듬뿍 받았다.
茅檐低小,醉里吴音:주:저자 주
淸平樂.村居(청평악 촌거) (宋)辛棄疾(신기질) 작품
茅檐低小, 溪上靑靑草.
醉里吳音相媚好, 白發誰家翁媪?
大兒锄豆溪東, 中兒正織鷄籠.
最喜小兒亡赖, 溪頭卧剥蓮蓬.
[가족사진]600x
这是一个虽贫穷但自足的家庭,他们有自己的幸福生活。
邓丽君出生于台湾南部的云林县,这里充满了南国的风情,蕉风椰雨,泥土芬芳。
邓丽君父亲邓枢是随‖国. 民. 党‖去台的军官,
祖籍河北,军衔不高,举家背井离乡,生活清贫。
이것은 비록 가난하지만 스스로 만족하는 가정이어서 그들은 자기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덩리쥔이 대만의 운림현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남국의 정취, 열대지역의 풍취 그리고 진흙의 향기가 가득차 있었다 .
덩리쥔의 아버지인 덩추는 국민당을 따라서 대만으로 온 군관인데
본적은 하북이고 군대의 계급은 높지 않았으며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버리었고 생활은 청빈하였다.
(주: 등추鄧樞_河北省 大名縣 鄧台村人,일찍이 黃埔軍校 第14期 졸업 中尉軍官으로 복무. 어머니 조소계趙素桂: 山東省 東平縣人)
20世纪50年代的台湾依然贫穷,听收音机广播是一般人家主要的娱乐,
邓丽君就是这样一位收音机的 “忠实听众”,跟着收音机学唱歌是她那时最大的乐趣。
她常去干妈家作客,因为那里有她钟爱的收音机,
而母亲与干妈也成了她的忠实听众。在收音机的广播里,藏有她与音乐的缘分。
20세기 50년대의 대만은 아직도 가난하여서 라디오가 방송하는 것을 듣는 것이 일반 대중의 주된 오락이었다.
덩리쥔은 바로 이같은 라디오의 충실한 애청자 이었다. 라디오을 따라서 노래를 배우는 것이 그때 그녀의 가장 큰 즐거운 취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대모의 집에가서 놀았는데 그곳에는 덩리쥔이 가장 좋아하는 라디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대모는 그녀의 충실한 청중이 되어 주었다. 라디오의 방송 속에 음악과의 덩리쥔의 인연이 감추어 있었다.
[주선]
那是一个下着淅淅沥沥小雨的一天,那一天的空气中漂浮着雨水的清凉和湿润,
那一天,一个幼小的女孩子独自哼唱着周璇的《飘渺歌》,
她并不知哀愁为何物,只是随着缠绵温柔的调子轻声吟唱,绵绵不绝。
그때 보슬보슬 보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그날의 공기 속에는 빗속의 상쾌함과 촉촉함이 떠돌고 있었는데,
그날 어리고 작은 소녀가 혼자서 周璇(주선; 유명한 여가수)의 [飄渺歌: 표묘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결코 어떤 것에 대한 애처러움을 몰랐으며 단지 구성진 감정에 이끌려 부드러운 멜로디로 가볍게 노래를 끊임없이 불렀다.
她也不知道这就是周璇在电影《董小宛》里唱的歌曲,甚至,她还不知道,
就在此时,一个五十多岁的老人已经在她家的篱笆旁沉默良久,
那把黑色的雨伞和他身上银灰色的西服就像一朵云一样停留她家门前。
一个女孩和一场春雨,一个细雨天和一首歌,就成为了她与自己一生音乐的缘起。
그녀도 이것이 바로 周璇(주선)이 [董小宛: 역자 주: 명말 청초의 진회의 유명한 기녀]라는 영화에서 불렀던 노래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는 또한 이 때 바로 50여세의 노인이 이미 그녀의 집 울타리 곁에서 말없이 오랫동안 검은 색 우산을 받쳐들고
은회색의 양복을 입고서 마치 한 조각의 구름처럼 그녀의 문앞에 멈추어 있었다.
한 여자 아이와 한줄기의 봄비, 한줄기 보슬비 내리는 날과 노래 한 곡이 바로 자신과 일생 동안의 음악과의 인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一切都是缘分,邓丽君因为不经意的一次哼唱,
被恩师常荫椿听见后如伯乐遇见千里马,
他被邓丽君的歌声感染陶醉,竟像任何一个心怀‖激‖情‖和真诚的人一样,
巴巴地跑到邓丽君父母那里,登门请求她的父母允许自己教授这个孩子。
之后才有那一出《访英台》的故事。
이것이 모두 다 인연으로, 덩리쥔은 무심코 한 번 흥얼거리자,
은사 이신 常蔭椿(창인춘)이 마치 천리마를 우연히 알아 보았던 伯樂(백락)처럼 노래를 듣고서는,
常蔭椿(창인춘)은 덩리쥔의 노래소리에 푹 빠져서, 마침내 어느 누구나의 속마음, 격정, 그리고 진실한 사람 처럼,
간절하게 덩리쥔의 부모가 있는 그곳으로 달려가, 찾아뵙고는 덩리쥔의 부모에게 자기가 이 아이를 가르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런 뒤에야 비로소 저 [訪英臺]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황매조 노래자랑 10세] 1963년 8월
邓丽君从民谣戏曲唱起,她婉转的歌喉,可爱的形容,令人难忘。
1963年,李翰祥导演的电影《梁山伯与祝英台》在台湾上映,引起台湾盛极一时的黄梅调热潮,
而到了“中华电台”顺水推舟举办黄梅调比赛时,
恩师常荫椿遂自作主张为其报名参赛,
当年邓父对此并不十分乐意,
父亲只以为她唱歌是为了自娱,焉知她心中对音乐的挚爱。
덩리쥔은 민요와 희곡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그녀는 감미로운 노랫소리, 사랑스런 모습으로 사람들을 잊지 못하게 하였다.
1963년 李翰祥이 감독한 영화 [梁山伯與祝英台]가 대만에서 상영되었을 때, 대만에서는 한 때 黃梅調의 열기가 극성을 일어났었다.
그래서 中華電台(중화라디오 방송국)은 시류에 따라서 黃梅調 노래자랑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은사 常蔭椿(창인춘)은 마침내 스스로 그 노래자랑 대회에 참가를 주장하였는데, 그 때 덩리쥔의 아버지는 이것에 대하여 결코 마음에 전혀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단지 덩리쥔이 노래하는 것을 스스로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뿐이어서, 어찌 딸의 마음속에 있는 음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알 수 있었으랴.
及至邓丽君一路过关斩将,雏凤清于老凤声,技压群芳,
一举拿下决赛冠军,邓父方心中大喜。
拿下黄梅调比赛的冠军,邓丽君登台献唱的机会越来越多,
学校、亲友、街坊之间,她的表演欲望得到了充分的展露,也获得了众多热烈的掌声。
邓丽君是家中的“清贫乐”,
而她从九岁开始随父亲的一位袍泽也是她的启蒙老师李成清四处义演,
也以微薄的酬劳补贴了家用。
덩리쥔이 한 단계씩 상대를 이기고 결승에 오르게 되었는데 어린 봉황의 목소리는 늙은 봉황보다는 더 맑듯이 여러 상대를 재능으로 누르고,
한꺼번에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 하여 덩리쥔의 아버지는 비로소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黃梅調 노래자랑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서, 덩리쥔은 무대에 올라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점차 많아지게 되어서
학교, 친구, 이웃들에게 그녀의 노래하고자 하는 욕망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었고 또한 뜨거운 많은 박수를 얻었다.
덩리쥔은 집안의 淸貧樂(가난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덩리쥔은 아홉살부터 아버지의 군대 동료 이기도 한 그녀의 초급 시절 선생님인 李成淸(리청칭)을 따라서 여기저기 공연을 하였고,
또한 보잘것 없는 수고비 이었지만 집의 생활비로 보태썼다. [訪英臺 방영태]☜(黃梅調)
[백일사진]
虽然要到处奔波,但她性格坚韧,并未因此而感到悲观忧郁。
邓丽君百日时的留念照片。妈妈怀里的邓丽君白白胖胖,像个假小子。
邓丽君原名为“邓丽筠”,而“邓丽君”则是她的艺名,
当她满月时,家中的哥哥都称呼她“丫头”,
父母觉得不雅,于是请部队一位学问高深的杨姓军官给她取名,
几经斟酌最后将她命名为“邓丽筠”,
其意为美丽的竹枝,志节高且出人头地,但“筠”与“君”同音。
实际上,她在台北的长眠之地金宝山的墓穴即叫“筠园”。
비록 여러 곳을 분주히 다녀야 했지만 그녀는 성격이 강인하여서 결코 이때문에 비관하거나 우울해 하지 않았다.
덩리쥔이 백일이 되었을 때의 기념 사진이다. 어머니 품안에 있는 덩리쥔은 새하얗고 포동 포동하여서 마치 장난꾸러기 같아 사내아이처럼 보인다.
덩리쥔(鄧麗君)의 본래 이름은 덩리윈(鄧麗筠)이다. 그러니 덩리쥔은 바로 그녀의 예명이다.
그녀가 태어난 지 만 한 달이 되었을 때, 집안에서 오빠들은 모두 다 그녀를 야두(丫頭 야토우: 못난 계집아이, 애칭)라고 불렀기에.
부모는 이를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해서, 부대의 학식이 높은 楊씨 장교에게 딸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여러 번 숙고하다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덩리윈(鄧麗筠)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것의 뜻은 아름다운 대나무 가지로, 뜻과 절개가 높고 또한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筠(jūn)과 君의 발음은 같다.
실지로 대북에 있는 그녀의 영면의 땅인 金寶山의 묘혈은 筠園이라고 불린다.
첫댓글현재 올려진 글이 人間正道滄桑: 何日君再來(세상의 바른 길에는 온갖 풍파가 있네: 언제 그대 다시 오려나) 15편까지의 원문이 실린 鄧麗君私家相冊 1편 중의 일부를 진캉시앤님께서 번역한 것입니다. 사진은 鄧麗君私家相冊에 실린 원판본과 Sina 블로그 친구가 스캔한 것을 받아서 사용했음. (원판크기 보기는 해당 사진 클릭요..)
첫댓글 현재 올려진 글이 人間正道滄桑: 何日君再來(세상의 바른 길에는 온갖 풍파가 있네: 언제 그대 다시 오려나) 15편까지의 원문이 실린
鄧麗君私家相冊 1편 중의 일부를 진캉시앤님께서 번역한 것입니다.
사진은 鄧麗君私家相冊에 실린 원판본과 Sina 블로그 친구가 스캔한 것을 받아서 사용했음. (원판크기 보기는 해당 사진 클릭요..)
덩리쥔의 아버지인 덩추는 나라, 국민, 그리고 당을 따라서 대만으로 온 군관인데
......................국민당을 따라서..................수정바랍니다
수정했습니다.
나라, 국민, .............는 빼 주세요
그렇군요, 특정 정당 명칭을 피하기 위하여 [国. 民. 党] 아렇게 표기했었군요..
랄라! 랄라! ^^
이제서야 귀하디 귀한 자료를 접견합니다!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건강 잘 챙기시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