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운을 낼 수가 없다. 비단 내 개인적인 상황만이 아니기 때문에 실은 티를 내기도, 입 밖으로 내뱉기도 송구하고 민망할 정도다. 평소 TV와 신문을 잘 못 보며 살고 있던 터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큰 눈 뜨고 지켜보지 못했다. 깊이 있게 세상일에 마음 쓸 여력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지난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이 참 싫기도 한 요즘이다. 고 송국현 씨의 어이없는 죽음과 잔인한 4월일 수밖에 없는 장애계라 빡빡한 일정에 몸을 내맡기니 축이 나도 단단히 났다. ‘주말에는 기필코 나의 시간을 갖겠다’는 결심을 실행하면서 축 늘어진 몸을 방바닥에 딱 붙이고 야옹이와 몇 마디만 주고받으며 쉼을 가졌다. 평소에는 멍한 채 시선은 들어오지도 않는 TV에 고정시키고 떠다니는 말들을 흘려보내는데 이번에는 그러질 못했다. <세월호>에 탑승한 어이없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의 진상을 보도하는 뉴스에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속속들이 드러나는 총체적인 부도덕함과 무책임, 안일함, 탐욕주의, 보신주의, 무능력 앞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느낄 뿐이었다. 미안함과 어이없음에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도대체 병들지 않은 한국 사회의 분야는 어디인지, 이 전방위적인 속임수를 쓰는 기득권들 앞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짓밟혀야 하는지 말이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자유롭고 동등하게, 그리고 인간다운 존엄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서두가 길어졌는데,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내내 <형제복지원>이 겹쳐졌다. < 세월호> 사건의 전말이 뉴스에서 계속 보도되는데, 보수고 진보고 할 것 없이 매체들은 모두 선장의 납득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행태와 탐욕에 눈이 멀어 비정상적으로 여객선을 개조하고, 법적인 규격에 맞지 않음에도 안전관리 승인이 떨어지고, 그 승인은 해양수산부 출신 고위 관리들이 포진되어 있는 선박회사들의 모임인 해양선급과 해양조합 등이 저지른 행위였다는 결론이었다. 법을 만드는 국회까지 로비해 엉터리 법 하나 고치지 못했다니, 이는 분명 행정부, 입법부, 비영리단체, 사업주 사원 모두 이 사회적 타살의 공범들이 분명하다. 게다가 실질적인 소유주인 유00은 회사 이름을 몇 번이나 바꾸고 몇 십 개의 계열사 임직원도 서로 얽혀있거나 자주 자리를 바꾸는 등 운영의 측면에서 혹은 돈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거짓된 수를 썼다. 거기에 종교까지 더해져 사람들의 영혼을 더럽히고 이용했다니 그저 ‘악’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함을 느낀다. 도대체 이 총체적으로 비뚤어진 난국을 과연 30여 년 동안 방치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아니 방치가 아니라 유지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여기서 하나의 고리만 끊었어도 우리 아이들 그리고 희망을 품고 바다를 건너려던 무고한 사람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어둡고 긴 침묵의 카르텔 속에 마몬(재물)의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건넨 이 비극적인 상황을 나와 우리, 한국 사회 모든 시민은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이 모든 것들을 용인하는 사회 속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 | | ▲ 80년대 부산 형제복지원 전경 |
하고 싶은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 <세월호> 사건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가가 내내 머릿속에 오버랩 된다는 것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외연상 드러난 실체는 87년 1월 약 3천2백여 명이라는 상상하기도 싫은 어마어마한 수의 시민들이 무고하게 끌려가 강제수용 되었으며, 군대식 운영으로 폭력과 성폭력이 난무했고, 75년부터 86년까지 사망자 수가 무려 513명이었고, 이는 단일 장소에서 벌어진 한국 사회 최대의 학살사건이란 것이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은 무엇일까.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원장이었던 박인근 씨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2년 6개월의 형을 받고 나왔고, 최종적으로 강제 감금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며, 그 판결을 한 사람이 박근혜 정권 초대 총리지명자인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이었다는 것이다. 또 당시 수사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법무법인 한별 대표)의 말에 따르면 심한 외압이 있었다고 했다. 횡령액이 총 11억 원 이상이었는데, 10억 원 이상이면 무기징역도 가능해 그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검찰 지휘부는 10억 원 미만으로 하고 빨리 마무리하라고 했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고, 부산시장 또한 직접 전화해 “박 원장을 풀어주라”고 까지 했다고 한다. 김용원 변호사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박 원장이 구치소에 들어가 있을 때에도 무슨 수를 쓴 건지 시내에 있는 사우나를 가는 현장 사진이었다. 최근 한 지인이 박인근과 89년 같은 감옥에 있었다고 말해 깜짝 놀랐는데, 잊고 있다가 최근 형제복지원 사건이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보며 떠올랐다며, “그는 감옥에서도 황제처럼 지냈다”고 회상했다. 이런 전방위적인 박인근 구명운동, 혹은 수사 방해와 사건 은폐, 왜곡의 상황은 2013년 ‘삼성뎐’이란 책을 쓴 전 중앙일보 이용우 기자 또한 똑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취재 경험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이상한 사건이라며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한 개인이 어떻게 이런 국가적 비호를 받을 수 있었는지 여전히 의아해하고 있었다. 또한,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전두환 정권이 펼친 ‘사회정화’란 국가정책에 시민들이 동참했다. 생계를 위한 거리의 노점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고 치우는 행위를 정당하다고 생각하며 눈 감았고, 그러면서 ‘수용소=시설’의 존재를 인정했다. 결국 전두환은 이런 시민들의 호응을 토대로 박인근에게 동백훈장, 장애인의 날 표창 등을 수여하며, “박인근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그 사람 때문에 거리의 거지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오”라는 칭송(?)까지 전달했다. 과거의 박인근은 부정과 무고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인권침해를 저지른 당사자가 아니라 국가정책을 대신 수행한 정권의 충복이었고 정권 유지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내게 <세월호> 사건과 <형제복지원>이 유사하다는 것은 박인근 원장이 89년 출소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복지재벌로 살고 있고, 그 배후에 한국의 수많은 사회복지법인 단체, 지자체, 관련 법, 금융당국, 종교계 모두가 있다는 점이었다. 89년 출소한 그는 구속된 시점에서 3년이 지나면 다시 사회복지법인의 이사장이 될 수 있다는 사회복지사업법을 이용해, 법인 이름을 ‘재육원’으로 바꾸어 이사장이 되었다. 87년 사건이 터진 후, ‘형제복지원’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거라는 것은 순진한 우리들의 기대였다. 형제복지원 연혁을 각종 공문과 이사회 회의록, 법인 등기부등본 등 자료를 수집해 파악해보니 형제복지원은 단 한 번도 폐쇄 혹은 법인설립허가 취소를 받은 적이 없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박인근 원장은 시설에 무슨 문제가 터질 때마다 법인 이름을 바꾸어가며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시민들을 우롱했다. 이사장, 이사 등록 또한 수시로 ‘했다, 안 했다’를 반복했고, 측근들로 이사진을 구성해 늘 법인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던 것이다. 최근 부산저축은행 불법대출과 관련해 불구속기소 되고, 형제복지지원재단을 물려받은 아들 박천광은 2년 구형으로 이사장에서 물러났다. 당시 부산지역의 사회복지법인들은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기보다 '시장과 시의회를 찾아다니며 박인근 구명운동’을 펼쳤다. 사회복지법인들은 부정과 비리 앞에서도 서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자 했다. 서로가 공모자임을 보여준다. 최근 형제복지지원재단은 박인근 측근들로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했고, 올 2월 법인 이름을 ‘느헤미야’로 바꿨다. 여전히 사회복지법인 운영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부산시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법인 이름을 바꾸거나 이사진을 구성하는 것은 법인의 자율적 독립적 고유 권한이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회복지법인의 시설 운영비는 100% 국가가 지원한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적인 활동을 국가를 대신해 하는 것이다. 또한, 2012년 부산시의 감사결과에서도 드러났듯, 박인근이 운영하는 법인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46명이 거주하는 중증장애인요양시설 달랑 하나 운영할 뿐이며 법인 전입금은 한 푼도 없다. 오직 수익사업을 위해 부산시의 허가도 받지 않고 112억 원을 불법대출 받았다면 너무나 뻔한 상황 아닌가. 사회복지법인이 한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해 목적사업을 수행하고 있지 않다면, 부산시는 설립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올바른 관리·감독의 모습이다. 하지만 왜 지금껏 침묵하며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일까? 2012년 감사에서 16명의 공무원이 연루돼 징계받은 사실과 절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형제복지원은 1960년 육아원으로부터 출발해 75년 부산시가 무상 임대 해준 주례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부산시와 [부랑인아일시보호사업] 계약을 체결했고, 그해 12월에는 [내무부훈령410호]가 공포돼 본격적으로 ‘부랑인’이라는 비(非)국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형제복지원에 감금한다. 그리고 재식훈련과 구타, 강제노역으로 어마어마한 건축물들을 지었고, 77년 8천6백여 평에 달하는 토지를 1천461만 원에 부산시로부터 불하받았다. 그 후 도시 확장으로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자, 2001년 한 건설사에 223억7천8백만 원에 되팔았다. 24년 뒤라지만 2백억 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재산 축적 과정은 이유 없이 끌려가 온갖 고문과 강제노역에 시달린 무고한 시민들의 핍박이었으며, 부산시의 특혜, 정권의 비호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박인근은 수시로 정관을 변경해 목적사업보다 수익사업에 오히려 열을 올렸고, 박인근은 전국부랑인복지시설협회장, 부산 사회복지법인단체협의회 회장, 장학사업, 종교사업(불법적인 시설 내 교회 운영)을 하며 지역사회 유지로 행세했다. 1998년에는 당시 수사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역시나 반성은커녕 오히려 명예회복을 하겠다며 2010년 자신의 회고록과 같은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는 운영 자료집 14권을 제작하기도 했다. 책 속에서 그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 부산시가 시킨 일을 한 것일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복지의 이름으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복지법인들, 그리고 이를 알면서도 문제제기 하지 않는 전문가 집단들, 잘못된 운영을 눈감아주거나 뒷돈을 받으며 무능력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지자체와 사회복지 실천을 늘 선한 의지로 생각하며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는 일반 시민들의 잘못된 인식, 그리고 가난한 장애인과 노인은 수용시설에 보내야 한다는 국가정책. 이 모든 것이 현재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형제복지원 사건을 낳고 있는 공모자들이 아닐까. <세월호>를 둘러싸고 ‘해피아’란 것이 가장 큰 문제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상황을 보며, 마찬가지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다시 생각한다. 공고한 이 침묵의 카르텔을 끊고 ‘복지마피아’란 구조를 깨, 인권과 공공성을 가장 우선에 둔 국가정책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