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왕과나'에서 인수대비
조선은 남존여비사상이 지배적인 나라였다.
남존여비사상을 가장 잘 나타낸 서적이 인수대비가 지은 '내훈'이라는 책인데, '내훈'의 [부부장]에는 "아내가 비록 남편과 똑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예로써 마땅히 공경하고 섬기되 그 아버지를 대하듯 할 것이다"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며, 심지어“남편이라는 직책은 높은 것이 마땅하고 아내는 낮은 것이니, 혹시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말대답하거나 성을 낼 것인가"라고도 적혀 있을 정도로 남존여비에 대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지은 인물이 세종의 손자인 단종을 계유정란으로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세조) 시대때부터 연산군시대까지 강력한 권력을 지닌 인수대비였다는 사실을 보면 '내훈'이 남존여비를 강조하기 위해 지은 책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수대비는 이러한 책을 지은 것일까? 그것은 인수대비가 살아온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기 전 수양대군은 자신을 뒷받침할 세력이 필요했다.
수양대군은 당시 명나라의 외교관으로써 명나라를 등에 업고 있었던 한확의 세력이 필요했고, 한확의 둘째 딸인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큰아들인 도원군과 혼인시킨다.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란을 통해 왕위에 오르자 수빈 한씨는 세자빈이 되어 권력의 정점에 선다.
그러나 그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수빈 한씨의 남편이었던 의경세자가 요절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0여년간 권력에서 멀어진 수빈 한씨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다시 권력의 정점으로 복귀하기 위해 '석실능묘 사건'을 일으킨다.
단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세조는 정통성의 문제 때문에 왕권이 강하지 못했다.
세조는 귀족권을 견제하기 위해 능묘제도를 개혁하고 그에 일환으로 석실 봉분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수빈 한씨는 그 당시 왕권주의를 유지 계승하고자 훈구파를 저지하려던 예종에게 장자의 부인이자 왕의 형수라는 지위를 이용해 훈구파와 손을 잡고 예종을 압박했던 것이다.
훈구파를 등에 업은 수빈 한씨와 예정은 끊임없이 대립하지만 예종은 불과 2년만에 요절한다.
예종은 불과 19살 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고, 정희왕후도 훈구파를 지원했기 때문에 수빈 한씨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수빈 한씨는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신군(성종)을 왕위에 올려 예종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한다.
성종
권력의 정점에 선 인수대비(수빈 한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게 도와준 훈구파의 권력이 강해지자 신진세력인 사림파의 등장을 끌어내며 성종에게 힘들 실어준다.
성종 시절 훈구파와 사림파는 인수대비의 역할로 균형을 유지하지만 성종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사림파의 힘이 강대해지자 인수대비는 '윤비 폐출 사건'을 일으켜 다시 훈구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불교 도첩제' 사건으로 훈구파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수대비가 이렇게 균형을 유지시키면서 왕권은 점점 강화된다.
귀족들의 힘싸움으로 강화된 왕권은 성종을 지나 '연산군'에 이르면 그 정점에 달한다. 연산군이 폭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강력한 왕권에 있었던 것이었고, 강력한 왕군을 지녔던 연산군이 쫓겨나며 인수대비가 이루어 놓았던 절대왕권시대가 종말을 고한다.
'내훈'은 이러한 인수대비가 세력간의 균형을 유지하게 힘을 쓰던 시절에 지어졌다.
'내훈'은 철저하게 성리학의 사상을 반영한 책이고, 성리학을 믿던 사림파에게 힘들 실어 주던 책이었다.
그러나 인수대비 자신은 불교 신자였고, 사림파의 힘이 어느 순간 강해지자 '불교도첩제' 사건에서 불교의 당위성을 옹호하며 훈구파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 발생한 것을 보아 인수대비 자신이 '내훈'을 사상으로 삼았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인수대비는 균형이 무엇인지 아는 조선 최고의 여성 정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