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로마서 1~11장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관계 회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로마서 12~16장은 권면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된 자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두 개의 전환 지점에 로마서 12:1~2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11장을 종합하면서, 다른 하나는 12~16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을 함축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즉, 로마서 1~11장의 결론부이면서 12~16장 모든 권면의 출발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라고 말씀합니다. “자비하심”은 복수입니다.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의미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셀 수 없는 불가산명사입니다. 그런데 마치 셀 수 있는 가산명사로 씁니다. 이는 이전에 로마서 11:30~32절의 “하나님의 긍휼하심”, 로마서 8:39절의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로마서 1~12장의 핵심입니다. 결론입니다. 아울러 로마서 12~16장 권면의 출발입니다. 시작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동, 순종, 삶은 은혜, 즉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에 기초합니다. 근거합니다. 우리가 순종했기에 받아들여짐이 아니라, 받아들여졌기에 순종함입니다.
“권하다”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칼로”로서 “권하다”, “격려하다”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더 강하게 “호소하다”라는 말로 번역해야 합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호소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이 이제 머리를 떠나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즉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떤 능력을 갖추고 나타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1절에 “너희 몸”은 복수입니다. “너희 몸들”입니다. 롬 12:1~2절은 개인보다는 공동체 전체에게 준 말씀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압축되어 있어서 자세히 풀어야 합니다. 먼저 “몸을 드리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몸”(소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왜 영혼을 드리라고 하지 않고 몸을 드리라고 하였을까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몸입니다. 사실 “영혼”이라는 말은 좋지 않은 번역입니다.
“영혼”(네페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나입니다. 구약에서 “영혼”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다 찾아보니, 세 그룹 정도로 나누어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일인칭이 붙습니다. “내 영혼아”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 권할 때 씁니다. 둘째는 내 속사람을 가리킬 때 씁니다. 셋째는 가장 많은 경우인데 “목숨, 생명, 사람”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목숨”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몸을 드리되,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기뻐하실 제물”입니다. 전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제물도 있고, 기뻐하지 않을 제물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제사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신약성경으로 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에 대한 언급이 더 많습니다. 베드로전서 2:5절을 보면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외에도 사도행전 10:4, 로마서 15:16, 에베소서 5:2, 빌립보서 2:17, 빌립보서 4:18, 디모데후서 4:6, 히브리서 13:15~16, 요한계시록 8:3, 4절입니다.
둘째, “거룩한 제물을 드리라 ”입니다. 무엇이 거룩한 제물입니까?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악한 시대, 즉 옛 시대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산 제물을 드리라 ”입니다. 이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어떻게 제물이 살아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단 한 번의 제사로 우리의 모든 저주와 죽음을 다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전 존재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그대로 드리는 산 제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죽은 제사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의 삶이 직접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드리라”라는 동사의 시제는 한 번 드리고 끝나는 그런 행위를 의미하지 않고 계속 드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헬라어의 현재형 명령문 동사가 반복되는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산 제사는 한 번 드리고 끝나는 제사가 아니라 삶 속에 매 순간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말씀할 때, 구약성경에서 레위기 1장 본문을 염두에 두거나, 성경을 펼쳐놓고 읽으면서 기록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레위기에 소개되는 5대 제사가 온전히 드려졌을 때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이전입니다. 주전 587년에 성전이 파괴됩니다. 주전 520년에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이 되어서 동물 제사를 드렸지만,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보기에는 힘듭니다. 오랫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서 나라가 멸망 상태에 있다 보니까.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흩어졌고, 본토에 있는 유대인들 숫자보다, 애굽, 알렉산드리아, 튀르키예(터키), 이란, 이라크 등지에 흩어진 유대인(디아스포라 유대인)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이들은 본토에 있는 성전을 방문해서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방법에 따라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바울까지 600년 동안 제사를 못 드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생각해 본다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는 말이 더 생생하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릴 때 제물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안수하다”라는 말이 “기대다”라는 의미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가 있는 힘껏 제물에 손을 대고 누릅니다. 자기와 제물을 동일시합니다. 제물을 드릴 때 자기가 키운 가축이어야 합니다. 왜 일반짐승은 안되고(예: 사슴, 노루), 가축(소, 염소, 양, 비둘기)이어야 합니까? 자기와 제물을 동일시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몸입니다. 예배자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가 지속해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는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본받다”와 “변화받다”라는 말이 대조됩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을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conform”과 “transform”의 대조입니다. “conform”은 “con”(따라가다)과 “form”(형태, 틀)이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즉, “형태를 따라간다”의 의미입니다. “transform”은 “trans”(바꾸다)와 “form”(형태, 틀)이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 세대”는 “대세, 주류”입니다. 모든 관건은 “형태, 틀”입니다. 형태를 따라가지 말고(동화) 그 형태를 바꾸어야 합니다(변화).
그러면 변화 받는 길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즉, “마음”(누스, mind)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쓰인 “마음”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쓰는 “마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카르디아”인데, 본문에는 그 대신 “누스”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카르디아”는 해부학적으로 사람의 “심장(heart)”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여기서 “카르디아”를 쓰지 않고 대신 “누스”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이성”이라는 뜻의 “누스”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이 “mind”라는 말입니다. 즉,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고방식, 세계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2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2절은 1절에서 말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입니다.
먼저 부정적인 방법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합니다. 여기서 “세대 = 시대”라는 말은 헬라어 “아이온”을 번역한 말인데, 단순하게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개념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왔고, 우리는 이제 새 시대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새 시대의 두드러진 점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악한 시대, 즉, 옛 시대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새 시대가 완전히 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분명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였지만, 신약성경이 예언하는 전체적인 부활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할 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으로 표현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라고 하지 않고 꼭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그 표현은 죽은 자들도 부활하리라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그 전체적인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옛 시대와 새 시대가 겹치는 부분에 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만 “이 시대”와 동화되기 쉬운 것입니다. 결국 “ 이 세대롤 본받지 말고”라는 표현은 그것들과 동화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것들을 따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본받다”라는 말은 헬라어 “쉬스게마티제스티조”인데, 이 단어의 중간을 보면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형태를 의미하는 “스케마”가 있습니다. 즉, 그 형태와 같아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 소비자 중심 문화, 성공 주의, 패권주의, 한탕주의 등등
빌립보서 2:15절을 보면 바울은 이 세대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와 동화된다는 것은 사실 기형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영적 불구자”입니다.
둘째는 긍정적인 방법입니다. 변화 받아야 합니다. 여기 “변화 받다”라는 말은 헬라어 “메타모르푸스테”입니다.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겉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속까지 다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속까지 바뀔까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합니다. “마음”은 우리의 감정, 사상, 의지가 다 들어 있어서, 그곳에서 결정하는 대로 우리의 삶이 그려집니다. 결국 마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을 본받아 동화될 수도 있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 바쳐질 수도 있습니다.
“새롭게”라는 말은 헬라어로 보면 창조와 관련이 있는 “아나카이노시스”입니다. 고린도후서 4: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속사람이 새로워 지는 것을 말할 때 “아나카이노시스”의 동사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10절을 보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이 새 창조입니다.
2절의 “분별하라”라는 말은 헬라어 “도끼마조”로서 다른 말로 번역하면 “시험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분별하다”라는 동사는 이인칭 복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개인이 삶보다는 공동체 생활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도끼마조”라는 단어에는 시행착오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창조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성숙해 가면서 점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갑니다. 분별하려면 새롭게 창조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은 기본적으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까? 본받지 말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즉 사고방식, 세계관이 계속해서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