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꾼들은 성삼재에서 만복대를 지나 바래봉과 덕두산에 이르는 길을 지리산 서북능선이라 부른다
우리는 정령치에서 시작하여 바래봉을 거쳐 구인월마을까지 약8시간을 걸었다
산행을 하는 동안 천왕봉이 항상 눈앞에 있어 그와 어깨동무를 하며 걷는 느낌이었다
장쾌한 지리산맥은 우릴 강하게 만들었고, 억새의 봉두난발은 가을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해주었다
정령치(1,172m)
전주에서 7시 반에 출발하여 정령치 휴게소에 9시 50분에 도착하였다
노고단에서 반야봉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는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한의 왕이 진한,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鄭)씨 성을 가진 장군을 파견했다 해서 '정령치'란 이름이 붙었단다
산행의 들머리
정령치에서 서북쪽 능선을 타면 고리봉-세걸산-부운치-바래봉으로 이어진다
남쪽 능선을 타면 만복대-묘봉치-고리봉-성삼재로 연결되는데, 우리는 서북쪽 능선을 탔다
철쭉이 만개하는 봄철에는 사람들로 인해 길이 엄청 막혔을텐데 오늘은 한산해서 참 좋았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開嶺庵址 磨崖佛像群)
고리봉 벼랑 밑 산속의 너른 터가 '고개를 여는 곳'이란 의미의 개령암지(開嶺庵址)이다
큰 것은 4m, 작은 것은 1~2m 정도로 12구가 모여있는 불상군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울퉁불퉁한 자연암벽이어서 조각 자체의 양각도 고르지 못하고 훼손도 심한 편이어서 안타까웠다
조형성은 뛰어나지 않지만 규모가 큰 불상군은 휘귀한 예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운주사의 못난이 불상들을 연상시키는 마애불은 온갖 핍막과 수모를 견디어낸 민중들의 얼굴 같았다
천왕봉과 친구가 되다
산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천왕봉은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천왕봉을 향해 모여드는 장엄한 지리능산을 배경으로 선 청춘남녀의 표정이 상기되었다
천왕봉은 우리들의 아픈 다리를 어루만져 주기도 하였고, 등에 흐르는 땀을 식혀주기도 하였다
큰고리봉(1,305m)
지리산 서북능선에는 고리봉이 두 개 있다
만복대 지나 성삼재로 가다 만나는 고리봉을 '작은고리봉'이라 부르고, 이곳을 '큰고리봉'이라 부른다
고리봉에 오르면 비로소 지리산은 커지고 뱀사골과 삼정산능선. 포효하듯 우뚝 솟은 반야봉이 보인다
고리봉은 백두대간 종주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곳이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급경사로 내려서면 고기리-수정봉-입망치-여원재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종주길이다
세걸산(世傑山) 1,216m
세걸산은 세상의 걸출한 인물이 나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이름에 걸맞게 학생교육원이 웅장한 세걸산의 품에 안기듯이 자리잡고 있었다
세걸산 줄기는 남원시 운봉읍과 산내면의 분수령이 되는 곳으로 계곡물은 서쪽으로 흘러간다
세걸산 계곡물은 운봉평야의 젖줄인 광천으로 흘러 낙동강 근원의 한 가닥이 되고 있다
세동치
점심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앞에서 줄음질치는 대장을 원망하며 세동치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20m 쯤 내려서면 세동치샘이 있는데 우리는 그냥 지나쳤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서 그런지 카메라를 들이대도 표정이 좀 거시기하다
늦은 점심식사
오후 1시가 훌쩍 넘어서야 숲속에 밥상을 펼칠 수가 있었다
자리는 옹색하였지만 깨죽나물, 도라지, 깻잎 등의 자연식품이 펼쳐지니 흡족하였다
봉지 커피 2개를 더운 물에 타서 7명이 나눠 마셨지만 충분히 만족하였다
떠나가도 눈에 선히 밟히는 사람아
돌아와 서성이는 텅 빈 안마당에
스산히 마른 가슴만 홀로 서걱이는데
소리치며 달리던 초록빛 바람하며
이제와 불꽃 육신 스스로 태우는 산천
서리하늘 찬바람에 기러기 떠도
입 꼭꼭 다물고 떠나버린 사람아
달빛에 젖은 몸이 허기가 져서
너울너울 천지간에 흐늑이는데
잔칫집 불빛처럼 화안히 피어
떠나가도 눈에 선히 밟히는 사람아
.........홍해리의 詩 <용담> 전문
부운치(浮雲峙)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공안리와 산내면 부운리 사이에 있는 고개다
부운(浮雲)은 떠오르는 구름, 즉 계곡을 따라 올라온 공기가 구름으로 피어오르는 데서 유래되었나 보다
식사때 알콜을 적당히 마신데다 서서히 지쳐가는 몸으로 인해 오르락내리락 하는 산길이 힘들었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老後)여
............임영조의 詩 <갈대는 배후가 없다> 부분
팔랑치(八郞峙)
소의 잔등처럼 부드러운 능선과 길게 이어진 나무데크를 지나니 팔랑치가 나타났다
이곳은 5월이 되면 흐드러진 철쭉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인데 지금은 억새로 뒤덮여 있었다
팔랑치는 마한의 왕이 달궁에 성을 쌓고 있을 때 여덟 장수를 시켜 적을 막던 고개라 해서 생긴 이름이다
식수가 떨어져 힘들었는데 지나가는 산꾼이 바래봉 밑에 샘이 있다고 해서 큰 힘이 되었다
감로수(甘露水)
바래봉 바로 아랫쪽에 엄청난 양의 물이 샘솟는 샘터가 있었다
이렇게 헐벗은 산 속의 어디에 이토록 풍부한 물이 숨어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메마른 입을 헹구고 나서 물통에 감로수를 가득 채우고 나니 바래봉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구상나무 열매
이재진 대건안드레아가 빠알간 구상나무 열매를 한웅큼 따주었다
열매를 입에 넣고 깨물자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진한 단맛이 새어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떼기가 무척 힘들었는데 구상나무 열매의 단맛으로 인해 새로운 힘이 솟았다
내게는 하늘에다 버둥댈
자유도 없단 말인가
오늘도 매운 바람 산허리 껴안고 뒹굴다
닿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
허둥대다 머무는 누구의 그림자인가
..........하옥이의 詩 <억새풀> 부분
바래봉(1,186m)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바래봉에 올라섰다
산의 모양이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를 닮아서 바래봉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1971년 박통 시절, 호주에서 가져온 면양 2,500마리를 키우기 위해 이곳에 초지를 조성하였다
면양은 모든 것을 먹어치웠는데 철쭉은 독성이 있어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국 제일의 철쭉 화원이 되었다
이렇게 바래봉의 철쭉은 자연과 인공의 합작품인 셈이다
외로운 구도자
오랜만에 참가한 바오로 형제가 외로운 구도자처럼 홀로 바래봉에 오르고 있다
도(道)를 깨닫는 길은 끝이 없지만, 산행은 언젠가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게 차이점이다
거대한 지리산맥을 등에 업고서 산정을 향해 걷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 같다
덕두산(德頭山) 1,150m
덕두산은 바래봉과 함께 지리산국립공원 서부지역의 북단 가장자리에 솟아있는 산이다
운봉고원의 울창한 산악지대로 봄나물과 약초가 많아서 산객보다는 약초 캐는 아낙네들의 발길이 더 잦은 곳이다
덕두산은 서북능선의 첫 봉우리로서 지리산의 관문처럼 생각되는데 모르면 그냥 지나쳐버릴것 같았다
남원시에서 세운 이정표가 엉망이어서 누군가 망가뜨려 놓았는데 그걸 주워들고 인중샷~
舊인월마을 갈림길
드디어 하산이 시작되는 갈림길 안부에 다다르자 모두가 지쳐서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어스름한 땅기운이 밀려들어 산속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무릎은 시큰거리고 시장기까지 밀려와서 발걸음을 떼기가 함들었다
舊인월마을
꼬박 8시간을 걸은 끝에 구인월마을에 도착하였다
달빛을 끌어들인다는 인월(引月) 마을의 이름이 무척 시적이고 낭만적이다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에 달빛을 끌어들여 왜장 아지발도를 화살로 쏘아 승리를 거둔데서 유래된 이름이란다
번암 막걸리
대장 부부와 오랜 친분을 쌓아온 번암막걸리 사장 부부께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두부를 따뜻히 데워서 맛깔스런 김장김치를 내오신 사모님의 인상이 매우 푸근하였다
막걸리를 그윽히 마시고 여러 사람이 네 박스를 구입해서 짊어지고 전주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넘었다
첫댓글 힘은 들었지만.. 억새와 구절초.. 울긋불긋 단풍.. 고운 가을하늘.
회원님들의 향기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지친 몸에 사각거리는 김치와 두부. 막걸리는 압권이었구요..
그날의 내음으로 행복한 한주 시작합니다.
가슴시리고, 애절하고,환희를 느끼게 해주는 산행후기~백작님~쨩!!
그날~저로인해 늦어진 하산시간~그래도 기다려주고 같이동행한 신산회 당신~~깜~싸~함니다.....
쥐가 나고 무릎이 아픈사람이 있어야
나머지 사람들이 편안해지는데
오히려 고마워 하고들 있을 거야
사실은 나도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리따 덕을 톡톡히 보았다우. 감사 ^*^
두부가 그렇게 귀하고 맛있는 음식일 줄이야
그리고 여지껏 가장 맛있는 김치는 리따표인줄만 알고 살았어
근데 아니더라고 번암주조장표 김치였더라고
그래도 리따와 리따표김치는 영원히 내가슴속에
각각의 김치마다 독특한 맛이 있어서 우열을 가린다는게 무의미합디다
번암주조장표 김치는 아삭아삭하고, 리따표 김치는 감칠맛이 있고, 군다표 김치는 깔끔하고...
글라라표 김치는 톡~ 쏘는 맛이 있고, 세라피나표 김치는 시원하며, 로사표 김치는 그윽한 맛이 나고..
도로테아표 김치는 개운하며, 카타리나표 김치는 얼큰해서 좋더라구요 ㅋㅋㅋ
바래봉 뒷쪽의 궁금증이 해소 되었습니다.ㅋㅋ
다음에는 쉬운 두륜산갑니다.ㅋ
참 시몬 총무 은혼식이 있어요
여러사람들이 부담없이 참여하게 산행 거리를 좀~ 줄이면 어떨까요?
총무님의 은혼식 이벤트는 오늘부터 준비하겠습니다
번암막걸리 주조장에서 우리 대장 부부의 인간미를 120% 확인하였습니다
어느 누구가 낯모르는 사람들이 20여명 몰려왔는데 막걸리와 안주를 공짜로 내주겠습니까?
이건 대장 부부가 오랜 세월 동안 덕을 베풀고 신뢰를 다져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이런 분을 우리 산악회의 리더로 모시게 되었다는게 무지무지 행복하였답니다
맞아요. 크나큰 감동이었어요.
대장부부께서 풍부한 인간미의 향기를
지리산자락 번암 골짜기까지 얼마나 풍기셨는지....
또 한 번 확인이 되는 풍요로운 번암마당이였어요. 캬~~~~~
행복가득은 뉘신지? 궁금~~
이뿐 혜자 언니여~
쫀득쫀득하고 감칠맛 나는 산행기!!! 그 감흥이 다시 살아나네요.
산행기 넘 멋져서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없네요~~~ 천왕봉과 하루종일 어깨동무했던 10월 정기산행... 돌고오니 하루종일 지리산 서북능선이 눈에 가물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