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1일. 금요일.
이 날을 우리 역사, 즉 우리의 불교사나 불교학연구사에서 어떻게 규정하고 평가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할 것이라는 점이다.
"불교평론"이 죽은 날이기 때문이다. 9월 21일 오후 6시에, 신사동 불교평론 사무실에서는 편집위원회를 열어서 편집위원들에게 폐간결정을 알리고 후속대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날 밤부터, 폐간결정 소식은 바람을 타고 날았다.
그리고 기자들은 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같다. 인터넷판에서 기사를 읽게 된 것은 9월 22일이었다.
가슴 속을 지나가는 만감은 차치하고, 막상 "불교평론"이 폐간되었으니 그와 나의 인연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불교평론도, 나도, 지난 13년은 참으로 격정적인 삶을 살아왔다.
나는 1997년 9월 1일자로, 동국대 불교대학 불교학부 교수로 임용되었다. 한 학기가 지나서 인도철학과로 소속변경. 전임강사로 2년 계약제.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 "계약제"라는 것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이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계약을 하지 않아도 을(乙)은 아무 말도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심정을 주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법에는 이렇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우리들에게 우리 학교에서 "2년 동안 연구업적을 몇 점 쌓고, 교육업적을 몇 점 쌓고 한다면 조교수로 승진된다"라고 하여, 승진에의 기대감을 심어준 경우에는, 그러고서도 재계약을 하지않아서, 소송을 하면 학교가 지게 된다는 것이다. 법대 변호사 출신 교수님으로부터 이에 관한 대법원판례를 얻어본 일이 있다. 내 자신의 문제로 본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것도 얻어보는 것이 대학교수의 삶이다!)
그런 압박 속에서 정신 없이 지낸 시간이 1997년 9월부터 1999년 8월까지 2년이었다. 1999년 9월 1일자로, 다행히 재계약을 하게 되었다. 이후는 계약제가 아니다. 그리고 10월 1일자로 조교수로 승진.
이 1999년 가을, "불교평론"이 창간호를 내게 된다.
잡지는 편집위원이 필요한 법. 연전에 작고한 고광영 선생이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홍사성 주간이 편집위원으로 나를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달라.
나는 어렵게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로서는 그 전투같은 2년을 지나고 나서, 그 피로감이 다 가시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그리고 조교수라고 올라갔지만, 여전히 연구의 압박감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교수까지는 승진해야 하지 않는가. 무능해서 잘렸다 소리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교수가 되는데 이후 10년이 더 걸렸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윤창화선생님과 마찬가지로, 홍사성 주간님은 오늘의 나를 있도록 교계에서 가장 많이 나를 '키워주신' 분들이다. 한 분은 출판을 통해서(민족사에서 지금까지 나온 책이 10권이다.), 또 다른 한분은 "불교신문"과 "방송"(라디오 불교방송과 불교티비)을 통해서였다. 그러한 현실적인 도움보다, 그분들이 내게 베풀어준 것은 "기대"와 "사랑"이었다.
그런데 "불교평론"을 맡아주지 못한 것이다. 그 전에 고광영 선생이 작고하였을 때, 짧은 글을 쓰면서도 말했지만, 아마도 고광영선생은 꽤나 섭섭하였을 것이다. "김호성, 변했다"라고도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실제 문제는 우리가, 교수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먹어야 할 밥의 메뉴와 "불교평론"이 제공하는 밥의 메뉴가 좀 달랐다. 불교평론에 편집위원이라도 못하면, 필자로라도 열심히 참여해 주었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이 "메뉴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먹어야 할 밥은 "정식"(논문)이다. 그런데 불교평론에서 먹을 수 있는 밥은 "비빔밥"(잡문)이다. 물론 형식상으로 하는 말이다. 잡문, 이라는 말은 학교에서는 그렇게 평가를 받는다는 말이다. 불교평론에 실려도, 학술논문으로서는 인정을 못받는다. 잡문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니까 학술논문집에 실리는 것보다 현저하게 점수가 안 되고, 대학으로부터 연구비 지원도 못 받는다. 그것이 오늘날, 제도화된 대학에서 살아가는 교수들이 처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이다 보니, 글도 많이 못 썼다. 겨우, 에세이 1편, 서평 3편, 기행문 1편. 논문 1편.
에세이 :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서평 2편 : "부처님 당시 스님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출가, 세속의 번뇌를 놓다(사사키 시즈카 지음, 원영 옮김, 민족사)
"원형석서", ?호
"공 --- "(제목은 나중에 수정함, 동대출판부, 김성철 역) ?
기행문 : 대만불교의 겉과 속, ?호
논문 : 대만 자제공덕회의 사회복지, "불교평론" 51호
여기서 '논문'이라 함은, 실제로 질적으로 보아서 "논문"이기에 그렇게 부를 수 있다. 논문은 불과 51호에서 겨우 1편 썼을 뿐이다. 에세이, 서평, 기행문은 모두 에세이 형식의 글이다.
아, 마성스님께서 내 책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써주신 서평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음, 거절된 원고도 1편 있었다. 바로 윤창화 선생의 책, "한국불교명전 58선"에 대한 것인데, 홍사성 주간으로부터 "불교평론에 싣기에는 성격이 적절하지 않다'라는 거절편지를 받았다.(이 글은 끝내 아직가지 활자화되지 못하였다. 이후 근대불교사를 연구하시는 김광식 선생님께서, "근대불교사에 의미가 있는 책을 서평한 것이니, "ㄷ" 논문집에 실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감사하다' 했는데, 역시 편집위원회에서 거절되었다 한다.) 실제로 '서평'의 형식에 딱 맞는 글이 아닌 것은 인정할 수 있다.
불교평론 52호를 앞두고, 편집위원이신 이종수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획연재, 근현대한국불교인물탐구 7"로 학명(鶴鳴)스님을 하는데, 좀 써달라"
"내가 작년까지 학명스님에 대해서 논문을 3편이나 써두었는데, 다른 분이 그것까지 읽고 쓰시면 더 좋을 것같다."
그리고 51호에 썼는데, 바로 또 쓴다는 것도 좀 그랬다.
아, 내가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일까? 그때 덥썩, 그 제안을 물고서, 글을 썼다면 내 가슴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윤창화 선생은 "불교평론의 회수(回收)"를 겪으면서, 내게 보내온 사신에서 말하기를 "화살 100개가 한꺼번에 내 가슴을 뻥 뚫고 지나간 것같다"고 하였다.
아마도, 한 50개 정도의 화살이 뚫고 지난 것같은 그런 마음은 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마지막 폐간호가 된 52호, 윤창화의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이라는 글이 실려서 필화사건이 일어나서, 회수가 되어서(서점에서 수거되고, 개인회원에게는 편지를 보내서 반송해달라고 했단다. 아직 그 반송편지는 안 왔다.) 사라지게 된 이 책에는
문제가 된 글 외에, 26명의 필자가 26편의 글을 썼다. 26편의 글이 더 실려있다.
그 모두는 우리 부처님 법을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특히 우리 사회를 영도하고 있는 지성인들에게 알리는 글들이 아닌가.
인터넷 현대불교의 글(신중일기자, '한국불교 지성의 장 '불교평론' 폐간되나' 2012. 09월 22일(토) 02 : 45 : 59)에 의하면,
"이에 대해 기념사업회의 한 스님은 '불교평론측에서 저간의 사정을 설명, 사과했고, 수덕사측은 '참회한다면 책을 회수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수덕사측은, 죄없이 함께 수거되어서, 읽히지 못하고 사라질, 이 26편의 글, 함께 불태워질 이 부처님의 말씀, 이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고려는 해보셨을까? 해보셨다면, 그 대답은 무엇일까? 그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여쭈신다면, 26편의 글은, 무슨 명분으로, 무슨 이유로 '회수하라' 요청했다 하실까? 나는 정말 궁금하다.
사실, 나 역시 불교평론의 비판주의(이런 말이 가능하다면)에 언제나 편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불편한 적이 있었다.(비판이 젊음이라면, 나는 이미 젊지 않다.) 적극적으로 반론을 전개하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 특히 나를 격분케 한 것은, 대승경전에 대한 비판적인 논리이다.
몇 호였는지, "불교평론"에서 나는 이런 글을 읽었다.(문장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뜻은 이렇다.)
"대승경전의 작자들이 대승경전을 짓고서 '불설'이라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런 혼돈은 없었을 것인데 ---"
뭐, 이런 논리다.
나는 화가 났다. 사실, 속으로 많이 뒤틀렸다. 그래서 쓴 발분(發憤)의 논문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화쟁론"이라는 논문이고, "보조사상" 33집인가에 발표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향은 없었다. 논문집 발표와 잡지 발표의 차이다.
만약 윤창화 선생이 제도권 학자여서, 그에게 발표할 수 있는 매체가 논문집이었다면 이런 사단은 안 일어났을지 모른다.(도대체 누가 논문을 읽는가? 특히 절에서, 스님들이 ---. 그러니 안전하다.)
그런데 저널리즘이었고, 저널리즘을 통해서 보도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크게 되었다는 측면도 없지 않다.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화쟁론"은 불교평론에는 실을 수 없다. 내가 투고를 했다고 하더라도 ---. 왜냐하면 불교평론의 매수 제한이 대개 "80매" 전후이다.
그런데 이 논문은 약 300매 가까이 되는 것으로 기억된다.
불교평론은 죽었다. 폐간에 대해서도 많은 말이 있는 것같다. 그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어떻든, 결론은 폐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필화사건으로 촉발된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바랐다. 아니, 실제로 9월 21일 오후 압구정에서의 점심 약속을 마치고, 신사로 갔다. 불교평론의 홍사성 주간님을 찾아갔다.
"회수하는 편지를 발송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발송을 하지 말라"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 대신에 불교평론 53호를 통해서, 편집진에서 사과할 말(회수하는 편지에 들어가 있다 한다)은 "사고(社告)"를 해주고, 윤창화 선생의 논문에 대해서 반론 성격의 글이든 제3자의 글을 싣자. 나만 하더라도, 윤창화 선생 글과는 다른 맥락에서 경허를 말하는 글을 쓸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이런 안을 가지고, 수덕사측의 양해를 구할 수 있다면, 이 문제가 원만히 "학문적 룰" 안에서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또하나 그래야 이 필화사건은 "필자 - 잡지사 -수덕사측"의 범위를 넘지 않게 된다. 학계도 무관할 것이고, 언론에 다시 오르내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랬다.
그러나, 이미 "화살은 저 멀리 신라를 지나가고 있었다."
만약 53호를 냈더라면, 그리고 거기서 "사고"도 내고, 반론도 하고 했더라면, 경허스님에게도 좋았을 것이다. 수덕사측으로서도 다소라도 경허스님에 대한 다른 평가를 역사에 남기고, 또 그 내용을 동일한 언론보도를 통해서 알려진다면, 다소라도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신 그) '명예'가 조금이라도 '회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역사 안에서는 경허에 대한 비판만 남게 되었다. 적어도 불교평론 안에서는 ---.(불교평론은 ISSN번호가 있는데, 이는 매호 2권씩 국립중앙도서관에 납품을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 지상에서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 국립도서관에, 반송해달라 요청은 못했을 것이다. 해도, 한번 들어간 도서관 책을 '결재'까지 받아가면서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내용들이 다 실리는 것이 '책'이라고 보지 않을까?)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현대판 분서갱유"(불교닷컴, 2012. 9. 22)를 일으켰다는 비판을 듣지도, 역사 속에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52호 폐간만은 막았어야 했다. 그 점이 두고 두고 아쉬울 것같다. 설사 폐간은 하더라도, 53호 폐간이어야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홍주간님께 "죄송하다"고 했다. 편집위원도 못 해드리고, 글도 많이 못 써드렸다고 ---. 아, 참, 편집위원은 한번 더 하기로 했었다. 2009년 봄부터 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첫 회의를 참여하기도 전에, 불교대학의 부학장 겸 불교대학원 부원장이라는 보직을 하게 되어서 도저히 학교 외부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 전화로 "보직 그만 두면 하지요" 했다. 그러나 보직은 그만 두었지만 이번에는 불교평론에서 연락이 없었다. 이미 많은 흘륭한 분들이 편집위원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퇴락한 비판정신'이 불교평론에 안맞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것이 나와 불교평론의 인연, 어떻게 보면 조금은 어갈리는 인연이었다. 그리고서 많은 아쉬움과 많은 이야기만을 남긴 채, "나는 간다, 말도 없이" 갔다. 죽었다. 년전에 작고한 고광영 선생 생각이 난다. 살아있다면, 분통깨나 터뜨리면서 술깨나 마셨을 것인데 ---. 그 사모님 사기순 보살은 이 사태를 보면서, 남편 생각을 또 하고 있을 것이다.
눈으로,코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 글을 쓴다.
울어주는 문상객이 아무도 없는 빈소만큼 쓸쓸한 데가 또 있겠는가.
불기 2556년(2012년) 9월 23일, 일요일
김호성 재배(再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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