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문화 <수상> 2001.11.22
희시를 읽는 재미
우리 선인들은 곧잘 희시( 詩)를 지어 즐겼다. 희시란 말 그대로 별뜻이 없이 장난삼아 만들어 보는 시를 가리키는데 역대 시첩을 뒤적이노라면 의외로 이 희시가 걸작선에 많이 올라있음을 볼 수 있다. 장난삼아 써본 것이 장난 아니게 된 경우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장난(作亂)이란 의도된 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희시는 굳이 시 형식의 한 갈래로 나눠보는 것보다는 시인의 감상따라 그렇게 부르거나 말거나 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다. 이를테면 아무리 내용이 무거울지라도 시인이 가벼운 마음으로 읊었으면 희시이고 아무리 가벼운 정조일망정 창자가 심사고음(沈思苦吟)했다면 희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실없는 희시 가운데 날선 풍자의 칼을 숨기고 있는 게 많음을 우리는 익히 안다. 희시는 조선시대 들어서 특히 많이 나타나는데 사화(士禍)가 많고 시참(詩讖)이 성했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후기로 넘어오면서 중국시와는 다른 우리의 독특한 조선 한시를 정립하려는 기운이 활발히 일어나는데 이 조류도 희시의 융성에 한 몫 했지않나 싶다.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나는 조선사람이니 달게 조선시를 짓겠다(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라고 선언한 대목에서 우리 선인들의 조선시 운동은 절정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다.
희시는 재미있고 능청맞으면서도 촌철의 예기를 담아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한자 뿐 아니라 우리말의 멋스러움을 이두식으로 잘 살려 일반에 널리 회자된 희시가 많았다. 이를테면 이런 게 있다.
글방에서 유생들 사이에 자주 수작되는 '제비가 논어 학이(學而)장을 읽는다(新燕讀學而章)'에는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는 대목이 나온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른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으로 아는 것이다'는 만고의 진리를 제비의 지지배배하는 울음소리에 실어 재치있게 일깨우고 있다.
희시의 대가라면 희대의 난고(蘭皐) 김병연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김삿갓의 시는 태반이 희시이고 또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은 탓에 여기서는 비켜가기로 하자.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 선생이다. 그 또한 세정을 멀리한 채 아무데도 속하지 않고 또 누구하고도 어울리는 동서남북인으로 시주(詩酒)를 벗삼아 떠돈 기남자인데 이런 짧은 풍자희시를 남겼다. 역시 제비 울음 소리를 빌어서 세상의 시시비비를 조롱하고 있다.
'시시비비 비시시(是是非非 非是是) 비비시시 시비비(非非是是 是非非)라'
이를 옮기면 '옳은 일을 옳다 하고 그른 일을 그르다고 하면 그르고 옳은 일이 발라질 줄 알았는데, 그른 것을 그르다 하고 옳은 것을 옳다고 해도 옳고 그른 것이 뒤틀려지네 그려.' 하는 정도가 된다.
석주(石洲) 권필 또한 한 꼬라지 있는 분이다. 그는 광해군 패륜을 시로 씹다가 44세에 매맞아 죽은 호한. 술을 어찌나 좋아했던지 귀양간 날 동대문 밖에서 친구들과 밤새워 통음하다가 술잔을 든 채 그 자리에서 뻗었다. 마지막 남긴 시가 있는데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장진주(將進酒)'를 차운한 것이다.
'이윽고 이내 청춘 저무는구나(正是靑春日將暮) 도화꽃 붉은 비로 어지러이 지고(桃花亂落如紅雨) 권필이 진종일 무진무진 취하노니(權君終日酩酊醉) 그래도 유령보다야 더 마시겠나(酒不到劉伶墳上土)'
여기에 설명이 약간 필요한데 유령은 중국 진나라때 시인으로 술에 꽤나 바쳐 어디를 가나 늘 술 한병을 들고 다녔는데 머슴더러는 삽을 들고 뒤를 따르게 하면서 "내가 술먹다 쓰러지면 바로 그 자리에다 묻어라"고 했다 한다. 어쨌거나 권필의 이 절명시는 너무나 귀기스럽다 하여 후세들이 희시보다는 시참(詩讖)으로 더 많이 일렀다.
술 좋아하는 권필이 야속한 친구에게 이를 갈면서 지은 희시가 있다. 제목이 '윤이성이가 약속을 하고도 안나타나 혼자 여러 됫박 술을 마시면서 장난 삼아 지은 시(尹而性有約不來 獨飮數器 作排諧句)'이다.
'친구 만나 술 찾으면 술이 좀체 없고(蓬人覓酒酒難致) 술 있어 벗 찾으면 사람이 안 오네(對酒懷人人不來) 내 인생 평생 이 모양이니(百年身事每如此) 크게 웃고 혼자서 또 서너잔 기울이네(大笑獨傾三四杯)'
영원한 습작 시인인 필자에게도 희시의 사연이 없을 수 없다. 8년 전인가 고은 선생이 강연차 광주에 내려와 아침부터 한 잔 재끼자고 해서 제백사하고 수작을 하게 되었다. 잘가는 막걸리집으로 안내했더니 고선생왈 마나님의 카드를 가져왔으니 좋은 데 가서 맘껏 마셔보자는 거였다. 싸락한 늦가을이어서 히레사케도 괜찮겠다 해서 어느 일식집에 가서 일배 일배 부일배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뿔사 강연 시간에 두 시간이나 늦는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충 수습하고 둘이서 다시 무등산 자락에서 권커니 잣커니를 계속하면서 제법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나누어갔다.
이야기가 글빚(詩債)으로 돌아 내가 한 마디 찔렀다. "전생에 무슨 글빚이 그리 많아 밤낮으로 끄적이고 사요. 듣자건대 무슨 책상을 다섯 개씩이나 놔두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글을 쓴다던데. 책을 몇 백권이나 더 내야 원이 풀리겠수. 참 큰 병이여, 큰 병. "
이렇게 질타하고 나서 낭랑히 소리내어 즉흥 희시를 읊었던 것이다. 그때 고선생은 사람좋은 웃음을 껄걸 웃으며 "한형, 나 정말 그만 쓸께. 좆같은 붓 당장에 콱 분질러 버릴게. 한번 봐줘." 운운했던 기억이 난다. 당대의 시인을 통쾌하게 비웃어준 촌 습작시인의 희시를 엄숙 경건히 감상하자.
가을이네
볕 좋고 바람 좋으니 시 쓸 겨를이 없네
다들 가는 가을이네
사람 더욱 좋아서
사랑할 엄두도 안나네
한송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