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서조선>의 신사참배 인식'
1.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케(安武)는 도내 공사립중등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하고 모든 학교가 신사참배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대해 숭실학교 교장 맥쿤(윤산온)을 비롯한 몇몇 선교사들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신사참배 문제가 교계의 큰 시험이 되었다. 이 일은 시시각각 첨예화되어 1936년 1월 맥쿤 교장이 파면되었고 미션스쿨은 폐교되었다. 각 교단의 총회와 노회는 신사참배 찬반에 따라 입장이 나뉘었다.
2. <성서조선> 그룹도 이 문제를 중대한 문제로 받아들였다. 이 무렵 김교신과 함석헌이 교사로 있었기에 학교에 신사참배가 강요된 것은 이들에게도 당면한 문제였고, '순수한 조선산 기독교'를 표방한 <성서조선>으로서도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했다. 1936년 1월에 발행된 <성서조선> 84호는 신사참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성서통신'에 신사참배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1935년 11월 29일 일기에서이다. 이날 김교신에게 보내온 엽서에서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11월 29일) '신문에 기독교학교 신사참배 문제가 중대화한다고 긴장됩니다. 우리가 순교의 시대를 당하는가 봅니다.'
신사참배 문제를 처음 거론한 위 글에서 '순교의 시대'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어지는 '성조통신'은 신사참배와 관련된 신문의 보도를 따라가면서 전해준다.
○ (12월 1일) 평양서 신사참배 문제가 확대되어 십만 학생을 수용하는 미션학교는 전부 폐교될 운명이라고 보도되다.
○ (12월 4일) 평양 모 전문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는 않더라도 교내에서 행하라'는 학무국 전보가 있어서 '기旗행렬과 경의를 표하기로 되었다'고 보도.
○ (12월 6일) 신문지에 의하면 평양 기독교학교에서는 지난 4일에 "교내에서 식전을 거행하고 경의만 표하고 신사참배에는 불참, 제등과 기행렬에는 종전대로 참가"하였다고 하며, 경남 노회에서는 "신앙 존중의 견지"에서 신사참배 불능"이라는 결의를 하였다고.
○ (12월 7일) "참배 여부를 결정할 장로교 평양 노회 금지"라고 보도. 경찰에서 종교 집회를 금지하기는 초사初事 운운. (<성서조선> 84호, 1936년 1월)
<성서조선> 85호(1936년 2월) '성조통신'은 맥쿤 선교사의 교장 파면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1936년 1월 19일) 숭실교장 윤산온 씨 파면의 보도.
○ (1월 27일) 근일은 윤교장과 마교사를 위하여 자연히 기도하게 되다.
3.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1936년 1월호와 2월호에 실린 글을 읽으면 <성서조선>의 논조에 변화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김교신이 <성서조선> 1936년 1월호에 발표한 <신년의 전망>과 <기독교도의 각오>라는 두 글은 박해, 암흑, 순교를 말하는데 이는 신사참배가 강요되던 상황에서 조선의 기독교, 특히 <성서조선> 그룹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말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도의 박해는 암흑시대의 필연한 현상이다. (중략) 우리는 1936년에 암흑이 성세함을 겁낼 것이 아니라. 신앙의 순진을 위하여 세련정진할 것이다. 신앙은 거대함을 불요不要한다. 겨자씨만 하여도 오직 순진하면 족하다.' (<신년의 전망>, 성서조선, 1936. 1)
'그러나 작금세태에 암흑의 세력이 넘침을 보고는 종래 우리의 태도에 다소 수정할 것이 발견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중략) 다른 아무 까닭이 없이라도 예수 믿는다는 것만으로써 사회에 용납못할 패자역적悖子逆賊으로 추궁을 받을 때가 왔다. 그 종국은 무엇인가. 순교의 형장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중략) 오직 소수의 형제여 위험한 줄 알면서도 퇴각할 수 없는 자만은 예수를 따르라. 그리고 그가 요구하시는 피를 제공하자.' (<기독교도의 각오>, 성서조선, 1936. 1)
같은 호에 실린 함석헌의 <순교의 정신>은 신사참배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어 주목된다. 서두에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하면서 신사참배 가부를 논의하기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살피겠다고 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란 종교개혁 이후 국가 권력과 종교 사이에 있어 왔던 질서가 흐트러져 모순과 갈등을 드러낼 가능성을 말한 것이었다. 함석헌은 미국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올 때 맘몬의 배를 타고 왔으나 이 오월동주의 배가 지금 국가주의의 발흥과 함께 깨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때에 '순교의 정신'으로써 스스로 더 강해지는 것밖에 길이 없다고 했다.
'신앙은 강철과 같은 것이다. 버티다 못 버티면 부러지는 것이 신앙이다. (중략) 신자는 신앙을 생명으로 한다. 어떤 곤란이 있어도 진리를 지키는 것이요, 그 주장을 꿰뚫을 수 없는 경우는 스스로 희생이 됨에 의하여 그 진리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정신을 '순교의 정신'이라 한다.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다. 순교에 의하여 일어난 종교요, 순교의 정신을 가지는 자만이 믿을 수 있는 종교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순교의 정신>, 성서조선, 1936. 1)
'1936년이 온다. 정치가에게는 군비충실의 해요, 경제가에게는 경기회복의 해일는지 모른다. 기독교 신자에게는 무엇이 올까? 아마 순교의 형장이 가까워지고 있을 것이다.' (<순교의 정신>, 성서조선, 1936. 1)
신사참배의 가부를 논의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핵심을 피해가지 않았다. '순교의 정신', '순교의 형장'이라는 말보다 신사참배에 대한 거부의 입장을 더 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순교의 형장'이라는 말을 김교신과 함석헌이 같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성서조선> 그룹이 신사참배 문제에서 공통된 인식을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1935년 12월 30일 동계성서강습회에서도 이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동계성서강습회를 시작하기 전 <성서조선> 1936년 신년호 편집을 마친 상황이었으므로, 성서강습회에서의 토론은 <성서조선> 신년호의 내용을 공유하는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류달영이 쓴 <제4회 동계성서강습회에서>는 1935년 12월 30일부터 1936년 1월 4일까지 있었던 동계성서강습회의 풍경을 친구 신근철에게 보내는 사신 형식으로 보고한 글이다. 이 글은 동계성서강습회에 첫 날 저녁의 토론의 내용을 또 다른 시선으로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김교신, 함석헌의 글을 보완해 준다. 이날 토론에 제사와 우상숭배, 신사참배 등이 주제가 되었다. 우상숭배와 제사 문제에 대해 <성서조선> 그룹은 다소 유연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우상숭배 문제는 결국 신도 각자의 양심에 따라 판단할 문제이며, 조선에서 제사는 서양사람들이 보는 것과 달리 부모 조부모의 기일을 기념하는 것이니 꼭 우상숭배로 볼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보고는 신사참배를 말하는 데서 단호한 목소리고 바뀐다. 류달영은 '권력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할 때는 우리에게는 오직 순교가 있을 따름'이라는 말로 이 단호함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신사참배에 대한 인식이 어느 한두 사람의 인식이 아니라 <성서조선> 그룹의 공유된 입장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 입장이 공개적으로 표명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성서조선> 85호, 1936년 2월, 16쪽)
5. 다음 달인 1936년 2월 <성서조선>에 발표된 김교신의 글 <금후의 조선기독교>에서는 지난 50년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성령운동을 정당하게 평가하면서도 이후 기독교는 달라져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글 마지막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다대한 위험을 불고하고 외치노니 '금후 오십 년은 이성의 시대요 학구의 시대라'고. 식염주사 같은 부흥회로써 열을 구하지 말고 냉수를 끼쳐서 열을 식히면서 학도적 양심을 배양하며 학문적 근거 위에 신앙을 재건할 시대에 처하였다. 지나간 오십 년간의 조선기독교도가 대체로 '성신타입'이었다면 금후의 그것은 '학구타입'이 되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나 전자가 은혜로 되었던 것처럼 후자도 은혜로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학문과 신앙이 완전히 합금을 이룬 것이라야 금후에 닥쳐오는 순교의 시대에 능히 견디어 설 것이다.'
이 글 마지막 구절에서도 '금후에 닥쳐오는 순교의 시대'를 말하고 있다. 이 순교의 시대를 견디기 위해서는 학문과 신앙의 완전한 합금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학문과 신앙의 완전한 합금'이라고 할 때 김교신이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우선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다음으로 자신의 <산상수훈 연구>와 <조선지리소고>가 아니었을까. 1935년 말, 아직 소록도 통신의 뜨거움이 채 식지 않았고, 갖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함석헌의 <조선역사> 연재를 마치자마자, 신사참배라는 이름으로 박해와 순교의 시대가 문앞에 당도해 있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과 자신이 처한 운명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