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월)
[2008년] 이소연 씨, 한국 청소년들과 무선 교신 성공
이소연 “한국어로 이야기하니 반갑다”
지난 11일 부터 국제 우주정거장에 머물고 있는 이소연씨가 오늘 한국 청소년들과의 무선 교신에 성공했습니다.
이소연씨와 청소년들의 교신은 이 씨가 머물고있는 우주정거장이 한반도 상공을 통과하는 오후 7시50분쯤 부터 10분 정도 이뤄졌습니다.
우주인 이소연씨와의 교신은 경기도 평택에 있는 한광고등학교에서 진행됐으며 전국에서 모인 15명의 초중고생들은 이 씨와 우주에서의 생활과 과학 실험 등에 관한 궁금한 점을 묻고 답했습니다.
이소연씨는 우주에 머무는 동안 러시아어와 영어로 말하다가 한국어로 의사소통해서 너무 반갑다며 청소년들이 지금 배워야할 것들을 배워 우주를 향한 꿈을 키우라고 당부했습니다.
이소연씨는 오늘 청소년들과 무선교신을 한 뒤 오는 18일 대전 국립중앙 과학관에서 또 다른 15명의 청소년들과 2차 무선 교신을 할 계획입니다.
[사회] 박경호 기자 /KBS 뉴스 2008.04.13 (20:33)
[1941년] 영화감독 하길종 출생 -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1941. 4. 13 부산~1979. 2. 28 서울.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초량의 중앙국민학교와 경남중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입학, 재학중에 시집 〈태를 위한 과거분사〉를 출간했고 졸업 후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UCLA)에서 영화이론과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1970년 귀국해 〈화분〉(1972)으로 영화계에 입문했고, 이후 〈수절〉(1974)·〈바보들의 행진〉(1975)·〈여자를 찾습니다〉(1976)·〈한네의 승천〉(1977)·〈속 별들의 고향〉(1978)·〈병태와 영자〉(1979) 등을 연출했다. 영화감독 활동 이외에 고려대학교·중앙대학교 등에서 영화를 강의했고 서울예술전문대학 영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또한 영화평론가로도 활약했으며 사후에 평론집 〈영상, 인간구원의 메시지〉(1981)가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미국 유학시절에 제작한 단편영화 〈병사의 제전〉에서 〈화분〉·〈수절〉로 이어지는 실험영화의 제1기와, 〈바보들의 행진〉·〈속 별들의 고향〉의 정통 극영화의 제2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그가 영화의 새로운 언어로서의 가능성과 기존권력에 대한 비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기이다. 그당시 만들어졌던 영화들은 검열당국의 방해, 그리고 관객의 이해부족 등으로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대중과 만났던 영화이고 그의 영화적 재능이 가장 훌륭하게 발휘된 〈바보들의 행진〉은 1970년대 유신시대의 암울한 청년문화의 모습을 코믹하면서도 페이소스가 넘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36년] 소설가 최인훈(崔仁勳) 출생 -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파헤친 ‘광장’
1936. 4. 13 함북 회령~.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목포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중퇴했다. 육군통역장교로 군복무하고 제대 후 글쓰기에 전념했다. 1959년 〈자유문학〉 10월호에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라울전〉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1960년 〈가면고〉·〈광장〉 등을 발표하면서 작가적 명성을 굳혔다. 4·19혁명 직후에 발표한 〈광장〉은 당대까지 금기시되었던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파헤친 대표작이며, 작가 자신도 책머리에서 자유당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 아래에서는 발표가 불가능한 작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주인공 이명준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에 드나들면서 '밀실만 충만하고 광장은 죽어버린' 남한에 구토를 느끼고 월북한다. 그러나 '끝없이 복창만 강요하는' 북한 역시 진정한 광장은 없고 퇴색한 구호와 관료제도만 있을 뿐 그가 기댈 곳이 없다. 그래서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 인도로 가는 도중 배 위에서 투신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작품은 발표 직후 최대의 문제작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문단에 정치적 허무주의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광장〉에서 제시된 분단문제는 〈크리스마스 캐럴〉·〈회색인〉·〈서유기〉로 이어졌으며 〈소설가 구보 씨의 1일〉에서는 분단시대 지식인의 모순과 갈등으로 그려졌다. 그밖에 〈총독의 소리〉·〈주석의 소리〉는 불안의식을 정치적 차원에서 그린 정치소설이라 할 수 있다. 소설집으로 〈광장〉(1961)·〈총독의 소리〉(1967)·〈태풍〉(1973)·〈왕자와 탈〉(1980) 등과 희곡집으로 〈옛날 엣적에 훠어이 훠이〉(1979) 등이 있다. 197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최인훈전집〉(12권)을 펴냈다. 1966년 동인문학상, 1977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을 받았다. 1993년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3년] 인간 ‘게놈 지도’ 완성
2003년 4월 13일 인간 게놈 지도가 100% 완성됐다. 이로써 단백질로 이뤄진 기나긴 ‘소설’을 해독하는 생명의 ‘알파벳’을 인류가 완전히 손에 넣게 됐다.
이 알파벳들이 어떤 조합으로 어떤 의미를 만드는지를 파악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인간의 신비를 규명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전체 인류의 5%가 윌슨병, 고셔병, 다운증후군 등 유전자 결함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고통 받았었다. 그러나 완성된 게놈 지도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 유전자 치료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실제로 이번에 게놈지도를 완성한 연구진은 새로 해독된 20번째 염색체의 염기서열이 당뇨병, 백혈병, 어린이 습진 같은 질병과 연관된 유전자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그동안의 연구로 찾아낸 인간의 유전자는 모두 2만5000~4만 여개로 이 유전자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고, 그 단백질이 체내에서 서로 상호 작용하여 인체의 신비한 생체 작용을 이뤄나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은 성인병·암과 같이 유전병 외의 다른 질병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조선
[1987년] 4ㆍ13 호헌조치
←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전국 방송망을 통해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1987년 4월 14일 조선일보 조간 1면에 실린 관련기사.
5공화국 마지막 해인 1987년,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대학가 역시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위의 열기가 절정에 달해있었다. 그러나 5공 정권은 민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 1987년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한다’는 이른바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 시민항쟁에 맞섰다. 당시 경찰은 전두환 정권의 4ㆍ13 호헌조치에 맞서 전국 20개 도시에서 개최된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원천봉쇄했고 전국에서 3천8백31명을 연행했다.
그러던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 6월 시민항쟁의 불을 댕겼다. 6월 10일 마침내 ‘박종철군 고문살인 및 은폐 규탄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것이 바로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까지 가세, 한국 근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에 참여하지 않던 일반 시민들까지 대거 길거리로 몰려나온 이 시위로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독재정권 연장을 꾀하던 5공 정권으로 하여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ㆍ29선언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조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되었다. 임시정부 수립은 3·1운동을 통해 나타난 민주적 정부형성의 의지와 해외 각지에서 성숙된 민주공화적 자립의욕이 복합된 결과였다. 지역적인 이점을 고려해 상하이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는 신규식이 닦아 놓은 터전 위에 이동녕·이시영의 다양한 민주공화적 전력을 승화·연결시켜 삼권분립의 민주공화정부를 탄생시켰다. 먼저 이동녕의 주도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공포한 뒤 국무총리와 6부의 행정부,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어 1919년 4월 13일 의정원과 사법부의 삼권분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각종 광복정책을 펴나갔다. /브리태니커
[1919년] 인도 암리차르 학살 사건 발생
← 암리차르에 있는 하리만디르
1919년 4월13일 식민지 인도를 통치하는 영국의 야만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암리차르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인도 시크교 성지인 암리차르시(Amritsar) 황금사원 인근의 잘리안왈라 바그 광장에서였다. 광장에는 1919년 3월에 제정된 영국의 인도 탄압법인 롤라트법(Rowlatt Act)의 철폐를 요구하는 정치집회가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수천명의 군중이 몰려들었으나 참석자 대부분은 호기심으로 참석한 인근 사원의 순례객들이었다.
1차 대전 때는 식민지 인도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유화정책을 펼쳤던 영국이 전쟁 종료와 함께 태도를 돌변, 인도 독립운동에 탄압을 강화하고 나서자 실낱같은 독립의 희망을 품었던 인도인들은 배신감에 분노했다. 전쟁중에는 영국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간디도 영국정부의 태도가 여기까지 이르자 영국 지배에 반기를 들고 비협력운동을 전개하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했다.
영국군이 이날 비무장 인도인들에게 가한 무차별 사격은 400여명을 숨지게 했고 1200여명을 다치게 했다. 더구나 광장에는 출구가 하나 뿐이어서 피해가 컸다. 학살 사건 이후에도 영국은 인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만적인 형벌을 도입해 인도인들을 더욱 모욕했다. /조선
[1914년] 주시경, <말의 소리> 간행
← 주시경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은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지기 전에 국어문법을 확립하여 보급해야 함을 절감하고 국어국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연구결과를 저서로 발간하였다. 1906년에 『대한국어문법』을 발간하고,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을 발간하였다. 1907년 1월에 지석영(池錫永)이 의학교 안에 국어연구회를 설립할 때 이준(李儁)의 추천으로 그 연구위원이 되어 연구에 종사하였다. 또한 주시경이 정부에 제출한 상소가 채택되어 1907년 7월 8일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그 연구위원이 되어 가장 뛰어난 연구보고서 『국문연구안(國文硏究案)』을 제출하였다. 1909년에는 전국민에게 국문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로 『국문초학』을 간행하였고, 1910년 4월에는 『국어문법(國語文法)』을 간행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해 10월 우리나라 고전을 간행 보급하기 위하여 광문회(光文會)에 가입해서 『훈몽자회(訓蒙字會)』 등의 고전을 교정하여 『훈몽자회재간례(訓蒙字會再刊例)』를 간행하고, 이와 함께 『국어사전(國語辭典:말모이)』의 편찬작업에 최초로 착수하였다. 1914년에는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선각적 국어국문 연구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언어와 한글이 재발견되어 애국계몽운동기에 과학적 국어문법이 처음으로 확립되게 되었다. /Google
[1979년] 우간다, 아민 정권 붕괴
← 아민
1979년 4월 13일 우간다의 이디 아민 정권이 탄자니아 군대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우간다 민족주의자까지 가세한 침공군이 수도 캄팔라에 들어서자 아민은 리비아를 거쳐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했다. 우간다 북서부의 카크와 부족 출신인 아민은 공식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나, 1943년 영국 식민지 군대인 왕립 아프리카 소총부대에 들어가면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한 뒤, 대통령 밀톤 오보테와의 친분으로 육군과 공군의 사령관을 지냈다. 1971년 1월 25일 아민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뒤 1976년에 종신대통령이 되었다. 아민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10만~30만 명의 우간다인들이 고문당하거나 살해되었다고 알려졌다./브리태니커
[1885년] 헝가리의 철학자·미학자·문예이론가 루카치(György Lukács) 출생
← 루카치
1885년 4월 13일 태어남 / 1971년 6월 4일 죽음
"사실주의자는 예술적으로, 세계관적으로 이중의 커다란 과제를 떠맡게 된다. 첫째는 현실의 연관관계를 사상적으로 발견하고 예술적으로 형상화해 보여주는 일이다. 그리고 둘째는 (중략) 추상작업을 통해 가공된 연관관계들을 예술적으로 걸러내는 일, 즉 추상을 지양하는 일이다." - 게오르크 루카치
루카치는 헤겔과 마르크스를 깊이 연구한 헝가리의 철학자·미학자·문예이론가이다. 1920년대에 그는 정치활동을 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심화했다. 1923년에 발표된 <역사와 계급의식 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 Studien über marxistische Dialektik>은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저서가 되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문학이론을 다채롭게 전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헝가리로 돌아가 철학 교수직과 교육부 장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때 취한 태도 때문에 루마니아에 억류되었다. 1957년 귀국 후에는 미학·존재론·윤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문학은 '인간의 의식을 통한 현실의 반영'이라는 기초 위에서 사실주의론과 변증법론을 제창해 당대와 후대의 문학이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06년] 아일랜드 극작가 사뮤엘 베케트(Beckett, Samuel) 출생
1906. 4. 13 ~ 1989. 12. 22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하였다. 더블린의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하고,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있다가 귀국하여 모교의 프랑스어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8년 이후 프랑스에 정주하여 영문·불문의 전위적 소설·희곡을 발표하였다. 처음에는 영어로 시집 《호로스코프 Whoroscope》(1930), 에세이 《프루스트론》(1931), 소설 《머피 Murphy》(1938) 등을 발표하였으며, 1945년 이후는 프랑스어로 집필하였다.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1952)의 성공으로 일약 그 이름이 알려졌으며, 앙티 테아트르(Anti-Theatre:反演劇)의 선구자가 되었다. 3부작의 소설 《몰로이 Molloy》(1951) 《말론은 죽다 Malone meurt》(1951)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L’Innommable》(1953)은 누보 로망(nouveau roman)의 선구적 작품이며, 그 외에 희곡 《승부의 끝 Fin de partie》(1957) 《오, 아름다운 나날 Oh! Les beaux jours》(1963) 《연극》(1964), 모노드라마에 《최후의 테이프》(1960), 소설에 《일에 따라 Comment C’est》(1961) 등이 있다.
그는 스승이면서 친구였던 조이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것을 독특하게 발전시켰고, 특히 소설에서는 내면세계의 허무적 심연(深淵)이 추구되었으며, 희곡에서는 인물의 움직임이 적고 대화가 없는 드라마로 형식화되어 있다. 그는 그의 전작품을 통하여 세계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아무 의미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인간의 조건을 일상적인 언어로 허무하게 묘사하였다. 196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naver
[1743년]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제퍼슨(Jefferson, Thomas) 출생
← 제퍼슨
1743. 4. 13 ~ 1826. 7. 4
버지니아주(州)에서 태어났다. 윌리엄앤드메리대학교를 졸업하고 1767년 변호사가 되었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아 정계로 진출하여 1769년 버지니아 식민지의회 하원의원이 되었다. 1775년 버지니아 대표로서 제1·2차 대륙회의에 참가하였고, 1776년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유와 평등을 외쳐 미국 건국의 이상이 되었던 그해 7월 4일의 독립선언문은 주로 그가 기초한 것이다. 그후 버지니아로 돌아와 주의회 의원·주지사 등을 지냈고, 봉건적인 장자상속제의 폐지와 정교(政敎)분리를 위한 신교(信敎)자유법의 제정에 노력하였다.
1783년 연방의회 의원이 되자 달러를 단위로 하는 통화제도와 오하이오강 북서부지역에 관한 정부안을 입안하여 신생공화국의 기초를 닦는 데 이바지했다. 1785년 프랑스 주재공사에 임명되고, 1790년 G.워싱턴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정부제를 주장하는 재무장관 A.해밀턴과의 정책대립으로 1793년 사임하였다. 해밀턴이 주도하는 연방파(聯邦派)에 대하여 민주공화당을 결성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민주당의 기원이다.
1796년 부통령, 1800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새 수도 워싱턴에서 취임식을 거행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중 문관의 무관에 대한 우월, 소수의견의 존중, 종교·언론·출판 자유의 확립 등에 주력하고, 1803년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만(灣)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지금의 루이지애나)을 프랑스로부터 구입하여 영토를 거의 배가(倍加)하는 한편, 나폴레옹전쟁에 의하여 국제긴장에 휩쓸리지 않도록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유지하면서 중립을 지켰다.
1804년 재선되고, 1809년 4월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후 버지니아의 몬티첼로에 돌아가 1819년 버지니아대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학장에 취임하여 민주적 교육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한 철학·자연과학·건축학·농학·언어학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몬티첼로의 성인(聖人)'으로 불리었다.
독립선언 50주년 기념일에 사망하였다. 생전에 자신이 직접 정해 놓았다는 묘비명 "미국독립선언의 기초자, 버지니아 신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대학교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라는 글귀가 유명하다. /naver
[1742년]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초연
← 헨델, Thomas Hudson이 1756년에 그린 유화(부분)
메사이아 또는 구세주라고도 한다. 헨델(Händel, Georg Friedrich, 1685~1759)의 대표작이자 동서고금을 통틀어 종교음악의 백미로 꼽힌다. 영국의 시인 찰스 제넨스(Charles Jennens)가 성서와 기도문를 인용하여 영어로 쓴 대본을 바탕으로 헨델이 56세 때인 1740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24일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예언과 탄생> <수난과 속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3부로 구성되며, 테너의 독창 <그대들 나의 백성을 위하라>로 시작하여 아리아와 합창곡 등 53곡이 연주된다. 연주시간은 약 2시간 20분이다. 초고가 완성된 뒤 헨델이 연주회를 거듭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악보를 수정하였기 때문에 정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서사적 묘사라기보다도 전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를 강력히 호소한다. 알기 쉬운 웅장한 표현 속에 생생한 종교적 감동이 잘 나타나 있다.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열린 자선행사에서 초연된 이래 지금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세계 각처의 자선연주회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다.
1743년 3월 23일 런던의 왕립극장에서 공연할 때 국왕 조지 2세는 제2부의 마지막 곡 <할렐루야 코러스>가 합창되자 감동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로부터 유래하여 오늘날의 연주회에서도 이 곡이 합창되면 청중이 기립하여 감상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naver
[1598년] 낭트칙령(Nantes, Edit de) 공포
← 앙리 4세, Frans Pourbus the Younger가 그린 그림(부분), 파리에 있는 Musee du Louvre 소장
1598년 4월 13일 앙리4세(Henri IV, 1553~1610)가 낭트에서 프랑스의 신교도에게 조건부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약 30년 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전쟁 1562∼1598)을 종식시킨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앙리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구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국내는 이분되었고, 혼란이 극도에 달했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고자 이 칙령을 공포한 것이다.
이때부터 신교도도 비로소 공직을 가질 권리가 생기고, 예배와 관혼 상제의 집행, 유언의 등기 등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신교도의 최고회의·목사회·서임권 등도 공인됐다. 또한 칙령은 비밀조항으로 백 수십 곳의 도시에 신교도의 자치특권을 인정했다. 그로 인해 그 도시들이 신교도의 무장지역이 되어 반란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톨릭 측은 계속 불만을 드러냈고, 결국 절대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17일 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의 권리를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서 프랑스에 많이 살던 약100만 명의 신교도 중 약 40만 명이 영국 네덜란드·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는데, 그들은 대부분 근면한 상인·기사·공예인·군인이었으므로 프랑스로서는 적지 않은 손실을 보아야 했다. /조선
[1397년] 흥인지문(興仁之門-현 동대문) 창건
← 종로에서 바라본 흥인지문 원경(1903)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에 있는 조선시대 성문. 도성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대문이라 한다.
1397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함께 건축, 이듬해 낙성되었다. 지금의 동대문은 1896년(고종 6) 개축한 것이다. 문의 기부(基部)는 화강암의 모룻돌[臺石(대석)]을 잘 다듬어 무사석(武砂石)을 이루고, 중앙에 홍예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기부 위에 목조 2층 누각을 세웠다.
문 바깥에는 무사석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어를 견고히 하였다. 누각은 상하층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다포계 형식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기부의 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어 공포(拱包)를 짰는데, 공포의 하층은 내3출목·외2출목이며 상층은 내외 모두 3출목이다. 그 형식은 살미[山彌(산미)]가 외부로 뻗어나와 수서[垂舌(수설)]와 앙서[仰舌(앙설)]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 끝이 운공(雲工)으로 되었으며, 기둥 위에 안초공(安草工)을 두고 있어 조선 말기 양식의 특징을 나타낸다. 가구(架構)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상하층의 대량(大樑)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고 맞끼어 연결되었고 내측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운 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 우주(隅柱)를 이룬다. 같은 도성 내의 숭례문에 없는 옹성을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 성문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1996년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 작업에 의해 <서울동대문>에서 <서울흥인지문>으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보물 제1호. /yahoo
[1695년] 프랑스 우화작가 라 퐁텐 사망
← 장 드 라 퐁텐.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고자 했던 프랑스의 시인이자 우화작가 장 드 라 퐁텐이 1695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라 퐁텐은 상파뉴 지방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26세 되던 해 아버지가 결혼을 시켰으나 그는 35세 때 홀연히 가정을 버리고 단신으로 파리로 올라와버렸다. 라 퐁텐에게 명예나 지위, 이해 타산, 남의 평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어린애같은 청순한 마음과 자유로운 정신은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아, 품 파는 일 없이 일생 동안 당시의 유명한 고관과 귀부인들의 보호와 총애 밑에 살았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했던가. 그의 이름을 후세에 길이 빛나게 한 그의 작품, 즉 우화 제1집을 토해낸 것도 불혹(不惑)을 훨씬 지난 47세에 이르러서였다. 그 후 다시 10년에 걸쳐 제2집이, 그리고 그가 죽기 전 1년 전에 마지막 편인 제3집이 나왔다.
일평생 유유자적했던 그였지만, 17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의 가식, 불의, 모순을 모르는 그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성의 비굴, 허위, 간교 등을 너무나 생생히 보았고 느껴왔고 겪어왔다. 이에 '잘못됐다'고 반기를 들기에는 시대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고 또 그럴 만한 정열도 그에겐 없었다. 이에 그는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을 통해 그의 사상이나 인생관, 철학을 나타내려고 했다. 이 우회적인 표현 수단이 바로 '우화'였다.
'전세계를 알면서도 나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라퐁텐. 그러나 그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았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장은 밑천과 수입을 모두 까먹고 /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갔노라…" -어느 게으름뱅이의 묘비명. 이 역시 그가 남긴 자신의 묘비명이었으니… /조선
그밖에
2004년 주유소 ‘공짜 화장지’서 피부염 유발 유해물질 검출
2004년 서울 서소문로 입구 태평로에 첫 횡단보도 신설
2002년 원로가수 현인씨 별세
2001년 남아공 축구장 대형 참사로 43명 사망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2000년 16대 총선 출구조사 발표와 실제 개표결과와의 큰 차이로 방송사 망신
1999년 안락사를 도와준 의사 잭 케보키언, 2급 살인죄로 10~25년 징역형 선고
1998년 미국 대형은행 네이션스뱅크와 뱅크아메리카 합병
1998년 복제양 돌리, 새끼양 보니 출산
1997년 골프천재 타이거 우즈, 마스터스 골프대회 우승(세계 메이저골프대회에서 첫 승)
1995년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발족
1995년 한국-이집트 국교 수립
1993년 행정쇄신위원회 발족
1991년 지중해 최악의 원유 유출사고 발생
1990년 KBS노조, 서기원사장 퇴진-방송민주화요구 파업
1988년 전두환 전대통령 정계은퇴
1983년 미국 시카고시장 선거에서 최초로 흑인 당선
1983년 을숙도 철새보호구역 60만평 해제
1982년 노인헌장 제정
1980년 박찬희, 한국프로복싱 사상 첫 5차방어 성공
1977년 한국-수단, 국교수립
1974년 북한 인민문화궁전 준공
1973년 개정약사법 발효
1968년 ‘동백림사건’ 항소심 선고
1966년 사이공 공항 베트콩에 피습
1966년 민주사회당, 주비대책위원회 구성
1959년 일본-북한 제네바서 재일동포 북송회담 개최
1949년 로마교황청 한국 승인
1948년 루마니아 인민공화국 헌법 제정
1941년 베오그라드, 독일군에게 함락
1941년 소련-일본 중립조약 조인
1937년 소련 작가 일리야 일프 사망
1934년 미국 전쟁채무 불이행국에 융자정지 결정
1909년 하싯트 터키황제, 청년당원 학살
1901년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출생
1838년 일본 정치가 고토 쇼지로 출생 -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
1609년 임해군 피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