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기도는 목사님만의 특권일까? (고후13:14)
개역: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흠정역: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서신을 마케도니아의 도시 빌립보에서 써서 디도와 누가 편에 보내다(고후 13:13-14).
* 개역은 12절의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라"라는 구절을 11절로 끌어올렸기 때문에 이후로 한 절씩이 부족하여 14절이 없으며, 고린도후서 마지막에 나오는 편지의 수신자, 편지를 쓴 장소, 전달자에 대한 기록이 빠져 있습니다.
* 축복은 빌 축(祝), 복 복(福)으로 원래 "복을 빌어주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이 축복하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보다 더 높은 어떤 존재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어의 역사성과 사회성 때문에 오늘날 이 단어는 사람에게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내려주시도록 구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이 복을 내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국어사전에는 아래와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축복 [祝福] [명사]
1 행복을 빎. 또는 그 행복.
2 <기독교>하나님이 복을 내림.
1. 전도사님은 주기도문, 목사님은 축도?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당시에는 주일 예배, 수요 예배, 금요 구역 예배, 학생회 예배 등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다 참석했습니다. 이렇게 일주일에 5~6번씩 예배를 드리면서 궁금하게 여겼던 것 중의 하나는 왜 예배를 마칠 때에는 꼭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주님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 있으며, 흔히 주님의 기도로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 6장 9-13절은 제자들의 기도라고 해야 옳습니다)를 암송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목사님이 예배 순서를 인도할 때에는 축도를 하는데, 왜 전도사님이 예배 순서를 인도할 때에는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쳐야 하는지도 궁금했습니다.
다들 예배 시간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 장로 교단에서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지만 그 당시에는 주기도문은 그냥 예배 순서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암송하는 것이고, 축도는 오직 목사님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말 외에는 다른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의문점에 대하여 열심히 성경 말씀을 찾아보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예배 시간이 끝날 때에는 주기도문을 암송하거나 목사님의 축복 기도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런 축복기도는 오직 목사님들만이 할 수 있다는 성경적 근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예배 끝에 축도를 하는 교회도 있고 축도를 하지 않는 교회도 있는데, 각 교회마다 예배의 형식과 순서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축도를 한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삼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님이 성도들을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해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축도를 목회자들이 성도들보다 더 우월한 지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자기들의 위엄과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종교 의식으로 삼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또한 목사님들은 특별한 권능을 부여받은 성직자이기 때문에 성도들을 축복할 수 있는 권세는 오직 목사님들에게만 있다는 주장은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축도권은 목사에게만 있는가?
축도란 축복 기도를 줄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예배 시간에 이른바 성직자들(기독교에는 성직자가 없지만)로 불리는 자들이 행하는 축도 의식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자기들의 교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방 종교의 무당이나 주술사들이 행하던 기복 의식을 카톨릭 교회 안으로 들여온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축도를 강복이라고 하는데 이는 복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축도(benediction)의 어원이 이 단어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여 bene(좋은) + dict(말), 즉 "좋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사후 해석에 불과합니다. 만약 축도가 성경적 기원을 가진 것이라면 마땅히 성경에 나오는 단어를 사용하여 blessing(축복)이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블레싱이라고 하지 않고 베네딕션이라고 하는 이유는 로마 카톨릭의 사제 베네딕토가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축도라는 의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용어 사전에서는 축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축도[祝禱 benediction]
예배 종료시에 신자들에게 행하는 축복기도. 이 축도는 일반적으로 목사가 행한다. 루터교 예배에는 아론의 축도(민6:24-26)가 사용되는데, 마틴 루터가 이 축도를 공식화시켰다. 영국성공회의 기도서는 성만찬시에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문구가 첨가된 바울의 축도(빌4:7; 한글개역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를 사용하고 있으며, 아침 기도시와 저녁 기도시에는 고후13:13의 축도를 사용하고 있다.
종교 개혁을 한 개혁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리하여 나왔다고 하지만, 그들은 상당 부분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와 성직 계급 제도, 종교 의식 등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임명된 사제들만이 축도권을 갖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목사만이 축도권을 갖는다고 주장합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에는 아래와 같이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축도권은 목사의 특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지교회를 관리할 때는 양무리 된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하고 강도하며, 찬송하는 일과 성례를 거행할 것이요, 하나님을 대리하여 축복하고 어린이와 청년을 교육하며 고시하고 교우를 심방하며 궁핍한 자와 병자와 환난 당한 자를 위로하고 장로와 합력(合力)하여 치리권을 행사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제3조 목사의 직무 1항)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거나, 오직 목사만이 축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는 제사장이 있었고, 로마 카톨릭에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중재한다고 하는 사제라는 특별한 신분이 있지만, 신약교회에는 그런 사제 계급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기 때문에(막15:38, 히10:20),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4:16).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니라(막15:38).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히10:20).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근거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사제와 같은 중재자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으며 모든 믿는 자들은 제사장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만인제사장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개혁주의자들은 루터와 같이 만인제사장설을 지지하며, 구속받은 성도들을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으로 나누는 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사만이 축복기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하며 일반 성도들에 비해 목사가 더 우월한 지위와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자기들의 종교개혁 정신을 부정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의 헌법이 목사의 축도권을 보장하고 있더라도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교회에서 축도(축복기도)는 목사만이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목사의 축복기도에는 뭔가 특별한 힘과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더 나아가 심지어 목사가 교인들에게 복이나 저주를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이나 그렇게 믿는 교인들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한다고 하는 무당을 의지하는 동양의 샤머니즘 사상이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전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새 차를 사면 자동차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고사상에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빌었는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새 차를 산 후 목사님을 불러다가 자동차에 안수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예수님을 믿고 나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만원짜리 지폐를 둘둘 말아서 돼지 코에 꽂는 대신에 감사헌금 봉투에 넣고, 돼지 머리 대신에 목사님을 초청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기복신앙을 가지고,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의지하는 종교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축도권이라는 것은 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성직자 계급의 특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제도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은 축복권을 내세워 교인들을 우롱해서는 안 되며, 성도들은 성경 말씀과 어긋나는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3. 축도권은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오직 목사에게만 축도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성경적 근거로 멜기세덱의 축복, 아론의 축복, 예수님의 축복,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인사말 등을 듭니다. 과연 이런 성경의 기록들은 축도권을 지지하는 말씀일까요?
(1) 멜기세덱의 축복
창세기 14장 19절에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은 왕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브람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가 아브람을 축복하여 이르되, 하늘과 땅의 소유주 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에게 복이 있을지어다(창14:19).
그런데 아브람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전쟁 승리 기원 예배"를 드리고,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 기도를 받고 출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멜기세덱 역시 아브람에게 복을 주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아브람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축복하였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브람에게 복이 임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멜기세덱이 이 사람 저 사람 이름을 불러가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소돔 왕에게 복을 주소서."한다고 해서 소돔 왕이 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멜기세덱은 제사장이지만 오늘날의 목사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는 전쟁에서 돌아오는 아브람을 맞이하러 나와 그를 축복하였지 예배 시간의 마지막 순서에 축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축복 기도를 축도권의 근거로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빈약한 논리입니다.
(2) 아론의 축복
민수기 6장에는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주께서 자신의 얼굴로 네게 빛을 비추사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고 주께서 자신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네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4-26).
이 축복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민6:23).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이란 문자 그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말하는 것이지 신약 교회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 중에는 제사장 아론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제사장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 기도는 신약 교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3) 예수님의 축복
축도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누가복음 24장 50절을 인용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는 오늘날의 예배 시간에 목사님들이 하는 것처럼 "손을 들어"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더라(눅24:50).
그런데 전후 구절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지금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이지 예배 마지막 시간이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님께서 검은색 사제복을 입고, 두 팔을 벌리고 손바닥을 펼쳐서 성도들의 머리를 누르고 쓰다듬는 자세로 기도하고, 사람들은 다같이 그 앞에서 눈을 감고 머리를 조아리고 복을 부어주시기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들고 예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행1:9-10). 그러므로 누가복음 24장 50절을 예배 시간의 축도로 착각하면 안 되며, 이 구절을 목사의 축도권을 보장해주는 근거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축복하신 이야기가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먹이실 때(마14:19), 어린아이들이 그분께 나아왔을 때(막10:16), 주의 만찬 자리에서(마26:26) 축복하신 것처럼 누가복음 24장 50절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축복 기도를 하신 것이지 오늘날 교회 예배 시간에 하는 그런 축도 의식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4) 고린도후서 13장 14절(개역은 13절)
기독교 용어 사전에 나온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교회 예배의 축도 의식은 고린도후서 13장 마지막 절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마도 이 구절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는 축복 기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더구나 이 구절이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절이기 때문에 예배의 마무리를 이 구절과 같은 형식의 축도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서신을 마케도니아의 도시 빌립보에서 써서 디도와 누가 편에 보내다(고후13:13-14).
그러나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그 당시에 사용하던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이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축도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장 3절과 고린도후서 1장 2절에도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인사말이 나오며, 신약 성경 서신서의 앞부분에서나(갈1:3, 엡1:2, 빌1:2, 골1:2, 살전1:1, 살후1:2, 몬1:3;), 서신서의 끝부분에서도(갈6:18, 엡6:23,24, 빌4:23, 골4:18, 살전5:28, 살후3:18, 딤전6:21, 딤후4:22, 딛3:15, 몬1:25, 히13:25, 벧전5:14) 이런 유형의 인사말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마지막에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서신을 마케도니아의 도시 빌립보에서 써서 디도와 누가 편에 보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고린도후서가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회 예배 실황 속기록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글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13장 14절 말씀은 그 당시 편지에서 널리 사용하는 인사말이었지 예배 시간에 사용하는 축도문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신약교회의 예배 시간에 사도들이 교인들에게 축도를 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장로나 감독이나 목사에게만 축도권을 부여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성경의 첫 책 창세기에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말씀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을 약속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 날짐승은 땅에서 번성하라, 하시니라(창1:2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더라(계22:7).
비록 어느 교단의 헌법에 "목사가 하나님을 대리하여 축복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지 못합니다. 거기에 기록된 "축복한다"는 말이 "복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거나 말거나 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이야기가 되어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 됩니다. 만약 거기에 기록된 "축복한다"라는 말이 "복을 내려달라고 높으신 분께 간구한다"라는 의미라면, 하나님이 자기보다 더 높은 어떤 존재에게 복을 달라고 빌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이는 하나님의 신성과 권위를 모독하는 말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복을 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 축복이 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복을 빌어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축복 기도는 모든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것이지 목사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닙니다. 목사를 성직자라고 하고, 목사가 교인들에게 복과 저주를 내릴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런 잘못된 교리를 통하여 교인들을 속박하는 것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니골라당의 교리이며,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미워하십니다(계2:15).
개역: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2:15)
흠정역: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거니와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15).
(개역에서는 주님께서 그것을 미워하신다는 내용을 삭제했음)
성경은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축복 기도를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땅의 모든 가족들이 아브람 안에서 복을 받게 되지만, 성경은 그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창12:3).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녀를 축복할 수도 있지만, 성경은 아들이나 딸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축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잠30:11). 시므온은 예수님과 요셉과 마리아를 축복하였습니다(눅2:34).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목사만이 아님)이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롬12:14).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창12:3).
자기 아버지를 저주하며 자기 어머니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세대가 있느니라(잠30:11).
시므온이 그들을 축복하고 아이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르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다시 일어나게 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또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워졌나니(눅2:34)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이런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축복 기도는 목사님들만의 특권이 아니며, 모든 성도들이 서로를 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목사님들을 마땅히 존중하고 그분들과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하지만(딤전5:17, 갈6:6), 그분들을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나 로마카톨릭의 사제들과 같이 높고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을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고, 그분들을 주 안에서 형제로 대우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뭔가 특별한 권능을 가진 존재로 대우하는 것은 자칫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추종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그분들을 무척 난처하고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김문수( www.keepbible.com )
첫댓글 저자 김문수씨는 서울대 교수라고 들었는데 현재는 풀로리다 펜사콜라 대학에서 유학중이고
글을 예리하게 잘 쓰시는 분입니다.
이분의 글중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가?"
(일요일,주일성수?)" 에 대해 성경은 이런 주장에 대해 무엇이라 하는가 ?">
일주일에 한번씩 돌아오는 일요일을 주일로 여기는 크리스챤들에게,
말씀을 다시 들여다 보도록 충실히 반론한 글도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축도에 대해서 잊고있었네요. 저도 그런 의문이 있었거든요. 신명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저주와 축복이 있고, 야곱도 복을 받겠노라 하나님과 씨름하였고, 부모도 축복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당연히 복을 받은 사람들이지요.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대로 살면 복을 받습니다만, 영적인 면에서의 복은 세상적인 복과 반드시 같지는 않습니다. 목사님도 축복권이 왜 없겠습니까마는 거듭난 사람들은 특별히 그 마음과 혀를 다스리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말도 조심~ 생각도 스스로 주님을 따라 조심스럽게 다스려야한다고 생각됩니다.
12:36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
But I say unto you, That every idle word that men shall speak, they shall give account thereof in the day of judgment. (KJV)
축복 기도에 관련된 많은 성경말씀들을 잘 망라한 훌륭한 글이네요. 이 말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믿어집니다.
""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목사제도 자체는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목사제도에서 파생된 축도란 성경적으로 근거를 찾지 못합니다. 목사가 무엇을 할수 있다면 다른 거듭난 성도들도 그것을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복을 베푸시는 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멜키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분의 바톤을 이어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의
성육신 이전의 모습이셨습니다.
이글은 또 베네딕토(축복 기원) 라는 문제를 생각해볼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 축복 기원 장사로 카톨릭과 기성교단들의 성직자 제도들이 재미를 보고 있지요.
루터는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오랜 전통이 왈덴지안 보고밀 보헤미아 형제단 등에서 만인제사장직을 믿어왔습니다. 루터 자신은 죽을 때까지 로마 카톨릭의 사제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카톨릭에서는 파문을 받았습니다만). 웨슬레 또한 성공회 사제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놈의 성직자 벼슬은 한번 붙이면 절대로 안떨어지는 것인가 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날에는 부끄러운 옷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볼수 없는 니골라당의 옷이요, 그마림의 옷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성직자제도는 바벨론 우상제사장 제도에서 나온것들이고, 니골라당, 그마림의 복장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져님 가져오신 글이 인터넷에서는 참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못 실수 할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6절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