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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꺼내야겠어! 분위기가 이상해."(양일권씨·54세·전 한인회장)
지난 4일(현지시각) 밤 11시 30분 과테말라시티의 주유소. 양씨는 권총의 탄창을 확인했다. 양씨와 기자가 탄 차를 따라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정지한 파란색 차는 10m쯤 뒤에서 라이트도 끄지 않은 채 서있었다. 분명 운전자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주유소였지만 기름도 넣지 않았고, 주차장에 차를 대지도 않았다.
지난달 18일 과테말라에서 납치당해 살해당한 송모(56)씨 상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한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것을 알고 강도들이 사냥감을 찾아온 것이다.
양씨의 SUV 승용차 왼쪽 뒷바퀴는 칼로 난도질당해 있었지만 우리는 이를 모르고 출발했다. 차를 출발한 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러나 양씨는 오히려 신호도 무시하고, 시속 80㎞ 이상 속력을 높였다. 타이어 교체를 위해 내렸다가는 강도의 '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씨는 "전형적인 수법"이라며 "2년 전에는 시내에서 따라온 강도들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했다.
10분 이상 달려 사람이 북적이는 주유소에 차를 댔다. 너덜거리는 타이어에서 탄내가 났다. 연락받은 교민의 쏘나타 승용차가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그 사이 숨도 쉬기 힘든 긴장감이 흘렀다. 쏘나타를 타고 떠나며 '놈'을 봤다. '놈'도 분한 듯 이쪽을 보고 있었다.
◆상상 못할 잔혹함…납치 리스트까지 발견="아프가니스탄에선 한 명 죽어도 나라가 난리더니, 우리는 8명이나 죽었는데 조용해요. 국민도 아닙니까." "한국인은 완전히 사냥당하고 있어요."
송씨 상가에선 교민들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특히 갱단이나 납치범들의 상상도 못할 잔인함이 공포심을 극대화하고 있다. 돈을 노리면서도 잔인함을 과시해 보복조차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납치됐던 봉제업체 한인 직원 2명은 불에 그슬린 뒤 공장 운동장에 묻힌 채 발견됐고(작년 1월), 주유소에 있던 한인에게 총을 난사하거나 남녀의 몸을 뒤로 묶고 각각 30차례 이상 칼로 찔렀다(3월). 목을 졸라 죽이고(4월), 머리에만 총을 4발이나 쏘아(올 1월) 살해하기도 했다.
범행에는 항상 내부자가 관련된다. 작년 1월 살인사건은 공장 경비원들의 소행으로 밝혀졌지만 미성년자란 이유로 풀려났다. 작년 3월 한인 남녀 피살사건에는 가정부가 과테말라 최대의 폭력조직인 '마라(Mara)18'을 끌어들였다. 이 사건의 검거작전에는 내무부 장관이 직접 나섰고, 조직의 보스인 일명 스마일리(Smiley)가 검거됐다. 누구도 못 믿는 상황인 것이다.
주과테말라 대사관의 박성훈 경찰 영사(경감)는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며 "최근에 다른 사건으로 잡힌 납치범들에게서 한국인 납치 예정 리스트가 나왔다"고 말했다. 리스트에는 납치 예정자들의 이름과 근무지의 위치가 상세히 나와 있었다. 이미 납치 대상자들을 물색하고, 사전조사까지 거의 마친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한국인이 돈이 된다는 인식이 자꾸 퍼지면 납치 대상자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교포들도 "최근 대사관을 통하지 않고 가족들이 직접 돈으로 납치를 해결한 경우에는 몸값이 수십만달러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며 "몸값이 올라가면서 납치가 더 늘어나는 것 같아 무섭다"고 했다.
◆13개월 동안 8명 피살, 학살당하는 한인(韓人)들=피살된 송씨는 지난달 18일 오후 6시 30분 "경찰에 불심검문을 당한 뒤 함께 가고 있는데 납치당한 것 같다"고 지인(知人)에게 전화를 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경찰차는 송씨의 차가 지나는 길목에 10분 전에 도착해 서있었다. 송씨도 3개월 전부터 "누군가 내 뒤를 캐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불안해했었다고 한다.
납치 협상과정에서도 경찰을 통해 정보가 납치범들에게 흘러들어갈 것을 예상해 역정보 공작도 했었다. 그는 결국 지난 2일 주검으로 발견됐다. 납치범이 경찰일 가능성도 있다. 2007년 과테말라를 방문한 엘살바도르의 국회의원도 경찰관 4명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수사를 지휘했던 수사국장조차 해외로 잠적했다.
지난 2009년 인구 1300만명인 과테말라에서 6451명이 살해당했고, 과테말라 시티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다. 오후 7시가 지나면 거리엔 사람이 없고 한국돈 50만원이면 청부살인이 가능하다. 범인도 거의 잡지 못하고, 잡아도 판사들이 보복을 두려워해 유죄선고율이 3% 수준이다. 사람을 죽여도 보석금만 내면 나온다.
이런 척박한 땅에도 한국인은 뿌리를 내렸다. 봉제업과 의류업 등에 종사하는 1만여명의 교민이 10만명 이상의 현지인을 고용해 과테말라 수출의 10%를 담당하고 있다. 한인이 없으면 과테말라 경제는 붕괴한다.
한국에선 "빨리 나오라"고 하지만 삶의 기반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는 없다. 한 교민은 "항상 줄 돈과 받을 돈이 꾸준히 돌아가기 때문에 야반도주를 하지 않는 이상 갑자기 나올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위험해도 교민들에겐 과테말라가 제2의 고향이다. 그래서 한인은 매력적인 납치·강도 대상이다. 2008년에 1건이었던 교민 피살사건은 경제위기가 본격화된 작년에 무려 6명, 올 1월 벌써 2명(미국 시민권자 포함)에 달했다. 이 밖에 납치됐다 몸값을 주고 풀려난 사례도 4건이나 된다. 죽이겠다는 전화 협박은 이제 일상사가 됐다.
과테말라 내무부 납치전담팀 엠마누엘 리베라(Rivera) 팀장은 "한국인은 매력적인 납치 강도 대상"이라며 "이곳에선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돈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의 전임자는 납치조직에 의해 2008년 살해당했다.
◆"한국 경찰이라도 보내달라"=과테말라 시티의 로데오 한국수퍼. 수퍼마켓을 들어가는 데 5개의 철문을 통과해야 한다. 모두 안에서 손님을 보고 주인이 열어주는 것이다. 김미화(여) 사장은 "수퍼마켓을 지키는 완전 무장한 경비원만 5명"이라고 했다.
화장품이 들어있어야 할 핸드백에는 권총이 있었고, 집안 곳곳에 총이 숨겨져 있었다. 김 사장은 "이 건물은 철판을 덧대서 총알이 뚫지 못하도록 지었고, 벽돌이 아니라 레미콘으로 탱크처럼 지었다"며 "심지어 집안에서는 휴대폰이 안 터질 정도"라고 했다. 그녀는 "요즘 너무 무서워 혈압약을 먹고 있다"며 "집 밖으로 못 나가니 하루종일 창살안에 갇혀서 사실상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봉제업을 하는 차복윤(53)씨의 사무실에는 권총 두 자루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산탄총 두 자루가 비치돼 있다. 책상 위에 총을 늘어놓으며 차씨는 "삶이 이렇다"고 했다. 차씨는 보디가드도 고용했다. 보디가드는 베테랑 형사 출신으로 주저하지 않고 강도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1인당 연평균 국민소득이 약 2500달러인 과테말라에서 월 1000달러의 월급을 준다.
경찰에서부터 가정부도 못 믿는 교민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이제 한국 대사관과 총밖에 없다. 김미화 사장은 "한국 경찰관이라도 몇 명 더 경찰영사로 와주면 좋겠다"며 "자주 교민 업체를 돌아봐 주기만 해도 현지인들에게 소문이 나면서 강도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교민들도 모두 스스로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며 "그래도 조국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좀 알게 해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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