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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2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부활절 마지막 주일)
하늘로의 초대, 행복으로의 초대
행1:15~17, 21~26; 요일5:10~13; 요17:13~19
미국의 신학자 중에 라인홀드 니버(1982-1971)라는 분이 있습니다. 니버는 개신교 목사이면서 기독교 윤리학의 대학자로, 20세기 혼란스러웠던 미국 사회에서 기독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노동, 인종, 평화문제, 정치 문제 등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향해 발언을 했던 살아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등 수많은 책을 쓴 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평정을 위한 기도문”(serenity prayer)이라는 짧은 기도문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여/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고요함(serenity)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한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한번쯤은 들어보셨지요? 이 기도문은 금주협회(AA) 12단계의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알콜에 무력했으며, 내 스스로는 이것을 대처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시인했다, 우리보다 위대하신 힘이 우리를 건전한 본 정신으로 돌아오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이제 그 신의 보살핌에 우리의 의지와 생명을 완전히 맡기기로 결정했다... ”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고요함(평정,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이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 이것은 알콜 중독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들 뭔가에 중독된 중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키팅 신부님이 이런 말을 했지요. “이 세상 사람들의 98%는 중독자들이다. 그런데 나머지 2%를 나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왜 이리 좌불안석일까요? 우리네 삶은 왜 이리 긴장되고, 왜 이리 불평불만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왜 이리 안정되지 못할까요? 우리네 감정은 왜 이리 널을 띠고, 우리네 삶은 왜 이리 흔들릴까요? 우리네 삶은 왜 이리 불행할까요? 그리고 언제까지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가 지금도 이런데, 더 늙고 병들고, 죽음에 더 가까워질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이고, 또한 아주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 성장, 신앙 속에서조차 여기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갑니다.(마7:21) 그럼 무슨 계명과 규율을 잘 지키면 되는 것입니까?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내쫓고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주님, 그래도 내가 적어도 이런 일을 했고, 내가 이런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습니까?” 그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여전히 우리는 혼동하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고요함(평정, 평온함)과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고, 바꿔야 하는 것은 방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엉뚱한 데 엄청 힘을 쏟느라 모든 힘을 탕진하고,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에는 널브러져 있습니다. 우리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부활시기 6주간을 보내면서 부활의 의미와 부활이 우리 삶에 실제로 어떤 능력이 되는지 되새겼습니다.
예수님 당시, 부활은 사실, (그리고 그분의 승천은) 믿고 의지하던,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14장 이후에는 소위 예수님의 “고별사”(14~17장)가 나오지요. 이제 제자들이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분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적고 있습니다. 이 본문들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고별사를 요약한다면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이 일은 사랑하는 일로 이루어진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도 사랑하셨다, 너희가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고, 그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는 내 제자가 된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러니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내가 가면, 오히려 너희에게 기쁨이 넘칠 것이고, 그 기쁨은 누구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17장은 소위 “대제사장의 기도문”이라고 불리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기도를 하는 기도문입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것은) 내 기쁨이 그들 속에서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제사장의 기도문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7:26)
한마디로 말해, 부활은 내가 하나님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근본적인 확신입니다. 근본적인 깨어남입니다. 요한이 “사랑”이라고 부른 그 “일치”가 그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말하면, 세상은 온전하고 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온전하고 괜찮습니다. 이걸 깨닫는 것이 부활입니다. 오늘 라인홀드 니버 식으로 하면,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그 고요함, 평정, 평온함”입니다. 우리가 지지난 주일이 보았던 아빌라의 데레사의 말로 하면, “하느님을 품은 자는/ 아무 것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느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입니다. 일어나는 일을 저항 없이 고요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뭔 소리냐고요? 세상이 온전하고 다 괜찮다니?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그런 소리가 나오냐구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괜찮고, 환경오염이 괜찮고, 당장 날아오는 카드빚이 괜찮고, 실직이 괜찮고, 내가 걸린 질병이 괜찮고, 우리 애들의 징징거림이 괜찮다고요? 윤석렬이 괜찮다구요? (아마 찾으면 오늘 하루 종일 해도 모자라겠지요?) 이런 일들을 당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김주환 교수의 유투브 강의) 내가 늦으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가려고 옷을 잘 차려입고 서둘러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진흙탕에 발이 빠져 옷을 다 버렸습니다. 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갑자기 당황해서 정신이 나가고 다음에는 화가 치밀고 또 비난이 일어나겠지요. 길을 이 따위로 해놓은 놈들에게 화가 날 것이고, 또 눈에 뻔히 보이는 진흙탕에 정신없이 빠져버린 자신에 대해서 분노를 하겠지요? 괜찮나요? 괜찮지 않지요? 여기서 괜찮다는 것은 저항 없이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흥분을 해서 날뛰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하지 않은 것을 책망해야 한다고요? 나중에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지금은 일어난 일에 휘둘리는 흥분에 휩싸일 것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저항하지 않는 거지요. 이것이 고요한 마음(평정, 평온함, still point)이지요. 이때 흔들리지 않는 중심, 그 고요함, 그 평정, 그 평온함이 바로 온전함(괜찮다)이고, 그때 갖는 우리의 태도가 바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그 고요함, 평정, 평온함”입니다. 이 틈, 이 간격에 바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니, 이 틈과 이 간격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호흡과 호흡 사이, 우리의 생각과 생각 사이, 우리의 경험과 경험 사이, 우리의 감정과 감정 사이, 그 틈과 고요함과 평온함이 바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며,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며, 하나님께 승복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이런 고요함에 바로 다다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부활의 가장 깊은 의미를 다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한참은 더 하나님과의 분리감을 느껴야 할 것이고, 틈 없이 바로 흥분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서히 하나님과 온전히 일치하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 마음의 공간 안에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승천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눅1:3) 승천하셨습니다. 누가가 쓴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수님의 승천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 그들이(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행1:9). 제자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천사들이 그들 곁에 서서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행1:11). 그래서 예수님은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똑같이 구름타고 재림하실 것이라는 전승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한번쯤은 예수님이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구름타고 재림하시는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안셀름 그륀의 부활시기 묵상글을 통해서 이 승천의 의미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의 승천은,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의 하늘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하늘은 어디 먼 딴 곳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멈추어라, 너 어디로 가느냐? 하늘은 네 안에 있다. 하느님을 다른 데서 찾는다면, 영원히 그분을 만나지 못하리.”(안젤루스 실레시우스, <케루빔의 방랑자>) 부활은 하나님과 떨어져 있지 않음에 깨어나는 것이고, 승천은 하늘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음에 깨어나는 것입니다. “하늘은 네 안에 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는 네 안에 있다!” 여기에 우리의 뿌리를 둘 때, 우리는 깨어난 것이고, 살아있는 것이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1편 말씀을 “새로운 예배 시편”으로 교독했습니다. 제가 번역한 말씀으로 다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1)행복하여라(아쉬레), 그 사람/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으며/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2)오히려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분의 율법을 밤낮으로 읊조리는(되새기는) 사람.
3)그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 제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이 시들지 않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4)그렇지 않네(로-켄), 악인들이여/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아라.
5)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 때에 굳게 서지 못하고/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함께 하지 못하리.
6)진실로, 의인들의 길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나/ 악인들의 길은 사라지고 말리라(토벳).
“행복하여라(아쉬레), 그 사람!”으로 시작해서 “악인은 사라지고 말리라(토벳)”로 끝납니다. 시편 전체를, 인간의 모든 희노애락, 행과 불행을 요약하는 시편입니다.
인생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복한 길이고 또 하나는 망하는,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불행한 길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오로지 주님의 율법(토라, 인도하심, 가르침)을 즐거워하며(헤프초),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예흐게)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단수입니다. 홀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행동이라기보다는 상태입니다.(즐거워한다, 읊조린다, “읊조리다”라는 말은 동작동사이긴 하지만, 그 동작은 움직임이 거의 없는 매우 작은 동작을 나타냅니다. 본디, 짐승들이 그르렁거린다는 뜻인데, 속으로 웅얼웅얼하다 라는 뜻입니다. 행복한 사람의 이미지는 부산한 움직임보다는 즐거워하는 상태, 또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정중동의 이미지입니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들)은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사람”입니다. 늘 떼거리도 몰려다니는 복수이고, 우르르 떼지어 다니면서 이리저리 걷고, 들어서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매우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걷다, 들어서다, 앉다, 이 모두는 다 움직임을 나타내는 소위 동작 동사들입니다.
율법을 즐거워하며 읊조리는(되새기는) 복 있는 사람의 이미지는 3절에 나오는 은유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 제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이 시들지 않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그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입니다. 그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부화뇌동하는 모습이 아니라, 깊게 뿌리 내린 의연한 모습입니다. 좌우로 이동하는 불안한 모습이 아니라 수직으로 한 곳에 뿌리내려 견고하게 서 있는, 정주하고 있는 이미지입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갈수록, 그만큼 단단한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또한 시냇가에 심겨짐으로써 수원에서 계속 물을 공급받아, 푸른 잎을 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큰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면 그 흔들림으로 인해 오히려 뿌리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잘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러다, 4절로 오면 큰 반전이 나옵니다. <로-켄 하러샤임> 그렇지 않네, 악인들이여!
행복한 사람들의 든든히 서 있는 나무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은 우르르 떼지어 다니면서 이리저리 걷고, 들어서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매우 부산하게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뛰면 왜 뛰는지도 모르면서 우르르 함께 뛰어갑니다. 이들은 열심히 뭔가를 하는 것 같은데 그 동기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군중심리에 따라 움직이고, 외적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런 이미지는 4절에 나오는 이들에 대한 은유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네, 악인들이여/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아라” 바람에 흩날리는 겨(우리 새번역 성경에는 쭉정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활동적이었던 그들의 모습은 부화뇌동하는 모습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흩날리는 불안한 이미지이며, 수평으로 이리저리 떠도는 뿌리 없는 이미지임이 드러납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싯귀, “악인들의 길은 사라지고 말리라”라는 말에서 이들의 허망함이, 아무 결실 없이 사라져 없어져 버리고 마는 무상함이 잘 드러납니다.
여러분, 시편1편은 세상물정 모르고, 이분법적으로 의인의 길은 잘 되고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고요함에, 우리 안에 있는 평정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우리 삶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좌충우돌, 안절부절, 부화뇌동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있는 하늘, 우리 안에 있는 고요함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어디에 뿌리내려야 할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남은 인생은 복된 삶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 뿌리를 내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단단한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