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존재(存在)인가
<말선37-144> 선생님(先生任)은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선조(先祖)가 좋은지 나쁜지 대개(大槪) 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선조(先祖)가 있어서 복(福)을 받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쁜 선조(先祖)가 있어서 지지리 고생(苦生)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전도(傳道)하러 나가서 지지리 고생(苦生)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몇 대(代)만을 중심삼고 보면 불쌍하지만, 전체(全體)를 중심삼고 보면 다 공평(公平)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탄식(歎息)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선조(先祖)들은 몇 천 년(千年) 전(前)부터 잘 살았으니 지금(只今) 내려가는 때에 있는 우리는 조금 못사는 것이라고 생각(生角)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例)를 들어, 감옥(監獄)에 들어가 몰리는 입장(立場)에 있다 할 때, 그것은 옛날에 선조(先祖)들이 다른 사람들을 감옥(監獄)에 집어넣고 그렇게 한 보응(報應)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민족(民族)이 감옥(監獄)에 가야 할 것을 대신(代身) 탕감(蕩減)하는 입장(立場)에서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종류(種類)가 있다. 하나는 자기보응(自己報應)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늘이 관여(關與)해 가지고 민족(民族)을 살려주기 위한 탕감(蕩減)으로 받는 두 종류(種類)가 있다는 것이다.
<말선20-19> 선조(先祖)의 공적(功績)이 없으면 여러분이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파산(破散)되어 버리는 것이다. 복(福)을 받는 것은 선조(先祖)들이 고생(苦生)을 하고 선행(善行)을 쌓았기 때문이다.
<말선13-269> 지금 잘 사는 사람은 옛날 선조(先祖)들이 못살았기 때문이고 지금 못사는 사람은 옛날 선조(先祖)들이 잘 살았기 때문이다. 지금 못사는 사람은 내려가는 운세(運勢)에 태어났으니 못사는 것이고 지금 잘 사는 사람은 올라가는 운세(運勢)에 태어났으니 잘사는 것입니다.
<말선50-323> 잘산다고 다 좋은 사람이 아니요 못산다고 다 나쁜 사람이 아니다. 하늘 따라 내려가는 운세(運勢)에 처한 사람은 내려가도 올라가기 마련이지만 사탄을 통(通)해 내려가는 사람은 망(亡)하는 것이다. 또 사탄을 통(通)해 올라갔다면 내려가서 망(亡)한다. 그렇게 되어 있다. 사탄을 통(通)해 올라갔다면 자연(自然)히 내려가서 망(亡)하는 것이고 사탄을 통(通)해 내려갔으면 영영(永永) 올라오지 못하고 망(亡)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통(通)해 올라갔다면 더 올라가고 내려갔다면 다시 올라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가려가지고 전도(傳道)를 해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사랑하자는 결론(結論)이 나오는 것이다.
<말선51-274> 여러분의 선조(先祖)들이 아무리 공적(功績)을 세웠다 하더라도 여러분 간판(看板) 여하(如何)에 따라 선조(先祖)의 공적(功績)들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놓고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운명(運命)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말선59-126~127> 여러분에게는 운명(運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운명(運命)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보면 골상학(骨相學)을 연구(硏究)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손금이나 관상(觀相)을 보고 뭐가 어떻다고 얘기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역사적(歷史的)인 산물(産物)입니다. 귀(耳) 하나만 보더라도 그 귀(耳)가 자기(自己) 어머니의 귀(耳)만 닮지 않았다는 거예요.
지금의 나는 선대(先代)로부터 연결(連結)된, 모든 조상(祖上)의 피(血)와 살(肉)을 이어받은 하나의 종합(綜合)된 하나의 실체(實體)로 빚어진 존재(存在)이기 때문에 선조(先祖)들의 만물상(萬物相)을 대표(代表)한 입장(立場)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現在)에 나타나 있는 나의 모습은 선조(先祖)로부터 인연(因緣)된 그 관계(關係)를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반드시 자기일대(自己一代)에서 결과(結果)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쁜 선조(先祖) 선(善)한 선조(先祖)가 내 일생(一生)에 반영(反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반드시 그 반영(反影)의 결과(結果)로서의 생애(生涯)로 걸어가야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적(自動的)으로 높고 낮음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自然的)인 이치(理致)인 것이다.
이러한 인생(人生)길을 걸어가는 인간(人間)들이 이것을 어떻게 모면(謀免)하느냐, 이것을 초월(超越)할 수 있는 방안(方案)이 없겠느냐? 이게 문제(問題)라구요. 불행(不幸)한 사람은 그 불행(不幸)의 환경(環境)을 어떻게 극복(克復)하고, 그것을 초월(超越)할 수 있는 방안(方案)이 없겠느냐, 이것이 문제(問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방안(方案)은 무엇이냐? ‘선조(先祖)를 이겨라! 선조(先祖)들이 가진 목적(目的) 이상(以上)의 목적(目的)을 가져라!’ 문제(問題)는 그겁니다. 그럴 게 아니에요? 이만큼 떨어져 내려왔으면 그것을 복귀(復歸)하기 위해서는, 그 떨어져 내려온 것을 원상복귀(原狀復歸)하려면 반대(反對)로 그 이상(以上)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선조(先祖)들이 갖고 나온 모든 생활방법(生活方法)을 극복(克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운동(運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自然的)인 결론(結論)입니다.
선조(先祖)들이 이렇게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됐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대(反對)의 행로(行路)를 주장(主張)하는 운동(運動)이 없어가지고는 그릇된 인생행로(人生行路)를 바로 잡을 길이 없다고 단정(斷定)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말선17-112> 나 자신(自身)이 올라가는 운세(運勢)에 있는가, 내려가는 운세(運勢)에 있는가를 보고 조상(祖上)의 공적(功績)을 타고났는가 못 타고 났는가를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은 남보다 3배(倍) 이상(以上)을 수고(愁苦)하고 더 열심히 정성(精誠)을 들여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내려가는 운세(運勢)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 내려가고 나서야 올라가는 것이다. 이럴 때는 정성(精誠)을 들이면 빨리 내려간다. 내려가는 사람이 정성(精誠)을 들이면 빨리 내려간다. 내려가는 사람이 정성(精誠)을 들이면 거기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빨리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惡)한 자(者)들이 정성(精誠)을 들이면 급살(急煞)맞는 일이 벌어진다. 자기(自己) 아들이 죽던가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짐으로 해서 탕감(蕩減)이 빨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라가는 운세(運勢)에 있는 사람이 정성(精誠)을 들이면 그 배(倍)가 되는 속도(速度)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네 마음(心)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力)을 다하여 주(主)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막12/30)
<말선59-127> 여러분은 수천(數千) 수만대(數萬代)의 선조(先祖)들을 가졌습니다. 선조(先祖) 가운데 선(善)한 선조(先祖)가 많았느냐, 악(惡)한 선조(先祖)가 많았느냐? 그것을 종합(綜合)해 볼 때 선(善)한 선조(先祖)가 많았다는 사람은 비례적(比例的)으로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왜? 일생(一生)을 살고 나서 임종(臨終)하는 순간(瞬間)에 가 가지고, ‘내가 일생(一生)동안 선(善)한 일을 많이 하였느냐, 악(惡)한 일을 많이 하였느냐?’ 하고 회고(回顧)해 볼 때, 선(善)한 일보다도 악(惡)한 일을 많이 했다는 결론(結論)을 어느누구나 내린다는 것을 볼 때, 우리 선조(先祖)들 전체(全體)가 선(善)한 사람이 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례적(比例的)으로 악(惡)한 선조(先祖)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生角)하게 될 때에, 나는 선(善)할 수 있는 새로운 혁신적(革新的)인 운동(運動)을 제시(提示)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이것을 극복(克復)하고 초월(超越)할 수 있는 방안(方案)을 모색(摸索)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人間)은 인연(因緣)의 혁명(革命)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인연(因緣)의 결과물(結果物)로 태어난 존재(存在)로서 그 운명(運命)을, 그 환경(環境)을 그냥 그대로 따라가 가지고는 비참(悲慘)한 자리에서 파탄(破綻)되는 결과(結果)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혁명(革命)해야 됩니다. 반대(反對)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헣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면 반대(反對)의 행로(行路)를 제시(提示)해야 됩니다. 그것은 불가피(不可避)한 일입니다.
<말선59-136~137> 혁명(革命)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혁명(革命)하는 단(單) 하나의 길이 있나니, 이것이 뭐냐? 전부(全部) 부정(不正)하고 박차버려라! 가치(價値)를 인정(認定)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絶對) 인정(認定)하지 말고 전부다 옥살박살 부정(不正)해 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부정(不正)해 가지고 부정(不正)을 한 그 이상(以上)의 자리로 점핑해 가지고 그 자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宗敎)가 고마운 것은 하나님을 절대(絶對)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혁명(革命)의 본위(本位)입니다. 알겠어요?
인간(人間)들 끼리 무슨 죄(罪)가 많고 어떻고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立場)에서 평면적(平面的)으로 보게 되면 백지(白紙) 한 장 차이(差異)입니다. 잘났다고 했댔자 그렇고, 못났다고 했댔자 그렇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絶對的)으로 믿어라! 절대적(絶對的)으로 믿으면 일시(一時)에 돌파구(突破口)가 생겨가지고 초월(超越)할 수 있는 길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절대적(絶對的)인 신앙(信仰)은 운명(運命)길을 혁신(革新)할 수 있다는 결론(結論)이 나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또한 인연(因緣)도 바로잡을 수 있고, 관계(關係)도 개선(改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선59-128~129> 그렇기 때문에 종교(宗敎)에서는 반대(反對)의 길을 제시(提示)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중심삼고 볼 때, 사람을 위해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神)과 사람(人)은 주체(主體)와 대상관계(對象關係)로서 하나는 남극(南極)이요 하나는 북극(北極)과 마찬가지입니다. 남극(南極)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남극(南極)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북극(北極)을 위해 살아라! 북극(北極)을 바라보고 살아라’ 하는 가르침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서 죽고자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북극(北極)을 위해 죽어라!’ 이와 같은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宗敎)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종교(宗敎)가 사실(事實) 그렇게 됐다면 역사적(歷史的)인 섭리(攝理)의 배후(背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認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人間)은 무엇을 해야 되느냐? 극(極)과 극(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인적(原因的)인 존재(存在)고 인간(人間)은 결과적(結果的)인 존재(存在)이니까 원인적(原因的)인 존재(存在)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性稟)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다음에는 ‘죽고 자(者) 하는 자(者)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者)는 죽는다’ 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무 목적(目的)도 없이 죽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죽고자하는 자(者)는 살고, 자기(自己)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者)는 죽는다 이겁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말선31-88> 선(善)한 조상(祖上)을 가진 사람은 희생(犧牲)해야 합니다.
<말선30-187> 하늘의 운세(運勢)를 타고날 수 있는 후손(後孫)을 가지려면 그것은 부모(父母)가 정성(精誠)을 들이는 기준(基準)에 따라 그 내용(內容)이 결정(決定)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즉(卽) 나라를 위해서 세계(世界)를 위해서 하늘을 위해서 얼마만큼 충성(忠誠)했느냐, 얼마만큼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지성(至誠)을 다하였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태어날 후손(後孫)의 운명(運命)이 좌우(左右)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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