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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수만 잘 모시면 만사가 여의"
김명순 당호(문수당) 의정부교구
전북 정읍군 칠보면 행단리 출생
1933년 5월 21일 생
의정부 지부회장
또 청수를 눈에 확 비춰 보여 주시더니 그때부터 내가 걷잡을 수 없이 말이 나오는 거예요. “청수 잘 모셔라 청수만 잘 모시면 만사가 여의하리라!” 하면서 큰소리를 지르는 거야. 난 그때 만사여의(萬事如意)가 뭔지도 몰랐어요.
내가 오관실행을 하며 신앙생활을 한 것은 늦은 편이에요. 조상님께서 대대로 하셨다는 말씀에 영감님(장수창,문암)과 기도식만 하고 기념일만 중앙교당으로 나갔습니다. 연희동에서 살 땐 교당이 가까이 없다는 게 핑계였죠. 그러다가 82년도에 의정부로 이사를 오게 됐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50세였어요. 이은혜 전 여성회 회장이 제 동서인데, 동서가 “형님 이제 교구도 가까이 있으니 열심히 잘 해 봅시다” 하는데 정말 부끄러웠어요. 내가 맏이로서 조상님의 뜻을 이어 동서들을 잘 이끌어야 하는데 동서한테 오히려 그런 말을 들으니 조상님께 송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우리 시댁은 평안남도 맹산군 지덕면인데요, 종갓집으로 아주 잘 살았다고 합니다. 대전에 김용순 사모님, 전라도 박지선 사모님 등 여러분들이 우리 영감님하고 한 형제처럼 지냈는데 그분들이 말씀하시길 “통일만 되면 고생 안합니다. 지금 고생은 도 닦는다고 생각 하세요” 하면서 절 위로했습니다.
3.1 운동 때는 우리 시아버님(장용선)께서 사랑방 문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서 사람들과 태극기를 만드셨습니다. 지덕면 5일장에 나가 사람들과 만세를 불렀는데 일본 순경이 와서 태극기를 든 바른 팔을 내리쳤습니다. 시아버님은 아랑곳 않고 왼팔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니, 일본 순경이 이번엔 왼팔을 내리쳤습니다. 왼팔을 내리치니 시아버님은 입에 태극기를 물고 배를 밀고 나아가셨답니다. 시아버님은 일본 순사가 잔인하게 목을 찌르고 난도질을 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교사에도 나온 만세시위입니다. 그때 우리 시아버님 나이 40세였지요. 우리 아버님은 목숨하고 천도교를 바꾸셨어요.
그 후에 우리 집안의 고초는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갑진개혁운동과 삼일재현운동 때도 희생을 당했습니다. 정말 조상님을 생각하면 목이 멥니다. 목숨 바쳐 지켜온 천도교입니다. 맹산군 시위운동은 우리 집안일인데, 이것을 아직 세상에 밝히지 못해서 너무 안타까워요. 지금은 자료가 충분히 남아 있지 않아 아버님 업적을 밝혀 드리지 못하니 후손으로서 더욱 가슴 아픕니다. 시할아버님도 성미를 받아 서울로 올리시며 정성으로 천도교를 하셨습니다. 우리 영감님이 피난 나오려고 준비하고 나왔다면 자료를 가지고 나오셨겠지만 자료를 못가지고 나왔습니다.
우리 영감님은 6.25 때 청우당으로 북한에서 일했어요. 어느 3대 독자 집에 영장이 나와 갖다 주고 나니 너무 미안해서 자청해 군에 입대했대요. 그런데 그 소대가 총 한번 쏴 보지 못하고 전멸하다시피해서 5명만 겨우 살아서 손들고 포로로 잡혔답니다. 포로 생활하면서 고생 많았지요. 그때 가지고 나온 것이 21자 염주 단 하나였어요. 이남에는 혼자 온 줄만 알았는데, 몇 년 후에 시동생 세 분을 모두 만났답니다. 우리 영감님은 동생들이 이북에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고, 동생들은 형님은 포로가 되어 죽었을 거라는 생각했다고 해요. 그때 서로 생각하며 울고불고 한 사연은 말로 다 못해요.
의정부로 이사 온 후 저도 열심히 하려고 마음을 먹었어요. 조상님 하던 것이니까요. 그때 의정부교구에서 한영자씨가 주도해 목요수련회를 했어요. 김경렬 포덕사님이 지도하셨죠. 우리 동서가 수련을 하는데 머리를 흔들흔들, 엉덩이를 들썩들썩 하면서 수련만 하면 떠는 거예요. 난 그런 걸 처음 봤거든요. 참 궁금했어요. 우리 동서는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 ‘나도 해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새벽 3시에 일어나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청수 떠놓고 5시가 되기를 기다렸어요. 혼자서 체험해 보려고요. 한울님이 계셔서 동서가 강령이 온다면 나도 한울님 딸로 한울님께서 내신 사람이니 나도 주시겠지 하며 무릎 꿇고 두 손을 합장하고 열심히 주문을 했어요. 그때 심고법도 몰랐어요. “한울님! 한울님이 계셔서 한울님 기운으로 강령을 주신다면 제게도 강령을 한 번 주세요. 그래야 내가 한울님 계신 걸 알죠. 난 모르잖아요” 하면서 얘기를 한 거예요. 열심히 주문을 외웠더니 온몸이 오싹하더니, 머리에서 손까지 전기 오듯이 찌지직하면서 강령이 모셔지는 거예요. “오메, 됐네! 오메! 한울님이 강령 주셨네” 하고 좋아했어요.
그러다 양력 2월, 아주 추울 때 처음 화악산수도원에 갔어요. 그때 우리는 의정부에서 구멍가게를 했어요. 그 전 연희동에서는 15년 동안 구내식당에서 밥 해주는 일을 했고요. 영감님을 졸라서 “한 번만 화악산에 가게 해 주세요” 했더니, 영감님이 “그럼 남 간다고 가고 남이 온다고 오고하면 안 돼요. 가서 진미를 꼭 맛보고 오세요!”라고 해요. “거기서 뭘 주는데요?” 하니 “응, 주는 게 있어. 그것은 한울님이 주시기 때문에 먹는 사람만이 맛을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 해요. 이제 걱정이 되는 거야. ‘진미의 맛이 무엇인가 보고 와야지. 남 못 모시는 강령도 혼자 모셨는데 꼭 진미의 맛을 보고 와야지’ 하는 생각이 밑바닥에 드는 거예요.
수도원에서 하루에 세 번씩 우물물을 길어 목욕을 했어요. 진미의 맛을 보려고요. 그러니 감기가 걸려 기침이 나고 눈물이 나고 콧물이 나고 사람들에게 죄송한 거야. 이소원 명동산원장님이 포덕사로 활동할 때에요. 조카딸이 105일 수련하는데 내일 모레면 다 된대요. 포덕사님도 그때 가셨어요. 기침을 너무 하니까 명동산원장님 조카따님이 “사모님 심고하세요” 하대요.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사모님이 정말 소원하는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하세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울님께 심고했어요.
'한울님 스승님 감응하옵소서. 내가 감기에 걸려 소란스러우니까 옆 동덕들이 수련을 못 하잖아요. 죄송해서 보따리 싸서 가야겠어요’ 하고 심고를 했어요. 오후가 되니 기침이 딱 떨어지는 거예요. 기침하고 수련할 적에 내가 많이 울었어요. 내가 잘못한 것이 필름처럼 팍팍 넘어가면서 울게 만든 거예요. 내가 우리 딸 공부 안한다고 때렸거든요.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몰라서 그러는 걸 때리기만 했으니. 또 영감님이 천도교 잘 하자며 새벽에 청수 같이 모시자고 했는데 나는 새벽에 사람들 밥해줘야 한다며 저녁에나 같이 하자면서 안 했던 거예요. 그게 미안해서 눈물이 나고 조상님께 잘못한 것만 보여요. 너무 죄송해서 또 울었어요. 우리 친정이 불교를 믿는 집안이었는데 부처가 내 몸에서 막 나가는 것도 보이고 잘못한 걸 반성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러고 나니 기침도 멎고 울음도 멎고 이제는 웃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또 물체를 보여 주시는 거야. 너무 재미있었어요. 산골에 계단처럼 논이 있는데 8월의 벼가 노랗게 익어 고개를 숙이고 익은 모습이 너무 감동이었어요. 또 콩 심은 것이 오똑오똑 있고, 꽃들이 피어서 방긋방긋 춤을 추고 웃고, 바위가 많이 있는데 모두가 살아서 끔뻑끔뻑 움직이는 거야. 나는 산이랑 강 위를 날아다니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서 웃고만 다니는 거야. 입으로는 주문 읽고 너무 재미있었어요. 강령이 오는데 그치지가 않아요. 그러니 윤정희 사모님께서 “밤에 잠을 못자니 잠 좀 자게 주문하지 마세요” 하세요. 그래서 강령 주시지 말라고 심고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강령 달라고 심고하는데 나는 그 반대였어요. 또 청수를 눈에 확 비춰 보여 주시더니 그때부터 내가 걷잡을 수 없이 말이 나오는 거예요. “청수 잘 모셔라 청수만 잘 모시면 만사가 여의하리라!” 하면서 큰소리를 지르는 거야. 난 그때 만사여의(萬事如意)가 뭔지도 몰랐어요. 무당처럼 자꾸 눈에 보이는 게 말로 나오는 거예요. 얼마나 걱정이 되고 사람들에게 얼마나 미안 했는지 몰라요. 아는 소리를 자꾸 하니. ‘동네에 가면 장사도 해야 하는데 미쳤다고 하면 어떡하지’하며 걱정되는 거야. 그래서 심고를 했어요. 강령 주지 마세요. 한울님 계신 것 알았으니까 강령 주지 말고 가르침도 주지 마세요. 주지 말라고 하면서 자꾸 심고만 하는 거야. 모두 나를 별나게 쳐다보는 거죠. 초보자가 남 안하는 짓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누구든지 바쁜 가운데 천도교를 해야지 잘한다고 봐요. 일이 없으면 도(道)도 없는 거예요. 내게 금 같은 시간에 거길 갔어요. 그리고 초보자 때 잘 해야 되요. 초보자 때 그냥 지나가면 진미의 맛을 못 봐요.
청수를 모셔야 만사여의 한다는 말을 하고 난 후에 청수를 모셨어요. 그때 원장님께서 서울 가시면서 아침청수 집례 때 음력 양력 날짜를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집례 할 때 음력 양력을 말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줄 알고 했어요. 그때 인천에서 할아버지 한분이 손자를 데리고 오셨는데 그 손자아이가 킥킥대고 웃더라고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웃는 거예요. 얼마나 무안한지. 그 뒤로 수련이 안 돼요. 마음이 자꾸 걸려서요. 마음이 맑아지니 자꾸 그런 것만 꼬집나 봐요. 한울님께서 마음공부를 시키나 봐요. 그래도 또 나가서 집례를 봤어요. 용기도 좋지요. 내가 말했어요. “내가 11시 집례 볼 때 잘못했습니다. 원장님께서 서울 가실 때 그렇게 해서 그렇게 하는 줄 알고 그랬어요. 다음에 올 때는 청수 잘 모시는 걸 배워서 잘 하겠습니다” 그 소리를 안 하면 동서 얼굴 보기도 미안하고 안 되겠더라고요. 그러자 손자아이가 벌떡 일어나 내보고 큰절을 하면서 “사모님 죄송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어린 게 그러데요. 괜찮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마음을 풀고 수련을 했죠. 지금 생각하면 별개 아닌데요.
하산하는 날 새벽 수련을 하는데 묵송 시간이었어요. 안개가 뿌옇게 낀 먼 산에 한쪽에는 태극기와 궁을기가 잔뜩 꽂혀 있는 거예요. 아이구, 그렇게 봤으면 됐지. 왜 또 말이 나오는지. “태극기! 궁을기다! 한 손에는 궁을기! 한 손에는 태극기! 궁을기라야 통일된다!” “정신통일! 정신통일!” 말이 튀어 나오는데 사람들한테 미안해 죽겠더라고요.
집에 오니 영감님이 나보고 우세요. “나는 이제 이 장사 안 하련다. 가게 내 놓아라” 하는 거예요. 그때 이곳에는 깡패들이 있었어요. 시국이 지금 같지 않았죠. 우리 영감은 성격이 곧은 분이에요. 애들이 외상으로 달라고 해서 영감님이 외상 조금 갚고 먹으라고 했더니, 애들이 이북서 이남 와가지고 이만큼 벌어먹고 살면서 외상 안 준다면서 그러려면 도로 이북 가라고 하더래요. 영감님께 그 소리를 들으니 어찌나 속이 상하는지. 서른이 넘은 건달패에요. 그 애들을 내가 불렀지요. 나는 기억이 안 나요. 어떻게 했는지. 그런데 옆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 얼굴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무서워서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더래요. 호랑이처럼 했나 봐요. 건달패가 무릎 꿇고 싹싹 빌더니 당장 외상값을 갚았어요.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으니 내가 한 것이 아니었나 봐요.
그리고 뒷날 의정부 교구에서 교인 집에 청수 모시러 갔어요. 그런데 청수 모시는데 또 민망스럽게 큰소리를 하는 거예요. “청수는 왜 모시느냐! 저것 붙여 놓고 왜 청수 모시느냐 부적부터 떼라!” 나도 모르게 딴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보니 문지방에 부적을 붙여 놓은 거예요. 집에 와서 얼마나 죄송스럽고 민망한지. 영감님께 그 말을 했더니 “천도교 잘못 믿었어. 우리 천도교 그런 것 없어! 무당인가? 사람이 참을성이 있어야지, 무슨 말이 튀어 나오려고 하면 입을 딱 다물고 말을 안해야지” 야단치시는 거야. 그 뒤로는 깜깜해. 자꾸 누가 잘한다고 하면 더 잘하려고 하는데, 자꾸 안하려고 하고 덮으려고 하니까 힘들었어요.
수련 후에 아무리 불쾌하고 나쁜 일이 있어도 마음 상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도가 다 깨져 버린 거야. 글쎄 몰라, 49일 기도했다면 복구가 됐을지 몰라도 내가 직장 다니고 장사 다니고 해서 복구가 안 됐지요. 그래서 밤낮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어요. 그때 좋은 살길을 열어 주셨는데 내가 제대로 못하고 입으로 퍼부어 망하게 해서 지금은 이렇게 후회를 많이 한답니다. 지금 의정부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못 나오는 게 참 안타까워요. 젊은 사람들은 직장 다니니까. 우리 며느리만 해도 마트에 일 다니니 시일식에 잘 참석을 못해 너무 아쉬워요. 그래서 지금 의정부교구에는 노인네들이 많아요. 안타까워 죽겠어요. 나는 여성회 수련 다닐 때 보면, 다른 교구 젊은 회장 부회장 총무가 너무 부러워요. 나는 내 복으로 사니 돈 많은 집 하나도 부러워 안 해요. 지금은 젊은 회장 총무들 보면 그처럼 샘나고 욕심나는 게 없어요. 그리고 밤낮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요.
내가 집에 있기 심심해서 직장을 다녔어요. 영감님이 그때 정신이 흐렸다 맑았다 하더라고요. 틈틈이 집에 와서 영감님을 돌봤는데, 하루는 집에 오다가 오뚝이처럼 넘어졌어요. 정신을 잃었지요. 조금 있으니 사람 소리가 들려요. 셋방 사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가까운 병원에 데려 갔는데 허리뼈가 굽었다고 입원을 하래요. 그때 입원할 처지가 못 되고 며느리들도 직장 다니고 영감님도 아파 입원을 안 했어요. 참 그때 미련했죠. 다치고 나서 근육이 뭉치니까 허리를 못 폈어요. 청수도 못 모시고 그랬어요. 앉지를 못하니까 다시 한울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청수를 모셨어요. 청수 모시니까 애를 낳을 때 아프듯이 배가 아프더라고요. 배를 막 문질러 주세요. 그러더니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어요. 옆구리가 펴지고 근육이 풀리는 거예요. 그리고 허리가 펴지더라고요. 한울님 은덕으로 다친 허리가 나은 거예요.
5월에 내가 허리를 다쳤는데 6월에 영감님이 돌아가셨지요. 영감님은 깨끗하게 내 신세 안지고 환원하셨죠. 고생 없이 편안하게 가신 거예요. ‘좋은 마음으로 사시니까 곱게 가는 구나’ 생각했어요. 나도 그렇게 좋게 갈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 뒤 우리 집을 지은 후에 또 넘어졌어요. 우리 아들하고 좋다는 데 다 다녔어요. 인터넷으로 뒤져서 유명한 곳에 갔는데 등의 잔뼈가 다 나갔대요. 손을 댈 수가 없대요. 우리 아들이 사정을 했는데 원장이 화를 내며 그냥 살아야 한다고 해요. 약 먹고 주사 맞으며 살아야 한대요. 앞으로 키가 점점 작아진대요. 그래서 내가 불구를 안고 살아갑니다. 한울님께 잘못했다고 사죄 합니다. 제대로 발을 못 디뎠으니 내가 잘못했죠. 지금도 내 힘으로 견디며 산다고 생각안하고 온전히 한울님 은덕으로 살아갑니다.
예전에 연희동에서 벽돌공장에 다니며 30명 정도 밥을 해주며 살았는데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내 몸을 생각 안하고 최선을 다해서 인부들 밥을 해 주었어요. 십리 시장을 걸어서 무거운 찬거리를 이고 날랐죠. 버스는 학생들 통학시간이라 타지를 못해서 이고 다녔는데 15년을 그런 생활을 했어요. 내 몸을 생각 안 하고 산거예요. 그때 이미 몸이 망가진 거예요. 지금은 ‘한울님! 저 깨끗하게 주신 몸, 앓지 않고 자식들에게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깨끗이 가게 해주세요’ 하며 그냥 즐겁게 삽니다. 아들 며느리가 잘해요. 나 아프면 도와주고 그래서 영감님께 ‘고마워’ 하고 종종 사진 보며 인사하지요. 우리 아들(장원일)이 참 고마워요. 귀한 보석이라 자랑은 안합니다. 집안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너무 귀한 보석입니다. 교회일 열심히 하지요. 교회 일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참 고맙습니다.
내가 당부하고 싶은 말은 누구든지 수련하고 난 후에는 더 발전할 생각을 해야 해요. 집에 와서 큰소리 내면 그거 절대 금물이에요. 도를 살리려면 절대 큰소리를 내면 안 돼요. 그걸 꼭 당부하고 싶어요. 수련 성공해서 교단 발전 이루어 주세요. 천도교는 내가 잘한다, 잘못한다가 없어요. 내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예요. 돈으로 따진다면 1천 원어치 하면 3만 원어치 덕을 본다고 봐요. 천도교 잘해서 가정 살리고 교단 살리고 사회 번영하고 이 나라 잘되어야지요. 언젠간 천도교 꼭 잘 됩니다!
(구술일: 포덕 149(2008)년 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