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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En aquel tiempo, se enteró el tetrarca Herodes de la fama de Jesús, y dijo a sus criados: «Ese es Juan el Bautista; él ha resucitado de entre los muertos, y por eso actúan en él fuerzas milagrosas».
Es que Herodes había prendido a Juan, le había encadenado y puesto en la cárcel, por causa de Herodías, la mujer de su hermano Filipo. Porque Juan le decía: «No te es lícito tenerla». Y aunque quería matarle, temió a la gente, porque le tenían por profeta.
Mas llegado el cumpleaños de Herodes, la hija de Herodías danzó en medio de todos gustando tanto a Herodes, que éste le prometió bajo juramento darle lo que pidiese. Ella, instigada por su madre, «dame aquí, dijo, en una bandeja, la cabeza de Juan el Bautista». Entristecióse el rey, pero, a causa del juramento y de los comensales, ordenó que se le diese, y envió a decapitar a Juan en la cárcel. Su cabeza fue traída en una bandeja y entregada a la muchacha, la cual se la llevó a su madre. Llegando después sus discípulos, recogieron el cadáver y lo sepultaron; y fueron a informar a Jesús.
«Se enteró el tetrarca Herodes de la fama de Jesús»
Rev. D. Joan Pere PULIDO i Gutiérrez Secretario del obispo de Sant Feliu
(Sant Feliu de Llobregat, España)
Hoy, la liturgia nos invita a contemplar una injusticia: la muerte de Juan Bautista; y, a la vez, descubrir en la Palabra de Dios la necesidad de un testimonio claro y concreto de nuestra fe para llenar de esperanza el mundo.
Os invito a centrar nuestra reflexión en el personaje del tetrarca Herodes. Realmente, para nosotros, es un contratestigo pero nos ayudará a destacar algunos aspectos importantes para nuestro testimonio de fe en medio del mundo. «Se enteró el tetrarca Herodes de la fama de Jesús» (Mt 14,1). Esta afirmación remarca una actitud aparentemente correcta, pero poco sincera. Es la realidad que hoy podemos encontrar en muchas personas y, quizás también en nosotros. Mucha gente ha oído hablar de Jesús, pero, ¿quién es Él realmente?, ¿qué implicación personal nos une a Él?
En primer lugar, es necesario dar una respuesta correcta; la del tetrarca Herodes no pasa de ser una vaga información: «Ese es Juan el Bautista; él ha resucitado de entre los muertos» (Mt 14,2). De cierto que echamos en falta la afirmación de Pedro ante la pregunta de Jesús: «Y vosotros, ¿quién decís que soy yo? Simón Pedro le respondió: ‘Tú eres el Mesías, el Hijo del Dios vivo’» (Mt 16,15-16). Y esta afirmación no deja lugar para el miedo o la indiferencia, sino que abre la puerta a un testimonio fundamentado en el Evangelio de la esperanza. Así lo definía San Juan Pablo II en su Exhortación apostólica La Iglesia en Europa: «Con toda la Iglesia, invito a mis hermanos y hermanas en la fe a abrirse constante y confiadamente a Cristo y a dejarse renovar por Él, anunciando con el vigor de la paz y el amor a todas las personas de buena voluntad que, quién encuentra al Señor conoce la Verdad, descubre la Vida y reconoce el Camino que conduce a ella».
Que, hoy sábado, la Virgen María, la Madre de la esperanza, nos ayude a descubrir realmente a Jesús y a dar un buen testimonio de Él a nuestros hermanos.
♣ 악을 폭로하는 의인의 희생과 죽음 ♣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의 예고편입니다. 요한은 정치적인 통치자의 배척을 받고, 합당한 이유 없이 그리고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정치 지도자들의 반대와 배척을 받고 부당하게 처형되었습니다. 두 분 모두 자신의 제자들이 주검을 거두었습니다.
갈릴래아와 페레아 지방을 통치하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듯이 예수님도 처형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한 소문을 듣고 놀랍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이 처형한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4,1-2). 세상의 막강한 권력을 지닌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며 경계하고 불안을 느낍니다.
요한의 운명은 헤로데 안티파스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계기로 죽음을 향해 치닫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배다른 형제의 딸이면서 동시에 이복형제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혼인하였습니다. 그는 이 혼인을 위해 첫째 부인 곧 나바테아 왕국의 임금 아레타스의 딸을 버립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여러 차례 옳지 않다고 용기 있게 비판하였습니다(14,4).
사실 헤로데의 행위는 율법에서 금지된 근친상간에 해당했기에(레위 20,21) 비판받아 마땅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의 정당한 지적에 잘못을 청산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사생활을 비판한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둡니다(14,3). 사실 그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으나,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두려워 차마 죽이지 못합니다(14,5).
헤로데에 빌붙어 세도를 누리던 헤로디아는 더 큰 불안을 느껴, 자신의 비윤리적 삶을 덮으려고, 딸을 이용해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멋진 춤과 박수갈채를 받고 즐거움에 젖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감성적이며 일시적인 기쁨에 젖은 그는 사랑의 괘를 벗어나 ‘무질서의 어둠’으로 가 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는 양심의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체면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허락하고 맙니다(4,6-11).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 자신과 사회 안에도 또 다른 헤로데가 있을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헤로데 안에는 자신의 정치권력이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며,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될 수 있다는 교만이 있었지요. 또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거짓과 뻔뻔스러움,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고 감각적 기쁨을 좇는 어리석음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헤로데는 그릇된 선택과 행동임을 의식하여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하느님의 시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시선을 더 의식했지요. 결국 그는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더 중요시하여 불의와 반생명을 선택해버린 비굴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헤로데의 이런 교만과 어리석음, 비굴함과 비열함, 죄의 은폐, 그리고 권력과 명분을 앞세운 폭력 행사를 과감히 버려야겠습니다.
한편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제자들의 삶 또한 늘 반대와 배척이 따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 때문에 겪게 되는 박해와 시련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막은 채 탐욕과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요한처럼 충실하고 용기 있는 예언자의 소명을 다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어떤 희생과 죽음이 닥치더라도, 온갖 불의와 억압, 거짓과 폭력, 그리고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세상 그 어떤 권력과 세력도 하느님을 이길 수 없음을 믿으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인들의 고통
존경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묵상할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이자 구약시대를 종결짓는 위대한 대예언자로서 평생에 걸친
노고와 희생에 대한 축복과 선물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다가온 것은 깊은 지하 감방 속에서의 외롭고 쓸쓸한 죽음이었습니다.
저 사악한 헤로데며, 헤로디아며, 살로메는 저리도 당당하게,
세상을 쥐락펴락하면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데, 잘못한 것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을뿐더러,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완벽히 수행한 세례자 요한에게
다가온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인들의 고통!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인류에게 주어지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정말이지 백번 천 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억울한 고통,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소아암 병동에 들렀다가 꼬마 환우들을 보면서 정말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그 여리고 여린 몸에 갖가지 주사바늘들을 줄줄이 꼽고 있는 모습에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떻게 저 어린 존재들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주시는지, 참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우리에게 다가오는 끔찍한 병고가 또 그렇습니다.
사이코패스들의 만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 역시
하늘을 찌릅니다.
하필 우리 가족에게, 내 자녀에게 다가온 갖가지 중증 장애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때로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
하느님의 존재 여부까지 회의하게 됩니다.
감당하기 힘겨운 십자가들은 우리를 근본적인 신앙까지 흔들어놓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의인들이나 무죄한 사람들이 저리도 혹독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 반해,
악인들은 계속되는 승승장구와 만사형통 앞에 크게 웃고 있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론 하느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간표와 인간의 시간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뒤로 물러서서 마음 크게 먹어도 이해되지 않는 모순된 현실 앞에
방황하고 흔들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 한 가지는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가신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
위대한 대 예언자들 역시 의인들의 고통과 악인들의 번성 앞에
우리와 똑같은 고민과 방황을 거듭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라고 한탄했다는 것입니다.
일관되게 하느님께 충실했으며, 늘 정의 편에 서서 끝까지 불의와 맞서온 자신의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용납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대체 무엇인가 끝없이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 묻고 또 물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두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펼쳐진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그 어떤 기대도 그 어떤 보답도 하지 않기로 결심하여 다 내려놓았습니다.
‘봉황의 뜻을 참새가 어찌 알리오?’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도 우리 눈앞에는 계속해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기억할 일, 하느님께서는 느리시지만
당신 나름대로의 시간표와 계획표에 따라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불평불만을 접고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일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신비스럽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불가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께서는 때로 우리를 따뜻이 어루만져주십니다.
더 당신 뜻에 맞갖은 모습으로 꾸며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를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깨트리십니다.
짓이기시고 산산조각 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다 합당한 존재로 우리를 재창조하십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자신이 누구이며 인생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줍니다.
여행을 떠나는 순례자의 길은 흥미진진한 길이지만,
다양한 결핍들과 고통들이 뒤따르는 길입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순례자이며,
아직도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내 삶의 자리에서 요구되는 의로움을 삶으로 살아내 봅시다
‘의로움’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어서 옮겨봅니다.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같은 대학에서 공부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친구는 은행가가 되었고, 다른 친구는 판사가 되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은행가가 된 친구는 수백만 달러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 사건이 판사가 된 친구에게 배당되었고,
언론은 사태 추이에 큰 관심을 쏟았습니다.
만약 은행가의 죄가 입증되더라도 피고가 친구라는 이유로
판사가 관대한 처벌을 내릴 것인지,
오히려 언론의 비난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가혹한 처분을 내릴 것인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재판 당일, 재판정의 방청석은 완전히 메워졌습니다.
배심원들에 의해 내려진 판결은 유죄였습니다.
판사는 일어나서 판결문을 읽곤, 해당 죄목에 적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형량인
수십억 달러의 벌금을 선고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법복을 벗은 다음,
피고인석으로 다가가 친구를 다정히 껴안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모든 재산을 팔았네.
이제 이것으로 자네의 빚을 청산하도록 하세.”】(행복선언 참조)
이야기에 나오는 판사는 정의와 의리를 동시에 지켜낸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그렇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친구를 돕는 희생이 없었더라면,
정의와 의리 중 한 가지는 놓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의롭게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위해서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에게 돌아온 백성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바른 말을 하는 예레미야를 죽이려 한 것입니다.
또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지적한 요한에게 돌아온 결과도
비참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다가, 헤로디아의 음모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의로움을 실천하는 일은 크고 작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명 의식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스승을 도왔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처럼
함께 하는 사람이 없다면 끝까지 걸어낼 수 없는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주님의 위로가 없다면 금방 지치고 포기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말씀’과 ‘함께 하는 사람들’과 ‘예언자적인 소명’을 바탕으로,
내 삶의 자리에서 요구되는 의로움을 삶으로 살아내 봅시다.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복음서 저자는 헤로데에 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4,5).”
여기서 “군중이 두려웠다.” 라는 말은,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 헤로데는 로마제국의 식민지 일부를 다스리는 영주일 뿐이었습니다.
만일에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황제는 그 책임을 헤로데에게 물을 것이고,
헤로데는 영주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중이 두려웠다.” 라는 말은,
사실은 자기의 권력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다는 뜻이 되기도 하고,
로마 황제를 두려워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세속의 권력만 두려워했다는 뜻도 됩니다.
(또 이 말에는, 군중에 대한 요한의 영향력을 두려워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이 군중을 선동하면,
자기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고,
그래서 요한을 죽였을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를 비판하는 말이 듣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죽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헤로데는 처음에는 군중의 폭동이 두려워서 요한을 죽이지 않았는데,
그랬다가 결국 요한을 죽인 것은,
군중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그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태 14,2).” 라고 말한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도 아니고,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냥 호기심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또 예수님과 헤로데가 만나는 장면을 보면,
헤로데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8-12).”
헤로데가 표징을 보기를 기대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는 헤로데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저열한 인간이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세속의 권력과 부귀영화만이 그의 종교요, 신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헤로데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를 꾸짖은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헤로데 같은 사람도 회개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는 지금 죄 속에서 살고 있더라도
완전히 구제불능의 인간이라고 단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악한 사람도 제대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요한을 죽인 것은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는 세속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가 받으려고 노력했다면 받을 수도 있었을 구원을 거부하고,
스스로 멸망을 선택했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죽이는 장면에 나오는
‘손님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 ‘손님들’은,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마르 6,21).
그들은 헤로데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라고 명령할 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 일에 찬성을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속으로는 반대하지만 권력이 무서워서 침묵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 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악행이 벌어지는 것을 구경만 했으니
그들은 모두 살인죄의 공범들입니다.
(“나는 아무 일도 안 했으니 공범이 아니다.” 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악이 행해질 때 아무 일도 안 하고 방관하는 것은,
사실상 그 악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도 악한 일이 됩니다.)
오늘날에도 헤로데 같은 자들이 있고,
그런 자들이 하는 일에 동조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정치권력과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면서 인권이나 정의 등은 무시하는 자들,
나중에 심판 받게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지 않는 자들과 동조 세력들...)
악한 일인 줄 알면서도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과 동조자들과 방관자들은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1-42).”
송영진 모세 신부
인간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다
독일의 미네르란 목사는 “전쟁백서”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는 히틀러의 독재에 항거하다가 8년 동안 옥중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날 무렵 같은 꿈을 일곱 번이나 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일렬로 줄을 서 있고 자신들의 삶에 대한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도 그 줄에 끼어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은 옆의 사람을 볼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심판자 앞에서 오직 자신의 모습만 들여다보기도 버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앞 사람까지 차례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꾸 주위를 두리번대고 있더랍니다.
그리고 결국 미네르 목사와 눈이 마주쳤는데,
‘이 사람 때문입니다!’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 자세히 보니 자신 앞에 있는 그 사람이 ‘히틀러’였다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해져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네르야, 히틀러가 이렇게 된 것은 너의 탓이다.
네가 8년 동안 히틀러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비판만 했지 언제 이 사람에게
나를 알게 하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니?”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그런 전쟁광이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고꾸라져 한참을 울었고,
그래서 써낸 책이 바로 ‘전쟁백서’라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할 때는 반대로 자신을 정당화 하는 것이 됩니다.
내가 정당하니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이 되기 전이 이를 깨닫고 남을 비판하는 일을 접어야만 합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잡아서 사형에 처하려고 합니다.
그가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랑인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당당히 말합니다.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나를 처리하십시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 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떱니다.
무슨 말 때문에 두려워했을까요?
바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내려치기 위해 돌을 들고 서있는
자칭 정의로운(?)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그리고 바닥에다 그들의 죄를 일일이 쓰시며 이렇게 되뇌셨을 것입니다.
‘너희들의 죄를 스스로 책임지고 싶다면...’
돌을 들고 있던 이들은 자신들이 돌을 던지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떳떳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앞서서 자신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남의 눈에 티가 보이면서 자신 눈 안에 들보를 어떻게 보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나쁜 의도가 자신의 들보를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려하지 않고 자신에게 여자를 만들어 준
하느님과 그 여자에게 핑계를 돌립니다.
그때 하느님은 아담의 죄가 무엇이라고 일일이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가 판단하는 것을 보시고는 바로 그를 죄인으로 단정하여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십니다.
판단하는 이의 죄를 일일이 따질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어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 죄란 바로 자아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아 자체가 죄입니다.
그 죄가 나의 주인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판단하는 사람 자체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심판자이신데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루살렘 시민처럼 재빠르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은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에 그를 살려두기로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이 따르기 때문인데
남을 판단한 사람의 책임이란 바로 자신도 판단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내 탓이오!”를 세 번 외칩니다.
이것이 구원의 외침인 것입니다.
내 탓이라면 다른 사람 탓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처럼 자신의 탓을 인정하여 자비만을 바래야 하는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정당하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밖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정당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도 동생도 판단하여 결국 아버지의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결코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다른 이를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