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8:16~29)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17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그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보이는
엘리야가 아합에게는 그저 ‘괴롭게 하는 자’이다.
선한 자에게는 선하게
악한 자에게는 그것이 악하다고 부정적 메시지와 행동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아니다.’라고 하는 와중에도 때와 장소에 맞게,
항상 친절하게 해야 한다는 세부적인 행동 지혜를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부정적 메시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배척하는 문제가 있다.
‘좋은 게 좋은 거야’식이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아무 일 없듯이
웃을 수 있으며,
처첨한 악의 피해자에게 어떻게 좋게 좋게 넘어가라고
말하며 끝낼 수가 있을까?
희, 노, 애, 락도 필요하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때와 장소에 맞게 그 감정에 빠지는 것은 정직하고
상식적인 일이다.
아합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본능에 거스르는 유일한 골치덩이,
엘리야가 그저 괴롭히는 존재로 느껴졌을 것이다.
아합은 성경을 읽는 독자에게는 당연히 문제 있는 존재로
쉽게 여겨지지만
크리스천의 탈을 쓰고도 좋은 게 좋은 거라 그저 넘어가는 사람은,
1. 너무 훌륭한 크리스천(내면으로는 모두 느껴도 승화시키는)
2. 기질상, 또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신앙으로
3. 내밀히 자신의 이익중심의 신앙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
이 정도 3가지 경우 중에 한 가지 정도겠지만,
나는 대부분 2, 3번일 거라고 생각하는 걸 숨길 수 없다.
엘리야의 제안대로
하나님과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두고
가시적인 역사로 판별하는 자리를 만든다.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우상과 거짓은 무능함을 드러낸다.
악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꼭 무슨 우상뿐만이 아니라
진리에 거스르는 개인이 보이는 한계이기도 하다.
그 속성과 공식이 같다. 절대 따르지 않아야 하는 진리 참칭자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아합에게 그나마 우상들에라도 순전한(?) 신앙이 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는 그저 자신의 이익, 악을 선택했을 뿐이고
그것에 일시적으로라도 도움이 된다면
바알이나, 아세라가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숭상하는 척했을 것이다.
그들은 악을 숭상하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부인한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을 따르지만,
악은 하나님 따르는 것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한다!”
“하나님!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을. 죄는 어떤 특정 우상에
심취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어떤 죄성의 이유로 필요한 우상을 따르는 태도를
취하는 수순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하나님! 제가 오로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제 행동과 언어, 특히 교회 안에서의 교제에서의 저를 제대로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저를 지켜주시옵소서.
거대하고 내밀한 죄가 있다면, 그것을 직시하게 해 주십시오.
양정환, 그에게 주님의 변함 없는 간섭과, 위로, 평화,
그리고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