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의 ‘회암사의 중 둔량’
환암대사의 수제자에 둔량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여러 경전을 깊이 공부하여 학문이 아주 깊었다. 시도 아주 잘 지었다. 시가 맑고 깨끗하여 목은, 도은 등 여러 선생과 함께 주고 받으면서 시창을 하곤 했다.
조선조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지 않고, 명문가 자제들은 중이 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다보니 스님의 무리 중에는 글을 아는 자가 없었다. 무식쟁이 중들이 많으니까 둔량 스님의 이름은 더욱 더 두드러졌다. 집현전의 선비까지도 그를 찾아가서 모르는 것을 물으면서 배웠다. 둔량스님은 유교와 불교 사림(士林)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존경했다.
나의(성현) 중씨가 일찍이 회암사에 가서 공부를 했다. 이때 스님의 나이는 이미 90이었다. 조금 여위기는 하였으나 용모가 깨끗하고 청아했다. 건강은 오히려 더 좋아진 듯 보였다. 어떤 날은 두어 날을 먹지 않아도 기력이 약해보이지도 않았다. 음식을 대접하면 한꺼번에 두 어 그릇을 먹어치우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포식했다고 티를 내는 일도 없었다. 두 어 날씩 변소에도 가지 않았다.
항상 빈 방에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으면서 옥등잔을 밝히고 맑은 책상을 벌려놓고, 밤을 세워 글을 읽었다. 터럭같이 가느다란 글자도 하나하나 연구하였다. 일찍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일도 없었다. 사람을 물리쳐서 곁에 있지 못하게 했다. 부를 일이 있으면 손으로 작은 초인종을 눌러 소리를 낸다. 그러면 제자가 응대를 하고 달려 왔다. 응대를 할 때도 높은 소리는 내지 말라고 했다.
일본에서 국사가 오면 일본 국사는 시를 지어달라고 청했다. 조선의 고위 관직자가 시를 지어준 일이 수십 차례도 넘는다. 둔량 스님이 왕명을 받들어 시를 지었다.
그 시는
水國古精* 맑고 상쾌한 직위에 있는 사람이구나
불처럼 급속히 달리는 마음이 동요를 응당 스스로 그쳤으리라
마른 나무처럼 생각없이 섰으니 다시 누구와 친할 것인가?
풍악은 구름이 산에서 일고
분성엔 달빛이 성문에 가득하구니
바람 돛대에 바다 하늘이 넓으니
고향의 정원에 돌아가면 매화와 버들이 봄이 한창이겠네.
그때 변춘정이 대제학으로 있었다. 려然無位人(려연무위인)이라고 한 글귀를 고쳐서 蕭然絶世人(소연절세인-텅 비어 있는 세상에 드물게 나는 사람) 이라고 고쳤다.
이 글을 보고 둔량 스님이 말하기를 ‘변공은 정말 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소연이 어찌 려연만 하며, 절세가 어찌 무위만 하단 말인가. 이렇게 고쳐버리면 자연무위를 노래하려는 시의 본 뜻이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걸 보면 남의 글을 함부로 고치는 일을 삼가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글자를 가지고 언어 유희를 한다는 기분이다.)
그가 남긴 千峯集이 전해 온다.
--성현의 용제총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