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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울어주는 큰무당 김금화
시대 탓일까? 70 넘고 80 넘은 할머니치고 기구하고 서러운 인생의 고비를 넘지 않은 분이 얼마나 될까. 전쟁과 폐허를 헤치고 살아남은 그녀들 삶은 대개가 시난고난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홉 살에 신병을 앓기 시작해 딱 60년 전 정월 대보름, 열일곱에 내림굿을 받은 큰무당 김금화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녀의 삶은 유난히 돋보이는 한 편의 서사극이다. 14살에 시작된 고된 시집살이, 2년 만의 도망과 곧 이어진 1년간의 지독한 무병은 물론 한국전쟁 동안은 혹세무민을 이유로 인민군에게 끌려가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미신 타파’의 기치를 걸고 ‘마녀사냥’을 방불케 하는 탄압을 하며 덩달아 우쭐해진 동네 건달들을 보내 굿판을 헤집곤 했다.
다행히 해외 문화계로부터 주목을 받아, 열아홉에 이미 대동굿을 주도하던 그녀는 한국 전통문화의 전수자로 이름을 날리며 ‘서해안 풍어제’의 맥을 잇게 되었고, 해외초청 공연을 통해 자연종교의 원초적 생명력을 일깨워주는 시대의 샤먼으로 우뚝 섰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난 다섯 남매 중 그녀에게 유난히 모질던 외할머니도 그렇고, 문화 권력에 빌붙은 하수인들뿐만 아니라 가난해서 예단을 못해온 며느리 구박하느라 “저고리 바느질해놓으면 섶 잘못 달았다고 북북 뜯어서 흙바닥에 짓이겨놓고, 버선코를 박아놓으면 솔기가 안 맞는다고 얼굴에 내던지던” 시어머니도 알고 보면 그녀를 큰 만신으로 만든, 제 몸 던져 그녀를 키운, 어이구, 영혼의 스승이었다. 무당이던 외할머니는 공수를 주면서 펑펑 울었다. “손녀딸아, 나는 양반집에 시집 와 아들 못 낳아, 아들 낳게 신령님께 기원하다 신이 들어 무당이 됐다. 그런 내가 왜 몰랐겠나. 어찌하든 막아보려고 일부러 너한테 몹시 굴었건만 오늘 이 길 들어서게 됐으니 남 욕되게 하지 말고 큰 사람 돼라.”
나와 남의 경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무당. 그러나 경계는 위태롭게 마련이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여성도 남성도 아닌, 아니 여성이며 남성인 경계. 풋볼 선수 하인스 워드를 보면 피부 빛의 경계도 큰 내공을 쌓을 때까지는 존재의 위기 지대라, 어쩌면 경계는 영혼의 성장을 위해 꼭 순례해야 할 땅이기도 하다. 아니, 이건 우리 사회의 저급하고 천박한 가치관과 거기 놀아나는 의식의 서툰 수작 탓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건강하고 자유로운 의식을 지녔다면 경계에 드는 일이 반드시 비극적인 운명으로 이어질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남의 아픔을 제 것으로 삼아 대신 아파주고 대신 울어주던 큰무당 김금화의 속살이 짓무르는 속내 이야기는 영혼의 성장이 갈급한 시대적 소재기도 하다. 최근 소설 속 인물 ‘계화’로 다시 태어난 그녀는 자기 성장을 꿈꾸는 이들에게 자기 운명을 덫이 아니라 힘의 원천으로 삼아 알을 깨고 나오라고 속삭인다.
병술년, 정월 스무엿샛날 저녁이었다. 대동강 물도 녹인다는 우수가 나흘 전이었다. 한낮의 햇살은 봄기운에 겹고 바람은 아직 눈의 찬기운을 머금은 때, 서울 남산 둔덕에 우뚝 솟은 밀레니엄 힐튼 호텔이었다. 그곳 일층 로비에서 지하 오크룸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오색찬란하거나 오랜 세월의 기운이 스민 맞이(巫神圖)들이 내걸려 있었다. 계단 아래엔 작두거리에 쓰일 장안기가 비스듬히 세워졌고, 계단과 계단 사이의 공간에 떡과 오색실과와 삼색나물이 담긴 굿상이 차려졌다.
타살굿은 이것으로 '보여주기'를 마치고 곧 작두거리가 준비됐다. 무당이 겅중겅중 뛰고 솟구칠 수도 없는 비좁은 무대에 칠성단이 꾸며졌다.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춤추는 작두거리는, 비수거리라고도 부른다. 산이나 바다를 건너온 허물을 벗겨내고 집안이나 식구들에게 든 액운을 모두 막아달라고 소원하는 굿이다. 이미 한·미 수교 백주년이 되던 1982년 5월부터 8월까지 뉴욕에서 LA 등 여러 도시와 예일대학과 코네티켓 브리니티시 주립대학을 돌며 굿을 보여주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다녔다. 작두를 고추 들고 혀를 내밀어 혀를 천천히 가르고 소매를 걷어 팔뚝을 가르고 치마를 걷어올려서 허벅지와 종아리를 갈랐다. 이렇게 작두 두 짝을 놀린 뒤에 제자들에게 돌려줬다. 곧 두짝을 하나로 맨 작두가 칠성단에 놓일 것이었다. 남자 둘이 어깨에 맨 작두에 김금화가 두 팔을 걸치고 매달렸다. 사람들이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다. 높이 솟구치고 몸을 젖히고 겅중겅중 뛰기 시작한 일흔 중반의 무당 김금화는 맨발로 작두 위에 섰다. 그가 작두날 위에 몸의 균형을 잡고 섰을 때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오랜 축원 끝에 통돼지가 우뚝 섰을 때처럼 그들은 무당과 한 마음이 되고 사람을 위해 복을 주고 한을 풀어줄 신명들과 하나가 된 듯하였다.
김금화는 작둣날 위에서 신의 말을 전해주는 '공수'를 줬다. 경제가 좋아져서 모두 소원을 성취하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도 잘 살고, 유럽도 잘 살고, 누구나 복을 듬뿍 받아 가시라고 축원했다. 모두들 경견한 표정으로 김금화가 모말에 든 복주머니를 던져줄 때, 그리고 흰 쌀을 흩뿌려줄 때 서로 받으려 손을 들었고 받은 사람들은 기뻐했다. 그들은 한국을 떠난 뒤에라도 이날의 격렬하고 신기하고 따뜻한 문화의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재빨리 칠성단이 치워지자 김금화가 한복을 입은 대표단을 무대로 불러올렸다. 그들이 손에 손을 잡고 김금화를 따라 덩실덩실 춤췄다. 누구는 무복을 입었고 누구는 모자를 썼다. 무대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도 저절로 어깨가 들썩였고 몸이 흔들렸다. 신명과 흥이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것이었다.
ⓒ 2006 OhmyNews
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 여사
나라굿으로 유명한 김금화 선생은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큰 무당이다.
차근차근 국내에서의 위상을 다지고 있던 김금화 선생에게 82년도에는 세계적으로 발돋음할 수 있는 운명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미국 LA에 있는 녹스빌국제박람회장에서 거행될 친선공연에 초청된 것이다.
서해안 풍어제
우리나라는 예로 부터 각 지방마다 그 지역의 특색에 맞는 풍어제가 발달해 왔는데.. 그중 서해안 풍어제는 황해도 일대에서 성행하던 대동굿과 배연신굿을 풍어와 만선을 비는 대표적인 풍어의식으로 행하여 왔다. 이는 6.25 전쟁이후에도 김금화 선생님을 비롯 많은 이들에의해 전해져 현재는 국가 지정 무형 문화제 82-2호로 지정되었고 이제는 예술적인 면에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많은 행사에 초청되어 시연 되어지고 있다.
대동굿과 배연신굿
김금화 선생님이 무형 문화재 기능 보유자 로 선정된 부분이 바로 이...대동굿과 배연신굿의 "무녀" 부분이다. 황해도에서는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추렴을 하여 모두의 이익을 빌고 단결을 다지는 풍어제를 대동굿이라 하고 선주가 하는 굿은 배연신굿이라고 부른다. 즉 대동굿은 황해도 해서지역, 특히 옹진군의 뱃사람들이 풍어로 만선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온 마을 사람들이 한바탕 즐기던 축제였다. 배연신굿은 배를 부리는 선주가 풍어와 집안의 재수를 위해 벌이는 굿이었다
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 여사 '만수'란 한 무당이 하는 소리를 다른 무당이 받아서 꼭 같이 전달하는 '만수받이'라는 말 중의 '만수'이고, 여자 무당을 존대하여 쓰는 말은 '만수'가 아니라 '만신'이라는 순수 우리말을 쓴다. 어떤 사람은 '만신'을 '만신(萬神)'이라는 한자 조어(造語)를 쓰고 있으나 이는 맞지 않는 말이다. 금화(錦花)라는 이름의 의미는 '비단꽃'이라는 뜻이다. 1931년에 아들이 귀한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 한 집안에 태어나서, 남자 동생을 본다는 뜻의 '넘새'라는 아명(兒名)을 가졌던 그녀가 나이 다섯 살에 남동생을 보고 얻은 이름이 금화이다. 일곱살에 옹진으로 이사했다.
열 살 전에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시퍼런 낫을 맨발로 타고 올라가 춤을 추고, 열 살이 넘으면서부터는 어느 집에는 무슨 일이 생기고, 아들 낳는다, 딸 낳는다, 어느 사람은 무슨 짓을 한다는 둥의 '허튼 소리(?)'를 마구 뱉어내는 맹랑한 금화였다. 때로는 사냥꾼이 쏘아 떨어뜨린 꿩을 사냥꾼은 찾지 못하는데 금화가 찾아 자기 집으로 가져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말을 탄 장군이 달려 오거나 호랑이가 쫓아와 물고 늘어지는 환상(幻像)과 환청(幻聽)에 사로잡히는 금화였다. 무속(巫俗)에는 무병(巫病)이란 말이 있다. 몸에 신령이 찾아들었을 때에 신기(神氣)를 이기지 못하여 생기는 병이 무병이다. 많은 사람들이 금화에게 무병이 들었다고 했다. 열 일곱 살이 되던 해의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다. 무병을 앓던 금화가 달맞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개울을 건너려 하자 하늘에서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개울을 건너려다가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신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 때부터 금화는 '신의 딸'이 되었다.
금화에게 신이 내리자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가장 가슴이 아팠다. 외할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 산기도를 드리다가 신령이 몸에 들어온 이래 '천일이 만수'라면 황해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큰 만수였다. 외할머니는 외손녀가 자기처럼 무당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고, 금화의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에 이어 딸 마져 무당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강신(降神)은 인위적이 아니다. 운명적이다. 외할머니 어머니 외손녀의 3대에 걸친 이 운명을 고리를 '사람이 싫다'고 벗어날 수는 없었다. 외할머니가 신 어머니가 되어 금화의 허주굿을 했다. 허주굿이란 금화의 몸에서 온갖 잡신을 다 몰아내는 굿이었다. 이어서 내림굿을 했다. 작두를 탔다. 그 때 '신 어머니인 외할머니'가 물었다.
"너는 무당이 되어 무엇을 하겠느냐?"
금화는 이제 막 신의 딸이 된 새끼 무당이라 신 어머니의 말을 직접 듣지 못하고 중간에 있는 만수들이 '만수받이'를 해서 전해 주었다.
"구관(舊官) 신관(新官) '나라 만신'보다 더 높은 무당이 되겠습니다." "이 빌어 먹을 년아! 어데다 대고 그런 경망스런 주둥이를 놀리느냐? 저 년을 제 정신이 들 때가지 마구 쳐라!"
내림굿을 하던 날 금화는 공수 한 마디 잘못하여 싸리 채찍으로 종아리에 무수히 맞았다. '큰무당이 되겠다'는 새로운 공수를 한 다음에 매가 멈추었다. 무당이란 이렇듯 말 한 마디, 몸 매무새 하나까지 주의하고, 겸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어서 놋쇠걸립과 쌀걸립을 다녔다. 걸립 도중에 용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죽은 쇠'를 가져다가 '산 쇠'를 만드는 놋쇠걸립과 솟을굿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내림굿 다음 해에 벌써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는 대동굿이 들어왔다. 닷새간에 걸쳐 벌어진 대동굿은 대성황 대성공이었다. 작두에 오른 열 여덟 살의 만신 김금화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仙女)와 같았다. 땅 위에서 추는 모습은 나비와 같았다. 금화는 금방 황해도 일대를 풍미하는 무당이 되었다. 무당이 된지 3년도 못된 열 아홉 살에 용해라는 신딸을 낳았다. 신딸과 함께 복지기 할머니를 되리고 굿판을 다녔다. 나이가 젊고 어린 두 무당들이 어찌나 영험하고 신춤을 잘 추는지, 두 사람이 같이 다니면 사람들은 금화를 '큰당닥궁이'라 부르고, 용해를 '작은당닥궁이'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땅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피가 묻은 옷가지를 싣고 가던 달지구도 먹구름에 휩쌓였다. 신의 게시였다. 북에서는 무당을 '인민의 정신을 좀 먹는 반동분자'로 몰고 있었다. 금화는 곧 나라에 큰 난리가 난 것을 남들보다 먼저 알고 피신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깊은 밤 중에 몰래 찾아와 점을 보고 갔다. 하루 밤은 나는 새도 떨어진다는 CID 간부의 장모가 찾아왔다. 사위가 폐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고 했다. 점을 보니 죽지 않을 것만 같았다. 환자 집에 찾아가 굿판을 벌였다. 작두를 타고 '사흘 후부터 회복된다'는 공수를 하고 내려오는 찰랐였다. 가슴이 섬뜩했다.
"무어? 다 죽어가는 사람이 3일 후에 살아난다구? 전시에 군인도 못먹는 쌀로 떡을 해서 굿울 해? 이년 너 지금 당장 총살이다!"
CID 대장이 총뿌리를 금화의 가슴에 댔다. 순간 많은 사람들이 공수 결과나 보고 총살을 시키자고 했다. 대장은 총뿌리를 금화의 목에 다시 대고 3일 후에 보자며 떠났다. 드디어 3일이 되는 날의 새벽이었다. 장모가 찾아와 피도 토하지 않고 생기가 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난중(亂中)에 신 어머니인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고향은 이미 무당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인천으로 피난해 왔다. 금화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향 사람들이 찾아왔다. 주로 가족들의 안위(安危)와 재회(再會), 그리고 호구지책(糊口之策) 등에 관해 점을 보러오는 사람들이었다.
8.15 해방과 6.25 동란을 거치면서 세상은 갑자기 변했다. 서구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고 전통 풍습은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이 땅의 믿음의 주인이었던 무속은 하루 아침에 미신(迷信)이라는 탈바가지를 쓰고, 세인(世人)들의 이상한 눈초리와 함께 경찰의 체포와 구금이라는 천형(天刑)을 받아야 했다. 수 없이 경찰에 불려갔다. 다시는 굿을 하지 않겠다는 시말서를 수없이 썼다. 그러나 어찌하랴. 병들고 서럽고 불행한 사람들이 찾아와 굿을 해달라는 것을 어떻게 해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행패도 많이 당하고, 조롱도 많이 당했다. 어떤 때는 굿판에 양아치들이 떼를 지어 찾아와 돈을 내라며 제사 상을 뒤엎고 장구를 찢었다. 어떤 산 기도장에서는 예수교 교인들이 떼거리로 나타나 굿판을 둘러쌓고 찬송가를 부르며 그녀를 '마귀'라며 손가락질했다.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전국에서 벌어진 후에는 무당들이 설 자리는 완전히 없어졌다.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조상 대대로 하던 굿을 왜 못하게 하는가 원망도 했으나 그녀는 끝내 그녀가 택함을 받은 '무(巫)의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햇볕이 없는 음지 생활이 몹시도 길게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열린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해도 사람들이 무어 좋은 민속이 없느냐고 했다. 섬에 다니며 만선(滿船)과 안전(安全)을 빌며 용왕제를 올리던 무가(巫歌)를 불러 주었더니, 그걸 '민속예술'이라는 단어로 포장하여 대회에 나갔다. 화려한 춤과 아름다운 무가가 담박에 상장을 가져 왔다. 광주 부산 제주 할 것 없이 대회가 열리는 곳마다 공로상 개인상 단체상 장려상 우수상, 상이란 상은 한 때 모조리 만수 김금화의 찾이였다. 신문 방송 티비에서 그녀의 모습이 자주 나타났다. 그리하여 어제까지 무당이라고 천대받던 김금화가 당당한 민속 예술인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때에 속리산에 있는 에밀레박물관의 조자용 선생의 소개로 한미수교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가해 달라는 미국 스미소니안 박물관장의 초청을 받았다. 전직 주미 대사 한 사람이 샤머니즘이라고 못가게 큰 훼방을 놓았으나 그들은 끝내 미국에 갔다. 현지에서 한국 대사관 직원들로부터 다 떨어진 의상 때문에 '이걸 입고 어떻게 미국 관중 앞에 서느냐'는 핀잔을 먹었다. 심지어 그들은 숙소에서 공연장으로 타고 갈 차를 보내 준다고 약속해 놓고, 고의적으로 차를 보내지 않아 공연 자체가 무산될 뻔한 일이 생겼다. 서둘러 다른 차를 타고 갔다.
"신사 숙녀 여러분! 공연 무대에서 카페트를 걷은 것은 카페트를 깐채로 공연할 수 없기 때문이지, 공연이 끝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한국의 사마니즘 대표가 여러분을 위하여 어렵게 멀리에서 여기에 왔습니다. 여러분이 모시고 있는 미국의 샤머니즘과 한국의 샤머니즘이 합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위한 굿판이 벌어지고, 굿판이 끝난 다음에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고사떡을 나누어 드립니다."
김금화 일행이 무대에 올랐다. 공연장은 벌써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가 텅 비어 있었다. 요란하게 두드려대어 숨막히게 빨라지는 장단 소리에 맞추어 그녀가 작두에 올랐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령님의 힘으로 엄청난 동작의 작두춤을 추고 내려왔다. 어느 새 가던 발길을 다시 돌려 들어왔는지 공연장에 가득찬 관중들은 기립 박수를 첬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이어서 녹스빌 워싱턴 뉴저지 등 긴 여정의 공연이 있었고, 그 뒤에는 매 년 독일 호주 등의 초청이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당, 특히 만수 무당 김금화에 대한 국내외의 인식을 날로 높아갔다. 서울대 음대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미국 UCLA에서 세계 무속을 전공하던 채희아가 귀국하여 그녀로부터 내림굿을 받는 장면이 KBS-TV 특집 프로그램으로 방영되면서 무속에 대한 인식은 더욱 새로워졌다. 어제까지 천대받던 만수 무당 김금화는 드디어 무속 춤을 가장 잘 추는 '무형문화재 제82호'가 되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하여 샤마니즘은 존재하고, 샤마니스트들과 어울려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섬짓한 일들은 한 두 가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일반 고사(告祀)에서는 돼지 머리가 통속적으로 쓰이고, 굿판에서는 금방 잡은 통돼지가 주로 받쳐진다. 큰 굿판이라면 소를 통채로 잡아 신에게 받친다. 그리고 고사나 굿판에서 사용된 고기와 떡, 과일 같은 제물(祭物)들은 재수가 있다하여 서로 조금씩 나누어 먹는 풍속이 있다. 이는 캐도릭에서 미사 때에 과자를 조금씩 나누어 먹는 것과 비슷한 종교 의식의 하나이다. 김금화 여사도 미국에서 굿판을 벌인 후에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면, 그곳 사람들은 우리나라처럼 많은 양을 바라지 않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고자 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신의 제물은 욕심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대상이다.
옛날에는 산짐승 산인간을 통채로 신에게 받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봉사 애비를 둔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 3백 석을 받고 황해도 장산곶마루 앞 바다 인당수에 통채로 제물이 되었다. 대서양을 주름잡던 바이킹들은 산 처녀를 제물로 배에 싣고 망망 대해에 떠내려 보내는 의식(儀式)이 있었고, 남태평양 타히티 같은 곳에서는 산 총각의 사지와 몸둥이를 나무토막에 묶어 신전(神殿)에 받치는 풍속도 있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굿판에는 만수대탁굿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살아계신 부모님의 천수를 기원하고, 돌아 가신 뒤에는 극락(極樂) 천도를 기원하며 산수왕을 가르고 산넋을 드리는 굿이다. 자손 우환 질병 평안 사고 자살 원한 원귀(寃鬼) 액운 부귀 강령 소망 공포 위안 등도 이 굿을 통하여 푼다. 대개는 닷새에 걸쳐 의식이 베풀어지고 본굿은 사흘간에 걸쳐 펼져지는 영실굿이다. 제물은 일반적인 한 가지 타살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 돼지 닭과 같은 세 종류의 짐승를 타살하여 받쳐지고, 이를 3타살이라 한다.
김금화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모시는 '신령의 딸'로 만신 외길 50년을 기념하여 무속 예술의 진수인 만수대탁굿을 1997년 오월 파주 기장사에서 베풀었다. 김금화는 내림굿을 받은 만신이지만 일평생을 통하여 무당으로서 기예를 갈고 닦는데 온힘을 기우려 왔다. 그래서 그녀의 크고 작은 굿판에서는 다른 굿판에서 보기 힘든 '의식 집행 절차'와 그 '절차에 따른 무예(巫藝)'가 극치를 이루어 숨을 죽이게 하기도 하고 환희를 동반하기도 하며 슬픔을 이끌어 내기도 하는 '극적인 위엄(威嚴)을 동반'하는 신화(神話)와 같은 '금화(金花) 특유의 굿'이라는 의식이 진행된다.
참고로 그 때 펼쳐진 만수대탁굿의 순서를 보면 ... 산청올림으로 시작하여 일월맞이-석함칠성-공중칠성-상산부군맞이-초부정 초감흥굿-복잔내림-영정물림-제석굿-공주님거리-성주굿-소대감놀이-도산말명 방아찜굿-소어름굿/생략-사냥굿-소(蕭)로 받은 썩은 직성 부귀 할마이들 놀리기-성수거리-타살군옹굿-별상거리-일월맞이-사또놀이-도령돌기-별따기-산수왕가르기-먼산장군거리-대감놀이-걸립대감놀이-조상굿/영실굿-영실 상산 부군 맞이-영실 영정물림-영실 칠성 제석굿-영실 성주굿-영실 소대감놀이-영신 도산 말명 영실 방아찜 굿-영실 타살군옹굿-영실 도령돌기-영실 먼산 장군거리- 영실대감놀이-영실걸립대감놀이-영실 조상굿-영실 수왕천 가르기-작두거리-마당굿에 이어 공주전송굿이라는 44개 과정이 5일간에 걸쳐 펼쳐?다. .
물론 현대인들이 즐기는 하이라이트는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 무당춤을 추는 작두거리가 아닌가 한다. 이 행사에는 김금화의 제자 30 여 명이 보조 출연했다.
인간문화재 만신 무당 김금화의 생애와 이적(異蹟)에 관한 기록은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라는 단행본 속에 있다. 여사의 꿈은 무속(巫俗)이 무교(巫敎)로 승화하고, '무당을 위한, 무당에 의한, 무당의 단체'를 만드는 일이다.(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 여사 연락처:전화 02-966-5934 팩스 969-9723) .....(참조 : http://www.mudang.org/)
약력
중요무형문화재 제82-2호 보유자 김 금 화
굿의 종류와 내용
천신(薦神)굿 : 새로 추수한 곡식을 신령에게 바치며 집안의 평온을 기원하는 굿으로 평민 들의 경우엔 재수굿이라 부른다.
한국의 무속의 역사
무속의 역사는 단순이 "점집" 이라는 의미를 벗어나 한민족의 저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등을 살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무속은 현재에 이르러 종교, 판소리등과 관련이 되며, 종교적인 형태, 즉 과거로부터 예지하는 스님들의 예지도 하나의 모속에서 전래되었다고 할수 있다. 현재의 무속은 ...... 무속에 대하여 지금도 접하는것은 어쩌면 일반인에게 두려움이 될지도 모른다.
삼한시대는 농경시대였다. 모든것이 농경으로 인하여 소비되고 보통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길흉의 예지 및 바램의 출발이었으며 고구려의 현재의 무당은 삼한시대에 이렇게 "나라굿" 을 하며 나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국가적인 모습을 형성하면서 원시적인 형태에서 중앙왕권의 집권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삼국시대의 "처용가"를 예로 들면 왕은 아니나 그와 밀접한 관계속에서 서민들과 이어지는 전설적인 형태를 띄기 시작하였음을 알수 있다. 왕의 권한을 인정하면서 그안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발전 즉, 복을 들이거나 물리치는 형태, 혹은 잡귀에 대한, 민심의 방향으로 흘렀다고 할수 있다.
태조가 고려를 세우면서 무속은 번성을 시작하였다. 신이라함보다는 산신등 지역적 특성이 삼국시대부터 반영되어, 전국적인 명산과 들 강, 주위에 급격히 퍼지기 시작하였으며, 나라를 위한 종교적인 성향을 뛰면서 행사와 의례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나라에 무속이 퍼지면서 무속은 궁안에서 행하여지기까지 하였다. 선관은 신선, 즉 하늘과 통하는 관리 라는 명칭의 하나이며 지금의 무녀라는 입장이 이에 속한다 할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처럼 무녀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기우제등이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궁밖애서는 많은 양민들이 위안을 삼고 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그 초기부터 유교정책의 이념이 강하게 지배를 받으면서 불과와 무당은 동시에 억압을 당하였다. 불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불교등은 산과 자연의 등지에서 일반 대중의 마음으로 스며들었고 마찬가지로 무속은 은밀하면서 간접적인 형태로 마을마을의 서낭당, 등으로 스며들었다. 계급의 하락은 그들을 신의제자라 한다 하더라도 천민에 속하도록 하는 국가의 그러한 성격은 요즘에도 이어져오고 있으며, 무속은 신내림, 즉 "느낌", "감"등으로 미래를 예측하였다면, 요즈음 철학,논리,통계 등의 학설로 발전된 역학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현재로서의 무속은 때론 나라와 혹은 세계의 흐름에서 소외되는 형상이 되지만 |
첫댓글 굿판 제대로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