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시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스페인은 가보고 싶은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는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이 마음을 끌지만, 그러나 더욱 내 마음을 기울게 하는 것은 거리에서의 투우 축제입니다. 경기장에서 투우사들이 투우의 등에 칼을 꽂는 것은 동물 학대 논란도 있거니와 개인적으로 인간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위의 사진처럼 황소를 거리에 풀어놓고 골목길의 사람들이 그것을 피해 도망가는 놀이(?)는 아무래도 스릴 만점이라 생각합니다. 놀라운 것은 인간들이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이 위험한 놀이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얼마나 생기가 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묘한 것이 인간의 감정입니다. 인간의 내면 안에 새디스트(sadist 가학성애자)가 있는가 하면, 마조키스트(masochist 피가학성애자)가 함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폭력성을 증오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을 즐깁니다. 권투나 격투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스페인의 투우 역시 경기장에서 잔인하게 황소를 죽이는가 하면, 또 황소를 거리에 풀어 놓고 그것으로부터 떠받치거나 밟히지 않으려고 도망다니며 그래도 즐겁다고 낄낄 거리는 모습들이 그 양면성입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럴까요? 인간 내면의 양면성, 양가감정(兩價感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발전도 하고 또 퇴보도 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로부터 도망쳐 나오기 원하면서도 또 자신 스스로 다시 그 고통의 현장을 찾아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원하면서도 안일한 가운데 그 평범성이 계속적으로 유지되면 또 답답하고 지루해 못 견뎌 합니다. 그래서 일탈(逸脫)을 시도합니다. 평범을 내세우며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안일주의는 사람을 재미없게 만들고 무개성의 사람을 만들어 거기엔 도전도 없고 새로움도 없이 똑 같이 평이한 권태만이 있습니다.
발칙한 상상입니다만 에덴에서의 범죄가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에게 무엇하나 부족함 없이 주셨습니다.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먹을거리가 넘치도록 그리고 혼자 외로울 것 같아 여자를 붙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에덴에서 범죄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에 대한 그들의선택과 결과이지만, 아마 그들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에덴에 싫증을 낸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응당 지켜야 할 안정된 규범의 세계를 스스로 깨뜨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에덴에서의 인간의 범죄를 오히려 하나님께 떠넘기려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처럼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갖게 하셨고, 또 괜히(?) 선악과 만들어 놓아 인간으로 하여금 시험들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 모든 인간의 연약함과 그 결과를 충분히 예측하여 알고 있었음에도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의 덫에 걸리도록 방치하였다고 신을 향해 인간불행의 책임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평범한 것이 싫습니다. 남들이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기가 싫어 나 나름대로의 비범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들이야 어떻든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을 이끌어 가는 중에 결과적으로 그것이 남들과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드러나게 될 뿐입니다. 일반적인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나를 평가받는 것이 싫고 또 나 자신 그 정해진 고루한 틀 안에 나를 묶이기도 싫습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준에서 나를 멋대로 규정지으려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의 기준 틀 안에 갇히어 평가받는 것이 싫은 때문입니다. 남을 쉽게 평가하는 태도처럼 얼마나 교만하고 불손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이것처럼 기분 나쁜 일은 없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을 내 기준에서 함부로 평가하고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온 사람으로 묘사됩니다(창 47:9).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해 불행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험악한 세월만큼 그의 삶은 큰 스펙트럼 안에서 더 넓은 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도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볼 때 결코 평범치 않았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평범했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더 넓은 세계들을 깊이 있게 체험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구태의연한 관습의 틀과 고리타분한 옛적 사고의 범주 안에서는 계속 급변하고 있는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이제 무조건 내 말에 따르라고 하는 순응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검토나 검증 없이 맹목적으로 윗 세대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자신 스스로 충분히 두들겨 본 후에야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깝고 진리에 이르는 타당성을 확증한 후에라야 순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기독교 역시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무조건 순응을 강요하기보다 다음 세대들이 새로운 가치로 도전할 수 있는, 충분히 도전할 만한 가치가 여겨져 목숨까지 걸 정도로 삶을 열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도전의 목표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 길만이 내가 살 길이고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진리와 생명의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에서 확증할 수 있는 '은총의 표적'(시 86:17)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