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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말 8박 9일간의 일정으로 베트남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1945년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을 맞이하는 가 싶었으나, 다시 30년에 걸쳐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 싸운 나라. 그 싸움에서 영토를 지켜낸 나라. 최근 10여 년 간 눈에 띄게 유연해 진 동남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 전 국민의 75%가 농촌에 살고 있지만 산업의 재편이 곧 이뤄질 것 같은 나라. 베트남은 이제 막 꿈틀거리며 변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리 가득 쏟아지는 오토바이들을 보며, 3모작이 가능해 황금빛과 초록빛이 함께 물결치는 농촌을 보며 나는 엉뚱하게도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똑같은 길을 걷지만은 말았으면, 저 오토바이들이 자동차로 바뀌어 전 국토를 매연으로 뒤덮지도 말았으면, 지금 중요하고 풍요로운 농촌이 신자유주의 물결에 황폐화 되지도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물론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베트남을 보며 베트남이 그 끈질긴 외침에 자기 자리를 꼿꼿이 지켜왔듯 산업화와 개발의 과정에서도 다른 면모를 보이길 바랐다. 또한 그건 개발과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우리가 잃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싶은 맘이기도 하다.
베트남을 다니며 두서없이 가진 생각들을 몇 차례에 걸쳐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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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노이 호아로 수용소 안에 있는 베트남 인민군 사진. ⓒ 김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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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 같은 일이지만 나는 베트남 중부 다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꾸앙남성 호이안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악몽에 시달렸다.
누군가가 나를 해치려 하는 식의 꿈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픈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꿈이었다. 처음 등장한 사람은 아이와 함께 있는, 멍한 표정의 다친 듯한 엄마. 다른 사람들은 금세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그 엄마는 깊은 여운을 남겼다. 함께 슬퍼져 ‘아~’하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지 않으려고 도망쳐야 했다. 악몽에선 깨어났지만 다시 가위에 눌려 내 몸은 꼼짝을 못했다. 바로 내 옆에 통역을 하던 오아인이 누워 있었지만 그녀를 깨우지 못했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평소 가위에 눌리는 일이 거의 없는데…
왠지 모르겠지만 그녀 얼굴을 보는 게 더 두려웠다. 그녀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만큼 순간적인 두려움에 빠졌기 때문이다. 원인 모를 공포에 나는 그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잠을 청했다. 생각보다 빨리 잠에 빠져 두려웠던 시간이 길진 않았던 것 같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평소 가위에 눌리는 일도 거의 없는 나인데…. 짚이는 건 있었다. 우리 일행 중 몇 명은 후에를 지나 다낭으로 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다낭과 꾸앙남성이 있는 중부 베트남은 베트남전쟁 당시 격전지였고 다른 지역이 한국인에 대해 호의적인 데 반해 이 곳엔 아직 한국인을 싫어하는 감정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그렇다고 다낭에서 내게, 혹은 누구에게라도 그런 감정을 나타내는 이를 본 건 아니었다.
긴장했던 것 같다. 하긴, 베트남은 내가 올 때부터 마음 편한 나라가 아니었다. 관광, 혹은 휴양 만을 생각하게 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더구나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명분 없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 그중 일부 부대원이 잔인하게 민간인 학살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던 터라 맘이 편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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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란 인간이 얼마나 야만적일 수 있음을 겨루는 장이기라도 한 걸까. 베트남은 너무나 많은 전쟁을 치뤄왔다. 목이 잘린 포로들의 사진. 호아로 수용소에서. ⓒ 김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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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베트남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혹시 내가 묵었던 숙소가 예전에 뭐하던 건물이었냐고. 전쟁 때 미군 본부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역사속 일로만 알고 있는 그 일들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지금부터 거슬러 올라가자면 겨우 한 세대 정도.
우리 일행은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전쟁 때 신문을 만들었다거나 게릴라였다거나 하는 식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다.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는 역사들. 나는 바로 그런 장소와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 바로 한 세대 앞에서 총을 겨누고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관계들을.
"우리는 어제의 창은 닫고 이제 내일의 창을 열고 있습니다"
베트남을 다녀오는 많은 한국인들은 베트남인들이 한국인에 대해 오히려 호의적인 데 놀라곤 한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미국에서조차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일컬어 지는 바로 그 전쟁, 자신들의 민족주의를 흔들며 참전했고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는 많은 한국인들은 바로 이 점이 의아해서 묻는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을 어떻게 생각 하냐고. 한국에 대한 감정이 어떠냐고. 그러나 수교 후 베트남에서는 입장을 정리한 것 같다. 한결같이 돌아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창이 있지요. 과거의 창과 미래의 창. 우리는 어제의 창은 닫고 이제 내일의 창을 열고 있습니다.”
기자들을 만나고 자치성 지도자를 만나도 대답은 한결같았다. 오히려 한국기자들과 불필요한 언쟁이라도 생길까봐 ‘과거의 일’에 대해서 세세한 언급을 피한다.
이런 베트남인들의 태도를 두고 경제적 발전을 위한 실용주의라고 평가하지만 그것만으로 답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아무리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해도 전 국민이 약속이나 한 듯 그렇게 말하고 심지어 오히려 한국인을 좋아하기까지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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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노이 시내에 있는 호아로 수용소. 프랑스가 만든 곳이다. ⓒ 김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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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참전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입장은 대체로 이렇다. “한국이라고 오고 싶어서 왔겠느냐, 다 미국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겠나.”
한 나라에 대한 입장 정리가 어찌 그리도 확실한가 싶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의 그런 입장과 태도와 나의 불편함은 그 출발이 달랐다. 나도 모르는, 원죄 같은, 역사적 부채의식. 베트남을 다니는 내내 거기에서 자유롭긴 힘들었다.
베트남은 ‘쿨’한 것일까? 과거 베트남을 지배했던 중국, 프랑스, 미국, 일본과도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베트남이 과거의 역사를 다 잊었다고 생각할 순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베트남은 과거를 모두,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다만 기억은 기억일 뿐이고 현재는 현재일 뿐이며 지금 베트남과 베트남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더 발전해야 할 ‘미래’인 것 같다.
얼마나 퍼부었는지 최근에도 땅을 파면 미군 폐기물이 나온다
하노이에는 과거 프랑스가 지은 감옥 호아로 수용소가 있다.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 전쟁 때는 베트남 인민군들이 수용되던 곳.
과거 인민군들이 어떻게 수용되고 어떤 처우를 받았는지 당시를 그때보다 적은 규모로지만 과거를 생생히‘고발’하고 ‘기억’하고 있다.
죄수들을 감방에 넣는 것도 모자라 발에 족쇄까지 채웠던 사실, 모자 수용소를 만들어 모자를 함께 넣어 넣고는 밥은 한 사람 분만 줬던 사실, 모자 수용소의 변기속 오물은 한 달만에 치웠던 사실 등이 속속들이 기록돼 있다.
나의 베트남 여정에는 없었지만 베트남 남북이 갈라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벤하이 강 을 따라 있었던 있었던 군사 경계선. 이 군사경계선을 따라 폭 10km, 길이 60km 에 이르는 비무장지대(DMZ)가 있다.
이 곳은 하루 코스의 ‘투어’일정으로 정해져 있다. 여기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미 해병대의 케산 기지 터를 볼 수 있다. 이 케산 기지 터에서는 무기를 전시한단다. 미국이 얼마나 퍼부었는지 최근에도 땅을 파면 미군 폐기물이 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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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노이에서 하롱베이 가던 길옆 마을에 있는 추모 묘지. 전쟁 중 희생자들을 기리는 곳으로 마을 마다 있다고 한다. ⓒ 김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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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을 꼼짝 못하게 만든 꾸찌 터널. 미국이 2차 대전 때보다 더 많은 폭탄을 쏟아 붓고 고엽제를 대량 살포하면서 베트남을 침공할 때도 끄덕 않고 견디게 해 준 데 큰 역할을 한 이곳 역시 보존돼 지금은 베트남을 찾는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좁은 땅굴 입구는 한 명씩 계단을 내려가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지나갈 정도인데 그것조차 관광객을 위해 넓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의 많은 묘지들은 길 가, 또는 논 가에 있다. 묘지를 두는 곳에 대한 기준이 우리네와는 다른 듯 보였다. 그런데 그냥 마을 사람들의 묘지 외에 가는 곳마다 다른 형태의 묘지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건 말하자면 오랜, 여러 나라와의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을 기리는 추모 묘지였다.
얼마나 많고 오랜 전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던 지 그렇게 마을마다 추모 묘지를 조성해야 했다.
'흉포한 남쥬띤 군인들은 수천 명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인에게 충격적인 건, 바로 ‘증오비’의 존재다. 베트남 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중부 지역에는 마을마다 바로 이 ‘증오비’가 있다. 한국군들에 의한 희생에 치를 떨었던 주민들이 전쟁 때 만든 것들.
지난 2001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찬 둑 루옹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 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공식 사과한 바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증오비가 있던 마을에 학교를 건립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 같은 조치에 마음이 누그러져서인지,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아져서인지는 몰라도 증오비들 중 일부는 ‘위령비’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증오비가 남아 있다. 소설가 방현석씨는 <하노이에 별이 뜨다>에서 빈선 쭈을래 마을의 증오비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반뚱 전투에서 대패하고 한계를 절감한 미국은 용병인 남쥬띤(남한) 군인들을 들여왔다. 흉포한 남쥬띤 군인들은 수천 명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그뿐 아니다, 지방자치제가 발달한 베트남이 지방마다 자기 고장의 역사를 빈틈없이 기록해 두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는 누가 어디서 어떻게 왜 죽었으며, 누가 누구와 어디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증언과 증거들이 무서우리만큼 자세하게 채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결코 잊지 않았고, 또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나라들에 그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자료를 찾아봤다. 2000년 6월 1일자로 기밀 해제된 주한미군 사령부 감찰부의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보고서는 1968년과 1969년 사이에 일어난 3건의 사건에 대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을 제기했다.
이 자료에서 밝힌 민간인 학살은 바로 꾸앙남성에서 벌어졌다. 주로 여성과 어린이들이 많이 희생됐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그 악몽에서 나타난 사람들은, 내게 억울한 죽음을 알려주기 위해 찾아 온 이들이었을까. 매년 천도제를 여는 우리나라의 지리산이 떠올려졌다.
역사적인 부채의식을 지고 있기에, 한가로운 마음으로 다니기 힘든 나라. 그 베트남을 다녀오며 어쩔 수 없이 이라크를, 또 자이툰을 떠올렸다.
우리는 지금, 역사 앞에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베트남이 한국인을 과거의 일과 연계시켜 적대시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니 오히려 한류다 뭐다 하며 한국인에게 호의를 보인다고 해서 우리의 그런 역사적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 안의 과거청산 뿐 아니라 밖으로의 과거청산을 제대로 했는가. 아니, 청산할 과거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몇 년 전 한겨레 신문사에서 베트남 전쟁 때의 한국 책임을 물으며 베트남 현지에 평화 공원을 조성하기도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다소 높아졌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공식조사나 배상은 없다. 진행되지도 않고 있다. 전쟁을 일으킨 미국조차 국내에서 ‘명분 없는 전쟁’ 이란 혹독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던 바로 그 전쟁.
온 국민이 전쟁 때처럼 단결해 ‘미래’로 가고 있는, 그래서 ‘과거’에 머물 틈도 없어 보이는 베트남을 보며,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다시 짚어가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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