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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참전 의승의 활동과 그 공적( 전> 중앙승가대 김상영교수) - 53선지식 구법여행 시즌2–서른두 번째 법회 봉행
삼보에 귀의 하옵고_()_
■.법회개요
⊛,주 제 : 임진왜란 참전 의승의 활동과 그 공적
⊛,일 시 : 불기2567년12월22일(금)저녁7시30분 ~ 9시
⊛,장 소 :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대웅전
⊛,강 사 : 전> 중앙승가대 김상영 교수
⊛,사 회 : 총무부장 도운 민영환
⊛,참석자: 총동문회 회장 보명화 도영숙 외 125명 참석
⊛.집 전 : 신행부장 법담 손영길
■.법회식순
공지사항 – 개회사 – 삼귀의 – 우리말 반야심경 – 음성공양(님을 따라 천리 길 /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 - 인사말
씀(총동문회장 보명화 도영숙님) – 법문(강연 김상영 교수) – 사홍서원 – 폐회사 – 기념사진 촬영
(조계사 불교대학총동문회 53선지수 합창단 )
□. 노래 : 님을 따라 천리길 /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 지휘 : 경희대학교 박경태 교수
□. 반주 : 삼조 정진경 자문위원
□. 포교부장 운정 나현숙님 외 단원20명 일동
□. 촬영 : 관음수 최명수 운영위원
법회 스케치 |
조계사 불교대학총동문회(회장 보명화 도영숙)는 불기 2567(2023)년 12월22일(금) 동짓날을 맞아 총동문회 신도들과 팥죽운력
과 함께 팥죽공양으로 전법포교와 자비나눔을 실천하했습니다. 그리고 영화15도 강추위에도 저녁 7시에는 조계사 대웅전에서
53선지식구법여행 서른두 번째 법회를 봉행했습니다.
도운 민영환 총무부장의 사회로 공지사항 전달, 법담 손영길 신행부장의 집전으로 삼귀의와 우리말반야심경, 53선지수합창단의
음성공양, 제10대 회장 인사말, 김상영교수의 강의, 사홍서원을 끝으로 법회를 여법하게 회향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총동문회 회장 보명화 도영숙께서는 “ 최근 3개월만 하더라도 10월 문화대축전과 11월 찾아가는 53선지식 법회 겸
해외 성지순례를 대만으로 다녀왔으며, 12월 8일에는 송년 법회를 만발 공양간에서 진행하였어요. 각 행사마다 원만 회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라며 “ 이 자리를 빌려 그동안 애써주신 집행부 임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리고 조계사와 조
계사, 불교대학 총동문회의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이라며 “행복하고 건강하게 겨울 잘 나시길 바란다.” 고 인사말을 주셨
습니다.
강연은 전) 중앙승가대학 김상영교수를 초청 주제인 “임진왜란 참전 의승의 활동과 그 공적” 대해 40분간 말씀하신 내용은 “ 임진
왜란 시기 활동한 의승들은 우리 역사의 의인으로써” 의승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 호국의승의 날 ” 제정은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한다며 함께 동참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모두가 함께 동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날 참석자는 보명화 도영숙 회장님을 비롯한 명심등 주숙자 부회장, 길상화 윤옥자 부회장, 옥천 김용안 부회장, 진각화 전연숙
부회장, 법선심 우양숙 부회장, 도운 민영환 총무부장, 월명화 백경선 총무수석, 일향지 김영인 재무부장, 월광지 김은수 재무수
석, 대경 박수정 기획부장, 성월 정승길교육부장, 법연심 안영란 봉사부장, 여여 이양우 봉사수석, 법담 손영길 신행부장,운정나현
숙 포교부장, 법왕자 오미균 포교수석, 자련 임경애 문화부장, 진공 이호진 홍보부장님외 각 부서 운영위원 임원들께서 법석 자리
를 정리정돈 해 주셨습니다.
특히 고문.자문단에서는 성해 장경태 고문(신도회 교육본부 부회장)을 비롯한 호연 겸경숙 고문(신도회부회장겸 장학회 이사장),
대덕심 김영숙 고문, 경담 이원굉 자문위원장,영윤 김용규자문, 삼조정진경자문, 정진행 양순덕자문, 현진화 김정미자문, 평전 하
용수자문, 법연 이동엽자문, 도안심 이순화자문, 환희지 권종순자문, 월광지 임연선 자문, 보현행 안영주 감사, 정진행 윤점애 감
사, 문수행 정은희자문, 정명화 허복미 자문님들께서 자리에 함께하셨습니다.
(글 정리:법연 이동엽 자문위원 )
공 지 사 항 |
■.천수다라니 기도법회
➪.일 시: 2024년 1월05일 오후7시
⊛,장소 : 극락전
⊛.문의 : 신행부장 법담 손영길010-7788-3445
■.조계사 불교대학총동문회 “신묘장구 대다라니” 기도 합송 / 목탁습의계획
⊛기간 : 불기2568(2024) 1차 :(1월~4월), 2차: (5월~8월) 3차:( 9월~10월)
⊛장소 : 교육문화센터 지하 원심회법당
⊛시간 : 매주(토) 오후3시30분 ~ 5시30분(120분)
⊛다라니독송(90분), 목탁습의(30분),목탁습의 교재: 우리말 불교의례(어산장 인묵스님)
⊛경전독송: 천수경,금강경(한문,우리말)-반야심경(우리말 장음.단음)-천수대다라니
화엄경약찬게,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등
⊛목탁습의 : 목탁집전의식 –독송의식-법회의식-예불의식- 불공의식
⊛대상 : 불교대학 총동문회원 누구나
⊛준비물 : 목탁 4.2 (13센치 이상 ) 목탁방석, 주머니
⊛문의 : 신행부장 법담 손영길 010-7788-3445/교육부장 성월 정승길 010-3565-2386
■.총동문회 합창단 모집 및 연습
조계사 불교대학 동문이면 누구나53선지수 합창단 가입하여 음성공양 할 수 있습니다.
➪.일 시:매월1,2,3째 주(토) 12시30분~2시4째 주(금)오후5~6시30분
➪.장 소:안심당 지하 합창단실
⊛.문 의:포교부장 운정 나현숙,010-9491-9466
■.교육법회
➪.휴 법
■.2024년 동문회 임원 모집
⊛,자격 : 2024년 졸업 예정자 및 졸업자
(신청자는 동문회 사무실에 비치)
■. 53선지식 구법여행 시즌2 서른세 번째 법회
⊛,일자 : 2024년1월26일 저녁7시
⊛,장소 : 조계사 대웅전
⊛,법사 : 삼조스님 (불교신문 사장)
⊛,주제 : 새해를 108배와 함께 ~
■.동문회비 및53선지식 구법여행 법회 보시구좌 안내
➪.동문회비:연회비-5만원,평생회비-50만원
⊛.하나은행111-054579-03005.예금주 대한불교조계종조계사
⊛.문의 재무부장 일향지 김영인010-3209-7400
■.장학기금 후원(조계사불교대학총동문회 장학회)
➪.조계사불교대학 동문이면 누구나 월1천 원 이상의 장학기금 후원가능
➪.장학회 정회원 조건:출자금10만원 월1천 원 이상 후원하시는 분
⊛.후원계좌:신한은행100-030-532200 (조계종조계사 불대총동문회)
⊛.문의:장학회 총무 보현행 안영주,010-6272-2895
■.불교신문 구독신청
➪. 53선지식 구법여행을 함께 진행하고 있는《불교신문》구독 신청바랍니다.
⊛.문 의:자문위원 법연 이동엽010-6324-3200
■.9월53선지식 구법여행 시즌2-법사비 보시
⊛.10월 서른두 번째 법사비는 상락행 김연희 자문위원님께서 보시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소망등 접수 안내
➪.불기 2568(2024)년 갑진년 새해 소망등 (1년등) 연등 접수 받습니다.
⊛연등 게시 기간 : 2023년 12월 ~ 2024년 11월
⊛새해 소망등 모연금 : 200,000원
⊛,접수 문의:봉사부장 법연심 안영란 010-9410-6369
■.총동문회 행복 나눔터
➪.참기름(12,000원)들기름(13,000원)볶음참께(5,000원)강황가루500g(1포30,000원)홍삼엑 기스( 100g 3병150,000원)를 판
매,-,국민은행: 837601-04-310207(예금주 도영숙)
⊛.문의:부회장 명심등 주숙자010-8842-6742/길상화 윤옥자010-9131-5435
인 사 말 |
감사합니다. 먼저 바쁘신 일정 중에서도 강의를 해 주시는 김상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연일 매서운 한파 속에서 법회에 동참해 주신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총동문회는 2023년을 쉼 없이 그야말로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지내온 듯 합니다.
최근 3개월만 하더라도 10월 문화대축전과 11월 찾아가는 53선지식 법회 겸 해외 성지순례를 대만으로 다녀왔으며, 12월 8일에
는 송년 법회를 만발 공양간에서 진행하였습니다.
각 행사마다 원만 회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2023년에 총동문회 공식 마지막 법회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동안 애써주신 집행부 임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늘 말씀드렸듯이 조계사와 조계사, 불교대학 총동문회의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이 보통 인연이 아닌 인연을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느냐 부처님의 가피로 만드느냐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하느냐
에 있을 듯 합니다. 내년 총동문회 10대 집행부 제2기에서는 동문회를 생각하면 편안할 수 있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더 많은 동문
님들의 소통과 화합을 위하여 노력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동참해 감사드리며 새해에도 여러분들과 가정에 그리고 총동문회와
조계사와 불교계에 부처님의 가피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불기 2567년 12월22일
( 조계사불교대학총동문회 회장 보명화 도영숙 합장 )
법 문 - 임진왜란 참전 의승의 활동과 그 공적( 김상영 교수) |
약 력 :⊛ 동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 한국학 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
⊛ 동국대 대학원에서 " 고려시대 선문연구" 박사학위 취득
⊛ 전)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 재직함
⊛ 전통사찰총서 (1~21권) 를 비롯한 저서
⊛ 한국불교사와 관련 다수 논문 발표
임진왜란 참전 의승의 활동과 그 공적 - ( 전문, 김상영 교수님의 논문 )
P1쪽
1.임진왜란 시기 승려 군사집단의 참전 결행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전란 극복에 앞장섰던 세 부류의 군대 가운데 관군과 의병
은 의무적이면서도 당위적 성격이 짙은 군대에 속한다. 반면, 의승(義僧) 또는 의승군으로 칭해지는 승려 군사집단은 철저하게 자
발적 참여하에 이루어 진 군대라는 특성을 지닌다. 특히 이들 의승 활동은 연산군-중종대라는 조선왕조 최악의 불교 탄압기를 거
친 이후 피지배계층에 의해 전개된 것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 하겠다.
2.조선의 의승군은 선조의 환궁, 평양성 탈환, 청주성 수복, 행주대첩, 노원평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이들뿐만 아니
라 의승군은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전투에서 도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들의 활약은 임진왜란시 전체에서도 상당
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전쟁 당시는 물론이고 전쟁이 종료된 이후에도 조선의 의승군은 철저하게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집
단에 불과했다.
3.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는 최근 10여 년 동안 ‘호국불교’와 관련한 의미 있는 연구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또한 2000
년대 이후 학계의 의승 관련 연구도 급증하는 추세인데,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이제 의승 관련 연구는 본궤도에 올랐다는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다. 하지만 적지 않은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호국불교’나 의승 관련 연구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아직도 산
재해 있다. 특히 ‘호국불교’의 범주와 개념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는 상당한 격차를 보이는 현실이다. 외침에 대응하기 위하여 고
려의 승단은 대장경을 조성하였으며, 조선의 승가는 직접적인 참전을 결행하였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고려대장경 조성불사
와 조선 의승군의 활동은 너무나 다른 성격을 지닌다. 우리는 언제까지 ‘호국불교’라는 이름 아래 이들을 한데 묶어 이해해야 하는
가? 조선시대 의승 관련 연구에서 항상 전제될 필요가 있는 문제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4.청허 휴정을 비롯하여 송운 유정, 뇌묵 처영, 기허 영규 등으로 대표되는 의승장과 이들을 따랐던 수많은 의승들은 단지 승려 신
분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평가와 예우를 받지 못하였다. 동일한 전투에서 함께 전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헌(趙憲)과 700
의병, 그리고 영규와 800의승에게 가해졌던 예우와 포상은 너무도 달랐다. 조선중기 의승의 활동과 업적을 재조명 해야 하는 이
유는 이 같은 측면에서 더욱 그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의병장, 또는 의승장들이 남긴 업적을 기리는 추념사업 가운데 사우(祠宇)의 건립과 제향 봉행은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상징적 의
미를 지니는 사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밀양 표충사(1738년), 해남 표충사(1788년), 묘향산 수충사(1794년)등의 공식 사액사우
(賜額祠宇)가 건립된 것은 임란 시기로부터 150~200여 년이나 흐른 뒤였다. 이들 사우의 건립마저도 일부 승려의 헌신적 노력속
에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사우 건립 이후 불교계는 사우의 유지와 제향 봉행을 위해 또 다른 고통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P2쪽
1.임진왜란 이후 후손들의 관심은 그동안 지나치게 의승장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물론 청허 휴정(서산대사), 송운 유정(사명대
사), 뇌묵 처영, 기허 영규 등의 활동과 그들이 남긴 업적은 중요하다. 조선 왕실 역시 그들의 업적을 중시하고, 이들 네 명의 의승
장을 추모할 수 있는 사당 건립을 승인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 네 분의 의승장 이외에 참전했던 수많은 사상자들은 아직까지 그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법명이 알려진 경우는 (傳名義僧)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한 현실이다. 절
대 다수의 호국의승은 무명(無名)이 아니라 망명(亡名) 의승이다. 우리는 단 한 분의 망명 의승이라도 그 법명을 찾아내기 위한 노
력을 해야 하며, 찾아진 법명은 위패에 새겨 봉안해야 한다. 그래야만 호국의승은 무주고혼(無主孤魂) 이나 원혼(寃魂)이 아니라
우리 역사를 지킨 자랑스러운 위인(偉人)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2.기허 영규는 임진왜란 발발 이후 최초로 군사를 일으킨 승장이다. 공주목사 허욱(許頊)과의 만남 이후 본격적으로 승군 활동을
시작한 영규는 청주성 탈환의 선봉이 되었다. 영규와 800 의승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금산 전투 역시 <선조수정실록>에
상세히 전한다(<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1592) 8월 1일 무자). 이 기록을 통해 조헌이 권율과 충청 감사 허욱의 만류를 뿌
리치고 전투에 나섰다는 사실, 그리고 영규 역시 ‘반드시 관군이 뒤에서 지원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만류하였으나 조헌이
이를 듣지 않고 전투를 감행하자 결국 ‘趙公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가담한 이휴 함께 전사하고 말았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군사들은 맨주먹으로 육박전을 벌였는데, 한 사람도 자리를 떠나는 자가 없이 모두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
으며, 영규도 전사하였다. 적의 무리는 죽은 자가 더 많아 시체를 운반하여 성으로 들어가면서 우는 소리가 연이어졌다”는 기록을
통해, 조헌과 영규의 군사는 금산 전투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3.뛰어난 전공에 비해 영규와 관계된 기록은 지극히 소략하다. 특히 전쟁 초기의 입적으로 인해 그에 관계된 불교계 내부 기록이
부실하다는 점은 ‘사문(沙門) 영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준다. 휴정이나 유전, 처영은 동시대 관료나 문인들과 폭넓은 교
류를 하고 있었다. 그의 사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런데 19세기의 고승 응운 공여(應雲 空如, 1794-?)는
영규를 ‘진승(眞僧)’이라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騎虛禪師) 그는 영규가 나라를위해 목숨을 던져 충성을 다하였으며, ‘참다운 승
려’로서 위의를 갖추고 있던 것으로 보았다.
입적 후 200연 년이 지난 시점에, 영규는 단지 의승장으로서가 아니라 후대의 승려들에게 진승, 즉 참다운 승려의 위의를 갖춘 인
물로도 널리 존승되고 있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P3쪽
1.영규를 포함한 일부 의승의 참전 이후 본격적인 의승군의 봉기는 청허 휴정(1520~1604)과 선조 임금의 만남에서 비롯하였다.
실록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行朝에서 묘향산의 옛 승관 휴정을 불러 그로 하여금 승려들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도록 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편양 언기가 지은 휴정의 <행장>과 이정귀가 지은 <청허당휴정대사비>(1632년 立碑)에는 보다 구체적인 내용
이 실려 있기도 하다. 이들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에서의 의승군 봉기는 왕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승단의 자발적인 결정과 참여로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2.휴정은 전국의 승도에게 참전을 독려하는 격분을 돌렸다. 실제로 각종 자료에는 휴정의 독려로 전국에서 의승군이 봉기하였으
며, 특히 유정은 관동지역에서 700명, 처영은 호남지역에서 1,000여 명의 의승군을 각각 조직하여 참전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
다. 처영은 호남지역의 승려 1,000여 명을 결속한 이후 권율의 휘하로 들어갔다. <난중잡록>에는 “전라감사 권율이 군사 2만여 명
을 거느리고 근왕하려고 북쪽으로 달려가는데, 각 고을 수령과 승장 처영 등이 따랐다”는 내용이 있으며. <재조번방지(再造籓邦
志)>에는 <휴정의 높은 제자 처영은 지리산에서 일어나 권율의 막하에 들어갔고, 유정은 금강산에서 일어났다”는 내용이 있기도
하다.
3.휴정의 참전 결행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일부 승려들도 있었다. 그들은 참전을 ‘월계(越戒)’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으며, 법당
에 남아 승려 본분사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휴정 역시 참전을 결행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내용의 갈등, 즉 불
교의 기본 계율과 충돌하는 지점에 대한 내적 갈등을 겪었던 것은 아닌지 검토해 볼 필요를 느낀다. 휴정의 시 가운데 ‘중생을 위
해서 왔다가 중생을 위해서 가니(來爲衆生來 去爲衆生去)’라는 시구가 주목된다. ‘위중생’은 휴정의 사문상이 가장 함축적으로 표
현된 시구이며, 그가 지닌 자비심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휴정의 승군 활동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볼
필요가 있다. 승군 활동과 ‘월계’ 사이에 놓여 있는 괴리감은 휴정 자신도 충분히 고민했을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정은
선뜻 참전을 독려하는 결단을 감행하였다. 휴정의 참전 결행은 그의 사문상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4.청허 휴정은 조선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자, 우리 역사를 크게 빛낸 위인이다. 그는 조선불교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태어났으며, 임진왜란으로 조선사회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삶의 말년을 보냈다. 휴정은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그의
존호처럼, 16세기 불교계와 조선사회를 널리 구제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정조대왕은 이러한 휴정의 삶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휴정의 삶을 찬탄하면서 “(대사는) 종풍을 발현하고, 국난을 널리 구제하였으며, 의병을 일으켜 근왕의 원훈(元勳)이
되었다. “(“ 顯發宗風 弘濟國難 倡義旅爲勤王元”, <正宗大王御製西山大師畵像堂銘[幷序]>,<청허당집> 보유)고 하였다. 정조 임금
이 찬탄하였듯이, 휴정은 크게 세 가지의 업적을 남겼다. 첫째, 침체에 빠져있던 16세기 조선불교의 종풍을 발현시킨 업적, 둘째,
전쟁으로 도탄에 빠져있던 국가를 널리 구제한 업적, 셋째,조선 왕실을 지켜낸 최고의 업적 등이다.
5.휴정의 상수 제자인 사명대사, 즉 송운 유정은 임진왜란 전란사에서 가장 큰 공적을 남긴 의승으로 평가된다. 그의 참전 계기와
전란 초기 의승 활동 등에 대해서는 이른바 <갑오상소> (1594)라는 자료에 상세하게 전한다. 이 상소문은 유정이 직접 지은 것이
어서 자료적 가치가 높으며, 특히 그의 참전 결행 의지를 살필 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어 주목된다. 유정은 왜란이 발생했을 때 금
강산에 주석하고 있었다. 유정은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이전 금강산에서 왜군과 두 차례나 맞닥뜨리는 일을 겪었는데, 유정 스스
로는 이 일을 ‘두 번이나 적중에 들어가서 적과 문답하였다’고 표현하였다. 이 일을 겪으면서 유정은 주변의 승려들을 ‘개유(開
諭)’하여 100->150->210명으로 의승 규모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평양성 탈환에 즈음해서는 의승도대장과 도총섭의 직책
을 맡으면서 의승을 통솔하였는데. 이때의 의승 규모는 무려 2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임란 시기의 의승 전체 규모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존재하지만 <갑오상소> 내용을 통해 적어도 유정이 통솔했던 의승 규모의 변화와 실태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
다.
P4쪽
1.유정은 평양성 전투에 이어 노원평 우이동 전투와 수락산 전투등에서도 전공을 세웠다
(1593. 3. 25~3. 27). 이들 전투 역시 대첩(大捷)이라는 표현이 수식될 정도로 한양 수복과 관련하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전투
였다. 이 승전 소식을 접한 조정은 유정에게 당상관의 직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이후 유정은 광주(廣州), 남원(南原), 의령(宜寧) 등
지에서의 활동이 확인되는데, 왜군과 교전하지 않을 때 유정과 승군은 보리를 파종하여 군량미를 준비하는가 하면 활과 화살 등
병기 제조와 화포의 교습에도 눈을 돌리고 있었다고 한다.
유정은 일본과의 강화교섭 과정에 참여하였으며, 전후에는 조정을 대표하여 일본에 사신으로파견되어 국교 재개와 포로 쇄환 문
제 등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수 개월 전 유정은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에서 유정은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형세가 싸워도 위태롭고 싸우지 않아도 위태로우니, 싸우지 않아 위태롭기보다는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움을
하여 성패를 결판 짓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선조실록> 권87, 선조 30년(1597) 4월13일 계유)고 하였다. 그는 또한 군량이 떨어
지기 전에 남하하여 적을 몰아치면서 한편으로는 수군으로 원병(援兵)의 길을 차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로로 덮쳐 곧바로 소
굴을 쳐부수자고 하였으며, 그렇게 된다면 자신도 의승을 이끌고 적극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유정의 경고는
적극 수용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조선은 다시 정유재란의 참극을 겪고 말았다(史臣의 ‘皮肉食者 寧無愧乎’라는 평).
2.유정의 입적 이후 허균은 <有明朝鮮 國慈通弘濟四멍溟松雲大師石藏碑銘幷序>를 지었다. 이 비문을 지으면서 허균은 유정에게
‘자통홍제(慈通弘濟)’라는 호를 지어준 연유를 별도로 밝히 기도 하였다. 또한 허균은 <사명당대사집> 서문에서 “스님의 도는 이
미 범인(凡人)을 뛰어넘어 여래의 경지에 들어갔습니다.”고 찬탄하기도 하였다. ‘자통홍제’라고 하는 호에서 ‘홍제’의 의미가 특별
히 주목된다. 유정의 의승군 활동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라는 생긱 때문이다.
3.뇌묵 처영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앞장섰던 대표적 의승장이다. 그는 청허 휴정, 송운 유정과 함께 해남 표중사와 묘향산 수
충사에 배향(配享)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지니고 있던 의승장으로서의 위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처영
은 또한 권율(權慄,1537~1599)과 함께 이른바 행주대첩으로 불리는 역사적 승전을 이루어냄으로써 한국전란사의 위인으로 칭송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그의 정확한 생몰연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처영의 행장 자료가 전하지 않아 단
정할 수는 없지만, 처영은 임진왜란 참전 이전에 이미 지역을 대표하는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만큼 당시 승단과 사회에서 각
별한 위상을 지니고 있던 고승이다. 이러한 사실은 ‘의승장 처영’을 이해아는데 있어 반드시 전제될 필요가 있는 사항이라 하겠다.
처영은 휴정이나 유정처럼, 이미 수행과 학문을 겸비한 상태에 서 임진왜란의 참전을 결행하였다. 처영의 의승 활동은 이 같은 점
을 충분히 고려할 때, 비로소 온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P5쪽
1.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였다. 당시 경성에는 적들이 연합하여 둔을 치고 있었으므로 그 기세가 등등하였
는데 권율은 명나라 군사와 연대하여 경성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머물러 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衿川)의 광교신(光敎山)에 주둔케 하고, 권율 자신은 정병(精兵) 4천 명을 뽑아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
위에 진을 치고는 액(柵)을 설치하여 방비를 하였다. 적은 외로운 군사가 깊이 들어 간 것을 보고 수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새벽
에 책을 포위하였다. 그들이 울려대는 징소리, 북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온 책 안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권율은 거듭 영을 내려
진정시켰다. 적은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진격해 왔는데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안팎 이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
다. 우리 군사가 점령한 지역은 높고 험준한데다가 뒤로는 강벽에 막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각오를 하였다. 적은 올
려다보고 공격하는 처지가 되어 탄환도 자연 맞지 않는 데 반해 호남의 씩씩한 군사들은 모두 활을 잘 쏘아 쏘는 대로 적중시켰다.
화살을 비오듯 퍼부을 때마다 적의 기세가 문득 꺾이곤 하였다. 왜적이 각자 짚단을 가지고 와 책에 불을 놓아 태우자 책 안에서는
물을 길어 불을 껐다. 적이 서북 쪽의 책한 간을 허물자 지키고 있던 승군이 조금 물러나니 권율이 직접 칼을 빼어 물러난 자 몇 사
람을 베고, 다시 책을 세워 방어하였다(<선조수정실록> 권27 26년 계사(1593) 2월 1일 병술)
2.처영의 의승군은 가장 경사가 완만한 지역인 산성의 서북면을 담당하였는데, 경사가 원만한 곳은 곧 적의 공격이 가장 용이한
지점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접전 초기부터 이러한 곳의 방어를 담당하였다면, 의승군은 당시 전투에 참여한 병력 가운
데 가장 정예군으로 분류되었거나, 아니면 그야말로 무참한 희생을 전제로 하는 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 의승군은 관군
이 아니며, 정예군으로 분류될 만큼 조련이 잘된 군사도 아니었다. 저긔 공격이 가장 용이한 지점에, 그것도 접전의 최초 시점에
승군을 배치한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전술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율의 독전’은 행주대첩을 전하는 각종 자
룡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처영은 이 대첩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절충장군의 직책을 받았지만, 행
주대첩에서의 의승 역할과 그 공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처영은 송운 유정과 절친한 도반 관계를 유지하였다. 유정이 1610년 입적한 이후 유저의 문하인 혜구(惠球) 등은 스승의 글을
수집하여 문집을 발간하면서 처영에게 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처영은 발문에서 “나 역시 서산대사의 문하에 있었기에
스님과 함께 출입한 것이 여러 해가 된다. 그런데 금란(金蘭)이 먼저 가니 마치 공(蛩)이 궐(蟨)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비록 아
양곡(峨洋曲)이 있어도 그 누구를 위해 다시 노래하랴. 오호 통제라! 그 누기 슬퍼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이처럼 유정과 처영
은 나라를 구한 의승장으로서, 휴정의 법을 함께 이은 동문학도로서 진정한 의미의 도반 관게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789년(정조 13) 4월 27일, 해남 표충사에서는 사당 완공 이후 첫 번째 제향을 봉행하였다.
이후 매년 봄과 가을 표충사 제향은 계속되었는데, 이때의 춘추제향에서 읽혔던 <춘추시향축문(春秋時享祝文), 내용은 지금도 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축문에서 처영은 ‘우세존자(佑世尊者) 뇌묵당선사(雷默堂禪師)’라는 존호로 칭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휴
정의 ‘보제’, 유정의 ‘홍제, 그리고 처영의 ‘우세’는 모두 의승장들의 참전 결행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보아
야 한다. 임진왜란 시기 승가의 참전 결행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이처럼 의 승장들의 존호를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P6쪽
1.해남 표충사는 매우 어려운 과정을 겪은 이후 공식 사우로 지정될 수 있었다.이 일은 대둔사 계홍(戒洪)과 휴정의 7세 법손 천묵
(天默) 등의 승려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천묵 등은 ‘발이 부르트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녔으며, 글을 엮어 조정에도 여러 차
례 의송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대둔사 승려들은 무엇보다 밀양 표충사, 특히 스승을 제자의 자리에 모신 현실
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것은 존비의 차례를 잃은 것이고, 사리와 체면이 뒤바뀐 것이라는(尊卑失序 事面倒置) 지적이었다.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은 1788년 4월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조에게 대둔사 승려들의 뜻이 전달되었으며
정조는 보다 자세한 내용의 품의를 지시하였고, 이후 당상관 서유린(徐有隣)의 보고를 받아들여 1788년 7월 5일 사당 건립 일을
윤허하게 되었다. 대둔사 승려들은 청허 휴정을 배향하는 사우 건립을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다녀야 했고,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
를 내야만 했다. 임진왜란 발발 200연 년이 흐른 뒤에야 그것도 대둔사 승려들이 온갖 고초를 겪은 이후에야 표충사 건립은 비로
소 공적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 극복에 끼친 의 승의 공적, 특히 청허 휴정의 역사적 위상을 감안할 때 지난했던 해남 표
충사 건립 과정은 참으로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고 하겠다.
2.자운 윤눌(慈雲 潤訥), 대가 희옥(待價熙玉), 비능(斐能), 급암(汲巖) 이들 4형제는 모두 의승으로 활동함. 특히 윤눌은 이순신의
부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움.
3.임진왜란 시기 활동한 의승들은 우리 역사의 의인(義人)이자 위인으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따라서 이들을 추모하고 선양하는 추념사업은 불교계뿐 아니라, 범국민적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닌다. 불교계
는 지난 2014년부터 ‘호국의승의 날’ 제정을 청원해 오고 있으나 아직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2023년 현재 총 53개에
달하는 국가기념일이 지정되어 있으며, 이들 가운데 의병의 날(6. 1-안전행정부), 현충일(6. 6-국가보훈처), 순국선열의 날(11.17-
국가보훈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충무공이순신 탄신일(4. 28-문화체육관광부)까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현실을 고려할 때, 수천
명에 달하는 의승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호국의승의 날’ 제정은 반드시, 그것도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조계사 큰 법당에서 이렇게 정면에서 말씀을 드리게 되는 거는 제 기억으로는 딱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마치 묘하게도 2014년도
인데요 그때도 이 주제 가지고 그때는 큰 행사를 했어요. 얼마 전에 입적하신 자승 스님께서 총무원장을 하실 때인데 우리 종단
차원에서 이제 호국 의승의 날을 제정을 하자. 이제 그 발족식을 하던 날입니다.
4월 달로 기억을 하는데 그래서 이제 저한테 와서 그때 한 10여 명 넘는 국회의원도 왔었고 종단에 이제 소임 보시는 스님들 이 법
당을 가득 메웠었고요. 그래서 이제 저한테 그 호국 의승의 날을 제정해야 하는 취지를 좀 설명을 해라.
그래서 한 15분 정도 문건 만들어와서 이렇게 서서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묘하게도 또 오늘 의도적으로 그랬던 건 아닌데요.
이에 불교대학 동문회에서 모임을 하신다고 이렇게 거창한 자리 같았으면 또 이렇게 뭐 선지식 구법여행, 도저히 저하고는 격이
안 맞는 그런 표현이라서 이 행사를 좀 잘 알았으면 사양의 말씀을 드렸을 텐데, 저는 그냥 뭐 동문회 여러분들 동지 법회 하시고
간단히 강의 정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고 이제 하겠노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어쨌든 한 10여 년 정도 사이를 두고 또 거
의 동일한 주제로 뭐 이렇게 정면에 서서 마이크를 잡게 됐습니다.
그동안에 뭐 매년 했던 건 아니고요. 그쪽에서 불교대학에 꽤 이른 시점부터 강의를 나왔던 것 같아요. 제 기억으로는 90년대에
중앙승가대학의 교수로 들어가고 나서 얼마 안 된 시점부터 그때도 불교대학이 있었고 그때도 이제 강의 부탁을 하셔서 강의를
했던 기억이 있고요.
가장 최근에는 올해 올해도 3, 4월달에 아마 그 불교사 강의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랫동안 연을 맺어왔던 단체고 또 무엇보다도 이제 같은 불자로서 오늘 이렇게 행사하시는 모습 그리고 이렇게 팜플렛을 보니까
불교대학 졸업하시고 나서도 이런 꾸준한 신행 활동을 하시고 또 어떤 단체의 신행 활동뿐만이 아니라 한국 불교 전체를 보고 뭔
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들을 이렇게 합심해서 여러분들이 찾아가고 계신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환희심이 들고요. 같은 불
자로서 감사한 마음도 들고 그렇습니다. 저도 뭐 오는데 제법 추운 날씨 때문에 뭐 그렇게 편하게 오지는 않았고 또 오면서도 내내
망설여졌어요. 뭐 이렇게 좀 연말이기도 하고 여러분들한테 조금 훈훈한 따뜻한 그런 그야말로 좀 법향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말씀
을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이제 뭐 저는 전공이 역사학이기 때문에요 법사 뭐 이런 역할하고는 좀 맞지는 않습니다.
또 억지로 뭐 지어내서 짜내서 그런 거 뭐 저하고 또 어울리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좀 고민을 하다가 최근에 이제 제가 제일 열심
히 공부하는 주제가 이 주제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는 한데요. 좀 지나온 이야기를 하면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시기 바로 전
날인데 해남 대흥사에서 큰 행사를 하나 했어요.
그때 이제 주지를 사시던 스님이 범각 스님이신데 대흥사 박물관에서 이제 소중한 자료가 하나 발견이 돼서, 그게 이제 뭐 향례 올
리기 제물 단자 이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걸 가지고 좀 집중적으로 김 교수가 분석을 해서 이 대흥사에서 봄 가을에 춘추
향례에 현충사에서 이제 그 향례를 모셔요.
그래서 그 춘추 향례를 국가 문화재로 좀 과거처럼 국가적인 재앙으로 성격 전환을 다시 본 모습을 좀 찾아가게끔 하고 싶은데 그
런 취지의 공청회를 한 번 하자. 주제 발표를 좀 김 교수가 해달라고 그런 일종의 이제 명을 받고, 그리고 이제 그 행사 마치고 대
흥사 앞에 숙소에서 하루 자고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해요. 그다음 날 아침에 이제 그 노 대통령 그 참극 소식을 듣게 돼서 어쨌든
뭐 제법 세월이 됐죠.
그리고 나서 또 뭐 계속 이렇게 이제 이 임진왜란이라든지 또 그 시대의 향례라든지 이런 것들과 관련한 연구 의뢰가 오고 올 한
해도 이제 아까 잠깐 제 소개 말씀 주셨을 때 그 정년 퇴직은 아니고요. 아직 뭐 3, 4년 남았는데 올해 2월 말로 그냥 학교를 도망쳐
나왔거든요. 그래서 좀 쉬기도 하고 그러려고 일부러 나왔는데 올해 뭐 여기저기 끌려다니다 보니까 세미나 발표는 뭐 올해 여섯
군데 세미나 발표 가운데서 무려 4곳에서 한 게 다 이 임진왜란 관련된 그런 발표를 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음 이제 오늘 말씀드리는 주제가 여러분들이 관심을 갖고 계시는 어떤 개인의 신행 또 불교의 어떤 철학적인 사상
적인 신앙적인 그런 부분들 거기에 좀 격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오는 내내 사실은 좀 마음이 무겁기는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또 고맙게도 저를 불러주셨으니까 어쨌든 어쨌든 최근에 제가 제일 열심히 자료를 들여다보고 공부하
고 있는 주제 그리고 늘 조계사 불교대학에서 불교사 강의를 할 때마다 여러분들한테 늘 드렸던 똑같은 당부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쨌든 우리 뭐 요새는 일천만 불자 그럽니다마는 어쨌든 이 땅의 불자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시
는 그런 그 책임감을 갖고 계신 위치 특히 뭐 이제 이렇게 졸업을 하고 이렇게 또 열심히 신행 활동을 하고 계시는 여러분들에게는
역사 공부를 하는 불교사 공부를 하는 그런 학자로서 이런 부분들은 여러분들께 꼭 좀 당부드리고 또 여러분들 개인 개인이 이런
내용들은 주변분들에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올바른 역사를 알리는 역할을 해 주시면 어떨까 그런 이제 개인적인 당부도 좀 담겨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다소 좀 재미없고 좀 동떨어진 주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료를 보면서 필요한 부분들을 좀 말씀드
리고 그렇게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많이 춥지 않겠는가 걱정을 했는데 그래도 법당안이 견딜만 한 것 같아요.
그러시죠? 그래서 강의 시간을 회장님께서 한 뭐 40분 안팎 이렇게 해 주시면 어떻겠느냐? 여러 가지 날씨도 있고 그래서요. 근데
이제 이 강의하는 사람들은 자기 말에 자기가 취합니다. 그래서 그 시간 가는 줄을 잘 몰라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보고 하는 만큼
하고, 여러분들이 조금 지루하신 표정을 지으면 그때 가서 그만두는 걸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료를 복사해서 이렇게 나눠주셨는데요. 총 6쪽짜리 자료입니다.
제가 그동안 써왔던 논문들 또 책자들에서 해당되는 부분들을 자기 복사를 해 온 겁니다.
오늘 뭐 강의를 위해서 따로 원고를 쓴 건 아니고요.
그동안에 이제 제가 썼던 글들 중에서 이렇게 순서대로 좀 옮겨온 겁니다.
이제 첫 번째 문단에 있는 내용 이제 일종의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서설격인데요.
까마득한 옛날 얘기죠 1592년이니까 제법 오래전의 얘기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임진왜란과 관계된 여러 가지 역사의 상
흔들은 우리 주변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그 뭐 전국 사찰들이 이제 많이 참배들 하실 텐데 보면 뭐 인진왜란 때 정유
재란 때 사찰이 불에 탔다고 하는 기록들을 많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불교 문화재들도 이때 많이 소실이 되죠. 또 이때 과연 얼마나 많은 조상님들이 죽고 다쳤느냐 정확한 통계를 낼 수가 없습니
다. 수십만 최소 수십만 이때 우리 스님들이 얼마만큼 많이 참전을 했느냐 최소 수 만입니다. 일일이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리고
최소 수천 명의 스님들이 돌아가지 않습니까?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게 그 정도로 참극에 해당하는 우리 기억으로부터 많이 떨어
져 있으니까 뭐 6.25 전쟁보다 훨씬 좀 덜한 느낌으로 우리들한테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것이 남긴 이
참극은 뭐 상상 이상의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이 일어났을 때 여러분들 잘 아시겠지만 참 무기력하게 당했죠. 뭐 부산 쪽으로 들어와서 이 한양 땅으로 올라오기
까지 거의 뭐 무방비로 그냥 왜군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데 이제 그런 전쟁의 과정에서 참전을 했던 집단이 크게 이제 셋
집단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관군이죠. 당연히 의무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게 관군입니다.
근데 지금 당시 관군의 이 여러 가지 무기의 수준이라든지 전투의 능력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왜군한테 상대가 되지 못했죠.
그래서 이제 초창기에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제 그런 관군의 참패가 이어지니까 전국 곳곳에서 특히 이제
호남 지역에서 먼저 많이들 일어나세요. 의병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의병들은 물론 자발적으로 일어난 그런 군대이지만 그
런데 이제 그 조선 임진왜란 때의 의병은 거의 대부분 유생 출신 그 지역의 관료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 같이 그 엄격한
신분제가 시행되던 시절 임진왜란을 당하니까 그런 자기들이 어떤 누리고 있던 이 사회의 질서 이 체제들을 지켜야 되겠다.
그걸 이제 뭐 근황 정신이라고도 표현을 하는데 어쨌든 이제 그런 지배 계층 지배 세력이 있는 사람들이 또 의병을 규합해서 항전
에 나섭니다. 그런데 이제 이 스님들은 그 경우가 아니에요. 의무적인 집단도 아니고 또 조선 시대의 어떤 지배 계층에 속했던 그
런 계층도 아닙니다. 거의 천민과도 같은 취급을 받던 게 조선시대 스님들이요. 그런데 이 스님들이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군대 규합을 합니다. 그 의승들과 관계된 기록들을 보면 그러게 눈물겨운 장면들이 있어요.
심지어는 뭐 스님들이 먹을 식량을 자기들이 싸갖고 실록 개념 표현이다.
자기들이 싸갖고 뭐 심지어는 뭐 무슨 이 나무로 만든 그런 무기들 또 낫 같은 거 농기구 우선 그 제대로 된 무기가 있을 수 없으니
까 우리 6.25 때 마치 학도병들을 막 그렇게 해서 전쟁터로 내보냈잖아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스님들이 이렇게 규합을 해
서 전쟁터로 나가서 그 수많은 희생을 당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임진왜란 시기 임진왜란부터 이제 정유재란 요새는 그냥 보통 임
진왜란 하면 정유재란까지 포함을 해서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 시기의 그 수많은 전투 거기에서 활약을 했던 이 의승 스님들 군대 의승군 이 스님들 군대 그 군사 집단
의 성격을 특히 우리 불교 공부를 하시는 불자 여러분들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걸 당연히 뭐 해야 할 것처럼 이렇게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라는 거죠.
그런 의무성도 없었고 또 그런 사회의 신분 구조상 지배 계층에 속하는 스님들도 아니었다.
고려 시대 같으면 우리가 이렇게 의승에 대해서 강조하고 뭐 이럴 이유도 없어요.
사실은 조선 시대 같이 더더군다나 임진왜란 직전의 16세기 한 초 중반의 상황은 불교와 가장 큰 바닥으로 떨어졌던 그런 시대 불
교 이 존립 자체가 대단히 어려웠던 그런 시대인데도 그런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왜침이 들어오니까 스님들이 이렇게 적극적으
로 전쟁 초기부터 의승 활동에 나섭니다.
대단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인 겁니다. 그 최근에 뭐 제가 또 여기저기 자료를 뒤져보다가 저는 이제 기허 영규대사가 거의 최
초 시점에 의승 활동을 한 것으로 봤는데 그 이전에도 있었어요. 영규 대사 그 충성 전투 하기 전에도 보니까 또 의승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스님들은 본명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의승이라고 표현이 됐어요.
승병이라고. 그래서 그 의병 활동을 하는 그 장수 거기 집단에 들어가고 또 거기에서 이제 그 유명한 고경명 그 뭐 아들들까지 다
죽고 그러잖아요. 그 고경명의 시체를 어쨌든 가져와야 하는데 그걸 스님들이 들어가서 의승들이 들어가서 그 시체를 모셔옵니
다. 그래서 그 아들들이 막 스님들한테 이제 감사의 인사를 하고 그런 자료도 보여요. 그거는 영규 스님의 이 전투 이전에 그러니
까 아주 이른 시기에 의승들이 전국 곳곳에서 결집을 하고 참전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한테는 그 자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쨌든 앞부분에서는 그 당부를 드리고자 하는 얘기입니다.
참전 의승들이 왜 참전을 했느냐 그때 당시에 이 의승들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규정을 해야 되느냐 이런 큰 틀부터 좀 말씀
을 드리고 싶어서 첫 문단 이야기를 했고요. 그렇게 참전한 의승들이 임진왜란의 전체 전쟁의 운명을 바꿔버린다.
이건 뭐 제가 불교사를 해서 불교를 신앙에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 이 임진왜란사를 객관적으로 전쟁사의 관점에서 역사의 관점
에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입니다.
그 임진왜란의 패전의 위기를 이렇게 전기를 바꾸어놓는 그 기운을 바꾸어 놓은 전세를 뒤바꾸어놓은 그런 결정적인 요인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의병과 의승의 활동이다. 이건 뭐 일반 역사학 책에 그대로 써 있는 얘기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 스님들이 싸움을 잘 했어요. 전쟁을 아주 잘했어요. 훈련받지 못한 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의승들이 대단히 용
감히 싸웠다. 조금 뭐 다른 얘기지만 저희 중앙승가대학이 안암동에 있었거든요.
성북구에 그 조그마한 학교였죠. 그런데 그 요새 이제 뭐 화제가 되는 한 80년 무렵 80년대의 그 민주화 투쟁 그 과정에서 이 승가
대 스님들이 거리로 나오면 제일 무서워했대요.
그래서 막 한 번은 이 종로 경찰서장이 파직이 되고 그런 적도 있습니다.
그 진출을 못 막았다. 그래서 그 안암동에서부터 막 그냥 시내까지 뛰처나와 이 스님들의 이제 그 무공 활동을 그 시대에 그 민주
화 활동을 이렇게 이제 축약해 놓은 자료를 보니까 정말 무지할 정도로 막 그렇게 막 최루탄 살포하는 차 앞에 막 그냥 뛰어 들어
가 그냥 목숨 내던지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죽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뭐 이 고대생들 몇 천 명 규모보다 승가대 뭐 몇십 명, 몇백 명 움직이면 더 비상이 걸
렸다고요. 그 스님들이 이제 딸린 식구들이 없어 그만큼 생사에 여여하시니까 그렇게 용감하게 하시는 거예요. 아마도 그 승가의
전통이라고 하는 게 그런 상황에 임했을 때 더 용감해질 수 있는 일반인들보다는 그런 부분들이 분명히 작용하지 않았을까 어쨌
든 전투 잘하십니다. 그 곳곳의 전투에서 아주 중요한 전투에서 역할을 해내세요.
그래서 막 포상도 받고 그래요. 그 두 번째 단락에 있는 얘기가 그런 얘기입니다.
그 여러 전투들 이 임진왜란이 전쟁사에서 아주 중요한 그런 몇 가지 전투들이 있는데 그 전투들에서 아주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선조가 이제 저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환궁을 하잖아요.
평양성으로 먼저 들어오고 그 임진왜란이 이제 초반기 그 밀리는 수세가 지나서 어떤 전기가 마련될 때 평양성 전투가 아주 큰 전
투거든요. 거기에 자료마다 조금 다른데 이제 명군이 들어오죠.
명나라 군사가 들어와서 대개 한 1만 여 명의 군사가 연합군이 쳐들어갔다고 그래요.
왜군하고 싸울 때 그런데 심지어 어떤 기록에 보면 그 조명연합군 만 명 가운데서 승군이 5천 명이나 됐다는 어! 5천 명은 좀 과하
지 않은가 제가 그냥 개인적으로 최소 한 2천에서 3천은 될 거요. 그렇게 잡아도 엄청난 숫자입니다.
만 명 중에서 이 삼 천이 승군이다라고 하는 거 이거 엄청난 비중이에요.
그 평양성 탈환할 때도 승군이 그렇게 기여를 한거예요..
그리고 이 한양 그 들어올 때도 그렇고 선조를 호위했던 그 승군들의 역할도 뭐 나중에 또 한 번 말씀드리겠지만 뭐 행주대첩 뭐
곳곳에서 곳곳에서 승군들이 많은 전공을 세워요. 그렇기 때문에 일반사를 전공하는 사람들 또 임진왜란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승군의 역할에 대해서 기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뭐 부풀려서 결코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
하고 어 제가 이제 올해 7월달인가요. 6월달에 국회 정각회에서 또 영규(靈圭) 대사 관련한 이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발표를 했는
데 거기 가서도 이제 뭐 힘 주어서 이제 얘기를 했던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아직까지도 이 승군들의 희생 그 공적에 대해서 공정한 역사적인 평가를 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공적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래 가면서 제가 그 표를 하나 만들어서 그 세미나에서 배포를 했었는데 중고등학교 교과
서에서 과연 이 의승들의 활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비중 있게 쓰고 있느냐 형편 없습니다.
그냥 지도에다만 이렇게 이름 적는 정도예요. 교과서 문장에 기술이 돼 있는 게 딱 한 종류가 있었어요. 의승의 활동 뭐 이렇게 딱
한 문장 정도 나머지 교과서에서는 아예 그 의승들에 대해서 언급조차 없습니다.
지도 이렇게 좀 표기해 놓은 거 그러니까 이 정도로 차별을 받고 있다. 또 올해 뭐 우리 불교계 법보 신문에서 아주 크게 시리즈로
막 기사를 내고 그랬지만 그 조간과 700의총이라고 합니다. 근데 거기는 그렇게 단장을 해놓고 국가적으로 막 예우를 하고 그러
는데 그 같은 전투에서 희생됐던 영규대사와 800 의승은 전혀 뭐 배려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역차별에 지금 시달리고 있다. 그런 공정한 대우를 결코 받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이제 오늘 그나마 그나마 이제 제 스스로 위안을 하면 여러분들 같이 이렇게 우리 불교계를 좀 끌고 가셔야 하는 일반 불자
들 중에서 불교대학 졸업생이시니까 또 그 동문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계시는 분들이니까 여러분들만큼이라도 이 의승 이 임진왜
란 정유재란 시기에 또는 조금 확대해 보면 병자호란까지 그렇게 수많은 희생 의승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제 좀 스피커가 되
셔서 적극적으로 알리고 그분들을 선양하는 그런 부탁을 좀 드린다라고 하는 의미에서는 그래도 나름대로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주제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락에 있는 얘기는 이제 그동안에 이 호국불교 관련해서 많은 연구들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제 이 의승 연구를
하다가 보면 자꾸 겹쳐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호국불교라고 하는 전통하고 이 의승의 활동하고 어떤 성격의 다름이
있는가 근데 지금은 우리가 호국불교 이야기를 할 때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던 고려 대장경 초조 대장경이 있고 재조대장경이 있
죠 초조 대장경은 이미 불타버렸고 몽고군이 불에 타버렸고 재조대장경이라고 하는 게 지금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 그 두 개
의 대장경은 다 외침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그 대장경이에요.
그래서 그런 전후 사정을 참 잘 쓰고 있는 게 그 이규보라고 하는 고려시대 대문인 이규보가 쓴 대장각판 군신기고문(大藏刻版君
臣祈告文)이라고 하는 글이 있어요. 요새는 이런 글들을 그냥 휴대전화에서 얼마든지 검색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고전번역원이라고 하는 데가 있어요. 그 고전 번역원 홈페이지에 가서 이렇게 창이 있습니다. 거기다 그냥 궁금한 거 검
색하시면 쭉 기록 되어 있답니다.
그 이규보의 글 중에서 대장각판 군신 기고문이라고 그 대장경을 파면서 다시 파면서 강화도로 그때 이제 피난 가 있을 때잖아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서 이제 부처님한테 기도하고 그 일종의 발원문 같은 그래요. 그 글을 보면 그런 얘기들이 쭉 나와 있어요.
그 초조 대장경은 거란 이렇게 들어왔을 때 그리고 재조대장경은 몽골이 들어왔을 때 그걸 어떻게 해서든지 부처님한테 좀 의지
해서 그래서 이 외침을 극복해 보자.
그게 호국불교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호국불교 사례요.
그런 대장경을 판각하는 호국불교 사례하고 스님들이 직접 창과 칼을 들고 나가서 비록 적군이지만 그 적군을 직접 찔러 죽이고
그런 직접 참전을 했다라고 하는 이것 하고는 하늘 바닥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스님들 그 누구보다도 불살생 계를 지켜야
할 그 제 일을 놓고 지켜야 할 스님들인데 어떻게 그 직접 참전을 하고 살상 하는 일에 가담할 수가 있을까 그런 것 하고 고려대장
경을 부처님한테 불심에 의지해서 이렇게 대장경을 판각해서 외침을 이겨내자라고 하는 그런 것하고 어떻게 같은 호국불교라고
하는 틀에서 같이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 이런 문제 들에 부딪히는 거 그래서 우리가 호국 불교 이야기할 때도 좀 조심할 필
요가 있다.
그 용어 사용이라든지 이 그래서 의승의 활동이라고 하는 거는 보다 특별하게 우리가 좀 바라보고 특별하게 이해를 해야 된다.
그 시대 스님들이 직접 살상 행위를 했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그 시대 스님들이라고 그런 고민
을 안 했겠는가 그런 궁금증을 갖고 자료들을 보니까 보여요. 서산대사 스님 입적 하시고 나서 뭐 한 백몇십 년 지난 다음에 대흥
사에 지금 그 비가 세워지는 거예요.
장유(張維)라고 하는 분이 쓴 비에 그 비에 보면 서산대사 당시에도 그런 치적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뛰어넘다 월담한다 뭐 그러
잖아요 월장 그 월 뛰어넘다라고 그 월계라고 하는 표현이 있어요. 그때 당시에도 서산 대사가 이제 참전을 결심을 하고 전국 스님
들한테 격문을 돌리고 그랬던 그때 당시에도 뭐 어떻게 월계(越戒)를 할 수 있느냐 아무리 외침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계를
뛰어넘는 일을 할 수가 있느냐 이런 지적들이 있었다는 거야.
물론 그 비를 지은 장류라고 하는 선비는 이제 그런 사람들을 좀 비아냥 거리고 그 잘못된 비판이다라고 하는 관점에서 그 비문을
썼지만 그러나 서산대사의 그런 결행에는 분명히 내적으로도 스님들 사이에서도 이건 안 된다.
지금 당장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 몇 년 전에도 한 번 불교계에서 그런 토론이 붙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 뭐 그럴 일이 없
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만약에 다시 대한민국에서 지금 어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승려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 돼요. 불자들은 어
떤 행동을 해야 되고 그런 살생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불자다운 행동이냐 간단한 문제 아니예요. 그걸 가지고
이제 뭐 불자 지식인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고 그랬던 적이 있는 거예요. 어쨌든 임진왜란 당시에도 서산 스님의 그런 결행에 대해
서 불교계 내부에서도 적지 않은 비판이 있었을 정도로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의승의 참전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특별하고 각별하게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하는 데 지금도 아마 여러분들은
뭐 둘러 앉아서 그 문제 옳고 그름 문제를 우리가 토론을 해보자고 그러면 아마 각양각색의 말씀인 것 같아요.
더더군다나 일반인도 아니고 더군다나 출가 승려인데 그런데 아무리 왜군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전쟁터에 나가서 직접 살
상을 하는 행동을 해야 될 것이냐 우리 달라이라마가 갖고 있는 위대성 많은 분들이 그런 부분에서 찬탄을 하잖아요.
그 무전 비폭력 간디도 보였듯이 달라이라마도 그러잖아요.
달라이라마가 그 미국 9.11 테러 사건 났을 때 아주 간곡하게 당시 당부를 했어요.
제가 그때 그 신문 기사를 신문도 기억 당신들 같은 강자가 끌어안아야 이 악순환이 멈춰진다. 제발 제발 보복 공격하지말라. 이
9.11 테러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고 죽어갔지만 지금 이 아랍권하고 이슬람권하고 미국과의 그 갈등 그 폭력의 악순
환 이런 것들을 멈출 수 있는 거는 당신들이 할 수 있다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그래야 멈춘다. 그런데 뭐 달라이라마 말 그러니까
불교적인 정신 부처님 가르침에 의거한 전쟁관 그런 살상과 이런 것들은 우리가 간단히 볼 문제가 절대 아니다.
아주 진지하게 그런 근본적인 부분들을 함께 생각하고 보다 바람직한 결론들을 도출을 해내고 그럴 필요가 있는 거다.
서산대사와 임진왜란 시기 참전을 결행했던 많은 의승들에 대해서 우리가 역사적인 평가를 하고자 할 때 그런 부분들도 냉정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비판하는 일부 인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은 참전을 결행
했어 많은 공적까지 쌓게 된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것들을 그냥 호국불교라고 하는 틀 안에서 뭉뚱 그려서 대장경 불각 하는
거 하고 이런 일들 하고 한꺼번에 놓고 이해 하지는 말자는 얘기가 길어져서 그렇습니다.
이쪽으로 넘어가서 보시면요 이제 서산대사 이야기 조금 하기 전에 보고 기허 영규부터 하겠습니다.
이쪽에 세 번째 단락입니다. 아까 잠깐 말씀드렸듯이 이제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의승들이 참전하는 과정에 그래도 가장 먼
저 이제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의승이 이 영규대사가 아쉽게도 영규대사는 음 우리 잘 알듯이 뭐 금산 전투에서 그 800 명의
의승들과 함께 다 그냥 돌아가시잖아요
그래서 그 영규대사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올해도 시작해서 이제 동국대 황인규 교수도 그렇고 자료들을 찾아서 영규대사 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스님들 명단을 한 10여 명
새롭게 추산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스님들을 이렇게 위패도 모시고 그런 노력들을 일부에서 하고 있는데 그냥 800명이에요. 그것
도 어디에는 뭐 500명이라 소리도 있고 700명이라는 소리도 있고 800명이라 소리도 있어요. 정확한 숫자조차 모르데 여하튼 금
산 전투에서 다 돌아가셔요. 그런데 이제 이 의승의 관점에서 이 전투들을 저는 보고 싶은 거예요. 실록에도 분명히 그 조헌의 판
단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주성 전투에서 이게 큰 전투예요. 임진왜란 전세를 전환시키는 그런 전투로 평가되는데 거기에서 공적을 세웁니
다. 조헌의 의병 군사하고 관군들하고 이 영규의 군사들하고 합심을 해서 청주성을 탈환을 해요.
그런데 이제 이 조헌이 흥분을 해서 그런 건지 곧바로 이제 금산성으로 처들어 들어갑니다. 근데 이 수 적으로 너무 열세니까 자꾸
주변에서 만류하는 거예요. 심지어 그 부하들까지도 막 떠나버립니다.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그래도 조헌이 이제 700명이 자기를
따르는 700명 군사를 몰고 그냥 가버리는 거야. 출발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가겠다.
그래서 또 800 명의 의승들을 끌고 가. 아니나 다를까 그때 주변에서 간절히 관군 오기 올 때까지 좀 기다리자라고 권유했던 그분
들의 권유대로 가서 그냥 하루 만에 다 몰살을 당해버립니다.
왜군들이 그때 뭐 금산성에 엄청난 숫자가 있습니다.
안 되는 거예요. 관군들이 지원이 와서 전략을 잘 짜서 들어가서 또 전투를 해야 하는 건데 이 조헌이라고 하는 장수가 이 의병장
이 판단을 잘못한 거예요. 그거 다 돌아가신 거예요. 정확한 사료에는 안 나오지만 그 영규대사와 800의승들은 시신 수습조차 제
대로 안 된 거예요. 조헌과 이 700 의병들은 거의 다 양반 가문들 양반 자제들 그래서 그 시신을 수습을 해서 지금도 왜 700의총이
있죠? 아주 단장을 잘 해놓고 제사를 그때부터 아주 성심성의껏 지내고 800 의승들은 시신 수습조차 안 해.
이런 차별을 받는 그런데 이제 제가 왜 그 말씀을 드리냐 하면 장수로서의 탐람 그게 대단히 중요한 거죠.
전쟁 특히 이렇게 뭐 수 천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인데 그때 그 주변의 권유대로 조금만 좀 기다려달라 할 때 관군과 함께 합세해
서 갔더라면 전쟁의 결과는 또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수였던 조헌과 그 700 의병들은 그렇게 극진히 추모를 하
고 단지 승려라는 이유로 그 800 명이 희생된 스님들은 이름조차 지금 확인할 수가 없고 시신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할 수가 없고
그런 상태다. 그래서 올해 이제 그 법보 신문에서 집중적으로 그런 문제를 제기하고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문화재청에서 문화재청
국장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답변을 했습니다.
문화재청 차원에서 그 조헌과 700의총 그 충렬사인가요. 하여튼 그 주변에 이제 스님들과 관계된 그 과거에도 있었어요.
그걸 다시 복원하고 적극적으로 불교계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그런 약속까지는 했습니다. 어쨌든 어쨌든 그 영규대사와 관련된
이 일들은 지금도 현재적인 시점에서도 좀 아쉬운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얘기고요. 3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3쪽에 이제 서산대사 이야기가 좀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 서산대사가 전국에 돌렸다라고 하는 격문을 저는 아직까지 원문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저기 이제 뭐 소설 같
은 자료에 있고 또 몇 년 전에 어디 미국에서 이제 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이 그 격문을 박사 논문 속에서 인용을 했다고 그래서 막
눈이 번쩍 띄어서 수소문을 해서 알아봤는데 그분도 역시 간접적인 2차 자료를 활용을 한 것 같고 인터넷에 이렇게 검색해 보면
꼭 문장이 좋아요.
어디 뭐 무슨 군법사 같은 데 역시 여러분들 같은 동문 군법사를 마치신 분들 또는 뭐 그 예비역 장성들 뭐 그런 단체들에서 이렇
게 올라와 있는 서산대사 격문이라고 하는 문장이 있는데 아주 좋은 문장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원문을 아직까지 저는 찾지 못했
어요. 추적을 해보면 다 2차 적인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좋은 문장들도 만들어내시고 그랬더라고요.
어쨌든 사실은 분명합니다. 서산대사가 격문을 쓰신 건 맞아요.
그래서 이제 그 격문이 전국에 특히 서산대사 제자를 중심으로 해서 전국 스님들한테 전달이 됩니다. 그래서 이게 이제 전국에서
곳곳에서 이 의병 의승군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 그런 가운데 그 유명한 뇌묵 처영 스님이 호남 쪽에서 일어나고 사명대사가 금
강산 쪽에서 일어나고 그럼 많은 전국의 의승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 촉발은 서산 스님은 이때 이미 연세가 높으셨어요.
그러니까 직접 이렇게 전쟁터에 나와서 싸우거나 그러시지는 않았습니다.
선조 환궁할 때는 옆에서 호종을 한 거 같아요. 서산대사 그 남기신 글이 이제 청호당집이라고 두꺼운 책이 있는데 눈 터지게 제가
찾아봤는데 전쟁과 관련한 기사가 딱 하나 있습니다. 딱 하나 있는데 아마 뭐 그 수전 이 해군들이 싸우는 그런 장면을 보신 것 같
아요. 그걸 이렇게 실록 하나 남겨놓으신 게 있는데 그러고는 뭐 직접 전쟁과 관계된 그런 글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이제 연
로하셨던 상태고 이제 주로 뭐 그 제자들이 이제 활동을 했던 거죠. 어쨌든 그런 서산대사가 경문을 돌리고 전국의 승도들 한테 일
부의 비판을 받아가면서도 이건 우리가 막아야 된다라고 격려를 하고 독려를 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적극적인 스님들의 참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도대체 스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걸 제가 몇 년 전에 고민고민해 가면서 논문 하나 썼던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직
접 전쟁과 관련한 기사가 없으니까 뭘 추측해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그 3쪽에 아래 가운데 단락입니다.
세 번째 단락 고 문장의 고 문단의 다섯 번째 줄 보면 한자가 10글자가 있죠 래위중생래 거위중생거(來為眾生來 去為眾生去)찾으
셨나요? 그 서산대사가 남긴 이제 시구 가운데 하나인데 결국은 임진왜란 참전이라고 하는 서산대사의 결단 그리고 거기에 참전
해서 희생됐던 수 천 명의 스님들을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그분들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그분들의 희생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요소는 뭘까? 그 요소를 저는 이 시에서 찾은 겁니
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렇게 불교가 탄압을 받고 스님들이 천시되고 하는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나서 이렇게 많은 중
생들이 도탄에 빠지고 죽어가고 하는데 우리 승려들이 살생하지 말자고 이런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 더 많은 중생들을 구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게 승려들의 살아야 될 당위성 아니냐? 중생을 위해서 와서 중생을 위해서 간다라고 서산스님한테는 아주 혼
날지도 몰라요.
제가 네가 각색했다고 그러나 제가 찾은 문구 가장 그래도 그 마음을 이렇게 좀 지금의 관점에서 그 충심을 그 충정을 지금의 관점
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제가 찾은 거는 요 시 이것 말고는 보이지 않는 거 그러니까 더 많은 중생들의 삶을 위해서 저들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국토를 쳐들어오는 외세가 있습니까? 저 왜놈들이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막아줘야 되겠다.
더 많은 중생들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희생을 해 줘야 되겠다. 그런 결단을 하신 게 아닌가, 만약에 경문 원문을 우리가 찾아낼
수만 있다면 어디선가 발견이 된다면 그 경문 안에는 그런 표현들이 좀 들어가 있겠죠. 아쉽게도 이제 그걸 확인할 수 없는 상태라
이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공적을 나중에 정조 대왕이 이 서산 대사의 공적을 한 3가지로 이렇게 추려서 그 그림 옆에 붙이
는 일종의 찬시처럼 이렇게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그 3쪽에 있는 그 내용이 그거고요. 일일이 다 이제 설명드릴 수가 없어서 4쪽
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쪽 3쪽 끝부분부터 4쪽 상단에까지 있는 거는 이제 사명대사가 뭐 워낙 임진왜란에 든 적이 많으시잖아요.
그런데 이제 사명대사가 처음에 그 승군을 모아서 이렇게 참전해 가는 과정 초기의 과정을 본인이 써놓은 글이 있어요.
그 사명대사가 이제 갑오 상소라고 하는 갑오년에 상소문을 올리는데 그 상소문 내용 중에 이런 표현들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보면 아!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의승들이 규합을 해 가는구나. 그 장면을 이렇게 살필 수가 있어서 특히 올해 들어서 제
가 이 자료를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거기 네 번째 줄 4쪽에 네 번째 줄에 보면 개유 열 개 자에 설득하다.
그런 이 사명대사가 직접 쓴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한 100명 그다음에 150명 210명 숫자도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요.
의승이 처음부터 이렇게 몇 천 명이 모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금강산 지역에 있었던 이 사명대사가 처음에는 한 100여 명을 설득
을 해서 모은 겁니다.
뭘 가지고 설득을 했겠어요. 제가 감히 더 각색을 해 보면 이 중생 중생을 위해서 우리 은사 스님이 서산대사가 저 도인이 더 많은
중생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 승려들이 나서야 한다. 우리들이 힘을 합쳐서 좀 막아내자 저놈들하고 싸워보자.
이런 경론으로 바꾼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그걸 가지고 사명대사도 설득하는 작업을 합니다.
개유는 그런 표현이 다 한 번 한 번 만나서 야 중이 살생하면 돼 이렇게 반대하는 스님들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분의 손을 붙잡
고 개유를 하는 겁니다. 우리 불자들은 여러분들 이제 올 한 해 지나시면서 주변인들과의 관계 어 잘한 것보다는 반성되는 게 더
많죠? 저도 역시 그렇습니다. 가장 부족한 게 이런 과정 아닌가 싶어요. 보다 좀 내 생각만 잘났다고 자꾸 소리지르고 그러지 말고
좀 개유를 해야 하는 것 그분의 마음을 좀 더 열 수 있도록 그분을 좀 그분의 관점에서 그분의 처지에서 이렇게 다가가서 설득을
하는 일들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그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거요. 이런 중차대한 문제도 사명대사가 뭐 내가 뭐 무슨 계급이 높아 내가 너보다 형이야 이 따
라와 이런 게 아닌 거예요. 왜 우리가 지금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지를 설득해 가는 그 과정이 100명 150명 210명 이 숫자가 저는
작게 보이지는 않아요. 그런 개유의 과정을 거쳐서 처음에 이렇게 작은 숫자를 갖고 사명대사가 시작을 합니다.
나중에 이제 그게 아까 뭐 평양성 탈환할 때 심지어는 5차 때 최소 2천 500, 3천 그 정도의 승군을 통술하는 자리까지 사용돼서 올
라갔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과정을 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사명대사 관련해서였고 두 번째 단락에 맨 끝에 줄 보면 한자 8자 써놨습니다.
근데 정유재란이 일어날 것 같은 예언을 해요. 사명대사가 일본에도 수차례 왔다 갔다 하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좀 전쟁에 관해서
아주 적극적인 건의를 하는데 당시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래서 이제 결과가 또 이렇게 돼버리니까 그 조선왕조 실록을 쓰는 역사가들이 사신들 비판을 한 겁니다.
그 사명대사의 그런 적극적인 진언을 좀 받아들이지. “피육식자 영무괴호”(皮肉食者 寧無愧乎) 이런 8글자를 왕조 실록을 쓰는 사
신이 거기다 써놓은 겁니다. 유생들을 가끔 이렇게 이제 비아냥거려요. 저 고기 먹는 놈들 자기들 얘기면서도 근대기에도 이런 얘
기가 있어요. 스님들은 육식을 안 합니다. 저 육식하는 놈들, 저 그 잘못된 유생들 저 놈들, 왜 이 사명대사 같은 사람의 말을 적극
적으로 듣지 않았느냐 어찌 “무개념” 어찌 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불교 용어 중에서 참회도 뭐 많이 쓰이는 용어지
만 참괴도 많이 쓰입니다.
괴愧 이 괴 자 씁니다. 이것도 역시 부끄러워하다. 뉘우치다라는 참회 그 부처님 전에 와서 우리가 참회를 하지만 음 그냥 그냥 뭐
절만 한다고 참회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참괴의 의미가 조금 더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뉘우쳐야 되는 거예요.
뉘우쳐 참회행을 하면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지금 부천님 전에서 뭘 고하는지? 뭘 잘못했다고 하는지 그걸 뉘우쳐야 뉘우
치다라고 얘기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신이 이 사명대사 이야기를 해 가면서 저 고기 먹는 놈들이 뭘 좀 뉘우치느냐 모르겠어? 지금 뉘우치는 게 없어. 그
정도로 사명대사가 끼친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조금만 더 할게요. 그 4쪽 맨 마지막에 보면 이제 처영대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영규대사. 그 조건의 판단처럼 이 행주대첩 이야기만 나오면 저는 속에서 좀 부글부글 끓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걸 그 5쪽에 두 번째 사료를 제가 직접 그냥 거기다 옮겨놨습니다.
조선왕 실록에 돼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6쪽의 자료집 가운데서 유일하게 줄을 쳐놓은 데가 지금 그 사료의 끝부분 5쪽에 두 번
째 단락 거기 밑줄 거는 세 줄 있으시죠? 보셨죠? 그러니까 이 권율 장군은 뭐 임진왜란 사회에서 아주 중시되는 분이고 행주대첩
행주산성 유명한 일화들 많잖아요. 그죠? 아낙네들이 막 행주 치마에다가 이렇게 해갖고 뭐 돌을 던져서 이겨내.
이제 그런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긴 전투가 그 행주대첩입니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행주대첩이에요.
그만큼 이 행주대첩은 이 큰 전투입니다. 아주 위대한 승전으로 지금까지 평가됩니다
그 행주대첩의 승전을 이끈 그 핵심 역할에 우리 뇌목 처영대사가 들어가 최소 천 명입니다.
여기에 가담했던 의승들이 최소 1천 명의 스님들이 호남에서부터 올라와서 이 행주대첩에 가세를 한 그런데 행주대첩 이야기를
하는 기록들을 보면 지나치게 권율 중심으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실록 기사에 그 밑줄 군데를 보면 가슴이 멍해져요.
이제 승군이 좀 초반 전투에서 후퇴를 했다. 뒤에서 권율이 목을 쳤다는 거예요.
그것. 그래서 다시 그때부터 전세가 이렇게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처럼 직접 목을 베다라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기록들 지금도 지금도 행주산성 지자체에서도 그렇고 세미나도 하고 그러는데요. 최근까지 나온 글들을 제가
다 읽어봤습니다. 지금도 지나치게 권율 중심으로 그 대첩을 이야기를 하고 권율만 그냥 앞세워 그런데 그 권율과 함께 희생했던
그 1천여 명의 의승 그리고 거기에서 죽어 나갔던 심지어는 권율의 칼에 의해서 죽어나갔던 그 의승들과 관련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3대 대첩의 중요한 승전 역할을 했던 이 승군들에 대해서 이건 대단히 문제가 있다.
그래서 거기에 권율과 관련한 또 이 처영과 관련한 이야기를 좀 써놨습니다.
뭐 부족한 부분은 좀 읽어보시고요. 마지막 장에 첫 번째 줄부터 이제 있는 내용이 그 얘기입니다.
스님들의 호가 있는데요. 서산대사는 보제 또 사명대사는 홍제, 또 이 처영 대사은 우세, 그래서 보제, 홍제, 우세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분들 이 승장 의승장들의 업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세상을 구제하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그런 행동 그런 위대한 판
단과 결행으로 이어졌던 그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게 전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부분들을 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단락에 이제 그 이야기를 써놨습니다. 아까 2014년도에 제가 이 자리에서 의승의 날 제정과 관련한 제안 설명을 했다고 그
랬는데 그러고 나서 이제 10년 세월이 다 되는데요. 지난번 그 국회 정각회 뭐 30주년 기념한 세미나라고 그래서 이제 발표를 했
는데 그 자리에 이제 주호영 의원이 정각회 회장을 지금 하고 있어요.
제가 아주 신신당부를 10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이 국가 기념일 하나 못 만들고 있느냐 이렇게 의원 여러분들이 계시고 관심을 갖
고 그때 오셨지 않느냐 2014년도 국가 기념일이 저도 요번 발표 준비하느라고 보니까 53개로 또 늘었어요.
그때 2014년도에는 40 몇 개였는데 계속 늘려요.
국가 기념일은 뭐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냥 국가기념일로 지정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 국가 기념일에 거기 써놨듯이 심지어는 이충무공 탄신일까지 있어요.
또 의병의 날도 몇 해 전에 제정이 돼서 많단 말이죠. 이 의승들의 역할이라고 하는 게, 그 국가 기념일 하나 만드는 게 뭐가 그렇
게 어려워요? 이렇게 숭고한 희생을 한 역사가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대단히 죄송하고 또 그렇지만 저도 더 노력을 할
께요. 여러분들께서도 그렇게 희생한 우리 호국 의승들 임진왜란 때 수천 명의 희생한 스님들 그걸 기념하는 국가기념일 하나 못
만드냐? 국가기념일 지정하는 운동을 다시 한 번 좀 우리 불교 계가 또 여러분들과 같은 이런 단체가 좀 합장해서 해 주시고 또 처
음에 예고한 대로 지말에 취해서 이렇게 얘기가 시간이 또 지났습니다.
추운데 열심히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마치겠습니다.
흔희 말하는 " 마음을 비운다." 라는 것은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닥치는 모든 경계에 대하여 "나"라는 상을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를 여실히 보고 그것을 마음의 발전과 수행을 위한 공부 재료로 삼는다는 것이다. - 간화선
(조계사불교대학 총동문회 자문위원 법연 이동엽 합장)
첫댓글 호국의승의 날 제정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힘을 보태겠습니다.~~
김상영 교수님 감사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