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는 석가세존(釋迦世尊)Sakya)의 이름이고,
모니는 성자(聖者)라는 뜻이다.
구담은 그의 성씨인 고오타마(Gautama)에서 따왔으며
싯다르타(Siddhartta)는 어렸을 때의 이름이다.
그밖에 그를 높여 부르는 이름으로는 아라한 · 명행족 · 여래(如來)가 있다.
석가는 지금의 네팔에 해당하는 카필라(Kapila)에서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반왕(淨飯王)과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은
인도의 명문 혈통을 가진 호족에 속했고,
대대로 왕통을 계승하여 내려온 귀인 집안이었다.
그를 잉태했을 때 마야부인은 다음과 같은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녀가 네 명의 왕에게 유괴되어 은산(銀山)에 끌려갔는데
“왕비는 틀림없이 사내아이를 낳을 것이며,
이 아이가 집에만 머물러 있으면 능히 왕이나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무기를 쓰지 않고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그가 아버지 곁을 떠난다면 세계 인류의 무지를 벗겨버릴 만한 대각자(大覺者,
즉 부처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해몽은 크게 틀리지 않아 곧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어머니 마야 왕비가 죽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대신하여
그의 이모인 마하파사파제가 그를 양육했는데,
그는 매우 영리하여 일곱 살 때에 학예와 무술을 통달했고
Yasodhara와 결혼하여 라훌라(Rā hula)라는 아들을 낳기도 했다.
마야의 꿈속왕비의 꿈은 기원전 2세기에 세워진 거대한 불탑의 원형 부조에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다. 이것을 자세히 보면 마야의 꿈속에 나왔다는 커다란 코끼리가 새겨져 있다.
꿈꾸는 마야부인마야 왕비가 태몽을 꾸는 장면이다. 왕비는 시종들에 둘러싸여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3~4세기경 불탑의 난간에서 나온 부조 중 일부다.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해탈
석가의 아버지 정반왕은
아들에게 자기의 권좌를 물려주고자 했고,
현실세계의 어려움과 상관없는 좋은 상태에서 부귀에 넘치는 교육을 받도록 배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석가는 수레를 타고 길을 가다가
사람의 네 가지 모습을 차례로 보게 되었다.
첫째는 늙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노인,
둘째는 높은 열로 고통받는 환자,
셋째는 이미 썩어버린 시체,
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초월하여 안식을 누리는 승려였다.
이와 관련된 그의 글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동쪽 문 나갔을 적에 늙은 자 모습 보았네
세월이 흘러간 뒤에 그의 환영 보는 것 같아
남쪽 문 나갔을 적에 병든 자 모습 보았네
괴로움 견디지 못해 신음하는 모습 보았네
허무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명상 속에 번민했네
서쪽 문 나갔을 적에 죽은 자 모습 보았네
육체의 영혼이 떠난 제일 슬픈 이별 보았네
북쪽 문 나갔을 적에 구도자 모습 보았네
남루한 옷차림 속에 눈빛만은 총명했네
반가운 마음 깨달은 마음 출가의 길 택하셨네.
이때 그는 모든 부와 명예와 권력과 가족을 버린 채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 무렵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젊은 동자로서 맑고 깨끗하고 새까만 머리에 한창 나이인 스물아홉이었다.
그때 한없이 즐겁게 유희하고, 화려하게 장식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나는 그때 부모님이 울부짖고 여러 친척들이 좋아하지 않았지만,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면서
몸을 깨끗하게 보존했으며 입과 뜻을 청정하게 보호했다.
그래서 나는 이 계의 몸을 성취한 뒤에는 병이 없는 한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근심과 걱정도 없고 더러움도 없는
한없이 안온한 열반을 구하고자 스승을 찾아 나섰다.”
출가하기로 결심을 굳힌 붓다성을 나서기 전에 아내와 아들을 마지막으로 들여다보는 장면이다. 그가 출가하게 된 데에는 농염한 자세로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봤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흔히 석가의 일생과 관련하여,
불교도들은
그가 열아홉 살에 출가하여
서른 살에 도를 이뤘고
여든한 살에 입멸(入滅)하였다고 한다.
석가가 출가하게 된 배경에는
다른 것보다 현실에 대한 그 자신의 애착이 도리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는 특히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부친,
그리고 친지들과 영원히 같이 지내고자 하는 열망이 다른 사람보다 강했지만,
그러한 바람과는 정반대로
이 세상의 덧없음에 경악하여 차라리 영원한 구도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는 출가하기 전에 이미 기존에 나와 있던 모든 종교에 대해
나름대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당시의 유명한 아라라가라마와 울다라라마자를 찾아
두 차례에 걸쳐 6년 동안 정진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도달했다.
고행 끝에 수척해진 붓다2세기경에 제작된 간다라풍의 조각이다. 꽤 사실적이다. 고행은 그의 체력을 극도로 쇠약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히말라야 산속에서
하루에 삼(麻)씨 한 알, 보리 한 알로 연명하면서
6년 동안 고행에 정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고행을 하다가 심신이 쇠약해져 기절까지 했다.
그러면서 석가는 고통과 즐거움을 모두 물리치는 좌사(坐思)의 묘리를 깨달아
가부좌를 하고 수도하기 시작했다.
그 장소는 갠지스강의 작은 지류인 네아란자라의 근처에 서 있는
한 그루 보리수 아래였고
오늘날 그곳은 부다가야(Buddha Gaya)라고 불린다.
그는 보리수를 등지고 동쪽을 향해 길상초(吉祥草)를 바라보며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는 인생의 모든 어리석음(無明)을 없앤 뒤
이튿날 새벽녘 어둠이 사라지고 새날이 찬란하게 밝아올 무렵,
동쪽 하늘에 오르는 계명성의 빛을 바라보는 순간 홀연히 모든 것을 깨달았다.
대지를 진동하고 하늘을 울릴 수 있는 큰 깨달음이었다.
이른바 금강좌(金剛座)에 앉은 지 77일 만에 대각성도(大覺成道)
‘내가 얻은 이 법은 알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생각하기 어렵다.
내가 비록 사람들 앞에서 이 법을 연설하더라도 그들은 이것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고,
또 받는다 해도 받들어 행하지 않으면 한갓 수고만 끼칠 뿐이다.
그러니 차라리 나는 침묵을 지키자. 굳이 설법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석가모니가 깨달은 묘법은 우리가 말이 아닌 명상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가족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애착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을 성도(成道)라고 부른다.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하는 붓다성불득도(成佛得道)하는 장면으로, 도를 깨달아 불타가 되는 일. 특히 석존이 보리수 아래에서 대도(大道)를 이룬 일을 가리킨다. 성도 후 그는 2주 내내 양손을 모은 채 연꽃 위에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명상을 했다고 한다.
네 종류의 신자와 네 개의 성스러운 장소
최초의 설법 장면설법에는 보통 법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슴이 등장한다. 그래서 맨 처음 설법한 장소를 녹야원이라고 한다. 17세기 티베트 그림이다.
이때부터 그는 붓다(Buddha)(鹿野苑)이며 이 사실을 초전법륜(初轉法輪 中道)
붓다는 이때부터 오십 년간을 일관되게 설교로 보낸다.
우선 마가다(Magadha)의 왕사성(王舍城)에서 교화 활동을 한 뒤에
고향인 카필라로 돌아가는 도중에 가섭 삼형제와 그 제자 천여 명을 귀의하도록 했다.
나라타 촌에서는 사리불과 목건연을 교화하여 제자 1,250명을 제도했다.
고국에 도착하여 아버지인 정반왕과 아들을 신자로 삼고,
그 후 서북방 사위성(舍衛城)에 가서 급고독(給孤獨)과 기타(祇陀)를 제자로 삼았다.
이 두 사람은 공동으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교화 활동 5년째에는 베사리성에 가서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사파제와
자신의 아내인 야수다라를 제자로 삼았는데,
이때 여성 수행자 비구니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니 라고 부르는
남녀 불교도 네 종류의 완비(完備)를 보게 된 것이다.
오십 년 동안의 교화 기간이 지나고 노년에 이르자 그는 허리에 통증이 일어났다.
석존은 구시나라의 사라수풀에 들어가 밤중에 조용히 여든 살의 인생을 마쳤다.
그가 입멸할 때에
이백 살을 먹은 최고의 장수자 수발타라(須跋陀羅)가 급히 찾아와 불교의 법에 귀의했는데,
그가 석존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입멸 후 일주일 만에 그의 유해는 수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의 주재로
구시나라 성밖에서 화장되었고,
여덟 종족의 왕들에게 분배하여 봉안하도록 했다.
그 가운데 하나로 1898년 네팔 남방 국경 피프라바에 있는 큰 탑파(塔婆)는
Peppe에 의해 발굴되었고, 현재는 이것이 인도와 영국의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부처가 열반에 든 후, 8곡 4두의 사리(舍利)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할 뿐이니라. 쉬지 말고 각고를 다하여 정진할지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생애와 관련된 네 군데의 성스러운 곳(四聖地)은
그가 태어난 카필라의 ‘룸비니’와 큰 깨달음을 얻은 마가다의 ‘부다가야’,
최초로 설법을 전한 ‘녹야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반에 든 ‘구시나라’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유금자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