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도에 남북한이 동시 유엔 가입하기 전까지
우리는 뻑하면, 여적 유엔 가입도 못하고 있는 나라라며
자탄스런 말들을 했었는데.. 그건 못한게 아니라 안한 겁니다.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를 인정치 않았기 때문이지
남북한 모두 국력이나 자격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가입하려면 인정키 싫은 주체를 서로 인정해야만 했기 때문이었죠..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는 말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평화상이야 학문의 논외이니, 오리지날 노벨상에 대해서 없다는 얘깁니다.
물리,화학상은 잘 모르겠고, 문학상의 경우가 그런게 아닐까 하는..
역량이 없어서라기 보다, 뭔가 다른 요인에 의함이 아니겠냐는 거지요.
무릇 예술행위란..그야말로 아픈만큼 성숙해지는게 정설이려니와,
아프고 쓰라렸던 상처라면 우리보다 더한 민족이 근,현대사에 또 있을까요.
구한말에서 시작하여, 강점기와 전쟁과 군부시대를 거치기까지 흘린 피의 양이란
민족인구 구성대비 1인당 최고비율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그 무진장한 아픔에 대해, 문인들은 필경 글로서 승화시켰을 터이니
따라서 노벨아니라 해래비상을 받음직한 문인들이 나왔어야 마땅함에도,
그럼에도 왜 여적 수상자가 없는가.. 순전히 제 억지의 변을 들이대 보면
역량있는 문인이 없었다기 보다, 역량있는 번역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외국어의 한글화는 기가 막힌데 반해, 한글의 외국어화는 쉽지가 않은 모냥입니다.
형용사가 가장 풍부하다는 포르투갈어 보다도 한글이 더 우수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해마다 노벨 문학상이 배출한 번역본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수상자들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냉철하게 평가해 봅니다만
그들을 부정한다기 보다, 그들에 절대 밀리지 않는 우리 문인들이 있었고..
그 위대한 작가군 중 대표주자가 바로 박경리 선생이라는게 제 주장입니다.
선생의 작품이 영어판이나 불어,독어판까지 출간되기는 했어도
우리가 원문에서 보고 느꼈던 한국적인 정서의 아픔이나, 토속적인 표현을
그들도 인지하고 알아챌수 있도록 번역됐는지는 심히 의문스럽습니다.
그러하매..영문,불문,독문학자등 역자들의 표현력이 향후 일취월장하게 되어
사후에 수상된 예도 없지 않은바, 선생께서 후보자가 아닌 수상자로서 등재되길 바래봅니다.
스웨덴 한림원의 기준은 잘 모르겠으되, 생뚱맞은 제 기준으로는..
펄벅의 "대지"보다, 박경리의 "토지"가 훨 위대해 보이는 까닭입니다.. 으음

둥그런 건물이 공원 관리소인데..근무중이시던 할매의 친절함과 온화함.
저를 작가나 지망생으로 보셨는지, 1박에 대한 문의에 상세한 설명까지도..
인상이나 언행이 선생의 유족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묻지는 않았습니다.

원주에는 토지문학공원과, 토지문화관이 따로 있습니다.
선생 사후에 유족과 협의후 박경리문학공원으로 개명되었지만,
지금도 입구 돌덩이에 음각된 명칭은 토지문학공원이지요.
전자는 시내 단구동에 있고, 후자는 외곽인 흥업면 매지리에 있습니다.
두 장소가 말로는 서로 가깝다고 하는데,차로 30분 이상 소요되는 거리란
절대루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고 저는 우겨 댑니다..으음

80년대 초에 정릉에서 원주로 이사하면서 자리잡은 집입니다.
당시에는 탁트인 언덕이나 구릉 보이는게 좋아 선택된 한갓진 장소였지만
어느덧 중심가가 되버린 탓에, 90년대 말 재개발계획에 포함되어 헐리게 될 위기였는데
뜻있는 문인들의 보존계획에 의해 "토지"의 산실이 이렇듯 살아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매지리로 이사하기 전까지 거반 20년을 지내온 곳입니다.

대지가 7-8백평 정도 되 보이고 연건평은 6-70평 정도
내부는 요청에 의한 안내원이, 설명과 함께 볼수있게 해줍니다.

운명 한달전 죽음을 예감한듯 현대문학 2008년 4월호에 게재된
"옛날의 그집"이 이집인지, 정릉집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각가에게 죄송시런 말..(동상으 자태나 때깔이 과히 맘에 들지는 않더라는)

이 조그만 텃밭에서 당시로선 선구자적인 유기농 채소의 전형을 제시하셨지요.
영정사진 찍은 곳은 이 텃밭이 아니라, 매지리 텃밭 같습니다.

원주통신이란 연작 글도 참 따뜻합니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선생이 왼쪽 같습니까, 오른쪽 같습니까..어린시절의 선생이십니다..
어느 장돌뱅이의 무지 결례되는 표현을 빌면, 과부가 3대 입니다.
영주씨는 김지하씨로 인해 오랫동안 생과부 신세였지요..

제 기억에는 우리 집에 IDEAL 재봉틀이 있었습니다만
이 SINGER 재봉틀이 그 앞선 모델로 생각됩니다.
선생의 단아한 옷가지는 대부분 손수 지어 입으셨습니다.
내 글로서 먹고 살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려니와, 쓰고 싶은 글을 자유롭게 쓰려면..
3대의 가장으로서 따로이 호구지책으로 생각했던 재봉질이었지요.

텃밭에서 쓰던 호미, 장갑, 모자
출감한 지하씨가 텃밭에서 작업중인 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뒤를 돌아보며.. 원보 애비야! 니 밭 매봤노?
아니요, 지가 한번도 매본 적이 없는데요..
.......밭도 못 매본 놈이 뭔눔의 생명타령이고..
그후 지하씨는 선생 앞에서 가급적 생명사상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는..
장인과 사위는 옹서라고 하는데, 장모와 사위에 대한 한자어는 뭔가요..으음

원고지를 종으로 쓰시던 걸로 보아 6-70년대의 원고인듯.
손때 묻은 만년필에서 왜 주책맞게시리 가슴이 뭉클하던지..

40대 시절로 보이는데 한 미모하신걸로 보이지요? ^^
젊고 예쁜여자가 혼자 사는데 대해 주변의 온갖 궂은 소리에도 못들은 척하다가
모아둔 설움을, 연말되면 한꺼번에 꺼이꺼이 울어 제끼셨답니다..

선생의 단행본들을 모아 전시해 놓은 3층..
여기까지가 문학공원 내의 컷들이고..

이곳이 매지리에 있는 토지문화관입니다.
사택과 텃밭은 옆쪽에 따로 있고 98년 부터 작고하실 때까지 10년을 기거하셨던..
대회의실,세미나실, 집필실,도서실,야외무대,식당등이 있는데
작가나 지망생들에게 관리비조로 약간 받고 숙식제공을 해줍니다.
박완서 선생께서도 이곳에서 머물며 탈고한 작품이 있는데, 제목이 아리까리..



문화관 내에도 다양한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만, 걍 분위기만..

애당초 선생의 생각은 완결시까지 발표나 게재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가장으로서의 역할로 인하여 원치 않았던 연재가 시작되었고,
69년 6월에 시작된 1부 연재는 94년 8월15일.. 5부로서 그 위대한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3개월 단위로 작가나 지망생들이 머무르며, 산고의 아픔을 치뤄내는 곳..
첫댓글 요즘 뜸하시더니 이곳에 갔다 오셨구먼유


아, 원주야 하루 당일치기루 댕겨와도 충분한 거리인디
뜸한거랑 여그랑은 전혀 상관 없슈..
아 ! 박경리 선생님. 고수 형님 덕에 그 분을 다시 한 번 그려봅니다. '토지'를 다시 읽어야 겠습니다.
요 아래 허향님께서, 읽구나서 후회 안한다고 그러시자나유.. ^^
다시 읽을라믄 시간이 좀 걸릴꺼인디.. 약이나 욜씸히 짜시라는.. 으음
고수님 잘 봤습니다. 원주는 소생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치악산이 산맥처럼 분지를 내려다 보는 제 고향.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원주에는 지금은 작고하신 생명운동을 처음 창시하셨던 장일순 선생님과 한국 민주화의 성지를 지키셨던 지학순 주교님이 계셨던 고장이기도 합니다. 제가 고딩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원동성당에선 지학순 주교님의 주도로 유신반대 예배가 열리기도 했던 민주화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고수님 홧팅~~~우리 고향도 홧팅~~~
PS 근데 아직도 토지를 안 읽으셨습니까? 읽어보세요. 후회 안하실 겁니다...
아
허향님 고향이 원주시군요.. 장일순 선생과 지학순 주교의 만남이 김지하씨에게는 운명적인듯..
제가 안 읽었다고 하지는 않은것 같은데요.. ^^
앗 고수님 죄송함다.
제가 문장독해력에 문제가 많은 모양입니다.
죄송함다...정말로...지금 무릎 꿇고 사죄드리고 있습니다...
죄송할 일 항개두 읍써 보이는디요
^^
아니예요 고수님...고수님과 저의 견해에 일치하는 부분이 많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술은 잘 마시지 못하지만 밤새 토론할 수 있는 붕(朋)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죄송함다. 고수님의 의견도 여쭙지 않고 불쑥 이렇게 벗하자는 얘기를 꺼내서 말입니다). 아무쪼록 명절 지나면 신고식 겸해서 자리가 마련되길 희망합니다.
(참, 여러 카페 선배 제위께서 제가 인사말을 드리니, 제2의 투덜 고수님이 등장했다고 말씀하셔서 제가 고수님이 올리신 글들을 유심히 읽고 감명 받았습니다...)
김지하씨는 장모,사위 간인데도 박경리 선생과 그닥 잘 울리지가 않는 듯한 느낌은 왠지 몰것습니다. 근자의 언제 적 인가부터 그런 느낌이. . . . . 자당간 멀리까지 가셔서 취재 해 오신 글 잘 보았습니다.
그 느낌은 몬가 잘못된 느낌으로 보이는디요.. ^^
이장님헌티는 지 글 중에 "흰그늘의 길"이라는 글을 조회해서 보심을 권하고 싶다는..
저도 고수님 의견에 한표...
김지하 시인은 박경리 선생님을 만나면서(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박경리 선생님의 따님을 만나면서)
생명운동에 눈 뜨게 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五賊'과 '타는 목마름으로' 등 김지하 시인의 일련의 시들은 반민주 세력에 대한 올곧찬 증오로만 일관됐었다는 평가였습니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님을 만나면서
목표가 뚜렷한 생명운동으로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할까요.
박경리 선생님도 원래 반골이셨고 이호철 님 등 60~70년 초창기 재야 작가들과 연대하셨지만,
원주로 오셔서 생명운동의 대가이신 장일순 선생님을 만나 생명운동에 심취하시게 되었지요...
아하! 그러니께 울 이장님께서, 일전에 황석영씨의 발언과, 그로인해 코너에 몰렸던 황석영씨를 옹호한 김지하씨의 발언을 언급하신듯.. ^^
그래요.. 정치적으로 흐를 소지가 다분하므로 이쯤하여.. 그란디, 딴건 다 좋아도 논객이란 단어는 도무지 당치 않다는.. 남세스럽꾸르.. 으음
아 메이디님의 깊은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
나도 토지 다시 읽고 싶은데...태백산맥,혼불,한강 10권씩 전집으로 다 있구만...토지는 누가 쌔비갔다는...책 한참 사들이면...만날 우리집 와서 살금살금 갖고 가시는 분이 누군지 알지만...이제와 내노라 할 수도 엄꼬...아마 갖고 있지도 않을거라는...
근데 고수님 완전제대로 구경하고 오셨네요~누가 가도 그렇게 가이드해주시나요?
박경리 선생님 연세 들어서도 단아하다기 보다는 자신만만해 보이는 외모셨는데...어릴 적부터 돋보이는 미모가 어머님부터 내려오는 내력인가봐요~모전여전...덕분에 가본 듯 구경 잘 했지만 원주에 혹 들릴 일 있음 꼭 가보고 싶네요~(해달별...텍스티콘 하도 싫어해서 고수님 글엔 안해~ㅎㅎㅎ)
누가 가도 그렇게 가이드 해주시나요
← 요 대사가 몬소린지 접수가 잘 안되는디..
,
,
..얘네들만 읍쓰면 괘안타는.. 으음
텍스티콘을 싫어한다기 보다, 문장 속에서 보리알 끼듯 들이대는 해,
ㅋㅋㅋ...바이올렛님이 가셔도 고수님남큼 안내나 설명 받으실 겁니다...
지는 집에 토지의 만화로 된 책이 사서보는데 요즘은 만화로 된책이 책방에 찾아봐도 없어요,,,,만화로 된책이 7권이나 있는데~~
오세영이란 분이 만화로 그리기 전에 선생께 찾아가 대담하는 사진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만화로 보는것도 괘안을듯 해요.. ^^
몇 년 전, 문학기행 차 원주에 갔었더랬어요. 선생님께서 집필하시던 문 앞에는 경남 통영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대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지요. 집필을 하시다가 고향의 그 대나무를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신 듯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낮에는 밭일을 하시고 밤에는 집필을 하셨다고....이웃과는 소통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밭일과 집필을 하시면서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까요.....결국 자신과의 싸움이지요. 저는 박경리 선생님과 공통되는 것이 하나 있더라구요. 저도 30살에 아파 쓰러져 몇 년을 누워 있다 보니 이웃이 없어지고 말았지요. 그 후 긴 세월동안 거의 이웃과 소통하지 않고 혼자 공부하면서 지냈다는 것....
선생이 통영을 떠나온 후, 임종 직전에 다시 찾기 전까지 통영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는데..
아픈 기억 때문이었을 겁니다.. 좌익으로 몰려서 죽었다고 선생께선 얘기하지만, 진보성향이었던건 맞는건 같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恨, 남편과 아들을 잃게 되어 맺힌 恨.. 통영의 기억은 묻어두고 싶었을듯..
몇십년만의 귀향길을 동행한 영주씨에게 말하길, 이곳 통영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하셨다지요?
그건 글쿠, 그린님은 요즘 몸 상태가 좀 어떠신지요?
그린님! 박경리 선생님이 이웃들과 소통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은 고향이 원주, 특히 박경리 선생님이 거주하시던 곳과 지근거리인 저로선 동의할 수 없네요.
박경리 선생님은 이웃들의 말씀에 늘 귀를 기울어주시고, 마을 경조사에도 빠짐 없이 참석하셨던, 동네의 아른이셨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동네 주민들이 박경리 선생님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사실도 모를 정도였다니까요.
생전에 늘 단아하고 밝고 맑으셨던 분이셨지만, 늘 눈높이를 이웃들에게 맞추셨던 분이랍니다.
(제가 마을 주민들에게서 들은 얘기는 그렇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그리고 그린님 요즘은 어떠세요? 제가 그린님에게 정식으로 인사도 드리지 못했는데..
허향님 얘기가 맞을듯..
저희 고향 원주에 대해 많이 관심을 기울여주세요.
사실 군대생활을 하신 분들에겐, 원주가 군사도시로만 각인돼 있지만,
사실은 원주는 예로부터 반골과 저항의 고장이랍니다.
궁예가 철원으로 옮겨가기 전 후고구려 수도가 원주(당시 지명은 북원)였고,
고려말 충신이었던 운곡 원천석 선생님의 고향도 원주(당시 많은 고려의 충신들이 이방원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치악산 구룡사 기슭에서 은거하다 모두 사약을 받았음)였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제일 많은 고장도 원주(우리나에서 두번쨰로 오래된 원동 성당이 대표적)이고
70~80년 민주화운동의 한 축인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도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태동됐습니다.
문학기행을 갔을 때, 가이드를 하시는 분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아마 통영에서 올라온 직후 , 선생님의 원주생활 초기 근황을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낮에는 밭일하시고 밤에는 집필하시느라 이웃과는 관계형성을 맺지 못하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우쨌기나 좋은 정보를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강원도 쪽의 산새에 반하겠더라구요. 그라고 강원도 옥수수 정말 맛있데요. 요즘은 몸이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운전면허증은 따지 않고 있습니다. 저에게 무리인 듯 해서요. 글고 이 덧글은 고수 님과 허향 님을 향한 공동 답글입니다. 이해하세이 ㅎㅎ
그린님 잘 읽었습니다. 글구 그린님의 말씀에 댓글을 단 건 박경리 선생님에 대한 각자의 존경심이 각별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죄송함다. 인사 꾸벅~~~
그린님 얘기도 일리가 있군요.. 가이드에게 들은 얘기시고, 그 가이드도 근거없이 얘기하지는 않았을 터..
^^ 옥수수하면 강원도표 찰옥수수라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사한 후 초기에는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어요
초가을 문학여행 떠나신 고수님, 차분함 가운데 마음 속에 삶의 청량제 가득 담아 오셨을 듯. 토지, KBS에서도 SBS에서도 드라마로 제작되었지만 제게 있어 인상깊게 남아 있는 건 최수지 주인공의 KBS작품이라는.
최수지라는 연기자를 직접 지목한 사람이 선생이셨다고 하더군요..
하셨다던데..
차말로 그리 봐주시니 고맙긴 하다는.. 

서희의 이미지에 제일 근접해 보인다고 P.D에게
장례식 사진을 얼핏 봤을때, 무지 슬퍼하던 그녀의 모습이 기억난다는.. 으음
근디..... 문학여행
저도 훈장님 말씀처럼 고수님의 문학여행 참으로 의미가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최수지라는 연기자를 박경리 선생님이 직접 드라마 주인공으로 지적했다는 사실도 고수님 덕분에 또 알게 됐네요...
저도 고수 님께서 이렇게 정리 해 주시니 마음에 차악 와 닿아서 몇 번을 클릭했습니다. 사진을 보고 의미를 생각하고 느끼며.......좋은 글과 좋은 자료들은 반복하므로써 머리에 각인이 되지요. 저는 이번 추석에는 낼 아침 일찍 갑니다. 이제는 시댁이란 개념이 아니라 큰집이란 개념으로 차례를 지내러 가니 말이죠. 시댁은 시어른들이 살아계셔야 더 어울릴 듯...... 글고 30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우니....그래서 오늘은 시간이 좀 한가해서 사진 귕 한 번 더 하고 있습니다. 고수 님요, 늘 좋은 글과 사진 많이 올려 주세이.....
고수님. 잘계셨지요? 우리동네로 한번오시기 바랍니다. 드릴 이야기가 많습니다.
우리 동네라 하심은 워디를.. 영화관이 있는 부천을 얘기하시는 건가유


토킹어바웃이 건설적인 야그였으면 차말로 좋것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