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오피니언 입력 2024.02.17. 의사이자 투사, 조국 독립 위해 목숨 바친 몽골의 슈바이처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① 대암(大岩) 이태준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상황은 일제강점기 전후 시기만큼이나 위태로워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지식인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즉 희생정신이 필요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거룩한 헌신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애국지사들의 평전을 들려주고 싶은 이유다.” 한국사 격동의 시기 20세기 초, 몽골의 수도 고륜(현 울란바토르)은 북방초원 실크로드의 거점이자 청나라·러시아간 교역창구인 국제도시였다. 지금 이 도시의 중심 보그드칸산 기슭에 시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자이승전망대와 승전탑이 있고, 바로 아래 ‘이태준 선생기념 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며 몽골인에게는 고통 받는 수많은 생명을 의술로 구한 대암(大岩) 이태준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몽골정부가 2200평 땅을 제공해 2001년 조성한 공원이다. 한·몽골 친선의 상징이며 몽골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애국혼을 심어주는 곳이다. 필자는 십수 년 전 몽골 출장 당시 선생에 대한 얘기를 듣고 이곳을 처음 방문한 후 관심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태준 선생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인천 이씨 재실에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고, 서양문물과 기독교도 접할 수 있었다. 부인과 사별 후 두 딸을 동생에게 맡기고 24세 되던 1907년 경성으로 가면서 그의 인생여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몽골 국왕 중병 치료해 최고 훈장 받아 : 경성의 세브란스병원 인근 ‘김형제상회’에 취업해 기거하면서 그 형제 중 한 명인 김필순(1878~1919)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우사(尤史) 김규식(1881~ 1950)의 처남이자 김마리아의 삼촌이다.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인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 다니던 김필순은 1908년 1회 졸업생으로 다른 6명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된다. 이태준은 김필순의 권유로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해 1911년 2회로 졸업한다. 이때 찍은 6인의 졸업사진이 이태준의 남아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이태준에 큰 영향을 준 다른 한 사람은 김필순의 의형제인 도산(島山) 안창호다. 안중근 의사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어 일제에 체포되었다가 모진 고문 끝에 1910년 석방되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면서 의학생 이태준을 만나게 된다. 안창호의 권유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의 자매단체로 최남선이 조직한 청년학우회에 가입하면서 이태준은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일하던 1911년 일제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빙자해 신민회를 비롯한 애국지사를 대거 검거하는 105인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신민회원 김필순은 체포위기를 맞아 1911년 말 중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고 그를 서울역에서 배웅했던 이태준도 신변에 위협을 감지하고 급히 평양행 열차로 경성을 탈출해 중국으로 향한다. 그는 당시 신해혁명(1911년)의 본거지이자 만주, 연해주, 상해 등과 더불어 애국지사들의 망명지와 활동무대였던 남경으로 가게 됐다. 2년 가까이 선교사가 설립한 ‘기독회의원’ 의사로 일하면서 다시 김규식을 만나 본격적인 독립운동 후원에 나서게 된다. 1914년 이태준은 김규식의 권유로 아시아대륙 내부에 위치해 일본의 영향력에서 떨어져 있는 몽골의 고륜으로 떠난다. 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다시 멀리하고 새로운 독립운동거점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된 것이다. 김규식은 이태준과 함께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몽골 땅에서 독립군지휘관 양성을 위한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하려 했지만 자금문제 등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예정되었던 부지가 울란바토르 인근의 테를지국립공원 지역이었다 한다. 이태준은 고륜에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세웠고 이후 김규식의 사촌여동생 김은식을 만나 결혼한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머나먼 몽골 땅에 정착해 의사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두 가지 크나 큰 업적의 주인공이 된다. 먼저 의사로서는 의료 환경이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 있었던 몽골인들에게 근대의술을 베풀고 수많은 인명을 구했다. 당시 국제도시였던 고륜은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인구 다수가 감염되는 위기상황을 맞게 됐다. 이태준이 몽골인들을 병마에서 구출하는데 앞장서면서 동의의국 앞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몽골인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졌다. 당시 러시아나 중국계 병원은 외국인이나 부유층만이 이용할 수 있었으나 동의의국은 모든 이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의 의술이 널리 알려지면서 신의(神醫) 또는 신인(神人)으로 칭송받았다. 이렇게 의사로서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몽골의 마지막 국왕 보그드칸 8세의 어의 5인 중 유일한 외국인 의사가 되었고 이후 중병을 앓던 국왕을 치료하면서 1917년 ‘에르데니-인 오치르’라는 외국인 최고훈장을 받게 됐는데 이 사실은 상해의 독립신문에도 보도된 바 있다. 이태준은 몽골사회에서 의사로서 신뢰와 명성을 얻는 한편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연결되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고, 동의의국은 러시아와 북경·상해를 연결하는 몽골의 항일운동거점이자 연락사무소 역할을 하게 된다. 동시에 독립운동 인사들이 왕래하면서 숙식하고 치료받고 충전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문헌·자료 거의 안 남아있어 안타까워 : 1920년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상해임시정부에 200만 루불을 지원하기로 해 1차로 40만 루불의 금괴를 지급했고, 금괴운송에 참여한 이태준은 김립을 도와 8만 루불을 고륜에서 북경으로 성공적으로 전달하게 됐다. 이때 북경에서 이태준은 비밀항일운동단체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고 폭탄 불발 등으로 고심하는 그에게 우수한 폭탄기술자를 소개해주기로 하고 다시 고륜으로 향한다. 이태준의 운전수인 ‘마자르’는 1차대전시 헝가리 포로 출신으로 폭탄전문가인데 훗날 의열단 활동에 큰 도움을 준다. 1921년 당시 러시아는 볼셰비키혁명파와 왕정복고를 노리는 백위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인데 백위군에서 약탈과 살육으로 악명 높아 ‘미친 남작’이라 불리던 운게른 슈테른베르그 부대가 고륜을 점령하게 된다. 이때 고륜에서 철수하던 중국군 사령관은 자신의 주치의 이태준에게 함께 피신할 것을 강권했으나 추가 운송키로 했던 독립운동자금 전달과 김원봉에게 약속한 폭탄기술자를 데려다주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거절한다. 그 직후 이태준은 금괴 4만 루불 운송과정에서 백위군에 체포된 후 살해되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다.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해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그의 나이 38세. 서울에서 2000㎞ 떨어진 이역만리의 사건이었으나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비보였다. 그의 순국배경에는 일본사주설, 금괴약탈설 등이 있다. 1921년 이르쿠츠크로 가던 여운형은 몽골에 체류하면서 자이승전승탑 인근 구릉에 있었던 이태준의 묘소를 찾아 애도하고 기록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묘소의 행방을 알 수 없다. 현재 기념공원 묘소는 가묘다. 오늘날까지도 이태준의 이름은 몽골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고 한·몽골 친선의 상징이 되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너무 늦게 그 존재가 알려졌다. 1990년에 와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함안에서 이태준기념사업회가 결성됐다. 2021년 지금은 명관저수지로 수몰된 함안생가 근처에 이태준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울란바토르 기념공원 내 2010년 목조기념관을 신축했는데 지금은 개축공사중이다. 이태준이 함안에서 낳은 두 딸 중 둘째는 일찍 죽었고 첫째 딸의 후손인 외증손자가 경남 밀양에 살고 있다.
선생은 100여 년 전 낯선 이국땅에서 순국했지만 조국의 국권과 자유회복을 위해 젊음을 바쳐 헌신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그의 숨결은 우리 가운데 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문헌기록이나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다. 중국-러시아-일본 등으로 이어지는 국제관계 속에서 인류평화를 위한 선각자로서 또 휴머니스트 의사로서 활동한 그의 일생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