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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변호사 한명이 만들어낸 조세천국 |
Cover Story 조세피난처 대해부- ① '네비스'는 어떻게 검은돈 은닉처가 됐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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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바다뿐인 작은 섬나라… 법률·인프라·수수료율 모든 것 역외 탈세 전문가가 설계
카리브해의 섬나라 네비스는 전형적인 조세피난처다. 등록 수수료와 대행료 1천달러만 있으면 언제든 익명으로 회사를 설립할 수 있다. 고객서비스를 위해 조세회피 지역을 찾던 미국의 한 변호사가 아예 신생 독립국가인 네비스를 그렇게 변모시킨 것이다. 많은 자금이 들락거리는 것으로 돼 있지만 네비스에서 이뤄지는 일이라곤 수수료를 챙기는 것 말고 거의 없다.
하우케 구스 Hauke Goos <슈피겔> 기자
조세피난처를 구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밴스 에이머리는 친절한 눈빛을 가진 검은 피부의 남자다. 그는 지금 찰스타운(네비스의 항구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야자수로 둘러싸인 광장, 메모리얼스퀘어에 서 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네비스의 총리 에이머리는 여기에서 연설을 할 예정이다. 관중은 이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에이머리의 연설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계속 그와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누군가가 나타나고 있다. 모두 중요한 일처럼 보였다.
그 자리에서 외부인이 네비스 총리에게 그의 섬나라가 어떻게 생존하는지 질문할 기회는 좀체 주어지지 않는다. '만일 어느 날 더 이상 외국인 자금이 섬에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투자자에 관한) 정보 교환에 합의하는 국가 간 협약이 맺어져 이들이 떠나게 된다면 섬의 운명은 어찌되는가' 같은 질문 말이다. "어째서 더 이상 방어가 불가능한 사업모델을 방어하려는 겁니까?"라고 묻자 에이머리는 질문을 주의 깊게 듣는 것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그는 "전자우편을 보내십시오"라고 하더니 "일정이 빠듯하다"며 자리를 피했다.
약간 잠긴 에이머리의 목소리는 미국 가수 해리 벨라폰테를 닮았다. 그가 불친절해서라기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설명해야 하는 괴로움 때문으로 느껴졌다. 지난 4월 초, 13만명에 달하는 전세계 역외 탈세자 명단이 언론인들에게 넘겨졌다. 그로부터 사흘 뒤 독일의 명문 축구 구단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 울리히 회네스가 수백만유로를 스위스에 몰래 예치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신문 1면을 장식했다. 당시는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절세와 탈세의 경계가 어디인지 모호했고, 이 사건은 금세 독일 총선의 주요 이슈가 됐다.
2층 건물 뒤로 나른하게 펼쳐진 카리브해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섬 중앙에 있는 화산 꼭대기는 두꺼운 구름에 묻혀 몸을 감췄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역외 탈세자 명단이 보도되고 일주일이 지난 4월11일, 에이머리는 워크숍 도중 몇가지 주목할 만한 내용을 언급했다. 국제 금융업계 앞에 놓인 도전과 조세피난처 네비스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상황의 심각성에도 네비스의 금융 부문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온라인을 통해 회사를 설립하는 게 지금보다 편리하도록 최신 컴퓨터를 구입할 예정이다. 새로운 마케팅 전략이 필요하다. 진짜 대어를 끌어들이려면 낮은 수수료를 미끼로 네비스에 자회사를 등록하게 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부자 나라들의 조직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조치를 피하려면 법을 개정해야 한다."
카리브해에 있는 네비스는 세인트키츠섬과 함께 세이트키츠네비스연방을 구성하고 있다. 인구 1만2천명의 작은 섬나라로 대부분 노예의 후손이다. 네비스섬 중앙에 있는 화산 꼭대기가 짙은 구름에 묻혀 몸을 감췄다. REUTERS
유령회사 등록 수수료로 먹고사는 나라
63살의 에이머리는 원래 교사였다. 이번이 총리로서 세번째 임기다. 지금과 비교하면 1992년부터 2006년까지는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땐 금융위기와 탈세자 명단 공개 같은 것이 없었고, OECD가 네비스 같은 조세피난처를 뿌리 뽑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전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로 9시간 거리인 네비스는 푸에르토리코 동쪽의 소앤틸리스제도에 속한 작은 섬나라다. 세인트키츠섬과 함께 세인트키츠네비스연방을 구성하고 있고, 영연방의 회원국이다. 인구는 약 1만2천명으로 대부분 노예의 후손이다. 그중 200명이 역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애초 이 섬을 부유하게 만든 건 사탕수수 재배였다. 금융서비스산업이 시작된 것은 불과 몇년 전이다. 그러나 지금은 관광산업 다음으로 규모가 커졌다.
네비스의 전략은 다른 카리브해 섬나라인 케이맨제도·앤티가·영국령 버진아일랜드·바하마 등과 다르지 않다. 이들 나라는 모두 과거 노예섬이었고, 한때 전세계적 조세회피 비즈니스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 나라는 동맹을 맺어야 하지만, 글로벌 경제는 이들 나라를 경쟁자로 만들었다.
네비스가 조세피난처로 변신하던 때 에이머리는 정부의 재무부 장관이었다. 섬에는 일자리가 거의 없었다. 사탕수수 산업은 이미 1957년에 완전히 끝났고, 젊은이들은 누구나 섬을 떠나길 꿈꿨다. 가끔 소형 유람선이 부두에 들어왔지만 큰길 하나에 벤치 몇개, 미용실 몇개에 불과한 이곳이 빛나는 태양만으로 유명 관광지가 되긴 힘들었다. 영국인들은 이곳에 좌측통행 외에 정치적 안정과 정비된 사법체계, 그리고 98%의 문자해독률(식자율)을 남겼다.
익명으로 24시간 안에 기업 등록 가능
독립 1년 뒤인 1984년, 한 미국인 변호사가 네비스에 나타났다. 그는 자기가 예전에 프랑스의 해안도시 리비에라에서 일했고, 주고객은 고국의 높은 세율을 피하고 싶어 하는 선주들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네비스 정부가 리비에라와 비슷한 조세피난처를 세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결국 미국인 변호사와 그의 직원들이 조세피난처를 위한 인프라를 마련했다. 그들은 필요한 법률을 만들고 직원들을 교육한 뒤 (기업 등록) 수수료를 정했다. 모델은 미국 동부의 조세피난처인 델라웨어였다. 소득세나 재산세 같은 직접세는 아예 없었다. 자신의 노고에 대한 대가로 미국인 변호사는 10년간 네비스의 독점적 투자 중개인이 됐다.
네비스 같은 조세피난처는 비합법적으로 벌어들인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려 하거나 자금거래에 따른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장소다. 그들은 조세피난처에 회사를 세우거나 은행 계좌를 만든다. 네비스에선 익명으로 계좌를 개설하거나 실제 소유주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명의로 회사를 등록하는 게 가능하다. 결산보고 의무도 회계장부 보관 의무도 없고, 주주총회는 전세계 어느 곳에서 언제든 열어도 된다. 백만장자들이 서류상 일반인으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새 사업은 잘 운영됐지만 본격적으로 붐이 일어난 것은 10년 독점계약이 끝나고 경쟁자들이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한 시점이다. 당시는 1990년대였고 불가능이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네비스가 자랑하는 최고의 상품은 IBC(International Business Company·국제 비즈니스 회사)"라고 네비스 국제서비스제공자협회 여성 상담원이 말했다. 네비스에 등록된 회사의 경영자는 익명으로 남고 공개되지 않는다. 거래는 외국에서만 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IBC는 네비스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IBC 설립자는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회사를 만드는 방법은 아주 쉽다. 고객은 인터넷 웹사이트에 등록된 60여곳의 에이전시 중 하나를 고르고 서류를 작성한 뒤, 신분증과 운전면허증 그리고 몇가지 신임장을 네비스로 보내면 된다. 가장 선호되는 운송 수단은 택배다.
"원본을 제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인증된 사본이면 충분하다"고 답했다. "직접 방문해야 하는가?"라고 묻자 "온라인으로 서류만 작성하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처리된다"고 설명했다. 에이전시는 미래의 사주, 그러니까 조세회피자의 전과 유무를 확인하고 만약 깨끗하다면 새 회사로 등록해준다. 이 모든 과정이 보통 24시간 이내에 처리된다. 서비스제공자협회의 친절한 여성 상담원은 "이것이 바로 많은 고객들이 네비스를 찾는 이유"라고 말했다.
정부에 내야 하는 사업자등록 수수료는 220달러이고, 여기에 에이전시의 서비스 비용이 더해진다. 전체 패키지 가격은 겨우 1천달러에 불과하다. 종종 중복되기도 하는 2만여개의 페이퍼컴퍼니에서 매년 440만달러가량의 수수료 수입이 들어온다. "역외 피난처 사업은 우리에게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다"고 시어도어 홉슨은 말했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을 가진 그는 50여년간 변호사로 일했다. 악수를 건네는 손에는 굵은 금반지가 끼워져 있다. 영국 런던에서 대학을 다닌 홉슨은 영국식 억양을 카리브해 고향으로 가져왔다. 선반 위에는 크리켓팀 주장이던 그의 모습이 찍힌 흑백사진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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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슨은 80살이다. 금융산업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의 네비스를 알고 있는 그는 네비스의 금융산업이 몰락할 이후에 닥칠 상황을 두려워했다. 그는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사람들이 네비스를 찾는 단 하나의 이유는 비밀보장제도"라고 말했다. "나는 OECD 국가가 우리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불안하다. 이 작은 카리브해 섬에는 천연자원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여기서 가지고 있는 것은 태양과 모래와 바다뿐이다."
네비스 사람들은 이 사업이 비도덕적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걸까? "부자 나라 경제에 대한 우리의 동정심은 제한적이다"라며 홉슨은 여전히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말했다. "그 나라들은 카리브해 국가를 책임져야 한다. 그들이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만들어 여기로 끌고 왔고 황금과 설탕을 집으로 가져갔다. 그들이 이 땅에서 이익을 얻었으니,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나라들의 세수에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은 우리와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다."
섬에서 OECD는 '위협' 그 자체다. OECD 회원국들은 계속 새로운 협약을 체결하고 네비스가 자랑하는 비밀보장제도를 무너뜨리고 비용을 상승시키는 새로운 요구,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낸다. "미국은 자국의 조세피난처인 델라웨어에는 우리보다 훨씬 압력을 덜 가한다. 우리가 양보할수록 그들은 더 많은 걸 요구할 것이다. OECD는 우리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든 살든 그들의 관심 밖이다." 미국이 네비스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비자를 거부할 수도 있고,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할 수도 있다. 아니면 네비스 은행의 미국 금융시장 진입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미국 금융시장에서 거래를 차단당하는 것은, 곧 세계 금융시장에서 발이 묶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더라도 OECD가 추진하는 방향이 옳지 않은가? 세계화 시대에 '투명성'은 공정한 세계경제를 위한 전제조건이 아닌가? 이 질문을 재무부 사무차관 로리 로렌스에게 해볼 수도 있다. 로렌스는 지난 20년간 여러 명의 총리 밑에서 사무차관으로 일해왔다. 그는 재정 및 기타 세부적인 사항을 책임지고 있다.
그의 강의는 길고 여러 내용이 얽혀 있었지만 말하려는 핵심은 이랬다. 투명성 요구는 네비스가 투자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약속인 자산 보호를 위협한다. 로렌스는 대표적인 사례로 뉴욕에 살고 있는 한 미국인 외과의사를 들었다. 이 외과의사는 의료사고로 환자에게 소송을 당할까 두려워 카리브해 지역에서 법적 보호를 받으려 한다. 많은 자선단체가 역외 지역에 있고 그중에는 한 어린이병원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객은 실제로 비밀 보장 때문에 네비스를 찾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를 들어 '원오프 컴퍼니'(One-off Companies)라 불리는 단 한차례의 거래를 위해 세워지는 회사다. 이런 회사는 들키지 않고 단 한번에 거대한 금액을 고국에서 외국으로 빼돌리려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여성 상담원은 "그런 거래는 불법"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에이전시는 이런 종류의 거래를 거부한다. 하지만 모든 에이전시가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에이전트는 소유주가 누구인지 알지만 비밀보호 조항에 묶여 있다. 고객의 신분은 법원 명령이 있을 때만 밝힐 수 있다고 여성 상담원은 말했다. 그 법원이 어디에 있냐고 묻자 "네비스에 있다"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법원이 고객 신분 공개를 명령하는 일이 자주 있는가?"라고 묻자 그녀는 "거의 없다. 사실 한번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한 남자가 세인트키츠네비스연방 이민국 사무실에 들어가고 있다. 이 나라에선 25만달러만 투자하면 시민권을 얻을 수 있고 출생지가 표기되지 않은 여권을 받는다(왼쪽). 앙헬 구리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은 역외 탈세자 명단 공개 뒤 조세피난국에 금융거래자 정보 교환, 세율 인상 같은 조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오른쪽). REUTERS
주민들에게는 소득세 없는 낙원
궁금한 것은 조세피난처 주민들이 선진국의 조세회피자들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조세피난처 주민들은 부자들을 그저 고객으로 볼 뿐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단순한 서비스 제공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자금 출처나 형성 과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합법성 여부는 부자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세무사와 의논해 해결할 문제다. 조세피난처 주민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되도록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한다. 그리고 기업이 내는 수수료를 환영할 뿐이다.
과일장사를 하는 마이크 사담(48)은 전형적인 조세피난처 주민이다. 그는 찰스타운 중심부에 판매대를 가지고 있다. 2개의 탁자와 의자는 발코니 아래에 있어 비가 와도 과일이 젖지 않는다. 사담은 영국령 가이아나에서 태어났다. 장성한 두 자녀가 있는 그는 얼마 전 자기 소유의 트럭을 구입했다. 10년 전에 그는 네비스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의과대학 건물관리인으로 일하다 어느 날 은행 대출을 받아 땅을 샀다.
이후 사담은 호박, 작고 반짝이는 파프리카, 달콤한 바나나, 양파, 오이를 키웠다. 네비스에선 그의 고향과 달리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게 바로 이곳의 좋은 점"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담이 네비스에 내는 유일한 직접세는 과일과 채소 판매를 위해 매달 영업허가를 신청할 때 내는 15달러가 전부다. 정부는 매달 그에게 서류를 보낸다. 사담은 소득을 기재하고 서류를 반송한다. 잠시 뒤 그는 자동차를 타고 도시로 나가 영업허가세를 납부했다.
정부는 그가 정확한 금액을 적었는지 한번도 감독한 적이 없다. 지금껏 사담이 신고한 소득에 대해 정부는 가타부타 한마디 반응도 없었다. 사담은 영업허가서 없이도 과일과 채소를 팔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허가받고 영업하는 쪽을 택했다. "난 여기서 살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약간의 소득을 환원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네비스는 국민에게 직접세를 징수하는 것을 포기한 나라다. 대부분의 국민이 식당과 호텔에서 일하거나, 아니면 수공업자다. 모든 국민이 면세정책의 혜택을 받는다.
10여년 전에 이 섬으로 이주한 마틴 댈글리시는 네비스의 법률이 실제 매우 훌륭하다고 말했다. 영국 태생인 댈글리시는 기업 컨설턴트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예전에 미국의 거대 통신회사 AT&T를 8개 회사로 분할했던 인물이다. 그는 1996년 50살에 은퇴했다. 그의 집은 산기슭에 세워진 옛 설탕공장 건물이다. 댈글리시는 17세기에 만들어진 담벼락의 일부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그가 이 건물을 마음에 들 때까지 수리하는 데 8년 이상 걸렸다. 정원에는 커피나무, 아보카도, 파파야가 자라고 있었다. 가지와 토마토를 키우는 곳에는 원숭이들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철조망을 쳐놨다. 그의 집에 있는 수영장 너머로 햇살 가득한 풍경이 들어왔다. 한쪽은 대서양이고 다른 쪽은 카리브해다. 댈글리시는 지금 생활에 매우 만족한다. 그가 더 원하는 게 있다면 이곳 사람들이 좀더 프로정신을 갖는 것이다. "사람들, 특히 에이전트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가 아니다. 네비스는 최고 수준의 전문가를 영입할 돈이 없다."
3년 전, 당시 총리 조지프 패리는 조세피난처의 핵심 사업인 기업등록을 민영화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레바논에 사업자등록이 돼 있는 UTICO(United Trading Investment Company·연합무역투자회사)의 익명의 사주를 파트너로 선택했다. 신임장은 없었다. UTICO는 네비스에 자회사를 설립하고 총리의 딸인 소냐 패리를 이사장으로 앉혔다. 이 계약은 최소 20년간 유효하고 소프트웨어는 그 뒤 UTICO 소유로 이전된다. 모든 기업정보가 담긴 서버를 네비스 외부에 설치하는 것도 허용된다.
이 거래 때문에 결국 패리는 총리직을 잃어야 했다. '큰 사업'에 끼고 싶은 아마추어 같은 아이디어였다. 댈글리시는 "역외 지역 사업이 부자 나라들의 조세정책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대기업이 매출이나 제품 디자인만으로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던 시대는 점차 지나가고 있다. 투자자금을 마련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세금을 아끼는 것이다. "기업이 조세피난처에 내는 수수료보다 자국에서 내는 세금이 더 많은 동안에는 조세피난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댈글리시의 주장이다.
총리는 조세회피 돕는 컨설팅회사 출신
메모리얼스퀘어의 집회가 있은 지 5일 뒤 에이머리가 인터뷰에 응했다. 그의 사무실은 과거 호텔로 사용된 건물 안에 있었다. 호텔 기둥의 안내판에는 예전에 이곳에서 넬슨경이 파티를 열었다고 쓰여 있다. 에이머리는 "네비스 국민이 역외 피난처 사업을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은 얼마 전 '역외 피난처'라는 명칭을 바꿔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 용어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국제금융서비스'(International Financial Services)라는 이름으로 마케팅에 나설 요량이다.
에이머리는 "통계로 볼 때 역외 피난처 분야는 지금도 매우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많은 회사들이 네비스에 등록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갖고 있지 않지만 금융 분야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지난 1월 에이머리가 다시 정부 수장으로 선출되기 전, 그의 사무실은 찰스타운 중심부에 있었다. '글로벌 컨설턴트&서비스'였던 회사 이름도 '옥타곤 컨설턴트&서비스'로 바꿨다. '역외 지역 기업등록 서비스' 회사다. 에이머리는 교사치고는 상당히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점점 강해지고 있는 국제적 압력에 어떻게 대응할 생각인가? OECD의 지속적인 경고에 대해서는 어떤 대비책이 있나?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고 우리가 힘들여 노력할 때마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새로운 요구를 들고 오는 경험을 했다." 에이머리의 말이다. 그는 대화 상대방의 눈을 보지 않는 습관이 있다. 대신 의자 뒤 블라인드에 방송용 프롬프터처럼 답변 문구가 쓰여 있기라도 한 듯 상대를 약간 비낀 곳에 시선을 뒀다.
"물론 이 문제는 사법체계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OECD 국가들은 이득을 얻고 우리의 평판은 땅에 떨어진다." 만일 OECD의 압력과 반복되는 탈세자 명단 공개, 스캔들 논란으로 역외 지역 사업이 지금처럼 규모를 유지하지 못하고 축소되면 어떻게 할 생각일까?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이머리는 블라인드를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비스 같은 섬나라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뭐가 있을까? 수수료를 낮추고, 일처리 속도를 더 빠르게 하고, 사업에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나라들과 정보교환 협약을 맺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들의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국가인 미국과의 협약은 될 수 있는 한 미루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쩌면 러시아와 중국의 새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중동이나 아시아 국가들로 사업을 확장할 수도 있다. 에이머리와 그의 국민은 새로운 기회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위협감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세인트키츠네비스연방은 투자자에게 시민권을 제공한다. 수수료를 포함해 25만달러만 있으면 세인트키츠네비스의 국적을 획득할 수 있다. 새로운 시민은 얼마 전부터 출생지가 표기되지 않은 여권을 받는다. 이는 독일이라면 입국 거부를 당하게 될 사람들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해주는 의도적인 태만 행위다. "우리가 살아남지 못하면 결국 남는 것은 OECD 국가들 뿐"이라고 에이머리는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다시 거지가 될 것이다.
ⓒ Der Spiegel 2013년 18호 All inclusive 번역 황수경 위원
*네비스의 정식 명칭은 세인트키츠네비스연방이다. 세인트키츠와 네비스 2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세인트키츠섬은 1782년부터, 네비스섬은 이듬해부터 영국 통치를 받았고, 1967년 영국 연방주에 편입됐다. 1983년 9월19일 세인트크리스토퍼네비스연방으로 독립했고, 1988년 세인트키츠네비스연방으로 이름을 바꿨다. 세인트키츠로부터 분리를 원하는 네비스섬은 자체적 입법권과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