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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대석학 이희안 선생이 지어 인재 양성
초야에 묻혀 학문 정진…'嶺中 3高' 추앙 받아
당대 명유석학과 교유…조식 선생과 가장 절친
황강이 남명과 함께 학문을 연마한 황강정. |
황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해 합천을 거쳐 낙동강과 합류한다.
황강 하류인 경남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지점의 푸른 절벽 위에 황강정(黃江亭)이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황강(黃江) 이희안(1504~59)이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강변 절벽 위에 있는 황강정에 오르면 아득한 절벽 아래로 흐르는 푸른 강물이 더위를 가시게 하고,
멀리 굽이굽이 펼쳐지는 황강 줄기와 산봉우리들이 절경으로 다가온다.
정자에 이르는 길 초입에 황강의 절친한 벗인 남명 조식이 황강정을 방문해 남긴 시가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11세 때 논어를 읽고 개명(開明)한 황강
황강의 자는 우옹(愚翁)이고 호는 황강이다. 강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된 부친 이윤검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기묘사화때 삭탈관직되었고, 큰 형 월휘당(月暉堂) 희증은 일두 정여창의 문인으로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지냈으나, 황강이 여섯 살 되던 해에 20대의 꽃다운 나이로 운명하였다.
중형 교리공 희민은 문과에 합격하여 승의랑이 되었으며, 부친과 함께 기묘명현(己卯名賢)에 들었다.
중형 역시 20대에 세상을 하직했다.
황강은 부친의 가르침도 받았지만, 특히 중형에게 소학을 배웠다. 10세에 글을 지을 수 있었고,
11세 때 비로소 논어를 읽고 활연히 개명(開明)했다고 전한다.
황강은 14세에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를 뽑는 초시)에 합격한 수재였으나
16세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 부친과 정암(靜庵) 조광조의 문인이던 중형이 삭탈관직되는 변고를 겪었다.
그로 인해 17세 때는 부친이 별세하고 18세 때는 중형마저 별세함으로써 벼슬의 뜻을 접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게 된다.
22세 때는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기도 했지만,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다.
40세 때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종4품인 종친 또는 문관품계의 위호)로 올라가
성균관에 머물면서 퇴계 이황과 경전의 뜻을 서로 토론함에 마음이 합하여 사귀기를 깊이 하였다.
훗날 회재(晦齋) 이언적의 추천으로 유일(遺逸: 과거를 통하지 않고 재야의 학자를 바로 발탁하는 제도)에
천거되어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지만, 몇 달간 근무하다가 깨끗이 물러나 본분대로 일생을 보내며
학자들의 사표가 되었다.
#당대 명유석학들이 모여든 황강정
황강은 28세 무렵에 황강의 절승지에 황강정을 짓고 좌우에 도서(圖書)를 갖춘 뒤,
고요히 정자에 앉아 치열하게 자신의 완성에 힘을 쏟으면서 제자 양성과 어머니 봉양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황강정에는 남명(南冥) 조식, 청송(聽松) 성수침, 송계(松溪) 신계성, 대곡(大谷) 성운,
동주(東洲) 성제원, 삼족당(三足堂) 김대유 등 명유석학들이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고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탁계(濯溪) 전치원은 소학을 가지고 와 배움을 청하였다.
탁계가 왔을때 황강은 그의 뜻을 떠보기 위해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제자 되기를 청하며
종일토록 곧게 앉아 대기하기를 5일 동안이나 계속했다. 황강은 학문을 배우려는
그의 굳은 뜻을 가상히 여기며 탁계의 이같은 자세를 '정문입설(程門立雪)'에 비유했다.
정문입설이란 송나라 때 유조와 양시가 강남에서 하남까지 수천리길을 가서 정이천(程伊川)을 찾았을 때
마침 정이천이 정좌(靜坐)수행 중이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정좌를 마치길 기다렸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지 문밖에는 눈이 한 길이나 쌓였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는 미수(眉瘦) 허목이 쓴 탁계 비문에도 전하는 유명한 일화이다.
탁계는 훗날 선생을 위한 모든 사업을 도맡아 하였다.
#황강과 절친했던 남명
황강과 가장 친한 친구를 꼽는다면 남명 조식을 들 수 있다. 남명이 김해 산해정(山海亭)에 있을 때는
황강이 산해정에 가서 '산해연원록(山海淵源錄)'을 편수하였고,
남명은 황강정에 수시로 드나들며 함께 학문을 연마했다.
황강에게 준 시와 황강정에서 읊은 시만 해도 여섯 수나 전한다.
그리고 남명은 훗날 황강의 묘갈명도 지었다. 글씨는 탁계가 썼다.
남명이 지은 제황강정사(題黃江亭舍) 시다.
'길 가 풀들 이름 없이 죽고(路草無名死)/
산의 구름 자유로이 인다(山雲恣意生)/
강물은 한 없는 한을 흘려보내며(江流無限恨)/
돌과 다툴 일 없도다(不與石頭爭)'
황강은 학자이면서도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했다고 한다.
송계 신계성은 당시 인물평에서 "삼족당은 높이 트여 구속받지 않는 기운을 가졌고,
남명은 설천한월(雪天寒月)의 기상이며, 황강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큰 역량의 솜씨를 가졌다"고 평했다.
당시 사람들은 세 군자를 잘 형용했다고 했다.
그리고 남명과 대곡, 삼족당, 청송, 동주 등과 막역지교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당대의 걸출한 인물로 꼽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명은 뜻과 기운이 걸출하여
아무나와 함께 섞여 교유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강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동계(桐溪) 정온은 송계, 남명, 황강을 영중(嶺中)의 삼고(三高)로 꼽았다.
당대의 명유석학으로 꼽히던 황강의 문집이 세상에 전하지 못해 후학들이 크게 아쉬워했다.
탁계가 원고를 수집하여 황강의 본가에 보관하면서 출판을 기다리던 중 화재가 나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후 400여년이 지난 뒤 유림과 자손들의 각별한 노력으로 두 편의 글이 수집돼
'황강선생실기'라는 제목의 목판본으로 출간됐고,
그의 행적은 '왕조실록' '국조보감' '동국유선록' 등과 선현들의 문집에 나타나 있다.
유림에서는 연곡서원(淵谷書院)을 세워 제향을 올리다가
훗날 청계서원(淸溪書院)을 건립, 오늘날까지 추모하며 학덕을 기리고 있다.
◇황강정 현판에 담긴 뜻
거경당(居敬堂)-마음 통일하고 이치를 궁구
비해재(匪懈齋)-낮밤으로 덕 닦기를 게을리 말라
백원당(百源堂)-백세의 근원지
지금 황강정에는 노상직(盧相稷)이 쓴 중수기문이 있고,
황강의 13세손 순용(淳容)이 쓴 기문이 남아있다.
정자 안에는 '거경당(居敬堂)' '비해재(匪懈齋)' '백원당(百源堂)'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남명이 자작시를 쓴 것으로 판명되는 '제황강정(題黃江亭)'도 전해오고 있다.
거경당은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고 이치를 궁구한다는 뜻인 '거경궁리(居敬窮理)'에서 온 말이고,
비해재는 시경에 '낮이나 밤이나 덕 닦기를 게을리하지 말라(夙夜匪懈)'고 한 데서 취한 것이다.
백원당은 백세(百世)의 근원지라는 뜻이다.
황강정 바로 아래에는 황강의 7세손인 이봉서가 강학한 관수정(觀水亭)이 있다.
황강정은 현재 황강의 14세손 이교용씨(76)와 15세손 이남기씨(73)가 관리하고 있다.
한편 유림에서는 오늘날까지 황강정에서 황강을 추모하는 석채례(釋菜禮)를 올리고 있다. 김봉규기자
▶남명 조식이 황강정을 방문해 남긴 詩
강 위로 제비 어지러이 날고 비 묻어 오려는데(江燕差池雨欲昏)
보리 누렇게 익어 누렁 송아지 분간할 수 없네(麥黃黃犢不能分)
접때부터 나그네 생각 조리 없이(向來客意無詮次)
도리어 외로운 기러기 되고 싶기도 하다가 또 구름 되고 싶기도 하네(旋作 孤鴻又作雲)
들어가는 문인 '망도문(望道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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