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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 서문
미셸 푸코
이광래 역
이 책의 발상은 보르게스Borges에 나오는 한 原文으로부터, 그 원문을 읽었을 때 지금까지 간직해 온 나의 思考----우리의 시대와 풍토를 각인해 주는 ‘우리 자신의’ 사고----의 전지평을 산산이 부숴버린 웃음으로부터 연유한다. 그 웃음과 더불어, 우리가 현존하는 사물들의 자연적인 번성을 통제하는 데 상용해 온 모든 정렬된 표층과 모든 평면이 해체되었는가 하면 오래전부터 용인되어 온 동일자와 타자 간의 관행적인 구별은 계속 혼란에 빠지고 붕괴의 위협을 받았다. 이 원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한 백과사전’을 인용하고 있다.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a 황제에 속하는 동물, b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c 사육동물, d 젖을 빠는 돼지, e 人魚, f 전설상의 동물, g 주인없는 개, h 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i 광폭한 동물, j 셀 수 없는 동물, k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l 기타, m 물 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n 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이와 같은 분류법에 대해 경탄하는 가운데 우리가 단번에 감지할 수 있는 것, 즉 우화를 통해 우리에게 또다른 사고체계의 이국적인 매력으로 보여지는 것은 우리의 사고의 한계, 즉 ‘그것’에 대한 사고의 절대적인 불가능성이다.
그러나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여기서 우리는 어떤 류의 불가능성에 직면하게 될까? 이와 같이 특이한 항목들 각각에 정확한 의미와 논증 가능한 내용이 주어질 수 있다. 물론, 몇몇 항목은 환상적인 존재----전설상의 동물이나 언어----를 포함한다. 그러나 중국의 백과사전은 그 존재들 각각을 독립된 항목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영향력을 제한받는다. 그 백과사전은 실재하는 동물(광폭하거나 물 주전자를 깬 동물)과 상상의 세계에서만 생각될 수 있는 동물들을 세심하게 구별한다. 위험한 혼합의 가능성이 배제되었으며, 문장과 우화는 그들 본래의 최고 지위로 복귀되었다. 따라서 상상 불가능한 양서류의 소녀, 발톱을 가진 나비, 비늘로 덮인 보기 흉한 피부, 다양한 형상을 한 악마의 얼굴, 불을 토하거나 들이 마시는 괴물은 실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기괴함은 실재하는 신체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며 또한 상상 내에서의 동물 형상에 어떠한 류의 변양도 일으키지 못한다. 기괴함은 어떠한 불가사의한 힘의 심층에 잠재하고 있지 않다. 그 기괴함이 빈 공간, 즉 그 존재들 서로를 ‘분리시켜 주는’ 사이의 여백에 스며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이 분류에 포함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가능한 것은 ‘전설상’ 동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전설상의’ 동물에 그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가능한 것은 그 동물을 주인 없는 개나 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과 분리시키는(그리고 병치시키는) 상호간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온갖 상상, 즉 모든 가능한 사고의 경계를 일탈하는 것은 그 범주들 각각을 여타의 모든 범주에 연결시켜 주는 단순한 알파벹 순의 배열(a, b, c, d)이다.
더구나 여기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사실은 단순히 보기 드문 병치관계의 기묘성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양극단의 접근이라는 당혹스러운 결과, 단순히 말해서 상호간에 어떠한 관계도 갖지 않는 사물들의 돌연한 근접에 익숙해 있다. 사물들 모두를 함께 쌓아 놓는 단순한 열거 행위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마법의 힘을 갖는다. “이제 나는 배고프지 않다”라고 유스테네스는 말했다. “오늘 하루에 한해서 다음에 열거되는 모든 것들은 나의 먹이 신세를 면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살모사, 쌍두사, 날개미, 뱀, 海龍, 암몬조개, 곡식벌레, 龍, 전갈人手, 독사, 뱀눈나비, 거미, 잠자리, 도마뱀, 치질...... 등이다.” 그러나, 부패와 찐득함을 암시하는 피조물인 이 모든 벌레와 뱀들은 자신들을 지시해 주는 음절들처럼 유스테네스의 타액 속에서 미끄러져 간다. 그 타액이 곧 우산과 작업대 위의 재봉틀처럼 그것들 모두가 모이는 ‘공통장소’이다. 그것들 상호간의 근접이 놀라울지라도 그 근접은 병치관계의 가능성에 대한 견실한 명증성을 갖춘 ‘그리고et’와 ‘안에’en와 ‘위에sur’에 의해 보증된다. 치질, 거미, 암몬조개가 유스테네스의 허위에 언제나 혼합되리라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결국 호위적이고 식욕이 왕성한 입이 그것들을 안락한 기숙처, 공존할 수 있는 지붕을 제공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이와는 반대로 보르게스의 열거에서 보여주고 있는 기괴함은 그러한 근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의 공간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불가능한 것은열거된 사물들의 근접이 아니라 그러한 근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i광폭한 동물, j 셀 수 없는 동물, k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이 동물들은 그것들의 열거를 알려주는 실체 없는 음성 속에서, 아니면, 그열거를 적고 있는 페이지 위에서를 제외한다면 어디에서 조우할 수 있었을까? 언어의 非在를 제외한다면, 그것들은 언어 이외의 어느 장소에서 병치될 수 있었는가? 언어가 우리의 면전에서 동물들을 전시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단지 사고 가능하지않은 공간에서 가능할 뿐이다. ‘현재의 분류에 속하는’ 동물들의 핵심적인 범주는 이미 주지하고 있는 패러독스들에 명백하게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러한 항목들 각각과 그것들 모두를 포함하는 통일된 항목 사이에 포함되는 것과 포함하는 것과의 관계를 규정함에 있어 결코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충분한 표시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분배되는 모든 동물이 예외없이 이 분류표의 소구분들 중 하나에 위치될 수 있다면 여타의 모든 소구분들 또한 그 하나의 소구분내에 포함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재차 부언컨대 그 단일의 통일적인 소구분은 어떤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의지할 수 있을 것인가? 부조리에 의해, 진열되는 사물들이 분배되는 ‘안에en’가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진열의 ‘그리고en’도 붕괴된다. 부르게스는 불가능의 지도에 어떠한 형상도 부가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 곳에서도 번득이는 시적 대면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순히 필연성들 중에서 거의 분명하지 않지만 가장 절실한 것을 제거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존재들이 병치될 수 있는 장소, 즉 무언의 기반을 제거한다. 중국의 백과사전의 열거에 대한 실마리(유일하게 가시적인 것)로 생각될 수 있는 우리의 알파벹순에 의해서, 소멸해 가는 특징이 은폐되거나, 아니면 오히려 터무니없이, 지시된다......요컨대, 제거된 것은 유명한 ‘手術台’이다. 조금이나마 루셀의 공헌에 답하면서 나는 그 단어 ‘대台’를 이중의 의미로 사용한다. 첫째로, 그것은 모든 그림자를 삼켜버리는 유리의 태양 아래에서 순백색으로 빛나고 있는 탄력 있는 니켈 도금된 台----한 순간 동안, 어쩌면 영원히 우산이 재봉틀과 조우하는 장소로서의 台----이다. 두 번째의 台인 tabula는, 사고로 하여금 우리 세계의 존재들에 대해 작용할 수 있게 해주고, 그 존재들을 질서있게 배열하고, 계층별로 분류하며, 유사성과 상이성을 지시하는 명칭에 따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台----태초 이래로 언어가 공간과 교차해 온 무대로서의 台----이다.
보르게스에 실린 그 원문 때문에 나는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물론 떨쳐버리기 힘든 어떤 당혹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것은 웃음과 더불어 ‘부조리한 것’, 즉 부적합한 사물들간의 상호연접보다도 더 심한 류의 혼란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혼란은 수많은 가능한 질서들의 단편들이 제각기 어떤 법칙이나 기하학도 없는 ‘불규칙적으로 변화하는 것’의 차원에서 뒤섞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 단어는 문자 그대로의 어원적인 의미에서 취급되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사물들은 상호간에 전혀 다른 ‘장소’에 ‘들어서서’ ‘위치되고’ ‘배열되며’, 장소의 이질성에 의해 그 사물들 모두의 기숙장도, 즉 그것들 모두의 ‘공통 장소’를 규정하기가 불가능하다. ‘유토피아’는 위안을 준다. 비록 그것이 어떠한 실재적인 장소를 점유하고 있진 않더라도 그것이 전개될 수 있는 불가사의한 均質의 공간이 있다. 유토피아로 향하는 길은 공상적일지라도 유토피아는 거대한 가로수 길과 훌륭하게 꾸며진 정원을 갖춘 도시들, 살기 좋은 나라들을 개방시킨다. 混在鄕은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밀리에 언어를 침식해 들어가며, 이것(과) 저것을 명명할 수 없게 하며, 공통 명칭을 분쇄하거나 혼란시키며, 미리 ‘統辭法’, 즉 우리가 문장을 구성하는 통사법 뿐만 아니라 말과 사물들(상호간에 가까우며 동시에 대립하는)을 ‘결합시키는’ 덜 명확한 통사법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유토피아가 우화와 言動을 허용하는 이유이다. 유토피아가 언어의 정당한 線上에, 즉 ‘이야기’의 기본적인 차원을 이루는 반면, 에테로토피아(보르게스에서 간혹 발견되는 것과 같은)는 대화를 고갈시키고, 단어를 그 자리에서 멈추게 하고, 문법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문법자체의 근원에서부터 이의를 제기한다. 에테로토피아는 우리의 신화를 해체시키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장의 抒情을 고갈시킨다.
어떤 류의 실어증 환자에게 다양한 색을 갖는 여러 개의 실타래를 보여주면 그는 그것들을 어떤 일관된 모양으로 배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단순한 직사각형이 그 환자의 경우에는, 사물들의 명칭의 의미론적인 영역 뿐 아니라 그것들의 동일성이나 상이성의 연속적인 질서를 동시에 명확하게 보이기 위해 그 사물들이 위치될 수 있는 동질적이며 중립적인 공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물들이 정상적으로 배열되고 명칭을 부여받는 이같이 단순한 공간내에서 그 실어증 환자는,명칭없는 유사관계들에 의해 사물들이 연결되지 않은 작은 선들로 응집되는 다수의소규모의 단편적인 소영역들을 창출할 것이다. 그는 한쪽 구석에 가장 밝은 색의 실타래를 놓을 것이며, 다른 구석에는 빨간색의 실타래들을, 또다른 곳에서는 가장 부드러운 감촉을 주는 것들을, 또다른 곳에는 가장 긴 것이나 진홍색의 색조를 띠는 것이나 공처럼 감긴 것들을 놓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군집 분류의 윤곽이 대충 드러나자마자 곧 그것들을 와해된다. 왜냐하면 그 군집 분류를 보증해 주는 동일성의 영역이 얼마나 제한받든지 간에 그 영역의 폭이 매우 넓어 불안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환자는 군집을 형성했다가는 다시 해체시키고, 다양한 유사성을 쌓아 놓기도 하며, 명백하게 보이는 유사성을 파괴하기도 하다가, 發狂的으로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서, 더욱 불안에 빠지게 되며, 결국엔 불안의 가장자리에서 맴돌게 된다.
우리가 보르게스를 읽을 때 웃음을 나게 하는 당혹감은 언어를 상실한----장소와 명칭에 ‘공통되는’ 것을 상실한----사람들의 심층적인 곤혹감과 확실히 연관관계가 있다. 失鄕症과 失語症. 그러나 보르게스에 나오는 그 원문은 또다른 방향을 지적한다. 우리로 하여금 분류의 적용을 하지 못하게 하는 분류의 왜곡에, 모든 공간적인 정합성을 결여하고 있는 그 표에 보르게스가 부여해 주는 신화적인 조국은 그 명칭만으로 서구를 위해 유토피아라는 거대한 보고를 제공해 주는 특정 지역이다. 우리의 꿈의 세계에서 중국은 이와 같은 ‘공간’의 특권적인 ‘장소’가 아닌가? 우리의 상상력의 체계내에서 중국문화는 가장 세심하고, 명확한 계층적 질서를 가지며, 시간적인 사건에 둔감하고, 공간의 순수한 전개에 가장 집착하는 문화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늘의 영원한 섭리하에서의 水路와 堤防의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눈에는 그 문화가 성벽에 의해 둘러싸인 대륙의 표면 전체에 확산되고 응고된 것으로 보인다. 그 문화의 기록마저도 음성의 사라져 버리는 飛翔을 수평선상에서 재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수직 기둥에 사물들 자체의 부동적이자 여전히 인지 가능한 模像을 남긴다. 따라서 보르게스에 의해 인용되는 중국의 백과사전과 그 사전이 제시하는 분류법은 공간이 없는 사고에, 즉 모든 생명과 장소가 결여되어 있긴 하지만, 복잡한 형상을 많이 소유하고, 복잡하게 얽힌 도로의 기묘한 풍경과 비밀통로와 예상치 않은 연락망을 갖춘 엄숙한 공간 속에 그 뿌리를 둔 단어와 범주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지구의 다른 한쪽 끝에는 전적으로 공간의 질서화에 헌신하는 문화, 그러나 우리가 명명하고 이야기하고 사고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어떠한 범주내에도 현존하는 사물들의 증식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가 실재할 것으로 생각된다.
개와 고양이, 그리고 두 마리의 그레이하운드 모두가 길들여져 있다고, 아니면 주인이 없다고, 아니면 광폭하다거나, 아니면 물주전자를 깨뜨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립한 분류에 따라, 우리가 개와 고양이의 닮은 정도가 두 마리의 그레이하운드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말할 때, 우리가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이 분류의 정당성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어떤 대台 위에서, 즉, 동일성과 유사성과 유비성의 어떤 여과구조에 따라 우리가 그 많은 유사한 사물 및 상이한 사물을 분류해 왔는가? 금방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아프리오리a priori하고 필연적인 연쇄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으며, 직접 지각가능한 내용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지도 않는 이러한 정합성은 무엇인가? 이것은 결과를 연관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을 모아 분리해서 분석함으로써 서로 연관시켜 분류 보관하는 문제다. 사물들 가운데에 하나의 질서를 설정하는 과정보다 더 가설적이고, 더 경험적인(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것은 없으며, 그 과정보다 더 명철한 눈이나 더 확실하게 분절화된 언어를 요구하는 것은 없다. 또한 그 과정보다 사람이 질과 형식의 증식을 쫓아 움직이게 됨을 시인하도록 더욱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도 없다. 의식적으로 준비를 갖추지 않은 시선은 어떤 한 상이점에서 출발하여, 유사한 형상들을 한데 모으고 다른 형상들을 구별한다. 사실상, 전혀 훈련받지 않은 지각에 대해서마저도 엄밀한 조작 및 예비적인 규준의 적용 결과가 아닌 어떠한 相似나 區別은 실재하지 않는다. ‘요소들의 체계’----유사성과 상이성을 구별해 줄 수 있는 구분선의 규정, 그 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변이, 상이성과 상사성을 가르는 경계----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질서의 설정에 필수불가결하다. 질서란 사물의 내부법칙으로서 사물의 내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사물들 상호간에 마주 대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은폐된 조직망이자 동시에 시선, 검사, 언어에 의해 창출된 그물조직 내에서만 실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질서가 이미 이 그물조직의 빈 여백 내에서 言表의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긴 하더라도, 자신을 심층적으로 현현하는 것은 단지 그 빈 여백 내에서만 가능하다.
한 문화의 기본적인 규약들----그것의 언어, 지각의 도식, 교환, 기술, 가치, 실천의 계층적 질서를 지배하는 것들----은 최초로 만인을 위해 인간이 다루게 될, 그리고 그 내부에서 인간에게 안락함을 주는 경험적 질서를 정립한다. 사고의 또다른 극단에서는, 일반적으로 질서가 왜 실재하는가, 그 질서는 어떤 보편법칙을 따르는가, 어떤 원리에 의해 그 질서가 설명될 수 있을까, 하필 다른 것도 아닌 이 특정한 질서가 설정되었는가 하는 물음들을 설명해 주는 과학적 이론이나 철학적인 해석이 실재한다. 그러나 상호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두 분야 사이에는, 주로 중간 항의 역할을 담당하긴 해도 기본적인 영역이 놓여 있다. 그 영역은 더욱 혼란스럽고, 더욱 불명료하며, 아마도 분석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문화의 원초적인 규약에 의해 정립된 경험적 질서로부터 미소하게 일탈하여 최초로 그 질서로부터 분리된 문화는경험적 질서로 하여금 본래의 투명성을 상실케 하며, 자신의 직접적이나 비가시적인 힘을 포기하고, 그 질서가 유일하게 가능한 것, 혹은 최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충분히 자유롭게 한다. 그 다음에 이 문화는 자연 발생적인 질서의 수준 아래에 자체적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고 어떤 言表되지 않은 질서에 속하는 사물들이 실재한다는 사실, 요컨대 질서가 ‘실재한다’는 생생한 사실에 직면하게 됨을 알게 된다. 언어, 지각, 실천, 각각의 그물 조직망에서 부분적으로 해방된 그 문화는 그 조직망들을 중화시키는 또다른 종류의 그물 조직망을 그것들 위에 포개 놓았으며, 이와 같은 포갬에 의해 위에 놓인 조직망은 그것들을 전면에 드러냄과 동시에 배제시키고, 따라서 문화는 이 과정에 의해 원초적인 상태의 질서와 대면하게 되었다. 새로 인지된 이 질서에 근거하여 言語, 知覺, 實踐의 규약들이 비판되고 부분적으로 무효화된다. 견고한 토대로 여겨지는 이 질서에 근거하여 사물의 질서화에 대한 일반 이론과 그러한 질서화가 포함하는 해석이 구축된다. 그리하여 이미 ‘코드화된’ 시선과 반성적인 인식 사이에는 질서 자체를 해방시키는 중간 영역이 실재한다. 여기에서 질서는 고려되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서 연속적이자 계층적이 아니면 불연속적이자 세분화된 것처럼, 공간과 연관되어 있거나 아니면 시간의 추진력에 의해 매순간 새로이 구성되는 것처럼, 일련의 가변요소와 관계되어 있거나 아니면 개별적인 정합성의 체계에 의해 규정된 것처럼, 계기적이거나 호응하는 유사관계들로 구성된 것처럼, 점차 증대해 가는 상이성 주위에서 조직된 것처럼, 기타 등등처럼 보인다. 이 중간 영역이 질서의 존재 양태를 명확하게 해주는 한 그 영역은, 자신의 표현이자 다소 정확하고 교묘한 것으로 여겨지는 단어, 지각, 몸짓에 선행하며(이것이 곧 순수하며 원초적인 상태에 놓인 질서에 대한 이 경험이 항상 비판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이유이다) 그 표현들과 명백한 형태와 철저한 작용과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려는 이론들보다 더욱 견고하고, 더욱 오래된 것이며, 의심의 여지가 보다 적고, 항상 더욱 진실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문화에 있어서 질서정연한 규약이라 불리는 것의 사용과 질서 자체에 대한 반성 사이에는 질서와 그것의 존재 양태에 대한 순수한 경험이 놓여 있다.
본 연구는 그 경험을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나는 16세기 이래로 우리의 것과 같은 한 문화의 주류 속에서 그 경험의 발달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우선, 당시 사용되었던 언어, 지각되고 수집되었던 자연의 존재들, 실행되었던 교환을 추적하는----말하자면 조류를 거슬러서----방식에, 다음엔 우리의 문화가 질서의 존재를 명백하게 한 방식과, 그 질서의 제 양상에 교환이 자신의 법칙을, 생물이 자신의 규칙성을, 단어가 자신의 연쇄와 표상적 가치를 의존하고 있는 방식에, 그리고 문법과 문헌학, 박물학과 생물학, 부의 연구와 정치 경제학에서 전개되어 온 인식의 실증적인 토대를 형성하기 위해 질서의 어떤 양상이 인지되고 상정되었으며 공간과 시간에 연관되었는가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다. 명백히 그러한 분석은 사상사나 학문의역사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토대 위에서 인식과 이론이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재발견하는데 그 목적을 두는 탐구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어떤 질서의 공간 내에서 지식이 구성되었으며, 어떤 역사적 ‘아프리오리’에 근거하여 그리고 어떤 실증성의 영역 내에서 관념이 출현했고, 학문이 구성되었으며, 경험이 철학 내에서 반성되었고, 합리성이 형성되었고, 그리고 얼마 후에 해체되고 소멸해 버렸는가를 탐구한다. 그러므로 나는 최종적으로 오늘날의 과학이 인지될 수 있는 객체성을 목표로 인식의 진보를 기술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인식론적 영역, 다시 말해서 합리적 가치나 객관적 형태에 의존하는 모든 규준에 벗어나 관찰되는 인식이 자신의 실증성의 근거를 두고 있고, 따라서 한 역사, 즉 점차적인 완성화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그 가능성의 조건이 역사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인 ‘에피스테메’이다. 이 말에서 표명되어야 할 것은 지식의 공간 내부에서 경험적 인식의 다양한 형태를 야기시켰던 배치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기획은 그 단어의 전통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역사라기보다는 ‘考古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고고학적 탐구는 서구문화의 ‘에피스테메’에 있어서 두 줄기의 거대한 불연속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불연속은 고전주의 시대(대충 17세기 중반)의 개막을 선포하며, 19세기 초에 시작되는 두 번째의 불연속은 근대성에 개막을 알린다. 오늘날 우리의 사고의 토대인 질서는 고전주의 시대의 인간이 지녔던 것과 동일한 존재 양태를 갖지 않는다.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이성’이 거의 순탄하게 전개되어 왔다는 인상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수정되긴 했지만, 린네의 분류법(식물의 분류법)이 여전히 그 유효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신념, 꽁디약의가치론이 19세기의 한계효용학파의 이론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인지될 수 있다는 신념, 케인즈가 자신의 분석과 칸틸론의 분석간의 근친 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신념, ‘일반문법’의 언어의 저자들이나 보제(보제에게서 그 예를 볼 수 있는)가 오늘날의 우리의 언어에서 별로 소멸되지 않았다는 우리의 가능한 신념에도 불구하고----관념과 주제의 수준에서 이 모든 擬似--連續性은 확실히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고고학적인 수준에서 실증적인 제영역의 체계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전체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를테면 이성이 진보를 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지식에게 내보이기 전에 그것을 분류하는 질서의 존재 양태와 사물의 존재 양태가 근본적으로 변질된 것이다 투르느포르와 린네와 뷔풍의 박물학이 자신을 제외한 여타의 모든 것과 관계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생물학이나 큐비에의 비교해부학이나 다아윈의 진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제의 일반 문법과 로오나 베롱 드 포르본네나 튀르고의 저서에서 볼 수 있는 화폐 및 부의 분석에 대한 것이다. 아마도 인식은 인식을 생성할 수 있을 것이며, 관념은 스스로를 변형시키고 관념 상호간에 서로를 변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역사가들은 아직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여하튼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 사실은 고고학이 자신의 일반적인 공간과자신의 배치와 자신의 내부에서 등장하는 사물의 존재 양태에 의뢰함으로써 새로운 실증성의 경계를 정하는 데 필요 충분한 변동의 계열 뿐 아니라 동시성의 체계들을 규정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분석은 고전주의 시대에 있어서 표상의 이론, 언어의 이론, 자연질서의 이론과 부 및 가치의 이론 사이에 실재했던 정합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19세기 이후로 완전히 변화된 것은 이 배치인 것이다. 모든 가능한 질서의 보편적인 기초로서의 표상의 이론은 소멸된다. 사물들의 원초적인 그물 조직망인 자연발생적인 ‘表’로서의, 다시 말해서 표상과 사물간의 필수 불가결한 매개로서의 언어 또한 사라진다. 반면에 심층적인 역사성은 사물의 본질로 파고들어 사물을 고립시키고 사물 고유의 정합성 내에서 사물을 규정하며, 시간의 연속성에 의해 도입된 질서의 제 형태를 사물에게 부과한다. 생산에 대한 연구가 교환 및 화폐에 대한 분석을 대신하고, 유기체에 대한 연구가 분류학적 특징에 대한 연구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며, 특히 언어는 자신의 특권적 위치를 상실하고 이어서 자신의 과거의 밀집성과 일관된 역사의 한 형상이 된다. 그러나 사물이 점차 반성적이 되고 자신의 전개과정 속에서만 이해 가능성의 원리를 추구하며 표상의 공간을 포기함에 따라 처음으로 인간이 서구 지식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소박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에 대한 연구는 소크라테스 이래로 가장 오래된 탐구 과제로 용인된다----은 틀림없이 사물의 질서 내에서의 일종의 균열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최근에 그가 지식의 무대에서 차지한 새로운 위치에 의해 그 윤곽이 결정되는 배치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부터 새로운 인간주의에 대한 환상들이, 즉 ‘인간학’에 대한 경시가 비롯되었으며, 이때 인간학은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반성(半 경험적이자 半 철학적인)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최근의, 즉 아직 2세기도 채 안 된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며, 우리의 지식 내의 단순한 하나의 주름살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그 지식의 새로운 형태가 발견되자마자, 인간은 다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어느 정도 위안이 되고 안심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본 연구는 확실히 고전주의 시대의 狂氣의 역사에 대한 나의 저술의 반향이다. 이 연구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적 구분은 광기의 역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동일하며, 그 구분은 르네상스 시대 말기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아직 일탈하지 못한 근대성의 경계인 19세기 초에 이른다. 광기의 역사에서는 한 문화의 경계를 구분짓는 상이성을 견실하면서도 일반적인 형태로 결정하는 그 문화의 방식이 문제가 되었던 반면, 본 연구에서는 한 문화가 사물들 상호간의 근접을 체험하는 방식과 그 문화가 사물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表’ 및 사물들의 通覽에 필요한 질서를 설정하는 방식을 살펴보는데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요컨대, 나는 類似性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전주의 시대의 사고가 사물들간의 유사성, 혹은 等價性의 관계, 다시 말해서 사물들의 단어와 사물들의 분류와 사물들의 교환 체계에 대한 토대 및 정당성을 제공해 주는 관계를 반성할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역사적 ‘아프리오리’에서 출발하여, 모호하고 규정되지 않고 정체불명이며 흥미 없는 상이성의 배경에 대응하여 정립된 판명한 동일성의 커다란 장기판의 규정이 가능하겠는가? 광기의 역사가 ‘타자’의 역사----문화에 대해서, ‘타자’는 내부적인 동시에 이질적이며, 따라서 배제되어야 하고(내부적인 위험을 없애기 위해서) 곧 폐쇄되어야 한다. (자신의 타자성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사물의 질서에 대한 역사는 ‘동일자’의 역사----문화에 대해서, 동일자는 분산적이며 동시에 상호 연관적이고 따라서 표시에 의해서 구별되어야 하고 동일성 별로 수집되어야 한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질병이 무질서----인체 내부에 그것도 생명의 핵심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타자성의 존재----이자, 자신의 규칙성, 유사 관계, 여러 유형을 지닌 하나의 자연 현상임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의학적인 관점에서의 고고학이 점하는 지위를 알 수 있다. ‘타자’의 한계 경험에서 의학적 지식을 구성하는 제 형태에 이르기까지, 후자에서 사물의 질서 및 동일자의 개념 구성에 이르기까지 고고학적인 분석에 이용가능한 것은 고전주의 시대의 지식 전체, 아니 오히려 우리를 고전주의 시대의 사고로부터 분리시키고 우리의 근대성을 구성하는 경계이다. 이 경계상에서 처음으로 인간이라 불리는 지식의 기묘한 형상이 등장했으며, 그 인간은 인문과학 고유의 공간을 표출시켰다. 서구문화의 가장 깊은 심층을 노출하려는 시도에 있어서 나는 우리의 고요하고 외관적으로 부동적인 대지에 균열과 불안정성과 틈새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대지는 우리의 발밑에서 다시 한 번 불안하게 꿈틀거릴 것이다.
* 이 책은 이광래 역의 {말과 사물}(민음사, 1993년)이며, 독자 여러분들은 꼭 이 책을 구입해서 정독하기를 바란다.
* 미셸 푸코(1926~1984)는 1948년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0년에는 심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리고 1952년 파리대학에서 정신병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탈현대 사상가이기도 하다.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의 저서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며, 그의 반이성적인 사유는 전세계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충격적인 전율과 그만큼의 새로운 사고의 진전을 가져다가 주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앎은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은 앎을 생산한다. 이처럼 지식과 권력의 복합체로서의 담론의 질서를 분석하고, ‘정상과 비정상은 권력의 조작이며’, 어느 누가 미쳤다고 하는 것은 ‘이성이 광기에게 하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언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011년 3월, 일본의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의 폭발은 일찍이 미셸 푸코가 예언한 대로 인간의 사라짐, 혹은 인간의 최후의 종말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00년 전에는 인간의 숫자가 20억에 불과했지만, 지금 현재의 인간의 숫자는70억에 육박할 정도이다. 기껏해야 60전후의 인간수명을 80세 이상으로 늘려놓은 의학의 성과가 에너지의 낭비로 이어지고, 드디어, 마침내는 원자력이라는 극약처방으로 그 에너지 부족을 충당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사물의 질서에서 일종의 균열에 불과하다는 것, 아니, 인간의 사라짐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성중심주의의 횡포,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횡포에 대한 사망선고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푸코의 반이성적인 사유는 그의 계보학적이고도 고고학적인 방법론을 통해서, 모든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폭로하는 탈현대 사상으로 완성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사상은 문학, 역사, 철학, 사회과학, 정신분석학 등, 그 모든 분야에 전면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가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인간은 틀림없이 사물의 질서 내에서의 일종의 균열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최근에 그가 지식의 무대에서 차지한 새로운 위치에 의해 그 윤곽이 결정되는 배치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부터 새로운 인간주의에 대한 환상들이, 즉 ‘인간학’에 대한 경시가 비롯되었으며, 이때 인간학은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반성(半 경험적이자 半 철학적인)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최근의, 즉 아직 2세기도 채 안 된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며, 우리의 지식 내의 단순한 하나의 주름살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그 지식의 새로운 형태가 발견되자마자, 인간은 다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어느 정도 위안이 되고 안심이 된다.”----{말과 사물}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