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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중생을 모두 구하겠다는 보살심으로 끝없는 생을 돌며 세상을 모두 덮을 만한 큰 공덕행을 쌓은 후 범행을 모두 마치고 마침내 인간완성의 경지인 마음의 열매 즉 해탈심을 얻으셨다.
해탈심은 마음의 모든 찌끼가 사라져 오직 순수한 맑음 하나 만이 남은 것이니
인간의 의식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경계인 반야와 합일하는 것을 말한다.
해탈에 이르게 되면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아무런 업이 없는 맑은 마음에 세상이 있는 그대로 비치게 되니
세상 일과 부딪히면 실상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반야심에 닿아 세상 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를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본다고 하여 눈을 떴다,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며 이에 반해 중생은 눈앞의 일도 바로 보지 못한다고 하여 눈뜬 장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깨달은 자가 실상을 보고 물으면 눈뜬 장님들은 실상 속의 일을 전혀 알 수가 없다. 마치 장님에게 콩을 손에 쥐어주고 이것이 콩이다고 하면 장님은 그것이 콩인지 알고 실상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눈을 뜬 자가 한 걸음 더 나가 콩 색이 노랑인지 검정인지 물으면 장님은 전혀 알 수가 없다. 보이지 않으니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 눈을 뜬 자와 보지 못하는 장님과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학문과 종교의 진정한 정체이니 현대문명이란 실상을 보지 못하는 중생들이 자기 생각으로 논리를 지어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며 주물러놓은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현상을 두고서도 사람에 따라 정반대 논리가 나와 매일 서로 다투고 있으며, 진리를 밝혔다는 종교간에도 싸우고, 인간을 행복하도록 하기위해 만든 공산주의는 오히려 세상을 불행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깨달은 자는 세상을 볼 때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다.
자연에는 눈앞에 있는 일들 간의 인과관계가 있을 뿐 추상적 개념이나 논리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성자들은 어려운 문자나 개념적인 학문적 용어를 쓰지 않고 평범한 언어들로 세상을 표현한다. 완전한 법계인 사실 속에서 완벽한 이치에 따라 나타나는 세상 일을 보시고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과 해탈에 이르는 길, 그리고 이 세상이 극락정토가 되는 길을 있는 그대로 쉽게 설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현대 불교학자들은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의 원형을 숫타니파타나 잡아함의 사실적인 구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이치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대구형식이 많이 사용되며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평범한 언어로 쓰여 있다.
부처님의 모든 업이 사라진 맑은 해탈심에 비치는 실상의 이치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같다.
부처님은 생각으로 법을 만들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사실과 그 속에 존재하는 이치를 있는 그대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는 참된 말만을 하며, 사실만을 말하며, 진실만을 말하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으며, 사실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아함경에 여러 장소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구절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이와 같이 같은 현상 속에는 언제 어디서나 같은 이치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항상 똑같이 보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에게 있어 이 세상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 우주의 진리가 스며있는 경전이었으며
그것을 나타난 대로 표현하면 그것이 진리의 법음이었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를 말로 표현하지 문자로 억지로 말을 짜 맞추지 않는다.
이러한 성자들의 가르침은 항상 눈앞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이며 너무 쉬운 말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머리 속에 많은 지식이 든 자들에게는 너무 평이하고 가치없어 보인다.
그리고 너무나 쉽고 맑은 진리이기 때문에 근기가 높지 않고 마음에 어두운 자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맑은 물에 물고기가 놀지 않듯이 초기 성자들의 곁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나 예수와 같은 성자들의 초기 가르침은 욕심이 많고 관념에 찌든 기존 기득권 세력에게 항상 거부받았으며 마음이 순수한 자들이나 하층민들에게만 전해졌던 것이다.
대승경전을 보면 항상 부처님이 수천명의 군중과 수만의 보살들의 환호 속에서 설법을 했다는 구절들이 나오는데 실제 부처님의 제자가 9명 뿐인 것은 그의 곁을 항상 따라다니며 법을 배우고자 했던 사람이 9명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친 환경의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법을 전하다 길 위에서 돌아가신 것은 법을 들으러 오는 사람이 없어 자비심에서 법을 전하려 사람을 찾아다녔기 때문이었다. 전해오는 말처럼 가만히 앉아있어도 그렇게 법을 들으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면 구태여 수만리 거친 인도 황야를 맨발로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법을 전하기 시작하자 점차 불교가 흥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부처님의 맑고 순수한 가르침을 당시 인도 환경과 중생들의 입맛에 맞게 조금씩 논리를 보태고 양념을 쳐 미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이니 종교의 역사는 이러한 진리의 변질사연이 숨어있는 것이다.
성자들은 가르침을 글로 쓰지도 않았고 종교도 만들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정해져있는 세상의 진실과 인간이 구원을 받는 길을 밝혔을 뿐이다.
이것을 후대의 제자들이 미화하거나 우상화하여 중생들의 입맛에 맞추자
종교가 세속화되면서 급속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피할 수 없는 변질과정이니 세상을 모두 보신 부처님께서는 다른 세상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르침마저 세상 인심에 의해 오래가지 못하고 변질될 것을 미리 아시고 정법이 500년 밖에 가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정법이 500년이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초기에 부처님이 설한 실상에 관한 유법(有法)이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대중부로 자유분방하게 변형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대승불교가 나타난 시기가 바로 A. D. 1~2 세기로 부처님 입멸이후 약 500년이 지난 시기이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의 가장 권위있는 부파가 있는 것을 설명했다 해서 설일체유부이다.
이 학파의 철학체계는 부처님 사후 약 천년 간에 걸쳐 완성된 것이지마는 '모든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 기본입장이었다.
이들은 사실에 기초하여 명확한 인과의 이치를 밝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하는 사실들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현상을 이루는 원리(법, 다르마)를 밝히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내면세계와 객관세계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분류하였다.
이것을 제법분류법이라고 하는데, 구사론에서 말하는 5위 75법이 그 완성된 모습이다.
5위(位)는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과 물질세계를 크게 다섯 가지 요소로 분류한 것으로
물질적 요소(색법), 마음의 요소(심법), 마음의 작용(심소법), 물질과 마음이 어우러진 나타난 것(심불상응행법), 인간의 사량으로는 잘 알 수 없는 것(무위법) 으로 구분하였다.
그래서 모든 존재하는 것이 연기법으로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들은 법(法)이라는 것은 삼세(三世) 어디서나 있으며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법은 삼세(三世)에 실유(實有)한다고 했다.
이를 삼세실유론이라 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무위법 또한 대승의 해석과는 달리 하나의 존재하는 유적 형태였으며
부처님의 해탈심 또한 인과관계의 결과로 나타나는 유적 존재였던 것이다.
이러한 초기의 실상에 근거한 가르침은 점차 제자들에 의해 불교가 논리화, 사변화되고
힌두적 환경과 정치적 영향으로 다른 이교의 관념들이 들어오면서 그 생명력이 약화되게 된다.
그래서 초기 부처님의 유법을 숭상하던 상좌부 중 일부가 개혁적인 성향을 띠면서 대중부로 갈라져 나갔고 각자의 불법에 대한 견해에 따라 20여개 파로 나눠지면서 각 부파의 성향에 따른 경전이 만들어지게 된다.
지금 초기의 경전으로 알려져있는 아함경도 모두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비교적 초기에 설일체유부 계통으로 보이는 잡아함경, 중아함경이 만들어졌으며 그후 법장부 계통의 장아함경이 나타나고 진보적 성향을 가진 대중부 계통의 증일아함경이 제일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부파불교 내부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부처님 사후 500년이 지난 기원 전후부터 대중부를 기반으로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당시 상좌부를 근간으로 한 기존 부파불교는 승원을 중심으로 고도의 복잡하고 난해한 법(法)논리를 전개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알 수 있는 철학적인 종교가 되어갔고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아래 엘리트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재가 신자들과 개혁적인 대중부 승려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권력과 유착하여 일신의 안락함을 누리면서 추상적인 논란만 일삼고 있는 기존 승단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 중생들의 구원을 위한 불교가 되자고 대중부를 형성하고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 승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소승'으로 공격하고
스스로를 '대승'이라 이름하면서 경전을 편찬하고 대중적인 신앙운동을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그들은 당시 국수주의화되고 있는 당시 인도의 정치적 격동기를 틈타 다시 종교로 정립된 힌두교에서 믿음의 종교인 박티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를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미타불 신앙을 발전시켜 나갔고
대중부의 철학적 영향을 받은 나가르주나(용수)는 중관사상을 마련하여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부파불교 중에서 대중부의 교리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개혁적이어서
그들은 과거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얽매이지 않았고 매우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논리를 변형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연히 사회적 배경인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대중부의 교리를 살펴보면 거의 대승불교의 교리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대승의 기본교리인 불타론(佛陀論), 보살론(菩薩論),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 등도 대중부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즉 대승불교는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이 숨어있다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도라는 힌두적 지역적 환경에서 변질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변적 논리가 발달해 나타난 부파불교의 철학적 연구결과였던 것이다.
이로서 모든 것이 변화하듯이 부처님의 정법 또한 시간의 변화를 넘어서지 못하고
부처님이 예언하신 대로 정법이 500년이 지나자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우리들이 생각하듯이 인도에서 기존 소승불교를 뒤엎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반동적 개혁운동이었을 뿐이며
인도 불교의 역사는 기존 부처님의 가르침을 견지하고 세부적인 내용을 계속 연구해간 상좌부 계통의 부파불교의 역사였다.
중국의 구법승 현장이 인도에 체류하던 7세기 때에 쓴 글을 보면,
기존 부파 불교인들이 갖가지 상이한 교리적 입장에 따른 대립·쟁론을 벌이는데
“대부분 소승을 배우고 대승은 믿지 않는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은
당시 인도에서 대승이 매우 소수파였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13세기경 인도 불교가 본토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대승불교는 중국 등지의 북방으로 전래되어 카니시카왕의 제4차 불전결집 이후에야
고도의 철학적 사유로 말미암아 북방에서 크게 인기를 얻게 된다.
그 이유는 인도북방과 중국에서는 초기 불교교단의 전통과 영향력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고
대승불교의 철학적 논리과 수행 중시 사항이 중국의 사유적이며 도가적인 수행 기풍과
그 맥을 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도내의 소수 개혁파인 대승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전개하여 완벽한 이론 체계와 관념체계를 갖추어가며 남몰래 경을 만들어나가며 세를 확산해 나갔다. 그 결과 AD 1세기경에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났으며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지어졌다.
그리고 3세기 경에는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에 의해 공에 관한 철학적 논리가 부여되면서 대승불교가 완전히 틀을 갖추게 된다.
그는 여러 저술들을 통하여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철학적으로 논리화시키고
대중부의 철학체계를 발전시켜 부처님의 사실적인 견해와 기존 힌두교의 주장들을 모두 비판 배척하게 된다.
용수는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므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진공중도의 바른 견해를 얻을 수 있다는 반야공관을 설하였는데,
이 설에 기초를 둔 학파를 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중관파의 시조인 나가르주나(용수)는 남인도 안드라 왕조의 데칸고원에서 탄생하여
젊었을 때에는 브라만 출신으로 방탕을 일삼다가 후에 불교를 배운 사람으로서
힌두사상 뿐 아니라 그 당시의 여러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처음 유부에 출가하였으나 후에 대승의 교리를 체득한 후,
중싸타바하나왕조의 보호아래 공 사상을 펼치다 나가르쥬나콘다에서 입멸하였다.
저서로는 [중론(Madhyamakakarika,中論)], [대지도론(大智度論)],
[대품반야(大品般若)], [십주 비바사론(十住 毘婆沙論)]이 있는데,
특히 [중론] 은 중관학파를 형성하여 6세기 이후에 크게 흥기하게 된다.
용수 탄생 당시 인도 불교계는 기존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아비달마 승단들이 20여 종의 교파로 난립되어 있었고
한편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은 혁신적인 불교도들이 대승경전의 편찬과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또 불교외적으로는 전통적인 육파철학(① 산키아(Smkhya)학파
② 요가(Yoga)학파 ③ 니야야(Nyya)학파 ④ 바이세시카(Vaisesika)학파
⑤ 미만사(Mims)학파 ⑥ 베단타(Vedant)학파)이 하나 둘 정비되어가면서
대중적인 힌두교가 서서히 인도사회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계의 혼돈 속에서 공 사상의 대가인 용수가 탄생하여
그 당시 사상적인 흐름인 현실과 이상을 구분한 이원적 사유방식으로 불교를 재창조하게 된 것이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이란 없으며 모든 실체는 공이라고 한다.
자성이란 것은 인과 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이며,
항상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고정불변한 실체라고 할 수 있는데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선 홀로 존재하는 자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본질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용수는 부처님이 실체에 대해 하나의 법을 밝힌 것과는 달리
“세속적인 덮힌 진리와 최고의 진리에 기초하여 붓다는 법을 설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원론적인 논리전개를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최고의 진리(Param rtha, 眞諦, 勝義諦)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체로서 인간의 사고 내지 인식작용이 미치지 않는 초월적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 본질의 세계와 유사하며 세상의 흐름과 무관한 우주의 영원한 무루의 실체를 말한다.
이에 비해 덮인 진리인 속제(俗諦, 世俗諦)는 상대적인 진리로 인간적 사유에서 본 법을 이야기하는데
플라톤의 이론에 비유한다면 현상의 세계, 동굴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진제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체 사물은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늙고 죽은 것도 모두 거짓된 관념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물이 생겨나고 멸하며, 인간이 늙어서 죽는 것은 <덮힘>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니 이 <덮힘>을 제거하면 불생, 불멸의 무루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용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덮힘>의 세상이며 꿈과 환영에 불과하니
눈을 뜨기까지 그것은 가슴을 괴롭히는 고통의 바다지만
일단 눈을 떠버리면 그 꿈은 아침 햇살 속의 이슬과 같은 것이니
더 이상 꿈 속에는 한 조각의 진리나 사실이 없으며
영원히 자유로운 평안과 해탈 속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용수는 이와 같이 <중론>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대승불교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시켰지만
생생한 깨달음의 실체인 해탈지경을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공으로 변질시킴으로써
불교는 사실에 관한 실천적인 법에서 관념이 지배하는 추상적인 법으로 변질되게 된다.
즉 부처님의 해탈지경은 업이 사라진 인간의 완성된 마음으로 우주의 실상과 진리를 비추는 생생한 거울이었는데
관념론자의 사고와 논리에 의해 철학적 사유로만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텅빈 허공으로 변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완성의 모범적인 경지인 부처님의 해탈지경 대신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빈 허공이 깨달음의 실체로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부처님은 생생한 깨달음의 경지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타나기 이전의 반야지경이라는 이야기를 했지 이 우주가 공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후대의 수행자들은 선정 수행시 일시적으로 체험하는 텅빈 의식의 존재를 보고
이것을 자기 생각으로 만유의 근본인 우주의 바탕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것이 후에 아뢰야식으로 발전하면서 유식론의 근거가 되는데
이처럼 대승의 기초가 되고 있는 공사상과 유식론은
후대의 수행자들이 깨닫지도 못한 자신의 체험을 불교 속으로 가져와 부처님 법을 변형시킨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연기하면서 변한다고 하여
눈앞에 존재하는 이 세상과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마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관념의 극치요, 사실을 부정하는 말법의 소리인 것이다.
이로서 불교는 눈앞의 일들마저 무시하는 관념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현실을 경시하고 실천력이 떨어지는 무기력한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때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현재라든가 우리 생애라든가 인류생존시라든가 우주존재시라든가 하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눈앞의 현실을 판단해야 하는 실제상황을 관념으로 굳이 무시하고
모든 일을 관념적인 우주시간으로 보아 영원한 것이 없다고 공하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고 세상을 속이는 일은 없는 것이다.
기준이 없이 태초의 시간까지 고려해 사물을 판단한다면
어떠한 인과나 판단을 할 수가 없으며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용수는 힌두교의 마야사상을 받아들여
이 세상은 무지한 범부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오온을 필두로 하는 제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 환상을 벗어나면 본래 속박되지 않고 해방되지도 않은 제법의 본래 모습인 진여를 보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유정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꿈이나 환과 같으며
부처님의 깨달음마저도 하나의 차별관념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제자의 입에서 생생한 부처님의 깨달음의 실체를 부정하고
해탈마저 하나의 분별심이며 착각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올바른 법의 실상을 밝힌 말이며 불제자의 말이라 하겠는가?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논리가 불교의 가장 차원높은 사상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그래서 요즘의 불교가 부처님의 원 가르침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가르주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며 삶을 구성하는 실체적 요소로 간주되었던
모든 다르마(法)와 실체를 부정하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관념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존 불교계를 지배해오던 부파불교의 승단인 소승불교와 서로 양립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실적인 법을 이어받은 전통적인 설일체유부에서는
이러한 중관학파를 ‘도무론자(都無論者 : 모든 것이 무라고 부정하는 자)’라고 하였고,
경량부는 세친의 〈구사론〉이나 그에 대한 경량부 주석서를 통해
‘일체의 법체가 모두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일체가 없다는 집착’에 빠져 있다고 하여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인도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스리랑카 상좌부에서도 중관학파를 대공부(大空部)라 하여 이단으로 비판하고 있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쉽게 넘겨버려서는 안된다.
역사와 법통을 가진 거대한 기존 교단에서 새로 나타난 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만큼 대승의 교리가 기존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점이 많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니 우리가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같은 대승불교의 유식학파에서조차 중관학파를 ‘있지 않음’에 집착하고 있는 극단론자로 공격·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유무의 극단설을 비판·부정하여 연기 중도를 선양하려 했던 중관학파가
도리어 무 또는 공만을 주장하는 극단론으로 취급받아 역공 당했다는 사실은
논리로서 우주의 실체를 규명하려 했던 관념적 사변론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 일체를 부정하고 우주의 실체가 공하다는 결론을 내리자
불교는 힌두교와 거의 관념의 차이가 사라지게 된다.
처음부터 브라만적 사고방식 속에서 생겨나 자라온 불교였고
힌두교와 더불어 교리의 변천이 이루어졌으며
나중에는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어버린 불교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변천을 거치면서
다시 힌두교화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힌두교파에서는 불교가 힌두교와 유사한 교리를 가진
지파의 일종으로 무리없이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힌두의 최고철학가 상캬의 不二論(Advaita)철학을 살펴보면
현실을 인정하되 그 실체는 공하다고 보는 대승 불교의 이중적 사고방식과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절대자 브라흐만은 절대 존재, 지고한, 순수한 의식은
말과 관념을 넘어선 세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정적인 표현만을 통하여 그 근처까지만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존재로서의 순수의식, 지고한 존재를 '높은 브라흐만'이라 하고
반면 속인들이 생각하듯 현상세계를 창조하는 낮은 창조신을 '낮은 브라흐만'이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진리를 궁극적 진리와 세속적 진리를 구별했다.
즉 인간의 말과 생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궁극적 진리의 세계와
인간 세계에서 통하고 표현되는 세속적 진리의 세계로 구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말하는 신, 업, 윤회, 자아, 창조 등은
궁극적 진리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세속적 진리로 본다.
따라서 신에 의해 나타난 최고의 지식인 베다의 공부와 선정을 통해서
신의 실체를 만나야만 해탈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힌두교의 우주관과 수행법은 사실과 실천행을 중시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달리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선정을 중요시하여 현실과 유리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고
이것이 불교에 영향을 주어 다시 불교는 공과 선정에 몰두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
중관학파의 말대로 세상이 고통이고 환상이며 나의 실체가 없다면
그러한 사고방식과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삶을 소중히 여기고 좋은 원인을 짓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집착이 헛된 욕망임을 알았을 때
집착을 버리고 사심없이 바르게 살 수 있다고 하지만
어차피 환상인 세상에서 옳고 그름마저 의미가 없고 해탈마저 분별심에 불과하다면
선악을 가리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불태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한 정말 중관학파의 주장이 사실이고 이 세상이 헛되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산다고 해도 양심이 거리낄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공이며 실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공덕의 가치와 인과법, 사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부정해버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중관사상이 유행하면서
세상은 어둡고 무기력해지며 사람들의 삶은 운명적이고 체념적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후대의 대승불교를 믿은 동양사회는
사람들이 공을 찾느라 선업과 악업이 모두 소용없다 하니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아 사회는 어둡고 무지하게 되었고
공한 세상에 적극적으로 좋은 원인을 지을 이유가 없으니
가난하고 나쁜 일이 많아져 어둡고 불행한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인 실상과 진리에 근거한 최고의 과학을 무시하고
관념적 논리에 빠져 인간이 가야할 길을 외면함으로써 불교가 받은 업보였으니
부처님이 현실 속에 정신과 물질의 인과를 설명하는 최고의 과학과 인간세상이 행복해지는 길을 밝혀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키지 못하고
또 다시 우매한 힌두교의 철학과 신앙을 받아들여 오염됨으로써
과학과 이성을 앞세운 후발주자인 서양에 정복당하는 역사적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던 것이다.
출처 진실의 근원(http://www.ginc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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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아낙네님! 모든걸 뛰어 넘은 것처럼 보입니다.
여름 우리밀 국수집 준비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사실과 다른 말이 무엇인가요?
@대자유 초기 경전인 앙굿따라니까야에 부처님의 제자 80명이 실려 있습니다. 이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받든 10대제자들 이외에 빅쿠(비구)와 빅쿠니(비구니)도 있고 재가자인 우빠사까(청신사)와 우빠시까(청신녀)도 있습니다. 즉 평생동안 법을 설했지만 법을 받드는 진정한 제자는 10명 정도였고 그외에 인연이 있어 법을 만난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신도를 포함해 거론할 수 있는 사람이 80명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종교가 번성하면 초기 성자들의 어려움과 고통은 사라지고 화려하게 치장되는 법입니다. 성자가 살아계실 때는 따르지 않는 가르침을 돌아가시면 중생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기 때문에 법이 변질되면서 사람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정법이 500년 밖에 가지 않는다고 했지요. 따라서 지금 경전에 그렇게 제자가 천명이라는 말은 믿을 게 못됩니다. 제자가 천명이라면 가만히 앉아 가르치지 그렇게 돌아다닐 이유가 없으며 먹을 게 없어 굶을 때도 있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겠지요. 그리고 대승불교를 창립한 자가 누구인가요? 해탈한 자인가요? 아니면 중생이 생각으로 만든 논리인가요?
@대자유 초기에 보살이란 부처님이 과거생에 높은 경지에 계실 때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용수를 보살이라고 한 것은 부처님이 인가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자찬해서 붙인 것입니다. 그가 부처님같이 깨달았다는 증거는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그가 만든 중론은 세상의 인과법을 본 것이 아니라 학자들이 쓴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이며 논리학일 뿐입니다. 그는 세상의 실상과 인과법을 본 해탈한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보살이라고 하다니요? 누가 보살이라고 붙였습니까? 그가 보살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대자유 그것은 전해내려오는 경전에 1차 결집에 500명이 모였다고 한다! 라는 의미로 인용한 것일 뿐입니다.
소승불교의 자신의 해탈에만 목적을 두어 아라한이 되는 것이고 대승불교는 자신의 해탈과 동시에 보살행을 통해 중생구제에도 목적을 둔다고 하는데 말은 대승이 더 아름답지만 말이 아름답다고 해서 그 말이 진리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진리는 깨달은 자가 우주의 실상을 보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밝혔기에 진리로 받들어 모시는데 부처님이 초기의 소승을 가르쳤지 대승을 가르쳤던 적이 있던가요? 대승의 핵심인 공사상, 보살신앙사상, 주문들이 부처님이 가르친 것이던가요?
@대자유 님이 알고 있는 그런 교묘한 대승의 논리들이 불자들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보라고 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법화시키고 인간의 정신을 망친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해탈심은 세상을 생생히 비치는 살아있는 맑음이었는데 깨닫지도 못한 용수가 중관사상을 들고나오면서 세상을 환으로 보고 그 실체를 공으로 봄으로써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과 생생한 삶마저 없는 것으로 관념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유식론에서는 중관론자를 일러 모든 것을 없다고 주장하는 "악취공자"라고 칭하면서 차라리 아견을 주장하는 자가 그들보다는 낫다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염세적으로 보고 분별을 경시한 대승불교, 공관불교가 성행한 나라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 증거가 있으면 제시해 보시지요?
@대자유 님은 불교가 숭유억불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임진왜란 때 승군이 전쟁에 나섰다고 불교가 사실적이라 주장하는데 왜 억불을 받았는지 원인을 찾아봄으로써 우리는 불교가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나 관념화되고 미신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에 비친 불교의 모습을 억불론을 통해 살펴보면, 화려한 불사로 돈을 많이 쓰지만 재액을 막는다는 증거가 없다, 자연과 인간은 환망으로 보니 군신 부자 등의 인간 관계도 대수롭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인륜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이것이 불교가 세상에 비친 모습이니 세상을 환으로 보고 무의미하게 보는 행태가 바로 대승사상의 영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wlstlf3 실상을 바로 보는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가 오늘날 사실과 이치를 바로보고 있다면, 동양제국을 부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며 신놀음하는 기독교에 대해 그들의 모순을 깨우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성과 현실을 보는 눈이 신본주의 종교보다 더 떨어지고 있으니 지금 불교가 존폐의 기로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와 티벳이 만족도가 높다고 하는데 무지와 환상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환상은 깨어지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니 그들이 만족하든 어떻든 그들이 잘못 살았다면 과보가 좋지 않으니 현실에서 그들은 식민지와 가난과 미신 속에 살고 있고 사후는 불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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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그런 말장난으로 진리를 논하지 마세요. 질문을 할려면 항상 사실과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한번 물어봅시다. 내 엄지손가락이 깁니까? 짧습니까? 잘 생각해보고 답을 주세요.
그래서 내가 질문을 하려면 사실과 기준을 두고 질문을 해야지 무조건 좋으냐 나쁘냐? 기냐 짧으냐로 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것으로 선가에서 먹고 살고 있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대자유 님의 질문이 상대의 오류를 유발하는 선가의 질문류이기 때문에 내가 사실과 기준을 두어서 질문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과 기준을 말한 내가 그 답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님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삼의 사포닌 성분이 몸에 열을 낸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마저 상대성에 빠져 부정하면, 님을 그동안 동양이 빠졌던 옳고 그름이 없는 판단정지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일은 이와 같이 불변의 실상의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만 부처님의 실상법과 인과법을 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실상법과 인과법을 바로 안다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며 해탈에 이르는 길도 찾을 것이며 모든 학문과 과학의 열쇄가 될 것입니다.
사실적인 역사의 흐름마저 부정하니.... 그렇다면 님에게 묻겠습니다. 불교의 목적은 해탈입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대자유 현대의 불성론은 다양한 해석을 통해 초기의 불성론에 비해 많이 완화된 표현을 사용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불성론의 기본적인 사상은 존재론적이며 이는 힌두교의 아트만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초기불교경전인 남방의 4 니까야나 북방의 4 아함 그 어디에도 불성론에 대한 근거가 없다.
석가께서는 '나'라는 존재를 오온으로 설명하셨다.
반야심경에서도 그러하듯이 나라는 존재에 별개의 불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참나 또는 진아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논리이다.
@대자유 불성 문제는 대승불교의 중요한 개념으로, 유식설(唯識說)의 입장에서 무불성(無佛性)을 인정하는 설에 대하여
불성론은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을 주장한다.
세친은 불성의 특징을 여래장의 관점에서 설명하는데
불성은 인법이공(人法二空)이 현현된 진여(眞如)라는 것을 밝히고,
인(因)으로서의 여래장과 과(果)로서의 법신이 동일하며, 여래장이 번뇌에 덮여 있다는 것,
그리고 법신과 그 현현된 모습으로서의 3신(三身:法身 ·應身 ·化身)을 설명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성론 [佛性論] (두산백과)
님은 올바른 이성을 가진 분인지 의문입니다.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면 옳음을 알아야 하는데 옳음과 그름이 무엇입니까? 업이 탐욕과 분노를 일으켜 생긴다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좋지않은 일을 당해도 복수하지 말라니 적이 쳐들어오는데 손을 놓고 항복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도적이 집에 들어오는데 반항해서는 안됩니까? 자신을 개변해야 한다고 했는데 말은 쉬운 것같지만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개변할 수 있습니까?
업이란 그게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것이 자신의 의식 속에 들어가 그것이 되풀이되는 것을 업이라 합니다. 모두에게 좋은게 옳음이고 내가 좋은데 상대에게 해로운 일이면 나쁜 게 아닙니다. 사실과 일치하면 옳은 것이며 사실과 다른 엉뚱하거나 거짓된 것이면 나쁜 것입니다. 부처님은 실상을 보고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밝히셨기 때문에 진리라 하는 것이며 용수는 깨달음의 눈을 얻어 사실대로 밝힌 게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과 달리 자기 생각과 논리를 말했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강도가 들어와 가족을 죽이고 물건을 훔쳐가려는데 용서를 빌며 돈만 가져가라 하실 겁니까? 그런 사고가 동양을 비굴하게 만들어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대자유 님의 인과는 모든 것을 업보로 돌리는 수동적인 인과법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불교가 빠진 순환론입니다. 그런 순환론은 영원히 자기가 지은 인연에서 맴돌기만 할 뿐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발심하여 새로운 원인을 지어 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를 모르니 무조건 용서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악인을 용서하면 세상은 악인천지가 되어 버립니다. 악한 자는 자기 속에 악업이 있어 악을 저지르기 때문에 이를 용서하면 그들이 살판나서 모든 선한 자가 피해를 입는 것입니다.
진정하게 깨달은 스승이란 어떤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합니까? 올바른 가르침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올바른 기운이란 어떤 기운을 말합니까? 그대는 올바른 기운을 느껴보고 올바른 기운을 이야기합니까?
사상업과 몸에 쌓인 탁기(검은물질) 그것을 통틀어 업이라 하는데 사상업과 탁기가 업이라는 것은 누가 구분하여 말한 것입니까? 번뇌망상과 업은 탐욕과 분노를 일으켜서 생긴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좋은 업은 어떻게 생깁니까?
님은 지금 선업이 어떻게 생기는지 말 안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사상업이 부처님이 하신 말씀입니까? 어떠한 깨달은 자가 하신 말씀입니까?
님은 업은 탐욕과 분노를 일으켜서 생긴다고 했는데 선업도 그러한 것입니까? 왜 처음 했던 말과 다릅니까?
@대자유 님은 모든 업은 탐욕과 분노를 일으켜서 생긴다고 했는데 나중에 선업은 자비심과 진실한 말, 자비행을 하면 생긴다고 했으니 처음 말은 잘못 하신 것입니다.
@wlstlf3 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선업 악업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가 선업과 악업에 대해 설명해드리지요. 거짓말이 선업입니까? 악업입니까? 악업입니다. 거짓말을 안하는 것은 바로 선업인 것입니다. 선업과 악업은 이렇게 두개가 아닌 것입니다. 선업으로 악업을 지우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안하는 선업을 쌓으면 거짓말하는 악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업에 관한 답을 했으니 좀 전에 한 질문에 대해서도 답하시지요!
진정하게 깨달은 스승이란 어떤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합니까? 올바른 가르침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올바른 기운이란 어떤 기운을 말합니까? 그대는 올바른 기운을 느껴보고 올바른 기운을 이야기합니까?
상대와 내가 모두에게 좋은게 옳음이고, 내가 좋은게 그것이 상대에게 해로운 일이면 그건 결과적으로 나쁜 것이라 했는데 그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닙니다. 뒤에서 사실과 일치하니 남과 나에게 다 좋고 일치하지 않으니 사실이 일치하지 않으니 누군가가 속아서 피해를 입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남의 말을 훔친 것입니다. 님은 내가 좋은게 그것이 상대에게 해로운 일이면 그건 결과적으로 나쁜 것이라 했는데 님의 말처럼 사실이 일치하지 않는 일이 내가 좋은데 상대에게 해로울 리가 없습니다.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일은 나에게도 안좋고 상대에게도 안좋은 것입니다. 님은 나쁜 것에 대한 정의를 잘못 내린 것입니다.
왜 이렇게 주고 받은 댓글을 다 지웠을까요? 자기 글에 책임을 질 자신이 없으면 남을 비난해서는 안되지요!
주고 받은 댓글을 통해 이성있는 분들이라면 어느 말이 옳은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