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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교회개혁포럼 원문보기 글쓴이: 서강사람
신앙자료실에 올렸던 자료 전광훈 목사의 성장과정 [고교시절 전성천 박사댁 거주)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전광훈 목사는 경북 의성출신인데 고교시절 전성천 박사(1913년 생, 일본 동지사대 졸업, 미국 프린스턴 석사 예일대 박사, 1940-47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 교수, 목사, 1959-60 이승만 정부 공보실장(장관급) 4.19로 2년간 투옥.
지평교회 성남제일교회 목사. 기독교 방송 사장 등 역임] 댁에 거주하며 영어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배웠다고 주장합니다.
전광훈 목사는 고교시절 전성천 박사댁(전광훈 목사는 전성천 박사가 집안 7촌 아저씨가 된다고 주장)에 기숙하며 전박사께 영어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배웠다고 주장합니다.
전광훈 목사는 실촌 수양관에서 있은 강연에서 고교시절의 성장과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전성천 박사 댁이 이촌동의 맨션 아파트라 시골소년이 받은 문화충격을 이야기합니다.
화장실이 집안에 있고,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아저씨인 전성천 박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미국서 박사 학위를 두개를 받았고 일제 강점기 말에 북한 평양 인근에 있는 진남포 시장을 했고, 전목사의 부모를 불러다가 평양에서 돈벌이를 하게 했는 데 해방이 되어 공산당이 들어오자 전목사의 부모는 남하했고, 전성천 박사도 남쪽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전광훈 목사는 전성천 박사가 자유당 말기 이승만 대통령이 목회를 하는 분을 모셔다가 공보실장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성천 박사는 이기붕의 추천으로 입각하여 공보실장을 맡았는 데 경향신문 폐간과 부정선거 관여 건으로 옥고를 치렀디고 합니다
그런데 전성천 박사와 전광훈 목사의 친족관계에 대해 7촌 관계라고 전광훈 목사는 주장하지만 용궁 전씨의 족보를 조사한 결과 10촌 범위의 명단에도 전광훈 목사의 이름은 없습니다.
전광훈 목사의 전성천 박사댁 거주에 대해서도 전광훈 목사는 전박사 댁이 아파트였다고 주장하지만 전성천 박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당시 녹번동 소재 방 7개의 일반 주택에 거주했다고 말합니다.
전광훈 목사가 실질적으로 전성천 박사 댁에 거주했다고 한다면 아파트와 일반주택으로 기억의 착오가 날 리가 없습니다.
조사결과 전광훈 목사와 전성천 박사는 7촌 관계로 가까운 친족도 아니고(자기 집에 입주해서 데리고 있을 정도로 가까운 친족이 아님) 전광훈 목사가 전성천 박사댁에 입주해 있었다는 전광훈 목사의 주장도 거짓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는 전광훈 목사가 실촌 수양관에서 강연한 내용 중 전성천 박사 댁 기숙설과 관련되는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맨 아래에는 전광훈 목사와 전성천 박사의 주장을 전광훈 목사의 강연과 전성천 박사의 자서전 '십자가 그늘에서'를 비교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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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목사 실촌 수양관 강연 내용 발췌
49분 무렵부터 관련 영상이 나옴.
https://www.youtube.com/watch?v=pji8yyn_emk
이승만 대통령의 재팬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책
이승만이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언
일본은 일본의 성경 천황사상이 있다.
이승만이 책에 서술. 일본인이 이것을 단군신화 배우듯이 배울 것이다.
청중 중 한 사람인 마유미 권사가 불려나와 일본의 신화에 대해 설명을 함.
일본의 조상은 한반도여서 이곳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구가 있지 않나.
이승만에 대한 설명. 이승만이 원자탄을 예견하고 있었다. (55분경)
이승만의 능력은 성경을 알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성경을 사랑하는 것은 타에 추종을 불허한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1910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강연을 하게 되어 사람들이 운집
시간이 안되어도 안와서 보니 종로 2가 YMCA에서 부녀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성경을 아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의 성경 사랑과 능통함은 대단했다.
이런 것을 책에서 공부했지만 집안의 7촌인 전성천 박사님에게서 배웠다.
전성천 박사님이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미국에서 공부
이승만의 박사 논문은 한국이 영원히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는 미국이 지켜 주는 영원한 중립국가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을 모른다. 박사 논문을 한명도 모른다.
우리나라 정치권은 범죄자들이다. 국회의원 뱃지나 달고 저녁에는 술이나 처먹고 여야가 모두 같다. 미친 놈들이다.
우리 아저씨의 프린스턴의 박사 논문은 ‘성경의 권위’다.
당시 전세계가 모세오경 문서비평 때문에 성경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에 거기에 대해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노태정 전도사가 나온 예일대에서 또 박사
나는 우리 아저씨를 통해서 자세히 들었다. 이승만 박사의 미국에서의 삶과 말을 자세히 들었다.
하여튼 저녁만 되면 나를 불러내려 앉혀 놓고 1시간씩 이야기를 했다.
하루에 한시간씩 잔소리. 아저씨 말씀이 너는 이승만을 모르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나는 아저씨의 영향을 받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걸어다니는 시체다.
내가 공부를 못하니 어머니가 1969년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처음에는 이모댁에 있었으나 하루는 어머니가 오셔서 전박사 댁으로 데리고 갔다.
한강 아파트, 맨션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나는 거기서 에레베이터를 처음 탔다. 걷지도 않았는 데 주님이 부활승천하는 것처럼 올라갔다 신기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방안에 화장실이 있었다. 기상천외하였다.
어머니가 아저씨에게 아주버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보니 전박사는 이승만 대통령보다 애국 사상이 하못하다.
우리 아저씨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서 해방 전에 한국에 들어와서 평양 옆의 남포에서 남포 시장을 했다.
6촌 동생인 아버지를 평양으로 데려다가 일을 시켰다.
일제 강점기에 형님의 백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해방이 되었다. 이웃에 전라도 친구가 살았는 데 어머니에게 새댁, 큰일났어.
삼팔선이 생겼는 데 머지 않아 남쪽으로 갈 수가 없대.
빨리 패물만 챙겨서 남쪽으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가서 남쪽으로 가자고 하자 어머니에게 힐난을 했다.
어머니가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드러눕고 떼를 쓰자 전라도 집과 같이 개성으로 내려왔다.
개성에 오자 소련군이 평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부모님이 열차에서 내려 길잡이를 만나 안내를 받아 남하를 했다.
남쪽에 오자 미군이 주먹밥을 주며 맞이했다.
안왔으면 나는 김일성을 수령이라고 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해방이 되니 전성천 박사도 내려와서 원래 목사였으니 통합측 목사가 되어 공덕동 제일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당시 프리스턴과 예일대에서 박사였다.
이때 이승만 박사님이 찾아와서 후배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목사님 목사님 같은 프리스턴 박사님이 세상에 교회 안에서 세월을 허비하면 되겠습니까?
외무부 장관이 영어를 못합니다.
승용차에 태워 경무대에 들어가서 문화공보부 장관을 했다.
문공부 장관을 사표내고 내무부 장관으로 옮기려는 때에 4.19가 났다.
만약 미리 내무부 장관을 맡았다면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
아저씨는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살고 나왔다.
우리 어머니가 아저씨댁에 가더니 잘못했다고 울면서 사정.
제수씨는 예수 안믿으니까 이런 자식이 나오는 것이지.
아저씨가 키워주겠다고 두고 가라고 했다.
전박사 댁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 사고방식이 미국화 되었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불러내려 영어를 가르치고 두 번째로 이승만을 가르쳤다.
이승만이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태어나서부터 본처 이야기 미국에서 생활을 얘기했다.
하나도 귀에 안들려 귀에 안들려 졸면 이놈 하면서 존다고 호령.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어 기억 못하면 다시 반복.
3년을 배웠는 데 하나도 안들려. 문을 닫고 나오며 욕이 나왔다. 집안 어른인데 욕을 했다.
그때부터 욕을 잘하게 되었다.
다시 이모댁에 가겠다고 했다가 어머니에게 혼났다.
다 끝나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어 생각을 해보니
답십리에서 목회를 하는 데 데모를 하던 학생들이 도망을 들어왔는 데 경찰이 따라왔다.
학생들이 없다고 했고교회가 치외법권 지대라고 항의를 했으나 학생들을 수갑을 채워 연행.
왜 나라가 일어날까에 대해 알고 싶어 이승만에 대한 책을 읽었다.
10년 전에 들었던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가 살아났다.
나중에 목사가 되어 아저씨를 찾아가서 회개를 했다.
무엇이 되었느냐고 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설교에 대해 묻기에 대충 한다고 했더니
전박사는 목사만 되면 다냐 설교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떼 배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뼛속까지 들어갔다.
제2의 신앙이 되었다. 이승만 눈으로 정치 경제 사회 등을 보면 세상이 보인다.
깨달은 것은 이승만은 성경의 천재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승리하기 바랍니까?
성경을 모르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성경을 아는 사람을 사용한다.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간 사람들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다.
성경에만 능통하면 주님이 같이 일하자고 사정하신다.
성경을 모르면 아무리 해도 헛방이다.
(1시간 10분 정도까지)
성경에 통달하면 쉽게 가르친다. 잘 모르는 사람이 어렵게 가르친다.
모든 학문에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쉽게 가르친다.
성경은 최초에 모세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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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목사 주장과 전성천 박사 자서전 내용의 비교
내용 | 전광훈 목사 주장 | 전성천 박사 자서전 | 비고 |
가옥 소재 | 이촌동 한강 맨션 아파트 | 가옥은 녹번동 소재 대지 199평 방 7개의 양옥 | 자서전 182쪽 |
전광훈의 전목사댁 기숙 기간 | 1969년 고1부터 3년간 | 1970년 12월 22일 광주대단지로 이주 | 자서전 187쪽 |
전성천 박사 학위 취득 과정 | 미국서 프린스턴 예일 양교에서 박사학위 | 프린스턴 석사 예일대 박사 | 자서전 12쪽 |
박사학위 논문제목 | 프린스턴 : 성경의 권위 | 한국개신교회의 분파와 통합 | 자서전 462쪽 |
미국체류기간 | 전박사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해방전 귀국 | 1947년 도미 유학, 유학 중 1949년 아내의 사망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출국 1955년 학위과정 마침 | 자서전 12쪽, 55쪽 |
귀국 후의 행적 | 전광훈은 전성천 박사가 귀국 후 남포시장을 역임했다고 주장. | 일본 유학 후 1940년에 귀국 41년부터 조선신학원에서교수로 근무함. ‘40년부터 남대문 교회 전도사’ 42년 목사안수, 공덕교회, 가리봉 교회 목사로 시무 | 자서전 311 - 328쪽 |
해방 당시 행적 | 해방후 북한 통치를 피해 남하함. | 1945년 2월 학생들을 인솔하여 평양비행장 건설에 6개월간 동원되었다가 서울에 휴가를 와서 해방을 맞음 | 자서전 335-336쪽 |
공보실장으로 발탁(1959년) | 공덕 제일교회에 시무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찾아와서 입각을 시킴 존대말을 쓰며 깍듯이 목사 예우를 함. | 연동교회에서 무급목사로 사역하다가 공보실장 발령을 받았으며 이기붕의 추천이라고 함. 이 대통령을 만났을 때 전박사에게 자네라는 호칭을 사용. 정부 대변인과 비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함. | 자서전 64-71쪽 |
내용 | 전광훈 목사 주장 | 전성천 박사 자서전 | 비고 |
4.19후 복역기간 | 6개월 | 2년 | 자서전 101쪽 |
전성천 박사 발탁 동기 | 외무부 장관이 영어를 잘못한다고 주장 | - | - |
내무부 장관 임용 관련 | 공보실장을 사표내고 내무부 장관으로 가려는 데 4.19가 남. | 이 대통령의 4선 출마에 대해 동의하지 않아 이 대통령의 분노를 샀고 이 건으로 사임 압력을 받아 공보실장 사임 | 자서전 98-99쪽 |
미국 체류기간에 대하여 전광훈 목사의 강연과 전성천 목사의 자서전 내용이 다름. 전광훈은 전성천 박사가 해방 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고 주장하나 전성천 목사는 자서전에서 해방 후 1947년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중간에 아내의 중병으로 귀국했으나 사별하고 6.25 직전 다시 미국으로 가서 학위 과정을 이수하고 1955년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귀국하였음.
전성천 박사에게서 이승만 박사의 미국에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으나 전성천 박사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함께 체류한 일은 없음.
전광훈 목사는 해방 전 전성천 박사가 일제에 협력하여 남포시장을 역임했고 자기 부모를 평양으로 데려다가 돈벌이를 하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성천 박사는 교회 목회를 하며 조선신학원 교수로 일했다고 한다.
정말로 전성천 박사 댁에 기거하며 매일 한시간씩 가르침을 받았다면 전박사 주택의 소재지 가옥 구조, 전박사의 행적에 대해 전광훈 목사의 주장과 전성천 박사의 자서전 내용이 차이가 날 수 없다.
전성천 박사가 시장으로 근무하다가 해방후 남하했다는 것도 자서전과 상이한 내용이다.
당시 외무부 장관은 조정환으로 미국에서 유학을 한 분임. 영어를 잘하지 못할 리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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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컷지말라.
사소한것 같지만 심각한 문구인데 그누구든 기독 신앙인이라면 명심했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