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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의 부름
미가서 6:1-8/ 마태복음 7:13-23
오늘 두 본문은 모두 정의로운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정의롭다라는 개념은 생각보다 정의내리기 어렵습니다. 나 자신이 주관적으로 가지는 옳음을 행하고 그름을 피하는 것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벗어나서 내가 만나는 남이, 그리고 또 나와 남을 포함한 우리가 함께 옳음을 행한다 혹은 그름을 피한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하기에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집단적 사고를 가진 사회에서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 보다는 우리 전체가 옳다는 여기는 가치관에 따라서 약한 나들의 희생이 강요되고는 합니다. 반면에 개인의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될 수 있는 한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가치에 있어서 느낌보다는 복잡한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가 옳다라는 것이 과연 옳은 지를 되돌아아보고, 최대한 약한 나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영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면에서, 독재를 위해서 일선 군인들이 이전처럼 쉽게 동원되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더욱 개인의 가치와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향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옳고 그름에 있어서 좀 더 복잡한 사고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가 옳다 혹은 그르다를 판별하는 기준이, 나의 변덕이나, 혹은 우리의 압력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가장 절대적인 명령을 주는, 어느 누구도 흔들지 못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절대적인 근거에 서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위 신앙 양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시작점이자, 또한 삶의 경로를 주관하는 분으로, 그리고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결국 삶의 옳음의 문제는 내 선택이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것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따라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 양심에 따른 삶은, 많은 경우에 그 신앙을 둘러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여러 사건들 속에서 나의 삶을 통해서 표현되게 마련이며, 그 가운데에서 당대 사람들의 옳고 그름의 기준과 충돌하게 됩니다. 노예를 인간 취급도 안하던 시대에 형제애를 보여주고, 여성과 어린아이의 존엄을 되살려주고, 고향을 잃은 이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는 그 모든 신앙 양심의 표현들은, 때로는 당대에 주어진 편협한 우리의 기준에 충돌하고 때로는 도전하면서, 모든 것을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옳음을 이루어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절대적 옳음의 문제가 가장 근본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확신의 문제이고, 언제나 결국 객관적일 수 없으며, 주관적인 확신들이 충돌하고 있다는 점을 마주치게 됩니다. 서로 같은 사안에 있어서 각자가 서로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가져오지만 결국 서로 반대되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여의도에서 광화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의 신앙 양심을 바탕으로 신속한 탄핵 결정을 강조하며 수십년간 지속되어온 반민주적 독재의 유산을 털어내려고 할 때,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기 나름의 양심을 바탕으로 탄핵 반대를 외치며 소위 그들 표현에 따르면 친중 공산주의 독재에 저항하며 정치적 의견을 표현해내려 합니다. 특히, 이제, 조갑제나 정규재 같은 보수주의자들 역시 포기해버린 윤석열과 그 퇴행적인 군부독재 패러다임의 준동을,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최후의 보루로서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광훈과 손현보 목사는 그 진영의 핵심리더들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말씀의 빛에 비추어서 좀 더 섬세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의 신앙 양심에 따른 삶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삶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고 계신가? 개인의 삶과 혼란스러운 역사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없는 듯 한 깊은 밤을 허우적 거리며 걸어다닐 때, 실날같은 신앙이 그나마 던지는 물음입니다. 결국 과연 우리가 믿고 따를 그 하나님은 과연 정의로운가? 그 정의로운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 우리 삶을 드리는 것이 과연 망상이 아니라 믿을만한 일인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미가서는 이 본문에서 흥미롭게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벌어지는 소송을 그립니다. 이 소송은, 즉 하나님 당신은 정의로우십니까? 그리고 그걸 따지는 너희야 말로 정의로우냐?라는 쌍방간의 소송입니다. 인간이 일어나서 하나님에 대항하는 소송이 정당하다는 이유를 밝혀보는 만큼, 하나님 스스로 역시 자신을 변호하면서 자신에 대한 소송이 부당하다 혹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이유를 밝혀보이는 것입니다. 상황은 이사야 때와 유사합니다. 아시리아의 강한 힘과 잔인함은 만군의 주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과 유대를 완전히 짓이겨 버리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이는 그래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대를 구해주실 거야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지만 반면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철저히 이들을 외면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둘 다 아마 공유하는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반전이 있건 아니면 혹은 없건 간에, 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드시는가? 그는 정의로운 존재인가? 그는 첫째 힘이 없는 무력한 존재이거나 혹은 둘째, 악의를 가진 사악한 존재이거나, 아니면 셋째, 그따위 것을 믿은 우리가 바보였던가?라고 묻게 됩니다. 여기서 성서는 일단 하나님의 무능력한 존재이거나 혹은 하나님은 우리의 망상의 산물이다는 견해는 일단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것은, 결국 난장판을 만드신 당신은 사악한 존재 혹은 정의롭지 않은 분이십니까?입니다. 그렇게 악한 신에 대해서 우리는 소송을 겁니다. 하기에 미가서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은 너희의 소송의 내용을 차근차근하기 말해보라며 권유를 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소송 진행의 청중, 즉 소송 내용이 들려지는 대상이 바로 자연과 역사입니다. 미가서의 하나님은 너희의 나를 향한 반대 소송의 심문은 바로 자연과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지금 그 땅, 그 산과 언덕은,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자연적인 삶이 가능하게 이루어지는 생태적인 터전이자 동시에 애급에서 탈출한 그들이 역사적으로 일구어왔던 역사적 현장입니다. 예를 들어, 한강은 분명히 삼국 시대나 현대나 그 주변의 모든 생태계 구성원에게 중요한 젖줄이지만 동시에 각 역사적 시대마다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전장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산과 언덕은 그 생태계를 구성하는 질서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지만 그에 둘러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일들을 일하시는 무대인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스라엘이 뿌리 내리고 있는 그 자연과 역사적 현장은 하나님을 고소하는 이유의 부당함과 동시에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정의 혹은 자신의 옳음을 변호하는 정당함의 이유가 됩니다. 왜일까요? 물론 우리의 보이는 상황은 비록 난장판과 하나님 없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본다면, 땅을 견고한 기둥이 받치고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연은 어느 정도 질서 있게 작동하면서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자연에 포개진 역사의 현장은 하나님이 역사의 한 복판에서 인류를 구원해오신 활동의 펼쳐진 무대인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침공이 임박하고 많은 살육과 포로됨이 일어질 상황 속에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은 그 상황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무책임한 희망을 던져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상황이 던지는 하나님의 불의함 혹은 사악함에 대한 혐의보다는 그 상황을 앞뒤로 둘러싼 하나님의 정의로운 구원이 도도히 흘러가는 그러한 역사와 그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격려합니다. 단기적 관점에서 파멸과 혼란은 피할 수 없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궁극적인 구원의 길이 드러날 것입니다. “너희가 이 모든 일을 돌이켜보면, 나 주가 너희를 구원하려고 한 일들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좀 더 크게, 더 깊이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 없는 부정의한 현실의 한 복판에서 우리를 옳은 길로 이끌어 옳게 하시는, 즉 정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사악하다고 절규하게 몰아가는 몰락과 고난의 순간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의심과 절규 자체가 그 분의 살아계심을 긍정하는 한에서, 결국 그 몰락의 순간은 그 앞과 뒤 그리고 배후에 우리를 옳은 길로 이끌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게 되는 분기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냥 절망하면서 좌절해야 하나요? 절망 속에서, 좌절 속에서도 결국 우리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결국 물어야 할 것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물론 임박한 심판과 파멸이 그 무엇을 한다고 해서 변경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은 확정되었습니다. 그 몰락과 멸망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이라면 결국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묻게 됩니다. 아니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미가는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진심으로 다해야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마주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전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가장 최선은 예배 혹은 제사를 드리는 것, 즉 전통 안에서 정해진 예식의 절차를 따르고 이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흡족하게 한다는 전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는, 단순히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예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백만원대의 송아지나 수십억원 대의 양때나 혹은 무수히 비싼 많은 양의 향유를 오로지 그 예배 하나를 위해서 소비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가장 소중한 자신의 자녀 역시 인신 공양으로 드릴 수도 있을 정도의 정성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만을 염두에 둔 여하의 행위는, 그것이 세상 속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을 바치면서 그 정성과 진실성을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정답이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이제껏 해오던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교회 안에서의 건축이나 교회 봉사, 그리고 장엄한 예배를 통해서 이루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은 착한 사람으로서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의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서로가 서로를 향한 따스한 마음으로 연대성을 가지고 스스로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 두가지 일을 하면서 자기 삶을 하나님께 겸손히 맡기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공의 혹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사실 애매합니다. 정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규정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공의를 행하는 것은 사실 뒤의 두 규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기준 앞에 서서 신앙의 양심을 회복하고 그 예민한 양심을 바탕으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들에게 최대한의 유익을 주려고 하고 각자 모든 이들이 받을 피해를 최소화함으로써 주어진 이웃들을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큰 틀에서의 사회 정의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도덕적인 옳음 혹은 정의의 문제가 확장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최대한의 유익을 주고 해악을 최소화하면서 공동의 삶의 원칙을 구성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입니다. 이러한 정의는 하기에 근본적으로 특정한 사안에 있어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가치를 열렬히 옹호하는 것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정의를 어떠한 법이나 원칙에 대해서 상당히 엄격하게, 그리고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에 있으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이나 다른 이를 엄격하게 단죄하는 것으로 오해하고는 합니다. 미국에서 이주 노동자나 혹은 성소수자 그리고 소수 인종들의 범죄에 대해서 엄격한 법 집행을 시행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강한 이들이 자기 유리한 대로 법을 가지고 약한 이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정의의 관점에서는 법이라는 원칙 자체가 그 원칙으로 사람을 따돌리고 학대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람을 질서있게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일종의 제도임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의의 문제는 자비 혹은 사랑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행하는 것 혹은 겸손히 걷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어떠한 입장에 대해서 정의 혹은 옳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습니다. 비록 때로는 분명히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옳을 수도 있으며, 나의 신앙 양심이 그 입장을 남들이 어떻게 틀리다고 보든 간에 내가 그것을 옳다고 여긴다면, 그 때 나는 그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한 편에서는 분명히 나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쩌면 나보다 하나님의 옳음을 더 잘 분별할 수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분명히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그것을 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 때는 그 옳음의 문제가 주는 결과의 문제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이처럼, 공의를 행하는 것은 한 편에서는 상황에 따라서 사랑의 원칙을 가지고 사적 상황이건 공적 상황이건 남을 돕고자 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 결과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자신에게 옳은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옳은 일을 분별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 신약 본문은 바로 자기 스스로 미혹되어서 하나님의 정의를 거슬리고 심판을 초래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경고에서부터 우리는 바른 분별력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마태 복음 본문은 간략히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결국 거짓 예언자를 따라서 큰 길로 가는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여러 기적을 드러내 보이며 세상의 관점에서도 그럴싸하게 좋아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기에 나쁜 열매를 맺게 되고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면 참 예언자이신 예수를 따라서 누구나 가기를 꺼려하는 좁은 길로 가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실재로 행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결국 좋은 열매를 맺게 되며, 하기에 하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유유 상종이라는 고사 성어를 떠올리는 상황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 즉 정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께 맡김을 선포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관심있는 것은, 그가 어떠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추종자를 얼마나 거느리며 그들을 바탕으로 얼마나 자기를 확장하는가에만 관심이 있는 이입니다. 성서는 바로 그러한 거짓 예언자의 특징은 바로 단기간에 빠른 세몰이를 통해서 추종자를 불린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넓은 길이란 표현에서 드러나듯,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매력적이고 또한 혹하게 해서 사람들이 모이게 할 만한 그러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넓은 길은, 별다른 생각없이 너무나 익숙하게 자신들이 사는 방식 그 자체를 반성없이 그냥 그대로 마치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인양 포장합니다. 최첨단의 장비와 시설을 갖춘 교회에서 깔끔하고 신뢰감을 주는 외모를 가진 성직자가 중산층 시민들이 너무나 익숙한 삶의 습관과 가치를, 그것이 학벌주의와 능력주의, 그리고 여러 교양있는 가정의 성역할에 기반한 것이건 간에, 그러한 가치를 마치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 상황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혹은 그러한 부유한 중산층 시민이 가진 편견과 배타성을 반영한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며 성경을 바탕으로 선동하는 경우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집단들이 넓은 길인 이유는 바로 모이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이 가진 편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해주는 듣고 싶은 이야기들만을 계속 들으면서 그에 이끌려서 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은 자신들이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모든 기이하고 놀랄만한 성취들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마지막에 드러날 예수의 삶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 되어버립니다. 비록 예수의 이름이 오르락 거리고, 그 과정에서 눈먼 돈이 몰려들고, 정치 권력자들이 굽신 거리고, 더 나아가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고 모일지라도, 그것은 예수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듣고 행하려는 정의로운 삶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그 삶의 방식을 볼 때, 결코 가기가 꺼려지고 조금 위험하고 또한 동시에 무모하면서도 동시에 한없이 진지한 느낌이 드는 그러한 삶입니다. 그것은 지금 바로 여기에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능력 속에서 완전히 휩싸여서 사는 예수의 삶입니다. 어쩌면 예수의 삶은 미가 예언자가 이야기 한 바, 정의를 행하고 인애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함이라는 가치를 가장 선명하게 구현한 삶입니다. 예수는 그 스스로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가치와 그 기준을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내고 또한 드러내었고 그 가치를 퍼트리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고 그로써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 혹은 하나님의 옳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는 당대의 유대교의 종교 권력자들과 도덕 선생들이 생각하는 정의 혹은 옳음과 충돌하는 동시에 로마의 정치 권력의 정의, 즉 로마의 패권의 안정성에게도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삶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의로움, 즉 하나님의 정의는 결국 자유로운 섬김의 마음을 바탕으로 한 이웃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에서 정점을 이루며, 그것이야 말로 모든 규칙과 법칙의 완성이며, 그 빛 아래에서 모든 규칙들과 법칙들은 해체되고 해소될 수 있음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는 율법을 종교 지도자들의 지배와 따돌림의 수단에서 빼앗아 와서 그 율법의 진정한 완성은 곧 예수 자신의 삶, 즉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자기를 내어주는 섬김과 이웃을 조건없이 사랑하는 그 삶에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한 사랑의 가치를 위해서 때로는 사회에서 정한 규칙과 법, 그리고 종교적으로 규정된 관습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자유롭게, 심지어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의 사역을 위해서 십자가에서의 고난으로 향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 맡깁니다. 당연히 이러한 삶의 방식은, 세상에서 안정적으로, 질서 있게, 현명하게, 그리고 때로는 격조 있고 세련되고 때로는 남과 스스로를 비교하고 으스대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너무 낯선 것입니다. 하기에 이러한 길, 즉 정의를 실현하며, 사람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삶은 전반적으로 세상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길이 아니며 그렇게 가고 싶지 않은 길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좁은 길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가는 이들은 당연히 가야하는 길이고 고됨 속에서도 잔잔한 보람이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길입니다. 넓은 길은 넓은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 또 그만큼 다양한 행보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이가 사욕을 위해서 미혹시키는 대중동원에서부터, 혹은 중상류층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기독교적 가치관이라고 띄우는 자기애적인 종교, 성찰없이 말초적인 음악과 감각에 스스로를 가두는 종교, 혹은 정치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자각 없이 명상과 성찰만을 강조하는 종교, 혹은 삶의 궁극적 의미와 그리스도와의 동행 없이 정치 사회적 동원만을 강조하는 종교 등, 넓은 길 속에 정말 다양한 행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은 비록 서로 다른 환경과 서로 다른 방식이 있을지라도 결국 예수의 삶으로 수렴됩니다. 예수의 삶이란 결국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옳은 해답, 혹은 정의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세상 속으로 온전히 드러내며, 세상이 정한 규칙과 법칙을 통해서도,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도 자유롭게 마음을 다해서 사람을 사랑하며, 그 속에서 자기 없이 자신의 삶을 내어맡기며 하나님께 맡기며 걸어가는 그러한 삶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사는 이들은 이미 현재 이 지상의 삶에서, 우리의 세상의 한 복판에서, 하늘 나라를 소유하며 거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날 같이 혼란 스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내버려 둔 듯 보이는 하나님을 부정의하고 사악하다며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이 자연과 또한 역사의 발전을 생각하고 그 모든 것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사랑과 그 정의로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재의 일시적 혼란과 좌절은 결국 더 큰 구원하심이라는 틀 속에서 더 완벽한 하나님의 옳으심으로 향할 것이라 잠잠히 기다리며 기대해야 합니다. 그 혼란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여러 거짓 예언자들의 다양한 거짓말들에 현혹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혼란함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법은 결국 예수를 따라서 하나님의 옳으심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나가며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의 삶은 매우 혼란스러움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혼란과 좌절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의로움을 의심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주님, 저희에게 더 깊고 강한 믿음을 주셔서 더 크고 깊게 볼 수 있게 되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당신의 정의로움을 붙들게 하소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고통을 겪어나가면서 여러 거짓 예언들에 미혹되지 않고 저희 삶을 당신이 바라는 의로운 삶에 매진하고, 이웃을 힘써 사랑하고, 우리 삶을 겸손히 당신께 내어 맡길 수 있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를 위해 그 삶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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