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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8월과 9월이 되면
가을철 말벌 경계령에 대한 비상한 뉴스가 쏟아집니다.
뉴스 뿐만 아니라 구글 검색을 통해서 말벌 관련 영상을 찾아보면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날 강원도 산약초 산행을 할 때
말벌에 대한 위험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길 없는 숲을 헤집고 다니는 산약초 산행에는
산행의 모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말벌은 주로 양지 쪽에 집을 짓는데
바위와 나뭇가지와 벌목하고 쌓아 놓은 나무 더미와 풀 숲의 땅 속에 집을 짓습니다.
양지 바른 곳의 무덤 주위는 말벌의 서식지요,
또한 그곳에는 양지의 능선을 좋아하는 뱀이 많습니다.
벌초하기 전의 무덤 주위는
말벌과 뱀이 많아 항상 살피지 않으면 큰 위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양지의 능선에는 산 도라지가 많이 서식하기 때문에
도라지 사냥 길에는 항상 말벌과 뱀의 위험이 있습니다.
산약초 산행의 심마니 길은
말벌과 뱀 뿐만 아니라 낙상의 위험이 있습니다.
등산로를 따라 산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가파른 8부 능선의 산행은
나무 가지를 붙잡고 산행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칫 발을 헛디디면 목숨마저 보장할 수 없습니다.
8부 능선의 나뭇가지는
대부분 마른 가지가 많아 약간만 힘을 줘도 부러집니다.
산약초 산행의 안전 장비는
안전한 산행을 위한 생존 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산약초 산행의 안전한 산행은
사실상 없습니다.
야생의 산행은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한 험지여서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면 오늘도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습니다.
산약초 산행에서 맷돼지를 만나면
줄행랑을 치든지 맨 몸으로 맷돼지와 사투를 벌여야 합니다.
맷돼지가 둔한 것 같아도
순발력과 스피드와 점프력 등 모든 면에서 사람보다 월등합니다.
더구나 야생의 산은 맷돼지의 텃벝이어서
총을 든 맷돼지 전문 헌터가 아니면 누구든 필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벌과 뱀, 그리고 맷돼지 등 독충과 산짐승의 위험이 항상 있는 산약초 산행은
목숨을 담보한 생존의 몸부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생보다 더 강한 생존의 본능을 갖지 않으면
야생에서 살아 남을 수 없고 그 야생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산약초 산행의 흔적을 가진 삶은
푸른 산의 백성으로 산촌의 삶을 동경하며 고향을 그리는 목가적 향토의 정서로 가득합니다.
지난 날 산약초 산행은 산약초 채취가 목적이 아니라
산의 높이와 깊이를 알고 배우는 체험 학습이요, 산악의 레저 스포츠었습니다.
항상 다른 산을 오르며 정상을 향하는 과정은
등산로를 따라 산행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산행의 스릴을 느낍니다.
등산화를 신고 산약초 산행을 하면
하루 만에 등산화의 밑창이 떨어져 나갑니다.
실제로 세일해서 17만원 하는 스위스제 등산화를 신고 몇 년 동안 출사를 다녀도 멀쩡하였는데
산약초 산행 하루 만에 밑창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공사장의 안전화를 신고 산행을 하였는데
그마져 떨어져서 미제 워커를 신고 산행을 하였습니다.
종아리까지 오는 미제 워커를 신고 각반을 두르고 산약초 산행을 하면
뱀을 밟아도 물릴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그물망 모자를 쓰고 그 위에 얼굴까지 커버하는 그물을 뒤집어 쓰고
수건을 두른 군용 밸트를 목에 채우면 강풍에도 모자가 날라가지 않고 장수 말벌의 위험에도 끄덕 없습니다.
손에는 목장갑과 스포츠용 가죽 장갑을 끼고 그 위애 고무 장갑까지 착용하고
용접용 가죽으로 된 토시를 착용하면 완벽하게 팔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 위에 기능성 조끼를 입고 그 많은 주머니마다 휴대용 물티슈를 넣으면
말벌의 공격에도 상체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허벅지인데 군용 밸트를 줄여서 2중으로 착용하고 수건을 두르면
허벅지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 위에 로프로 중무장을 하면.......
험한 산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 오는 길은 밀림의 타잔처럼 가파른 절벽도 산악 레포츠를 즐길 수 있습니다.
스스로 안전한 길을 만들어 갔던 산약초 산행은
생존과 공생이라는 생활의 강인이 되었습니다.
문득 언론이 비판하는 산약초 산행을 하면 산림이 훼손되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국립 공원을 등산하면 주말 같은 경우
발디딜 틈이 없습니다.
강원도 산행을 하는 가운데
어느 한 날은 설악산 울산 바위를 등정하였습니다.
보통 산약초 산행을 하면 그 넓고 큰 산에 혼자 밖에 없는데
설악산을 찾은 수 만명의 등산객을 보고 많이 낯설었습니다.
또 주말에 테마 여행을 다니면서 출사를 하면
전국의 관광객이 모여들어 어디를 가든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산약초 산행에서 일행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적이 없을 정도로
강원도 야산을 찾는 등산객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기자는 산을 다니는 자체가 산림을 훼손한다고 비판하였는데
탁상공론의 우매한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곡괭이로 산약초를 채취한 흔적은
산짐승들이 남긴 수 많은 발자국에 비해 조족지혈일 뿐입니다.
산의 산림은 숲가꾸기 일환으로 벌목하고 버려 둔 나무 더미만 하더라도
도심의 빌딩 숲 보다 더 많고 높습니다.
산 사태가 나서 무너지고 패인 흔적들을 직접 목격하면
산에 가는 것 만으로 산림이 훼손된다는 어리석은 추론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산 짐승들이 자주 다녀 만들어 진 길에 쌓인 낙엽은
산림의 훼손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입니다.
숲이 우거져 망가지는 산림을 위해 숲 가꾸기를 하는 것은
산림을 보호하고 보존하는 최선입니다.
다만 인력이 부족하여 벌목한 나무 더미를 방치하는 것은 무단으로 출입하는 산약초 산행인에게만 불편할 뿐
자연 그대로 썩어 그름이 되고 유기체적 생태 순환을 합니다.
그러므로 산약초 산행으로 산림이 훼손된다는 비판은
숨을 쉬면 공기가 오염된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누구든지 용기와 지혜가 있으면
자연의 산에서 생존하고 공생하는 삶의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산약초 산행인은
자연과 소통하는 삶의 지혜를 가졌고 그 산의 품에서 은택을 누립니다.
그러나 지금은 도심의 그린 빌리지 숲 속의 산책으로
한 달 3만원의 생활비로 또 다른 생존과 공생의 비법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던 바울은
최악의 환경과 최상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복음의 전사로 생존의 달인이었습니다.
☞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빌4:8-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신념이 아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는 말씀 그대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생존의 학습 체험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길에서
고난으로 걷는 형통의 길을 하나님의 은혜로 체험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도 일기는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 말씀하였습니다.(고전4:9-13)
뿐만 아니라 고린도 후서에서도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고후11:22-28)
모든 교회를 위한 바울의 염려는
사역의 길에서 당한 고난과 핍박과 그 모든 환난을 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존과 공생을 위한 바울의 사도적 삶은
이방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기 위한 일사각오의 생존기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생존과 공생, 그리고 상생을 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 삶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생존과 공생을 위한 복음의 역학적 관계는
하늘의 빛을 땅에 비추는 바로 그 생명의 원리입니다.
예수의 길, 바로 그 빛을 비추기 위해서
바울을 이방을 향하여 달려갈 길을 달렸습니다.
쉰들러 리스트의 열정으로
한 생명을 더 구원하기 위해 이방의 구원을 위한 제물이 되어 전제로 부어졌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받고 헐벗고 굶주림이 문제가 아니라
이방을 구원하는 예수의 빛을 진리의 복음으로 달려가면서 전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깨달았던 하박국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는 복음의 나팔이 되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합2:2-4)
여호와의 묵시를 받은 하박국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노래하면서
참된 생존과 공생의 길을 깨달았습니다.(합3:17)
이와 같이 성경의 복음적 시선으로 볼 때
기독교의 기복 신앙은 이단과 사이비 신앙입니다.
물질의 풍요와 삶의 행복이 목적인 신앙은
영생의 구원을 상속 받을 수 없는 세속적인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부잣집 대문간의 걸인 나사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세지입니다.
물질의 풍요를 기원하는 맘몬 신앙은
여호와를 바알로 섬겼던 이스라엘의 타락한 바리새인의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험한 생존과 공생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하늘의 빛으로 전하기 위한 복음에 매인 종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진 십자가의 그 길을
사도 바울은 고난의 흔적으로 그 복음의 길을 달렸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샘을 가진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의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각처에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길은
예수의 구원을 담은 생존과 공생의 험지였습니다.
은혜로 용서 받은 성도는 사랑으로 허물을 덮고 용서를 베풀며
온유와 관용으로 참된 생존과 공생과 상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복음으로 영생의 구원을 받은 성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땅 끝까지 만들어 갑니다.
은혜로 생명의 샘을 발견한 성도는
누구든지 먹고 마시면 영생을 얻는 성령의 강을 흐르게 합니다.
민생과 안보의 프레임에 갇혀 영원한 하늘의 구원을 잃어 버린 대한의 아들 딸들은
붉은 띠 머리 두르고 헛된 생존의 뭄부림으로 허망한 인생을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잃어 버린 백성은
개인의 탐욕과 이기적 집단과 지역적 이기와 자국의 보호를 위한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프레임에 갇혀있습니다.
무엇을 위하고 누구를 위한 생존 투쟁인가?
사도 바울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백성을 위해
달려가는 복음의 등불이 되었으며 생명의 샘과 향기가 되었고 그 삶의 자취는
질그릇에 그리스도의 보배를 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개인의 민생을 위해 투쟁하고, 집단적 이기를 위해 투쟁하고
지역적 이기를 위해서 헌법을 운운하면서 반국가적 생존 투쟁을 불사합니다.
여기에 성도와 교회가 나서는 모양새는
참된 생존과 공생을 위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린 세속주의 추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존과 공생을 위한 투쟁은
오직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세상의 빛으로 비추는 그 복음적 사명이요,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헌신과 충성의 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구원을 생명의 은혜로 온전히 꺠달은 바울은
개인과 가정과 단체와 사회와 민족과 국가를 뛰어 넘어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온전히 달려갈 길을 달렸습니다.
한 알의 밀이 썩어지는 밀알이 된 예수의 길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 화목화며 영생의 구원을 얻기 위한 메시야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고전10:32-33)
또한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딤전2:4)
에스겔 선지자는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겔33:11)
부활하신 예수님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막16:15)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롬1:16-17)
참으로 복음 전파의 가치는
경제와 민생, 복지와 안보를 뛰어 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위대한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한 생존과 공생의 길은 밥 먹고 살기 위한 어떤 경제 활동이나
공공의 안녕을 위한 공익 질서나 민생과 안보를 위한 헌신과 충성보다 더 존귀하고 귀중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