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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식구의 사명
1971.01.16 (토), 한국 부산교회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은 부산지구 본부에 모인 식구들과이 시간을 갖고자 하오니 같이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각자의 사정과 형편은 다를 지라도 뜻을 위하는 마음과 당신이 소원하시는 목적은 저희들과 일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당신의 경륜 하심으로 저희들의 생활과 저희들의 세태를 두루 살피시어서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이 시간 전체를 당신의 사랑 가운데 품으시어서, 일체를 당신만이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서로 그리워하던 식구들을 만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옵고, 당신의 기쁘심만이 여기에 나타나시기를 바라옵니다.
전국에 널리어서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는 식구들이 많은 줄 알고 있사오니, 그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전체를 당신이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면서 참부모님의 성호 받들어서 아뢰었사옵니다. 아멘.
말 씀
이 시간은 '통일식구의 사명'이란 제목을 가지고 터놓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동안 전국을 순회하면서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목이 좀 쉬었습니다.말소리가 저 뒤에까지 잘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뒤에 잘 들려요?「예, 들립니다」잘 안 들리죠? 앞으로 좀 나오세요.
실례지만 오늘 저를 처음 보는 분들 한번 손들어 보세요? 내리세요. 오늘 처음 온 분들은 '통일식구의 사명' 하게 되면 잘 모를 것입니다. 기성교회 다니던 분들은 조금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중간 부분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전과 후가 연결될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양해하시고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와 요셉 가정을 세운 목적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교인들끼리 공통으로 쓰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 하면 식구라는 말입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교인이라고 말하 지만,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식구라고 말합니다. 어찌하여 식구라는 말을 쓰느냐 하는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걸 비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식구라는 명사는 원래 한 부모를 중심삼고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가족을 두고 쓰는 말인데 통일교회에서는 부모라든가, 자식이라든가, 혹은 그런 관계에 있지 않은,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남남인 사람에게도 식구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 혈연적으로 형제가 아닌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식구라는 말을 쓰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어요. 식구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은 여기 서 있는 이 사람이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과 통일교인간의 어떠한 인연된 관계를 두고 식구라는 명사를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본래 예수님 때부터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응당히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사명이 어떠한 것인지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최후에는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만민을 위해 서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기성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와가지고 사명을 다하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처음 오신 분들은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되겠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기 때문에 설명을 구체적으로 들어야 그 내용을 전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데에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알고 있는 분야는 이러했는데, 그 배후에 숨겨진 내용이 있는 모양이다' 하고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들어 주시면 좋겠어요.
여러분, 예를 들어 어떤 회사 직원이 지방으로 출장을 가서 해야 할 사명을 다 완결했다 하면 다시 그곳에 갈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 이후 4천년의 역사를 지내오면서 예수님 한분을 이 땅 위에 보내기 위해서 숱한 수고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땅 위에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게 한 목적도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더 높고 큰 뜻에서, 미래에 이스라엘을 위주로 해서 세계를 영도할 수 있는 한 중심을 보내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메시아를 보낸 것도 메시아를 위해서라기보다 더 큰 세계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보낸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또한 유대교를 어려운 가운데 세워 나온 것도 결국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유대교 자체만으로 남아지게 하기 위한 것보다도 이 땅 위에 만민을 구하기 위해서 보낸 메시아를 위해서, 그 메시아의 발판이 되고 또 메시아의 생활환경과 그의 생애에 있어서 활동의 배경으로 삼기 위해서임이 틀림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유대민족 가운데서도 특정한 씨족을 택했습니다. 유대민족에도 김씨, 박씨, 문씨, 혹은 조씨 같은 여러 씨족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중심이 될 수 있는 씨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씨족으로 하여금 역사 이래 이 땅 위에 처음 오시는 한 분, 주인공 되시는 메시아를 탄생토록 하신 것입니다. 그 씨족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선택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고, 교회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씨족, 안팎으로 철두철미한 기준을 갖춘 대표적인 씨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 가정이요, 사가랴 가정 일파, 즉 우리 한국으로 보면 한 씨족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자세히 보면, 여러 가지 의심나는 내용이 많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자기 부모를 사랑했고 자기 씨족을 사랑했는가? 그 씨족은 유대교를 대표해 택했던 것이요, 유대교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 택했던 것이며, 이스라엘 나라는 세계를 대표해서 택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지도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나라가 필요한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를 지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한 것이요. 교회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으로 요셉 가정을 택하여 마리아를 통해 메시아인 예수님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인간도 자기의 아들이 태어날 때는 잔치를 하고, 또 자기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그것에 대한 제반 준비를 철저히 해 가지고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좋은 결과가 전체의 이익으로 결부될 수 있게끔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철저한 계획에 의해서 한다 할진대,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 모든 것을 운행하신다는 겁니다. 만의 하나 사랑하는 아들이 이 땅에 와서 뜻을 완성하지 못하고 보내신 본의에 일치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까봐 염려하시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신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랜 기간 동안 선지자를 통해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을 통보해 나오신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앞으로 이스라엘 나라는 소망의 나라가 될 것이요,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우수한 민족이 되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는 이러한 고차적인 소망을 주입시켜 나가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키우고 유대교를 키우셨습니다. 그 가운데에 요셉 가정을 선택하여 마리아를 통해 메시아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홀로 공생애 노정을 걸으실 수밖에 없었던 예수
그러면 그렇게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실 것이냐, 망하게 하실것이냐?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을 구하러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오셨으면 일반 사회를 구하는 것보다도 먼저 자기 가정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는 요셉과 마리아를 중심삼고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었고, 그 직계 형제뿐만 아니라 사촌 형제, 육촌 형제, 외사촌 형제 등을 중심한 일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사가랴 가정을 보게 되면, 사가랴의 부인이 세례 요한을 잉태하게 될 때, 사가랴는 자기들 부부는 나이가 너무 많은데도 아기를 잉태 하게 된다는 천사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에 벙어리가 되어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가랴 가정에게는 놀라운, 소문날 수 있는 가정적인 배후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세례 요한을 보면 유대교 전체가 따를 수 있는, 즉 세례를 받는 일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세례를 받을 정도로 그 시대의 선지자로서 환영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정을 배후에 연결시켜 놓은 것이 예수님 가정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이종 형제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형님, 나는 이런 사명을 갖고 있소이다. 그러니 형님은 죽든지 살든지 나를 받들어 주어야 합니다'라고 강력하게 협조를 요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나이가 서른 세살쯤 됐으면 세상을 다 알 수 있는 나이입니다. 전후·좌우·상하를 가려 가지고 사회에 있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살필 수 있는 연령이었기 때문에 천의의 대명을 받은 예수님께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형제와 요셉과 마리아를 대해 가지고 뜻은 틀림없이 이렇게 받들어야 된다고 눈물을 머금고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그들을 이끌고 나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요셉 가정의 일파는 한 사람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목이 좀 쉬어서 목소리가 이상한데, 듣기에 거북하지 않아요? 저뒤에 계신 분들, 좀 거북하지 않아요?「괜찮습니다」큰소리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좀 이상한 소리가 날 거예요. 말을 많이 해보신 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듣기에 좀 거북하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지요? 요셉에게도 예수님이 의붓자식이라 해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형제들에게 있어서도 의붓 형제이지만 형제는 형제라는 거예요. 여하튼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근 친척들 모두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라든가, 어머니 마리아의 환경에 나타난 것을 보면 알고도 남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가문 전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문의라도 해보아야 했던 겁니다. '네가 무슨 뜻을 품고 있는지 소신을 한번 피력해 봐라. 그리고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면서 마음을 터놓고 문중회의를 열어 전후 좌우를 가릴 수 있는 놀음을 했더라면 예수님이 그렇게 외톨이로 집을 나갈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바로 알고 예수님을 믿어야
성경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생애는 3년 공생애로부터 시작됩니다. 그전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라든가 열 두 살에 예루살렘에 갔다 왔다는 약간의 기록은 있습니다만,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 거예요. 그것보다도 서른 살이 되기까지 그동안 뭘 했는지, 집안에서는 화목하게 자랐는지,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해 주었는지, 헝제간에 의가 좋았는지, 사돈의 팔촌 까지 예수님을 존경했는지, 그러한 내용은 하나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뚝 잘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그렇게 알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역사는 바로 밝혀야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바로 밝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부모가 나라의 역적이라면 역적이라고 밝혀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분의 역사에 대해서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배후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것뿐입니다. 배후가 올바르게 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릇되게 되어 있느냐? 과거 역사를 알아야만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올바른 결과로 결하게 될지를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0년 생애노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4복음서라든가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예수님 사후에 사도들이 기록한 3년 공생애노정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하도 작아서 차를 타고 전국을 일주하는 데 여섯 시간 반밖에 안 걸립니다. 누가 한쪽 끝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면 다른 한쪽 끝에서 산울림으로 울려서 다 들을 수있을 정도로 좁은 곳입니다.
성경 66권을 대조해 보면 시온산과 예루살렘은 불과 20리 안팎의 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듯 20리 안팎에서 일어난 사실만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야말로 형편없다는 겁니다. 앞집 사람, 뒷집 사람이 누군지 전부다 빤히 알 수 있고 무슨 문제가 벌어지면 일시에 소문이 퍼질 수 있는 그런 지역입니다. 미국 같이 50개 주나 되어 가지고 동쪽에서 서쪽까지 가는데 그 시차가 서너 시간이 되는 지역이라면 모르지만, 그곳은 뭐 엎드리면 코 닿을 곳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3년노정에서 베드로 야고보 등 사도들을 데리고 다니는 데에 있어서, 언제나 친척들을 만날 수 있고 모든 사실을 다 알 수 있는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요셉 가정의 족속들은 한 사람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사촌이나 육촌, 이종 형제들이 있었을 텐데 그 누구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기가 막힌 사실이라는 거예요.
만약 어떤 집에 맏아들이 있다고 하면 그 맏아들이 의붓자식이라 해도 그가 집을 나가 3년 동안 어떠한 뜻을 품고 새로운 일을 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그를 따라 다니는데 그것을 본 친척 패거리들이 거기에 하나도 안 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일이나 한다면 모르지만, 뭇사람들로부터 놀라운 추대를 받으며 또 그 배후에 나타난 이적기사라든가 역사에 없었던 놀라운 일을 하고 다니는 예수님인데도 불구하고 친적들이 그렇게도 빤빤하게 모른 척할 수 있어요? 예수님도 친구가 있었을 것인데 도와주는 형제나 친구 한 사람 있었으며, 가정을 중심삼고 누이 동생이나 혹은 이모 등 진정으로 예수를 염려하면서 울고불고 하던 사람이 어느 누구 하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수수께끼라는 겁니다.
여기 서울교회 목사님도 한 분 오셨는데 기독교 믿는 사람들, '목사님' 하면 무조건 우러러보지요? 그저 이름이 좋아서 목사라는 거예요. 만약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따랐더라면 목사 됐겠습니까? 또, 목사가 될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진짜 목사가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한꺼 번에 많은 사람들이 섬기기만 했으면 될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만일 예수님의 친척들이 베드로 야고보보다 생명을 내놓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다면 예수님이 무식한 사도들을 선택했겠어요? 그 무식한 사도들보다도 명문가 출신인 요셉의 친족들이 그렇게도 못났더란 말입니까? 세례 요한을 보더라도, 그는 당대에 얼마나 잘난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실 때까지는 그래도 근본적으로 틀거리가 그만한, 환경에 신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면 되었지 그렇게 쫄딱 망하는 따라지 모양으로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거예요.
오늘날 통일교회는 기성교회가 믿고 있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다만 좀더 헤치고 뿌리를 파가지고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하늘의 뜻이 어떻게 된 연유에서 이러한 사연으로 저끄러졌으며, 또 그러한 사연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행로와 결과가 맺어졌느냐 하는 것을 알고서, 과연 그 결과가 천의에 일치 되는 결과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감정하고 비판하여 그것의 책임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 우리 통일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 기간 중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사도들도 예수님이 죽을 고비에 처하게 되자 다 배반하고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죽은 지 40일 만에 부활했을 때 다시 모여 가지고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러한 무리들이 살기 어려워 못 견디는 환경을 거쳐 나가면서 기록해 놓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사도행전이요, 바울 서한입니다. 전부 다 그러한 놀음을 한 기록이에요. 이게 기가 막힌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기가 막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 처음 온 분들은 자기 자신을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면서 기분 나빠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통일교회는 하늘 앞에 공적인 기관이고 그 책임자가 누구이더라도 공적인 기관의 책임자는 공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일컬어 선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 예수님이 잘난 사람인지 못난 사람인지를 분석해 보아야겠습니다. 참 심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뭐 소학교도 못 나왔고 달리 배우지도 못 했으니 대학 나오고 박사인 내가 예수님보다 나을지도 모르지'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분이 역사적인 인물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볼 때, 이것을 전부다 헤치고 분석해 봐야 할 내용이 많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출발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마리아가 '나죽기 전에는 너는 집을 못 나간다' 하며 매달렸으면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했습니까? '하늘의 뜻이 있어 내 품을 통해 나왔는데, 큰 대명을 받아 합동공사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집에 왔는데 어째서 떠나려고 하느냐'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동네방네 소문내던 마리아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 성경의 어느 한 페이지에라도 기록되어 있어요?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요셉은 의붓아버지이니까 그렇다치고 어머니인 마리아가 악착같이 울고불고 예수를 따라가겠다고 했더라면 그 아들딸도 '나도 따라갈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밥을 얻어먹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배고플 것을 염려하면서 어머니가 얻어 주고 형제들이 얻어 주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머니나 형제들이 얻어 주는 것이 낫겠습니까, 일자무식의 어부들이 얻어 주는 것이 낫겠습니까? 그때 어부들은 형편없었습니다.
선생님이 베드로의 장인 장모가 살던 집을 가 보니까 뭐 두더지 굴 같더라고요. 형편이 무인지경이었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의 그 사도들을 내가 안 좋게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높이 알고 있는 이상 나도 높이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엮어내 가지고 해명 하려니 할수없다는 겁니다. 그 밑창을 전부다 밝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물을 깁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베드로야! 그물을 던지고 나를 따르라. 이제부터는 고기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했을 때 베드로가 대번에 따랐던 게 아니라구요. 동네에서 안팎으로 보고 듣고 해서 알았던 거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따랐던 것이지, 누가 예수님을 따랐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뜻은 6천년 전에 다 이루어졌게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도 바닷가 하게 되면, 팔도의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사는 곳입니다. 뜨내기들이 모여 사는 거라구요. 부산 식구들 기분 나빠도 할수없습니다. 사실이니까. 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할 것 없이 팔도의 뜨내기들이 모여 사는 거라구요. 그러니 지역의 전통적인 풍습도 가질 수 없는 거예요. 사람의 계층으로 본다면 하류계층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니까 아무리 부인해도 그렇다는 거예요. 여기 부산에도 아가씨 들이 많지만 지금도 뱃사람한테 시집가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예」
갈릴리 바다를 실지로 가 보면 사막은 저리 가라입니다. 어찌나 황량하고 스산한지 정 붙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2천년 전 그곳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 배를 상상해 보세요. 가지고 있는 배 형편이 어떠했겠습니까? 간신히 뒤집어지지 않고 겨우 뜨는 정도의 배였을 것입니다. 이런 배를 가지고 고기를 잡겠다고 그물을 지고 가는 베드로의 신세는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을 데리고 그래도 뜻을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예수님은 얼마나 처량한 입장이었겠느냐는 거예요. 왜 그렇게 되었느냐 이겁니다.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오셨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랑이 많아서 죽으러 왔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러 왔다면 이스라엘에 오지 않고, 저 아프리카 식인종 소굴에 왔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죽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리의 전후를 가려 가지고 옳고 그른 것을 전부 다 대 보고, 큰지 작은지 넓은지 좁은지 높은지 낮은지 두꺼운지 얇은지를 다 알고 나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선생님이 쓱 보니까 기성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대번에 알겠어요. 벌써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이렇게 내밀고 있습니다. 그러지 말자고 했는데도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은 친척들이 따르지 않아서 혼자 집을 뛰쳐 나가서 한 일이에요, 아니면 '어머니 아버지, 저 내일 들어옵니다. 동생들아, 내일 모레 들어올께 기다려라' 하며 근거지를 집에다 두고 한 일이에요? 어디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사이좋게 의논하여서 이빨이 맞게끔 되어 가지고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에게 다녀오겠다고 하며 나갔습니까, 아니면 어디에다가도 근거지를 삼을 수 없는 외톨이가 되어 나갔습니까? 오히려 친척들에게 미쳤다고 핀잔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 친척들이 미쳤다고 하니, 유대교인들이 안 미쳤다고 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안 미쳤다고 하겠어요? 바리새 교인들은 더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자기 친척들이 전부다 빈정대는 날에는 큰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통일교회 문선생을 소문낸 것도, 통일교회 문선생과 상대되는 사람이 소문을 냈기 때문에 선생님이 골탕을 먹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이 선생님을 죽도록 모시고 충성을 했으면 내가 지금쯤은 얼마나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지금 이 부산교회에 있는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만나 볼래야 만나 볼 수 없는 자리에서 세계를 주름잡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할수없이 환영받아야 된 배경을 남겨 두고 집을 떠나서 왔다 갔다하면서 3년 공생애노정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쫓겨났든가, 아니면 뛰쳐나왔든가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형편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만, 어떡하겠어요? 내가 영적 세계에서 예수님을 만나 보니, 그런 내용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물론 여러분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싫어할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예수님이 알려 주기를 바라니 죽고 망하든, 욕을 먹든 말든간에 얘기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선생님 말이 옳은지 그른지 성경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기가 막혔던 예수의 사정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집을 나와 가지고 혼자 돌아다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이 4천년에 걸쳐 준비한 그 나라는 어디 갔는고. 그래도 4천년 동안 나라를 세운 것은 그 터전 위에 나를 보내 가지고 나를 중심삼고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나라가 배척하고, 4천년 동안 준비한 이 유대교가 배척한다 이거예요.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신뢰의 초점으로 알고 따라와 주기를 바랐는데 배척을 하니 어떻겠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기가 막히겠어요, 안 막히겠어요? 그들이 환영하지 않는 입장에 섰으니 어떻게 되었겠느냐 이겁니다. 나라를 바라보아도 소망이 끊기고, 교회를 바라보아도 소망이 끊기고, 친척들을 바라보아도 소망이 끊겨서 갈래야 갈 수 없게끔 다 막혀 버렸기에 할수없이 토굴을 찾아가고 빈민굴을 찾아가야 할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기가 막혔겠어요, 안 막혔겠어요?
그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출세하여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면 엄마 아빠 동생 할 것 없이 가족들이 전부 '나도 가겠소. 날 버리고 가면 안 돼요' 했을 것입니다. 한 자리 해먹을 것 같았으면 자기를 빼놓으면 안 된다고 서로 싸우면서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처량한 내리닫이 길을 홀로 석양길을 더듬어 가면서 눈물과 더불어 슬픔을 품고 가는 예수님을 그 누가 환영했을 거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불학무식한 어부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불평이 많지만 그래도 오직 소원을 중심삼고 사는 사람들, 그래도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 같은 순수한 사람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 만나가지고 손해 안 볼 것 같고, 그래도 우리보다 예수님이 낫다고 하는 입장에 설 수 있는 사람들만이 신뢰의 발판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의 어부들을 찾아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이 자기 집을 나와 가지고 혼자서 다니시니 얼마나 굶주렸겠습니까? 그러한 자신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나마 집이라는 데서 나왔으니 다시 들어갈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하고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자신이 행했던 이적 기사를 자랑했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런 내용이 어디에 있어요? 3년 동안 그렇게 헐벗고 돌아다니면서 자기 친척들을 부여안고 이야기해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향 산천을 찾아가 30평생 자기를 길러 주고 정을 준 그 어머니와 밤을 새워 가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가 왔다고 해서 어느 한 날 어머니가 떡을 하고 잔치를 벌여 예수를 환영했다는 내용이 성경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집을 나왔으니 배도 고프고 처량했겠지요? 그때 자기 가까운 친척 집에서 혼인잔치가 열린다고 해서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집이였습니다. 그 집은 어머니 마리아하고 아주 가까운 친척집인데 예수님이 배도 고프고 하니까 밥을 얻어먹고 떡도 얻어먹고 하려고 갔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 기사를 행한 것입니다. 그때 마리아는 과방(果房)에 술이 떨어진 것을 알고 예수께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마리아가 예수님이 좋아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능력이 많으니 포도주를 만들어 줄 줄 알고 부탁한 줄로 아십니까? 그래 마리아가 예수를 능력 많으신 하나님의 훌륭한 아들, 능력을 자유자재로 행할 수 있는 거룩한 예수로 알고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고 한 줄 알아요? 처량하게 얻어먹으러 와 가지고 그것을 바라고 있는 신세 같아서 바라지 말라고 그런 말을 한 것이라구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좋게 해석하려면 좋게 해석 하고, 나쁘게 해석하려면 나쁘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당시 예수님이 배가 고팠겠어요, 안 고팠겠어요. 누가 따라다니며 끼니를 대준 사람이 있었어요? 복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예수를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더우면 더울세라 추우면 추울세라, 배가 고프면 배가 고플세라, 어려우면 어려울세라 앞을 다투어 나가면서 매를 맞아도 내가 맞고, 어려움이 있어도 그 어려움을 내가 뒤집어 쓰고, 예수님의 비운을 대신해서 담당하겠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예수님께서 정말로 배가 고팠겠어요, 안 고팠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예수의 어머니가 배고픈 사정은 물어 보지도 않고 포도주가 없다고 하자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들이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할 때 예수가 한 말을 생각해 보세요. '아 그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데 예수가 얼마나 불효자냐는 것입니다.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대들었어요, 안 대들었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인 거룩한 왕자님의 입에서 마리아에 대해 욕을 하기 위해 한 말이에요? 하늘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그랬어요? 여기에는 말 못할 가슴을 찢는 사연과 곡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터놓고 싶고, 투정하고 싶은 심정이 솟구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선생님이 하는 말이 옳다면 큰일이라는 거예요. 그렇지만 이것이 이치에 가당치 않는 것은 아니지요?
예수가 3년 공생애 때 떠돌이로 돌아다니며 어느 동네에 이르렀을 때,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래도 아들이라고 동생들을 충동질해서 같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만나려고 밖에 섰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기가 막혀서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며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리아와 동생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했어요, 안 했어요? 대답해 보세요. 뜻대로 했는데도 그렇게 말했겠어요, 안 했는데 그렇게 말했겠어요? 「뜻대로 안 했으니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딱 걸려 버린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열 두 살 때 마리아와 요셉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있는데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버려 두고 집에 돌아갔다가 예수님을 찾으러 사흘만에 다시 와 가지고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그 사실을 기독교인들은 참 좋게 해석을 하지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성경 토론을 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마리아가 와서 하는 말이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하니 예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 2:4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말했겠어요, 기분이 나빠서 말했겠어요?
열 두살짜리 아이를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열 두 살 난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그 아이를 놔두고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아들을 놓고 가는 것을 몰랐겠어요, 알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여기 아주머니, 어때요? 아들을 놓고 갈 때에 마리아가 몰랐겠어요? 그걸 몰랐다면 어머 니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어찌하여 마리아가 요셉을 향하여 '영감님, 예수를 데려올래요' 하고 데려오지 못했느냐?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그들 부부 사이에는 가를래야 가를 수 없고, 뽑아낼래야 뽑아낼 수 없는 불평과 마찰이 계속되었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마리아가 가만히 요셉의 눈치를 보니까 예수 때문에 필경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된 입장에서 예수 때문에 요셉한테 지금까지 고충을 당하고 있는데, 여기에 요셉의 눈을 바라 보니 여자의 입장으로서는 말할래야 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딱한 사정에 놓여 있던 마리아를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이런 실정에서 예수를 두고 고향 집에 마리아와 요셉만 돌아가게 되면 동네방네 소문이 나겠거든요. '아들은 어떻게 했느냐'고 다들 물어 보겠고 의붓자식이라서 내버리고 왔다는 소문이 나겠는데, 고향은 가까와지니 아니 데려갈래야 아니 데려갈 수 없어, 할수없이 요셉과 마리아가 되돌아와서 예수를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배후에 잠들어 있는 곡절을 알아야
여러분이 모르는 이러한 곡절이 기독교의 배후에 잠들어 있다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래 가지고 천당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한 역사를 모르면서 그저 좋은 예수, 몰려다녀도 좋고, 집을 나가도 좋고, 쫓겨 다녀도 좋고, 죽은 것도 좋아서 죽었어요?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에 통일교회 문선생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바로잡아 새로운 방향으로, 전후좌우의 가리새가 맞게끔 해결해 가지고 안팎을 들이 맞추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때가 돌아오기 때문에 통일이라는 명사를 붙인 교단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필요한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쁘다면 나쁘게 생각하세요. 내가 참이라면 여러분이 안 될 것이고 내가 거짓말했으면 내 목이 잘릴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거짓말 같으면 지금까지 목을 내놓고 이렇게 생애를 바쳐 싸우지 않습니다. 뭐 어디서 주워다가 이럭 저럭 꿰어 맞춘 것 같으면 난 시시해서 이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자, 이제 그만 했으면 '아하, 그렇소. 그 말씀이 옳소' 할 것입니다.
여기 총각들, 예수님의 역사를 가만히 훑어 봅시다. 총각들은 손 좀 들어 보세요.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총각들, 얼마나 되나 봅시다. 내려요. 자, 총각들 이 다음에 결혼하기 전에 약혼해야지요? 약혼하게 될 때자기 맘에 맞지 않는 사람하고 약혼하겠어요?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보나, 속을 보나, 집안 환경을 보나, 또는 사돈의 친척까지 안팎을 다 갖추어 보나 그래도 그만하면 되겠다, 쓸만하다고 생각될 때 찾아가 인연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떤 총각이 약혼을 했다고 합시다. 약혼을 척 했는데 약혼녀가 애기를 뱄다고 소문이 난 거예요. 얘기를 계속 들어 보세요. 우리가 예수님을 흉보자는 게 아닙니다. 사실대로 들어 보라요. 내가 나쁜 의미 에서 평하는 것이 아니예요. 사실대로 생각해 보자 그말입니다. 그래, 철석같이 믿고 약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난데없이 약혼녀가 애기를 뱄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총각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시원하겠어요, 왕창 꽝하겠어요?
어떻겠어요? 목사님들 대답해 보세요. 저 맨 뒤에 서 있는 양반, 어떻겠어요? 총각들 한번 생각해 봐요. '그저 기분만 조금 잡칠 뿐이지 그거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겠어요? (웃음) 생각해 보세요. 어떻겠어요? 가슴이 '꽝'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꽝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꽝' 했는지 큰일날 지경이라고요. 큰일날 지경이라는 겁니다.
내가 이런 말까지 한다고 해서 기성교회의 신앙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성교회 신앙도 한 사람이고 신학도 아는 사람입니다. 뭐 임자네들만큼 몰라서 이런 얘기 하는 게 아니예요. 그러니 처음 온 사람들은 기분이 나쁘더라도 들어 두는 게 좋을 것입니다.
난시(亂時)에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피난가야 돼. 아 인민군대가 내려 온대. 그러니 서울 사람들도 피난간다는 구만' 하는 말을 들으면 좋아요, 안 좋아요? 안 들은 것보다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지나가는 말이었다고 해도 정말로 피난을 가야 할 때라면 듣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럴수 있는 거라구요.
여기 아가씨들도 많이 왔구만요. 기성교회 다니던 아가씨들이 왔으면 '아이구,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는데 …' 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선생님도 역시 그런 생각도 해봤고 그런 고민도 다 해봤습니다. (웃음)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믿어 보겠다고 생명을 내놓고 50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감옥생활을 하면서까지 줄달음질하며 헤쳐나온 것은 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시하게 밖의 사람들이 말하듯 벌거벗고 춤이나 추는, 그따위 수작 하는 사람인 줄 알아요? 선생님을 잘 몰랐다는 거라고요. 뭐 벌거벗고 춤춘다고? 도깨비 감투를 거꾸로 씌워야 될 녀석들. (웃음) 춤이라도 한번 추겠다고 들이 맞서 가지고 발이라도 들었다 놨다면 그래도 모르겠는데, 구경도 안하고 생각도 안한 사람에게 그런 생떼를 쓰고 뒤집어 씌워요? 그러니까 좋다는 거예요. 누구나 다 와 보면 그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알거든요. 누구나가 '생사람 잡는 놈들' 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들이 뭐라고 하든지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가 말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한테 지지 않습니다. 기성교회를 때려잡으려면 때려잡을 수 있는 실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비상한 작전을 하여 사탄을 녹여 먹던 그런 지혜도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내가 어디 신문에 내 가지고 기성교회 목사들이 죽으라고 하는 것에 대해 변명하는 것 봤습니까? 못난 척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못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상대가 되지 않아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라고요. 두고 보세요. 꼭대기에서부터 바짝 바짝 조일 테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볼트 너트 알지요? 아래를 꼭 잡고 위에서 돌려 조이면 꼼짝 못하지요? (웃음) 자꾸 조이면 조일수록 '아이고, 아이고' 소리지르며 아우성일 것입니다. 그러니 붙어 있으려면 납작해지든가 끊어지든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기분 나쁘더라도 나보고 나쁘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뱃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기에 기분 나쁜 얼굴을 하느냐는 거예요. 선생님만큼 못 들어가 있을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저렇게 방망이질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선생이라는 사람이…' 할 거예요, 그러나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거예요. 이렇게 만나 한집안이 되었으니까요. 우리가 처음에 좋아서 만났습니까? 싫어서 만났지요. 그러나 다 살림살이를 잘하기 위해서는, 좋게 하는 방법이 있으면 후려 맞으면서라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마리아를 데려온 요셉의 처지
이제 목이 많이 가라앉았으니 빨리 끝내야겠습니다. 목이 쉬어서 야단났어요.
마리아가 그랬으니 총각님 요셉의 신세가 처량했겠어요, 처량하지 않았겠어요? 바꾸어 생각해 보세요. 기성교회 장로 되시는 분이 왔으면 '내가 총각 때 그 지경이 됐으면 어떻게 했을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아마 밤새도록 잠을 못 자고 엎치락뒤치락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요셉이 그렇게 고민하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천사를 보내서 '요셉아, 마리아를 데려와라' 했습니다. 성경에 천사가 꿈에 그런 말을 했다고 했어요, 요셉이 눈을 뜨고 있는데 그런 말을 했다고 했어요? 꿈에 그랬다고 했습니다. 요셉의 꿈속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너의 아내 마리아를 찾아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 말을 듣고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꿈은 꿈꾸나 마나입니다. 꿈 가운데는 잡꿈도 있고 또 무슨 꿈요? 「개꿈」(웃음) 그런 꿈도 있고 그 다음엔 ? 「용꿈」(웃음) 이처럼 여러 가지 형태의 꿈이 있어서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신경과민이 되어서 그런 꿈도 꿀 수 있지. 그건 꾸나마나야' 하면서 얼마든지 지워 버릴 수도 있는 거라고요.
그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요셉은 역사과정을 거쳐 오시면서 그렇게 수고하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 세워 지금까지 보호육성하여 오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누구보다도 애국애족하는 심정을 지니고 나라를 염려한 요셉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그래도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에 보내 주겠다고 하신 그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알려 주거나, 혹은 비몽사몽간에 천사가 나타나서 가르쳐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자기처럼 미천하고 순박한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는 길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며 마음으로 바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했을 때 아무 말없이 마리아를 데려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때 요셉은 신경질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 이해됩니까? 요셉은 칼날 같은 신경질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애를 뱄다고 하면 그때의 법으로는 당장에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죽게 마련이라고요. 그래서 그때의 요셉은 자기와 인연되었던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마리아를 보호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사연이 있었기에 요셉은 나라의 법을 어기더라도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요셉은 선량한 남자였다는 겁니다. 요셉이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면 당장에 달려가서 무슨 끝장을 보았을 텐데 그러지 않고 천사의 말에 따른 것을 보면 묵직하고 용한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안그래요? 여러분 중에도 신경질직인 남자가 있지요? 그런 사람하고는 질이 다를 거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데려오라 하니까 마리아를 데리러 갑니다. 그런데 요셉에게도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겠지요? 사돈의 팔촌들도 다 있었을 것입니다. 없다면 말이 안 되지요. 그런데 요셉이 어머니 아버지에게 인사하면서 '어머니 아버지, 마리아가 이렇게 됐는데 천사가 이렇게 말하니 마리아를 지금 당장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아십시오' 하며 어머니 아버지에게 마리아를 데리러 간다고 통고하고 갔겠어요? 사돈의 팔촌 형님 누나 모두에게 통고하고 마리아를 데리러 갔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 됐어요, 못 하게 됐어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누가 알세라 슬쩍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낮에 데려왔겠어요, 밤에 데려왔겠어요? 생각해 보라고요. 여기 총각들, 아가씨들, 어떻게 했겠어요? 틀림없이 밤에 데리고 왔을 거라고요.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알았겠어요, 몰랐겠어요? 모르게 데려 왔을 것입니다. 데려와서도 안방에 이불 펴고 포대기 펴고 했겠어요? 새색시 왔다고 떠들썩하니 기름 냄새 피워 가며 떡하고 지짐질해 가지고 뭐 동네방네 다 알게 잔치하고 그랬을 것 같아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누가 알세라, 인기척만 나도 골방이 있으면 골방으로 들어가 숨어 있으라고 할 그런 판국에서 떡 데려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고민
여러분, 이스라엘 나라의 집을 보면 집 구조가 참 해괴합니다. 거기에다 대면 우리 한국은 문화가 아주 발달한 선진국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집을 보게 되면 지붕도 없습니다. 비가 잘 안 와서 그런지 몰라도 그나마 있는 지붕도 여기저기 뚫려 있어서 비가 오면 샐 데가 많은 아주 형편없는 집이라구요. 그런데 2천년 전이었으니 그 형편을 보면 생각할 정도도 못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 데에다 마리아를 데려다 놓긴 했는데, 오늘날처럼 몇층 되는 빌딩이 있어 가지고 수세식 변소도 있고, 혼자 세면도 할 수 있는 아파트 같은 데에다 데려다 놓았으면 감쪽같이 속일 수 있지만 그들 집이 그렇게 돼 있어요? 그들 신세가 어쩌면 우리의 피난 때 실정보다 더했을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판자집 같은 데서 속닥거리면 밖에서 다 알아들을수 있는 형편이라는 겁니다. 요즘과 같이 수세식 변소로 되어 있어서 집안에서 자유롭게 용변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천만부당한 생각이라는 겁니다. 한국식과 같이 들락날락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요셉의 집이 방 하나였다면 마리아 때문에 당장에 동네방네 소문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아이들이 소식은 빨리 알지요. 이사라도 가게 되면 아이들이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거든요, 그럭저럭하다가 좋지 않은 소문이 동네방네에 금새 퍼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요셉 저 녀석 언제 아가씨를 데려다 놨대' 하고 속닥거렸을 것입니다.
요셉의 집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방안에서 이상한 말을 서로 하더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무언가 다짐을 하고, 마리아는 안 그렇다고 우기며 하더라는 거예요. 그런 싸움질도 했을 겁니다. 왜냐? 데려다 놓았는데 대관절 복중에 있는 아기가 누구의 아기냐고 요셉이 물어 봤겠어요, 안 물어 봤겠어요? 어디, 남자들 대답해 보세요. 물어 봤겠어요, 안 물어 봤겠어요? 안 물어 보면 그건 남자도 아니고 동물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얄궂고 복잡한 사연이 엉클어지고 헝클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갖추고 살래야 살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이 자기의 생명의 은인이고, 또 약혼를 했기 때문에 남편도 되는지라 이렇게 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하지도 못하는 입장에 몰렸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요셉이 마리아에게 완강하게 물어 보니 어떻게 됐겠어요? 여기 있는 아가씨에게 물어 보면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뱃속에 있는 애기가 누구 애라고 솔직하게 대답해야 되지 않아요?
'대관절 애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을 때 '누구긴 누구예요. 성령으로 잉태했어요' 하고 대답하면 그 말을 남편인 요셉이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대답해 봐요. 「글쎄요」 글쎄요가 뭡니까? 믿었겠는가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웃음) 솔직하게 얘기해 보자고요. 글쎄요가 뭡니까?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디 믿겠다는 여자나 남자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내 한 가지 물어볼 테니…. 없구만요. 기가 막히다는 거라구요.
마리아가 쩔쩔매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신이 와서 아기를 배게 했어요' 하면 요셉이 '이 요사스리운 것아. 내가 그래도 너의 생명의 은인인데 네가 솔직히 이야기하지 앉고 그렇게 슬쩍 넘기려고 수작을 하는 구나'라고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자구요. 그렇지 않아요? 자기는 마리아를 사지에서 구해 주었고 자기의 체면과 위신을 가려 가면서 가슴이 콩알만해 가지고 쉬쉬하면서 지내는데 말입니다.
그래, 동네방네에 소문이 이상하게 다 났을 게 아니예요? 동네 아이들을 통해서 말이에요. 그러니 요셉의 어머니 아버지가 못 들었겠어요? 요셉이 어머니 아버지한테 붙들려서 '이 녀석아, 그 여자가 누구냐', '누군 누구예요. 약혼녀 마리아를 데려왔지요', '왜 데려왔느냐', '그게 이차여차 해서 데리고 왔어요' 이렇게 꽁무니를 뺐을 겁니다. 또한 요셉의 사촌 누이 형님들이 '이놈의 자식. 너 소문이 수상하더니 그대로구나'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그게 어떻게 된 거야', '아이들이 그저…' 하며 그저 말 끝도 못 맺고 우물우물하면서 가슴을 졸였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슬쩍 감아 넘기려고 성령으로 잉태됐다고 한 말은 불신 중에서도 기가 막힌 불신밖에 안 된다는 거에요. 그 말을 듣고 요셉이 '우리 마리아는 참으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이야' 그랬겠어요? 수작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달라져도 벌써 몇 번이나 달라졌을 것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내심으로 고민을 했겠습니까? 그러니 둘 사이에는 트러블이 많았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트러블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그런 일 없이 결혼식을 올리고도 살다 보면 싸움을 하게 되는데, 처음부터 얄궂은 인연 가운데 맺혀진, 엉클어지고 헝클어져 풀 수 없는 골치덩어리인데 싸웠겠어요, 안 싸웠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여러분, 열 달이 거의 다 되어 가지고 아기를 낳을 때가 되면 막달이 어느때인지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분들, 그거 몰라요? 다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낳을 날이 돌아오게 될 때 사정이야 어떻든간에 애지중지하며 서로 위하고 염려하며 '이제 며칠 남았지' 하고 그랬을까요? 첫 아기에 대해서 관심이 큰 것입니다. 처녀 총각들도 결혼해 보라구요. 누구나 첫 아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둘이 만나기만 하면 서로 '며칠 남았지' 하면서 꼬박꼬박 그날을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고민
그런데 요셉이 애기 낳을 날짜를 꼬박꼬박 기다리게 되어 있어요? 생각만 해도 왈카닥 기분 나쁜 거라고요. 기분 좋았겠어요? 요셉이 그렇게 의심을 할 적마다 천사가 매일 아침 다시 나타나 '야, 이 녀석아. 하늘 나라 천사가 그렇다고 일러주었는데 왜 그런 수작 하고 의심하느냐'고 했을 것 같아요 ?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 했는데 하늘의 특사가 내린 통고문을 매일 반복할 줄 알아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깜깜 천지가 돼 가지고, 지나 놓고 보니 요사스런 꿈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별의별 해석을 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아기를 낳을 막달이 다가오니 큰일났다는 겁니다. 여기 처녀들이나 아주머니들 그런 입장이 되었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어떻게 했겠어요? '하나님, 나 이러이러해서 여기서는 아기를 못 낳겠습니다'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소문은 벌써 동네에 자자하게 났고, 친구들도 요셉에게 '야 이 녀석아, 어떻게 된 거야' 하면서 수상하게 여기고 시원치 않게 생각하는, 그렇게 몰리는 입장에 있었는데, 마리아가 그 동네에서 아기를 낳을 배짱이 있었겠어요?
여자들, 이렇게 물어 보면 미안하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그까짓 것 반대하면 했지 하나님 뜻대로 낳는다' 하고 낳을 자신이 있겠어요? (웃음) 생각해 보세요. 간혹 그럴 수 있는 배짱이 있는 여자가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낳을 자신이 있겠어요? 그럴 수 있다는 여자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기도할 밖에요. '하나님이시여. 이 동네를 벗어나서 타향살이라도 좋고, 이국 땅이라도 좋으니 사람 없는 곳에 가서 제 몸을 은신해 가지고 아이를 낳아 키을 수만 있게 해주세요' 하고 그러한 마음 가지고 하늘 앞에 호소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하사 길거리의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게 했는데 그것이 도리어 그녀에게 있어서는 감사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비참한 사연입니다. 하늘의 왕자님이 길거리에 있는 마구간에서 태어나 덮을 요 하나 없고, 바지저고리는 커녕 강보도 없어서 그들이 콧물 눈물 땀 닦던 그런 것을 강보로 썼을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 걸로 아이를 싸야만 하는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은 기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이 만우주의 주인이시며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만인의 참된 부모님으로 오시는 거룩한 분을 그와 같은 비참한 자리에 모시면 안 되겠기에 하늘이 통찰하시사 동방에 있는 박사들을 보내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땅이 비록 환영할 수 있는 환경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인간 세상에 있어서 하늘의 체통을 세워 주기 위해서 이웃 나라에서 손꼽을수 있는 사람들인 동방박사들을 보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며 예수님 앞에 인사드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대번에-당시에 전보는 없었겠지만-사람을 사서라도 그들의 친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헤롯왕이 요사스럽게 행동하여 아기를 잡아죽이려고 할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삯군을 사서라도 자기 동네에 연락해서 어머니 아버지에게 알려 주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도망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어머니 아버지에게 통보해 주었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했어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책임은 꿈도 꾸지 못한 마리아
이런 것 저런 것 보면 그 배후가 얼마나 복잡다단했었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때 요셉이 부모가 알세라 친척이 알세라, 그 누구도 모르게 살짝 야간 도주해 가지고 어디로 갔어요? 애급으로 갔지요? 거기서 3년 동안 살다가 이스라엘 땅 갈릴리 해변가의 나사렛 동네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그곳은 친척이 있는 동네가 아닙니다. 그러니 요셉은 그러한 사연을 가지고 할수없이 마리아와 그곳에서 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말한 내용이 요셉의 가정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요셉은 의붓아버지이지요? 의붓어미는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잡아 죽이듯이 하는데 의붓아버지인 요셉이 그 자식을 사랑해서 사지에서 구해 주었겠어요? 사람 마음은 다 마찬가지라고요. 예수는 철이 들면서 자기 때문에 어머니하고 아버지의 관계가 좋지 못한 것을 눈치챘기 때문에 어머니인 마리아 품에 가서 안기고 싶어도 열 서너 살 철들 무렵부터는 아버지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랬겠어요, 안 그랬겠어요? 기가 막힌 사연이라는 겁니다.
또, 예수가 아버지 무릎에 앉으려고 한번이라도 가까이 갈 수가 있었겠어요? 호랑이같이 무서운 아버지였다는 거예요. 이런 입장이었으니 예수는 의붓자식으로서의 생활을 톡톡히 치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목수로 살아갈 때 그 목수의 조수로서, 처량한 생계의 보조자로서, 그야말로 더벅머리 총각 예수는 신세타령 할 데조차 없이 외로운 사정을 안고 30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나온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친족을 바라볼 수 없는 입장에서 자라났던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의 친척인 세례 요한 일파라든, 요셉의 혈족들은 괜찮은 가문이었습니다. 그 가문을 중심삼고 유대교와 연결될 수 있는 기반도 돼 있었고, 유대교단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사적 배경도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조건은 갖추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고독 단신이 되어 버렸으니 얼마나 처량합니까?
그래서 떠꺼머리 총각 예수는 밤이 되면 별을 바라보며 사연을 토로하고 동녘에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자기의 지난날을 회상하고, 미래의 소망인 하늘의 뜻을 가슴 깊이 다짐하면서 외로운 신세로 지냈던 것입니다. 어느 한 날 동생들을 데리고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하고 우리 한국 사람들이 노래 부르던 것과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도 있었을 텐데, 예수님에게는 그런 즐거움도 없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7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히려 동생들이 비웃었습니다. 형님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고 또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모양인데 그게 뭐냐고 하면서 동생들까지도 이렇게 시비했습니다. 기가 막힌 사연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는 말을 할 수 없는 입장에서 묵묵부답으로 30여년의 생애를 지냈으니, 어머니에 대해서 한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자기 아들이 세상의 아이 같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자식을 위해서 비운의 행로를 거슬러 가야 할 운명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자녀를 기르는 환경, 가정환경을 혁명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혁명을 할 수 있는 여자가 못 됐다는 거라구요. 그렇게 하지 못하고 환경에 몰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10대가 지나고 20대가 지나고 30대가 되면서 어머니에게 달려들어서 '나의 어머니는 이런 어머니가 아닙니다. 나는 하늘나라의 왕자가 아닙니까?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하늘의 아들로 태어난 아들, 만인을 위한 참다운 도리, 만민을 구하기 위한 천도를 갖고 온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날 때부터 그렇게 알지 않았습니까' 하고 따졌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그날부터 천법을 통한 가정의 도리를 세워야 했습니다. 요셉도 끌어당겨 설득시켜야 했습니다. 매를 맞든 천대를 받든 죽음을 당하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을 설득하고 권고해서 예수가 태어난 날부터 하늘나라의 가정의 법도로써 예수를 모셔야 했다는 거예요. 아침마다 목욕재계하고 예수 앞에 경배하는 생활, 가정생활 전체를 보고하는 생활을 하는 등의 천도를 세워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은 꿈도 안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동네의 총각들처럼 시시하게 생각해 가지고 세상적인 생활권내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고립되고 마리아의 가정도 고립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역사는 바로잡혀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어머니가 있어도 어머니의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이요, 아버지가 있어도 물론 의붓아버지라 사랑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동생과 형이 있고 친척들이 있어도 사랑을 할 수도 없고 받지도 못한 외롭고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의 교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무도 몰랐던 비운이었습니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 목사들이 통일교회를 이단 괴수로 낙인을 찍어 가지고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죽으라고 별의별 짓을 다 하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당당하게 하늘의 뜻과 이런 내용을 그들 앞에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망하든 흥하든 역사는 바로잡아야 됩니다. 족보는 바로잡아야 된다는 거라구요.
조상 가운데 역적이 있었다면 누구 대에서 역적질을 했었다고 밝혀야 되는 것입니다. 죄 지은 것을 모두 알아야만 하늘의 공평한 심판정에 나가서 자기 스스로 사죄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사죄를 구할 수 없는 불쌍한 민족이 되고, 불쌍한 기독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 문 아무개가 이 시대에 있어서 그야말로 필요 적절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성교회에 다니는 분들, 문선생 때문에 말이 많다는데 오늘 잘 만났소. 그래 솔직이 이야기해 봅시다. 통일교회에서 무엇이라고 말해요? 예수가 사랑해야 할 어머니 아버지, 가정이요, 예수가 사랑해야 할 친척이요, 예수가 사랑해야 할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다 사탄의 꼬임에 의해 흘러가는 비운의 역사와 보조를 맞추어 예수를 버리고 예수만을 홀로 남기고, 이 모두가 사탄권내에 포위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운의 행로를 다시 개척하여 잃어버린 나라, 잃어버린 교회를 수습하고 씨족과 가정의 서러움을 풀 수 있는 한 길을 찾기 위하여 철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그들을 길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예수는 부모의 입장에 서서,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그 반대의 입장에서 사랑받았다는 조건으로 그들을 사랑하기에 힘썼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님 누나들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대신하기 위하여 예수는 제자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며, 자기 친척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대신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제자들을 사랑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민족에게서 사랑받지 못한 자기 자신을 한탄하면서 교회와 이스라엘 나라의 사도들이 사랑받을 수 있게끔 개척의 길을 나선 것이 3년 공생애노정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실패한 것을 다시 막는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처량한 행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3년 공적 노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몰아대고, 교회가 몰아대고, 친족이 몰아대는 그런 입장에 처하여 예수는 갈 데도 없이 되었으니 판세도 틀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예수님을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준비했고, 교단을 준비 했고, 가정을 준비했으나 다 틀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미 판국이 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 가지고 변화산상에서 장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통고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돌변지책으로서 하나님이 내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적이건 육적이건 완전히 다 깨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수난을 당한 이유
본시 육적인 이스라엘 나라, 육적인 이스라엘 땅,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땅이요, 하나님의 선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주권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탄세계의 나라와 사탄세계의 땅과 사탄세계의 백성을 점령하기 위한 제 1차적인 계획이 예수님이 불신당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깨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발판은 땅위에 다 떨어져 없어진 것이요, 백성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던 것이며. 주권도 남아나지 않고 흘러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끄러뜨린 이스라엘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 민족은 주권을 가질수 없는 것이요, 백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요, 땅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 도처에서 유리고객하는 집시의 무리가 되었고, 서방 민족의 말발굽 아래 사라지고 총칼에 사라지는 2천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서 피를 대가로 탕감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죽인 죄 때문입니다. 때가 점점 가까와 왔는데도 아직까지 예수를 죽인 죄를 다 탕감할 수 없기 때문에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서방에 널려 있던 이스라엘 민족 6백만이 히틀러의 손에 학살당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이스라엘은 여기에서 모든 죄의 탕감조건을 세워 가지고 탕감을 치렀기 때문에 해방 이후 유엔의 협조에 의해 1948년 5월 하나의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이 재봉춘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죽어 없어져야 할 민족, 하늘의 벌을 받아 사라져야 할 민족이었지만, 그래도 주님이 다시 올 때가 됐기 때문에 땅 위에서 주님을 잃어버리고, 나라를 잃어버리고, 백성을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운의 역사를 해결짓지 않고서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뜻을 못 이루기 때문에 그러한 독립의 운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죄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아랍권이 총칼을 쥐어 잡고 '이놈아, 예수를 죽인 반대의 입장에 서 봐라' 하는 입장에 몰려 있으니, 금후에 가야 할 이스라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냐? 이것을 통일교회 문선생이 쥐어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 이 한민족은 불쌍한 민족입니다. 통일교회는 이 민족 앞에 물의를 일으켰고, 스스로의 뜻을 품고 하늘의 도리를 따라가면서 하나님을 사랑 한다는 그런 무리들 앞에 염려의 대상이 되었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염려의 대상은 안 될 것으로 봅니다. 그래도 통일교회가 있기 때문에 이제 한국의 고민거리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거예요.
예수가 십자가에 잘 죽었습니까?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영육 완성의 길을 못 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이 땅에 걸려 십자가의 죽음 길을 감으로써 예수님의 몸을 위주한 땅의 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적인 부활의 터전이라도 마련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은 거라구요.
예수님이 죽었던 그 터전에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생긴 것입니다. 기독교는 원래 부활의 종교이지, 십자가의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형틀이라구요. 그런데 십자가가 인간을 구원해요? 예수님이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그 근본이 틀려서 나온 것입니다. 전부 다 부활의 도리를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여 40일 동안 영적인 이스라엘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흩어져 버린 사도들을 다시 수습해 가지고 70문도와 120문도의 형태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지상에 나라도 없고 땅의 기반도 잃어버린 채 뜬구름과 같이 영적인 천국을 소망하면서 발전해 나온 것이 제 2이스라엘인 민주세계권의 기독교입니다. 여기에는 아직 나라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국가는 많지만 기독교 주권 국가는 없습니다. 교구장이 왕의 자리를 대표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이 왕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주권자와 교법사와 제사장이 각기 달랐다는 것입니다. 명실공히 주권이 하늘 앞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권자 앞에 언제나 목이 잘리고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순교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비운 가운데에서 성장해 나온 것이 기독교가 아니었느냐는 것입니다.
비운의 기독교 역사를 탕감해야 할 통일교회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 1차 이스라엘 나라가 잃어버린 주권을 이 땅 위에서 다시 찾아 그 땅에서 자기의 땅에 주권을 중심삼고 백성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치 단결하여 사탄과 대결해 가지고 사탄의 주권을 당당히 쳐부수고 하늘편 사람들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한 명이라도 놓칠세라, 한 명이라도 상할세라 전체적으로 보호육성하고 치리하고 관리할 수 있는 주권이 있었더라면 기독교인들이 왜 죽었겠습니까? 왜 죽었겠느냐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걸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는 이러한 비운의 역사를 탕감해 나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한이 하늘땅에 사무치고 인류역사의 고빗길 가운데 사무친 것입니다. 이렇게 사무친 한을 다시 그와 같은 실정에서 뿌리를 뽑아 풀어 놓기 전에는 역사적인 승리의 터전을 순리적으로 닦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맺힌 한을 풀어 놓아야합니다.
이러한 한을 풀기 위한 사명을 짊어지고 통일교단이 이 땅에 나와 가지고 희생하며 한을 품고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냥도 못 주면서 쪽박을 깨뜨리는 격의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왜정 때도 일본 놈들한테 고문을 당하고, 북한 공산당한테도 고문을 당하고, 민주세계에서도 역시 당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갖고 나오는 우리가 악당보다 깡패들보다 나빴느냐는 거예요. 그들이 왜 그러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과 마찬가지의 입장입니다. 열 한 형제가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 받는다고 미워하고 급기야는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거와 마찬가지의 격입니다.
그렇지만 통일교회 문선생은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망하지 않아요. 통일교회는 그렇게 시시한 패가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님은 작전을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속국으로 있을 때 주위 환경이 칼날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인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욕을 먹으면서도 묵묵부답, 말없이 나오면서 이제는 세계적인 기반을 다 닦아 놓았습니다. 대한민국이 통일교회를 없애려면 없애 보라는 거예요. 그렇게 못할 만한 기반을 세계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실력으로 대결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패들, 그렇게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습니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자들처럼 왜 그렇게 약하게 말해요? 천지가 진동하고 하늘이 땅에 뚝 떨어지도록 대답해도 시원치 않은데 병자들처럼 그게 뭡니까? 시시하다는 거라구요.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정신 번쩍 들도록 이야기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부산교회에 찾아왔는데 손님을 그렇게 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이놈의 경상도 패들, 내가 손님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손님 대접을 잘 해야 될 게 아니예요? 오늘 저녁 밥은 어떻게 했길래 그럽니까? 물기가 질척하게 있고 뜸도 안 들여진 밥을 먹으라고 가져 왔더군요. 그래서 내가 한 숟갈 밖에 안 먹었어요. 손님 대접 그렇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이 부산패들, (웃음) 그렇다고 울진 말라구요. 내가 한번 얘기해 본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주인이에요, 내가 주인이에요? 누가 주인이에요? 「선생님입니다」 내가 주인이에요? 「예」 왜 내가 주인입니까? 내가 부산 사람 입니까? 나는 지나가는 손님이예요. 초청해서 온 게 아니예요? 손님이라구요. 그러니 손님 대접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목이 쉬어 가지고 목이 아픈데도 이야기를 해주면 잘 듣고 고맙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여러분한테 사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쉰 목으로 말하더라도 잘 들어야지, 사정해 가지고 잘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손님 대접을 잘하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여기에 조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 안 두겠어요. 선생님은 조는 사람 놓고 얘기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제 조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저기 보니까, 이제 정신이 아주 퍼뜩 드는 것 같군. 졸 때는 이런 말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 예법입니다. 한 사람이 졸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도깨비 바람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송사리 때문에 흙탕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아주 빨리 퍼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통일식구가 뭡니까? 식구가 뭐예요? 식구가 좋아요, 나빠요? 「좋습니다」 좋긴 뭐가 좋아요? 이놈의 식구가 사람을 망쳤습니다. 식구가 예수님을 망쳤다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래서 통일교회는 뭘해야 되느냐? 통일교회 원리에 따라 탕감복귀를 해야 합니다. 잃어버렸으니 잃어버린 것을 그대로의 모양으로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멍을 잘못 뚫어서 그 뚫어진 곳을 때우려면 그 구멍에 맞추어 땜질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입니다. 크고 작은 모양의 결정체와 마찬가지로, 장석이면 오각, 수정이면 육각인 것과 같은 형의 내용을 갖추지 않으면 탕감복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것은 알고 있지요?
예수님의 해원을 위한 일가(一家)가 되라
통일교회는 통일교회로 끝나는 단체가 아닙니다. 통일교회가 아니라 통일가(家)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통일교회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간판은 언제든지 뗄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대신 통일가입니다. 통일가(統一家)할 때 '가'자는 무슨 '가' 자입니까? 「집 '가' 입니다」 집 '가'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성은 무엇입니까? 우리 통일교회 식구의 성은 무엇이겠어요? 「통일가요」 통일가입니다. 통일가이니 길게 읽어 보면 한 '일'자 일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래도 일가요. 저래도 일가라구요. (웃음) 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가가 없어서 죽었으니 일가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일가를 다시 찾지 못하면 사랑할 수 있는 기반과 사랑받을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추지 못하면 해원성사, 즉 한을 풀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굿하는 것을 본 적이 있지요? '배뱅이굿' 이라는 말 들어 봤지요? 배뱅이를 불러 가지고 한을 풀어 주는 것입니다.
처녀가 죽어서 된 귀신을 무슨 귀신이라 하던가요? 「몽달귀신」 몽달귀신인지 낯짝귀신인지 나는 잘 모르는데 그러더구만. 그 귀신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는 볏단으로 남편을 만들고 잔치상을 차려 가지고 후루룩 날려 보내는 놀음을 합니다. 그렇지요? 한을 풀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에서 차원이 조금 다를 뿐이지, 거기에는 통하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죄를 지으면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죄지은 사람 대신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뿌림으로써 탕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 뜻을 다 못 이루었습니다. 영적으로만 이루었던 거예요. 예수님은 영적 육적의 실체를 중심삼은 이 땅 위의 만군 만왕의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천하의 사명을 갖고,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과 영광을 가지고 이 땅 위의 그 누구보다도 호화찬란한 생활을 거쳐 가지고 생애를 마치는 그날 만민이 추모하는 가운데 고이 가야 할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다니…. 그러려면 왜 4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세웠겠어요? 괜히 만들어 가지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시켰습니까? 죽이려면 한 날 전부 다 강변에 떼거리로 모아 놓고 죽여 버리지, 왜 그렇게 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당시 유대교의 교법사 제사장들, 니고데모 같은 작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게도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교의 교법사 같은 인물들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있었어요? 있었어요, 없었어요? 전부다 세리의 친구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마시고 먹기를 즐긴다고 비난했습니다.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런데 기성교회에서는 그런 것은 생각도 안 하는구만. 마찬가지라구요. 주님이 오실 때도 마찬가지로 딱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목사 가운데는 간판 붙어 있는 목사가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도 없어요? 그것은 통일교회에 누구나 못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여기 기성교회 목사가 있다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색다른 목사, 다시 말해 기성교회의 이단 사촌쯤 되는 그런 목사들이 들어올는지는 모르지만 기성교회의 간판 있는 목사들은 전부 예수 잡아 죽이는 데에 날인해서 공문 돌리는 그런 패들밖에 안 되니 못들어온다는 거예요. 그래 통일교회가 그들의 원수지요?
하기야 선생님이 잘났으니 그렇지 내가 못났으면 그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며칠 떠들다가 떨어질 사람 같으면 가만히 내버려 둘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두고 보니까 자기네들의 똑똑한 패들을 빼 가는데 나중에는 자기네 패들을 시켜 가지고 대들보까지 소리없이 몽땅 빼가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서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왜 무섭다는 것입니까? 내가 뭐 칼 가지고 대포를 걸어놓고 목사들한테 겨누고 있습니까? 그렇지만 심상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 사나이가 놀음할 판국을 짜고 나오게 될 때는 자기들이 어느 사다리에 걸려 넘어지고 어떤 배지기에 들려 넘어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럴 만한 실력이 있다는 겁니다.
통일교회는 애국애족하는 교회가 되어야
예수님은 유대교가 반대하더라도 반대하는 그들을 자기 일당으로 만들어 가지고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의 목을 조르려던 작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와 같은 비운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와 같은 작전을 기필코 성사시키겠다고 나선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기성교회가 우리를 이단이라고 합니다. 민주세계에 있는 기독교가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같은 입장에 있으나, 이제는 기독교가 반대하더라도, 기독교가 없더라도 나라를 받들 수 있는 통일교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요셉의 족속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할수 있는 통일가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애국애족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예수님을 중심한 유대교를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을 중심삼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통일교회 자체만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중심삼고 그런 나라를 가져야 하겠기 때문에 그 나라를 가지기 위해서, 애국애족하기 위해서 우리는 별의별 놀음을 다 해 나왔던 것입니다. 어떤 때는 피를 팔아서 이 일을 해 나왔습니다. 그랬기에 이제는 명실공히 애국애족하는 단체라고 나라가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종교계에 있어서도 통일교회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단계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두고 보라구요.
기성교회는 썩고 망할지언정 통일교회는 절대 망하지 않을 거라고 자타가 공인할 수 있는 두드러진 승리의 권을 갖추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 위에 비운의 사나이로 몰려갈 수 있는 하늘편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획했던 소망을 재현시켜 가지고 도리어 공인을 얻어 가지고 승리의 패권을 쥐고 호령할 수 있는 기반을 세계적으로 착착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할 통일교단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통일교회의 식구는 무엇이냐? 유대교를 대표하는 예수님 일가,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하는 유대교 대신 재편성한 것이 통일교회 문선생을 중심하여 통일교회의 합동결혼식을 한 소위 축복받은 가정들입니다. 이러한 통일교회 식구는 수두룩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사상이 아니면 이 나라를 구할 수 없을 정도의 절정의 장면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나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교회,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가정은 결국 이스라엘과 유대교와 요셉의 가정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사랑하고 옹위하며 모실 수 있는 환경, 그러한 발판이 될 수 있는 요셉 가정의 일파를 만들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문제는 무엇이냐? 예수님의 한을 푸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대받음으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을 남기고 갔기 때문에, 이 한을 풀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한이 맺혔고, 하나님의 한이 맺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망하여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랑하는 혈족을 남기고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누구에게 한이 맺혔다고요? 「하나님에게 한이 맺혔습니다」 불쌍한 예수님의 한이 맺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사랑받고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수 있는 한날을 바라보고 4천년을 한날같이 이스라엘 민족을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희생시켜 가지고 어둠의 세 시간이 가로놓여지는 그 비운의 장면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단 말입니까? 이게 무슨 도깨비 수작입니까?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뜻이 다 이루어졌으면 왜 하나님이 한탄해요?
하나님의 한을 누가 풀어 드릴 것인가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은 영육을 중심한 지상천국의 개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육을 중심한 터전을 만들어야 되지만 그렇지 못해 둘 다 망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영적인 하늘나라의 문이라도 열기 위해서 작전을 한 것이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적인 천국문을 열 수 있는 길을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에 하나님의 한이 맺혔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한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요, 유대교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요, 요셉 일가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한을 누가 풀어드릴 것이냐? 오늘날 민주세계의 중심적인 주도권을 갖고 있는 기독교가 풀어 드려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그 책임을 못하니 우리 통일교단이 중심이 되어 풀어 드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인들은 애국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애국자. 둘도 없는 애국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제 1이스라엘을 팔아먹던 민족, 원한의 터전이 되고 불신 불충의 민족이 되어 하늘나라의 한을 맺히게 했던 것을 오늘날 한민족을 대표해서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이 풀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모두가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애국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사랑하지 못한 예수를 나라를 사랑함으로써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국자라는 레테르를 받으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충성을 하고 효성을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불신한 유대교도들 같은 그런 패거리가 아니라 하늘의 일이라면 의심하지 않고 절대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 바칠 것을 각오할 수 있는 심정을 가진 통일교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가 사랑하지 못했던 그 예수님을 우리 통일교인이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기반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요셉의 일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사돈의 팔촌과 같은 이런 모든 사람들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수십년 정성들여 가지고 닦아 놓은 것이 통일교단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무엇 하기 위한 것이냐?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출발의 기원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가정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한 식구가 한을 맺히게 한 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동기였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교회와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한을 풀 기반을 닦아 나온 것이 오늘의 통일교회, 통일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바랐지만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 모인 무리가 통일교회 식구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어요? 「예」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장 또는 예수님의 형제, 누나,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 조카 등 친척권을 대신할 수 있는, 이 땅 위에 규합되어 있는 무리들이 우리 통일교회 식구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예」
예를 들어 여기 열 두 살난 어린 소년이 있다고 합시다. 이 열 두 살난 소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재현한 것입니다. 그의 과거가 어떻든간에,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 예수로 재현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해서는 한 나라의 대표자로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그 일을 다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사랑 하는 데는 나라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랑하지 못하고 교회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랑하지 못한 것을, 가정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랑하지 못한 것을 사랑해야 됩니다. 이렇게 3단계 내용을 대신한, 충효의 도리를 갖춘 참다운 형제의 인연을 가지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한과 이스라엘의 한도 풀어져야
요셉의 가정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언제 예수를 사랑해 봤습니까?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예수님을 추방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로막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천국의 개문을 위해서는 사랑 못받은 예수를 사랑할 수 있는 재현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통일교회를 만든 것입니다. 알겠어요?
또한 아저씨 아주머니가 언제 예수를 사랑해 봤습니까? 못했다는 것입니다. 형님 누나가 사랑해 봤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언제 사랑해 봤습니까? 동생들이 사랑해 봤어요? 못 해봤다는 것입니다. 그의 동생들은 형님 예수를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중심삼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가 철석같이 뭉쳐 나라의 칼이나 어떠한 권세의 힘을 가지고도 깨뜨릴래야 깨뜨릴 수 없는 철옹성 같은 심정적인 식구의 인연으로 결속된 터전을 갖추어 가지고 정말로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야만 하나님의 한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알겠지요? 「예」 이것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꾸며 가지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 대신 입장에서 사랑하려면 깊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4천년 동안 몰리고 쫓기던 민족, 비운에 처해 근근히 세계에 남아진 민족이 된 것은 천륜을 어겨 나오던 로마의 수하에서 그 절개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천륜을 알지 못하고 개인의 사정과 가정환경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비판하고 천륜을 배반했던 요셉 일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의붓 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사랑하고 싶었고, 또 어머니인 마리아를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사랑하고 싶었고, 또 형제를 누구 보다도 안고 싶었고, 격식을 갖추고 살지 못하더라도 같이 살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그렇게도 수고해서 남겨 놓은 최후의 한분이기 때문에 일평생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수는 의인으로서 뼛골이 녹아 지고, 힘줄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피살을 다 쏟더라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던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사랑하지 못했던 사랑을 다시 찾아서 이제까지 사랑하지 못한 동생들을 사랑하고, 생명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족들을 붙들고 끝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저씨 아줌마,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과 종족과 나라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통일가에서 재현시켜 가지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한을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한을 풀자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대교가 믿고 이스라엘 나라가 믿고 요셉 족속이 믿었더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자밥이 되었겠습니까? 믿었더라면 세례 요한도 어쩔 수 없이 에수님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 때문에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는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국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마 11:7-9)"라고 세례 요한의 무리들을 책망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생각하니 자기는 명분이 있는 하늘의 선지자로서 가는 입장인데 헤롯왕, 즉 사탄한테 모가지가 걸려 가지고 감옥에 갇혀 있는 따라지 팔자가 되었으니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준 적이 있는, 지금까지 나쁘게 소문났던 사생아 같은 자기의 동생 뻘 되는 예수에 대해 별의별 의심을 다 품었고 내가 형님인데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그가 어떻다는 소문을 듣고 생각해 보니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보내 가지고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 이 괴물단지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하시면서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식한 베드로가, 수제자가 될 수 있는 세례 요한의 권한을 몽땅 빼앗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1:11)"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천국은 시시껄렁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세례 요한이 책임을 다했더라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사도가 되고 70문도 120문도가 다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박사와 목사 그리고 수많은 사도들이 있었어도 여기에는 꿈에도 생각 못한 이러한 역사적인 슬픔이 깃들어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느냐 이겁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문선생이라는 사람이 나왔으니 이런 내용을 다 밝히는 거라구요.
만일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와 요셉 가정이 예수를 모셨다면
앞으로 세계적으로 이러한 내용이 개방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나 안 되나 두고 보라는 거예요. 그때 가서는 목사들 그저 허리를 굽신거리며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잘못되었다고 할 때가 불원간에 올 것입니다. 안 되면 선생님이 어떻게든지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이스라엘 나라가 받들고, 유대교단이 받들고, 요셉 가정이 받들었으면 예수가 죽었겠습니까? 세상에 악당 괴물이라 해도 그런 괴물들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 스승을 은 삼십 냥에 팔아먹어요? 그게 사람 새끼입니까? 여기에 문선생 팔아먹을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그래 팔아먹을래요? 무슨 원수 졌다고…. '선생님을 팔아먹어야 돼' 하는 사람은 거지 영신이 붙은 사람인 모양이지요?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종자가 있는 사람 같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와 요셉 가정이 예수님을 받들고 모셨더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들어 보십시오. 얼마나 재미있나…. 예수께서 그 나라의 왕이 됐겠습니까, 안 됐겠습니까? 「됐겠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세력 판도는 지중해 일대에 걸쳐 있습니다. 속국을 가지고 있었고 충분한 기반을 이룰 수 있는 사회상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부터 예수가 불만 잘 질러 놓으면 아랍권 전체가 동원되어 로마와 싸워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좋은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그 통에 밀려날까봐 떨었던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런 입장인데 예수님이 죽지 않았으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겠지요? 왕이 됐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좋았겠어요, 나빴겠어요? 누구라도 충성하겠으니 나 좀 끌어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인의 조상들까지도 출세 길이 열렸다고 야단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나라의 왕이 되었으면 예수 중심삼은 내각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내각이 있겠어요? 「예」 그럼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한 삼십년만 왕노릇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수한 족속이 남아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한, 즉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 가지고 가정을 못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정을 이루어 가지고, 신부와 신랑의 인연을 가지고 모든 족속을 거느리고 사랑하고, 교단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결혼도 못하고 따라지 신세가 되어 가지고 죽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남의 시집 장가가는데 가서는 수작하고 걱정 했지만 예수 장가드는 것에 대해서 염려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마리아를 들이 때린 거라구요. 남의 잔치집에 와서 수작하면서 아들 장가 가는 것을 생각이나 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들이 때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장가가야 할 예수의 입장을 알아서 사돈네 팔촌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까지 전부 다 동원해 가지고 처녀라는 처녀는 전부 다 불러서 예수의 신부를 간택해야 했던 것입니다.
축복가정은 이스라엘의 한을 풀기 위해 모인 무리
하늘나라의 왕자인 예수의 계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딸, 즉 후계자를 남길 수 있게끔 정성을 다하고 예수의 내심을 따라 지도를 받아 그 판도를 넓히면서 터전을 마련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가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한 거예요. 남의 집 잔치하는 데에 가서 수작은 하면서도 자기 아들 예수를 위해서 언제 한번 그런 생각이나 해보았어요?
그것은 노총각 분풀이의 말입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예수 잘 믿는 양반들, '에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장가를 가? 그렇다면 그거 이단이잖아' 할 것입니다. 그게 이단입니까? 여러분, 예수가 남자예요, 여자예요? 「남자입니다」 거 왜 남자로 태어났습니까? 보십시오. 예수께서 죽으면서 다시 올 때는 무엇으로 온다고 했습니까? 신랑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신랑으로 오는데 무엇하러 온다고요? 신부를 차 버리기 위해서 온다고 했습니까, 신부를 찾아서 온다고 했습니까? 「신부 찾아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신부가 무엇입니까? 색시예요, 다른 뭐예요? 「색시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목사들은 '남자도 신부 된다' 합니다. 남자가 신부 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의 한을 풀어야 할 종교입니다. 예수가 왜 죽었느냐? 하늘땅이 허락할 수 있는 아내를 못 찾아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오면 누구를 맞는 다고요? 신부를 맞는다고 했습니다. 일등신부. 예수님이 신부를 맞지 못하면 어린양 잔치를 못 하는 것입니다. 그저 주먹 구구식으로, 엉터리 망터리 어거지 떼거지로 해 가지고 '나 천국간다' 하는데 전부다 가보라구요, 어떻게 되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됩니다.
이스라엘의 한이 뭐냐? 예수님이 신부를 맞아 가정을 이룬 그 일가는 그야말로 하늘나라의 왕가입니다. 지상에 하늘나라의 왕가가 벌어졌을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늘나라의 왕자님이기 때문에 그 왕자님을 중심삼은 가정이 지상에 벌어졌으면 하늘나라의 혈족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족속은 이 땅에 영원히 주권을 가지고 치리할 수 있는 하늘 나라의 족속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한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일가를 이루어 아들딸을 낳아 부모가 되고 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손자손녀들까지 사랑하고 가야 했습니다. 그래야 이 땅에 온 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책임을 다하고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의 한이 무엇이냐는 거예요. 예수님 일대에 가정을 이루어 아내와 자녀와 손자들과 그 일가를 거느려 보지 못하고 사랑해 보지 못한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한인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통일교회는 예수님의 그러한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한 무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축복가정이 바로 그런 입장입니다. 예수님이 소망 하던 신랑신부에 부합할 수 있는 기준을 결정지은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이스라엘의 그러한 한을 풀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 왕가의 혈족을, 이 땅 위에서 실체를 쓰고 예수를 믿지 않고 천국갈 수 있는 아들딸, 그 족속을 모셔 보자고 등장한 것이 바로 통일교회 식구라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니 지긋지긋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류를 대신하여 기쁜 소식을 중심삼고 하늘 가정의 터전, 하늘나라의 왕자 왕녀와 그 혈족을 중심삼고 예수 믿지 않고도 천국갈 수 있게 하늘 나라의 직접적인 관리 밑에서 새로운 세계를 중심삼고 하늘나라의 혈족 기반을 넓혀 나가는 일을 못한 것이 이스라엘의 한이요, 역사적인 인류의 한입니다.
이것을 탕감복귀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해방의 한 때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한과 예수님의 한과 이스라엘 민족의 한과 인류의 한을 푼 승리적인 가정과 승리적인 종족과 승리적인 민족과 승리적인 새로운 국가로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 통일가의 소망입니다. 알겠어요? 「예」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는 그 마음을 세계적으로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전부 다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삼천만 민중을 대하여 그 나라의 백성에 대해 예수님이 원수들을 용서하셨던 그 마음을 그대로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볼 때에 내가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아저씨 아주머니한테도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느냐?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님이나 누나의 입장에 있는 사람한테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종족을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고 국경을 넘어 저 원수 나라인 일본의 할아버지 할머니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느냐, 일본의 아저씨 아줌마라도 우리의 한 혈족을 대하는 것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인연을 자유롭게 맺는 곳이 천국
예수님의 가정에 있어서 맺지 못하였던 그 사랑의 인연을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자유롭게 맺을 수 있다 할 때,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한 것을 가려 나와 이런 엄청난 천주의 한을 해원성사하고 가로막힌 인류의 갈 길을 터놓기 위해서 오늘 통일교회가 세계의 기수로 등장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들은 하나님을 누구 보다도 사랑하고 인류를 누구보다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잃어버린 것도 한이지만 그 민족을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세계를 찾지 못한 것이 예수님의 한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교회를 찾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민족을 잃어버렸고, 종족을 찾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잃어버렸고, 가정을 찾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종족을 잃어버렸고, 어머니를 찾지 못하여 가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식구의 인연과 부자의 인연과 형제의 인연을 갖고 부모님을 모셔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한과 예수님의 한과 인류의 한을 몽땅 풀 수 있고 또 어떠한 악한 것이라도 끼어들 수가 없도록 사랑의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사상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해야만 가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어떻게 해야 가느냐?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 처자보다도 혹은 자기 형제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심정으로 하나님 중심삼고 통일가정권내에서 피를 분립한 하늘의 혈족을 이루어, 혈연적인 형제들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는 내적인 강건함을 갖추어 인연맺을 것을 다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 이상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심정과 모심의 도리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훗날 본연의 나라를 중심삼고 본연의 세계가 아닌 이 세계를 우리 이상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길에 깃발을 꽂고 그 길을 닦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을 지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알겠어요? 「예」
이렇게 통일가의 심정의 씨를 뿌려 만민을 전부다 포괄해 가지고 참부모의 사상을 중심삼고 하나의 형제의 인연을 맺어 공동적인 사랑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는 데는 흰둥이고 검둥이고 황인종이고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합동결혼식에 대한 얘기를 들어서 다 알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는 민족이 달라도 결혼을 시키고 있습니다.
가령 영국과 독일은 국가적인 원수입니다. 또 영국 사람들은 인테리니 뭐 젠틀맨이니 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자랑하는 교만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미남자와 독일의 지지리 못난 여자가 원수지간의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어 결혼을 함으로써 누구보다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역사적인 새로운 전통과 하늘의 법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가의 사명인 것입니다.
세계를 밟고 올라서서 우리가 이런 일을 실천하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독일 처녀와 영국의 청년하고 결혼시켜 줬습니다. 거기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중심삼은 너희가 두 나라의 국경 때문에 외적인 사탄세계의 담으로 가로놓일 수 있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뜻은 꼼짝도 못한다. 그러니 너희는 역사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가정의 봉화를 들고 세계에 전통을 세울 수 있는 선각자가 되어라' 하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멋지게 깨끗이 살라는 것입니다. 2, 3년만 같이 지내게 되면 말은 통하는 것입니다. 그들 부부가 아들딸 낳고 사는 것을 볼 때에 그 이상의 행복을 그리워하면서 천년의 해원을 바라보고 천륜의 도리를 세우고자 다짐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은 원수지간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제일 잘난 사람과 한국의 제일 못난 사람하고 혹은 일본의 잘난 여자하고 한국의 못난 남자와 짝을 맺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너는 한국사람을 사랑하느냐'고 하면 '사랑합니다'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끼리 맺어 주고 통역을 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러냐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인간 세상에 없는 새로운 가정의 인연을 짓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내심으로 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통일교회의 이런 사상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망의 운세가 감돌수 있는 원수들간의 국경이 여기서 허물어지고 인류의 비참했던 절대적인 권세가 풀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한의 구렁텅이는 메워지는 것이요, 가정과 가정 사이의 벽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통일교회가 있기까지의 하늘의 수고를 알라
이 놀라운 역사, 이러한 찬란한 역사, 찬란한 새로운 문화의 창건을 위해서 서로 서로가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만국에 자랑할 수 있는 한날이 기필코 올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내가 지금까지 생애를 바쳐 수난의 길을 걸어왔다 하더라도 여기에 당당히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멋진 통일교회입니다. 알겠어요? 「예」
통일교인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뭉쳐야 되는 것입니다. 부산에 있는 식구들, 여기 지구장이면 지구장, 또는 여러분에게 내가 무엇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이 통일교회 선생이라는 사람은 여러분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껄렁껄렁한 가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늘 열과 성을 다하여 통일교회 여러분을 사랑해 왔습니다.
선생님은 내 어머니의 하소연도 뿌리치고 처자식까지도 발길로 차고 나온 사람입니다. 식구들을 원수로밖에 대할 수 없기에 옆눈으로 흘기면서 혹은 침을 뱉으면서 나온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후계자의 이름을 절대 더럽히지 않으려고 부모의 정을 끊기 위해서 혀를 깨물었던 사람입니다. 첫아들이 눈물짓는 것을 바라보며 악착같은 사나이가 되라고 하면서 하늘 가는 길에 있어서는 피를 흘릴 수 있는 한 대표자가 나와야 된다고 박차고 나선 사나이입니다.
선생님은 이렇듯 부모를 버리고 처자를 다 버리고, 이 보잘것없는 통일교회 무리들을 위해서 피눈물을 흘리며 지금까지 생애를 살아왔습니다. 세상에서 월급을 받으며 사는 사람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사는 사람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통일교인은 이러한 뼛골에 사무친 사실을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에 부정 못 할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않는 생활을 하여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통일교회의 사상과 전통만은 남겨야 됩니다.
꺼져간 예수, 흘러간 예수의 비운의 원한을 내 일신에서 다시 소생시켜 천륜의 새로운 희망봉을 향하여 새로운 기수가 되어 가지고 당당히 직행해 나갈 수 있는 용사의 모습을 갖추고 나섰다고 자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부르게 될 때 당당히 부를 수 있는 것이요, 하늘의 사랑은 나와 더불어 관계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철석같은 충신의 도리와 철석 같은 효성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맹세의 절정에 서서 외치며 나설 수 있는 사나이, 아낙네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교인이 하늘 뜻 안에 가져야 할 절개요, 우리의 뜻 앞에 가져야 할 절개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수난길을 걸어오고 남이 헤아릴 수 없는 비참한 운명길에서 혹은 영계에 부딪치는 사연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앞에 내가 어떠한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것으로서 내가 당해야 할 수난이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남겨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런 수난길을 뼛골을 녹이며, 원리의 길은 바로 이러한 길이라고 여러분을 가르치며 나온 것입니다.
복귀의 길은 찾아가는 길이요, 원리의 길은 밟아가는 길입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복귀노정에 있어서 선생님은 지금까지 무지의 세계에서 허덕이면서 이 길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공식노정으로서 밟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심혈을 다 투입한 사나이입니다. 이런 비운의 사나이가 비운의 시대에 이 대한민국에 태어나 가지고 오늘날 한국 민족으로부터 화살 같은 핍박을 받으며 악운 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쳐 나왔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 이 고을 저 고을로 도피하는 길손의 걸음걸이를 재촉하면서 나왔습니다.
오늘날의 통일교회의 이만한 교인들이 있기까지에는 통일교회 문선생으로 말미암아 하늘땅에 사무친 한이 또 남게 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을 푸는 것은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모시고 있는 선생님이 지금까지 닦아 나온 생애노정을 여러분이 책임지지 않으면 비운의 역사적인 한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이 한을 내 일대에, 내 자신의 가정에서 탕감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승의 마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인류를 자기의 혈족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하늘 가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리가 이단입니까? 선을 쳐 가지고 남아지는 악의 무리는 없습니다. 선은 맞아서 흥하지 않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일에 선이 손을 들어 치는 날에는 악은 흔적도 없이 영영 깨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이도 참아 왔습니다. 하늘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통일의 무리가 나오기 전에는 기성교회가 지금까지 형님의 자리에서 하늘을 모시고 나왔습니다.
우리가 없었던 때에도 하늘 아버지를 모시는 형의 인연을 이어 나왔기에, 내가 없는 동안에 그들이 하늘의 혈족을 남길 수 있도록 공을 들여나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 있어서 그러한 형님을 몰라볼 수는 없어서 눈물로 호소하며 빚을 져 가면서까지 전부 투입해 가지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도 미워하고 있다는 거예요. 만일 기성교회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앞으로 일세는 망하게 됩니다.
앞으로 기성교회 목사들이 전부다 끝까지 버틸지 모르지만 그들의 2세는 전부다 통일교회 문선생을 따르게 되는 거라구요. 내가 악한 복수의 마음이 있다면 그들에게 자기 어미 아비의 무덤을 파 버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한을 우리가 풀 것이 아닙니다.
참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
참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참된 사람이 있느냐? 참된 사람이 있느냐는 거예요. 오늘날 위인들은 많습니다. 이 나라의 위인은 누구냐? 여러분은 이순신 장군을 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순신 장군을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좋아 합니다」 선생님은 싫어합니다. 싫어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 선생님 말을 들어 보세요.
참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참은 원수의 나라에서도 참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참은 한국에서도 참이요, 영국에 가도 참이요, 독일에 가도 참이요, 미국에 가도 참이요, 아프리카에 가도 참입니다. 우리편 사람만이 아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참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참된 사람이라면 우리 민족도 좋아하고, 일본 사람도 좋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을 한국 사람들은 좋아하는데, 일본 사람들도 좋아합니까? 일본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좋아하느냐는 거예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책에는 원수라고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참사람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애국자로 존경합니다. 그렇지만 하늘땅 위에 공적인 특권을 가지고 천추만대의 만민과 더불어 원수를 관할할 수 있고 원수까지도 무릎을 꿇고 찬양하도록 할 수 있는 참된 사람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상 성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은 참된 사람의 반열에 드는 사람입니다.
그분은 자기의 생명을 잃는 자리에서도 원수들을 위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 :34)" 라고 했습니다. 생명이 끊어지는 그 자리에서도 사랑을 선포하던 그분의 그러한 사실을 알고 난 뒤 로마제국의 병사들도 뼛골이 녹아나서 그분을 존경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가 400년 후에 기독교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원수의 나라라도 그분을 모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원수들도 좋아하고 존경해야만 참사람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인류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까지도 그분을 사랑하고 숭배할 수 있는 터전을 가졌기 때문에 그분은 참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통일교회에 기독교라는 말을 붙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 우리 통일교회는 원수를 갚는 다 하는 무리가 아닙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집을 떠나 30년 이상의 세월을 지내왔지만, 어느 한 날 하나님 앞에 '복 주십시오. 보호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한마디도 안 한 사람입니다. 처자를 버리고 7년간의 길손 노정을 거쳐왔지만 처자를 위해서 기도 한마디 안 했습니다. 돼지도 자기 새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는 대신 세계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대신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다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이 나오신 길이 아니잖소. 나를 세웠으면 어떤 일가를 망하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를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오' 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당한 정의에 입각한 논리라는 것입니다. 돼지 새끼처럼 자기나 잘되는 복을 갖겠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이북에 계시는 부모님에 대해서 기도하면 순식간에 알 수 있습니다. 팔 남매 중 나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돌봐주시던 형님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동생인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몰랐지만 이 세상에 동생밖에 없다는 것을 영계를 통해서 알았던 분입니다. 해방될 것도 미리 알았고 신앙면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고차적인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형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동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움직이던 그 형님에게 선생님은 통일교회 원리 말씀을 한마디도 못 했습니다. 왜 그랬느냐? 자기 혈족을 통한 한을 품고 죽은 예수님의 그 한을 풀어 주어아 할 사명을 짊어졌기 때문에, 선생님은 어머니 아버지와 형님에게 이야기 한번 못하는 한을 그대로 품고 나온 것입니다. 세상 같으면 자기 부모와 형님 누나를 중심삼고 자기 혈족을 통해서 교회 간판을 붙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빈손으로 와 가지고 자기 혈족을 희생시키고 난데없는 거지 떼거리들을 중심삼고 자기 혈족 이상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었습니다. 그것이 천도를 상속할 수 있는 터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지금까지 사랑하는 아들딸, 사랑하는 종족, 사랑하는 나라를 희생시켜 가면서 이 악당의 무리를 사랑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아들이 되고 그 계대를 잇는 입장에서는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이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지금까지 선생님이 죽을 고비에서도 망하지 않고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같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나가는 데 망하거든 목을 자르라는 것입니다. 내 목을 자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통일교회는 이렇게 싸워 나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잡아 죽이기 위해 몰아낸 목사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들의 후손까지도 다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공산당 치하에서 3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도 매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사연을 풀고 그 원수들을 친히 사랑했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모색하려고 알아봤더니 모두 다 흔적도 없이 죽고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렇게도 악바리 같은 사람들이 다 꺾여 나갔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산 증거를 지금까지 보이고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무섭다면 아주 무서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통일교회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통일교회가 망하면 천도가 깨져 나갑니다. 남을 위해 피를 토하고, 남을 위해 밤잠을 안 자고, 남을 위하여 거짓말을 안 하며 남의 일생을 거름 삼아 가지고 나오는 사람이 망한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핍박받는 노정에서도 하나님은 '네 갈 길은 또 있다'고 하시며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상에도 이스라엘편에 7천의 무리가 숨겨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통일교단이 가는 길에 있어서 준비된 이 민족이 받들면, 세계 도처에서 그 길을 환영할 수있는 날이 올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대한민국에 우리 단체를 등록하려고 했으나 등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때는 이미 세계 5개국의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을 마친 때였습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판도가 되었으니 결국 등록허가를 내주지 않은 우리 나라가 창피하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를 상대로 싸워 가지고 대한민국 국가 입장에서 등록거부라고 공고했던 것을 일주일 이내에 철회하게 하는 운동도 내가 시켰습니다. 다 그럴 줄 알고 지금까지 이렇게 싸워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매정한 우리의 행로 앞에 언제나 슬픔만이 깃드는 것은 아닙니다. 한때를 거슬러 가는 것입니다. 밤은 자정이 지나면서 새 아침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일의 광명한 아침이 되어 세계를 향하여 7천년 역사의 운세를 가지고 이 한민족 앞에 찾아오고 있는데 한 번밖에 맞을 수 없는 이 운세를 놓쳐 버리는 불쌍한 이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러한 고귀한 천륜의 사명을 여러분이 뼛골에 이어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한과 참부모의 한과 지금까지 온 인류가 풀지 못한 한을 풀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통일가뿐만이 아니라 세계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천상세계의 승리적 권한을 가지고 하나님도 춤을 추고, 영계에 간 모든 선한 영들도 춤을 추며, 천사와 땅 위의 만인이 춤을 출 수 있는 그 세계를 향해 돌진할지어다. 여러분. 그렇게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내리세요.
기 도
사랑하는 아버님, 오늘도 이와 같은 자리에서 당신의 서글픈 심정을 회상해 볼 적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가슴 아픔을 절절히 느끼게 되옵니다. 아버님께서 이와 같은 비운에 사로잡힌 줄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담 해와의 한 날의 실수로 인하여 아버지께서는 억만천세 뼛골에 사무치는 분통과 공분을 느끼시며 천추에 이를 데 없는 슬픈 심정을 품고 나오셨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생각하게 되옵니다. 아버지, 여기에 모인 통일가의 부족한 무리들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저희들의 피어린 심정 가운데 당신만을 사모할 수 있는 마음이 고조되게 하여 주시옵고, 등 뒤에서 울려 나오는 천명을 들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기말 시대에 있어서 우리 통일가에 맡겨진 중대한 책임을 완수함으로써 아버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실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곳 부산지구 본부까지 순회하는 가운데,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오늘도 이곳을 위하여 정성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옵니다. 이 무리들이 만날 때는 기뻐하고 헤어질 때는 눈물로 엇갈린 사정을 나누는 것을 보게 될 때에, 불쌍한 이 무리들을 버리지 말라고 당신 앞에 이들을 의탁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을 아시옵소서. 외로운 길가에서 누구도 모르는 눈물을 흘릴 적마다 이들에게 깊은 심정의 아버지가 되시옵소서. 쫓기는 자에게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주시옵소서.
당신의 깊은 가슴의 사연을 터놓고 내 딸아 내 아들아, 부르시어 분부 하시고 권고하시던 당신은 아들과 딸이 그런 자리에 설 적마다 언제나 같이하실 것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험한 길에 부딪치게 되어도 당신의 마음 졸이는 사정을 알고 저희들 스스로가 그 길을 회피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들어갈 적마다 아버님은 언제나 승리의 결과를 남겨 주었던 사실을 저희들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오늘 부산지구 본부에 모인 어린 자녀들을 사랑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대한민국이 단말마적인 상황에 놓여 있사옵니다. 국가가 비운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 아버지여, 내일의 아시아 정세를 염려하시는 아버지시여, 승공을 표제로 삼고 나오는 통일교회에는 이제 세계 공산당과 일선에 서서 피살을 뿌려 가면서 담판의 해결을 지어야 할 과정이 남아 있사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희들이지만 오직 당신의 제물로서 몽땅 바칠 것을 결의하고 나섰사오니, 아버지여, 이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한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지켜 주시옵고, 이 시간도 눈물어린 심정으로 대한민국의 앞길을 맡기 위하여 자기의 생을 제물삼겠다고 하는 이국의 자녀들에게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서로 원수로서 맞대고 있는 민족의 담벽을 헐어 버리고 세계에 없는 역사적인 새로운 미래의 기원을 이루고자, 아버님을 위한다는 긍지를 가지고 나가는 통일가의 형제들이오니, 아버지, 그들 위에 사랑의 손길을 펴시옵소서. 외로운 눈물의 골짜기를 메우시어 당신의 위로와 사랑이 같이하여 주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금후의 아시아의 정세를 지키시옵소서. 아버님이 걸어가셔야 할 세계적인 행복의 노정을 위하여 저희들은 착실히 가야 되겠습니다. 이몸 마음을 다 바쳐 아버님을 위하여 미치고 또 미치는 미치광이가 되어야 겠습니다. 아버지,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까지, 불행과 고난이 끝날 때까지, 당신을 위하여 정진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갖게 하여 주옵고, 오늘의 비참한 운명을 가름할 수 있는 이 몸이 되겠다고 몸부림칠 줄 아는 하늘의 용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내일은 부산교회를 떠나 서울을 향하여 올라가겠사오니 스승을 보내고 나서 가는 길을 염려하여 마음으로 기도하고 외로와하는 이곳의 자녀들 위에 천배 만배 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의 소원은 죽을 때까지 빚지지 않는 것이오니, 이들도 절대로 빛을 지지 않고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들이 이러한 행로를 가는 데 있어서 기력이 다할 때까지 가기를 맹세하며 갈 수 있도록, 아버지여,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산 전통의 인연을 이 민족 전부와 더불어 세계인에게까지 맺을수 있는 사랑의 삼천만 민중의 삼천리 반도, 거룩한 남북통일된 주권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희들은 일구월심 꿈에라도 잊지 않고 자나깨나 일편단심의 성심을 다함으로써 승리하는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늘땅이 기뻐하는 자리에서 승리의 태극기를 들고 아버지 앞에 영광의 한날이 되었다고 승리의 개선가를 드높이 부를 그때까지 저희들은 죽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쳐서도 안 되겠사옵니다. 저희들에게 힘을 주시어서 그 자리에 동참하는 무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지여,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오늘 이들에게 통일식구의 사명이 이렇게 엄청난 것임을 알려 주었사오니, 이 내용이 뼈살에 사무치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기어이 아버님의 한을 풀고 죽겠다고 다짐하며 천년 만년 가중된 십자가의 길을 생애에 가야 할 책임노정으로 알고 달려갈 줄 아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고 원하옵니다.
이 시간 이후의 모든 일도 당신의 깊으신 뜻 가운데에서 맡아 주관하여 주옵기를 부탁드리면서, 모든 말씀 참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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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