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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충렬사•강한루•기문(記文)> 고영화(高永和)
1. 통영충렬사(統營忠烈祠)
충렬사(忠烈祠)는 경남 통영시 여황로 251(명정동 213)에 소재한 충렬사는 사적 제236호로써, 선조 39년(1606년) 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왕명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안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목적으로 세워진 사당으로 1663년 제45대 김시성(金是聲) 통제사의 계청으로 현종 임금이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에게 '충렬사(忠烈祠)' 현판을 쓰게 하여 친히 내리니, 비로소 사액사원(賜額祠院)이 되었다. 매년 수군통제사들이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그리고 가운데 두 기둥에는 신관호(申觀浩, 1861~1862년 재임) 통제사의 친필인 '맹산서해(盟山誓海)', '욕일보천(浴日補天)'이라 예서로 새긴 주련이 각각 걸려있다. 경내 건물은 본전(本殿)과 정문(正門)·중문(中門)·외삼문(外三門)·동서재(東西齋室)·경충재(景忠齋)·숭무당(崇武堂)·강한루(江漢樓)·유물전시관 등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현종 11년(1670년)에 제51대 통제사 김경(金鏡)이 동서 재실(중문 내)을 증축하였고, 제70대 최숙(崔숙) 통제사는 숙종 20년(1694년)에 경충재(景忠齋)를 짓고 서당을 개설하였으며, 제71대 김중기(金重器) 통제사는 숙종 44년(1718년)에 숭무당을 창건, 장교(將校) 3인을 차출하여 관리사무 즉 전곡(典穀) 사무를 집행하도록 하는 한편, 군창(軍倉)에 속해 있던 통영군 산양면 연대도(煙臺島) 둔전 30여 석지기 땅을 떼내어 충렬사 운영비에 쓰도록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다.
경내에는 많은 비석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81년(숙종 7)에 제60대 민섬 통제사가 세운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統制使忠武李公忠烈碑)인데 이 비는 1681년(숙종 7)에 수군통제사 민섬(閔暹)이 세운 것이다. 또한 충무공 후손통제사 비각 2동에 6기가 있고, 이운용 통제사 비각, 김중기 통제사 비각, 유형 통제사 비각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명나라 만력제가 내린 8가지의 선물인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보물 440호)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795년 1질을 통영 충렬사에 내리면서 직접 지어 내린 어제사제문판(御製賜祭文板) 및 어제제문(御製記板)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2월, 8월의 춘추향사와 4월 28일의 탄신제 그리고 한산대첩기념제전의 고유제는 이곳 충렬사에서, 기신제는 착량묘에서 각각 봉행하고 있다.
1) 통영충렬사(統營忠烈祠) / 안덕문(安德文) 1700년대 말.萬屋人烟海氣蒼 수많은 인가마다 연기 끼고 바다엔 푸른빛 가득한
爲尋忠武古祠堂 충무공 옛 사당을 찾아 왔다.
三邊城市皆魚蟹 도시의 세 면이 모두 어물이고
一面山林獨檜篁 한 면의 산림에만 오직 전나무 숲이네.
擎讀全書生義氣 전서(全書)를 받들어 읽으니 정의로운 기개가 생겨나,
拜瞻遺碣瓣心香 전해오는 비석을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도다.
腥塵乍歇寒潮晩 성진(腥塵)이 잠시 그치고 저문 밀물 차가운데
畫角聲悲夜火光 뿔피리 소리 비장하니 횃불이 빛나네.
-- 有御賜全書 어사전서에 실려 있다.
[주1] 성진(腥塵):전진, 싸움으로 인한 먼지. 피비린내 나는 티끌.
[주2] 안덕문(安德文 1747∼1811) : 조선후기 유학자. 자는 장중(章仲)이고, 호는 의암(宜菴)이다. 본관은 탐진(耽津)이고, 출신지는 경남 의령군(宜寧郡) 부림면(富林面)이다.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흥학당(興學堂)을 지어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문집으로 8권의 《의암집(宜菴集)》이 전한다.
2) 충열사 향사(忠烈祠祠享) 이순신(李忠武 舜臣) / 김창숙(金昌淑 1879∼1962).
漫漫海曲爲誰尋 가없는 바다모퉁이 누굴 찾아 가는고
都督祠前樹影森 수군도독의 사당 앞에 나무그림자 무성하다.
茂勣危忠光帛史 깨끗한 충신의 빼어난 공적 비단 빛에 화사하고
君褒皇賜煥綸音 임금이 기리고 황제가 하사한 윤음(綸音)이 빛난다.
荒沙的歷蠻兒骨 황폐한 모래땅에 섬 오랑캐 뼈가 선명하니
異世輪囷烈士心 시대는 달라도 높은 열사의 마음 상통하네.
嘆息長蛇方荐食 탄식하노니 나라를 잠식하는 큰 뱀을
九原難作淚盈襟 구원하기가 어려워 눈물이 옷깃을 적시누나.
[주] 윤음(綸音) : ‘임금의 말’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 국왕이 臣民에게 내린 訓諭나 명령의 문서를 널리 지칭하는 용어이다. 綸旨라고도 하고, 간혹 ‘열줄’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綸音이 형식상 10行으로 자주 간행·반포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3) 충렬사 알현(謁忠烈祠) 통영에 사당이 있어 이충무공께 향사한다(祠在 統營 享李忠武 舜臣) /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일제강점기 時 충렬사 이순신 장군을 알현하고 비통한 마음에 적은 글이다.
將軍古廟傍穹林 장군의 옛 사당 옆 우거진 숲은
風雨飄搖歲月深 비바람에 흔들리며 세월만 깊어간다.
同戴讐天今日淚 함께 받들자던 하늘의 맹세는 오늘의 눈물이라,
招招毅魄若爲心 꿋꿋한 혼백 손들어 부르니 마음만 아프네.
[주] 김창숙(金昌淑, 1879.7.10∼1962.5.10) : 독립운동가·유학자·교육자. 임시정부의 주요인물로 8·15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아버지는 호림(頀林)이며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이다. 본관은 의성.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翁). 한때 우(愚)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4) 충렬사(忠烈祠) / 좌의정 조현명(左議政趙顯命,1690~1752)
忠烈遺祠古渡潯 충렬의 유훈을 받든 옛 나룻가 사당에
靑春駐節海雲深 푸른 봄날 유하실제 바다구름 깊었구나.
得如公死眞無愧 공처럼 죽음에 이르러도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었고
也識天生早有心 타고난바 서둘러 주위를 살펴야함을 알았다네.
誓後魚龍猶怒氣 어룡에 맹세하곤 노한 기색을 다스리니
化餘猿鶴自悲吟 감화된 여남은 원숭이와 학이 절로 슬피 읊조린다.
檀香欲歇靈風過 쉬어가려는 향나무엔 신령스런 바람 부는데
蕭寺鐘鳴月掛林 쓸쓸한 절간엔 종이 울리고 수풀엔 달이 걸렸네.
5) 충렬사(忠烈祠[二]) / 판서 정익하(判書鄭益河,1688년~?)
忠武遺祠志士尋 충무공의 유훈 받든 사당을 뜻있는 선비가 찾아보니
翠筠蒼檜自成陰 푸른 대나무 회나무 절로 그늘을 만들었네.
人能義若鰲山大 사람들이 의롭다하며 마치 거북 같은 큰 산으로써
天仗功收鷺海深 하늘을 찌를 듯한 공(功)을 거둔 노량바다 깊을 뿐.
向者西原埋碧血 예전에 서쪽 언덕에서 짙푸른 피를 메웠고
得於南國秉丹心 남녘국토에서 한결같은 충성심 지키었다.
螭頭別有如椽筆 이두(螭頭)에 달리 있는 훌륭한 글씨가
彷彿英姿倚劍吟 마치 늠름한 자태로 칼에 기대 읊조리듯 하네.
[주1] 이두(螭頭) : 성문 위의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성벽에 끼운, 이무기나 용의 머리 모양으로 조각하여 구유처럼 홈을 낸 돌. 궁궐 섬돌에 새긴 용머리 모양의 장식물로 한림학사를 가리킨다. 관제(官制)에 “아조(我朝)의 한림은 모두 사관(史官, 起居注)으로, 반열이 이두(螭頭)에 가깝기는 하나 역시 전하(殿下)에 멀리 있다.” 하였다.
[주2] 여연지필 (如椽之筆) : 서까래 같은 필력. 글재주가 뛰어난 것을 말한다.
6) 충렬사(忠烈祠[三]) / 판서(判書) 김상성 (金尙星 1703∼1755)
古廟丹靑碧海潯 오래된 사당의 단청, 푸른 바다 기슭,
寒潮嗚咽怨何深 한파에 설움 복받치니 원한이 그리 깊었나?
風雷菀結三呼恨 폭풍우에 울화가 치밀어 여러 번 한탄하고
星斗昭森六出心 여섯 번이나 마음을 잡으니 별들이 반짝인다.
落日樓船猶壯迹 석양속의 다락배는 아직도 자취 씩씩하고
淸秋皷角自悲吟 맑은 가을 고각소리 절로 슬피 들리네.
有時方斷神靈雨 제 때에 신령스런 비가 걷히니
楓樹蕭蕭篁竹林 참대 숲 단풍나무가 쓸쓸하구나.
[주] 육출심(六出心) : 한(漢) 나라 진평(陳平)이 평생에 국가와 전쟁에 대해서 여섯 가지 기특한 꾀를 내었다. 출심(出心)은 가행(집안의 행실과 품행)의 선심에서 나오는 마음.
7) 충렬사(忠烈祠) / 신좌모(申佐模,1799∼1877) 이조 판서.
忠武之生實賴天 충무공의 생애는 하늘의 은혜를 받아
至今勳烈記龍年 오늘에 이르러, 큰 공훈을 용의 해에 기록한다.
再持節鉞氛塵洗 재차 절부월(節斧鉞)을 손에 쥐고 티끌을 씻으니
八錫弓刀日月懸 여덟 가지 하사품, 활과 칼이 일월처럼 빛나네.
十萬敵兵經幾戰 십만 적병을 몇 번의 전쟁으로 다스리니
三千里域得重圓 삼천리 국토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구나.
五原星隕英䧺淚 오장원(五丈原)의 떨어진 별은 영웅의 눈물이라,
江漢高樓一汪然 강한의 높은 누각 보니 한줄기 눈물 하염없네.
[주1] 절월(節鉞) : 절부월(節斧鉞), 조선 시대에, 관찰사ㆍ유수(留守)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대장(大將)ㆍ통제사 들이 지방에 부임할 때에 임금이 내어 주던 물건.
[주2] 장성운(將星隕) : 장군(將軍)이 진몰(陣沒)하거나 영웅ㆍ위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
[주3] 오장성운(五丈星隕) : 오장은 중국 섬서성 봉상현의 서남쪽에 있는 곳, 제갈량이 여기 오장원에서 죽음. 제갈량의 죽음을 뜻하는 말. 제갈공명의 책략이 돋보였던 전쟁을 꼽으라면 사마중달과 대치했던 오장원 전투가 아닌가 싶다. 오장원(五丈原) 전투는 공명이 자신의 죽음을 이용해 적의 오금을 저리게 하고, 자신의 후광(後光)만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물리쳤다는 점에서 적벽대전과 대비된다.
[주4] 강한고루(江漢高樓) : 강한의 높은 누각, 여기에서는 1840년에 건축된 충렬사 內 강한루(江漢樓)를 말함. 강한(江漢)은 양자강과 한수가 만나는 곳으로 원래 군사요충이며 이름난 중국 호북성의 경승지라고 한다. 1840년에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이 여기에 누각을 지었을 때 추금(秋琴) 강위(姜瑋)가 충무공의 위업을 강한과 관련된 고사에 연관지어 강한루(江漢樓)라 명명했다. 현 누각은 전형적인 조선의 팔각지붕 양식으로 1988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8) 충렬사 2수(忠烈祠 二首) / 송병선(宋秉璿,1836~1905) 송시열의 9대손, 조선말기 유학자 문신 애국자,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
松杉蒼鬱古祠前 소나무 삼나무 울창한 옛 사당 앞에서
颯爽靈風動劒筵 시원한 바람소리, 신령스런 바람에 흔들리는 칼.
八賜皇明紀功大 명나라 황제의 여덟 가지 하사품이 큰 공로를 기념하는데
千秋孰不仰雲天 천추에 누구인들 구름 덮인 하늘 우러러보지 않으랴.
長懷忠武善揚兵 충무공이 훌륭히 병사를 일으킨 일을 길이 사모하는데
人說板橋夷膽驚 사람들이 말하길, 널다리(판교)가 오랑캐 간담을 놀라게 했다네.
今作一家羞莫雪 이제는 일가가 되어 부끄러우니 논하지 말라.
百年志鬱何時平 백년의 답답한 감정 언제쯤 풀어질까.
9) ‘충렬사 알현’ 시원중제군(謁忠烈祠 示院中諸君) 충렬사를 방문해 원중(院中)의 그대들을 보며. / 강위(姜瑋,1820~1884)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歷落嶔崎老此生 험준한 세상에 내려와 이승에서 늙어 가는데
試爲院長亦奇情 잠시 원장이 되니 또한 기이한 정(情)이로다.
未知節制猢猻陣 절제를 알지 못하는 원숭이 대열이라,
已見周旋鴈鶩行 기러기나 오리걸음으로 맴도는 것만 보일 뿐.
欹枕天風來瑟瑟 베개 베고 누웠는데 하늘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凭闌海水貯盈盈 난간에 기대보니 가득 찬 바닷물이 찰랑이네.
總藉先賢流澤遠 모두가 선현에 의지하여 멀리 떠도는 덕분에
魚龍草木共承平 어룡 초목이 모두 태평하도다.
問訊名園萬竹安 묻노니 이름난 동산엔 울창한 대나무 안온하지.
綠天風雨動微寒 푸른 하늘 비바람에 찬 기운이 으스스하다.
一齋人集新知好 한 번씩 재계하고 모두 모여 새로 주관하여
千里書携舊讀殘 천리서 온 글을 가지고 예전에는 남은 글을 읽었다.
碧酒中年原易感 중년은 원래 푸른 술에 쉬이 감응하니
靑灯遙夜幾回闌 푸른빛 등잔이 이슥토록 몇 번이나 가로막는지?
諸公俱有凌雲氣 여러분이 모두 구름을 뚫을 기세이지만
莫學癡翁鋏屢彈 어리석은 늙은이가 부젓가락 자주 두드리는 것은 배우지 말라.
[주] 벽통주(碧筩酒) : 삼국 시대 위(魏)나라 정각(鄭慤)이 삼복(三伏) 때마다 사군림(使君林)에 가서 피서를 했는데, 항상 큰 연잎에 술 석 되〔三升〕를 담고 연의 잎과 줄기 사이를 비녀로 뚫어서 술이 줄기를 타고 내려오게 하여, 마치 ‘코끼리의 코〔象鼻〕’처럼 구부려서 줄기 끝에 입을 대고 술을 빨아 마시면서 이를 벽통주(碧筩酒)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酉陽雜俎 酒食》
10) 충렬사[忠烈祠] /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1882년 1월(음) 중순경에 거제도 유배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하던 때, 통제영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지은 글이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전직 영의정이었고, 또한 복귀가 확실시 되던 분이라, 거제도 유배 역사상 가장 호화스런 귀양살이를 했다. 거제도에 있는 동안에도 정낙용(鄭洛鎔) 통제사가 매달 문안 인사를 올렸고, 돌아가던 중에도 통제영에 모셔서 충렬사 세병관 등을 안내하며 극진한 예우를 하였다.
山島屹然遠海呑 섬의 산이 우뚝 솟아 멀리 바다를 삼킬 듯,
堂堂忠義古祠存 당당한 충성과 절의의 옛 사당이 있구나.
百年壯氣舟師在 백년의 장한 기세, 통제영의 수군이 있으니
三道威聲壁壘尊 삼도의 위력 있는 명성에 성벽과 성루 또한 웅장하다.
金肅門高風半夜 높은 금숙문(서문)에 바람이 한밤중에 부는데
冬靑花發雪黃昏 황혼의 눈 속에 사철나무 꽃이 피었네.
歸裝草草前塗濶 돌아가는 초라한 행장에 앞길이 먼데
立馬回頭酒一罇 말을 세우고 돌아보니 한 동이 술이로세.
[주] 통영성(統營城) 4대문 : ①북문은 통영성을 축성할 당시에는 문루가 없었으나, 후에 문루를 짓고 이를 공북루(拱北樓), 일명 의두문(依斗門)이라 하였다. 정량동의 비석1길과 북신동의 북문1길이 교차되는 지점으로 추정된다. ②동문은 일명 신흥문(新興門)이라 하였다가 나중에 춘생문(春生門)으로 불렀다. 위치는 지금의 태평동 623번지 고갯마루의 도로 중앙으로 추정된다. ③남문은 청남루(淸南樓)인데 2층 문루이다. 위치는 지금의 문화동 150-6번지 도로변 4거리 중앙으로 추정된다. ④서문은 일명 금숙문(金肅門)이라 하였다. 위치는 지금의 문화동 310번지 고갯마루의 도로 중앙으로 추정된다. ⑤동암문은 일명 수구문(水口門)이라 하였는데 문루가 없는 작은 문이다. 위치는 지금의 태평동 504번지 도로 중앙으로 추정된다. ⑥남암문 문루가 없는 작은 문으로 조선후기 동안 풍수지리설에 의해 항상 잠겨 있었다한다. 위치는 지금의 중앙동 143번지 도로 중앙으로 추정된다.
11) 충렬사[忠烈祠] / 오횡묵(吳宖默,1834~?)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
李公祠屋竹林中 이(李)공의 사옥(祠屋)은 대숲 속에 있는데
百世羹墻景慕同 오랫동안 추모의 정(情)을 함께 경모하도다.
古壘雲埋龍虎血 옛 보루(堡壘)는 구름에 묻혀 용과 범의 핏빛 같고
荒城草漲鷓鴣風 황폐한 성곽엔 풀이 덮이어 소쩍새만 떠도네.
武候不盡呑吳恨 제갈공명은 탄오(呑吳)의 한(恨)에 끝이 없었고
岳穆偏知報宋忠 악목(岳穆)은 송나라 충신임이 널리 알려졌다.
有儼淸高遺像在 남겨진 초상화는 맑고 고결함이 엄연한데
至今籩豆走村翁 지금까지 제사 모시는 일에는 시골 노인들만 바빴다네.
[주1] 무후(武候) : 제갈공명의 관직을 줄여 사용하는 말이며 유비를 모신 소렬사(昭烈祠)가 먼저 있고 뒤편에 제갈공명을 모신 무후사(武候祠)가 있다.
[주2] 탄오(呑吳) : 오나라를 병탄하다.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제갈량의 만류를 불구하고 오나라를 공격하다 크게 패했다.
[주3] 악목(岳穆) : 중국 남송의 충신인 악비(岳飛)를 말한다. 1126년에 여진족이 세운 금이 화북지방을 침입하여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점령했고 북송은 멸망했다. 그 후 휘종의 아들인 고종(1127~62/63 재위)이 양쯔 강 이남지방에 남송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재건했다. 고종과 함께 남쪽으로 퇴각한 그는 구릉지가 많은 강남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금의 기마공격을 막았다. 양쯔 강과 화이허 강 남부 사이에 위치한 중원지역의 회복에 진력하여 금이 점령했던 일부 지역을 수복할 수 있었다. 북진하여 잃어버렸던 모든 영토를 수복하려는 그의 노력은 주화파의 반발을 불렀다.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진회 등의 주화파는 1141년에 악비를 옥에 가두고 처형했다. 이후 악비는 후세의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되었고, 악비를 모함한 진회는 '반역자'라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12) ‘봉심(奉審)’ 충무공 충렬사[奉審 忠武公忠烈祠] / 오횡묵(吳宖默,1834~?) 1886년 영남향별사, 고성부사(固城府使 1893~1894).
忠烈祠堂到此尋 충렬사 사당을 찾아 이곳에 이르렀는데
對山無語日西沈 마주 본 서산에는 말없이 해가 지고 있구나.
庭前猶有寒松竹 뜰 앞에는 찬 솔과 대나무가 있는데
保得靑靑萬古心 청청한 만고의 마음을 지켜가고나.
松竹淸高廟貌虛 소나무 대나무 맑고 고결해도 사당과 화상은 공허하고
黃鸝碧草自如如 푸른 풀숲의 꾀꼬리 절로 여여(如如)하네.
身殲未盡紆籌策 몸을 희생해 큰 포부를 펴지 못했으니
魚鳥猶知恨有餘 물고기와 새도 여한(餘恨)이 가히 끝없어라.
[주] 한송죽(寒松竹) : 논어 자한편에 나온 구절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 後凋)"는 뜻으로 전하고 있다. 해마다 추운 겨울을 견디며, 삶의 성찰이 쌓인 소나무 대나무같이 초지일관의 삶이야말로 청송(靑松)의 곧고 굳은 기상으로 인생을 마감한다는 의미심장한 뜻이다.
2. 통영 강한루(江漢樓)
강한루(江漢樓)는 통영 충렬사 경내에 있다. 통영 충렬사는 임진란이 끝난 8년 후인 선조 39년(1606) 이운룡(李雲龍) 제7대 통제사가 왕명을 받들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지금 정침과 외삼문에 걸려있는 「충렬사」현판은 현종 임금의 사액현판(賜額懸板)으로 문정공(文正公)송준길(宋浚吉)의 글씨라 한다.현종 11년(1670)에 김경(金鏡) 제51대 통제사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지었고, 숙종 7년(1681)민섬(閔暹) 제60대 통제사가 충렬묘비(忠烈廟碑)를 세웠다. 그 후 숙종21년 (1695) 최숙(崔橚) 제70대 통제사가 경충재(景忠齋)를, 같은 해 김중기(金重器) 제71대 통제사는 숭무당(崇武堂)을 지었다. 정조 19년(1795)에는〈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어제제문(御製祭文)을 하사하였으며, 헌종 6년 (1840)에는 이충무공의 8대손 이승권(李升權) 제172대 통제사가 강한루영모문(江漢樓永慕門)을 세웠다.
강한루의 ‘강한(江漢)’은 원래 중국의 군사요충이며 양자강과 한수가 만나는 곳으로 이름난 호북성의 경승지라고 한다. 1840년에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이 여기에 누각을 지었을 때 추금(秋琴) 강위(姜瑋)가 충무공의 위업을 강한과 관련된 고사에 연관 지어 강한루(江漢樓)라 명명했다. 현 누각은 전형적인 조선의 팔각지붕 양식으로 1988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13) 강한루(江漢樓) / 강위(姜瑋,1820~1884).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試溯神仙夢 신선의 꿈 쫓아 물길 떠돌다가
重開漢上襟 강한루에 올라 옷깃을 활짝 연다.
孤月行天遠 외로운 달은 하늘 멀리 떠가고
衆流到海深 수많은 물갈래, 깊은 바다에 이르네.
逢人問古地 사람 만나 옛 땅을 물으며,
對酒憐初心 마주한 술에, 본디 마음 가련토다.
忠烈祠堂在 충렬사 사당이 있는
天涯已再尋 하늘 끝, 재차 찾아왔을 뿐인데.
14) 강한루만조(江漢樓晩眺) 강한루에서 저물녘 경치를 보며 / 강위(姜瑋)
海上名園萬竹風 해상의 이름난 동산에 많은 대나무에는 바람이 일고
沈酣竟日綠天中 온종일 술에 취하니 푸른 하늘 가운데다.
覊遊未覺光陰轉 나그네 떠돌다 세월 가는 줄 모르는데
安石花飛滿院紅 석류꽃이 날리니 온 동산이 붉구나.
搏桑萬里洒天風 만 리 박상(搏桑)에서 시원한 하늘 바람 불고
身在琉璃鏡影中 몸은 유리 같은 수면의 그림자에 있네.
千樹珊瑚誰網得 천 그루 산호수(珊瑚樹) 누가 그물로 잡으랴.
滄波落日浸殘紅 푸른 물결 위 석양이 남은 붉은 잎에 잠긴다.
[주1] 안석화(安石花) : 석류화(石榴花)는 안석국(安石國)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안석류(安石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주2] 박상(搏桑) : 동쪽 바다의 해 돋는 곳에 있다는 신목(神木)을 이르는데, 또는 그 신목이 있는 곳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3] 산호수(珊瑚樹 Ardisia pusilla) : 앵초목 자금우과의 상록 작은 관목. 털자금우라고도 한다. 높이 5∼10㎝. 줄기는 땅 위를 기며 전체에 털이 많다.
15) 통제영(統制營) / 강위(姜瑋,1820년~1884년). 조선 후기의 한학자, 개화사상가.
江漢樓前萬里波 강한루 앞 만 리 물결
太平元帥大刀歌 태평한 통제사 대도가를 부른다.
遙夜群鴻都睡着 긴 밤 기러기 떼 모두 잠들고
碧空無際月華多 가없이 넓은 짙푸른 하늘에 달빛이 쏟아지네.
書劒無成老更哀 문무(文武)를 못 이루고 나이드니 더욱 슬픈데
沈吟終日在戎臺 종일 군사훈련장에서 깊은 한숨뿐이로다.
天中積翠頭流出 하늘의 짙푸름이 산머리를 떠돌다 나타나고
海上斜陽巨濟來 해상에는 저문 햇살이 거제로부터 비춰오네.
水偏淸處毒龍浮 독룡이 떠다니는 물이 편벽되게 맑은,
讀得唐詩可戰不 당시(唐詩)를 읽고, 어떻게 싸우지 않으리오.
神解如公千古少 신령을 깨우친 공 같은 분이 먼 옛적에도 적었으니
莫將敦說擬凡流 범부에 비견해 지나친 말이라 하지 말라.
忠武祠堂萬竹林 무성한 대숲 속 충무공 사당에는
英雄事畢海沉沉 영웅의 일을 끝내고 바다에 잠긴,
世間不乏千名將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명장으로
有否盟山誓海心 굳게 맹세한 마음만 있도다.
[주1] 통영 강한루(江漢樓) : 강한(江漢)은 군사요충이며 양자강과 한수가 만나는 곳으로 이름난 중국 호북성의 경승지라고 한다. 1840년에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이 여기에 누각을 지었을 때 추금(秋琴) 강위(姜瑋)가 충무공의 위업을 강한과 관련된 고사에 연관 지어 강한루(江漢樓)라 명명했다. 현 누각은 전형적인 조선의 팔각지붕 양식으로 1988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주2] 수편청처독룡부(水偏淸處毒龍浮) : 율곡이 이순신에게 "독룡이 숨어 있는 곳의 물은 편벽되게 맑고 산에서 나무 찍는 소리가 ‘정정’ 울리니 산은 다시 그윽하다(伐木丁丁山更幽 毒龍潛處水偏淸)"이란 시구를 전해주었는데 "伐木丁丁山更幽"는 두보의 시인 "제장씨은거(題張氏隱居)"에 실려 있다.
[주3] 맹산서해(盟山誓海) : 썩 굳게 맹세(盟誓)함을 이르는 말.
3. 기타 기문(記文)
16) 통영(統營) 충렬사(忠烈祠)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① 1795년 9월 14일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八冊) 인쇄·비용·배포 기록.
이면긍(李勉兢)이 전교하기를, “이충무공 전서 8책을 교정하고 편집에 힘써야합니다. 내각으로 하여금 활자판 40건(件)을 들이도록 하여, 10건은 서고(西庫)에, 또 각기 1건씩 사고(史庫) 5곳에 나누어 보관해야 합니다. 홍문관·성균관 및 순천충민사, 해남충무사, 통영충렬사, 남해충렬사, 아산현충사, 강진유사, 거제유묘, 함평월선사, 정읍유애사, 온양충효당, 착량초묘 등에 임금의 명령에 의해 분배해야하니 곧 32건의 책을 출간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은 충의를 드높이고 공훈에 보답하며 무용을 드러내 아름다운 공덕의 뜻을 기리는 것입니다. 편찬할 때에는 누차 부지런히 물어야 하며, 인쇄할 즈음에는 마땅히 틀리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내탕전(內帑錢)의 돈 5백민을 하사받았고, 어영청(御營廳)이 돈 5백민을 보태 인쇄하는 책비용에 보탰습니다.”[傳于李勉兢曰 李忠武公全書八冊 校正編進矣 令內閣活印四十件入之 十件西庫 又各以一件 分藏于五處史庫 弘文館·成均館及順天忠愍祠 海南忠武祠 統營忠烈祠 南海忠烈祠 牙山顯忠祠 康津遺祠 巨濟遺廟 咸平月仙祠 井邑遺愛祠 溫陽忠孝堂 鑿梁草廟 頒賜件 則三十二件印出 此擧 出於尙忠報功 旌武彰烈之意 編纂之時 屢致勤咨 剞劂之際 亦宜別異 今下內帑錢五百緡 御營錢五百緡 俾助印書之費]
② 통영(統營) 충렬사(忠烈祠)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치제문 / 홍재전서(弘齋全書)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통영충렬사에 내리면서 직접 지어 내린 제문 ]
1795년 11월 정축일에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를 인쇄하여 반포하고 한 본을 통영(統營)의 충렬사(忠烈祠)에 보관하였다. 12월 5일(임인일)에 통제사 이득제(李得濟, 1794년9월~1796년12월 재임)에게 명하여 현황제(顯皇帝)가 하사한 도독구첩전(都督九疊篆), 동관방(銅關防) 및 영패(令牌), 귀도(鬼刀), 참도(斬刀), 독전기(督戰旗), 홍령기(紅令旗), 남령기(藍令旗), 곡나팔(曲喇叭)을 진설하고, 또 정독(旌纛), 총통(銃筒), 가고(笳鼓) 등속을 사당의 내외에 진설하고 각기 토양에 맞는 음식과 한 말의 술과 한 마리 돼지를 위패 앞의 갑옷에 드려서 유명(有明) 수군도독 조선국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에게 제사 드리고 고하게 하노라.
[萬曆癸酉紀元後二百二十二年十一月丁丑 忠武全書印頒 以一本藏于統營忠烈祠 時維十二月壬寅 命統制使李得濟 陳顯皇帝欽賜都督九疊篆 銅關防及令牌 鬼刀 斬刀 督戰旗 紅令藍令旗 曲喇叭 次陳旌纛銃筒笳鼓之屬於祠之內外 各隨地宜 斗酒彘牲 入奠於版前鎧甲 以侑於有明水軍都督朝鮮國贈効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德豐府院君 行正憲大夫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 忠武公李舜臣 若曰]
경을 알고자 한다면 전서를 볼지니 혁혁하고 빛나는 글이 열네 편 남짓하다네. 전쟁의 공적을 이루고 합변의 형세를 알았으며 거북선을 만들었으니 기러기 소리 들리는 물가였네. 도독 진린(陳璘) 총병 등자룡(鄧子龍)과 합세하여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여 지켰으니 바다에 서약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도 이름을 알았었네. 책으로 어찌 공의 경중을 논하랴만 책을 보면 곧 드러나기에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을 덜어 인쇄에 부치니 비로소 광전을 닦은 것이라네. 이 책을 보관하는 곳이 바로 충렬사(忠烈祠)이니 이에 통제사에게 명하여 경건히 잔을 드리게 하노라.
[欲聞卿者 視此全書 奕奕焜焜 十四篇餘 戰爭之績 合變之勢 伏龜之舫 聽鴈之澨 曰陳曰鄧 湖嶺連營 誓海盟山 草木知名 書豈輕重 賴書乃顯 捐帑付劂 肇修曠典 于以藏之 忠烈之祠 爰命統帥 虔奠泂巵]
17) 통영충렬사 강한루 영모문(統營忠烈祠 江漢樓·永慕門)
통영충렬사(統營忠烈祠) 경내(境內)에 있는 강한루(江漢樓)는 헌종(憲宗) 6년(AD 1840) 이충무공(李忠武公)의 8대손인 이승권(李升權) 제172대 통제사(統制使)가 충무공의 임란(壬亂) 때에 이룩한 승첩(勝捷)의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통영충렬사에 누각(樓閣)을 창건하고 조선 때의 시인 추금(秋琴) 강위(姜偉)에게 누각의 제호(題號)를 짓게 하고 현판(懸板)의 글은 영조(英祖) 때의 명필(名筆) 고동(古東) 이익회(李翊會)의 친필(親筆)로 쓰게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고증(考證)된 바는 없으며, 창건 후에 이면(裏面)에 영모문(永慕門)이라는 현판을 걸었으나 필자는 미상이다. 강한루(江漢樓)에서 "강한(江漢)"은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소호(召虎) [소목공(召穆公), 소공(召公) 석(奭)의 후손]에게 명령하여 회수(淮水) 남쪽의 오랑캐를 평정하도록 하였는데, 소호의 병사가 용감하고 그 무리가 무수하였으며, 명령을 내린 선왕과 명을 받아 오랑캐를 쳐부수어 공로를 세운 소호(召虎)가 서로 잘 화합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시경(詩經)의 제목이 "강한(江漢)"이므로, 충무공의 전공(戰功)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이름으로 판단된다. 창건한 지 70여 년이 지나 누각이 노후(老朽)되었으나 일제(日帝)의 강점하(强占下)라 간섭이 자심(滋甚)하여 보수(補修)하지 못하여 오다가 1915년 폭우(暴雨)로 드디어 훼철(毁撤)되고 말았다. 누각이 쓰러진 지 5년 후인 1920년 충무공을 숭모(崇慕)하는 이 지방의 유림(儒林)과 충렬사영구보존회(忠烈祠永久保存會)가 일어나 강한루(江漢樓)·영모문(永慕門) 신복건축(新復建築)을 위하여 보존회장 박응렴(朴應廉), 부회장 박태모(朴泰模), 원장(院長) 김정우(金正佑), 전서(全書) 및 족자(簇子) 발행인(發行人) 이영재(李永宰) 외 75名과 통영군민이 합심하여 모금(募金) 운동을 펼쳤다. 모금 방법은 이충무공 영정(影幀) 족자(簇子)4) 제작,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8권 합편(合編) 출판, 이충무공께서 당시 사용하시던 거북선 및 다른 물품, 각처 사원(祠院)과 비각(碑閣) 등의 사진첩(寫眞帖) 제작(製作), 이충무공 친필(親筆) 사진첩 제작 등 4건의 사업을 펼쳐 이의 판매 대금으로 강한루(江漢樓)·영모문(永慕門) 신복건축(新復建築)을 하려 하였으나 끝내 일제(日帝)의 강압(强壓)으로 복원(復元)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누각이 쓰러진 지 73년이 지난 1988년 정부에서 한무목조(韓武木造) 2층 다락식 와즙(瓦葺) 1동, 건평 20.4평으로 신축 복원하였다. 강한루(江漢樓)의 현판은 다행히 탁본(拓本)이 충렬사에 소장되어 있었고, 영모문(永慕門) 현판은 광복 직후 일본인이 세운 본원사(本願寺)7) 지하(地下) 창고에서 당시 청년단장 이정규(李廷圭)가 발견하여 충렬사에 보관해 왔다. 누각이 복원되자 당시 충렬사 이사(理事)로 있던 죽촌(竹村) 김문환(金文煥)이 누각의 상량문(上樑文)을 쓰고 강한루(江漢樓)라는 현판은 탁본 그대로 제작 각(刻)하여 걸고, 영모문(永慕門) 현판은 옛 것을 그대로 걸었다.
18) 통영충렬사팔사품(統營忠烈祠八賜品) / 옮긴 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뛰어난 무공이 전해지자 명나라 임금인 신종이 충무공 이순신에게 내린 8종류의 유물 15점이다. 동으로 만든 도장인 도독인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모두 2개씩으로, 충렬사에 보존되어 왔다. 1969년 현충사가 지어지자 도독인을 제외한 나머지 유물들은 1개씩을 그곳으로 옮겨놓았다. 현재 충렬사에는 도독인,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 8종류 8점만이 남아있다. 도독인은 손잡이가 달려있는 동으로 만든 도장이다. 도장을 넣은 함에는 ‘황조어사인’이라고 쓰여 있어, 중국 황제가 보낸 도장임을 알 수 있다. 호두령패는 나무로 만든 것인데, 사슴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표범 머리가 장식되어 있다. 귀도는 칼자루에 용머리와 귀신 머리가 장식되어 있는 칼로, 오동나무로 만든 칼집은 종이로 싸서 붉은 칠을 하였다. 참도의 칼자루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상어 껍질로 싸고 붉은 칠을 한 다음 소가죽으로 감았다. 독존기는 전쟁시 감독하며 격려하는 깃발이다. 남색 비단 바탕에 ‘군사가 적을 만났을 때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처단한다’라고 쓰여 있고, 깃대 머리에는 창이 꽂혀있다. 홍소령기는 군대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깃발인데, 홍색의 비단 바탕에 남색으로 영자를 붙였고 자루 끝에 창을 달았다. 남소령기는 홍소령기와 마찬가지로 군대의 명령을 전할 때 쓰는 깃발인데, 남색의 비단 바탕에 홍색으로 영자를 붙였고 자루 끝에 창을 달았다. 곡나팔은 구리로 만든 나팔로, 목이 구부러진 모습이라 곡나팔이라고 한다. 나팔 입은 퍼졌고 붉은 술을 달았다. 이순신의 사당인 충렬사에 보관되어 있는 이 유물들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높이 평가한 명나라의 황제가 보내준 것이고, 장군의 넋을 기리고 용기를 배울 수 있는 유물이다. 이 일련의 유물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명(明)의 수군도독진린(水軍都督陣璘)이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전공(戰功)을 명제(明帝)에게 보고하자 명(明)의 신종(神宗)이 장군에게 보내 준 물건들이다. 이 유물들은 계속 통영(統營) 통제영(統制營)에 보관돼 내려오던 것이다. 도독인(都督印)을 제외하고는 모두 1쌍씩이어서 그 중의 한 벌과 도독인(都督印)의 모조품(模造品)을 아산(牙山) 현충사(顯忠祠) 준공을 계기로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팔사품(八賜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도독인(都督印) 1개 동제(銅製)의 인(印)으로 높이 1.8cm, 길이 15.1cm, 너비 7.8cm, 높이 6.9cm이다. (2) 호두령패(虎頭令牌) 1쌍 길이 31.8cm, 너비 30.3cm 8릉형(稜形)이며 한쪽에는 검은 칠을 하고「령(令)」자를 새긴 다음 붉 은색으로 메웠고, 다른 쪽에는 분칠을 하고「대장(大將)」의 두 자를 썼다. 나무로 만들고 녹피(鹿皮)의 갑에 넣었는데 갑에는 표범을 그렸으며 역시 녹피(鹿皮)로 끈을 달았다. (3) 귀도(鬼刀) 1쌍 칼날 길이 83.3cm, 너비 7cm, 전체 길이 137.9cm 칼자루는 단목(檀木)으로 만들고 용두(龍頭)를 새겼다. 그 아래에는 귀모(鬼母)와 귀자(鬼子)를 새기고 모두 붉은 칠을 하였으며 용두(龍頭)에는 비늘을 나타내었다. 칼집은 오동나무로 만들고 종이로 싸서 붉은 칠을 한 다음 채색(彩色)으로 용(龍)의 비늘을 나타내었다. (4) 참도(斬刀) 1쌍 길이 180.2cm, 너비 6cm 칼자루는 상어 껍질로 싸서 붉은 칠을 한 다음 쇠가죽 오라기를 감았다. 칼집은 나무로 만들고 쇠가죽으로 싸서 붉은 칠을 하였으며, 은도금을 한 쇠로 장식을 물렸다. (5) 독전기(督戰旗) 1쌍 한 변 길이 101cm, 자루 길이 303cm 남색 비단 바탕에 붉은 비단으로「독전(督戰)」의 두 자를 오려 붙였고, 한가운데에는「범군임적불용명자처참(凡軍臨敵不用命者處斬)」이라고 썼다. 자루 끝에는 길이 45.5cm의 창을 꽂았다. (6)홍소령기(紅小令旗) 1쌍 한 변 길이 84.8cm, 자루 길이 303cm 붉은 비단 바탕에 남색 비단으로「령(令)」자를 붙였다. 자루 끝에는 길이 24.2cm의 창을 꽂았다. (7) 남소령기(藍小令旗) 1쌍 한 변 길이 84.8cm, 자루 길이 303cm 홍소령기(紅小令旗)와 같은 형식이나 다만 남색 비단 바탕에 홍색 비단으로 「령(令)」자를 붙였다. (8 곡나팔(曲喇叭) 1쌍 길이 218.2cm, 입지름 25.7cm 구리로 만들었는데, 나팔의 입은 퍼졌으며 네마디로 되어 있다. 붉은 술을 달았고, 목이 구부러져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19) 통제사(統制使) 이 충무공(李忠武公) 충렬사비(忠烈祠碑) 뒤에 쓰다. /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조대왕은 위로 황제의 위덕(威德)을 힘입고 아래로 공의 충의(忠義)에 의지하여 그 중흥(中興) 위업(偉業)이 고금에 빛났으니, 진 원제(晉元帝)와 송 고종(宋高宗)도 말할 것이 못 된다. 공이 몰(歿)한 뒤에 상(上)이 이 문충공(李文忠公 문충은 이항복(李恒福)의 시호)을 명하여 사당을 건립하게 하시므로 이공이 비문(碑文)까지 지어서 그 글이 만력(萬曆) 갑인년(1614, 광해군6)에 완성되었는데, 이번에 민후 섬(閔侯暹)이 비로소 돌에 새겼고 이수(螭首 비(碑)의 머릿돌)와 귀부(龜趺 비의 받침돌)도 갖추어졌다. 대저 갑인년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1갑자(甲子)가 지나고도 7년째 되었다. 그동안에 몇 사람의 통제사가 갈렸으나 지금에 와서야 그 일이 완성되었으니, 일의 더디고 빠름에 운수가 있다고 하지만, 만약 민후(閔侯)의 의리에 대한 무궁(無窮)한 사모함이 아니었던들 어찌 이에 미칠 수 있었으랴. 참으로 가상할 일이다.그윽이 생각건대, 진 원제와 송 고종은 조 예주(祖豫州 진(晉)의 예주 자사(豫州刺史) 조적(祖逖)을 말함)와 악무목(岳武穆)을 제대로 쓰지 못하여 마침내 천고(千古)의 한(恨)이 되었으나, 우리 선조는 능히 공을 쓰시어 마침내 공으로 하여금 뛰어난 공업을 이루게 하였으니, 공이야말로 임금을 만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문충공이 없었다면 누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이를 이처럼 천하 후세에 밝혔겠는가. 민후 또한 그 군대의 위용(威容)을 확장시켰다고 이를 만하다. 숭정 신유년(1681, 숙종7) 입추일(立秋日)에 송시열은 쓴다.
[宣祖大王上憑皇威 下仗公義 其中興偉績 振耀今古 晉元 宋高不足稱也 公歿 上命文忠李公 建立廟宇 李公仍作牲繫文 文成在萬曆甲寅 今統使閔侯暹始刻文於石 螭首龜趺具矣 夫自甲寅至今甲子 一周而又七年矣 其間更幾統使 而乃今卒其事 雖其遲速有數 而倘非侯慕義無窮 烏能及此 殊可尙也 竊惟晉元 宋高 不能用祖豫州 岳武穆 遂爲千古恨 我聖祖則能用公 卒使之卓然有成 公於是抑不可謂不遇矣 然若不有文忠公 其孰能對揚揮發如此哉 閔侯亦可謂張其軍矣 時崇禎重光作咢立秋日 宋時烈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