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여자, 노을에 닻을 내리다
노을이 물 위에 내려앉았다. 하루의 끝자락에서 하늘은 마지막 열정을 쏟아내듯 붉게 타오른다.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잔잔한 수면에는 주홍빛과 보랏빛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있다. 오래된 나룻배 한 척이 물 위에 떠 있다. 나는 그 배에 앉아 저물어 가는 세상을 바라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바람은 느리고 물결은 순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은 어쩌면 목적지를 잊어버린 순간에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배는 낡았다. 군데군데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고, 나무의 결마다 지나온 시간이 새겨져 있다. 한때는 거친 물살을 헤치며 누군가의 삶을 실어 날랐을 것이다. 기쁨에 들뜬 사람도, 슬픔을 감추지 못한 사람도 이 배를 탔으리라. 그러나 배는 누구의 사연도 묻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물 위에 몸을 맡기고 묵묵히 건너갔을 뿐이다. 문득 우리의 인생도 한 척의 배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날에는 빨리 건너가는 것이 잘 사는 일인 줄 알았다. 남보다 앞서야 했고, 뒤처지지 않으려 애썼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고, 잠시 멈추는 일조차 용기가 필요했다. 그 시절의 나는 노을보다 일출을 좋아했다. 떠오르는 태양에는 희망이 있었지만 저무는 태양에는 왠지 쓸쓸함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세월은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는 안다. 떠오르는 해가 아름답듯 저무는 해 또한 눈부시다는 것을.
나룻배에 앉아 두 손을 포갠다. 손등에는 지나온 계절이 머물러 있다. 젊은 날의 매끄러운 손은 아니지만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문을 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잡았던가. 때로는 눈물을 닦았고, 때로는 원고지 위에 삶의 이야기를 적었다. 손끝에 남은 세월이 새삼 고맙다. 주름은 잃어버린 젊음의 흔적이 아니라 살아온 날들의 기록이다.
노을이 짙어질수록 물빛은 더욱 깊어진다. 이상한 일이다. 태양은 점점 낮아지는데 세상은 오히려 화려해진다. 빛이 사라지기 직전 가장 찬란한 색을 남기는 자연의 섭리가 경이롭다. 사람의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젊음이 지나갔다고 아름다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래 살아낸 사람에게는 젊은 날에는 얻을 수 없는 빛이 있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 용서할 줄 아는 지혜,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여유가 그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길 위의 여자였다. 낯선 풍경을 만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계절의 표정을 글로 옮겼다. 길은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찾는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 물음에 답하려고 수많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르다. 발걸음을 멈추고 배에 앉으니 그동안 미처 듣지 못했던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참 많이도 걸어왔구나.’
그 한마디가 가슴에 오래 머문다. 잘한 일보다 아쉬운 일이 먼저 떠오르던 날도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앞에서 후회했고, 붙잡을 수 없는 인연 앞에서 마음을 다쳤다. 그러나 지나온 삶을 다시 펼쳐 보니 어느 한 장면도 헛된 것은 아니었다. 기쁨은 나를 웃게 했고, 슬픔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게 했다. 실패는 겸손을 가르쳤으며 기다림은 마음의 깊이를 더했다. 인생은 완벽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배는 물결에 따라 가볍게 흔들린다. 나는 그 흔들림을 거스르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중심을 잡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흔들려도 괜찮다. 흔들림이 곧 침몰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때때로 흔들리는 일이며, 그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 삶의 지혜일 것이다.
멀리 작은 배 한 척이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저 배에도 누군가의 하루가 실려 있을까. 저마다 다른 물길을 지나왔어도 우리는 결국 같은 저녁을 맞는다. 인생의 속도는 달라도 저무는 시간 앞에서는 누구나 한 사람의 여행자가 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멀리 왔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마음에 담고 왔느냐일 것이다.
나는 다시 노을을 바라본다. 붉은빛이 얼굴에 스며든다. 문득 오늘의 내가 마음에 든다. 젊은 날의 나보다 조금 느리고, 조금 조심스러워졌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한결 따뜻해졌다. 모든 것을 가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며, 모든 길을 끝까지 걸어야 성공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때로는 멈추어 앉아 한 줄기 바람을 맞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노을은 서서히 빛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끝이라고 부르지 않으려 한다. 해가 저문 자리에는 별이 뜨고, 어둠이 깊어진 뒤에는 또 다른 아침이 찾아온다. 삶 역시 그러하다. 한 시절이 지나가면 새로운 시절이 열린다. 젊음의 계절이 떠난 자리에 성숙의 계절이 찾아오고, 열정의 언어가 잦아든 자리에는 사색의 문장이 자란다.
오늘 나는 노을에 닻을 내린다. 더 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다. 지나온 날들을 원망하지 않고, 다가올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남은 생을 내 속도로 건너가고 싶다. 아직 쓰지 못한 이야기가 있고, 만나지 못한 풍경이 있으며,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은 따뜻한 문장이 남아 있다.
바람이 나룻배의 가장자리를 스친다. 물결 위로 마지막 햇살이 길게 누웠다. 나는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인생이라는 긴 항해에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 있다. 행복은 먼 포구에 도착해야 얻는 선물이 아니라, 건너가는 동안 마음에 깃드는 작은 평화라는 사실이다.
이윽고 산 너머로 해가 모습을 감춘다. 붉었던 하늘이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든다. 나는 서둘러 배에서 내리지 않는다. 어둠이 찾아오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싶다. 빛나는 순간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길 위의 여자는 오늘도 여행 중이다. 다만 이제는 세상을 향해 노를 젓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향해 천천히 물길을 연다. 노을이 사라진 자리에도 물은 여전히 흐른다. 오래된 나룻배는 그 물 위에 조용히 떠 있다. 나 역시 그렇게 남은 시간을 건너갈 것이다. 화려한 출항도, 요란한 귀항도 필요 없다. 삶이 허락한 물결에 몸을 맡기고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가면 그만이다. 저무는 하늘 아래에서 나는 깨닫는다. 인생의 황혼은 빛을 잃어 가는 시간이 아니라, 살아온 모든 계절이 하나의 빛깔로 완성되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오늘, 나는 그 빛 속에서 가장 평온한 나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