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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방 서예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古方
동방 5현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2)
- 회재 이언적의 삶을 생각하다
지난 시간에는 양동마을이 여강 이씨와 경주 손씨의 두 성씨의 가문이 공존하는 두 가문의 500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마을이란 것을 알아보았다. 이번 시간에는 양동마을이 그 전통성을 지키며 오래도록 보존되고 지켜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한 회재 이언적의 삶과 그의 학문적 성취와 철학을 돌아보면서 소년 시절 천재에서 사화를 겪고 영남학파의 학통을 잇고 문묘에 동방 5현으로 배향되기까지의 삶을 중심으로 양동마을의 나머지 공간들을 돌아보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우선 회재 이언적 앞에 붙는 동방 5현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간단히 설명하자.
동방 5현이란?
동방 5현은 동방의 다섯 현자, 즉 우리나라에서 배출해낸 현자로 일컬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다섯 현자를 뽑는 일에서 영남학파들은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바로 회재 이언적을 집어넣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남인인 영남학파의 이런 의견은 기호학파의 서인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이이는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이 직언을 통해 더 많은 유림을 구하지 못한 것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언적은 원칙을 중요시한 보수적 인물이었고 아무리 전횡을 일삼는 윤원형일파라 할지라도 그들과 강하게 맞서는 강경책으로 조광조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온건적 변화를 유도해 나가는 방법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인보다 다수를 차지하고 주류였던 서인세력은 영남학파의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등은 동방 3현으로 추대하는 데 합의했지만 이황, 이언적 등에 대해서는 논란을 키워나갔으며 최초에 동방 3현의 추대된 후에 동방 5현에 이언적이 포함되도록 영남의 유림들은 서인세력과 백년이 훌쩍 넘도록 대립과 갈등을 해 최종적으로 거두어 낸 결과이다. 서자 이전인과 그 후손들이 적서차별의 엄혹한 벽을 넘어 이루어낸 명예회복이자 고난끝의 승리가 바로 동방 5현 중 일인으로 배향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묘에는 공자와 같은 중국의 성현들만이 아니라 동방 18현이라 하여 우리나라에서 배출한 유학의 현자들이 배향되어 있다. 동방 5현은 늘 소수파였고 재야였던 영남의 유림들이 조정에 강하게 압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킨 일이라 할 수 있다.
문원공이란 시호를 받고 의정부 영의정 벼슬을 추증받을 때까지 그는 죽어서도 죽지 못한 죽음을 형벌로 받았다.
여하튼 여러가지 우여곡절과 난항을 거듭한 끝에 문원공이 되고 동방 5현으로 배향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 이유를 회재 이언적의 삶을 통해서 이해해 보도록 하자.
이언적의 묘 그리고 기대승이 썼다는 이언적 신도비
이언적의 묘는 포항 연일읍에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언적이 사화로 유배된 상황에서 강계에서 죽고 그를 연일읍에 묻었는데 왜 양동마을이나 옥산서원 독락당이 있는 곳이 아닌 이곳 포항 연일읍에 그의 묘소가 있는가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아마도 이언적의 후손들은 양동마을에서 죄인의 후손 신분을 피하기 위해 연일읍으로 모두 옮겨가게 되면서 경주로 운구해온 시신을 이곳 연일읍에 묻게 되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회재 이언적의 영정이 있을까 하여 찾아봤지만 회재 이언적의 영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언적(李彦迪, 1491년 ~ 1553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현신(賢臣)이었다. 이름은 원래 이적(李迪)이었는데, 중종의 명령으로 “언”자를 덧붙였다. 호는 회재(晦齋), 자계용(紫溪翁)이고, 자는 복고(復古)이다. 경주 출생이며 여주(驪州)이다.[1]
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인동현감, 사헌부장령(掌令), 밀양부사(密陽府使) 등을 지내고 선정을 베풀어 명관으로 이름났으며, 중종 25년에는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당시 척신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다가 심언광(沈彦光) 등의 모략으로 물러나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중종 32년(1537) 김안로 일파가 쫓겨난 뒤에 종부사첨정(宗簿寺僉正)으로 복직하여 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고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어 선치(善治) 했으므로 경내(境內)가 평안하였다. 그뒤 수천언(數千言)의 소를 올려 국가대본(國家大本)과 정치강령을 논하여 왕의 찬탄을 받고 가선대부를 거쳐 자헌대부로 승진한 뒤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였다. 그뒤 1545년(인종 1년)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 되었다.
명종 즉위 후 원상(院相)의 한사람으로 서정을 주관하였고 판의금부사로 을사사화 당시 체포된 윤임 일파를 위관으로 추국하였으나 그도 다음해인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귀양갔다가 1553년(명종 8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이황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주자가례에 처음으로 정통했던 그는 예학서를 통해 후대의 예학에 영향을 미쳤다. 주자가례를 고집한 그는 자신의 서자 이전인에게 가통을 넘기지 않고, 5촌 조카 중 한명인 이응인을 양자로 입양하여 가통을 전수했다. 그뒤 이전인의 아들 이준이 이탕개의 난 진압에 기여한 공로로 서얼 허통을 하게 된다.
그럼 양동마을에서 회재 이언적의 흔적이 담긴 무첨당부터 여행을 시작하도록 하자.
종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위주로 한 건물답게 제사에 참가하는 종친들 한명의 한명의 일인 소반들을 선반에 올려놓은 모습이 인상적이고 대청에서 바라보이는 후원과 마당 풍경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무첨당 (더럽힘이 없는 집)
조선시대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 회재 이언적(1491∼1553)선생 종가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세운 건물이다. 지금은 종손인 이지락 선생이 종손으로서 관리를 하고 있다. 이곳은 회재 이언적의 부친 이번이 살던 곳이라 하며 여강 이씨 대종가이며 사랑채, 안채 별당채 중에서 무첨당은 별당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 이의윤의 호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이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루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며, 뒤쪽과 옆면은 벽을 쳐서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자형을 띠고 있고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배치하고 있다.
이 건물의 기능은 상류주택에 속해있는 사랑채의 연장 건물로 손님접대, 쉼터, 책읽기를 즐기는 따위의 여러 용도로 쓰이던 곳이다.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별당건축의 기능에 충실하게 지은 건축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무첨당 안채 건물
무첨당에는 여러 편액들이 걸려 있는데 물애서옥은 중국의 사신 조광이 조선에서 학문에 이름높은 학자가 제일 많은 곳을 찾아 이곳 양동마을에 들러 물봉언덕의 학문하는 집이란 뜻으로 크게 감명받아 써놓고 간 편액이라고 한다.
무첨당에서 보면 물봉고개란 곳이 있는데 이 고개의 이름은 조상에게 욕됨을 입히지 않음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과연 회재 이언적은 조상들에게 욕됨이 없는 삶을 산 것일까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한다.
좌해금서는 흥선대원군이 대원군이 되기 전에 이 곳 양동마을에 잠시 머무르면서 쓴 편액이라 전해지는데 도난을 당해 최근에 모작 편액을 걸어두었다 한다. 좌해는 왼쪽에 바다가 있다는 뜻이니 영남지역을 말하고 금서는 거문고와 서책을 말하여 영남지역 선비들의 풍류가 드높음을 중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글이라 한다.
그밖에 세일헌 편액과 오체서실 편액 등이 있다.
무첨당은 독락당에서 말년을 은거하며 보내기 전 회재의 부친 이번이 별당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며 이언적의 친자가 아니지만 양자로 들였던 이응인이 제사를 지내는 계후자로서 양동파의 후손이 되고 회재의 맥을 잇고 독락당과 옥산서원을 세우는 데 기여하는 친자이며 서자였던 이전인은 옥산서원 중심의 옥산파의 후손으로 분류되어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잇는다. 김안로와의 대립으로 귀향했을 때 회재 이언적은 자신의 행보가 여강이씨 전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무첨당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락당으로 가서 거기서 두번째 부인에게서 서자 이전인을 얻고 살게 된다. 이 두번째 부인이 늙으신 부모를 공양한 것으로 인해 회재는 무척 아꼈다고 한다.
보기엔 상류층의 화려함의 극치를 누리고 있는 건물인 것 같지만 회재 정도의 이력을 가진 사람에겐 이 정도가 그렇게 크고 화려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회재는 양동마을의 이 무첨당에 곡식을 담아두는 큰 성주독을 마련해 두었는데 춘궁기가 다가오면 성주독의 곡식을 퍼내어 약 100kg의 쌀로 떡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정도로 이웃과 함께 하는 철학을 펼쳤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대성헌
18세기 중엽에 세운 목조 가옥으로, 안채·사랑채·행랑채의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ㄱ자집 형태이고, 사랑채와 행랑채는 일자형이며, 3동의 건물이 모여서 전체적으로는 ㅁ자집이다. 안채·사랑채·행랑채의 건물은 모두 소박하고 간결한 구조이다.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소로받침 없이 납도리를 받쳤다. 사랑채의 대청 앞에는 2칸에 8짝문을 샛기둥 없이 달아, 4짝씩 접어 들어올리게 하였는데, 이러한 건축양식은 다른 건축물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구성이다.
스물셋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거치며 중종의 밑에서 목민관으로서의 꿈을 키웠지만 권력 남용을 밥먹듯이 하고 정적을 공포정치로 짓눌렀던 김안로에 반대하다 고향으로 낙향했지만 김안로가 실각하고 쫓겨나 사사당하자 다시금 조정에 등용해 직제학 등을 해내던 이언적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친다. 바로 윤원형 일파의 을사사화이다.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윤원형의 의도에 반기를 드는 꼴이 되어 자신이 관직을 물러나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소윤의 영수이며 실권자였던 윤원형과의 대립은 그가 과연 정치를 통해서 주자의 도리를 과연 조선사회에서 관철시킬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회의와 번민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김안로에 이어 윤원형 일파에 맞선 것은 대대로 이어지는 권문세가와 선을 긋고 모난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언적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늘 논란의 핵심이 된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리론을 집대성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지만 권문세가들의 권력남용과 전횡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일까? 난 독판을 치는 윤원형같은 권문세가들에 의해 선비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면서 정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왕을 보좌하고 격군하는 자기가 만든 논리가 매우 무력하다는 것도 절실히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영귀정의 대문인 이호문
영귀정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세운 정자로 이후 소실된 것을 1778년(정조 2) 후손들이 중건하였고, 세월이 흐르며 심하게 퇴락하여 1925년에 재차 중건하였다. 대문채인 이호문(二呼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영귀정(詠歸亭)이라는 편액이 걸린 본채가 있다. 정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좌측 2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다. 마루를 높이 띄우고 전면 전체에 계자난간을 둘러 뒤쪽 툇마루를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다. 현재 이언적 후손들의 모임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 벼슬 생활 중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머물며 심신을 가다듬던 공간이라 전해지고 있다.
양재역벽서사건 유배생활의 시작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경원대군이 즉위하는 한편,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자, 소윤 세력은 역모를 씌워 대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사화로, 그 과정에서 사림(士林)계열의 인물들까지도 많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윤 세력이 자신들에 대한 정적으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잔존 인물들을 도태시키려고 일으킨 것이다.
1547년(명종 2) 9월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다.
윤원형·윤인경(尹仁鏡)·이기·정순명(鄭順明)·허자(許磁) 등은 이전의 처벌이 미흡하여 화근이 살아 있는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수(李若水)를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정황(鄭熿)·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김만상(金彎祥)·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이천계(李天啓)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소윤이 몰락한 후 대부분 복권되기도 하지만 이언적은 유배지인 강계에서 죽었다. 복권과 명예회복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이응인, 이전인 중에서 이전인은 서자라는 이유로 경주 향교나 서원 등에서 배척될 수밖에 없었다. 옥산파 후손들이 서자의 후손이라는 굴레를 쓰지 않았다면 회재 이언적의 명예는 훨씬 전에 회복되지는 않았을까?
설천정사 정문 향양문
설천정사
조선 중기의 문신 설천(雪川) 이의활(李宜活)이 1602년에 건립한 정자로, 200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좌측 2칸은 대청, 우측 1칸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 앞쪽 마루를 대청마루보다 높게 설치하였으며 대청 뒤쪽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아 조성하였고 둥글게 다듬은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이의활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손자로,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호연(浩然)이다.
여강이씨 일족은 회재 이언적으로 인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없었고 이언적의 후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동파의 후손들이든 옥산파의 후손들이든 회재가 복권되고 정당한 평가를 받기 전까지 오랫동안 영남학파의 학통을 잇고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미친 회재 이언적의 후손이라는 것은 명예라기보다는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딱지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경산서당
육위정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4대손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이 분가하여 살던 곳으로, 1591년(선조 24)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중앙에 건립되었다. 이후 이곳에서 맏손자의 6형제가 태어나 그들이 번성하라는 뜻에서 육위정(六韡亭)이라고 불렀다. 정면 4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좌측 2칸은 대청, 우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마루를 높이 띄우고 전면에 전체적으로 난간을 설치하여 대청 뒤쪽 쪽마루를 통해 출입한다. 현재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으며, 건물 뒤쪽 부속채에도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양재역벽서사건 정미사화, 을사사화 등으로 사화란 붕당정치 최대의 폐해에 맞닥뜨려 학문적 동지와 친구와 선후학 등을 잃었을 이언적은 아마도 현실을 잠깐 피해 더욱 더 학문적 성취에
더 힘을 쏟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단칠정론의 학문적 탐구를 시작하여 퇴계 이황이 그 뒤를 잇게 된 것도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정치적 정신적 시련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수졸당
양동마을 중앙 산등성이의 중간지점 동쪽 언덕받이에 있다. 1620년(광해군 12)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4대손 이의잠(李宜潛)이 건립하였고, 그후 6대손 이정계가 증축하였다. 수졸당이라는 당호(堂號)는 이의잠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출처] 양동 수졸당 [良洞守拙堂 ] | 네이버 백과사전
양졸정
양졸당(養拙堂) 이의징(李宜澄:1568∼1596)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1734년(영조 10)에 세운 정자로,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8년에 중건하였다.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건물 뒤쪽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을 높게 쌓아 조성하였으며 낮은 초석 위에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현재 뒤뜰에 딸린 부속채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
이의징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손자로 본관은 여강(驪江), 자는 형연(炯然)이다. 1568년(선조 1) 경주 양동에서 태어나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음직으로 승사랑(承仕郞)에 올랐다.
거림식당
청국장찌개 된장찌개로 양동마을에서 이미 소문난집 거림식당 가서 꼭 먹어봅시다. ㅋㅋ
안락정
양동마을 어귀인 초등학교의 맞은편 언덕 위 산중턱에 자리한 월성손씨(月城孫氏) 문중의 서당으로, 여강이씨(驪江李氏) 문중의 공용서당 양동 강학당(良洞講學堂:중요민속자료 83)과 쌍벽을 이루는 건물이다.
당초 1776년(영조 52)경에 월성손씨 문중에서 서당으로 건립한 것인데, 헌종 때 수통정인 손영순을 위하여 후손들이 이 건물을 매입하여 정자로 삼았다고 한다.
[출처] 양동 안락정 [良洞安樂亭 ] | 네이버 백과사전
이향정
1695년(숙종 21)에 건립한 주택으로 온양군수를 지낸 이향정(二香亭) 이범중과 그의 맏아들 이헌유가 살던 집이다.
양동마을의 안골로 들어가는 동구 초입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아래채·곳간채로 이루어져 전체 구조는 튼口자형으로 배치된 집이다. 토담으로 된 담장을 들어서면 사랑채 동단에 있는 중문이 마주 보인다.
안채는 북측 꺾임부에 부엌을 두고 남측으로 안방 2칸, 건넌방 1칸을 두어 정면이 6칸이며, 안방에서 건넌방까지 툇마루를 두었다. 부엌의 서측 아래쪽에는 2칸의 광과 1칸짜리 방을 들였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5칸으로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두고 대청 좌우로 방을 두었는데, 사랑건넌방의 전면과 측면 마루는 퇴를 달아 확장하고 끝에는 아(亞)자형 난간을 돌려 누마루 같은 정취를 보인다. 아래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좌우에 2칸의 광을 두고 중앙 2칸은 흙바닥 헛간을 이루고 있다.
[출처] 양동 이향정 [良洞二香亭 ] | 네이버 백과사전
강학당
여강이씨(驪江李氏) 문중의 공용서당으로 월성손씨(月城孫氏) 문중의 서당인 양동 안락정(良洞安樂亭:중요민속자료 82)과 쌍벽을 이루는 건물이다. 성주봉 언덕에 있는 양동 심수정(중요민속자료 81) 서쪽에 자리잡고 있어 북촌을 바라다보는 위치에 있다. 건립연대는 1870년경으로 추정되며, 후학들이 계를 모아 건축하였다고 한다.
서당과 행랑채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당의 평면구성은 ㄱ자집 형태로 동측 꺾이는 곳에 안방을 두고 서측으로 대청 2칸, 건넌방 1칸이 배열되어 정면은 4칸이 된다. 안방의 북측으로는 마루 1칸과 장판고 반 칸을 두었다. 막돌흩은층쌓기 기단 위에 방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출처] 양동 강학당 [良洞講學堂 ] | 네이버 백과사전
심수정
양동마을에 들어서면 우측 성주봉 등성이에 있는데, 맞은편 북촌에 자리잡은 향단(香壇:보물 412)에 딸린 정자이다. 건축연대는 1560년경으로 여강이씨(驪江李氏) 문중에서 세웠다고 한다. 철종 때에 화재로 전소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17년경에 본래의 모습대로 중건·복원한 것이다.
정자와 행랑채로 구분되는데, 2동 모두 ㄱ자형 평면구성이다. 정자는 정면 5칸인데 북측 꺾임부에 대청을, 동남측 끝에 2칸의 방을 두고 서남쪽으로는 방과 마루를 1칸씩 배치하였다. 마루부분은 누각이고, 난간마루 둘레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였다. 행랑채는 방, 마루, 방, 부엌이 1칸씩 연결되고, 부엌을 서북쪽으로 연장하고 광 1칸이 달려 있어 ㄱ자형 평면구성이다.
[출처] 양동 심수정 [良洞心水亭 ] | 네이버 백과사전
개인적으로 양동마을의 여러 가옥들 중 심수정이 가장 멋드러진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함허루, 삼관헌 등의 편액 등도 함축적으로 공간의 의미를 더한다.
이상으로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는 양동마을의 주요 건물들을 한번씩 둘러보며 회재 이언적이 김안로나 윤원형 같은 당대 권력가들과 맞선 정적으로 낙인돼 오랜 고초 끝에 유배 생활 중에 강계에서 죽어 죽은 후에도 죽음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 뒤늦게 동방 5현으로 배향될 수 있었던 과정까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양동마을은 500년간의 손씨와 이씨 집성촌으로서 회재 이언적의 할아버지 때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두 집안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문화유적으로서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이제 세계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오랫동안 지키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자산임을 깨달았기를 바라며 다음 편에서는 옥산서원과 독락당으로 옮겨 양동마을에서 다루지 못한 이언적의 삶과 철학을 더 이어서 해보도록 하겠다.
- 다음 편에 계속
출처-http://theplace2012.tistory.com/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