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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23강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말씀 / 마가복음 14:27-72
요절 / 마가복음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오늘은 마가복음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동안 마가복음 통해 은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친밀한 관계인지 잘 나타납니다.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더불어 연약한 제자들을 향한 소망을 보게 됩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들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이신 예수님을 쳐서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내버려두시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그러나 목자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갈릴리에 먼저 가셔서 기다리고 있다가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을 계획까지도 미리 말씀해 주십니다. 또 주를 버리지 않겠다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될 것도 말씀해 주십니다.
이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네’라는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 장소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 앞에서 심히 슬퍼하며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4).” 예수님은 지금까지 이처럼 힘든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항상 당당하고 스피릿 충만하셨습니다. 살기등등한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는지 알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죽임당할 것을 반복해 가르쳤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오늘따라 너무 연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잠시 후면 체포당합니다. 채찍에 맞고 발길질을 당하고 심한 고초를 겪게 됩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조롱과 수치를 당합니다. 두 손, 두 발에 굵은 대못이 박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됩니다. 몸은 찢기고 뼈는 으스러지게 됩니다. 온몸에서 피가 흐르며 진이 다 빠져 결국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는 분이지만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 이렇게 고난당합니다. 더구나 마음 다해 도왔던 제자들은 흩어지게 됩니다. 그토록 마음 다해 병 고쳐주고 귀신도 쫓아내 주고 먹여주었던 사람들도 배신하고 다 등 돌립니다. 누구 한 사람 예수님 편이 되어주는 사람 없습니다. 무엇보다 일시적으로는 사랑하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아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철저히 외톨이입니다.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감당하기 버거운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졌기 때문에 십자가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연약한 모습을 제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예수님은 이 고통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눠질 수 있을까 제자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합니다.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래서 강한 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솔하게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이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완벽하면 거리감이 느껴질 텐데 예수님도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많은 사람이 자기를 이해해 줄 누군가를 학수고대합니다. 아내는 자신을 이해해 줄 남편을 원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도 자신을 이해해 줄 아내를 원합니다.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서운해하고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100%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가장 가까운 부부간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시고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우리를 이해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과 연약함, 실패와 좌절을 이해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이해하시고 합당하게 인도하시는 주님께 나아가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35,36절을 보십시오.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조금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의 이 기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진솔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 ‘이 잔’은 ‘십자가 고난의 잔’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어야 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제자들을 모아 놓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가르치신 예수님의 체면은 뭐가 될까요? 더구나 제자들이 이를 옆에서 다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치 보지 않고 고뇌와 번민, 두려움과 불안을 다 하나님께 쏟아내셨습니다. 아니 제자들을 굳이 데려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다 듣게 하셨습니다. “아빠, 저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살려주세요!”
여러분은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께 한 기도라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는 ‘기도’하면 뭔가 거룩하고 거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속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기도 대상이 ‘아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뭘 자꾸만 하라고 요구만 하시는 그런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아빠’는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깊이 신뢰하고 친밀함 가운데 그 품에 안기면서 ‘아빠’ 그럽니다. ‘아버지’하면 무거워 보이고 가까이 하기에 조심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아빠’에게는 뭐든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속에 있는 대로 힘들면 힘들다, 괴로우면 괴롭다, 속 터놓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 중에는 종종 ‘아빠’는 모르고 ‘아버지’만 알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회초리 든 엄격한 선생님, 군대 유격 훈련장의 빨간 모자 쓴 조교 같은 아버지만 아는 분이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를 그렇게 인식하게 된 데는 저마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이렇게 굳어져 버린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도 이런 분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나도 모르는 사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하는 고아처럼 행동합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도 자기 마음에만 꾹 담아두고 아무에게도 쏟아놓지 못합니다. 겉으론 강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힘들 때 찾아가 쏟아내고 위로도 받고 책망도 받고 격려도 받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두려우면 두렵다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 대상이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아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에 점점 물꼬가 트이고 여명이 밝아옵니다. 아빠 하나님이 그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시고 든든한 백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빠 하나님은 나를 가장 잘 알고 나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영접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 아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고민과 슬픔, 여러 문제를 있는 그대로 토로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무조건 하나님을 찬양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정답만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고뇌를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털어놓습니다. 시편 38편 6-8,10절을 보면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우리는 ‘다윗’하면 골리앗을 물리친 용사, 수많은 대적을 물리친 용장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다윗도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연약함을 깊이 인정할 뿐만 아니라 아빠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친밀함 가운데 진솔하게 나아가야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여기까지 나아가는 것도 참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처음엔 제발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세요” 기도하셨습니다. 그때는 자신이 당할 고통이 너무나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눈에 더 큰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해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또 아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기에 십자가 고난을 통한 부활의 영광까지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기 생각, 자기 소원을 부인하셨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Yes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에 대해서는 항상 Yes하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No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본성대로 자연스럽게 No가 튀어나옵니다. 사탄은 할 수만 있는 대로 하나님께 No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러나 아담이 사탄의 말을 듣고 따랐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의 열매를 맺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십자가 지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부추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이 겟세마네 기도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아픔이 담겨있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참으로 귀한 순종의 기도입니다. 진솔한 아픔과 심적 고민이 담겨있기에 예수님의 기도는 현실적이면서도 의미 깊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나의 원’은 나의 욕심, 나의 정욕을 위한 것이라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의 원’이 무엇인지 알아갑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아 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대로 사는 삶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기도 가운데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기도 하십니다.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성령께서 우리 생각을 사로잡아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또 우리 하나님은 주위의 상황과 형편, 또는 사람들을 통해 주님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고자 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자세가 먼저 되어져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정욕에 사로잡힌 자에게 하나님의 뜻이 보일 리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져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면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소원보다 자기 소원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욕심과 정욕을 따라 자기 원대로 합니다. 우리의 소원이 나에게 가장 좋을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소원은 좁고 편협하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넓고 원대하고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하고 가장 좋고 확실합니다. 사람이 자기 원대로 할 때는 영적 세계의 비밀을 알 수 없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놀라운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신령한 은혜들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 욕심과 정욕을 앞세우기보다 예수님처럼 먼저 하나님의 크신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기도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돌아오셨을 때 자고 있는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7b,38).” 예수님은 자고 있던 베드로를 깨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도 기도하고는 싶었던 것 같은데 쏟아지는 졸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의 연약함을 이기기 쉽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을 떠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고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오셨을 때 제자들은 아예 곯아떨어졌습니다. 성경은 몸이 피곤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설명하는데 우리말로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것은 자기 연약함을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뜻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피곤합니다. 아직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깨어 기도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에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깨어 기도합니다. 육신이 연약한데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를 져야 하니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적 고민이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나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고민하고 심적 갈등하는 시간인데 그런 시간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해지고 충만히 임해서 담대해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이를 보면 세 시간 정도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제자들은 세 시간 정도 곯아떨어져 숙면을 취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지금껏 잤는데 뭘 또 자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이 장난하는 걸까요? 지금은 자고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자고 쉬라’는 이 말씀은 안식을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가룟 유다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보낸 군병들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배반의 키스를 신호로 달려들어 예수님을 잡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예수님이 말씀으로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양처럼 연약해 싸울 수 없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끌려가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연약한 양이 아니라 사람 구실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제자들 다 도망갔을 때 예수님이 심문받는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뜰에 있을 때 대제사장의 여종이 불쬐고 있는 베드로를 빤히 쳐다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기억해 내고 말합니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잖아.” 베드로는 부인하며 슬그머니 피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따라온 여종에게 베드로는 또 한 번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예수님과 같은 당이라고 할 때는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극구 부인합니다.
72절을 보십시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이때가 연약하여 자고 쉬고 있던 베드로가 드디어 깨어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때는 엄청 깨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고 있는 때요, 쉬고 있는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깨어 있다’는 것은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고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초로 나 자신과 처한 상황들을 살펴보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으로 깨어나니 드디어 통곡했습니다. 가슴을 쳤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새기고 붙드는 것이 아픔이 있고 괴로울지라도 그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째 와서 하신 ‘자고 쉬라’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주님은 자고 쉬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 용서할 수 없는 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잘 자고 쉬고 나면 그다음에는 잠에서 깨어나 예수님을 잘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연약함을 반복할지라도 깨닫고 나면 예수님을 따라 깨어 있는 제자들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때를 소망하면서 깨어 기도하는 모습을 제자들이 곁에서 보도록 하셨고 세 번이나 다시 오셔서 깨워주셨습니다. 숫자 ‘3’은 지속을 의미합니다. 지속적으로 깨워주고 도와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양들이 흩어지리라’ ‘세 번 부인하리라’ 말씀으로 예고도 해주셨습니다.
연약함 가운데 자고 쉬고 있던 베드로가 마침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사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어 있는 사람이 조금씩 되기 시작합니다. 깨어 기도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나의 연약함이 부끄럽고 때로는 가슴 아플 수 있습니다.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괴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주십니다. 깨어 기도하는 주의 제자로 서도록 도와주십니다. 더 나아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도움 받아 깨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복된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