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과 고난과 슬픔에 대하여 우리는 살다보면 형통한 때도 있지만,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은 나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한 경우도 있지만, 천재지변이나 사건 사고 등과 같이 자신의 행동과 전혀 무관한 경우도 있고, 한 나라나 한 시대에 속한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휘말리는 경우와 같이 이유를 알수 없는 경우가 우리의 삶을 강타한다. 인간은 고난 속에서 자신이 사회나 특정 집단으로부터 소외되고 거절되는 경험을 하며, 섭섭하고 답답하다 못해 억울함을 느끼기도 하고, 이 고난이 언제 끝날지 불안해지고, 안달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대해서 분노가 일면서, 의식적 차원 혹은 무의식적 차원에 서,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관자로 믿어왔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분노마저 생기게 된다. 더구나, 이렇게 이유를 알수 없는 역경 속에 오래 노출되어 있다보면 이 역경에 의미가 있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 야하는지 등등에 대해 회의가 생겨, 결국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미치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고통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자신에 대한 그리고 동료인간과 모든 창조물에 대한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한편으로 인생에 대한 넓고 새로운 개념과 태도(orientation)를 갖게 해주어 새로운 삶의 목적과 가치를 갖도록 해 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삶을 망가뜨리는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는 정체성을 바로잡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며 살아갈지, 워치타워 조직은 비록 버렸다 하더라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역경을 잘 넘기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즉 고통에는 어떤 뜻이 담겨있는지, 고통과 고난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고난 당할 때의 인간의 느낌과 반응 고통은 어떤 면에선 보편적인 현상이다. 고통이란 현실의 일부이므로, 모든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다. 인간의 한정된 삶의 기간 중엔 고통이라는 요소가 으례히 포함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1) 소외감 혹은 자기 연민, 자존감의 위축 인간은 고난 속에서 자신이 행운 혹은 순조로움으로부터 제외되고 거절당하는 경험을 하며, 세상이 자신을 제외시키고도 잘 돌아간다는 사실에 한편으로 놀라며 또 다른 편으로는 소외감과 섭섭함을 느끼며 그 고통이 신체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혼자라는 강한 느낌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느끼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또한, 자신의 처참하고 불행한 모습 속에서 자존감을 쉽게 잃게 되고, 무엇보다도 그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처량해지고, 위축되며 답답함을 느끼고 억울함조차 느끼게 된다. (2) 죄책감, 삶의 규범과 가치관에 대한 회의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로 이런 결과가 왔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예민해지고, 자신의 책임이 아닌 부분에 까지 죄책감을 느끼며, 모든 것이 자신의 탓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반드시 우리의 어떤 죄에 대한 벌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의 실패를 느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에 관해 회의를 불러일으켜, 결국 고난은 자기의 성품과 태도, 규칙과 가치에 회의를 품게 하고, 그 동안 살아온 삶의 의미와 가치추구에 도전을 한다. (3) 악인의 형통함에 대한 시기심과 안달감. 그런데, 역경에 포함되지 않고 인생길이 잘 풀리는 사람에 대한, 특히 악한 일을 하면서도 형통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 대해 은근히 시기심이 생기고 부러워하면서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고, 분노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또한 이런 고난이 언제 끝날지 불안해지고, 좋은 날이 빨리 오지 않음에 안달이 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 불행과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고,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지 따지고 싶은 생각이 고개를 든다. (4) 신의 위치와 사랑에 대한 회의 또한, 고통은 인간의 안전에 대한 욕구를 위협하기에, 세상이 이렇게 돌아 가는데 대해서 분노가 일면서, 이 역경을 하나님은 아시는지, 이 역경의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계시다면 왜 그냥 보고계신지 의문이 일면서, 의식적 차원 혹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창조주의 존재와 사랑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분노조차 생기게 된다. 즉, 소외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발견하게 되면 인간은 더욱 고독감과 버림받은 느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 등에 대해 회의가 생기고, 우리가 만나는 고난에 대처하기 위해서 자기의 과거의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만든다. 결국 고난은 인간적이고, 영적인 정체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의 사랑과 충실함에 대한 회의를 하게 만든다. 2) 고통의 본질: 고난과 고통은 인간의 삶의 일부 (고난과 슬픔의 근원) 인생에는 기쁨과 보람이 따르듯이, 고난과 고통은 인간의 삶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함은, 무의 상태를 두 상반되는 힘으로 갈라 놓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리적인 현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것은 결국 인간의 정신도 물리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고난과 슬픔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신약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루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 예수는 인간이 겪게 되는 속박과 두려움과 수치와 패배와 절망과 죽음을 친히 겪으셨다. 그는 그런 고난에 앞서 그 고난을 당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심정을 잘 묘사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고난은 견딜 수 밖에 없다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러한 고난은 어느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닌 어차피 겪어야 할 섭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성서는 고난을 벗어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즉, 고통이라는 아픔 그 자체를 보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므로써, 우리의 고통이나 시련 그리고 슬픔까지도 희망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3) 고난 속 고통의 역할 (1)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성장 및 성숙하게 해준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 인간은 자기비애에 빠지고, 자신에 대해 부정적 자아 상을 갖게 되고, 죄책감에 싸이면서 무력감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 “자기만족”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 (“의존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겸비해진 마음을 갖게 된다. 결국, 고통 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한낱 피조물일 뿐이고 유한한 한계 를 가진 존재임을 인식한다. 그런데, 여기서 포기한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도태되고 말지만 소외감을 떨치고 희망을 찾고, 사랑 받고 관심 받는 대상 임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역경을 극복함을 볼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두 강도는 모두 고통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고통 가운데서 한 강도는 삶을 포기한 듯 하였지만, 우편의 강도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절망가운데서도 희망의 빛을 찾으려고 했다. 이처럼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그에 대처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인식에 따라 매우 다른 양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편의 강도는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인식하면서 자기보다 우월해 보이는 예수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이에 예수도 동일하게 고통을 당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세에서 흐트러짐 없이 그 강도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필립 얀시는 “고통받는 사람은... 어떤 자원들을 필사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곧 사랑, 희망, 존재의 느낌이다. 그렇다면 그를 도와주려는 예수의 노력은, 그의 신체에 가해지는 강력한 공격을 저지시킬 수 있는 힘을 그의 정신에 주는 방향으로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고 말한다. 그렇다! 예수는 그 강도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죽어가는 마당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통의 순간이 짧을 것이며, 그 후에 평안함이 오리라는 위로의 약속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 약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에게 희망을 건 강도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계속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예수]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죽는 순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이 한계 상황에서의 구조, 구원이 필요하고, 인간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해준다. 고난 속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는 본질적으로 가난한 존재, 의존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달은, 그래서 영혼이 가난한 피조물이고 자신들의 인생에 창조주 하나님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되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에 교만함을 비워내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예민해진 사람”들이 되게 한다. MacDonald는 이런 상태에 대해 “자기 자신들의 영적 가난함을 본질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가 가난한 피조물임을 느끼는 사람들,...자신들에게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 어떤 사람이 나는 낮고 가치 없는 사람이라 말할 때, 그때 천국의 문이 그의 앞에 열리기 시작한다” 고 말한다. 쟝 칼뱅도 질병이라는 고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실 우리는 여러 가지 질병으로 시달리게 될 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러 가지 질병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우리의 초라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질병에 시달림으로써 이 세상에 속한 여러가지 그릇된 생각을 버리게 되며,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질병에 시달리게 되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됨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기뻐하신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의 각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마도 고통이 그에게 영향을 주어 정체성을 드러나게 하는 도구인 듯하다.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너는 어떤 사람이냐 라고 묻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해서 고통을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고통이 우리의 정체성을 하나님께 드러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3) 고난 속 고통은 인간을 강인하게 단련시킨다. 고통은 현실과 새로운 실존적 가능성과 변화의 기회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 내고, 우리의 안전과 미래의 목표라는 욕구를 위협한다. 그 결과, 고난에 굴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두려움과 무력감이 있다. 그런데, 고난의 역할과 가치를 이해하게 되면, 훨씬 덜 두렵고 뭘 해야 할 지를 알게 된다. 필립 얀시는 삶 가운데서 고통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력감과 두려움에 맞서 싸우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Frankle은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한, 우리는 심리적으로 살아 있게 된다 (psychically alive). 사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성숙해지고, 고통으로 인해 자라가게 된다, 즉 고통에 대한 우리의 긍정적 인식과 해석이 우리를 더 풍성하게 해주고 더 강인하게 해준다” 고 갈파한다. 아마도 고난을 인내함으로써, 우리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진다는 성경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듯하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고난이 우리 안에 인내로 인한 원만한 인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억울한 옥살이를 오래한 넬슨 만델라나, 신영복 교수에게서 보이는 심리적 여유와 인격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4) 삶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New Orientation)가 생기게 해준다. 아마도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 고통과 고난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깨달아 알기 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히 5:8-9은 예수에 대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라 하면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 순종하기를 체험하여 배웠다는 말을 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하려 하심이니라”(롬 8:28-29)에서 보듯,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니, 그 아들이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면 우리도 그를 본받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또한, 고난이라는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경험을 통해 인간에 대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이 생기게 도와준다. 고통은 영적성장을 이 루고 새로운 의미를 찾는 기회가 된다. 즉, 하나님과 나는 무슨 상관이 있으 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과 구원을 연관 지으시며, 이 연관성이 인간의 삶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어떤 통찰력을 제공해주는지가 관건이다. 2. 고난과 관련된 하나님에 대한 의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회의, 인생의 의미 고난 속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지? 이 고난 속에 의미가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자. 1)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누구 책임인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설명. 먼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비극적 사건과 인간의 존엄성이 부인되는 상황인 고난 속에서, 인간사로부터 제외되어 소외감을 경험한 인간은 왜? 무엇 때문에? 라는 고통스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질문을 가장 생생하게 제시한 욥기에서조차 하나님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고난의 원인보다 일어난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관심을 집중한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무조건적 용납과 지지와 이해를 기대하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외와 거절을 경험하고, 무엇보다도 그런 비극적 상황 속 에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할 때 가장 처참함을 느낀다. 이 고통 속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2) 신은 과연 신뢰할 만한 분인가?: 하나님과의 친밀성 결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 또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대해서 분노가 일면서, 이 역경을 하나님은 아시는지, 이 역경의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계신다면 왜 그냥 보고만 계시는지, 고통 속의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이러한 의문들이 맴돌면서, 의식적 차원 혹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분노조차 생기게 된다. 즉, 소외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발견하게 되면 인간은 더욱 고독감과 버림받은 느낌을 느끼게 된다. 특 별히 고독감이 만연된 Postmodern 사회의 인간의 가장 핵심 욕구는“친밀성의 욕구”(need for intimacy)인데, 즉, 거절 당할 위험 없이 무조건적으로 용납을 받고 싶은 필요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함께하심 (solidarity, 연합, 임마누엘)은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하나님을 향한 분노와 실망은 종종 인식된 불의 또는 실제적인 불의를 통해서 받은 상처를 남기고 이것은 여러가지 정서적 문제의 근본 원인이 된다. William Backus는 “참으로 어렵고 추한 것은 분노, 우울증, 불안, 혹은 우리의 과거력이 아니며 질병이나 사고, 상실, 마음의 고민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과의 가장 친밀한 연합 속에서 누리는 삶의 사랑과 기쁨, 평안을 우 리 영혼 속으로부터 떼어 놓기 원하는 깊이 갈라진 틈이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 문제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하나님은 공평하신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하나님은 숨으셨는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실 수는 없었는가? 라는 회의를 하면서, 종종 하나님께 분노하거나, 적어도 실망하게 되고, 그런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을 무관심한 태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고, 그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어디 계시며 내가 그분을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결국, “고통이란 인간의 역사에서 섭리라는 용어로 하나님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인간의 깊은 갈망을 드러내주는 것이며, 고통 속에서 찾는 하나님의 임재 혹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추구는 결국 사건과 상황을 통제하고 싶은 인간의 깊은 욕망의 표현이다.” 그런데, 고통 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과정은 특정한 인간 행위나 행위의 처방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해석의 과정이다. 즉, 고난 속 하나님의 임재를 찾고 위로 받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는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 즉 하나님은 나에게 누구시고, 나는 하나님과 무슨 관계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풀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유를 알수 없는 역경 속에서 오래 노출되어 있다 보면 이 역경에 의미가 있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등등에 대해 회의가 생겨, 우리가 처해진 고난은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결국 고난은 인간적, 영적 정체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충실하심에 대한 회의를 하게 만든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시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고난 속에 인생의 의미를 나름 해석하게 되고, 그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위기의 시기에, 그 사람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재점검하고 재해석하고 다시 방향성을 정하는 확인하는 과정은 이것이 그들의 세상에 대한, 자신에 대한 그리고 문제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능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글의 의도는 하나님에 대한 개인의 개념은 자신에 대한 개념에 큰 영향을 미칠뿐 아니라 문제 를 극복하는 능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인간 역사에 개입하셔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위기에 있는 사람에게 문제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변화시키고, 이것은 다시 세상과 다른 사람에 대한 관점을 궁극적으로 변화시켜 그들이 문제와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을 수 있게 도와준다. 3) 하나님은 임재인가 부재인가? 고난 속에서 인간은, 고통이 신체적이든 심리적이든 간에 혼자 있다는 강렬한 느낌과, 그 고통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며 어느 누구도 완전히 이해 해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다고 느끼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이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느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 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고 하셨다. 그 약속대로, 하나님은 고난과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하셨다. 고난 중에 인간은 하나님의 부재를 발견했다고 했는데, 아마도 고난과 고통에 눌려 눈이 어두워져 함께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이었으리라. 고난 속의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고난 속 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모습,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찾고야 인간의 영이 안심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도 바다에 폭풍이 일 때, 예수께서 그들이 탄 배에 함께 계셨지만 제자들은 (보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 공포에 눌려, 주의 꾸지람을 들었다. 독일의 다카우 강제 수용소에서 4년간 포로생활을 했던 크리스천 리거는 “하나님은 나를 구해 내시지도, 내 고난을 쉽게 만드시지도 않았다. 그분은 단지 나에게 자신은 여전히 살아 계시며, 여전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아신다고 증명해주셨다” 라고 말했다. (2)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고통받는 인간을 사랑하심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는 몸소 십자가를 지심으로, 어떤 의미에서 고통에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그리스도의 패배처럼 보일 수 있다. 능력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일일수 있다. 그러나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 는 것을 보이셨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참으로 아낄만한 아들,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아들, 귀한 아들을 고통과 고난, 죽음의 순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절규에도 불구하고 버려두셨다. 창조주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은 마치 아무 능력이 없으신 것처럼, 십자가 위의 아들의 절규에도 능한 팔을 접으시고, 아들이 찔리고 조롱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묵묵히 눈을 감으신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 3. 고난을 통한 인생의 해석: 고난에는 뜻이 있다. 1) 고난은 우리의 정체성 검증과 시련의 기간 (1) 하나님의 충실함에 대한 신뢰의 회복 한편, 인간 부모가 때때로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우리의 잘못과 오류 때문에 우리를 책하거나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고 하셨으니 우리가 못나서 부끄럽거나 무가치한 존재가 아님을 확신시켜주고 있다. 즉,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발견하였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케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문제 해결의 핵심 비결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때로, 문제나 역경 속에 넘어지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심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고 이 생각의 배경에는 주변 인물 특히 자신의 안전의 보장이 되는 부모와 특히,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나 벌주는 자와의 관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세주이고, 나는 피조물이요, 사랑의 대상이다. 이렇듯,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우리의 문제에 대한 치유의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고난을 받으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십자가에 못박힌 것 같은 고난이 와도 그 후에 부활이 있음을 알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시험과 고난을 당할 때 그 시험은 우리가 받은 영혼의 구원이 붙잡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시험하고, 우리의 형편을 검증받아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한다고 한다. 곧 죽을 듯한 불같은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며 부활이 있듯이, 그 고난이 주는 시간의 시험에서 이겨내면 오히려 우리는 정제되고 깨끗해진 존재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2) 우리의 정체성 확립 결국, 고난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재정립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의 주인되심에 대한 회의를 품다가 하나님의 엄위하신 임재와 다스리심을 체험하며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확인하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의미의 화해를 하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 안에 있는 구속 받은 존재로서의 우리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연단이요 철을 더 단단하게 하는 제련의 과정이다. 거저 받은 복음이 정말 귀한 것이고 우리의 목숨을 바치고 일생을 드릴 만한 것인지에 대한 검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Louw는“고통 속에 하나님의 뜻은 특정한 인간 행위나 행위의 처방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해석의 과정이고, 그 (은혜)에 포함되라는 초청이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하는 우리의 질문은‘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과 역할의 특징과 자질에 관하여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 온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자질에 관하여 도전을 받는 것이다”18) 라고 하였다. 그 시험과 검증의 과정을 마칠 때 우리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벧전 2:9, 10)라고 그리스도 안의 확실한 지위를 확인하게 된다. 결국, 고난 가운데 충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의 소명을 재확인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찬양으로 기 뻐하며 영광을 돌려드리는 귀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비록, 고난이 아프고, 싫고 그래서 피하고 싶지만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또한 큼을 깨닫게 된다. 결국, 고난은 밀쳐버려야 할 참화가 아니라,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는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어떻게 여기시며 무엇을 하시는 분이신지 알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바른 정체성을 갖고,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만들어주는 은혜의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고난의 이유가 우리를 온전케하고 강하게 하려 하심이 분명해졌고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벧전 5:10), 우리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하려는 목적(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임을 알뿐 아니라, 고난은 잠시 받는 것이니,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명확해진다. 그래서 성경은“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 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 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고 한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희생을 통해 아무 공로없이 부끄러운 구원만 받을 것 이 아니라 예수의 고난에도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주어지는 것으로 여기라는 말이다. 또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고 말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합당하게 행할 것을 말한다. III. 글을 마치면서 인간이 고난 속 고통을 느끼면, 고난과 고통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몸부림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를 원한다. 그런데, 고난 속에서 우리가 한낱 피조물임을 깨닫고,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의존적 존재임을 인식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겸허히 엎드려서야 고난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된다.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의 주관하시며 통치하고 계신다. 이처럼 고난에 담긴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서 감사와 감격이 나오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고난 중에 만나고 보고 체험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과 인자와 긍휼이 한이 없으심에 대해, “우리가 이를 우리의 후손에게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전”(시 78:4) 하게 된다.
인용출처: 김영희, 고난 속 고통에 대한 신학적 접근: 고통을 통한 인생의 의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