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GDawh0cF
나를 담은 문장을 쓰세요
공광규
1
젊어서 문학 소년소녀였던 분들이 시 창작교실을 찾아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초 강좌에는 94세 드신 분이 지팡이를 짚고 신림동에서 노원까지 오셨습니다.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그간 거쳐 간 여러 강사 분들의 시 강의를 평가했습니다. 그러니 시 창작교실에서 80대 드신 어른을 만나는 일은 흔합니다.
70대는 더 많고, 정년퇴직을 한 60대와 정년을 앞두고 아이들을 거의 키운 50대 중후반이 주류입니다. 물어보나마나 이제 생업과 자식 키우기를 거의 끝냈으니 시를 쓰고 싶다는 것입니다. 수필 교실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20대, 30대, 40대 남녀 직장인들이나 주부도 있지만 소수입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시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경제적 가정적 여유일 것입니다. 현재 중고령 세대인 부모들은 대개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세대입니다. 식민지 정책은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친일 매국한 소수의 가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민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해방된 지 5년 후 전쟁이나서 국토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절대 가난에 처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해방 당시 전 국민 78% 문맹 여건에서 태어나고 자란 부모 세대의 가난은 현재 중고령에 접어든 1960년대 생까지, 아니 70년대 생 초반까지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먹고사는 데 바빠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다운 일에 눈을 둘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다행히 이런 세대의 노력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는 여유로워졌지만, 이만큼 와서 보니 그 안에 내가 없었습니다. 나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전공보다 취 직이 쉽고 돈벌이가 될 만한 전공을 자의든 타의든 지원해야 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돈과 안정을 중심으로 선택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담긴 직업, 내가 담긴 직장, 내가 담긴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중고령에 이르기까지, 노령에 이르기까지 내가 없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가족과 가정 경제를 위해, 때로는 사회적 체면을 위해 나를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다 중고령에 이르러, 노령에 이르러 내가 하고 싶었던 시를 써보려고 잃어버린 나를 찾아 문학교실에 오는 것입니다.
2.
문학교실에서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시를 어떻게 써야 되는지요?' 입니다. 방법을 묻습니다. 이런 질문에는 자기의 경험과 관련된 제재를 찾아서 시적 대상인 사물이나 사건이나 사유를 묘사하고, 비유하고, 구성을 하면 된다는 대답뿐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시는 표현이 쉬워야 한다고 합니다.
묘사가 잘된 시들과 시가 오래전 비유의 발명으로 태어난 것을 설명하기 위해 불교 초기경전 <숫타니파타> 뱀의 비유와 코뿔소 비유를, 성서의 아가서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비유를 들고, 구성이 잘된 시의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이럴 때 꼭 나오는 질문이 마지막 '시는 표현이 쉬워야 한다'는 것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현재 시들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입 니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저는 안 읽히는 시는 읽지 말라고 합니다. 안 읽히는 시는 시인의 표현 미숙이라고 일갈하고 지나갑니다. 쓰레기통에 처박으라고 과격하게 말합니다. 물론 독자가 읽든 말든 이해하든 말든 쓰는 표현론적 입장과 독자의 가독성이나 이해를 고려한 수용론적 입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러고는 두 입장을 시인이 선택하면 된다고 합니다.
거의 수용론적 입장을 선택합니다. 나의 진정한 표현은 상대와 소통될 가능성이 있을 때, 소통이 성사될 때 완성된다는 것을 시 쓰는 사람의 몸이 알기 때문입니다. 대중과 소통되지 않는 시는 시간의 빗자루가 쓸어서 시간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립니다. 어려운 시, 시시한 시는 정말 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물론 출판자본의 힘과 인맥, 대중매체와의 우연한 인연으로 어렵거나 시시한 시가 잠시 유명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지내며 써가다 보면 부딪히는 게 제재의 고갈입니다. 이 때 나오는 질문이 '뭘 써야 되는지요?'입니다. 이럴 때 제재를 지정합니다. 수업기간이 짧을 경우에는 졸저 <이야기가 있는 시창작 수업>중에서, 수업기간이 길 경우에는 공자가 편집한 [시경]의 목차를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재들이 거의 시인의 경험 자장 안에 있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 적어도 어느 시는 3,200년을 견더온 [시경]에 나오는 시의 보편적 제재는 현대인의 장기적 기억 속에 내재된 경험 속의 제재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시경]의 시에서 힌트를 얻어 나와 관련된 경험을 쓰면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제재의 고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나를 쓰세요' ' 내가 담긴 문장을 쓰세요'만 강조하면 됩니다. 시를 쓰는 행위가 바로 나를 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일말의 작은 체험에서 시작된 작은 나에서 확장된 나를 써내면서 시 쓰기의 행복감도 확장됩니다. 당연히 그동안 내가 담긴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분들이 폭발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3.
그 뒤에 나오는 정말 어려운 질문이 '어떤 게 좋은 시입니까?'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요즘에는 쉬워졌습니다. 저는 '자기를 담은 시가 가장 좋은 시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담지 않은 일, 자기를 담지 않는 직업, 자기를 담지 않은 직장, 자기를 담기 어려운 사람과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그래서 지금이라도 자기를 담은 시를, 자기를 담은 문장을 쓰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수필과 시를 동시에 쓰기도 하고, 어느 분은 수필을 공부하다 그만두고 시만 공부하러 오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와 수필은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든 수필이든 자기를 담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시와 수필은 자기고백의 양식입니다. 그러니 시든 수필이든 '자기를 담는 문장을 쓰세요' 합니다.
또 등단도 하고 문단 활동을 어느 정도 한 분들, 더하여 등단 수십 년 된 분들까지도 우리나라 시인이 너무 많고 잡지도 많다고 불평을 합니다. 저는 이런 불평에 편들지 않습니다. 시인도, 시를 공부하는 곳도, 잡지도, 문학단체도 더 많아져야 합니다. 과거 문자를 아는 지식인들이 그랬듯 시를 읽고 쓰는 것을 교양으로 일상에서 수용해야 합니다
시를 읽고 쓰는 것을 교양으로 접근하면 시를 대하는 입장이 쉬워질 것입니다. 시는 특별한 무엇도 위대한 무엇도 아닙니다. 그러니 시를 잘 쓰면 좋지만 못 써도 됩니다. 자기와 자기 삶을 규정하는 자연과 사회가 담겨 있으면 됩니다. 살림살이의 일부분으로 교양으로 시를 읽고 쓰고, 발표하고, 시집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개인과 사회가 즐거우면 됩니다.
공광규 <동서문학>, 등단(1986) 녹색문학상 수상 시집 <담장을 허물다>, 산문집 <맑은 슬픔>
------------------
아가서 와스프의 구조
https://m.cafe.daum.net/somdaripoem/pvci/342?svc=cafeapp
아가서 위키백과
https://m.cafe.daum.net/somdaripoem/rA34/480?svc=cafe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