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단지 평화라는 그 말 한 마디 밖에는.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위치한 토지문화관은 나에게 한없는 평화다. 오봉산의 신령한 정기를 받고 무럭무럭 자라 오르는 논과 밭의 작물, 마늘 옥수수 감자 고구마 고추 시금치 상추 등이 그러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시로 울어대는 뻐꾹이와 산비둘기 소리가 평화다. 얼마 전 소담하게 피었다가 이제는 한철 지난 모란꽃이 피어있던 연못가에 정답게 모여 앉은 개구리 떼가 평화다. 아침나절 이슬이 채 마르기 전에 그곳엘 가면 발소리에 놀라 폴짝 폴짝 연못으로 뛰어드는 그들의 날랜 동작이 평화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개구리 가족의 야간 연주회를 한 번쯤 기대해 보고 싶다. 그뿐인가. 회촌교를 지나 마을로 올라가노라면 지금은 물줄기가 다소 약해지긴 했어도 계곡의 힘찬 물소리가 평화다. 그 물소리는 우리들의 오감을, 세속에 찌든 우리의 영혼을 클린 해준다. 물소리를 들으며 물 가운데 하얗고 잘 생겨 있는 너럭 바위를 보는 것이 평화다. 그 너럭바위에 앉아 명상에 잠겨보면 어떨까 궁리해보는 것도 평화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여기 저기 피어있는 야생화- 금낭화며 하얀 민들레 클로버 씀바귀 망초 원추리 산나리 엉컹퀴 등 그리고 이름 모르는 가지가지 꽃들의 은밀한 속삭임도 그지없는 평화에 다름 아니다.
까맣게 영글어 툭툭 땅바닥에 떨어지는 뽕나무 오디와 풀섶 여기저기에 샛삘갛게 익어 있는 산딸기 또한 평화가 아닐 수 없다. 살림이 넉넉하거나 농사일이 바빠서 오디나 산딸기가 저절로 익은 것도 알지 못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평화다.
토지문화관 뒤란에서 쑥쑥 자라고 있는 벌레먹은 배추이파리도 평화다. 벌레 먹은 것은 배추 이파리 뿐 아니라 그 옆에 지천으로 돋아 사람들 발길에 밟히면서도 굳굳히 버티고 있는 질경이며 그 흔한 비름나물 명아주의 모양새도 평화다.
햇볕에 따근따끈 달구어져 찜질방은 저리가라 일 정도로 하체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고 박경리 선생님이 앉아계시던 큰 바위도 평화다. 귀여운 손자와 함께 또 때로는 먼데서 찾아온 문학 후배와 함께 그 바위에 앉아 나누었을 그리운 이들의 이야기도 평화다.
아카시 꽃이 지고 산 속에선 밤나무 꽃이 벌고 있다. 토지문화관 뒷산은 이제 곧 밤나무 꽃으로 뒤덮일 것만 같다. 밤나무 꽃의 야릇한 내음에 섞여 다른 곳엔 다 졌으나 몰래 숨어서 핀 듯한 산찔레 향기가 여전히 평화를 과시하고 있다. 산찔레 꽃 넝쿨 아래 양배추 당근 상추 쑥갓 온갖 채소들이 뭇 벌레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식물을 제공해주는 그 우주적 아량이 평화다.
엊그제 모내기를 끝낸 것 같은데 하룻밤 자고 나면 몇 센티나 뾰족뾰족 자라 오르는 논물의 모가 또한 나에게는 평화다. 어쩌면 농약을 살포했을지도 모르는 논물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올챙이새끼들의 천진한 유영도 평화다.
귀래관의 동쪽 창에서 바라다 보이는 맞은 편 백운산 자락에 한낮에도 걷히지 않고 느긋이 얹혀있는 게으른 안개도 평화다. 산 아래 또 다른 산이 첩첩으로 포개져 있는, 그 산의 소나무와 낙엽송 산딸나무 엄나무 은사시나무 백양나무 등의 무성한 숲을 지나가는 청량한 바람도 평화다.
하루 몇 번 회촌행 버스가 조용히 머물렀다 겨우 몇 사람의 승객을 태우고 먼지를 일굴 것도 없이 원주 시내 방향으로 유유히 사라져가는 모습도 평화다.
무량한 평화와 더불어 토지문화관에서의 작업이 시작되고 마침내 본래의 계획보다 더욱 튼실한 결과물을 보듬고 몇 시간 후면 나는 귀가한다. 그렇다. 집으로 가는 마음, 한 달여 동안 머물다가 기쁜 마음으로 귀가를 서두르는 내 마음에도 평화는 그 실질과 분량에 있어 풍성하기만 하다. 평화의 나라에 은둔했다가 총총히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 가운데 평화의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나는 초록빛 평화의 나라에 유학이라도 온 것인가. 평화를 닮기 위해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그것이 아니라면 나 자신 평화가 되기 위한 것이었을까. 소설나라로의 평화로운 이전! 토지문화관을 중심으로 평화는 성숙하고 확대돼 나간다. 자연과 인간의 평화. 2011년 6월의 평화가 무르익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