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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운희 교수의 "대쥬신을 찾아서"에 관한 신문기사 입니다.
‘쥬신’이란 게 뭔가. 숙신, 조선과 같은 뿌리를 지닌 쥬신이란 말은 간단히 말하자면, 동북아시아 고대 역사무대를 달린 주체들 가운데 오늘날 한족 또는 중화민족이라 일컫는 집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민족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그들을 하나로 묶는 큰 범주다. 거기에는 몽골, 흉노, 말갈, 선비, 부여, 맥, 여진, 숙신, 동호,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왜 등이 포함되며 발해, 원, 요, 금, 후금, 청, 몽골, 일본, 조선 같은 개념으로도 포착된다. 몽골 쥬신, 만주 쥬신, (조선)반도 쥬신, (일본)열도 쥬신 등으로도 대별되기도 한다. 김 교수 생각으로는, 중국 판도를 넓힌 역대 중국 거대 왕조들의 주인은 대개 한족이 아니라 쥬신족이다.
쥬신 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는 종족 또는 민족들은 핏줄이 같고 언어 등 문화적으로도 동질성을 지닌 ‘형제’와 같은 존재다.
그렇다면 쥬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쥬신은 만주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부르는 이름이다. 17, 18세기까지 쭉 써오던 말이라고 한다.
역사서와 신화, 생김새 등을 바탕으로 그려나가 보면 쥬신 민족의 범위는 의외로 넓다. 숙신, 동호, 예맥, 부여, 고구려와 몽골, 흉노, 말갈, 선비 등이 모두 이름만 다를 뿐 같은 민족인 쥬신이며, 이들은 모두 '범한국인' 개념에 속한다. 즉 실체는 같으나, 이름은 여럿이라는 설명이다.
왜(倭)는 한국인들의 이름이란다.
중국과 한국의 사서를 보면 왜는 요동,한반도 남부,북규슈 등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던 친부여계 거주민들을 말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한서'의 삼한시대 독로국(瀆盧國,오늘날의 거제 혹은 동래) 관련 기록에서 '그 남쪽은 왜와 접하고 있다'고 했는데 남쪽은 일본이 아니라 바로 한반도 남해안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남해안 지역의 거주민이 다름아닌 왜라는 것. 그 주장은 왜와 가야가 뒤섞여 있었다는 학계 주장과 일치하기도 한다.
신라가 흉노의 나라였다는 주장도 들어있다.
그는 이를 종합해 기원전 7세기경 알타이 산맥에서 출원한 고도의 청동기 기술을 갖춘 유목민족이 중국 허베이(河北) 성과 산둥(山東) 성까지 남하했다가 다시 한족에 쫓겨 만주로 이동했으며 그중 일부는 몽골로 서진하고 일부는 한반도, 일본으로 남진했다고 분석했다. 중국사서의 기록은 이 종족이 계속 이동함에 따라 시대적, 공간적 차이로 여러 이름으로 혼동해 불렀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한국인을 지역에 따라 조선족, 고려인, 코리안으로 부르는 것처럼.
○코리족 또는 쥬신족의 놀라운 유사성
그럼 이 고대종족의 이름은 왜 쥬신인가. 그 종족명은 크게 코리 계열과 쥬신 계열이 있다. 코리는 이들이 처음 출원한 알타이의 종족명으로 구려, 고리, 고구려, 고려 등으로 전승돼 왔다는 것. 그 어원은 구리 또는 하늘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
쥬신은 조선, 숙신, 식신, 직신, 주신 등으로 한자 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발음은 유사한 형태로 계승돼 왔다는 것이다. 쥬신의 어원은 태양, 아침, 산 등이 복합된 것으로 설명된다.
코리는 한민족 계열에 나타나지만 쥬신은 만주와 한반도에 공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좀 더 포괄적이다. 청을 세운 만주족은 자신들의 종족을 주신(珠申)으로 부르다 훗날 ‘문수보살’의 문수의 발음을 빌려 ‘만주’로 부르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만주족이 세운 금과 청의 역사서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신라 출신의 김함보(金函普)라 밝히고 있음에 주목한다. 금과 청은 이에 따라 자신들의 성(姓)을 금(金)을 뜻하는 아이신자오뤄로 지으면서 그 한자 표기를 애신각라(愛新覺羅)로 해서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라’는 뜻으로 새겼다.
김 교수는 이처럼 ‘중국 25사’는 물론 몽골비사와 고서기, 일본서기 등을 샅샅이 뒤져서 한민족 거란족 만주족 선비족 몽골족 일본민족의 공통된 정체성을 하나하나 드러낸다. 특히 유목민들이 이동을 할 때 고향의 지명을 갖고 가는 전통 때문에 박달산(보르항 산, 홍산, 태백산), 평양(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 아리수(아무르 강, 압록강, 한강), 서라벌(경주, 서울, 도쿄) 등의 지명이 알타이, 몽골, 한국, 일본에 똑같이 존재한다는 설명은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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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박원길 교수의 기고문
저자(김운희 교수)가 대쥬신 공동체의 이름으로 사용한 쥬신이란 대청제국의 원명인 'Yeke Jüsin Ulus'의 'Jüsin'으로 조선(朝鮮)이나 숙신(肅愼)은 그 음역(音譯)에 해당하는 말이다. 또 저자는 쥬신 공동체나 코리(Khuri) 공동체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동방계 유목 민족사에서 쥬신이나 코리라는 단어는 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기본 명칭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 두 명칭은 한 국가 내에서도 서로 혼용될 정도로 구분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된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 祭天之胤 傳七葉)"이라는 글이 있다. 김대성은 이 능비의 투후(秺侯)를 『한서』「김일제전」에 등장하는 "김일제를 투후로 봉했다(封金日磾爲秺侯)"와 "[김일제의] 본은 휴도(休屠)인데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을 주관하는 까닭에 김(金)이라는 성을 내려주었다"를 연계시켜 김알지를 왕망(王莽) 때 신라로 이주한 김일제의 후손라는 설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설은 약간의 관점 차이는 있지만 현재 이종호나 김병모, 주채혁 등 일부 학자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저자(김운희 교수)도 이를 인용해 신라의 성격을 고조선계와 흉노계의 연합세력으로 간주하고 있다. 저자의 신라어 해석 중 김알지를 '금(金) + 금(金)'이라고 본 것은 탁견으로 알지란 Alt(금)에 i가 첨가되어 구개음화(Alt+i 〉 Alji)가 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인용된 알씨(閼氏)는 몽골어 카톤(왕비)에 대비되는 흉노어 아씨(Assi)의 음역이다.
사실 신라는 평지형 무덤이나 구릉형 무덤의 시기가 명확히 구분되고 또 평지형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동방계열보다는 서방계열 유목민족의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간 많은 학자들의 고뇌를 유발시킨 미스테리의 국가다. 이로 인해 신라의 기원이 도대체 어디이며 주력 지배층이 어디서 왔는가가 학계의 논란으로 남아 있다.
박원길/고려대학교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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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희의 '대쥬신을 찾아서'
제가 이 일에 뛰어든 직접적인 이유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동북공정에 대한 대안(代案)으로 ① 기존의 사학계가 추진하는 ‘고구려 지키기’, ② ‘요동사(遼東史)’ 개념[요동의 역사를 중국사도 한국사도 아닌 제3의 영역으로 보려는 시도], ③ ‘쥬신’의 관계사(關係史)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 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쥬신’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었으며, 17세기까지 사용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미 ‘고구려 지키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도임을 ‘삼국지 바로 읽기’를 통해서 제시한 바 있습니다. 1천4백여 년 전에 없어진 나라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한다거나, 조공-책봉에 대한 연구를 한다 한들 동북공정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설령 발해의 역사를 지킨다 해도 이미 1천 년 전에 없어진 나라이니 그 또한 동북공정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1천 년 전의 국가의 토지대장이 있다한들 지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할 무력이 있습니까?
그렇지만 한반도 도처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은 남방계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고인돌의 분포지역은 중국의 황해 연안(요령성·산동성·절강성), 한반도 영산강 유역과 제주도, 일본의 큐슈(九州)지방, 인도차이나 전역, 인디아(인도) 남부 등인데 이것은 남방계의 이동경로를 보여주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고인돌의 이동경로는 벼농사 문화의 이동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신화(神話)의 경우를 보면 북방계 유목민들은 천손(天孫 : 하늘의 자손) 신화이고 남방계 농경인들의 신화는 난생(卵生) 신화인데 이 두 가지의 신화 요소가 한국 고대 국가 성립 과정에서 모두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한반도의 남단에서 나타난 신라(新羅)의 경우에도 그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천마(天馬)의 알에서 나옵니다. 여기에는 북방 기마민족(쥬신족)의 성수(聖樹)인 버드나무[양산(楊山)]가 나오고 그들의 영웅 신화(영웅의 탄생과 죽음)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새가 나옵니다. 박혁거세의 박(朴)은 음을 빌린 말인데 바가지[瓠] 또는 ‘밝다[明]’는 의미이고 혁(赫)도 ‘붉다’ 또는 ‘붉은 빛이 나다’는 의미로 모두 태양을 나타내지요. 즉 천손사상을 유지하면서 난생설화를 적절히 섞어서 만든 신화이지요.
제가 보기에 천손사상이라도 토착세력의 도전을 일시에 물리칠 경우에는 신화에 알[卵]이 등장하지 않고 ① 토착세력 때문에 세력을 키우는 데 상당히 힘이 들거나 ② 점차적으로 세력을 키워서 정치권력을 장악한 경우 등을 알[卵]로 묘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알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점차적으로 성장하고 새롭게 변신하여 강력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즉 여기서 말하는 알[卵]이라는 것은 남방계 신화와는 다른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알[卵]이라는 것은 남방으로 이주한 북방민들이 천손(天孫)이라는 고유의 이데올로기(ideology)를 유지하면서 현존하는 문화의 외피(外皮)인 난생신화(卵生神話)를 덮어쓰고서 ‘재탄생(re-birth)’한 것을 의미하죠. 유목민족인 천손족(天孫族)이 실제로 다스려야할 사람들은 결국은 난생신화를 믿는 농경민이 아닙니까?
일본의 마쓰모도 교수(오사카대학)는 몽고인종을 특징짓는 유전자 결합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몽고인종의 혈청 중에 있는 Gmab3st 유전자로 아시아계 인종의 계통성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Gmab3st 유전자는 바이칼호 북쪽의 부리야트 족[칭기즈칸의 종족으로 알려짐 : 몽골 쥬신]이 100명 중에서 52명으로 가장 많고 한국인(반도 쥬신)은 41명, 일본(열도 쥬신)은 45명인데 반하여 중국인은 화북(華北)지방이 26명 화남(華南) 지역은 9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에 이르는 지역이 이 민족의 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혈액형의 경우에도 북방계는 A, B형이 많고 남방계는 O형이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국이나 일본은 A, B 형이 많다고 합니다.
김원룡의 견해에 따르면, 예니세이 지방에서 나타난 카라스크 문화인(황인종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북향한 퉁구스족)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는 모체였다고 합니다. 카라스크 문화 다음에는 다카르 문화가 성립되는데 이때는 B. C 7세기경으로 이 문화는 주로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카르 문화는 말(馬)이 운송수단이 되면서 뛰어난 기동력으로 남부로 진출하게 되고 오르도스 흉노(匈奴)에게로 뻗어갔다고 추정됩니다
(오르도스는 바로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의 고향이죠). 뿐만 아니라 이 시기를 전후하여 흑해 북쪽 해안에 새로이 등장한 스키타이 동물 미술도 가미되어 특수한 시베리아 청동기로 발전합니다. 바로 이 문화의 주인공들이 바로 오르도스의 주인이었던 흉노(匈奴)들이라는 얘깁니다. 이들은 빠른 기동력을 이용하여 현재의 중국 땅은 물론이고 한반도까지 큰 정치적인 변화를 주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한반도와 중국 및 동북 지방을 아우르는 청동문화는 스키타이-다카르-오르도스 청동문화라는 것입니다[김원룡 『한국문화의 기원』(탐구당) 33~35쪽].
물론 김원룡의 견해와 관련하여서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기 때문에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확실한 내용들이 밝혀지는 대로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일단 여명기의 알타이의 역사는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다소 긴 분석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초기 한반도의 정착민들은 소수의 남방계로서 주로 해안을 따라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이주한 북방계는 주로 동부 시베리아 지역( 동몽골ㆍ만주)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왔으며 이들이 소수의 남방계를 압도하고 한반도의 주류 민족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일부이지만 몽골 서부 지역 또는 서시베리아 계통의 유목민이 김해지역(과거의 변한/가야지역)까지 유입되기도 했습니다(이 사람들은 신라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 부분은 신라 부분에서 다시 거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쥬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니 어떤 사람들은 “말도 안 돼. 옛날에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무엇이 달라? 다 몽골로이드(황인종)이지.”라고 합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중국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중국 민족을 스스로 ‘화(華)’, ‘하(夏)’ 또는 ‘제하(諸夏)’라고 합니다. 쥬신족들이 스스로를 부를 때 ‘제신(諸申)’이라고 한 것과 대조됩니다[‘제하(諸夏)’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제신(諸申)’이라는 말을 아는 한국인은 드뭅니다. 각성합시다].
그나저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오랑캐가 한족들을 통일하여 한족의 실체가 서서히 태동했다니 말입니다.
즉 중국인들은 북방 유목민들을 서융(흉노, 강), 북적(흉노, 선비), 동이(갈, 예맥) 등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흉노·선비·갈·예맥이니 하는 명칭들은 이들 부족들이 스스로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자기들이 분류하기 편리한 대로 임의로 부여한 명칭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인간 이하를 지칭하는 욕들입니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진 ‘예맥(濊貊)’이란 ‘똥오줌이 묻은 더러운 (승냥이 같은) 짐승’라는 뜻인데 간단히 얘기하면 ‘똥고양이’이죠. 세상의 어느 부족이 자기 부족 그렇게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선비(鮮卑)란 동물무늬가 있는 허리띠[세르베]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고증), 흉노(匈奴)란 ‘입심 좋은 노예’라는 뜻입니다. 물길(勿吉)은 ‘기분 나쁜 놈(재수 더러운 놈)’입니다.
대표적인 민족이 몽골입니다. 오죽하면 몽골인들은 같은 민족인 요(遼)나라인들이 중국인들의 흉내를 내니 이들을 “중국인 트기” 쯤으로 여기면서 비하하여 지금도 중국을 요나라라고 하겠습니까?
이제 쥬신의 역사기행에 앞서 중화사상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료에 의해 어느 정도의 검정이 가능한 민족이나 역사적 공동체를 논할 때는 한(漢)나라 이후를 두고서 보는 편이 타당하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공자(孔子)는 동이족(東夷族)’이니 ‘강태공은 한국인’이니 또는 유명한 ‘충신 백이와 숙제가 동이족’이니 하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즉 한(漢)나라 이전에 나타나는 쥬신의 역사나 중국의 역사는 큰 의미를 둘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 동안 쥬신의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지나치게 과거로 올라가서 역사를 기술하는데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예를 들면 『한단고기(정신세계사 : 1999)』에 한국시대는 3301년이고 “신시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라고 합니다. 이렇게 정확한 수치를 기술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느 사료를 근거로 또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한(漢)나라 이전 사료(史料)들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문제지만 한나라 특히 동중서(董仲舒 : 179~104 B.C.) 이전에는 ⓐ 중화사상도 불완전하고 ⓑ 중국인(한족)들의 실체가 불분명한데 ⓒ 중국인들보다도 실체가 더 불분명한 쥬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한나라 이전에 제대로 된 민족개념이 있다고 보는 것도 잘못입니다. 과학적인 분석을 기반으로 해야 할 학문이 목소리만 크다고 될 일은 아니지요.
(8) 현대 중화패권주의의 미래
그러면 지금까지 견고하게 유지된 중화주의는 현대 사회에서는 어떨까요? 「들어가는 글」에서 보신 대로 전체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가 중국 오성홍기(五星紅旗)의 깃발 아래 신하(臣下)의 예를 갖추어 무릎을 꿇을까요?
중국은 외형적으로 보면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과 개방에 크게 성공한 이후 국방력이나 경제성장도 빠르고 국력도 매우 강대해보입니다.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중국은 겉보기와는 달리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점을 간단하게 요약해 봅시다.
① 현대 중국의 경제 성장은 외국자본의 유입에 의한 부분이 많고 자체적인 성장 동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현재 중국의 임금(wage)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향후 10년 이내에 외국자본이 더욱 값싼 지역으로 자본 이동을 강행할 경우 심각한 실업문제가 발생할 위험성이 큽니다.
소련(Soviet Russia)의 경우도 미국과의 경제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몰락한 것을 중국의 지도부가 직시해야 합니다. 미국의 지속적인 저유가(低油價) 정책으로 석유 수출에 의존하던 소련 경제가 심각한 재정적자에 봉착한 데다 미국의 SDI(Strategic Defence Initiative) 프로젝트의 추진으로 소련의 숨통을 눌려버린 것이 소련붕괴의 원인이었다는 지적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요.
한족(漢族)들은 과거 쥬신족들을 불러 ‘예맥’이라고 했지요. 예맥은 쥬신이 스스로 부르는 것을 한자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이 가관이죠. 중국인들이 쓴 말 즉 예맥(濊貊)의 한자 뜻 그대로는 ‘똥오줌이 붙은 표범이나 삵괭이 같은 짐승’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와 가장 가까운 식으로 표현하면 ‘똥고양이’ 정도가 될 것입니다.
만약 예맥이라는 말이 이 민족 스스로가 불렀던 이름이면 예맥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이 민족의 가장 고귀한 어떤 내용을 담은 말일 수도 있습니다. 즉 쥬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품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똥고양이’라고 부르며 비하했다니 기가 찹니다.
만약 이 ‘똥고양이’라는 말 안에 쥬신의 단군신화(檀君神話)가 숨어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단군신화의 첫 머리에 나오는 내용의 요점은 천손족(天孫族)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천손족이라고 믿을 때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스스로 고귀한 존재라는 의식을 가지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하나는 특정 지역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동하는 민족 즉 유목민(遊牧民)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실증적으로 많은 동북아시아 유목민들이 이 같은 신화를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단군신화에서 특이한 것은 흔히 농경문화(農耕文化)를 상징한다는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라는 말이 나온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치우(蚩尤[chīyóu])라는 말도 욕설이니 앞으로 다른 명칭을 찾아봐야 합니다. 치우라는 말만 봐도 치우는 한족(漢族)의 조상이 아니죠.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입을 열면 예의니 도덕이니 하는 중화백성이 자기 조상을‘버러지 같은 놈(치우)’이라고 했겠습니까?
셋째, 설령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가 농경과 관계 있다 하더라도 유목민들은 동아시아에서 철기를 가장 먼저 사용한 민족들이기 때문에 이 말들은 철기와 깊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농경(農耕)은 유목민들이 전달해 준 철제가 농기구로 만들어져서 보급된 이후라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주지역은 철기가 아니면 사실상 농경이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그런데도 부여(夫餘)는 농경을 발달시켰죠? 그 기반이 바로 발달된 철기문화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도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동안 제가 본 연구자들은 모두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농경문화의 상징처럼 이야기하는데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가 반드시 농경문화(農耕文化)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단군신화에서 보더라도 환웅의 경우 농경을 지도하거나 가르쳤다거나 하는 말들이 전혀 없지요?
그리고 중국의 신화를 보면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가 농경보다는 주로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치우는 “황제가 우리를 물로써 공격하려 하니 풍백과 우사는 비와 바람을 일으켜 적을 공격하라.”고 합니다[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85쪽]. 이것은 치우 또는 치우족들이 변화무쌍한 기후를 잘 알고 이용했다는 말이겠지요. 치우의 라이벌이었던 황제(黃帝), 또는 황제족은 주로 물[水]로 공격하였다고 하니 그들은 치수(治水)에 능했다는 말이지요.
어쩌면 우리가 그 동안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 = 농경’이라는 등식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유목민만큼이나 기후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바람을 풍백(風伯)으로 가장 높이 칭한 것도 유목사회와 관련이 있습니다. 유목생활은 바람에 영향을 심하게 받습니다. 특히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은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축들이 얼어 죽고 겔(천막)도 날아갑니다. 그러나 농경민족일 경우에는 겨울에는 농사가 끝나서 가족끼리 모여서 여가(餘暇)를 즐깁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환웅은 농경문화 그 자체를 가지고 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웅은 씨앗[種]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니죠? 다만 의술(醫術)과 금속문화(후반에서 설명함)를 가지고 간 것입니다.
“풍백(風伯)ㆍ우사(雨師)ㆍ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을 주관하면서” 라는 말은 고도의 문명(文明)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요. 그리고 이들이 무력만으로 지배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죠.
이 문명은 황제(黃帝) 시대 이후 고도의 농경문화가 중원에서 꽃필 때까지 중국을 지배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 “은(殷)은 동이(東夷)의 국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죠.『사기(史記)』에 말하기를 “은(殷) 나라는 오랑캐[이(夷 : 쥬신족)]가 세운 국가이고 주(周)나라는 우리 화하족(華夏族 : 중국인의 조상)이 세운 국가[殷曰夷周曰華]”라고 기록되어 있죠?
여기서도 몇 가지의 중요한 상징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① 쑥(wormwood)과 달래(wild garlic), ② 곰(bear), ③ 조선·아사달 등이 나타나는데 이것 또한 단군신화의 주인공들의 속성이나 특징을 찾아낼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됩니다. 즉 초기 쥬신의 역사를 밝히는 단서들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첫째. 쑥과 달래는 의약품이므로 보다 발달된 의료기술을 의미합니다. 쑥은 현대에서도 식용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복통 · 토사(吐瀉) · 지혈제로 쓰이고, 냉(冷)으로 인한 생리불순이나 자궁출혈 등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 여름에 모기를 쫓는 재료로 사용하여 들판에서 잠을 쉽게 잘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쑥찜, 또는 쑥뜸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해본 사람이면 다른 의약품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달래는 역시 약재로 여름철 토사나 복통을 치료하고, 지혈제는 물론 종기와 벌레에 물렸을 때 쓰이며, 협심통에도 좋다고 합니다.
쑥과 마늘의 현대적 의미는 바로 의료 기술이죠. 그리고 샤먼(단군)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병에 대한 치료입니다. 사실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도 더 좋은 문화적 감응은 없습니다. 만약 곰 토템 부족들이 천손족에 반했다면 의료기술 때문일 겁니다. 여기서 치우천왕이 염제(炎帝)의 후계자였다는 점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곰[熊]이 등장한 문제입니다. 이 곰은 당연히 곰 토템의 부족을 말하겠지요. 만주에는 곰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그런데 위의 내용으로 보면 유목민들이 보다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와서 토착민들과 융합했다는 말이 되지요
세상에 유목민 보다 정보(information)를 중시하는 민족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정보는 바로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인사도 ‘니하오(你好 : 잘 지내셨어요?)’식이 아니죠. “(당신이 온 곳에서) 뭐 새로운 소식 있습니까?[Сонин сайхан юу байна?(소닝 새항 요 밴?)]”라는 형태로 주로 다른 곳의 정보를 물어보는 식입니다. 지평선 너머 적(enemy)이 있는지를 빨리 파악해야지요. 아니면 새로운 목초지(牧草地)가 있는지도 봐야죠.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평양이란 현재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평양은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하는데 이 지명은 양주동 선생이나 박시인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베이징(北京) 지방의 옛 이름이라고 합니다(박시인『알타이 신화』132쪽). 놀랐죠? 더욱 놀라운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평양성을 맥국(貊國)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명은 국내성(만주 즙안현) - 평양(현재의 평양)에 이르기까지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평양이라는 지명이 베이징 → 만주 즙안 → 평양(평안도)에서 계속 나타난다는 얘기죠.
단군조선이 처음으로 도읍한 곳이 베이징(北京) 인근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삼국사기』에 고추모(高雛牟)가 북부여에서 일어나 해모수를 제사하여 일부 새로 편입된 영토를 ‘다물도(多勿都)’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다물’은 고구려어로는 옛 땅을 되찾는다는 의미입니다(麗語謂復古舊土).
이제부터 이 예맥이라는 말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예맥이라는 말을 접근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예맥의 원래 발음을 추적해 가는 것이 급하겠죠? 그래서 일단은 한어(漢語 : 중국어) 발음을 알아봅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또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현대 중국어의 발음으로 과거의 발음이 추정되는가?’라고요. 맞습니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아예 포기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일단은 이런 분석, 저런 분석을 다 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먼저 맥(貊)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맥(貊)은 중국어로 하오[h o]·허[hè]·모[mò] 등으로 발음이 되는데 듣기에 따라서 예(濊)의 발음(훠[huò]·휘[huì], 또는 웨이[wèi])과도 유사합니다. 그런데 알타이어에서는 ‘ㅎ’과 ‘ㅅ’ 의 교환현상이 자주 일어납니다(『춘향전』에도 ‘향단이’를 아예 ‘샹단이’라고 적힌 판본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나 맥이나 모두 [쉬]·[쇠이]·[쇠]·[서] 등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두 ‘ ’ 또는 ‘쇠’, ‘서’에 가까운 소리가 됩니다.
‘ ’, 또는 ‘쇠’(‘서’)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죠. 그 가운데 중요한 것만 우선 정리해봅시다.
① 금속, 즉 구리·쇠[鐵 : iron] 등의 여러 가지 금속
② 하늘을 나는 새(鳥 : bird)
③ 해 뜨는 곳 동(東 : east) 예를 들면 새파람.
④ ‘ ’(해), 즉 태양(太陽)
맥(貊)의 발음 가운데 하오[h o], 허[hè] 등에 주목해 보면 일단 맥이라는 말은 쇠[鐵], 또는 태양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죠.
제가 이렇게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맥(貊)을 불러서 『관자(管子)』에서는 ‘하오(毫 : [h o])’라고 하고 있고, 『춘추(春秋)』·『좌전(左傳)』·『사기(史記)』등에는 ‘ ’ ,또는 ‘밝(發 : [b k] 또는 [f ])’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해(태양)의 밝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불여[불(해) + 여(무리, 민족) : 부여(夫餘)]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죠? 이제 아시겠죠?
그래도 맥(貊)이라는 말에서 맥[mæk], 또는 모[mò]라고 하는 발음도 신경이 쓰입니다. 북방민족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돌궐의 쿨테긴(Kül Tegin) 비문(碑文)에 나오는 복엘리(B kli)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일본의 모리마사오(護雅夫)는 비문(碑文)에 남아있는 돌궐 카한 시조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신 가운데 ‘해 뜨는 곳’으로부터 파견된 복클리(B kli) 초원의 사절을 고증하였습니다. 모리마사오에 따르면 이 복클리(B kli)는 맥의 나라라는 것입니다[護雅夫 “いわゆるB kliについて - 民族學と歷史學と間 - 『江上波夫敎授古稀記念論文集』(民族ㆍ文化篇) 東京. 1977, 229~324쪽].
여기서 복엘리(B kli)는 ‘복(Bok = Mok : 종족명) + 엘리(eli : 나라)’로 분석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Bok(Mok)이 맥(貊)의 음역이라는 것이죠. 즉 이 맥이라는 게 복[b k], 또는 [b k]으로 발음된다는 말이지요. 어떤가요? 이 말이 결국 ‘ ’ ,또는 ‘밝(發 : [b k, 또는 [f ])’이지요? 이젠 좀 시원하십니까?
전설적으로 보더라도 맥(貊)이라는 동물은 철(鐵)이나 구리(銅)를 먹고 산다고 합니다. 따라서 맥이란 똥고양이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 철기를 사용하는 힘이 센 민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족들은 이들을 이처럼 비하했을까요?
그것은 고대 중국인들이 이 철기로 무장한 유목민들에게 큰 고통을 당했거나 오랫동안 지배받았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전설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맥(貊)은 치우천왕(蚩尤天王)과도 깊은 관련이 있겠지요.
치우천왕은 ‘태양(불)의 신’인 염제(炎帝)의 후계자로 현재 중국의 산동성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의 임금인데
『서경』에 “구려족의 임금을 치우라고 한다.” (「孔傳」)라고 하고 있으며 『사기(史記)』에서는 “구려(九黎) 임금의 호가 치우(蚩尤)이다.”고 합니다.
『사기(史記)』에는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고 따랐기 때문에 치우는 지극히 횡포하였지만 천하에 이를 벌할 자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죠. 이것은 철기를 바탕으로 한 신무기체계를 기존의 제후들이 이길 수 없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맥족들은 쇠를 숭배할 수밖에요. 물론 이 내용은 전설적인 내용입니다. 다만 이 전설 안에 녹아있는 의미를 맥(貊)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죠.
치우를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치우가 당시 중국의 변방에 살던 대장장이 집단이고 치우는 그 우두머리 샤먼(무당 : 박시무당)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무당이 대장장이를 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을 다루어 금속을 정련하는 기술은 무당의 특별한 능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79쪽]
현재에도 칭기즈칸의 종족으로 알려진 부리야트족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은 샤먼이고 그 다음이 대장장이랍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알아봅시다. 정재승(봉우사상연구소장) 선생의 『바이칼 여행기』에는 특이한 내용이 있죠.
따르면, 맥족(貊族)이 중국 사서(史書)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B. C. 7세기경인데 이 때 이들의 거주지는 섬서(陝西)·하북(河北)이라고 합니다. 이후 이들은 B. C. 5세기경에 산서(山西), B. C. 3세기경에는 송화강 유역으로 이동한 뒤 다시 남하했다고 합니다(이옥, 『고구려민족형성과 사회』1984). 그러면 B. C. 7세기~B. C. 5세기경에 맥족은 탁록을 통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화하족(華夏族 : 중국인의 조상)과의 결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고로 중국 본토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600~500년경부터 철기시대가 시작된다고 하는데 이 탁록 대전과도 관계가 있겠지요
북방 민족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박원길 교수는 맥의 원래 명칭이 코리(Khori), 또는 꾸리(구리) 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고구려지요. 고구려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지만 크게 보면 ‘(해가 비치는) 고을(나라)’ 또는 ‘구리(銅)’와 같은 금속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알타이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1921~1990 : 서울대 교수)은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거란(契丹)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쇠[빈철(賓鐵)]도, 금나라의 쇠[金]도 다같이 ‘새 아침’의 새[新]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몽골(蒙兀)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은(銀)도 쇠의 일종이다(박시인『알타이 신화』232쪽).”
보세요. 고대의 역사에서 쥬신과 관련된 민족들은 하나같이 아침 해[태양]나 쇠[鐵] 또는 금속과 관련이 있지요? 이와 같은 것은 일종의 토템(Totem)입니다(무생물과 자연 현상 토템은 토템문화 후기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濊)라는 말을 분석해 봅시다.
예(濊)라는 말은 한자의 뜻 그대로 똥물의 뜻인가요? 천만에요. 세상 어떤 바보가 스스로를 똥물에 비유하겠습니까?
예(濊)의 발음은 훠[huò]·휘[huì], 또는 웨이[wèi] 등으로 나타나 맥(貊)보다는 오히려 더 ‘ ’나 ‘쇠’(‘서’)에 가까운 소리가 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웨이[wèi] 보다는 훠[huò]·휘[huì]가 고대 발음에 가깝다고 합니다(유 엠 부찐 『고조선』67쪽). 그 동안의 연구들을 토대로 보면 예(濊)는 크게 ① 쇠[金], 또는 관련된 금속(구리· 은·금), ② 해 뜨는 곳, ③ 부족의 중심지인 나라[國]라는 뜻 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점들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째, 예(濊)라는 말은 ‘ ’(‘쇠’ 또는 ‘서’)라는 말을 한자음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쇠[鐵]라는 말이라면 우리가 맥을 분석한 것과 같은 결론이 나오므로 더 말할 것이 없지요. 만약 그렇다면 예와 맥은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이라는 말이 됩니다.
둘째, 예(濊)라는 말은 ‘ ’라는 말로 동쪽, 또는 ‘태양이 뜨는 곳’을 나타내는 말로도 볼 수 있죠. 즉 ‘ ’라는 말은 아사달·아사다라·서라벌· 벌·서울(Seoul)·도쿄(東京 : 신라의 수도이자 현대 일본의 수도)·일본(日本 : 해 뜨는 나라)이나 조선(朝鮮 : 태양의 첫 빛이 비치는 나라)과 같은 말이죠. 아사달(阿斯達)은 몽골어나 거란어로 ‘확 트인 밝은 벌판이나 장소(나라)’를 뜻하는 ‘아사다라(Asa-tala)’와 일치합니다.
셋째, 언어적으로 보면 이 ‘예(濊)’로부터 카라(kala)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데 이 말이 나라[國]를 의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구려, 또는 고려나 가라(加羅)· 가야(伽倻)·한(韓 : 일본의 훈음 ガラ), 그리고 열하·요령성 일대에 널려 있는 카라(喀喇)·카사(喀佐)등의 지명도 모두 이 카라(kala : 濊)가 변형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카라(kala)는 ‘부족의 중심지’로 이 말에서 나라[Nkla : 國]가 나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죠[곽창권 『한국고대사 탐색』(일선출판사 : 1987)].
『세종실록(世宗實錄) 』(「地理志」江陵條)에 “강릉(江陵)은 본래 예(濊)의 옛 나라로 철국(鐵國)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죠. 예(濊)를 철국이라고 한 것은 철(鐵)의 훈(訓)이 ‘쇠’ 또는 ‘서’이기 때문이죠. 같은 책(鐵原條)에 “철원(鐵原)은 원래 고구려의 철원군(鐵原郡)인데 고려 태조가 동주(東州)라 하였다”는 것이죠. 즉 철원(쇠의 벌판)이 동주(해 뜨는 곳)로 둔갑한 것은 이제는 쉽게 이해가 되죠.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철(鐵)의 훈이 ‘ '나 ‘쇠’(‘서’)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쇠와 해, 동쪽이 서로 구별 없이 섞여서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뒷날 반도 쥬신의 국가 이름이 된 조선(朝鮮)은 만주족들이 스스로를 부르던 ‘쥬선(Jusen)’, 또는 ‘쥬신(Jüsin)’이나 아사달·아사다라·서라벌· 벌·서울(Seoul), 도쿄(東京)·일본(日本) 등과 그 뜻이 일치합니다[이 쥬신, 또는 조선에 대한 명칭 분석은 숙신(肅愼)편에서 다시 하도록 하고 일단 넘어갑시다].
결국 이 예(濊)라는 말은 ‘태양이 비치는 나라’, 또는 ‘태양의 아들[天孫族]들이 사는 곳’, 또는 ‘쇠를 잘 다루고 태양을 숭상하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도 맥과 마찬가지로 철기(鐵器)와 해[太陽]가 들어가 있습니다.
고증학자인 이병도는 ‘예’와 ‘맥’을 따로 보아서는 안 되고 예맥을 합쳐서 중국말로 ‘휘마[Houei-mai]’의 고대음 ‘ㅋ휘마[Khouei-mai]’를 따서 곰 토템, 신성을 의미하는 ‘고마’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도 일부 타당성이 있습니다.
흑룡강 주변에 살아가는 종족으로 울치족(ульчи)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울치족은 어린 곰을 잡아다가 고이 기르고 나중에 자라면 곰을 강변까지 끌고 가서 죽여서 그 고기로 잔치를 벌입니다. 이 곰을 죽일 때는 궁수(弓手)는 단 한발에 아무런 고통 없이 죽여야 하고 그 광경을 보면서 울치족의 여인들은 한없이 슬피 웁니다. 그리고 난 뒤 곰의 머리뼈는 땅에 묻고 나머지 고기들은 전 부족들이 나눠먹고 잔치를 벌이지요. 울치족들은 이 과정을 마치 자신의 조상인 곰이 죽으면서 자신의 살을 후손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들에게는 곰은 가장 가까운 동물로서 단지 짐승 가죽을 쓰고 있을 뿐 과거에는 인간이었다는 것이죠(곽진석 「시베리아 오로치족의 신화와 신앙에 대한 연구」참고).
그런데 이들 울치족의 유적과 한반도 남동 해안 지대에서 발견되는 일부 유적들(암각화)이 거의 같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곰 토템은 주로 만주지역과 연해주 태평양 연안 지역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분석해 보면 예맥이란 대체로 ① ‘곰을 신성시하는 민족으로 철기나 구리를 사용하여 강한 전투력을 지닌 민족’ 또는 ② ‘해 뜨는 동쪽의 밝은 나라(또는 그 나라 사람)’ 또는 ‘태양 또는 하늘의 자손[천손족(天孫族)]’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예맥이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한정 되었다기보다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융합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기에는 예와 맥이 따로 쓰이다가 어느 시기에는 다시 합쳐지다가 또 따로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예를 들면 예맥은 『한서(漢書)』ㆍ『삼국지(三國志)』ㆍ『후한서(後漢書)』에 이르면 예(濊)와 맥(貊)으로 따로 불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예맥으로 불리어졌다 말이죠]. 그래서 따로 사용될 때는 앞의 항목에서 분석한 것으로 봐야 하고 같이 사용될 때는 이병도식으로 합쳐서 분석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결국 단군신화(檀君神話)입니다.
따라서 단군신화란 철기(iron)를 잘 다루는 민족[예(濊) 나 맥(貊)]이 시베리아에 흩어져 사는 광범위한 곰 토템 부족과의 융합과정[예맥(濊貊)의 등장]을 신화로 표현한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찾아가는 고대 쥬신의 실체이죠.
환웅(桓雄)이라는 말도 그런 말이 아닐까요? 환웅을 한번 다시 써볼까요 ? ‘환(桓 : 하늘족 - 천손족) + 웅[熊 : 곰토템 부족]’ 이 되지 않습니까?
이것만은 알아둡시다. 아침·쇠(금속제련 : 금·은·철·구리 등)·해(태양)라는 말이 쥬신에게는 항상 따라다니는 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속의 제련과 세공은 농경에 비교하여 상당한 손재주(섬세한 기술)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인·일본인들이 세계 최고의 손재주(섬세한 기술)를 가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급 반도체 기술이나 IT기술을 가진 것이겠지요. 그래서 아직도 치우와 황제(黃帝)의 싸움은 끝나지 않은 것이죠.
이상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중국인들이 쥬신의 뿌리를 ‘똥고양이’이라고 부른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그 수많은 비밀들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이 예맥이라는 민족과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다른 민족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봅시다.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예맥 = 동호 = 숙신 : 범쥬신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6>
2005-05-04 오후 1:57:01
이런 동요 들어 보셨죠?
“예솔아! ”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대답하면
“너 말구 네 아범.”
“예솔아.” 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면
“너 아니고 네 엄마.”
(김원석의 동요 : 내 이름 중에서)
그러면서 이 동요는 아버지를, 어머니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내 이름 어디에 엄마와 아빠가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우스운 말이지만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도 어머니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들은 적이 없거든요. 아버지의 이름은 알았지만 어머니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요. 조금이라도 총명한 구석이 있었으면 초등학교 가기 전에 좀 알아두거나 학교에 가지고 가는 서류라도 유심히 보면 알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었던가 봅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당시에 저는 하루 종일 앉아서 그림만 그리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저도 “엄마의 이름은 뭘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물어봤습니다. “엄마 이름은 뭐야?” 그랬더니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엄마 이름 ? 엄마 이름이 ‘엄마’지.” 그런데 늘 이런 식으로 어머니는 넘어가기 일쑤여서 어머니가 제게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마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의 이름을 안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 보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당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기 보다는 주로 ‘갑돌이 엄마’, ‘평양댁’, ‘갑수 형수’, ‘영철이 마누라’ 등으로 인생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 어머니들의 지위가 낮아서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지난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을 해왔지만 당당하게 살지 못하고 항상 뒤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에 가려서 세상을 살아오신 것이지요.
(1) 중국 장님, 예맥 코끼리 만지기
우리의 뿌리와 깊이 관련이 있는 민족은 예맥ㆍ숙신(肅愼)ㆍ동호(東胡)입니다. 이 세 민족은 아직도 안개 속에 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는 예맥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합시다.
연구자에 따라서 예(濊)는 샤오싱안링[소흥안령(小興安嶺)] 산맥 동부지역에 맥(貊)은 샤오싱안링 산맥 서부 지역에 거주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예는 부여, 맥은 고구려라고 하기도 합니다. 때에 따라서 예와 맥은 따로 있기도 했지만 합류하여 하나의 나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맥족이 예족을 지배하였다고 합니다만 기록에 나타난 형태는 예(濊), 또는 예맥(濊貊), 또는 맥(貊)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예와 맥은 분리시켜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의 민족으로 간주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샤오싱안링 산맥 동부 지역에서는 국가의 발달이 미약하고 샤오싱안링 산맥 서부지역에서 국가의 발달이 활발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맥의 일부가 고조선을 구성한 것이죠.
우리는 그 동안 기원 전후, 또는 중국의 한(漢)나라 전후 동북아시아에는 동호ㆍ예맥ㆍ숙신 세 민족이 서로 대립하면서 살아간 듯이 배우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아무런 반발도 없이 수용했습니다.
우선 그 동안 어떻게 배워오고 가르쳤는지를 한번 봅시다.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북방의 예맥족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융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주의 중부와 서남부, 한반도 동북부에 살고 있던 예맥족은 다시 고조선을 세운 조선족과 부여ㆍ고구려ㆍ옥저ㆍ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① 만주 서부[요서(遼西) 초원지대]는 동호(東胡)의 근거지로 오환ㆍ선비계(鮮卑系)이며 몽골계이고 ②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소흥안령-장백산맥]는 숙신ㆍ읍루의 후예이며 후에 만주족으로 불리는 말갈ㆍ여진의 거주지이며, ③ 송화강-요하 유역의 중부 만주평원(소위 동북평원)과 훈강(渾江) - 압록강 - 대동강 일대의 산악지대는 바로 고조선과 부여ㆍ고구려인들을 포함하는 예맥의 근원지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 ①]을 보면 이해하기 힘듭니다. 동호·숙신·예맥을 무슨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단순히 중국의 사서(史書)에 나오기 때문인가요? 그 동안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어떤 관념에 갇혀 사물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림 ①]을 보세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동호는 결국은 고조선의 영역과 일치하는 지역인데 왜 별도로 나눕니까? 또 이 지역은 후일 고구려가 모두 통합한 지역입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나눌 수 있는 지가 궁금합니다. 갑자기 새로운 민족이 이주해온 흔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습니다. 고조선이나 부여는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요동 만주 지역에서도 한족(漢族)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왕이 출현한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류의 책들이 다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지역의 인구와 지리적 특성을 거의 모르고 지적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유목이나 수렵은 무계획적이고 자연환경에 큰 영향을 받으므로 국민총생산(GNP)이 매년 일정하지도 않고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죠. 더구나 인구 증가도 한계가 있어 사회가 상당한 부분 정체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유목국가에서는 혈통적으로 가까운 씨족이 모여서 부족을 이루고, 부족이 모여 국가를 이룹니다. 유목사회가 국가를 형성할 때는 그들 부족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부족장이 군주가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즉 유목국가의 특징은 부족 연합국가(部族聯合國家)라는 것이죠. 이 점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지향하는 중국의 정치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더구나 만주 일대는 매우 광대한 지역이지만 인구가 극히 희소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지역적으로 인구를 나누기 시작하면 수십~수백 종의 부족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로 통치하기도 불가능하지요. 왜 그럴까요?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나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국가체제를 구성하여 오는 경제적 편익(benefit)보다는 비용(cost) 발생이 너무 크다는 말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지금부터 거의 2천 년 전에 현재의 남한(한반도 남단)보다 10배 이상 큰 곳에 수만~수십만 정도가 여기저기 흩어져 산다면 그런 곳을 어떻게 통치하겠습니까?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어느 곳에 행정 중심지를 세우고 어떻게 군대를 주둔시킵니까? 그리고 무기가 겨우 칼이나 창 정도인 시대에 흩어져 살면서 전투력도 왕성한 유목민들을 어떻게 제대로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한(漢)나라 때 기원전후로 실시된 인구조사에 따르면 만주의 총인구는 1백만 명 수준이며 인구밀도도 1.31명/km2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지금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시대지요. 그 후 만주의 총인구는 1201년에는 3,643,975 명, 14세기 후반기에 3백만 명, 1491년에는 총인구 435만 명, 인구밀도 5.42명/ km2 이었다고 합니다[趙文林ㆍ謝淑君 『中國人口史』(北京 : 人民出版社, 1988)]. 그리고 17세기 청 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가 중국(명나라)의 대규모 침공(30만 명 규모)을 격파하기 위해 최대로 동원한 군대가 겨우 2~3만도 채 안됩니다(만주 부분에서 다시 봅시다).
그리고 인구 1백만, 또는 3백만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일정 지역에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인구밀도 자체도 허수(虛數)일 가능성이 높지요. 그래서 흔히 만주를 ‘바람이 스쳐가는 땅’이라고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붙박이 농경민과는 다르지요. 이들은 이동성(移動性)이 강하고 그 행동반경은 대단히 넓습니다. 농경민의 입장에서 보는 유목민족과 실제의 유목민족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둡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유목민은 농경민이 사용하는 토지의 열 배에서 스무 배 정도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목민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한족(漢族) 사가(史家)의 눈에는 이들이 요서 지역에서 출몰하면 동호(東胡)가 되고 요동 지역에서 출몰하면 예맥이 되어 버리겠죠? 그러다가 한참 밀려가서 두만강 유역에 나타나면 읍루가 됩니다. 실제로 유목민들이 요서 지역에서 두만강까지 가는 길은 사흘도 걸리지 않는데 말이죠.
따라서 한족(漢族) 사가(史家)의 눈에는 분명히 다른 종족으로 보고 기술하더라도 실제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알타이 산맥에서 압록강까지 가는데 말을 타면 2주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농경민이 이 길을 걸어서 간다면 아마 살아서는 다 가지 못할 겁니다. 따라서 유목민의 특성을 전제하지 않고 유목민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이 될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림 ①]에서 나타나는 숙신(肅愼)ㆍ읍루(挹婁)도 실제와는 좀 다릅니다. 숙신이 반드시 만주 동부와 연해주에만 출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숙신은 현재의 산시성(山西省)과 베이징(北京)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서 막 출현합니다.
그리고 읍루는 그 민족적 계열이 가장 혼란하여 동북아시아 전체 역사를 혼란에 빠뜨린 민족입니다. 분명한 것은 읍루를 해명해야만 쥬신의 비밀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읍루는 숙신이 아니라 아이누족을 의미합니다. 즉 숙신과 일정한 교류를 가진 정도의 아이누족이라고 봐야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는 『진서(晋書)』에 나타나는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는 식의 표현은 읍루에 대한 혼란을 크게 가중시킨 서술이죠. 이 때문에 숙신은 오히려 안개 속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숙신 대신에 사용한 읍루가 아닌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는 읍루는 예맥계열이 아니라 아이누족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아이누족이 살고 있는 연해주(두만강 동북부)에서 태평양 북부 연안에 이르는 지역은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인구가 극히 적어서 사실상 민족으로 분류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인구 규모라고 봐야합니다. 이 부분은 숙신편에서 다시 깊이 다루고 이 정도로 일단 넘어갑시다.
이 정도 이야기를 하고나면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은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김 선생, 당신 말이 이상해. 도대체 당신 결론은 뭐야? 그러면 예맥·동호·숙신이 같다는 거야 뭐야?”
맞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다만 예맥·동호·숙신 등이 ‘같다’는 말보다는 ‘구별이 안 된다’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분포 범위가 지나치게 넓은데다 인구는 극히 희박하면서도 이동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저기서 출몰할 수 있죠) 여러 가지 변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또 말씀하실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거문화나 장례습속은 민족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잘 바뀌지 않는 대표적인 문화입니다. 장례습속은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고 주거문화를 한번 봅시다[참고로 김한규에 따르면 고조선 문화와 중국 문화가 확실히 다른 부분은 묘장문화(墓葬文化)라고 합니다(김한규『요동사』141쪽)].
쥬신의 대표적 주거문화는 구들, 즉 온돌(溫乭)입니다. 학자들은 구들이 고조선ㆍ부여나 고구려(손진태 선생, 최남선 선생의 견해)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이미 구들이 개발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구들(온돌)은 물론 그리스나 로마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만 쥬신의 주거문화와는 여러 면에서 거리가 있어 이를 제외하면, 온돌의 기원에 관한 대부분의 견해들은 ① 중국 서북부 산시성(山西省), 또는 ② 동호(東胡), ③ 만주 등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대표적인 쥬신의 주거 문화라는 말이죠.
구들(온돌)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중국 북부와 여진족이 살았던 심양 일대에도 분포되어 있습니다. 심양 지역은 바로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중심 영역이죠. 온돌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 곳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랴오닝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연화보 유적인데 이것이 고조선 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곳은 바로 요하(遼河) 중류지역으로 고조선의 중심지이죠. 바로 동호 지역인 셈입니다.
구들(온돌)에 관한 최초의 중국 기록은 5~6세기경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수경주(水經注)』라는 문헌으로 토은현 진궁산의 절 건물에 온돌을 사용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토은은 지금 북경 동남 방향에 인접한 땅으로서, 전문가들은 중국에 있어 온돌의 남방 한계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몽골에서도 게르 바닥에 난방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몽고를 중심으로도 온돌에 관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인들은 양반 다리(가부좌)하고 앉아서 휴식을 하는데 이런 자세는 쥬신족들이 아니면 하기 힘든 자세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 사람은 양반다리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선진시대에는 발(發)을 맥(貊)과 대신하여 사용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조선(朝鮮 : 고조선)을 맥(貊)과 동일시합니다. 그런데 고조선은 맥의 일부에 불과하지요? 후한대(後漢代)에서는 이르러서는 고구려를 맥(貊)과 동일시하기도 하고(『후한서』4 「和帝紀」) “부여(夫餘)는 본래 예(濊)의 땅”이라고 하기도 하고(『후한서』85 「東夷傳」), 동예(東濊)를 가리켜서 예맥으로 칭하기도 합니다(『삼국지』「동이전」)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예(濊)·옥저(沃沮)·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있다”고 합니다(『後漢書』「東夷列傳」: 濊及沃沮句麗本皆朝鮮之地也).
예맥은 중국의 한나라 이전에는 마치 맥과 예가 요동을 동과 서로 나누어 차지하는 것처럼 서술이 되다가 한나라 이후에는 예맥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서(漢書)』에는 예맥조선(濊貊朝鮮)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漢書』24 「식화지」). 앞서 본대로 예와 맥은 하나의 범주로 봐야합니다.
예맥이라는 종족은 『관자(管子)』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허뻬이(河北)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선비나 동호 등도 모두 이들로 볼 수 있습니다. 『한서(漢書)』(「소제기(紹帝紀)」)에 따르면, 예맥은 오환(烏桓)ㆍ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중원에 위협을 주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환ㆍ선비는 동호의 대표적인 민족이 아닙니까? 결국 동호나 예맥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죠.
맥(貊)은 중국의 고대 전적에서 야만족의 대표적인 종족으로 묘사되어왔습니다. 예를 들면 『시경(詩經)』에 “(저 멀리) 추족과 맥족이 사는 곳까지 북쪽 나라 모두 다스리기 위해 왕께서 소공을 제후로 봉하셨네(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라든가 “회수의 오랑캐와 맥족과 같은 야만족, 그리고 남쪽의 야만인에 이르기까지 그를 따르고 복종하지 않는 자 없으니(淮夷蠻貊 及彼南夷 莫不率從)” 라든가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맥은 중국인들이 보았을 때 그저 중국의 북방 또는 동방에 사는 오랑캐로 보이네요. 쉽게 중국식으로 말하면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을 합쳐서 부른 말로 보입니다.
제가 이 글을 인용한 이유는 공자가 구이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이(九夷)는 일반적으로 보면 예맥족의 총칭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한번은 주목할 필요도 있다는 말이죠. 참고로 『한서(漢書)』에는 “사맥(四貉)이 모두 복속하였다.(『漢書』22 「예악지」)”는 말이 있고 다른 문헌에서도 “제맥(諸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동안 많은 연구로 몽골 - 만주 - 한반도에 거주했던 여러 종족들이 동일한 민족, 또는 동일한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연구와 증거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유 엠 부찐은 “맥족의 분포 지역은 오늘날의 랴오시(遼西 : 요하 서쪽) 지역(그 이전 시대에는 산둥반도의 일부 지역 포함), 요하(遼河) 중상류의 계곡, 랴오뚱(遼東) 반도 한국의 서북부 해안 지대를 포함한다. 그리고 예족은 지린(吉林)의 남부 및 동북만주 지역이다.”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유 엠 부찐 『고조선』(소나무 : 1990)].
북한학자 리준영은 맥족은 고대 중국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리국(槀離國)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이고, 북한의 탁월한 사가인 리지린 선생은 이들이 동호(東胡)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맥족이 지역적인 분포나 문화적인 특성이 동호와는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동호 = 맥(예맥)’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리지린 선생은 『고구려역사』에서 B. C. 3세기경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를 침입함으로써 맥족이 멸망”했으며 당시의 잔존세력들이 집단적으로 동부지방 즉 송화강(흑룡강의 최대 지류) 유역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합니다. 또 그들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이며 그 시기는 대략 B. C. 232년경(B. C. 3세기)이라고 합니다.
리지린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황해 연안과 발해만 한반도에 거주했던 종족인 조이족(鳥夷族)과 예맥족이 융합하여 기원전 2천년 경에 숙신(肅愼)이 나타났다고 하고 있습니다(리지린『고조선연구』1963). 여기서 리지린 선생이 지적하는 시기는 의문스럽지만 예맥족과 숙신족도 구분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뻬이(河北) 지역과 남만주지역에서 나타나고 있고, 한(漢)나라 이후에는 흑룡강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죠. 그런데 한(漢)나라 이전 숙신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대부분 겹치고 있으며, 조선(朝鮮)과 숙신이 같이 나오는 기록이 없어 숙신(肅愼)은 조선(朝鮮)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이 부분은 ‘숙신편’에서 다시 논의합시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동호(東胡)나 숙신(肅愼)을 예맥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처럼 보고 있었기 때문이죠. 또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왔습니다. 마치 동호나 숙신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튀면 죽을병이라도 생길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 동호에서 거란(契丹)이 나온 것으로 말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과 몽골(蒙兀)은 민족적으로 다르지 않고 거란 또한 고구려를 구성한 민족과 다르지 않죠. 이 점은 앞으로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밝혀 갈 것입니다.
같은 주거문화, 유사한 장례문화, 같은 토템, 같은 무속(巫俗)에 언어도 같은 계열이고 생물학적 체질과 체격조건도 같은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환경 변화에 따른 생활양식이 다른 것뿐인데 말입니다.
예를 들면 버드나무를 신목(新木)으로 숭배하는 사상은 흉노·몽골·거란·선비·여진·고구려 등 모두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江上波夫 「匈奴の祭祀」『ユウラシア古代北方文化』東京 1948 227-231쪽). 참고로 선비·오환 등도 동쪽과 푸른색을 숭상합니다. 실제로 『삼국지』(「위서」), 『요사(遼史)』 등에 나타나는 오환ㆍ선비(동호)의 습속은 현대 한국인과도 매우 유사할 정도입니다.
이전의 강좌에서 본 예맥의 신화(단군신화)로 파악해 보더라도 중국의 베이징 부근으로 밀려난 예ㆍ맥족들이 요동 - 만주 - 연해주 지역의 곰토템 민족들과 융합하면서 쥬신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곰토템 지역으로만 보더라도 ① 유라시아 아메리카 형(시베리아 산림지대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남 : 야생의 곰을 종족의 수호령, 또는 수렵신으로 간주)과 ② 아이누형(연해주에서 북해도에 걸쳐 나타남 : 곰을 사육하여 의례적으로 죽여서 나눠 먹지만 곰을 조상으로 간주) 등이니 이 지역들은 사실상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북해도에 이르는 태평양 주변의 전 지역을 의미하고 있지요.
제가 이 같이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맥(貊)이라는 명칭은 중국의 사서(史書)로 보면 서주(西周) 시대 이후 나타났다가(『시경(詩經)』「大雅 韓奕篇」)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에는 소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예맥은 없어졌을까요? 그것은 아니지요. 이들의 명칭이 역사 자료에서 사라진 이후 말갈이나 물길(勿吉 : 기분 나쁜 놈), 읍루(挹婁 : 아이누 같은 놈들) 등이 대신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그 동안 우리가 동호(東胡)나 숙신(肅愼)을 예맥과는 다른 별개의 민족처럼 본 것은 2천년 역사연구의 가장 큰 잘못이며 이것이 우리가 쥬신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실패하게 만든 근본 요인입니다.
단순히 예맥이라는 민족의 일부가 고조선을 구성하였다가 역사에서 사라지고 다만 그들의 일부가 북만주로 도망가 부여를 구성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한반도 남단에 흘러들어왔다고만 이해하여 그들의 영역이 현재 한국의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 등이니 그 곳만이 이들의 역사 영역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지요. 그들은 전라ㆍ경상ㆍ충청뿐만 아니라 요동과 만주에도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말이죠.
생각해 봅시다. 요동ㆍ요서ㆍ만주 일대에 있던 모든 예맥족이 고조선이 망하자 일부는 부여로 가고 나머지는 몽땅 한반도로 올 수 있습니까? 기차가 있습니까? 고속버스가 있습니까? 황해 바다를 건너올 페리호가 있습니까? 설령 그것이 있다한들 이들을 어떻게 다 데려온단 말입니까? 더구나 예맥이 사라진 텅 빈 요동과 만주에 동호·숙신·읍루·물길 등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 같이 많은 인구가 타임머신이나 공간이동도 없이 갑자기 어디서 왔겠습니까?
따라서 예맥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숙신·읍루·물길 등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민족이 그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4) 이런 젠장, 거란과 선비와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니
이쯤 했으면 ‘예맥 = 숙신 = 동호’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숙신과 관련해서는 ‘숙신편’에서 궁금증을 해소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숙신ㆍ동호ㆍ예맥 등을 일컫는 범칭으로 ‘범(凡) 쥬신’ 또는 ‘원(原) 쥬신’이라는 용어를 써야한다고 보지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또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이런 젠장, 거란과 선비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니. 김 선생, 거란은 분명히 우리와는 다르잖아? 또 그렇게 배웠어. 사실 거란 같은 오랑캐족속을 우리와 같은 계열의 민족으로 본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아. 기분 나빠.”
허어, 그렇습니까? 흥분하지 마시고 좀 따져봅시다. 제가 앞서 거란의 원류인 동호의 영역이 고조선의 영역과 일치한다는 점은 말씀드렸죠? 그리고 체질이나 체격도 일치하고(‘아침안개 속의 쥬신’), 주거문화나 토템도 일치(‘똥고양이와 단군신화’)한다고 말씀 드렸죠? 그렇다면 그 동호(東胡)에서 거란(契丹)이 나온 것은 아실 테니 일단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遼史)』를 봅시다.
『요사(遼史)』에서는 “(거란 수도인 중경의 동부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遼史』「地理志二」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금법(八條禁法)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遼史』卷四十九 :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고 하고 있지요.
이 요나라야 말로 정치적인 군장과 종교적인 수장을 겸하는 단군왕검(檀君王儉)식 통치를 보여준 대표적 경우입니다.
『요사(遼史)』에 따르면, 요나라의 태조는 “천명을 받은 군주는 마땅히 하늘을 섬기고 신을 경배한다(受命之君 當事天敬神 :「耶律倍傳」)”라고 하여 샤머니즘을 아예 국교(國敎)로 숭상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島田正郞 『遼朝官制の硏究』(1979) 321쪽]
그래도 또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말하시는 분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에이, 그래도 대부분 사학자들이 예맥과 동호계열의 선비(鮮卑)는 다르다고 하던데. 김 선생, 당신 쥬신의 범위를 너무 넓게 보는 거 아니야? 당신, 간단히 말해봐 선비와 고구려가 무어 닮은 점이라도 있는지.”
그렇군요. 좀 더 구체적인 예가 필요하다는 말씀인데요. 이 점을 다시 봅시다.
앞서 본 대로 리지린 선생의 연구는 예맥족과 숙신·선비는 구분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선비와의 연관성에 대해서 간략하나마 알아봅시다.
실제에 있어서 고구려나 몽골은 기원적으로 타브가치(Tabgachi : 拓跋鮮卑), 즉 선비족(鮮卑族)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이 때 사용된 ‘치(chi)’는 몽골계 언어의 인칭대명사입니다. 예를 들면 장사치·벼슬아치 등의 치와 같은 것이죠]. 이 점은 몽골이나 북방 유목민들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참고로 선비(鮮卑)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 교수는 사비(Sabi)라는 만주어가 “상서(祥瑞)롭다”는 의미이므로 기린과 같은 성스러운 동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만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는『유라시아 고대북방문화』에서 가죽 허리띠에 붙어있는 동물모양의 버클의 음역에 불과하다고 고증하였습니다.
타브가치는 흔히 탁발선비(拓跋鮮卑)라고 기록된 민족으로 북위(北魏)를 건설한 민족인데 고구려ㆍ몽골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의 원주지가 맥족이나 몽골과 겹치고(같거나 인근지역)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나 풍속이 거의 같다고 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82쪽, 94~95쪽].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는 사신이 와서 북위의 세조(世祖)에게 민족 발상지를 설명해주자 세조가 그 곳에 사람을 파견하여 축문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魏書』「烏洛侯傳」). 그런데 내몽골 자치구 후룬뷔일멍(呼倫貝爾盟) 어룬춘(鄂倫春) 자치기(自治旗) 아리하(阿里河) 진 서북 10km 지점에 있는 천연동굴에서 이 축문 비석이 1980년 7월 30일에 발견되었다는 것이지요[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97쪽]. 이 비석은 아리하, 즉 아리수(阿利水) 인근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이 강 이름이 고구려의 시조가 건너간 강과 같은 이름이죠. 이 지역은 대체로 따싱안링산맥[대흥안령(大興安嶺山脈)]과 샤오싱안링산맥[소흥안령(小興安嶺山脈)]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위(北魏 : 386-535)는 북중국을 통일(439)하여 고구려와 이웃하고 남방으로는 한족(漢族)의 송나라(420-479)와 대치합니다.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 따르면, 장수왕의 부음(494)을 듣고 북위의 효문제는 “오호, 슬픈 일이로다. 내가 직접 문상(問喪)가지는 못하더라도 이곳에서나마 애도(哀悼)를 표하고자 하니 제단을 마련하고 상복을 준비하도록 하라.”라고 합니다(『魏書』高祖 紀第七下 : 帝爲高麗王璉 擧哀於城東行宮). 이 기록은 그대로 『삼국사기』와 일치합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長壽王 七十九年 : 王薨 … 魏孝文聞之 制素委貌 布深衣 擧哀於東郊).
그 동안 우리는 한국인은 북방의 예맥족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융합되었다고 알아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족(韓族)이라는 개념도 삼한(三韓)식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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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족(韓族)이라는 말도 그 근원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한(韓)이라는 말이 그저 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 지방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착각하고 있네요. 그저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것을 앵무새처럼 인용하고 있습니다.그러면서도 이들은 기원후 5세기경에 고구려로 통일되는 것은 인정합니다.
‘아리수’(阿利水)를 아십니까? ‘아리’는 ‘(깨끗하고) 큰’ 이라는 뜻이므로 ‘아리수’는 큰 강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바로 서울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한강(漢江)을 옛말로 ‘아리수’라고 합니다. 강 이름으로는 매우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아리수(阿利水)는 한강의 옛 이름으로 고구려 시대에 한강을 ‘아리’ + ‘수(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부분을 좀 더 알아봅시다.
한강은 한사군(漢四郡)시대나 삼국시대 초기에는 대수(帶水)라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강의 이름이 ‘아리수’라고 한 것은 영락대제비(광개토대왕비(碑))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영락대제비는 ①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세계(世系) 및 영락대제의 행장(行狀), ② 영락대제의 정복활동과 그 성과, ③ 영락대제 능에 대한 관리방법 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중요한 부분은 ② 정복활동과 성과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모두 8개의 정복기사가 적혀 있죠. 바로 영락대제비에는 한강을 아리수(阿利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보시죠.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부여의 잔당들(백제)’의 근거지인 여러 성들을 토벌하였다. … [토벌한 여러 성들의 이름 나열] … 그러나 ‘부여의 잔당’들은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여기저기서 대항하여 싸우니 이에 왕이 크게 노하였다. 왕은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성들을 압박하자 … ‘부여의 잔당’들은 개구멍(근거지를 낮추어 부른 말)에 숨어들어가 있다가 잔당의 우두머리(백제 아신왕)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옷감 1천 필과 남녀 1천명을 데리고 나와서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머슴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왕)은 이런 허물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왕은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잔당 우두머리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原文]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여기서 보면 백제에 대하여 ‘잔(殘)’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백제(百濟)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것은 부여의 잔당(殘黨)이란 듯입니다. 즉 이 당시 부여는 힘도 없이 사실상 고구려의 보호국(속국)에 불과하면서도 그 잔당들이 여기저기서 부여를 만들어서 고구려에 대항하고 있으니 이것을 성가시게 생각한데서 나온 말로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노골적으로 부여를 비난하여 ‘부여의 잔당’이라고 하지 못한 것은 고구려 역시 부여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당시 사정을 좀 더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부여의 잔당’이라고 번역 해드린 것이지요.
어쨌든 한강을‘아리수’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권 25)에도 한강을 ‘욱리하(郁利河)’라고 하는데 이 ‘욱리(郁利)’라는 발음은 ‘유리[yùli]’로 나타나 결국 아리수와 유사한 발음이 납니다.
그 후 한강은 백제가 동진(東晋)과 교류하고 중국 문화를 수입하면서부터 중국식 명칭인 ‘한수(漢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한강은 ‘아리수’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버리고 한강(漢江)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새끼 중국인’을 자처하는 소중화주의자(小中華主義者)들 덕분이라고 봐야겠지요? 이들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이 강 이름조차도 ‘한강(漢江)’이라고 바꾸어버렸죠. 서울(Seoul)도 ‘한성(漢城)’이라고 부르죠.
참, 못 말리겠습니다. 이렇게 지독한 사대(事大)ㆍ중화주의자(中華主義者)들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들은 한국이 중국의 식민지가 되면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병이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깊은 것이죠. 정말 세대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한강(漢江)을 ‘아리수’라고 바꾸어야 합니다. 만약 혼란이 심하다면 한강의 한문(漢文) 표기를 중단해야하고 한[‘한’이란 크다는 순우리말]가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릅니다.
“김 선생, 좀 지나치게 굴지 마. 한강이라는 지명은 벌써 1천 5백년도 넘게 사용 되어 왔어?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이름을 고쳐라 마라 하는 것이 교양이 있는 소린가 말이야?”
옳으신 말씀입니다. 혼란이 심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한강을 아리수로 불러야 한다고 하는 데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몸속에 뿌리 깊은 새끼중화주의를 경계하려 함이고 다른 하나는 이 ‘아리수’라는 말 안에는 엄청난 쥬신의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1) 아리ㄱ 오손(Arig-Usun)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의 시조인 아름다운 성녀(聖女) 알랑 고아에 관해서 『몽골비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알랑고아의 아버지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냥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아름다운 여인 바르고진을
아리ㄱ 오손(Arig-Usun : 청결한 강이라는 뜻)에서 만나 알랑 고아를 낳습니다.
그런데 코릴라르타이-메르겐에게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 사냥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하는 무리들이 나타납니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람들을 모아 코릴라르(Khorilar)라는 씨족을 만들어
성스러운 산 보르칸으로 이동합니다.
성스러운 보르칸 산은 땅이 좋고 사냥감이 풍부한 곳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코릴라르는 코리족(Kohri)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의 명칭이라고 합니다. 이 명칭은 주몽이 코리 부족에서 일단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운 뒤 국명을 코리의 한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고(高 : 으뜸) 구려(Kohri)라고 부른 것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몽골비사』에는 세 개의 몽골 기원설화가 실려 있습니다. 맨 앞에 있는 늑대 설화는 돌궐의 것을 모방한 것이지만 나머지 두 개, 즉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이동설화와 알랑 고아의 설화는 몽골 고유의 설화라고 합니다(박원길, 『북방민족의 샤머니즘과 제사습속』1998). 앞으로 다른 장에서 말씀드리겠지만 알랑 고아 설화는 고구려의 유화부인(柳花夫人) 이야기와 거의 같은 내용이고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한역하면 고주몽(高朱蒙)입니다. 활의 명인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메르겐은 신라의 마립간(麻立干)과 같은 말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쥬신의 마음의 고향인 바이칼 호수에는 삼십 개에 가까운 섬들이 있고 그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이 바로 ‘알흔섬’입니다.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져 온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는 우리 민족과 관련된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알흔섬’사람들의 말로는 이 곳이 바로 코리(Khori)족의 발원지로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夫餘族)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합니다(제가 보기에 이들이 말하는 민족의 발생기원은 이들의 말처럼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민족 이동의 방향도 이들의 말과는 좀 다릅니다. 이 점들은 앞으로 계속 분석해 드리지요). 이 부리야트족은 칭기즈칸의 종족으로 알려져 있죠. 김병모 선생에 따르면 이 종족이 한국인들과 유전인자가 가장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사실을 한반도에 사는 우리만 모른다는 거죠. 그렇지만 이 얘기는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에서는 동명왕을 코리족 출신의 고구려칸(Khan)이라 부른다고 합니다(정재승 :『조선일보』2003.09.25).
다시 생각해봅시다. 이 이야기들을 왜 우리만 모르는지. 일부러 피하는 걸까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처럼 중국이 ‘부모의 나라’여서 그런가요? 그래서 중국에 누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숨긴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과거에는 영광스러웠지만 이제는 별 볼일 없다 뭐 그런 걸까요? 그런데 ‘뿌리를 찾는 일’은 볼 일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정재승 선생에 따르면 ‘알혼섬’ 바다는 바이칼호 전 지역 중 가장 수심이 깊고 풍랑이 센 곳으로 예부터 이곳 뱃길을 항해하는 상인에 의해 몸을 던지게 되는 부리야트 심청의 인당수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 비극적인 아가씨는 ‘알혼섬’의 바이칼 인당수에 몸을 던지자 금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로 다시 환생하여 신들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유명한 이야기중의 하나가 ‘나무꾼과 선녀’ 입니다. 이 이야기는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와 내몽골·티베트·만주지역 등에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으나 바이칼호가 그 원류라는 점이 학계의 중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리수’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나온다는 것이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동명성왕)은 대략 개루부 출신(‘舊唐書’)으로 2천년 전 동부여를 떠나 졸본으로 가서 나라를 건국했다고 하죠?
고주몽은 원래 부여사람으로 동부여를 출발하여 보화산(寶花山)을 거쳐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건너 제사, 묵골 등을 만나 졸본(현재의 환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삼국사기』「고구려 본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엄리대수입니다. 대수(大水)는 문자 그대로 큰물 즉 강(江 : 가람)을 의미하겠습니다. 그러면 엄리(奄利[yănlì])는 무얼까요? 두 가지 각도에서 분석해야죠. 하나는 그 뜻이 무엇인지, 다른 하나는 그 위치가 어디인지 말이죠.
첫째, 엄리(奄利[)는 ‘야리[yănlì]’에 가까운 발음이 나고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엄리를 큰 강을 의미하는 ‘아리가람’을 한자음을 빌려서 표시한 말이라고 합니다(신채호,「조선사연구초」『丹齋申采浩全集(下)』1982). 즉 ‘아리수’라는 말이죠.
둘째, 엄리대수를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는 흑룡강으로 보았습니다[『塞外民族史硏究(下)』]. 그럴 수밖에요. 엄리대수는 양자강(揚子江)과 같이 큰 가람을 의미하죠. 그리고 만주와 몽골에서 크고도 큰 강을 의미하는 것은 흑룡강 밖에는 없지요. 흑룡강은 아무르강, 또는 몽골어로 에르군네무렌(Ergünne- Muren)이라고 합니다.
어, 그러면 흑룡강도 ‘아리수’가 되는군요. 어허, 한강(漢江)과 흑룡강(黑龍江)의 원래 이름이 같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무려 1천여 km가 떨어진 두 강의 원래 이름이 같다고 하니 말입니다.
(3) 어, 압록강과 ‘아리ㄱ 오손(Arig-Usun)’도 ‘아리수’라고요?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만주 지역의 여러 가지 연구를 진행했던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압록강(鴨綠江)도 엄리대수라고 하였습니다. 일단은 한강과 흑룡강 사이에 있는 강이 압록강이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아 다행이죠.
압록강에서 ‘압록(鴨綠)’도 앞에서 본 엄리(奄利[yănlì])와 마찬가지로 ‘야뤼(鴨綠[yālù])로 발음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라토리 쿠라키치의 견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죠?
뿐만 아니라 시라토리 쿠라키치는 엄리대수의 다른 명칭으로 ‘아리수’(阿利水[아리 강]), 오열수(烏列水 [아오리에 강]), 무열수(武列水 [우리에 강]) 등을 지적하였습니다(白鳥庫吉, 「黑龍江の異名について」『塞外民族史硏究(下)』74-75쪽).
이형석 한국 하천연구소 대표에 따르면, 주자(朱子)는 천하에 황하·장강·압록강 등, 세 개의 큰 강이 있고 그 가운데 여진이 일어난 곳이 압록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신당서』와 『구당서』 등에 의하면 압록강(鴨綠江)은 물색이 오리대가리처럼 파랗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압록강의 다른 이름으로는 안민강(安民江)·요수(遼水)·청하(淸河)·아리수(阿利水)·패수(浿水)·엄수(淹水)·엄리수(淹梨水)·엄체수(淹遞水)·시엄수(施淹水)·욱리하(郁里河)·비류수(沸流水)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중국에서는 ‘야루’(yalu), 또는 ‘아리, 야루장’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칭기즈칸의 선조들이 떠나온 ‘아리ㄱ 오손(Arig-Usun)’이라는 말로 돌아가 봅시다.
‘아리ㄱ 오손(Arig-Usun)’이라는 말에는 문제의 그 ‘아리’가 또 들어가 있죠? 즉 ‘아리ㄱ + 오손(물, 또는 강)’에서 오손이란 강이란 뜻이므로 결국은 수(水)로 바꿀 수 있죠? 그렇다면 ‘아리ㄱ 오손(Arig-Usun)’도 결국은 ‘아리수’가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참지 못하고 이렇게 따질 것입니다.
“김 선생, 그런 게 어디 있어. 당신 말이야. 운이 좋아서 평양이나 한강 정도는 찾아냈겠지. 예맥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당신이 우리와 족보가 같다는 동호도 그런 게 있어?”
좋은 지적이십니다. 앞에서 지적한 북위가 바로 동호지요?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동호로 분류되는 선비ㆍ오환(烏桓)의 경우에도 이런 것은 많이 발견되고 오히려 그 때문에 현재의 우리민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좀 구체적으로 볼까요?
왕침의 『위서(魏書)』에는 오환의 영혼의 안식처로 ‘붉은 산[적산(赤山)]’이 나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오환은 본래 동호(東胡)이고 그 오환의 명칭이 오환산(烏桓山)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있습니다(「烏桓傳」).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오환산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요나라 때는 오주(烏州)에 오환(烏丸山)이 있었고(『요사(遼史)』「地理志」), 청나라 때 학자가 쓴 책에서는 아로과이비(阿魯科爾泌)부 오란령(烏蘭嶺) 서북쪽 1백여리 지점에 오료산(烏遼山 = 烏丸山)이 있다고 합니다(張睦, 『蒙古遊牧記』). 청나라 말기 학자 띵첸(丁謙)은 오환(烏桓)이 몽골어의 울라간(Ulagan)의 음역이라고 추정하기도 했습니다(丁謙, 「烏桓鮮卑傳地理考證」『蓬萊軒地理學叢書』1915 浙江圖書款叢書). 그런데 여기 나타나는 오환산들의 거리가 많이 떨어진 것으로 봐서 오환산이 여기저기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마치 ‘아리수’처럼 오환산도 유목민들이 그 지명을 들고 다닌 것입니다.
『요사』에 따르면 요나라의 성종(聖宗)은 오환산(적산)이 위치한 경주(慶州) 부근에 말을 세운 후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愛其奇秀) “짐이 죽으면 이 곳에 마땅히 묻혀야겠군(吾萬世後當葬此 : 『遼史』「地理志」).”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오환산이란 죽으면 돌아가는 산으로 볼 수 있겠지요. 이 산은 쥬신의 마음의 고향이자 조상님들과 그 신령들이 살고 있는 곳이죠.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환인들이 병들었을 경우에는 주로 쑥뜸과 달군 돌로 아픈 부위를 문질렀다고 하는군요(王沈,『魏書』).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오환의 ‘붉은 산[적산(赤山)]’은 바로 쥬신의 성산(聖山) 부르항산(Burkhan Khaldun), 또는 불함산(不咸山)과 흡사한 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박원길 교수의 책(『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68~72쪽)을 참고로 하시면 됩니다.
몽골 전문가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현재 몽골에서도 지명조사의 결과 부르항(Burkhan)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다양하게 분포되어있다고 합니다. 부르항 산의 특징이 버드나무가 자라며 사람들의 출입이 가능한 나지막한 산이라는 것이지요. 『몽골비사』에서는 “주변에 수풀이 우거지고 사냥감이 많은 곳(9, 102, 103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특징들이 오환의 거주지 곳곳에 나타나는 붉은 산[赤山]과 자연 환경적 특성이 거의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민족이 이동할 때 그 땅이름도 가지고 다니는 경우는 비단 쥬신의 역사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요. 앵글로색슨(Anglo-Saxon) 민족의 경우에도 영국의 요크(York = Yorkshire)를 미국에 옮겨온 것이 바로 뉴요크(New York)아닙니까? 캐나다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도 영국의 잉글랜드(England)를 옮겨 놓은 것이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도 영국의 웨일즈(Wales)를 옮겨다 놓은 것이죠. 미국의 버지니아(Virginia)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와 퀸즈랜드, 뉴질랜드의 퀸즈타운(Queens town) 등은 모두 영국 여왕을 기리는 땅이름이죠? (참 앵글로색슨 민족도 쥬신족 만큼이나 세상을 두루 다녔군요)
아하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지명만으로도 민족의 역사의 일부를 볼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요?
구체적으로 범(凡)쥬신은 한족(漢族)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허베이(河北) → 요동 (遼東) → 만주 → 북만주 등으로 이동하여 부여가 건설되었고, 다시 북만주(길림, 또는 농안지역) → 압록강 중류(고구려)ㆍ어룬춘 아리하(몽골) → 한반도 중부 ‘아리수’ 유역 등지로 이동해갔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선비(북위)나 몽골·고구려 등은 부여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무리는 후일 북위(北魏)나 원(元) 제국을 건설한 몽골로, 또 한 무리는 고구려(高句麗)로 내려온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서울을 끼고 도는 한강을 또 ‘아리수’라고 부른 주체가 도대체 누구냐는 것입니다. 고구려요? 제가 볼 때는 아닙니다.
이 말은 부여의 세력들이 남하하여 잃어버린 ‘아리수’(현재의 흑룡강, 또는 아무르강)를 재현한 것이지요. 흔히 말하는 백제인(百濟人), 즉 ‘반도 부여인(夫餘人)’들을 말합니다. 사실 유사하지요. 서울의 한강은 흑룡강(아무르강)보다 폭은 좁지만 대도시를 끼고 도는 큰 강임에는 틀림이 없죠. 파리의 세느강이나 런던의 템즈강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시작
예맥이라는 종족명은 『관자(管子)』에 처음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때 말하는 예맥은 하북(河北)의 동북부 지역의 거주민을 의미하였습니다. 즉 현재의 베이징으로부터 요동 - 만주 일대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이후 한(漢)나라 때의 문헌 사료에 빈번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맥이라는 말이 조선이라는 말보다 앞에 나온다는 것이죠.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한 이옥(李玉)의 연구에 따르면, 맥족(貊族)이 중국 사서(史書)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B. C. 7세기경인데 이 때 이들의 거주지는 섬서(陝西), 하북(河北)이라고 합니다. 이후 이들은 B. C. 5세기경에 산서(山西), B. C. 3세기경에는 송화강 유역으로 이동한 뒤 다시 남하했다고 합니다(이옥, 『고구려민족형성과 사회』1984).
맥족이 나타난 시기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맥족이 B. C. 3세기경 송화강(흑룡강 최대지류) 유역에서 출현한 것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역이 지난 장에서 보았던 원조(原祖) ‘아리수’ 유역이군요.
그리고 우리말에서 나라[國]라는 말은 강변을 의미하는 (나루[津])라는 말과 어원이 동일하죠? 그리고 이 말은 일본의 ‘나라(奈良)’와 동일합니다. 모두 물가(해변, 강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나라’는 바다를 끼고 있지만 그 바다가 마치 큰 강과도 같아서 분위기가 거의 비슷하지요. 그래서 하내(河內), 즉 ‘가와치’라고도 합니다.
지병목은 소수[小水 : 혼강(渾江)]에 거주하던 소수맥(小水貊)이 구려별종(句麗別種)이라는 말에 주목하여 맥족의 원명은 구려(句麗)이고 이들이 후에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합니다(지병목, 「고구려 성립과정고」『고구려사 연구』1995). 북한학자 리준영은 맥족은 고대 중국사서의 고리국(槀離國)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이고, 리지린 선생은 이들이 동호(東胡)라고 합니다.
이미 앞서 보셨다시피 리지린 선생은 B. C. 3세기경에 연나라가 동호를 침입함으로써 맥족이 멸망했으며 당시의 잔존세력들이 집단적으로 동부지방 즉 송화강(흑룡강의 최대 지류) 유역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또 그들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이며 그 시기는 대략 B. C. 232년경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시기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더 많은 연구가 기대되지만 B. C. 3세기경에 원조 ‘아리수’ 지역(아무르강 : 흑룡강)이 새로운 근거지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맥족은 우리가 지리적으로 알고 있는 동호 지역과 부여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고, 이들은 만리장성 북쪽에 주로 거주하다가 한족(漢族)이 강성해지자 지속적으로 동부로 이주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맥족은 알타이 지역에 거주하던 흉노의 일파로 알타이에서부터 이동한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물론 이렇게 한 방향이 아니라 일부는 송화강 쪽으로 동시에 내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그림 ②]과 같이 표현한 것은 중국의 사서들의 기록에 나타난 이동 경로를 표시한 것입니다(참고로 말씀드리면 알타이에서 동쪽으로 송화강변으로 남하한 사람들은 중국과의 접촉이 없어 기록에 남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그림 ②]에서 B. C. 3세기는 대단히 중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남쪽으로 내려왔던 쥬신([그림②]에서 1,2)이 다시 북쪽으로 옮겨 가서 송화강(흑룡강 최대지류)유역으로 들어가([그림②]에서 3)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알타이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왔던 쥬신들([그림 ③] 참고)과 B. C. 3세기경에 합류합니다. 그래서 비로소 ‘쥬신’이라는 하나의 역사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B. C. 3세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족(漢族)의 압박이 이들의 합류를 촉진한 것이죠. 또 이런 합류의 과정이 ‘단군신화’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것을 그려보면 [그림 ③]과 같이 됩니다.
[그림 ③]을 보면 B. C. 3세기에 새로운 역사공동체 즉 ‘쥬신’이 구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쥬신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한족(漢族)의 영향력도 지속적으로 이동해 와서 이 시기에 이르면 요동지역까지 한족(漢族) 사가들이 요동ㆍ만주 지역의 민족들을 일일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인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 한족사가(漢族史家)에 의해 민족이 나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고고학적으로도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그러면 당시의 사정을 좀 더 소상히 알 수 있으며 [그림 ③]과 같이 기존의 샨시(陝西ㆍ山西) - 허뻬이(河 北) - 베이징(北京) - 요동 방향뿐만 아니라 알타이 동부를 돌아서 흑룡강ㆍ송화강으로도 쥬신이 이동했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죠.
신석기 때 요서지역에 주로 나타나는 홍산(紅山)문화(4000~3000 B. C.)는 중국 문명인 황하(黃河) 유역의 앙소(仰韶)문화 및 용산(龍山)문화와는 성격이 확실히 다릅니다(흔히 중국인들을 앙소문화의 후예라고 합니다). 홍산 문화에서 나타난 토기는 한반도의 것과 유사한 반면,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 형태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홍산문화는 청동을 사용하는 형태로 발전하여 하가점[夏家店 : 내몽골 적봉(赤峰) 하가점촌] 하층(下層)문화(2000~1500 B. C.)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같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하가점 상층(上層) 문화(1000~300 B. C.)는 이전과는 다르게 유목문화의 특징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즉 이전과는 달리 스키타이 동물문양들이 나타나는 등 유라시아 초원지대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앞서 이미 본 비파형 동검은 바로 이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나타나죠.
여기서 잠시 봅시다. 일반적으로 하가점 상층문화의 시기와 지역은 동호의 존속기간과 지역이 거의 일치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인심을 써서(?) 요동지역은 고조선(古朝鮮)의 문화로 요서지역은 동호(東胡)의 문화로 생각해오기는 합니다만, 제가 보기엔 요서와 요동의 문화적 차이가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초에 동호 = 예맥이라고 한 것이죠. 구체적으로 봅시다.
그 동안의 발굴된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 현상은 돌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은 청동검(靑銅劍)과 청동거울 등이 마치 하나의 조를 이루고 있고, 그 합금비율(合金比率)이 한반도·요서·요동 지역 등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파형 동검은 동일한 세력의 기술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들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죠.
그리고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비파형 동검의 발달된 형태인 세형동검이 나타날 즈음 일본 열도에서는 야요이 문화가 시작됩니다. 이 시기는 연(燕)나라가 세력을 키우면서 고조선을 압박한 때이기도 해서 쥬신의 청동문화가 한반도 - 일본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조진선, 『세형동검문화의 전개과정 연구』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2004) 참고].
나아가 홍산문화 - 하가점 상하층 문화의 특성들(빗살무늬 토기·민무늬 토기·고인돌·비파형동검)은 요서 - 요동 - 만주 - 한반도 - 일본 열도에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으므로 제가 항상 주장하는 범쥬신(몽골쥬신 - 만주쥬신 - 반도쥬신 - 열도 쥬신)의 영역과도 일치합니다.
B. C. 3세기 이후 형성되는 ‘쥬신’이라는 공동체의 역사적 특성은 ①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하지만 유목문화(遊牧文化)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② 서역의 발달된 문화를 수용하고 한족(漢族)의 문화를 일부 엿보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전통 문화(傳統文化)를 견고히 유지했으며, ③ 농경과 유목·수렵·어로 등의 다양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사회나 국가들이 등장했고, ④ 신화(神話)의 경우도 요동과 만주 및 한반도 등을 중심으로 남북방계가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쥬신의 일부 세력들은 중국 문화에 대한 강한 동경(憧憬)을 요동과 만주ㆍ한반도 땅에 심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이후 쥬신의 역사에서는 일부 세력이 철저히 한화정책(漢化政策), 또는 친한족 정책(親漢族政策)을 수행함으로써 쥬신의 내부에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쥬신족 내부의 갈등이기도 하지만 한족(漢族)들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의 성공적인 정착과정이기도 합니다. 부여와 반도부여(백제 : 말기는 제외), 요(遼)나라와 북위(北魏), 신라(통일기), 한반도의 조선(朝鮮) 등이 대표적인 경우지요.
고조선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유 엠 부찐은 알타이족인 예맥의 구(舊) 발상지는 몽골 알타이와 랑산(狼山) 산맥 사이이며(알타이산맥 부근), 신(新) 발상지는 장백고원(백두산 부근)으로 보고 있고, 그 증거로는 깐수성(甘肅省)의 고분에서 출토된 두개골과 랴오닝성(遼寧省) 적봉(赤峰)의 고분에서 출토된 두개골이 유사하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유 엠 부찐 『고조선』(소나무 : 1990) 107쪽].
앞서 본 대로 쥬신과 한족(漢族)의 전설적인 대규모 전쟁인 탁록대전(琢鹿大戰 : 연대 미상)으로 쥬신은 요동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며 요동을 중심으로 번성한 것이 고조선이겠죠? 이후 다시 한나라의 압박으로 동만주로 송화강으로 이동해 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기록들의 연대를 신뢰하기 어렵지만 치우천황은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인물로 보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철기가 발달된 시기가 B. C. 5~7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시기의 요동의 변화를 충분히 알 수 있죠. 물론 전설상으로는 탁록대전이 B. C. 2000~3000년대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시기를 믿기는 어렵겠죠. 물론 과거의 시간 개념은 오늘날과는 많이 다릅니다. 아담(Adam)은 930세에 죽었다고 하지요?
몽골학을 전공한 박원길 교수는 이 맥족의 원래 이름은 ‘코리’라고 합니다. 즉 ‘위략(魏略)’이나[위략에는 고리(槀離 : 중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까오리])] ‘몽골비사’의 기록처럼, 맥족의 원래 명칭은 모두 코리(Khori)를 음역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몽골은 ‘몽골비사’에서 몽골의 기원이 이 코리족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몽골 문화 가운데 한국인들과 유사한 것이 많고 외모나 체격 등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닮았습니다.
윤내현 교수(단국대)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현재의 몽골인들의 주류 종족은 보르치긴족이라고 합니다. 칭기스칸을 배출한 종족이죠. 윤내현 교수는 이 보르치긴족이 몽골로 이주해 가기 전 북만주 어르구나하 유역에 거주했던 종족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고대 북만주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점에 주목하면 이들은 결국 고조선을 구성한 종족이라는 말이 된다는 것이죠. 이 후 고조선이 붕괴된 후 이 지역은 동부여 영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보르치긴족은 한민족의 한 갈래이거나 아주 가까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로 한민족에서 갈라져 나갔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몽골과 코리족들은 형제, 또는 자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사기』(흉노전)나 『산해경』에 연나라가 맥국을 쳐서 내몰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시기는 B. C. 3세기경입니다. 부여와 고구려는 고리국(槀離國)에서 나왔고, 맥국(貊國)은 결국 고리국의 별칭이겠지요(이 고리국이라는 말을 반드시 기억해두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쥬신은 ‘고리국 → 부여 → 고구려’라는 건국의 방향이 나타나게 됩니다(물론 이 고리국은 예맥 전체를 포함한 나라는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갑시다. 진수의 『삼국지』(「동이전」) 에 따르면 “예(濊)는 현재 동부에 연한 함경도 지방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마치 숙신 내지는 읍루로 들리지요?). 즉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 등에 인접해 있다고 하거든요(『삼국지』「위서」東夷傳). 그런데 역시 같은 책 『삼국지』에는 부여의 경우 “나라 안의 오래된 성을 예성(濊城)이라고 불렀다(「위서 東夷傳」夫餘).”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부여(夫餘)의 국호가 사용되기 전에 부여인들은 스스로를 ‘예’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과 관련하여 체계적인 기록으로는 가장 처음 나타나는 책이 바로 『삼국지』「위서(魏書)」입니다. 그런데 예(濊)에 대한 기록을 보면 몇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요약해 봅시다.
첫째, 현재의 지린(吉林)ㆍ하얼삔 일대의 부여도 예(濊)라고 불렀고, 현재의 함경도 지방의 사람들도 예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濊)의 범위가 한반도 북부에서 흑룡강(아무르강)에 이르는 정도로 광대한 영역의 거주민을 나타내는 총칭으로 사용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 명칭은 말갈이나 물길을 지칭하는 지역의 범위만큼이나 넓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런데 부여(夫餘)는 맥(貊)족이 건설한 나라인데, 또 그들이 과거의 성을 예성(濊城)이라고 했다는 것은 맥족이 예족을 통합했거나, 아니면 하나로 융합되었거나, 아니면 원래부터 같은 민족일 수가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부여는 예족과 맥족이 결합하여 형성된 국가라고 볼 수 있겠지요. 현재 남북한의 학자들은 나중에 나타난 맥족이 선주민이었던 예족을 동화ㆍ통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셋째, 한(漢)나라 때 이후의 기록들은 대체로 예맥족(濊貊族)을 하나의 범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예맥족의 활동범위는 함경도에서 흑룡강에 이르는 지역이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바로 예맥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B. C. 3세기경에 흑룡강(黑龍江) 중류(송화강) 지역에서 ‘고리’ 족이 등장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가들이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몽골은 고리 족에서 분리되어간 종족의 일부로 추정되는데 이 점은 일본의 역사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의 연구와 일치합니다[시라토리 쿠라키치는 몽골-고구려-탁발선비(타브가치)의 원주지가 흑룡강(黑龍江) 중상류 일대인데다가 그들의 언어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고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 일대에서 많은 관련 유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몽골 부분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몽골비사』의 기록을 보면 고리족의 이동과 고리족의 일파인 몽골의 이동로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몽골은 이후 4세기 후반 북위를 건설하고 11~12 세기 경 흑룡강(黑龍江) 상류(오논강 : Onan)까지 진출했으며 13세기에 크게 발흥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 55쪽).
따라서 흑룡강을 포함한 만주 전체 지역과 요동 및 한반도 북단의 지역민들을 중국인들은 예맥(濊貊)이라는 불렀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알타이에서 남진한 흉노의 일파 가운데 하나인 맥족은 한족(漢族)과의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요동과 만주로 밀려가 동북지방에 산재하고 있던 부족들과 융합하여 예맥이라는 민족으로 거듭나고 일부는 국가체제를 갖추어 갔을 것이라는 말이죠(그리고 앞에서 우리는 동호·선비 등과 예맥이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예맥은 경우에 따라서 예로, 또는 맥으로 되어있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 예맥이 워낙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초기 쥬신의 역사)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지요.
① 맥족은 고리국을 건설 - 맥국의 별칭이 고리국(?~?).
② 고리국의 일부 세력이 분파되어 부여(?~494)를 건설 - 예맥의 융합.
③ 부여국의 일부 세력이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 .
④ 남쪽으로 이동해 간 예맥족은 일찌감치 고리국(고구려 : ?~668)을 건설.
⑤ 서쪽으로 이동해 간 예맥족은 북위(北魏 : 386~535)를 건설.
⑥ 북위를 건설한 예맥의 일부가 후일 몽골제국(1271~1368)을 건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부여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봅시다. 부여는 고조선·고구려 등과 상당기간 공존하면서 예맥문화권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한(漢)나라 때 예맥을 고구려와 부여를 지칭하는 말로서 사용했습니다. 고구려와 부여는 그 점에 있어서 단순히 요동의 국가라고만 보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부여와 고구려는 쥬신족들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호수(湖水)’ 같은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漢)나라가 중국사의 호수이고 로마가 유럽사의 호수였듯이, 쥬신의 역사에 있어서도 고구려와 부여는 예맥이 모두 거쳐 가는 하나의 호수였습니다. 로마의 역사와 다른 점은 고구려와 부여는 끝없이 계승되어왔다는 것이죠. 여기서는 일단 부여만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삼국지』의 부여전(夫餘傳)에 따르면 부여의 위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여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현도(玄免)에서 천리가 떨어져 있다. 남으로는 고구려와 접해있고 동으로는 읍루(挹婁), 서로는 선비(鮮卑)와 접하여있다. 북으로는 약수(弱水)가 있고 지방은 2천리가 되며 호수(戶數)는 8만이다.”
부여의 터전은 대체로 현재의 눙안(農安)에서 하얼삔(哈爾濱)에 이르는 지역으로 보이고 약수는 송화강으로 추정이 됩니다. 특히 현재의 하얼삔 바로 남쪽에 위치한 쏘앙청(雙城) 아래에 금나라의 발상지인 아르추꺼(阿勒楚喀)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그와 같이 추정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삼국지』에 나타난 부여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긍정적입니다.
부여와 비교해보면 고구려에 대한 중국 사서들의 평가는 형편없습니다. 물론 고구려가 중국의 북방에서 강대한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특히 쥬신족에게 밀려서 양쯔강 남쪽으로 밀려간 한족(漢族)의 남조(南朝 : 동진ㆍ송ㆍ제ㆍ양ㆍ진 : 317~589) 국가들의 입장에서 고구려는 매우 두렵고 성가신 나라였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삼국지』위서(동이전)에도 보면 고구려는 좋은 밭이 없어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부족하고 “성질이 사납고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남사(南史)』「열전(동이 고구려)」에도 “사람들이 흉폭하고 성질이 급하며, 노략질을 좋아하고(人性凶急喜寇) 풍속은 음란(其俗好淫)하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兄死妻嫂)”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석은 농경민들의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형사취수(兄死妻嫂)는 농경민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유목민들에게는 불가피한 경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에 대한 서술은 부여와 비교해볼 때 매우 신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부여에서도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것은 흉노의 풍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경우에는 여러모로 사납고 음란(淫亂)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아마도 고구려가 이주해간 지역이 평야지대가 없는 산악지대라서 식량을 자급하기 힘들자 주변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한데서 이 같은 평가가 나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고구려가 부여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고구려와 부여가 서로 다른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농업과 목축을 동시에 할 수 있었던 부여와는 달리 대부분 산악지대였던 고구려는 일찍부터 전쟁을 통한 식량의 확보라는 국가정책 방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러나 오히려 이 같은 특성으로 말미암아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같은 계열의 종족이라도 고구려의 성장은 부여로서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어 부여는 고구려나 주변 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정부들과 긴밀히 협조하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구려와 부여의 싸움은 이후 수백 년, 아니 천년 이상이나 계속되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부여는 고구려와의 대립에서 패배하지만, 다시 반도부여[백제(百濟)]로 통합되어 고구려와 처절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계속합니다.
고구려의 천년의 적인 부여는 346년 전연의 침입으로 사실상 와해되었고, 410년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자 영락대제(광개토대왕)는 부여를 대대적으로 정벌합니다. 결국 이름만 남아있던 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의해 패망합니다. 6세기 이후 더 이상 공식적으로 부여는 존재하지 않지요.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형제간의 싸움은 부여와 고구려의 싸움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반도부여(백제) 왕들의 전사(戰死)입니다. 고려나 조선시대를 보면 국왕(國王)이 전사한 경우는 없지요. 그런데 백제는 사정이 다르죠.
반도부여(백제)의 책계왕(責稽王 : 재위 286~298)은 고구려가 대방군을 공격했을 때 군사를 보내 대방을 돕자, 고구려가 이에 대해 분개하였고 298년 낙랑군과 맥인(貊人)이 쳐들어와 피살됩니다. 책계왕의 아버지는 고이왕(古爾王)이고, 왕비는 대방왕의 딸이었습니다. 이 점은 앞으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인데 ‘백제편’에서 상세히 살펴보지요(古尒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 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旦城ㆍ蛇城, 備之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 『삼국사기』「백제본기」).
그리고 책계왕을 이은 분서왕(汾西王 : 재위 298~304)도 낙랑태수의 자객에 의해 살해됩니다(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大守所遣刺客賊害, 薨). 이에 맞서서 반도부여(백제)의 복수전도 치열하게 전개되어 결국은 반도부여(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입니다. 그렇지만 또다시 개로왕(蓋鹵王 : 재위 455」475)은 장수왕에게 도성이 함락당하고 피살됩니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압박에 대하여 외교적인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시도합니다. 개로왕은 위나라에 조공을 하며 고구려를 토벌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위나라가 들어주지 않자 조공을 끊기도 합니다.
보세요. 국왕이 죽는 일 자체가 일어나기 힘든 일인데 그 대부분이 고구려와의 전쟁, 또는 복수전에서 비롯되고 있지요?
신화상으로 보면 고리국(槀離國 : Kohri)에서 부여가 나온 것이고 그 부여에서 다시 고구려가 나왔지요. 즉 A(고리) → A'(부여) → A"(고구려 = 고리국) 라는 형태가 됩니다.
부여는 물론 고리국과 사이가 좋지 않을 것입니다. 갈등이 심하니 그 곳에서 뛰쳐나왔겠지요.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부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요?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고구려가 부여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은 신·구세력의 갈등과 같은 것이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부여와 고구려는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죠?
그렇다면 고구려는 원래 부족으로 돌아가서 자기들이 고리국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부여를 제압하는 더 큰 논리가 되는 것이죠. 왜냐구요?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고리국의 일파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고리국으로 회귀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강력한 정통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수 있겠지요.
고리국을 축으로 하여 고구려와 부여의 싸움이라는 것도 결국 이 싸움이지요. 그래서 신화도 공유(共有)하는 것이고, 그 정통성을 차지하기 위한 극렬한 투쟁이 진행됩니다. 마치 호랑이가 개보다는 고양이를 더욱 미워해서 잡아 죽이듯이 말입니다. 『삼국지』에서 원소(袁紹)의 부인(유씨 부인)과 그 아들 원희(袁熙)가 원소의 여러 명의 첩들과 그 첩들의 자식들을 죽여서 얼굴을 짓이기는 등 필설로 하기 힘든 잔인한 짓을 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김운회,『삼국지 바로읽기』삼인 참고). 이런 극심한 갈등과 악행(惡行)의 원인은 이들이 서로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이죠.
결국 부여는 고리국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이를 벗어나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보다 발전된 문화를 습득하는 한족화(漢族化) 정책을 시행한 반면, 고구려는 고리국의 전통을 중시하여 반한족적(反漢族的)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래서 부여가 철저히 친한족적(親漢族的)인 정책을 추진했었다면, 고구려는 철저히 쥬신적인 전통을 고수한 나라였습니다. 이때부터 벌써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가 시작된 셈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이 두 나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쥬신의 비극(悲劇)도 태동하고 있는 것이죠.
이 처절한 동족상잔이 시작될 즈음 중국은 어떻게 이들을 요리했을까요? 이제 그 점들을 살펴봅시다. 먼저 『전한서』의 기록(「왕망전」)을 한번 보시죠.
“왕망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이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그들은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오히려 피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이 모든 책임이 고구려후(高句麗侯)인 추(騶)에 있다고 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난동을 피우는 것은 역심이 있어서이니 이를 평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여의 무리들은 유순하지만 흉노는 아직도 정벌하지도 못하였고 부여ㆍ예맥이 다시 활동하면 큰 우환거리가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예맥이 큰 반란을 일으키자 엄우에게 명하여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후 추를 유인하여 오게 한 후, 추의 머리를 베어 장안에 전하였다.”[『전한서』권 99 「왕망전」, 始國四年]
위의 기록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왕망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군을 동원하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둘째, 예맥을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부여ㆍ예맥”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은 쥬신 역사의 여명을 밝히고 고구려를 예맥으로 불렀던 증거의 하나가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비밀(秘密)이 숨겨져 있습니다.
즉 우리가 보아온 대로 부여는 예맥이 이룩한 국가인데 부여를 예맥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지요?
중국인들은 예맥을 동북쪽 오랑캐의 범칭으로 사용하다가도 일단 분명히 구별되는 국체(國體)가 형성되면 그것을 그들의 민족으로 분리시켜 하나의 민족으로 새롭게 분류하는 것이죠. 이것은 예맥족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인들의 예맥족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부분의 비중국계(非中國系) 사가(史家)들, 특히 어설픈 한국(韓國)의 사가들이 지적(知的)으로 농락당하고 말지요.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술수와도 연결이 됩니다. 이 점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일찌감치 국가체제가 발달한 중국의 경우에는 교섭당사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느 부족이든지 국가 체제를 갖춘 민족을 분명히 하여 교역이나 조공관계를 확립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지요.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이들과 분리시킴으로써 ‘분할 통치(divide & rule)’의 효과를 노릴 수도 있습니다.
즉, 이미 만들어진 국가와 같은 민족(같은 민족이나 국가를 만들지 못한 상태로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들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동족(同族)간의 갈등을 유발하여 한족(漢族)의 안전(安全)을 보장한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구려 - 부여라는 것이지요.
『삼국지』시대에는 위나라가 요동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요동 땅은 사실상 공손씨의 독립왕국이었습니다. 공손씨는 나라의 안정을 위해 지속적인 대비를 하는 한편으로는 고구려를 공격하여야 했는데 이 때 부여를 협력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부여는 이후에도 조조(曹操)의 위(魏)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도 적극 협력합니다. 이것은 같은 민족이라도 정치적인 변화나 역학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을 축(軸)으로 하여 말이지요. 현재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마찬가지지요.
결국 고구려 - 부여의 영역을 합하여 고찰해보면 대체로 압록강-두만강을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는 흑룡강(송화강) 이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소싱안링 산맥과 압록강 - 두만강에 이르는 지역은 대부분 산지이므로 경제활동에 매우 어려운 지역인 반면 현재의 하얼삔 - 쏘앙청 - 아르추꺼 등지에서 북으로는 치치하얼(齊齊哈爾), 남으로는 푸순(撫順)에 이르는 곳은 광대한 만주대평원(동북평원)이 있어 민족통합을 달성한 종족들이 강대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점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중국 역사의 가장 큰 변수로 변환됩니다.
1970년대 중반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민족사학자 한 분이 “조선(朝鮮)은 숙신(肅愼)에서 나온 명칭”이라고 쓰신 글을 읽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기분이 나쁘고 숙신 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로 ‘숙신하다’는 말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다’는 뜻입니다.
어찌하여 우리같이 문명화되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가 그런 오랑캐에, 미개인들에서 나왔는가 말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비록 형편없이 가난하기는 했지만 오천년 역사를 가진 자랑스러운 단일 민족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똘똘 뭉쳐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숙신하다’는 말 자체가 사람에게 사용하기가 경멸스러운 말인데 도대체 그런 족속들이 우리의 조상이 된다니 말이 됩니까?
당시 사회의 풍조는 한국의 것이면 대체로 수준이 낮고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노래조차도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나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미국 유행가(Pop Song), 니꼴라 디바리(Nicola Di Bari)의 칸쏘네,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의 샹송 등을 들으면서 힘겨운 입시전쟁에서 잠시나마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항상 아름다운 벌판에 우리가 지은 마음의 집은 그림 같이 하얀 미국식 집이었습니다. 크게 유명하지도 않은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가 한국에 와서 이화여대(梨花女大)에서 공연을 했을 때는 아주 난리가 났었습니다. 요즘 오빠부대는 저리가라 할 정도였지요. 지금부터 30~40년 전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숙신의 후예(後裔)라는 생각은 그냥 잊기로 했습니다. 오랑캐이자 미개인(未開人)과 소중화(小中華) 백성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음이 비슷하다는 생각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최루탄 연기 자욱한 대학으로 들어갔으며 숙신은 기억 속에서 멀어져갔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저는 운명적으로 다시 ‘숙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 ‘코리’인가 ‘쥬신’인가?
우리 민족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나타나는 명칭은 예맥(濊貊)과 숙신(肅愼)입니다. 그런데 이 숙신의 문제는 고대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복잡한 문제로 남아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연구자들은 이 숙신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하는지를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 좀하고 넘어갑시다. 숙신[쑤썬]은 그 발음을 보면 조선[짜오썬,또는 쭈썬]이라는 말과 비슷하죠? 현재의 중국음과 과거의 중국음은 차이가 있지만 우리말의 한자음이 중국 고대음에 가까우므로 숙신과 조선은 오히려 비슷하게 들립니다. 현대 중국어가 주로 요동(遼東)ㆍ허베이(河北) 지방의 한어(漢語)를 기반으로 성립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겠죠.
참고로 말씀을 드리면 중국의 학계에서는 과거 예맥족의 말을 ‘예맥어’로 표시하고 있지만, 1945년 이후 남북한의 언어학계에서 이 예맥어를 대신하여 과거 부여사람이 사용한 원시부여어(原始扶餘語)와 고대 요동ㆍ반도에 걸쳐 사용한 원시한어(原始韓語)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원시부여어나 원시한어는 어간(語幹)이 같아서 경상도 사투리나 전라도 사투리의 차이와 같은 방언(方言)의 차이가 있을 뿐으로 보고 있습니다(權兌遠, “古代 韓民族의 石塚文化系統” 『道山學報』제9집).
그나저나 어, 이 야만인과 소중화인(小中華人)이 비슷하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소중화인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조선이나 숙신이라는 말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진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말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기를 쓰고 찾고 있지만 아직 아무도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 동안 제 경험으로 말하자면 조선과 숙신의 기원을 잡으려하면 할수록 마치 무지개처럼 조금씩 멀어져 가는 느낌도 듭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하나의 문제가 생겨납니다.
조선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을 말하는 어떤 고유어를 한자로 표현한 듯 한데 그 원음(原音)이 무엇인지 오늘날에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동안 ‘조선’에 대한 순 우리말 이름에 대한 연구가 있었고, 그 연구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 것이 ‘쥬신’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유사한 말[직신(稷愼)ㆍ숙신(肅愼)ㆍ식신(息愼)]들이 중국 고대 사료에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많이 나타나는 말은 코리(Khori), 또는 까오리·구리·고구려 등의 말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개의 말, 즉 코리와 쥬신 가운데 어느 말이 우리 민족의 범칭(凡稱)으로 타당할 것인지 이제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합니다. 먼저 숙신ㆍ조선이라는 말을 분석해보도록 합시다.
(2) 숙신과 조선
그 동안 민족의 여러 스승들은 조선(朝鮮)이라는 말의 어원을 숙신(肅愼)에서 찾았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의 어원은 숙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고어(古語)가 숙신이라는 것이지요.『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숙신의 옛 이름은 ‘주신(珠申)’, 또는 ‘주리진(朱里眞)’이며 이것은 관경(管境)을 가리키는 만주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신채호 선생은 『만주원류고』를 토대로 조선의 원래 발음은 주신이고 그 뜻은 “주신(珠申)의 소속 관경(管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경’이란 우리 쥬신 민족이 살고 있는 온 누리를 말합니다.
정인보 선생도 은나라ㆍ주나라 시대부터 등장한 숙신(肅愼)이 식신(息愼)ㆍ직신(稷愼)ㆍ주신(珠申) 등으로 기재되었음에 근거하여 이런 형태로 ‘조선(朝鮮)’이라는 나라 이름이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정인보, 『조선사연구(上)』(서울신문사 : 1946) 52쪽].
조선에 대한 말의 기원을 오랫동안 연구했던 러시아의 L. R. 꼰제비찌도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꼰제비찌는 ① 사료에 나타나는 고대 조선족과 숙신족의 인구분포가 지리적으로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 ② 사료 상으로 동이(東夷)에 속하고 있다는 점 ③ 숙신과 조선족의 종족형성 과정이 유사하고 새(bird)라는 공동의 토템을 가지고 있으며, ④ 두 민족 모두 백두산을 민족발상지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L. R 꼰제비찌 『한국의 역사적 명칭』(모스크바 : 1970) 63~67쪽].
그리고 안호상 선생은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은 ① 한국의 고유 명사에서 유래했거나, ② 선비족(鮮卑族)의 명칭에서 유래했거나, 또는 ③ 숙신족의 명칭에서 유래되어 그 파생어가 직신(稷愼), 혹은 주신(珠申)이라고 했습니다.
안호상 선생의 견해를 보면 숙신ㆍ동호ㆍ예백에 대한 구분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조선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맥을 표현하는 말인데 동호는 선비ㆍ오환을 지칭하는 말이고 숙신은 후일의 만주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안호상 선생은 이 세 가지를 하나의 범주로 두고 있습니다. 안호상 선생의 견해를 좀 더 살펴봅시다.
안호상 선생은 아사달에서 유래한 아시밝(첫 빛 : 태양이 처음 나타난 장소)을 중국어로 묘사한 것이 조선(朝鮮)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밝’, ‘숙신’, ‘직신’ 등등은 모두 이 말에서 나온 파생어라는 것이죠[안호상, 「나라 이름 조선에 대한 고찰」『아세아연구』Ⅷ-2 (서울 : 1965) 81쪽]. 즉 조선이란 ‘첫 빛’ 즉 언젠가 태양이 처음 나타난 장소를 의미하는 고대 한국어인 ‘아시밝’을 중국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아사달’, ‘아시밝’, 또는 ‘아사타라’, ‘아이신(金)’ 등등으로 표현되던 지역이나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쥬신’이라는 국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러분들은 의문을 가지실 것입니다. 보편적 명칭이라면서 왜 이렇게 조금씩 다른지 말입니다.
당연합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한국을 ‘코리아(Korea)’라고 하여 현재의 국제어(international language)인 영어로 국명을 표기하지만 이것도 일관성이 없기는 마찬가집니다. 코리아를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꼬레·꼬레아 등으로 부르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솔롱고스’라거나 ‘한꾸어(韓國)’라고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쥬신에 대해서도 조선·숙신·식신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즉 본래의 말에 대한 발음을 한자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마치 고려를 코리아·꼬레·꼬레아 등등으로 묘사하듯이 쥬신을 朝鮮(조선)·肅愼(숙신)·稷愼(직신)·息愼(식신)·發(밝) 등등으로 묘사했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이 모두가 서로 다른 사람들로 보이는 거죠.
리지린 선생은 『고조선 연구』에서 ‘숙신’, 또는 ‘조선’ 이라는 말이 고조선족의 명칭이고 이 말은 고대 한국어로 수도(首都), 또는 ‘나라’를 의미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대단히 타당한 견해입니다. 즉 제가 사용하는 쥬신이라는 말은 ‘태양의 첫 빛이 비치는 나라(해 뜨는 나라)’라는 뜻이고 이 말은 그대로 ‘서라벌(서울)’이라는 말과 동일하지요. ‘서라벌’에서 원래 발음이 ‘’라는 말은 동쪽, 해 뜨는 곳이라는 말이고 벌이란 벌판, 즉 넓고 평평한 땅이죠. 그리고 과거의 국가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촌락을 지배하는 형태였으므로 ‘수도 =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지린 선생의 견해는 타당합니다.
(3) 숙신이 조선에서 나온 아홉 가지 이유
이상의 견해들은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데 있어서 매우 귀중한 말씀들입니다. 그렇지만 여러 스승들의 견해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의문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즉 과연 “조선의 고어가 숙신인가?”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숙신(肅愼)이라는 말이 아사달이나 아사밝을 표현하기엔 다소 약하기 때문입니다. 숙(肅)이라는 글씨는 ‘장엄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태양숭배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조(朝)보다는 확실히 의미가 약하죠? 뿐만 아니라 숙(肅)이라는 글자는 신조(神鳥)를 의미하는 숙(鷫)의 약자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엔 숙신(肅愼)의 고어(古語)가 오히려 조선(朝鮮)이라는 것이지요. 즉 숙신이라는 말은 조선에서 나왔으며 이 말은 조선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말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이 점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째,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이라는 말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단군(檀君)이 나라를 열고 세운 나라가 바로 조선인데, 이때가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 : 요임금을 말함)와 같은 시기였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시기는 대체로 B. C. 2333년경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신뢰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말이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범위가 큰 말이라는 것이죠. 즉 단군신화가 동호를 포함한 예맥족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반도 만주 일대를 대표하는 신화로 정착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이라는 말이 전체 쥬신족들을 대표하는 말로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엄밀하게 보자면 단군은 고조선 지역의 어느 지배적인 종족의 조상신(祖上神)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만주족의 조상이라고 보는 숙신계와 한국인들의 조상으로 보는 예맥계 모두가 공통의 조상신으로 숭배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천관우, 「고조선의 몇 가지 문제」『한국상고사의 제문제』(한국정신문화연구원 : 1987)]
경우에 따라서 단군(檀君)을 선비족의 대영걸이었던 단석괴(檀石塊 : ?~181)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석괴는 고구려의 영락대제(광개토대왕)같은 분으로 『후한서』나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대체로 2세기 중반 남으로는 허베이(河北) 등의 지역과 북으로는 정령(丁靈), 동으로 부여 등에 이르는 곳을 점령한 대정복 군주였습니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사기』에서는 요순의 시대나 하나라ㆍ은나라ㆍ주나라의 조상은 모두 주(周)나라의 조상신인 황제(黃帝)로 되어있지요. 즉 중국이 조상으로 간주되는 신들은 복잡다기하지만 『사기』에서는 이들을 모두 통합하여 화하계(華夏系)인 주나라의 조상신인 황제가 조상신으로 정착되고 있죠. 일본의 저명한 동양사가 카이즈카 시게키(貝塚茂樹 : 중국사학계 교토 학파의 지도적 인물)는 황제가 중국 전역의 조상신으로 확대되는 시기가 전국시대(戰國時代 : B. C. 403~B. C. 221) 중기 이후라고 합니다. 대체로 보면 B. C. 3세기 이후가 되겠지요. 그래서 제가 B. C. 3세기, 또는 한(漢)나라 이후부터 쥬신과 한족(漢族)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셋째, 조선이라는 명칭은 B. C. 7세기경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나타나 있으나 숙신이라는 명칭은 그 보다 2백년 뒤인 B. C. 5세기경에 씌어진 『상서(尙書)』에 처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춘추 시대의 민요를 모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집『시경(詩經)』에는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주나라 왕실을 방문한 것을 칭송한 노래를 전하기도 합니다(韓奕篇). 이 한후를 조선(朝鮮), 또는 고조선의 왕과 직접 연관시키기는 어렵지만 그 시의 내용을 보면 “주나라왕은 한후(韓侯)에게 추족(追族)과 맥족(貊族)까지 내려주어 북쪽의 나라들을 모두 다 맡아 그 곳의 패자(覇者)가 되었다.”고 하여 고조선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이 기록은 지금부터 3천 년 전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아무튼 웬만한 사서(史書)들보다는 오래된 기록입니다.
『관자』에는 “밝조선에서 생산되는 범가죽(發朝鮮文皮 : 『管子』卷23 揆道篇)”이라는 말이 있고 『상서(尙書)』에는 “무왕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이 와서 이를 하례하였다(武王伐東夷肅愼來賀 :『尙書』書序)”는 기록이 있습니다. 『관자』의 말은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관자에게 해내(海內)에 귀중한 일곱 가지 예물이 뭐냐고 묻자 관자는 그 가운데 하나로 밝조선의 범 가죽을 들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밝조선이 조근(朝覲 : 조공)하지 않는 것은 비싼 범 가죽과 태복을 예물로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管子』卷24 輕重甲篇).
넷째, 쥬신의 고유 영역이나 종족을 의미하는 알타이·알탄·아이신·아사달·아사타라·아시나·아사밝·아사다께 등의 말에서 조선이 파생되는 과정은 유추하기 쉽지만 숙신은 유추하기가 다소 어렵습니다.
즉 숙신이라는 말에서 아사달이나 아사타라·아시나·아시밝을 유추하기는 어렵다는 얘기죠. 그러나 쥬신의 고유영역이나 종족을 의미하는 말에서 쥬신, 즉 조선(朝鮮)이 나오고 이 조선이라는 말에서 숙신(肅愼)·직신(稷愼)·주신(珠申)등은 쉽게 나올 수가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말하자면 코리아(Korea)라는 말이 있으면 코레· 꼬레아·코리 등의 말들이 파생될 수 있다는 말이죠].
다섯째, 조선(朝鮮)과 숙신이 같이 나오는 기록이 없어 숙신(肅愼)은 조선(朝鮮)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즉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베이(河北) 지역과 남만주지역에서 나타나고 있고, 한(漢)나라 이후에는 흑룡강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죠. 그런데 한(漢)나라 이전 숙신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대부분 일치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좌전(左傳)』에 “숙신은 연박(燕亳)에 있으며 우리(중국인), 즉 한족(漢族)의 북쪽 땅”이라고 했는데 이 연박이라는 말이 당나라 때의 대학자인 공영달(孔穎達 : 574~648)은 북경(北京) 부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위쪽은 바로 고조선의 영역이죠.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다르지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 책에서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경우, 숙신(肅愼)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사기(史記)』를 보면“연나라는 북쪽으로는 오환·부여·동·예맥·조선과 진번과 이웃하고 있고(夫燕烏桓夫餘東濊貊朝鮮眞番之利 : 권129 貨殖列傳)”,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으며(燕東有朝鮮遼東 : 「蘇秦列傳」)” “진나라 영토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조선과 접하며(地東至海 曁朝鮮 : 권6)” 등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염철론(鹽鐵論)』에서는 “연나라가 동호를 기습하여 천리 이상을 패주시켜 요동 땅에 이르렀고 다시 조선을 공격하였다(燕襲走東胡地千里度遼東而攻朝鮮 : 『鹽鐵論』「伐攻篇」).”라고 합니다. 『전국책(戰國策)』에서는 “소진(蘇秦)이 연나라 문후(文侯)에게 말하기를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으며’ … (『戰國策』「燕策」)”라고 합니다. 또한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山海經』「海內北經」).”라고 하고 있지요.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진(秦)나라가 북쪽으로는 요수(遼水)와 만나며 동쪽으로는 조선(朝鮮)과 국경을 맺는 장성(長城)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어느 곳에서도 조선과 숙신을 함께 사용한 흔적이 없지요.
여섯째, 숙신과 조선이라는 말이 서로를 대신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사기』에 “산오랑캐와 밝숙신, 이들을 일컬어 동북오랑캐라고 한다(山戎發肅愼 謂之東北夷 : 『史記』「五帝本紀」,「本紀」).”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밝조선’이라는 말 대신에 ‘밝숙신’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국인들은 이 말을 들으면 분통이 터질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숙신이 오랑캐로만 알았는데 조선이 들어갈 자리에 숙신이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소중화주의자들이라면 혼절(昏絶)할 일이죠.
일곱째, 조선과 숙신에서 파생된 말이 조선과 숙신과 유사한 말의 변화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즉 조선에서 숙신이라는 말이 나왔고 이 말에서 ‘직신(稷愼)’, ‘주신(珠申)’, ‘식신(息愼)’ 등의 말이 나왔다면 이 말들도 조선이 사용된 것과 유사한 형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 예를 보면 『관자(管子)』에는 “밝조선에서 생산되는 범가죽(發朝鮮文皮)”이라는 말과 유사하게 한(漢)나라 때 대덕(戴德)이 편찬한 『대대례기(大戴禮記)』에는 “밝식신(發息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사기』에 “북쪽에는 산오랑캐와 밝식신이 있다(北山戎發息愼 : 「五帝本紀」)”는 기록이 있죠(참고로 오제시대는 하(夏)나라의 이전시기로 전설상의 시대입니다).
여덟째, 밝조선 이전에 조선이 이미 성립될 정도로 조선이라는 말의 연원이 깊다는 것입니다. 즉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보다는 오래전에 나온 말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나오는 조선이라는 말이 밝조선(發朝鮮)으로 되어있죠? 이것은 조선의 강역(국경이라는 말이 아님)은 매우 넓었으며 밝조선이란 전체 조선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마치 북조선, 남조선 하듯이 말이지요). 물론 나머지 조선의 정확한 의미를 아직은 알 수는 없지요.
일반적으로 밝식신(發息愼)이나 밝조선(發朝鮮) 등을 보면, 밝과 조선이 다른 종류인지 하나를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이들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밝 + 식신(조선) 등을 하나의 말로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밝(發)이라는 말이 단독적으로 사용한 예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朝鮮)이라는 말은 독립적으로 사용되고 있죠. 따라서 조선이라는 개념은 밝조선보다는 훨씬 큰 개념으로 그 이전에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죠.
아홉째, 쥬신계의 건국신화를 보면 고구려와 숙신계의 건국신화가 많은 공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의 주도세력을 숙신으로 보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숙신계라니?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듯한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무엇보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부여와 대동소이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이것이 숙신계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만주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했던 일본의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1876~1940)에 따르면, 주몽이 군사들에게 쫓겨서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따르는 사람은 없고 도피처[흘승골(紇升骨)]에 이르자 세 사람을 만나서 이들과 합류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숙신계와 유사하다는 말이죠. 이 삼(三)이라는 숫자가 열쇠입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이 세 사람이 세 여자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후금(청나라)의 건국신화에도 세 사람의 하늘에서 온 여자[天女]가 나타나고 있지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우리 민족의 명칭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 쥬신의 고유영역이나 종족을 의미하는 말(알타이·알탄·아이신·아사달·아사타라·아시나·아사밝·아사다께 등)이 고유어로 존재.
㉡ 쥬신의 고유영역이나 종족을 의미하는 말을 당시의 국제어(international language)인 한자(漢字)로 조선(朝鮮)으로 표기.
㉢ 조선(朝鮮)이라는 말에서 숙신(肅愼)이 파생.
㉣ 조선(朝鮮) 또는 숙신(肅愼)을 표현하기 위한 많은 말들이 나타남. 예를 들면 ‘직신(稷愼)’, ‘주신(珠申)’, ‘식신(息愼)’ 등.
제가 보기엔 과거 한족(漢族)의 압박으로 고조선(古朝鮮)이 몰락하고 허베이 - 요동 - 만주 - 연해주로 이동하면서 흩어져가는 조선이라는 민족을 부르는 말이 숙신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이 부분은 다음 장을 보시면 더욱 명확해질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조선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우리들의 책 속에 나오게 된 것도 말입니다.
(4) 아이신(金)
조선에 대한 말의 어원을 이제 안다고 해서 해결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또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죠.
‘조선(朝鮮)’에서 조(朝)는 ‘아침’, 또는 ‘찬란한 태양의 영광’, ‘불’, ‘아침 해처럼 빛나는 황금, 또는 금속’ 등의 뜻을 빌려온 것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선(鮮)’은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분석ⓐ]ㆍ[분석ⓑ]ㆍ[분석ⓒ]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분석ⓐ] 조(朝)와 선(鮮) 모두 한자(漢字)의 뜻을 빌려온 경우
조선이라는 말이 ‘장엄한 아침’, 또는 ‘찬란한 태양의 영광’, ‘불’, ‘아침 해처럼 빛나는 황금, 또는 금속의 아름다움’ 등을 그대로 한역(漢譯)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가능성은 매우 낮게 봅니니다. 왜냐하면 조선이라는 말이 단순히 정확히 한역한 말이라면 다양하게 변형된 명칭이 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이와 관련하여 어떤 학자는 선(鮮)이 순록의 겨울 주식인 선(蘚·이끼)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견해는 한자(漢字)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본 견해라고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분석은 일부 부분은 타당할 수 있을진 몰라도 쥬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견해로 전체 쥬신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명칭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쥬신은 단순히 초기 동물 토템단계의 미개한 유목민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죠. 어떤 종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가장 자랑스러운 이름을 부르지 문화적으로 낙후된 유목민의 특성을 자신의 이름(그 연구가 예시하고 있는 이름은 수달·너구리·순록 등)으로 삼겠습니까?
[그림 ③] 유목민의 삶의 근거지 초원 ⓒ프레시안
쥬신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본 대로 ① 천손사상의 표현 및 ② 태양의 숭배와 당시에는 ③ 첨단기술인 금속 제련과 관련된 말이라고 봐야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IT Korea’라고나 할까요?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분석ⓑ] 조(朝)는 뜻을 빌리고 선(鮮)은 어미의 음을 빌려온 경우
알타이 산맥을 주변으로 하여 몽골 초원 지역이나 만주 지역까지 거주했던 민족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이나 도읍을 오손(烏孫), 오논(몽골지역), 아이신(만주지역) 등으로 불렀는데 이 말들은 모두 알타이 말인 ‘아사나’[해뜨는 곳(日本, 日出地)]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박시인, 『알타이 신화』). 그리고 금(金)을 의미하는 아이신·알탄 등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조선이라는 말은 ‘아이신(金)’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됩니다(참고로 말씀드리면 쥬신이라는 말을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사람들이 만주 쥬신입니다). 즉 오손ㆍ오논ㆍ아이신ㆍ아사나 등의 말은 “해가 뜨는 아침” 또는 “밝게 빛나는”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중국어에서 아침, 또는 첫 빛을 의미하는 ‘조(朝)’를 따오고 ‘아이신(金)’에서 신에 해당하는 중국말을 따온 것이 선(鮮)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결국 조선(朝鮮)이란 ‘조(朝 : 뜻을 빌려옴) + 선(鮮 : 음을 빌려옴)’이 되는 것이죠. 이 때 사용된 선이라는 말은 황금의 의미를 일부 가지면서도 말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어미(語尾)가 되겠습니다. 우리말이나 몽골어에는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여자를 의미하는‘니’, 사람을 의미하는‘치’ 등).
[분석ⓒ] 조(朝)는 뜻을 빌리고 선(鮮)은 ‘산(山)’이란 음을 빌려온 경우
아사달(阿斯達)에서 조선(朝鮮)이 나왔으며 ‘아사’에서 조(朝)가 나오고 ‘달’에서부터 산(山)이 나오는데 이 산(山)을 선(鮮)으로 잘못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거나 선(鮮)이라는 글자가 산(山)의 대용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아사(阿斯)’는 중세국어의 ‘아’[朝], 일본어의 아사[朝]에 해당되고, ‘달(達)’은 고구려어의 ‘달[山]’에 해당하지요. 그래서 결국 조선이라는 말은 아사달을 한역(韓譯)한 것이라는 말이고 그러면 결국 조선이란 아침처럼 밝게 빛나는 큰 산, 즉 황금의 산 ‘알타이산’을 의미하는 말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철ㆍ구리와 같은 금속을 품은 산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쥬신족의 이동경로와 철ㆍ구리ㆍ금 산지와는 상당한 일치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조선이라는 말은 앞에서 본대로 오환산(烏桓山 : 선비), 붉은산(赤山), 부르항산(몽골)과도 같은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산(山)을 선(鮮)으로 대신 사용한다? 금방 납득이 되지 않죠?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해석을 지원하는 것으로는 B. C. 2세기경의 책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서(字書 : 고금의 문자 해설서)인 『이아(爾雅)』에 “동북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으로는 척산의 범가죽이다(東北之美者 斥山之文皮 : 「釋地篇」).”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상하죠? 척산이 조선(朝鮮)이라는 말에 들어갈 자리에 들어가 있지요? 그런데 이 척산(斥山)의 발음이 츠샨[chìishān]입니다. 선(鮮 - 샨[xiān])과 발음이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말이 이 척산에서 왔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합니다. 이 해석은 선(鮮)과 산(山)이라는 글자가 서로 교환되고는 있지만 다른 부분과 연계되어 전체적으로 깨끗하게 해석이 되는 장점이 있지요.
결국 제가 제시한 조선(朝鮮)의 어원(語源)에 관한 위의 세 가지 분석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하든 간에 조선, 또는 쥬신은 ① 태양(하늘) 숭배, ② 금제련술 ③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민족(아침의 의미), ④ 찬란히 빛나는 민족이라는 자부심 등을 표현한 말이라는 것이지요.
[그림 ④] 쥬신 이미지 (아침 - 태양 - 금속제련 - 황금) ⓒ프레시안
어떻습니까? 쥬신이라는 말의 분명한 어원이나 실체는 우리가 아직 완벽히 알 수는 없더라도 조선(朝鮮)이라는 말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가 있죠?
이런 끝도 없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또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예맥을 대표하는 국가가 부여와 고구려였고, 고구려는 이후 여러 나라에 의해 계승 발전했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라는 말이 쥬신 전체를 포괄하는 말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볼까요?
(4) 그리고 코리아(Korea), 태양의 아들
고구려 사람들을 맥족(貊族)이라고 보는데 고구려를 맥(貊)이라고 표현한 것은 후한대(後漢代) 이후 시기를 기록한 사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나라 이전에는 예와 맥은 각기 중국의 북방이나 요하(遼河 : 랴오허) 동쪽에 거주한 민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三品彰英 「濊貊族小考」『朝鮮學報』4, 1953 ; 황철산, 「예맥족에 대하여」『고고민속』1963-2).
『사기』에는 예맥이 확인됩니다만 대체로 맥은 중국 북방의 민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맥이 의미가 확장되면서 예와 결합하여 예맥이 된 것으로 보고 있지요. 그러니까 진(秦)나라 이전부터 요동에 있던 민족들의 범칭이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주로 허베이(河北) 지역에 살다가 중국의 동북방으로 밀려갔으며 이들이 다시 흑룡강 부근까지 밀려가서 부여를 건설하고 부여의 일파 가운데 한 무리가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이전 강좌에서 충분히 보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구려의 건국시조는 부여의 왕자 출신이라는 기록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예맥의 집단적인 민족이동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고리’, 또는 ‘구려’라는 말은 이전부터 나타나지만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한서(漢書)』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서 설치했던 4郡[한사군]중에 하나인 현도군(玄菟郡)과 관련이 있습니다(한사군중 진번과 임둔은 실제로 없었던 군현으로 보고 있죠). 후한 때 학자인 응소(應劭)는 『史記』「조선열전」에 대한 주석에서 “현도군은 본래 진번국이었다”고 썼으며 『한서(漢書)』「지리지」에서는 “고구려현은 옛 고구려 오랑캐(胡)이다(현도군 고구려현에 대한 주석).”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현도군의 고구려현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생성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대체로 고조선 서부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코리족(고리족, 혹은 구리족)에서 기원한 고구려족은 고조선이 멸망(108)한 후 한족 세력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성장한 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한족(漢族) 세력을 몰아낸 것은 “현도군은 후에 이맥[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구려의 서북으로 옮겨갔다.”라고 하는 진수『삼국지』의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쫓겨난 시기가 B. C. 75년경이므로 이 시기엔 이미 고구려가 하나의 국가로서 존재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에 대해서 한번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 고구려, 즉 고려는 오늘날 ‘코리아(Korea)’의 어원이 되는 말이죠. 어떤 면에서 보면 쥬신이라는 말보다도 ‘코리’라는 말이 반도쥬신(한국인)에게는 더욱 연륜이 깊고 익숙하게도 들립니다.
고구려, 또는 고려(Korea)라는 말을 당시에는 어떻게 불렀는지를 알기는 어렵지요. 그 동안 여러 분들에 의해 고구려는 ‘가오리’, ‘가우리’, 또는 ‘고구려’, ‘고구리’ 등으로 불린다는 분석들이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① 고구려라는 말이 애초에 뜻으로 사용된 말이 아니라 기존의 쥬신 말들을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점, ② 중국어의 특징인 성조(聲調)는 쉽게 변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변화무쌍한 중국어의 성조(聲調)를 생각해 보면, 2천 년 전의 고유 발음을 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쥬신의 호수였던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을까를 알기는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 문제를 한번 짚어나 보고 갑시다.
제가 보기에 고구려라는 말에서 구려는 ‘구리(銅)’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이 부분은 ‘똥고양이와 단군신화’에서 충분히 검토했으리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고구려가 고리(고리국)에서 나온 것은 사료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고 고구려가 ‘구리’에서 나왔을 경우 다른 부분도 쉽게 해명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말(구리 등의 금속)은 쥬신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는 하나의 토템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청동기 시대나 철기시대를 주도한 세력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의미를 요즘 식으로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제 생각엔 구리나 철의 제련 기술은 당시에는 최고 첨단 기술입니다. 그래서 이 말에 가장 가까운 요즘 표현으로 고친다면 ‘IT 강국’, 또는 ‘바이오(Bio) 강국’ 또는 ‘최첨단 신무기 국가’라는 식이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고구려에 대한 발음입니다. 중국의 『강희자전(康熙字典)』등에 ‘麗’를 나라 이름으로 읽을 때는 ‘리’로 발음하여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면 고구려는 ‘고구리’가 되겠지요. 그러면 고구려, 또는 구려(句麗)라는 말은 구리[銅]나 쇠[金]와 깊은 관계가 있겠죠. 그래서 저는 고구려에서 구려의 실제 명칭에 가장 가까운 것은 아무래도 구리[銅]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의 고(高)는 종족의 성씨나 또는 찬란한, 위대한 등의 의미로 천손을 나타내는 수식어라고 봅니다.
그래도 일단은 의문은 남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고려를 출입한 외국 상인들은 고려를 ‘Corea’, 또는 ‘Korea’로 표기했는데 이 발음은 ‘고려’, 또는 ‘고구려’에 가깝지가 않습니까? 우리와 언어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본의 경우에도 ‘려(麗)’는 ‘れぃ[레이]’, ‘うるわ[우루와]’, ‘うら[우라]’ 등으로 발음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의 명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의미로 확장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영어나 한문에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도(道)’나 ‘나라(國)’ 같은 단어들입니다. ‘도(道)’는 단순히 길(road)일 뿐만 아니라 근원(origin)·방법(method)·인의(仁義)· 덕행(德行)으로 발전할 뿐만 아니라 통하다·말하다(speak)는 의미까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國)의 경우도 만만치가 않죠? 나라를 의미하는 국(國)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경계[□]가 있고 창(戈)을 가지고 사람[口]이 지키는[或]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생각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국가로 쓰입니다. 초기에는 원시부락에서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경계 정도라는 말로 사용되었겠지만 이것이 발전하여 제후의 영지가 되고 작은 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삼국시대 초기에는 경상도만 하더라도 수십 개의 나라(國)가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일본어에서도 국(國 : くに)이라는 말은 나라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지방’이라는 말로 많이 사용되지요. 예를 들면 일본어에 ‘유끼구니(雪國)’이라는 것은 눈이 많이 내리는 지방입니다.
이렇게 말의 뜻이 확장되는 것은 아무래도 그 말이 주변의 말과의 관계를 통해서 진행된다고 봐야 합니다. 즉 고구리라는 말은 비슷한 발음이 나는 골(마을)이라는 말과 서로 부딪히면서 ‘(구리족의) 고을’, 또는 ‘(구리족의) 나라’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원래 구리(銅)를 의미했던 고구리는 고을[村]을 의미하는 ‘골’이라는 말과 상호작용하면서 ‘구리족의 마을’, ‘구리족의 나라’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종족명은 그 종족이 시조의 이름에서 오는 경우도 있고 그들의 거주지(나라)를 딴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 민족명이 바로 그 민족이 사는 고을 또는 나라를 의미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금(金)나라죠. 금나라 황제의 성도 금씨고, 나라 이름도 금이죠.
따라서 고구려라는 발음이 구리와는 다소 다르게 코리어로 정착될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구리가 철기로 바뀌면서 구리라는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고 천손사상을 보다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것은 아래의 천손사상을 중심으로 고구려 - 고려를 분석해보면 좀 더 확연해집니다).
여기서 잠시 중국인들은 고구려나 예맥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를 보고 넘어갑시다. 『맹자(孟子)』에는 맥족의 맥(貊)자는 과거 중국 동북지방의 고유어인 백(白)ㆍ호(毫)ㆍ박(薄)과 같다고 하며 별칭 박고(薄姑)란 밝다[明](또는 밝고)는 의미라고 풀이합니다(『孟子』告子篇 章句). 산해경(山海經)에서도 “맥이란 본래 우두머리가 되거나 하얗게(밝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貊字本作伯或作白)”라고 합니다(山海經白民國條). 따라서 중국인들도 쥬신인들이 어떤 의도로 나라와 민족의 명칭을 정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이들의 나라 이름 속에서는 상당한 민족적 자부심(pride)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항상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민족을 수달이니, 너구리·순록 등으로 정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양주동 선생은 백제(百濟)에 대하여 잣ㆍ재라 하여 광명한 성(光明城)ㆍ나라의 으뜸이 되는 성(國原城)ㆍ불과 같이 빛나는 성(夫餘城)의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고구려나 부여·백제가 가지는 의미가 별로 다르지 않죠?
이제 좀 다른 각도에서 고구려라는 말을 다시 살펴봅시다. 즉 고구려라는 말을 쥬신이 가진 보편적인 신앙이자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인 천손사상(天孫思想)의 측면에서 한번 보자는 것이죠(이 분석은 앞의 분석과는 언어적으로 다소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이나 나라 이름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경로로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하게 보자는 것이죠).
고구려 - 발해 - 고려에 이르는 ‘고구려’라는 이름을 가진 국가의 공통성은 그 왕들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견고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속일본기(續日本記)』에서는 발해왕(대고구려, 또는 후고구려)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하고 있고 스스로 하늘의 자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손 사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에 하늘나라[천국(天國), 또는 환국(桓國)]가 있고 그 구체적인 실체는 해와 달입니다. 쥬신족들은 조상이 하늘나라 임금(桓仁)의 아들 [단군신화에서는 환웅(桓雄)]과 하늘나라와 관련된 무리들이 지상 세계로 내려와 지상의 인간들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는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與 또는 黎)라고 칭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태양은 우주만물의 근원입니다. 물론 요즘에는 태양 이외에도 많은 항성(恒星)들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태양은 당시 사람들이 아는 우주에서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 하늘의 무리 또는 하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하늘 또는 태양을 의미하는 말에다 무리를 나타내는 말을 더하여 나라 이름으로 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추론할 수 있죠. 이 점을 다시 ① 하늘, 또는 태양의 의미, ② 무리, ③ 하늘 또는 태양 + 무리 등의 순서대로 추적합시다.
‘하늘’이나 ‘태양’을 표현해야 하는데 쥬신족들에게는 문자가 없었습니다(일부 사람들은 문자가 있었을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제대로 전하여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의 한자말을 빌려서 써야했습니다. 태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글자들이 바로 ① ‘高(고 : 뜻을 빌림 - 높다)’‘桓(환 : 소리를 빌림 - 환하다)’ ‘白(뜻을 빌림 - 빛나다)’ ‘不[소리를 빌림 - 의미는 불(火)]’ 등이라는 것이죠. 여기에 무리를 나타내는 말은 ② ‘여(與)’ 또는 ‘여(黎)’이므로 이것들을 조합(① + ②)함으로써 뜻은 대동소이하지만 다양한 나라의 이름들이 나올 수 있겠죠.
이제 ① 하늘, 또는 태양이라는 말과 ② 무리를 붙인 말들을 만들어 보면 ‘高黎(고려)’, ‘不與(불여)’, ‘不黎(불여)’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은 모두 하늘의 자손, 또는 그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한족(漢族)들은 단지 쥬신들이 부르는 소리를 가지고 기록을 하기 때문에 ‘고여(高黎)’, ‘고려(高麗)’, 또는 ‘고리(高離)’ 라든가 부여(夫餘), ‘불이(不而)’나 불여(不黎) 등의 말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한자(漢字) 말이 가지는 의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민족의 나라’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구려, 또는 고려(高麗)와 부여(夫餘)라는 명칭은 쉽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를 천손사상으로 해석하든 구리(銅)로 해석을 하든, 고구려는 태양(하늘) 숭배하고 금속 제련에 능하며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찬란히 빛나는 민족이라는 뜻으로 수렴이 됩니다. 다만 고구려는 후기에 갈수록 구리라는 말보다는 천손이 강조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그래서 구리를 의미하는 구려보다는 고(高)자가 강조되는 것이죠. 이후 고구려는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 다시 지속적으로 계승이 됩니다.
그렇다면 ‘코리’ 역시 쥬신을 의미하는 명칭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치 현재의 우리가 조선(朝鮮), 코리아(Korea), 한국(韓國 : 汗國) 등의 말들이 동시에 사용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실제로 북한의 공식적인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입니다.
이상의 논의로 보면 쥬신은 코리로 불러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쥬신이나, 코리나, 결국은 그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① 태양(하늘) 숭배, ② 금제련술 ③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민족(아침의 의미), ④ 찬란히 빛나는 민족이라는 자부심 등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5) 쥬신의 나라
쥬신의 나라이름에 대해 부분적이지만 체계적인 연구가 최근에 있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2002년 공명성(34 :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학연구소 근대사 실장) 박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국조보감(國朝寶鑑)』, 『기자조선』 등 370여 권의 고문헌을 7년간 연구한 끝에 우리나라 역대 국호(國號)의 뜻은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제시하였습니다. 즉 고조선 이후 한반도에 실존했던 역대 국가들의 나라 이름은 모두 같은 의미라는 것이지요.
월간 『민족21(2003.11월호)』에 따르면, 공명성은「조선 역대국호 연구」(2003)라는 논문에서 우리 민족역사의 많은 나라들이 건국시기와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이름에는 ‘동방의 해 뜨는 나라’, ‘태양이 솟고 밝고 선명한 나라’라는 공통된 뜻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조선의 아사달(阿斯達)은 ‘밝게 빛나는 아침’, ‘광명을 가져다주는 동방의 아침’을 뜻하며 여기에서 유래한 조선(朝鮮)이란 나라이름도 ‘태양이 솟는 동방의 나라’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부여는 태양·불[火]을 의미하며, 고구려는 태양을 뜻하는 ‘고(高)’와 성스러우며 크다는 ‘구려(句麗)’를 결합한 것으로 결국 ‘태양이 솟는 신비한 나라’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또 옛말로 박달인 백제(百濟)는 ‘밝은 산’을, 신라는 ‘새 날이 밝는 곳’ ‘태양이 솟는 벌’을, 발해는 ‘밝은 해가 비치는 나라’ ‘밝은 태양이 솟는 나라’를, 고려(高麗)는 ‘태양, 신성하다, 거룩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공명성의 연구는 국호의 의미를 한자의 뜻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각 나라 사람들의 시원(혈연적 계보), 건국 과정, 신앙과 염원, 고유 조선어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종합 분석한 것입니다.
공명성 박사의 분석은 일단은 만주 -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본대로 몽골 및 일본 지역 역시 동일합니다. 알타이 지역에서 몽골 만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이나 도읍을 오손(烏孫), 오논(몽골지역), 아이신(만주지역) 등으로 불렀는데 이것은 모두 ‘해뜨는 곳’을 의미하죠? 그리고 일본(日本)은 ‘일본’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이미 ‘해뜨는 나라’라는 의미로 오손·조선·부여·백제·구려와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말로 ‘아사(あさ)’라는 말은 아침이라는 말로 알타이어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들리시겠지만 ‘일본’이나 ‘조선’은 같은 의미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이란 ‘해뜨는 밝은 아침’, 또는 ‘아침 해[朝陽]’, ‘동녘의 나라[東國]’, ‘해뜨는 나라[日本]’ 라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금나라(청나라의 전신)의 역사서인 ‘금사(金史)’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요나라는 쇠를 나라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쇠가 단단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삭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세상에 오직 애신(금 : 金)은 변하지도 않고 빛도 밝습니다. 우리는 밝은 빛[白]을 숭상하는 겨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이름을 애신[金]이라고 합니다(遼 以賓鐵爲號 取其堅也 賓鐵雖堅 終亦變壤 惟金不變不壤 金之色白 完顔部色尙白 於是國號大金 : 金史 2권 太祖紀).”
이를 보면 쥬신족들은 알타이(金)라는 말이 가진 의미들 즉 ① 금(金)이나 쇠, ② 해뜨는 곳 즉 동쪽(東), ③ 시작하다(始), ④ 밝다[明], ⑤ 하늘을 나는 새[鳥] 등의 의미들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만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요약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몽골 - 만주 - 반도(한국) - 열도(일본) 등에 거주한 민족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쥬신’이라는 말과 ‘코리’라는 말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약간의 발음상이 차이는 있었지만 ‘쥬신’이나 ‘코리’라는 말은 결국 그 내용은 대동소이함을 여러 각도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이 제게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쥬신’으로 불러?”
그렇지요. 그것이 문제가 되겠네요. 제가 지금까지 드린 말씀으로는 고구려(고려· 구려)는 구리족으로 원쥬신에 해당되는 민족인데, 이 민족으로부터 몽골의 코리족이 나왔으며 이들은 북위·거란·몽골 등을 건설하는 민족인데 차라리 코리, 또는 가오리·고구리·고구려·구려·구리 등이 범쥬신을 포괄하는 말로 사용되어야 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쥬신족을 코리족으로 불러도 전혀 문제가 없고 이 두 말은 서로 바꿔 사용해도 상관이 전혀 없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즉 ‘쥬신’이라는 말을 쓰든가, 아니면 ‘코리’라는 말을 사용하든가, 여러분의 자유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몽골 - 만주 - 반도(한국) - 열도(일본) 등에 거주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코리(가오리, 또는 코리·고구리·고구려), 또는 쥬신(숙신·조선)으로 불러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몽골 - 만주 - 반도 - 열도에 이르는 민족을 ‘쥬신’으로 부를 것인지, ‘코리’로 부를 것인지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개의 명칭 가운데 어떤 명칭이 이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민족 명칭으로 적합한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쥬신’이 좀 더 적합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코리’ 는 너무 ‘코리아(Korea)’에 치우쳐 이 지역 전체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가 있는 말이기 때문에 저는 ‘쥬신’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쥬신이라는 명칭도 하필이면 조선(朝鮮)이라는 말과 매우 가깝게 들리지만 이 말은 만주족들이 늘 사용해 온 숙신(肅愼), 또는 주신(珠申)·제신(諸申) 등의 말이기도 해서 별 부담 없이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몽골 - 만주 - 반도(한국) - 열도(일본) 등에 거주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코리 또는 쥬신이며 앞으로 우리 뿌리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다시 쓸 때는 이 점을 고려해서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는 이 숙신이 중국 사서에서는 어떤 변신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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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3
번호 : 7294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0 스크랩 : 0 날짜 : 2006.07.20 22:54
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肅愼)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0>
2005-05-31 오후 5:17:25
『고려사』에 보면 건녕 3년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 무엇보다도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그 주인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따라 왕건을 그 성주로 삼았다고 합니다[여기서 왕융은 고려 태조의 부친으로 후일 추존하여 고려의 세조(世祖)가 되는 분입니다].
[原文] 乾寧三年 丙辰 以郡歸于裔裔大喜以爲金城太守 世祖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使太祖築勃禦塹城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高麗史』太祖紀).
그런데 이상하죠? 왕융이 궁예에게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이라는 구절이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변한은 대체로 한반도의 중남부를 말하는 듯하고 조선은 고조선을 말하는 것으로 북경을 비롯한 북중국과 요동 땅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왕조가 성립되기 무려 4백여 년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숙신이라는 곳은 어디를 말할까요? 제가 보기엔 일단 과거 고조선 지역을 제외한 만주 전체 지역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죠. 왕융이 궁예에게 한 말은 조선ㆍ숙신ㆍ변한을 하나의 범주로 두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이러한 생각이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서두에 나올 뿐만 아니라 다른 사서(史書)에서도 많이 확인이 된다는 것이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지역적인 범주를 일반적으로 현재의 한국(韓國 : Korea)을 의미하는 ‘삼한(三韓)’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머리글에는 금사세기(金史世紀)를 인용하면서 숙신(肅愼)에 대하여 “한나라 때는 삼한(三韓)이라고 하고, 위진시대(魏晋代)에는 읍루(挹樓)라고 하였으며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權兌遠,「濊ㆍ貊文化圈과 肅愼문제」,『論文集』43,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4).
어떤가요? 지금까지 배우고 가르쳐온 관점으로 이해가 잘 되십니까? 그러면 다시 좀 더 깊이 들어갑시다.
고구려 때 요동의 북쪽에 막힐부(鄚頡府 [마오제부(?)])가 있었는데 이곳은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창유현(昌圖縣)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막힐부에 대한 기록들이 매우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이 됩니다.
『신당서(新唐書)』에 이 막힐부는 부여의 옛 땅(扶餘之故地)이라고 합니다(『新唐書』「渤海傳」). 그런데 『요사(遼史)』에 따르면 이 막힐부라는 행정구역은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라고 합니다만, 이상한 것은 요나라 때는 한주(韓州)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죠(韓州…高(句).麗置 鄚頡府 都督鄚ㆍ高二州 渤海因之 : 遼史「地理志」).
이상하죠? 요하(遼河)의 북쪽을 두고 한주(韓州)라고 하다니오? 우리는 대부분 한(韓)이니 삼한(三韓)이니 하면 으레 한반도 남쪽을 이야기하는데 요하의 북쪽을 두고서 한주(韓州) 라고 했다니 말입니다. 더구나 송(宋)나라 때의 기록을 보면 이 한주가 삼한의 땅(三韓之地)라고 합니다(曾公亮,『武經總要』卷16,「北蕃地理」).
사실 쥬신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등의 이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쥬신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새끼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한없이 이상해지는 것일 뿐이죠. 즉 이 기록 때문에 일부에서는 숙신은 읍루(挹樓)와는 달리 한(漢)나라 때 예맥문화권(쥬신문화권)에 흡수 동화한 종족으로 볼 수가 있다고도 합니다만, 그것은 잘못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보시면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 것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뿐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거란ㆍ금ㆍ고려를 아예 삼한(三韓)이라고 불렀다는 것이죠[허흥식編,『韓國全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 1984) 崔思全 墓誌]. 그리고 명ㆍ청 시대 사람들은 요동 지역을 아예 삼한(三韓)으로 불렀다는 것이 고증에 철저한 대학자의 저서에 나오고 있습니다[顧炎武撰,『日知綠』卷31, 地理 三韓條(四庫提要, 子, 雜家類]
그뿐이 아니죠. 『요사(遼史)』에서는 아예 이 한주(韓州)가 바로 그 의문의 고리국(藁離國)이라는 것이죠( 遼史「地理志」).
고리국이 어디입니까? 바로 부여와 고구려의 시원(始原)이 된 나라가 아닙니까? 그것이 요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결국 예맥족(숙신ㆍ동호 포함)의 이동 경로는 허베이(河北) - 요동(遼東) - 요하 북쪽(遼北) - 부여지역 - 고구려ㆍ몽골이라는 저의 주장이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되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1) 숙신, 안개속의 그 이름
숙신이라는 명칭은 고대ㆍ중세 할 것 없이 중국의 사서(史書)에 자주 나타납니다. 앞서 본대로 숙신은 B. C. 5세기 경 『상서(尙書)』에 나타나고[武王旣伐東夷 肅愼來賀(「書序」)], 『죽서기년(竹書紀年)』에도 “순임금 25년 식신(숙신)이 와서 활과 화살을 바쳤다(帝舜二十五年息愼來朝貢弓矢)”라는 말이 있죠.
숙신은 그 후 물길(勿吉), 말갈(靺鞨), 읍루(挹婁) 등과 같은 의미도 쓰이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종족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종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숙신에서 물길이, 물길에서 말갈이, 말갈에서 여진족이 나타나기도 하고 일부는 숙신 - 물길 - 말갈 - 여진 등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숙신이란 같은 종족에 대하여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이 시대에 따라 읍루·물길·말갈·여진 등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죠.
숙신의 명칭이 달라진다고 해서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아시아에 있어서 하나의 민족에 대한 명칭이 달라지는 것은 이들 종족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 종족에 대한 한족(漢族) 사가(史家)들의 기록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애당초 한족(漢族)들은 이들에 대해 편한 대로 부르거나 동물 이름을 섞어서 비칭화(卑稱化 : 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명과 그 지역에 사는 민족명을 혼동하여 부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이 숙신이라는 민족이 어떤 지역에 있었는지를 살펴봅시다.
사마천의『사기(史記)』의 자료로 알려져 있는『국어(國語)』에 “공자가 진나라(현재의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 부근) 머물러 있을 때 싸리나무 화살이 꽂힌 매 한 마리가 떨어져 죽자, 공자가 ‘이 화살은 숙신의 것’이라고 했다.”는 말이 있죠. 이 사건의 사실 여부보다도 ① 상당히 오래 전에 숙신의 존재가 알려져 있다는 점, ② 죽은 새가 발견된 위치가 카이펑 부근이라는 점이 중요하죠. 이것을 지도로 살펴봅시다.
[그림 ①] 중국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 부근. ⓒ김운회
현재의 개념으로 보면 이 매가 화살을 맞은 상태에서 비행 거리가 길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면 멀리 잡아도 숙신은 현재의 산시(山西)지방이나 허베이(河北)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겠죠? 이 기록은 『사기(史記)』(권47 「공자세가」)를 포함하여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설원(說苑)』(권18 「辨物篇」), 『전한서(前漢書)』(권27 「五行志」) 등에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기』에 “동방의 이족(夷族)과 함께 북방에는 식신(息愼)”을 들고 있는데[『사기』권1 「五帝本紀」舜],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은 이에 대하여 “식신(息愼)은 또는 숙신(肅愼)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동북방에 거주하는 오랑캐이다.”라고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신(稷愼)은 숙신(肅愼)이다(『일주서』「왕회해」).”라는 말도 보이고 한 무제(漢武帝) 때의 조서에 숙신(肅愼)이라는 말이 보이는데 실제로 씌어진 조서에서는 肅□(□은 愼의 古語)로 되어있습니다.
그 후 이 숙신이라는 말은 236년경부터 554년까지 다시 등장합니다. 이 부분의 연구자들은 숙신을 굳이 나눠 어떤 시대에 사용된 숙신이라는 명칭은 읍루이고 어떤 것은 물길이고 하는 식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보기에 이것은 잘못입니다. 이 숙신이라는 명칭은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한족(漢族)들이 편리한 대로 부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정리 좀 하고 넘어가죠. 우리는 지난 장에서 ‘조선 = 숙신’임을 보았으므로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동북방 오랑캐 = 조선(朝鮮) = 숙신(肅愼) = 식신(息愼) = 직신(稷愼)
그 동안 숙신을 포함하여 만주 지역의 민족들에 대한 연구는 일본, 북한이나 러시아를 중심으로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북한 학자들은 중국인들이 아무렇게나 부른 말[汎稱]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여 특정 종족으로 인식하고 분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唐)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을 당인(唐人)으로 불렀고 베트남인들은 중국을 오(吳)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에도 민족적으로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을 정하기란 쉽지 않지요. 지금은 한족(漢族)으로 부르지만 일본의 경우 에도(江戶)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중국인들을 당인(唐人)으로 불렀습니다[시바 료타로, 『몽골의 초원』(고려원 : 1992) 117쪽].
재미있는 것은 몽골어에서는 지금도 중국을 거란(契丹)이라고 부릅니다. 이상하죠? 이 몽골이나 거란은 둘 다 과거 동호(東胡)로 몽골쥬신에 해당되는 완전히 같은 민족인데도 서로 다르게 부르고 있죠.
거란은 8세기경에 일어나 10세기경에 요(遼)나라를 건국한 민족인데 이들은 몽골과 별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몽골이 이들을 중국인들과 동일시하여 경멸하는 말투로 불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요나라가 지나치게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초기에는 같은 민족으로 살다가 요나라가 한화(漢化)하면서 스스로를 한족(漢族 : 중국인)들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몽골인들이 이를 거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 ②] 요(遼) 나라. ⓒ김운회
참고로 고구려가 반도부여(백제)를 경멸하여‘잔당(殘黨)’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철저히 응징하려했던 것도 반도부여(백제)가 지나치게 친중국정책(親中國政策)을 추진, 한족(漢族)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끝없이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후일 이 같은 전통은 열도부여(일본)에 그대로 전승되어 열도부여의 지명(地名)들도 마치 중국의 지명처럼 부릅니다. 모방이 지나쳐 보기에 민망스러울 정도입니다.
(2) 숙신, 카멜레온의 빛깔
숙신이라는 명칭은 554년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었고 물길(勿吉)이라는 명칭은 572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563년부터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말갈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기도 전인 5대10국 시대에도 여진(女眞)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다시 말해서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 등의 명칭이 하나씩 나타났다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쓰이기도 하고 점차 사용되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명칭들이라는 것이죠. 마치 한국에서 중국인·한족(漢族)·되놈·짱골라·짱께·솰라솰라(殺了殺了) 등이 동시에 사용되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숙신이 물길이라는 명칭을 거치지 않고 바로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보기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족(漢族)의 사가(史家) 입장에서 보면 정확한 정보원(情報源)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이들 종족들이 유목민들이기 때문에 정확한 이동경로를 파악하기 어려우며 독립적으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유목민들이라도 발전 수준이 모두 다 조금씩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차이들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겠죠.
특히 소규모의 독립적인 비정착민(非定着民)들은 국가를 구성하기도 어려운 환경에서 주변의 종족들과 극심한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에 동일한 민족이라도 상당한 적대적인 관계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여와 고구려는 물론이고 몽골인들이 요나라에 대해 가졌던 적개심이 대표적인 경우지요.
숙신은 시대에 따라서 읍루(挹婁[이루우]), 물길(勿吉[우지, 또는 와지]), 말갈(靺鞨[모허])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서(晋書)』에 보면,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 하기도 한다.(肅愼氏一名挹婁也)”라고 하고(『晋書』「肅愼傳」) 『후한서(後漢書)』에도 “위략에서 말하기를 읍루는 일명 숙신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後漢書』「孔融傳」의 주석).
읍루·물길·말갈 등의 발음들이 고대에서는 정확히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숙신이나 조선 등의 말과는 분명히 다르게 들립니다. 즉 숙신과 조선은 비슷한 소리로 파악이 되는데 읍루·말갈·물길은 상당히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이것이 왜 그런 지 분명히 알아낸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할 점은 한자(漢字)의 표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숙신·식신·조선 이라는 말과는 달리 읍루·물길·말갈 등은 발음도 차이가 나지만 상당히 비하적인 요소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욕에 가깝지요. 읍루는 두레박과 유사한 의미를 보이고 ‘물길’은 ‘기분 나쁜 놈’이라는 의미, ‘말갈’은 버선과 가죽신 또는 ‘두건을 쓴 놈’ 이라는 의미로 하나의 민족 이름으로 사용하기 힘든 욕설(비칭) 들이죠. 그저 되놈·짱꼴라 수준의 말로 이해하시면 가장 적절할 겁니다.
(3) 숙신, 읍루와 결별하다
아가, 아가 언제나 우리에게 풍요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 아가는 물의 신(神) - 나나이족 -
『삼국지』에는 “한나라 이래로 읍루는 부여에 속해 있었고 부여는 조세와 부역 부담을 가중하게 하여 황초연간(220~226)에 반란을 일으켰다.(『三國志』「魏書」東夷傳)”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읍루는 부여의 정치권 내에 속하고 있죠.
숙신의 위치는 대체로 보면 백두산 북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에 면해 있다는 것으로 봐서 그 위치가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이나 우수리스크ㆍ하바로프스크 등지로 추정됩니다. [『진서(晋書)』에는 “숙신씨는 일명 읍루로 불함산 북쪽에 있다. 만약 부여에서 그 곳까지 가려면 60일 정도가 걸린다. 동쪽은 큰 바다에 면하여 있고 서쪽은 구만한국에 접해있고 북쪽은 약수에 이른다. 그 영역은 수 천리이다(肅愼一名挹婁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日行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北極弱水 其土界廣袤數千里)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숙신은 과거 숙신으로 기록된 백성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기록들에 의한 부분은 “한족(漢族)이 황하 중류 유역의 좁은 지역을 근거로 할 당시에 이에 인접하여 있는 종족이 숙신”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죠[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98쪽]. 또한 숙신을 대신하는 물길이라는 이름은 요하 지역(요동ㆍ요서ㆍ요북)에서 나타난 말이기 때문에 읍루가 대신하고 있는 숙신(블라디보스토크 - 하바로프스크 - 아무르강 하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죠.
[그림 ③]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의 위치. ⓒ김운회
따라서 숙신을 대신하는 읍루라는 것은 숙신인(쥬신인) 가운데서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나 우수리스크 등지로 이동한 사람들을 말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현재의 지리 개념으로 보면 황하 → 요서 → 요동 → 북만주 → 연해주 등으로 숙신의 일부가 이동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이들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다른 민족이라기보다는 개발 정도의 차이에 따라서 안정된 국가 권력을 형성하지 못한 숙신계의 극소수의 비정착민들이 끊임없이 정치경제적 탄압으로부터 탈출해간 경로라고 봐야합니다.
여기서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의 하나인 숙신과 읍루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읍루는 그 민족적 계열이 가장 혼란하여 동북아시아 전체사를 혼란에 빠뜨린 민족입니다. 이 부분을 해명해야만 쥬신의 비밀이 풀립니다. 이 읍루 부분이야말로 한족사가(漢族史家)들이 가장 큰 실수를 했으며 그로 인해서 쥬신의 역사가 안개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의 사가들도 이 읍루의 함정에 걸려들어서 천년 이상을 헤매고 있는 것이죠.
먼저 선사시대 동아시아의 인종분포를 살펴봅시다. [그림 ④]은 현재의 고교 역사부도에 있는 지도입니다.
[그림 ④] 선사시대 동아시아의 인종분포(역사부도 : 천재교육 2004). ⓒ김운회
[그림 ④]에서 보면 읍루와 아이누의 지역이 일치한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① 읍루와 아이누의 발음이 거의 일치하고, ② 읍루와 아이누가 살고 있는 지리적인 영역이 일치하며, ③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이누의 생활(일본 지역은 제외)과 각종 사서들에 묘사된 읍루의 문화와 습속, 그리고 그 생활상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째, 읍루(挹婁)는 현대 음은 이루[yìlóu]인데 이 말은 아이누 말인 ‘이르’, 또는 아이누라는 말과 거의 일치합니다. 아이누의 말로 ‘이르[ir]’라는 말은 가족(家族), 또는 그 보다 큰 범위의 친족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이누’란 그들의 말로 사람이란 뜻이고 이들을 부르는 일본말인 ‘에조, 에미시’도 아이누말로 사람이란 뜻이라고 합니다[일본인들은 아이누를 ‘하이(蝦夷)’, ‘이(夷 : 중국말로 동쪽 오랑캐)’, ‘적(狄 : 중국말로 북쪽 오랑캐)’으로 적고 ‘에조’, ‘에미시’라고 읽습니다. 열도부여인(일본인)들이 지나치게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주변민족을 부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죠].
둘째, 지리적 영역으로 앞서 본 대로 읍루는 “동쪽은 큰 바다에 면하여 있고 서쪽은 구만한국에 접해있고 북쪽은 약수에 이른다. 그 영역은 수 천리이다.” 라는 표현과 [그림 ④]의 영역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후한서』에서는 “읍루의 거주영역의 북쪽 끝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不知其北所極 :『後漢書』東夷傳).”고 합니다.
셋째,『후한서』에 “읍루는 항상 혈거생활(穴居生活)을 하는데 그것이 깊을수록 귀하며 큰집의 경우에는 무려 9층(아홉 개 계단)에 이르기도 한다(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後漢書』東夷傳).”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 즉 연해주에서 아무르 강 하류 일대에 이르는 주민들은 정착생활을 하면서 야산이나 삼림에서 수렵을 했습니다. 이들 정착민의 주거(住居)는 원칙적으로 반지하식이며 흙을 씌운 혈거(穴居)입니다. 이것은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베링해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대부분 순록을 기르는 유목민인 것과는 약간은 대조가 됩니다.
생물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아이누족은 예맥이나 숙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길랴크나 아이누의 언어는 고아시아 제어(諸語)에 속합니다. 그래서 알타이어계통과는 다르지요. 언어적으로 보면 아이누 말은 문장 성분이 서로 뒤섞여 한 낱말처럼 보이는 집합어(polysynthetic language)에 속한다고 합니다(즉 동사는 각종 의미를 갖는 일종의 접사와 낱말들이 융합되어 구성이 복잡해져 매우 어렵게 됩니다). 유럽의 바스크 언어도 이와 유사한데, 스페인 속담에 “하나님이 악마를 징벌하기 위해 내리는 가장 큰 벌은 그 악마에게 7년 동안 바스크 말을 공부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집합어는 말이 어렵다고 합니다.
아이누족은 눈이 쌍꺼풀이고 귀는 큰 편이며 광대뼈는 크지 않습니다. 아이누는 머리 길이도 세계의 인종들 가운데서 아주 큰 편(198.36㎜)이지만 머리의 폭은 아주 작은 반면, 한국ㆍ몽골ㆍ만주 인종은 짧은 머리형에 속합니다. 알타이 계통이 아니지요. 뿐만 아니라 아이누에게서는 몽골 반점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시베리아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지만, 그들의 수는 매우 적습니다. 오늘날에도 시베리아 소수민족의 비율은 채 10%가 되지 않으며 시베리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민족은 부랴트족(몽골의 칭기즈칸족의 기원)ㆍ사하(야쿠트)족 등인데도 1990년대를 기준으로 봐도 40여만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퉁구스인들은 십만이 안 된다고 합니다(물론 스스로를 퉁구스라고 부르는 민족은 없지요).
이 종족들을 살펴보면 에벤·에벤크·네기달·나나이·울차·우데헤(러시아)·오로촌(중국)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길랴크로 알려진 니브히·에스키모·코략·유카기르 등의 소위 고아시아족이 있으며 과거 사서에서 읍루라고 부르던 종족은 아무르강 하류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곳에 살던 길랴크나 아이누 같은 고아시아족들에 대해 읍루, 즉 아이누라고 불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시베리아의 종족들의 인구는 하나의 종족이나 민족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적습니다. 대개의 경우 1만 명도 안 되고 있습니다(민족으로 분류하기도 어렵죠). [그림 ④]에서 일본은 북몽골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반도부여(백제)의 영향이 미치기 이전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숙신과 아이누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숙신을 읍루, 즉 아이누라고 불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쥬신의 비밀을 찾아가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글을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바로 1920년대의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는 길랴크 족의 모습을 묘사한 글입니다(이 글에서는 길랴크라고 하고 있는데 큰 범주에서 보면 아이누, 즉 과거의 읍루라고 보시면 됩니다).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일대에 사는 소수민족인 퉁구스 고리드족과 길랴크족에게는 곰한테 죽은 사람의 시체는 그 곰을 잡을 때까지 그대로 둔다는 관습이 있었는데 … 곰을 유인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 북만주 일대의 삼림이나 황무지에는 길랴크나 고리드, 한민족(韓民族) 등 나라 없는 약소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만주족은 그들을 박해하고 착취했다. … 길랴크족은 늘 당하기만 했다(김왕석, 『수렵야화』 「중국인과 길랴크족」).”
대체로 이들의 거주지는 아이누 - 길랴크의 거주영역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만주족(만주 쥬신)과는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속 보시죠.
“그 일대는 나무들이 울창한 원시림이었으며 그런 곳에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길랴크족뿐이었다. 만주 땅에서는 어디를 가도 나타나는 마적들도 그곳엔 들어가지 않았다. … 만주인들은 그들을 짐승 같은 야만인이라고 말했다(김왕석, 『수렵야화』 「중국인과 길랴크족」).”
이 부분의 묘사는 『삼국지』와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삼국지』에서는 “그들은 사람의 수는 적었지만 험한 산속에 살고 있었고, 이웃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활과 화살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끝까지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어려웠다(『三國志』魏書「東夷傳」).”는 기록이 있죠. 이 기록은 『후한서(後漢書)』『진서(晋書)』에도 그대로 있죠.
“길랴크족은 사냥만으로 생활을 했다. 몽고족처럼 그들도 농업이나 상업을 경멸했으며 아무리 생활이 궁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몽고족은 그래도 목축을 했으나 길랴크족은 그것도 하지 않고 오직 사냥만을 했다. … 그들은 많은 짐승들을 잡았으나 수입은 좋지 않았다. 만주인 상인들에게 착취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값비싼 짐승 털과 녹용·웅담 등 약재를 헐값으로 만주인 상인들에게 팔아 상인들만 배부르게 만들어주었다. 길랴크족은 돈이라는 걸 잘 몰랐고 저축이니 이자니 하는 것도 잘 몰랐다. … 그들은 짐승을 많이 잡아도 훈제로 만들어 저장을 할 줄 몰랐다. 많이 잡히면 이웃마을 사람들이나 나그네들까지 불러 잔치를 벌여 다 먹어치웠다. 그래서 그들은 사냥이 잘 되지 않으면 굶주렸다. 만주인들은 그럴 때는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거기엔 터무니없는 이자가 붙어있었다. 한 달에 2할, 심지어는 3할까지 이자가 붙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만주인들이 돈을 꾸어줄 때는 땅이나 집, 또는 처자식을 담보로 잡았으며 돈을 갚지 않으면 강제로 담보물을 빼앗아갔다(김왕석, 『수렵야화』「중국인과 길랴크족」).”
이 부분에서 아이누 - 만주족(만주쥬신) - 한족(漢族)의 비즈니스적 네트워크의 연계관계(supply chain in business)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주족(과거의 숙신 : 만주 쥬신) 중의 일부는 이들과 깊은 거래관계가 있어왔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족(漢族)들이 쥬신의 일부를 두고 읍루(아이누)라고 부른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위에서 인용된 『수렵야화』는 신문에 연재 되었던 글인데 저자는 한국인 사냥꾼 박상훈(朴尙勳, 함경도 출신, 1879 ∼ 1945년 소식불명)이라는 사람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고 합니다. 이 글로 보면 당시의 읍루의 생활이 어떤 상태였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이들과 만주인과의 관계를 알 수가 있지요. 이들의 수렵생활은 그 특성상 긴 세월 동안 상당한 원형을 유지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들이 만주나 한족들과는 달리 이기심이나 교활성 위선 등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수렵야화』에서는 만주족과 읍루(아이누, 또는 길랴크)와는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지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만주족의 조상이라고 보는 숙신과 읍루(아이누)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이 점을 분명히 아셔야 쥬신의 뿌리가 해명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사서의 기록들로 돌아가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봅시다. 제가 보기에 한족(漢族)의 사가들은 숙신(肅愼)의 일부가 동부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해가면서 아이누족(길랴크족)과 (『수렵야화』에서 보듯이) 상업적 거래를 위해 어울리는 것을 보고 아예 읍루(아이누)라고 불렀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 숙신의 일부가 아이누 지역까지 흘러 들어간 것을 마치 이들이 읍루로 합쳐진 양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숙신이 연해주 쪽으로 흘러들어가니 아이누는 다시 동북으로 올라갔겠고 후일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만주 쥬신이 대거 중국 땅으로 들어가자 다시 이들은 남하하였을 것입니다. 이 같은 요동이나 만주ㆍ연해주 일대의 사정을 한족 사가들이 제대로 알 리가 없지요.
따라서 숙신이 아이누가 아니듯이 아이누는 예맥이 아니고 또한 쥬신도 아닌 것이지요. 숙신 대신에 사용한 읍루가 아닌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는 읍루는 예맥계열이 아니죠. 앞으로 읍루는 아이누로 보고 분석을 해야 합니다.
유전학적으로 보면 아이누에 특유하게 나타나는 유전자인 DE-YAP(Y 염색체 변이의 하나)는 한국이나 몽골 등 범쥬신에게는 1~2%도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Han Jun Jin & Wook Kim, “Genetic Relationship Between Korean and Mongolian Population Based on the Y Chromosome DNA” 『Korean J Biol Sci 7 』139 ~144, 2003) 다만 DE-YAP은 일본의 경우에는 꽤 많이 나타나는데(『Human genetics』2003, Vol 114, 27~35쪽), 이것은 아이누가 일본열도에 이미 많이 살고 있었고, 쥬신족이 일본 열도에서 아이누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많은 피가 섞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동안 읍루족의 기원은 ① 퉁구스족의 일파설(위치가 현재의 길랴크족의 분포와 가까우므로 길랴크[니브히(Niebuhr)]족의 선조로 보는 견해) ② 여진족의 선조설(각종 중국측 사서에는 숙신의 별칭이자 후예로 여진족의 선조로 보는 견해) 등이 있지만 이제 읍루가 여진족의 선조라는 설은 확실히 틀렸다는 것을 아시겠죠?
[그림 ⑤] 시베리아 일대의 종족 분포도(지명은 현재지명). ⓒ김운회
읍루족이 아이누족이라고 볼 때 숙신의 이동으로 인하여 다시 사할린 북쪽 아무르강 하류 입구쪽으로 다시 밀려올라갔을 가능성이 크므로 ①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 점을 좀 봅시다. 킬랴크는 연해주에서 북극해에 이르는 동시베리아 지역에 광대하게 분포하는 아이누의 영역 가운데서 아무르강 하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죠.
일부에서는 한국어가 길랴크족의 언어와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한국인과 길랴크족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민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본 대로 유전자적인 분석에서 범쥬신에게 있어서 아이누의 특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죠). 1955년 러시아의 끄레이노비치는 길랴크족(Gilyak)이 아무르강과 사할린보다 남부 지방에 거주했으며, 한국인 및 만주인들과 긴밀했다고 보고 한국어 및 만주어와 길랴크어의 유사성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두 언어에 보이는 유사한 낱말은 차용에 의한 것이지, 결코 동일 계통에 속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김방한,『한국어의 계통』(민음사 : 1983) / 장길운,『국어사정설』(형설출판사 : 1993) / 이기문,『국어사개설』(탑출판사 : 1972)].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아이누말의 계통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이 언어와 우리 말과는 직접적인 연계를 밝히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에 따르면, 아이누 계의 언어를 일본어·한국어·알타이어, 심지어 인도 유럽어와의 비교를 해보았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 언어를 현재까지는 다른 언어와는 상관이 없는 ‘고립어(isolated language)’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한국어가 길랴크말과 비슷한 어휘들이 많다는 것은 숙신과 길랴크(또는 아이누족) 사이에 상당한 교류가 있었거나 정치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길랴크족의 주요 거주지는 아무르강 하류 유역이고 아이누의 주요 영역은 아무르강 하류에서부터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 지역입니다. 그래서 아이누나 길랴크는 각각 숙신(만주쥬신)과 한반도(반도쥬신)에 경제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읍루, 즉 아이누는 비슷한 시기에 동쪽으로 이동해가는 숙신인들과 교류를 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그것이 숙신의 후예들인 만주족(만주쥬신)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숙신 - 여진 - 만주는 쥬신으로서의 일관된 계보를 가지고 있는데 왜 갑자기 아이누와 하나의 종족이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숙신의 일부 즉 한반도 및 연해주 동북부의 사람들과 교류가 있을 수가 있겠지만 그것은 숙신의 큰 흐름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지요.
숙신을 읍루와 혼동한 것은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한 실수 중 가장 큰 실수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읍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의 “읍루는 과거 숙신의 나라이다(古之肅愼氏之國也).”라는 기록으로 말미암아 사가들이 숙신 - 읍루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대로 숙신은 예맥의 주요 흐름과 일치하는 민족이므로 읍루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사가들이 읍루의 함정에 빠진 것은 읍루, 즉 아이누가 아무르강 상류에서부터 연해주까지 이동해왔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아이누들의 남진(南進)은 정확한 원인을 알기는 어렵지만, 아무르강 유역의 문화를 뽈체 문화라고 하고 아이누의 문화를 올가 문화라고 하는데 이 두 문화는 토기ㆍ철기ㆍ석기 등에 나타나는 유사성(토기의 형식, 문양구성,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같은 문화로 보고 있습니다[강인욱, 『極東考古學要綱』(2002) 53쪽].
아이누는 문화적으로는 많이 뒤떨어져 있지만 수렵을 하는 민족이므로 그 특성상 대단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 “아이누(읍루) 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하는 것을 즐겼는데, 북옥저는 이들의 노략질을 두려워하여 매년 여름이 되면 번번이 바위굴에 숨었다가 겨울에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읍락에 거처하였다(挹婁人憙乘船寇抄, 北沃沮畏之, 每夏輒臧於巖穴, 至冬船道不通, 乃下居邑落 :『後漢書』「東沃沮」).”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이누는 전문 수렵인이라 대부분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던 모양입니다. 『삼국지』에서는 읍루인들은 사람의 눈을 쏘아 맞힐 정도로 활쏘기에 능하여(善射) “일단 활을 쏘면 모두 맞았다. 화살에 독을 발라서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射人皆入. 矢施毒, 人中皆死 : 『三國志』「魏書」東夷傳)”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여는 여러 번 이들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지만 산세도 험하고(所在山險) 사람들이 그들의 화살을 두려워해서 끝내 정복할 수 없었다(卒不能服也)고 합니다(『三國志』「魏書」東夷傳).
그러면 여기서 읍루, 즉 아이누와 교류를 가진 숙신의 일부 집단의 성격에 대해 알아봅시다. 범쥬신은 한족의 압박으로 인하여 허베이 - 요동 - 만주 - 연해주 등지로 지속적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연해주로 이동해 간 쥬신의 일부는 아이누와의 교류를 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기에는 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요동과 만주의 범쥬신 가운데 일부는 고래로부터 문피(호랑이 가죽)가 가장 주요한 특산물의 하나였습니다(‘숙신이 조선에서 나온 아홉 가지 이유’ 참고). 이 같은 고급 특산물의 가장 중요한 공급자가 바로 아이누로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읍루의 문화수준은 매우 열악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서는“동쪽 오랑캐들은 대부분 예기(禮器)를 사용하는데 동쪽 오랑캐들 가운데 (유독) 읍루는 음식예절이 없고 풍속이 엉망이었다.(東夷飮食類 皆用俎豆 唯挹婁不法 俗最無綱紀)”(『三國志』「魏書」東夷傳)라고 하여 문화적으로 가장 미개할 뿐만 아니라 장례법 또한 매우 미개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읍루는 자연환경이 열악한 까닭으로 다른 종족들과 문화적으로 격차가 심하여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숙신과 읍루가 제대로 융합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쥬신과 한족(漢族)이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읍루(挹婁)는 쥬신이 아니며 연해주에서 아무르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아이누ㆍ길랴크(니브히) 같은 고아시아족을 이르는 명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 쥬신(숙신)이 이 지역과 연계하여 비즈니스 활동(Business Activities)을 함으로써 한족 사가들이 이들을 읍루라고 혼동했거나 아니면 숙신인지를 알면서도 비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4) 기분 나쁜 놈
숙신을 의미하는 말 가운데 물길(勿吉)이라는 이름을 한번 봅시다. 중국인들이 한자어로 표현한 것을 보면 한마디로‘기분 나쁜 놈’이라는 뜻이군요. 정말 듣기에 기분 나쁘군요.
물길은 발해 때 숙신의 한 갈래가 막힐부(鄚頡部)를 중심으로 먼저 물길을 칭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 다시 막힐부가 나오네요. 막힐부는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창유현(昌圖縣)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막힐부는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고, 요나라 때는 한주(韓州)로 이름이 바뀐 곳이죠. 이 한주(韓州)란 ‘한국인(韓國人)들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이죠? 이것만 보아도 물길을 쥬신에서 빼어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사서들의 기록을 보면 숙신의 이름이 매우 다양하게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물길·말갈로 주로 나타나지만(읍루도 나타나지만 이제는 제외시켜야겠지요), 숙신이 어느 날 동시에 물길로 불린 것도 아니고 그들의 일부에 대하여 물길로 부르거나 끝까지 물길로 부르지 않은 숙신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숙신은 카멜레온처럼 변화가 무쌍합니다.
숙신이라는 민족 이름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① 숙신 - 숙신 - 숙신 (일부의 숙신족은 그대로 숙신으로 부름)
② 숙신 - 읍루 - 읍루 (일부의 숙신은 읍루로)
③ 숙신 - 읍루 - 물길 (일부의 숙신은 읍루 - 물길)
④ 숙신 - 숙신 - 말갈
⑤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일부의 숙신은 읍루 - 물길 - 말갈)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한 가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숙신이라는 종족이 물길·말갈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읍루는 이제 제외합시다).
위의 경우 가운데 일반적으로는 ⑤의 경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경우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④의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있습니다. 즉 흑수말갈은 물길로 불린 적이 없다는 말이죠[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08쪽]. 참고로 흑수(黑水)란 현재의 흑룡강(또는 송화강)을 말합니다.
[그림 ⑥] 흑수(흑룡강 : 헤이룽강)의 위치. ⓒ김운회
숙신이라는 종족의 명칭이 이렇게 다양하게 된 또 다른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하나의 원집단(原集團)에서 그 집단의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 그 통치권 하에 있던 다른 부족 가운데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갈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견해들을 다 소개할 순 없는 일이고 주요한 것만 소개해 봅시다. 예를 들면 흑룡강(黑龍江)을 현지인들이 만구[Mangu] 라고 했는데 이 말을 따서 했다는 견해도 있고 물길, 또는 말갈은 만주어로 밀림, 또는 삼림의 뜻인 ‘웨지’[窩集 (Weji)], 또는 ‘와지’에서 나왔다는 견해도 있죠.
제가 보기에는 이 ‘와지’라는 말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즉 ‘산골 사람’, 또는 ‘숲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와지’라는 말을 사용해왔는데 그것을 중국인들이 한자로 받아 적을 때 같은 발음으로 ‘기분 나쁜 놈(勿吉)’이라는 욕설로 쓴 것이죠. 정말 기분 나쁘군요. 그런데 이 ‘와지’라는 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합니다.
‘와지’라는 말은 삼림이라는 의미 외에도 동쪽, 즉 ‘해 뜨는 곳(日本)’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생각해보세요. 숲이 우거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숲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동쪽인 한자말의 동(東 : 木 + 日)도 사실은 나무(木) 위로 떠오르는 태양[日]을 묘사한 말이죠. 평생을 알타이 연구에 몸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前 서울대 교수)은 이 말을 옥저(沃沮)나 왜(倭)의 어원(語源)이라고 분석합니다. 앞으로 다른 장(일본편)에서도 보시겠지만 이 왜라는 말이 시작된 것은 요동ㆍ만주 지역입니다. 놀랐죠? 여러분은 그 동안 왜(倭)라는 말은 일본 열도에서 시작된 말로만 아셨죠? 이 부분은 일본편에서 다시 분석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이 물길·말갈이 결국은 옥저나 동예 나아가 일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다시 말하면 숙신이 부여ㆍ고구려 지역은 물론이고 옥저ㆍ동예ㆍ한반도ㆍ일본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된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따라서 숙신이나 물길은 동아시아의 쥬신족들에 대한 일종의 범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국학자들이나 대부분 한국의 사학자들은 물길은 확실히 오랑캐 종족으로 보고 있으며 물길을 이은 말갈(靺鞨[모허])도 일반적으로 돼지·개가죽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석학으로 추앙받는 정약용 선생조차도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갈이라는 말은 그들이 돼지와 개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었기 때문에 그들을 말갈로 부른 것일 것이다.”라고 합니다(정약용,『아방강역고』권2 ).
이외에도 말갈이라는 말은 붉은 색의 무릎 가리개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 즉 말갈을 부르는 다른 말로 매갑(韎韐[모거])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이지요. 매갑이란 선비(鮮卑)의 세르비와 유사하게 붉은색의 무릎 가리개를 의미합니다. 매갑은 말갈이라는 말과 발음이 매우 유사하죠.
말갈은 그 이전의 앙갈(鞅羯)의 후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앙(鞅)이란 고삐를 말하고 갈(羯)이란 거세한 양을 의미하는 말로 양을 거세하여 고삐로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게 한 것이라는 의미죠. 이 갈족은 중국의 산서성을 중심으로 석륵(石勒)이라는 영걸이 나타나 후조(後趙)를 세워 중원을 지배한 적이 있는 민족입니다. 『동문선』에 실린 최치원의 견해에 따르면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 (고구려의 변방에) 혹처럼 붙어있던 부락인 앙갈의 족속이다(渤海源流 句麗末滅之時 本爲疣贅部落鞅羯之屬)”라고 합니다. 최치원은 이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지요.
[그림 ⑦] 후조(後趙) A. D. 300년대 초ㆍ중반. ⓒ김운회
그러나저러나 분명한 것은 말갈이라는 말이 비록 음을 빌려서 사용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예맥(濊貊)이라는 말과 같이 욕설(비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숙신은 만리장성 이북의 지역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쳐서 거주했던 민족들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숙신은 카멜레온의 몸 색깔처럼 물길(勿吉)·말갈(靺鞨)·읍루(挹婁) 등으로 불리었으며, 후일에는 여진·만주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름들이 거의 욕설로 바뀌어졌습니다. 스스로 글이 없다 보니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재단된 것이죠. 그러나 이 숙신이야말로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였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숙신이 현실적으로는 어떤 국가에서 어떻게 변모되어가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쥬신의 실제 뿌리, 물길과 말갈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1>
2005-06-07 오후 5:10:05
유리(羑里)에 가서 불탄다
노태맹
이제 유리에서 푸른 강의 은유는 끝났네.
물고기 산중에 매달려있고
아침이면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물 마른 강가로 내려오네.
불길한 괘처럼 태양 속에 별이 뜨고
우리 딱딱한 혀는 얼마나 오래 유리의 은유를 견디는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적인 유리 나무들 제 마른 팔 부러뜨리고
붉은 새 안간 힘으로 둥근 유리의 시간 빠져 나가네.
그러나 여기 유리에는 외부는 없네.
마른 북 울리며 늙은 소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물 마른 강가 저녁 얼굴 가리고
부러진 나무속에 갇혀 우리 불타네, 우우
유리에 가서 우리 불타네.
- 노태맹 시집. 『유리에 가서 불탄다』(세계사 : 1995) -
‘유리(羑里)’란 삼천백여 년 전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이 문왕(文王)을 가둔 감옥입니다. 문왕은 주(周)를 건국한 무왕(武王)의 아버지로 유리에서 복희(伏羲)씨가 그린 ‘팔괘(八卦)’를 처음으로 연역(演易)‘하였는데 이것이 주역(周易)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무왕과 그의 후예들은 쥬신의 손발을 묶어 빠져나올 길이 없는 유리에 가두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천 년 동안 쥬신은 유리(羑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숲의 사람
우리는 때로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조금만이라도 그 관념의 틀을 벗어나 보면 금방 알게 되는 것들도 그 관념 속에서 헤매다가 그 관념 속에 함몰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경우도 많지만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경우는 물길(勿吉), 또는 말갈(靺鞨)이라는 민족에 대한 것입니다.
말갈과 관련하여 몇 가지 먼저 알아둘 사항이 있습니다. 말갈은 고구려나 발해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의 “고구려·발해는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고 하여 한국사와는 무관한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습니다. 즉 발해는 ‘말갈족을 주체로 한 민족 정권인 동시에 당나라 중앙 정권의 책봉을 받아 당 왕조에 예속된 지방 정권’, 혹은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 정권’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중국의 국정교과서에는 “발해는 당현종(唐玄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임명한 속말부(粟末部)의 수령(首領)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지방 정권’(『중국역사, 초급중학교과서』).”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중국학자들의 연구로 “고구려인은 여진족과 동일하다”라는 주장[왕건군(王健群),「고구려족속탐원(高句麗族屬探源)」『學習與探索』53 : 1987-6]도 있습니다. 즉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왔고 부여는 숙신(肅愼)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므로 고구려인도 여진족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도 ‘고구려족(高句麗族)의 별종(別種)도 아니고 고구려의 후예도 아닌 중국 동북지방에 예로부터 생활해 온 숙신족(肅愼族)의 후예인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이라는 연구(김향, 「발해국의 일부 민족문제에 대하여」)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위에 나타난 내용만으로 보면 왕건군이나 김향의 주장은 크게 틀린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한국사학계의 고질적인 ‘새끼 중국인’ 근성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숙신, 물길이나 말갈은 우리와는 다른 미개한 오랑캐로 고구려나 부여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도 숙신, 즉 후대의 여진족의 국가라고 하니 꼼짝없이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숙신(물길ㆍ말갈)은 중국의 산서지방에서 흑룡강 연해주 등지에 걸쳐서 거주한 민족의 범칭(일반적으로 두루 부르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말갈이나 물길이란 만주어로 밀림, 또는 삼림의 뜻인 ‘웨지’[窩集 (Weji)], 또는 ‘와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즉 ‘산골 사람’, 또는 ‘숲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특정한 권역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지요. 그리고 이 말이 ‘해 뜨는 곳(日本)’을 의미하여 쥬신의 일반적인 명칭을 따른 것을 알 수 있지요.
일부에서는 물길이 부여나 고구려 계열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는 근거로 『위서(魏書)』[북위(北魏)의 역사서 - 『삼국지』의 위나라가 아님] 「물길전」의 “물길의 말이 다른 동이의 그것과는 다르다.”라는 기록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서』「물길전」의 기록이 아이누(좀 더 엄밀하게는 아이누의 선조, 또는 길랴크 같은 고아시아족), 또는 아이누와 교류하는 일부 숙신인들을 지칭하면서 아이누의 언어와 숙신 즉 물길의 언어를 혼동하여 생긴 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읍루 지역(아이누나 고아시아족의 영역)에 살고 있던 숙신을 아예 읍루처럼 불렀던 것 같습니다(‘읍루의 함정, 그리고 카멜레온 숙신’ 참고).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바로 물길의 위치 때문이지요. 『위서』에 따르면 물길의 대체적인 위치는 북류 송화강변이었습니다(『魏書』卷100「勿吉傳」). 이 지역은 현재의 하얼빈 동쪽 송화강이 북류하는 지역으로 하바로프스크에서 콤소몰스크(Komsomolsk)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 물길은 발해 때 숙신의 한 갈래가 막힐부(鄚頡部)를 중심으로 먼저 물길을 칭하였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죠[북한사회과학원『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07쪽]. 구체적으로 보면, 5세기 경 물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족이 사서에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정확히 언제 이 물길이라는 명칭이 나타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연흥 5년(475년) 물길의 을력지(乙力支)가 북위(北魏)에 사신으로 간 것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이전의 시기로 볼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물길이 조공을 보낸 마지막 기록은 북제의 무평 3년(572년)입니다. 물론 이것은 기록상의 이야기이고 실제로 물길이 이 기간에만 존속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다만 이 마지막 조공 후에도 일정하게 그 이름은 있었겠지요,
문제는 물길을 가장 먼저 칭한 막힐부의 위치가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창튜현(昌圖縣)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죠. 이 막힐부는 고구려가 설치하였고 발해가 이를 계승한 곳이었죠. 이 곳은 과거 고조선의 영역이자 동호의 영역인 지역입니다.
그러면 『위서』「물길전」의 기록은 분명히 이상합니다. [그림 ①]에서 보면 랴오닝성 창튜현의 위치는 요하(遼河) 북쪽입니다. 만주 서쪽 경계 가까이에서도 물길이 존재하고 동쪽 끝부분에서도 또 물길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만주 지역 전체에 해당되겠군요. 손오공처럼 동쪽 끝과 서쪽 끝을 구름을 타고 날아다닐 일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결국 물길의 영역은 요하에서 하바로프스크가 위치한 연해주 일대에 분포한 것이 되어 결국 숙신의 영역과 다를 바가 없지요. 차라리 범쥬신의 영역이라는 편이 나을 듯 한데요. 이것을 [그림 ①]로 확인해 보세요.
[그림 ①] 물길의 영역. ⓒ김운회
그래서 『위서』「물길전」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이 책 역시 그 동안 고질적인 문제인 숙신(물길)과 아이누를 혼동하여 보고 있죠. 그 동안 이런 유의 기록을 한국이나 중국의 사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다시 반복하여 왔습니다. 그러니 숙신이나 물길의 실체가 보일 리 있나요? 다시 말씀드리면, 숙신의 일부가 읍루(아이누)와 접촉한 것을 두고 『위서』「물길전」은 숙신(물길)을 마치 읍루(아이누를 포함한 고아시아족)처럼 묘사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는 쥬신의 종족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기록하다보니 하나의 민족이 여기저기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다 ‘새끼중국인[小中華人]’을 자처하는 한국의 사가(史家)들이 이것을 지속적으로 비판 없이 받아들여 사용하다보니 쥬신의 역사가 자꾸 안개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된 것이죠.
일단 물길에 대한 사료들을 간단히 보고 넘어갑시다.
물길인들은 문화적으로는 뒤떨어져 있었으나 군사적으로는 매우 강대하여 부여를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있습니다(『魏書』卷100「勿吉傳」). 대부분의 사서에서 국가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고 만주일대를 살아가는 쥬신들은 강한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이들 부족들을 지배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수많은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압제 속에서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그 한계상황에서는 과감히 도전하고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물리친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 물길인들 가운데 국가구성에 동참하지 않은 물길인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부족들을 중심으로 전쟁에 임했으며 전쟁이 끝나면 다시 원래로 돌아가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각 부족들은 우두머리가 있었지만 전체를 통솔하는 큰 우두머리는 없었습니다(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 :『魏書』卷100「勿吉傳」). 그것은 자연환경과 유목과 수렵이라는 경제적 배경에 원인이 있겠지요.
물길은 정착생활을 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과는 달리 국가의 영역에 포함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것이죠.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숙신(물길)이 아닌 것은 아니죠. 우리가 모든 것을 단지 한족(漢族)의 농경민의 시각에서만 보니 이상한 것이죠. 위의 설명[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에서 보듯이 한족(漢族)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안에 속해있지 않다고 해서 다른 민족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죠[참고로 한족(漢族)의 통치제도는 정착민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수탈과 착취의 경제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족(漢族) 왕조들은 지나친 수탈과 사치로 패망합니다].
그러다보니 쥬신을 부르는 이름도 일관성이 없고 대충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한족(漢族)의 입장에서는 국가체제를 구성한 부족은 따로 분리하려 들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칭(卑稱 : 욕)으로 동북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숙신 또는 물길(말갈)등으로 통칭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만주 지역의 문화적ㆍ지리적 특성과도 무관하지는 않겠죠. 인구가 극히 희박하고 부족의 단계에 머물러 수많은 씨족 또는 원시적 형태의 부족국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족(漢族) 사가(史家)로서는 판단하기에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관심도 없었겠죠.
[그림 ②] 북위(北魏 : 386~535). ⓒ김운회
예를 들면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물길전」)에 의하면 물길의 주변에는 대막루국(大莫婁國 : 부여국이라고도 함), 복종국(覆鍾國), 막다회국(莫多回國), 고루국(庫婁國), 소화국(素和國), 구불복국(具佛伏國), 필려이국(匹黎尒國), 발대하국(拔大何國), 욱우릉국(郁羽陵國), 고복진국(庫伏眞國), 로루국(魯婁國), 우진국(羽眞國) 등의 12개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고대국가 체제가 아니라 부족, 또는 원시적 부족국가 정도의 단계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런 부족국가들을 모두 서로 다른 민족으로 분류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쉽게 말하면 쥬신은 주로 부족연맹·부족연합국가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중앙집권적 구조의 중국인의 사고로는 이해될 리가 없죠. 이런 특성은 부여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몽골ㆍ금ㆍ후금(청)ㆍ일본 등에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전통은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농경생활이 정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쥬신의 주요 특성입니다[제가 『삼국지 바로읽기』(34장 삼국지와 고구려)에서 쥬신의 특성을 볼복스(Volvox)에 비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2) 지배층만 고구려인이라니?
숙신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물길과 말갈로 불립니다. 그 동안 우리가 배우고 가르친 대로 동북방의 대표적 오랑캐지요. 지금까지 배운 대로 한다면, 이들은 발해의 피지배계층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인 민중은 말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물길과 말갈 역시 안개 속에 있는 민족입니다. 마치 쥬신의 역사가 안개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 동안 요동과 만주 지역의 민족에 대한 연구는 북한(北韓)에서 많이 이뤄졌습니다.
북한의 연구는 발해가 고구려 유민과 대부분 고구려의 전주민(前住民)에 의해 건국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북한 학자들은 발해주민을 일률적으로 말갈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대부분이 고구려(高句麗)의 유민(遺民)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20쪽]. 따라서 고구려인들이 발해를 건국했거나 일부의 고구려인이 건국하고 다수의 말갈을 지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통일신라 때 최치원은 발해가 갈족의 한 갈래인 앙갈(鞅鞨)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말갈과 고구려 주민을 분리하는 것은 보다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이지 민족적 특성으로 보기는 어렵지요. 예를 들어 봅시다. 한국의 수많은 씨족 가운데 한 성씨인 전주(全州) 이씨(李氏)가 조선왕조를 건설했다고 해서 그들이 전체 대다수 한국인들과 다른 집단이라고 볼 수 있나요?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주 일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포괄적인 말갈인(만주쥬신)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최치원은 중국에 조기유학한데다 중국에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발해와 말갈에 대해서는 비하하는 정도가 한족(漢族)의 사가와 유사하고(그래서 여러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의 연구는 지나치게 편협해[『력사과학』(1962) 1호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 『발해사연구론문집』(1992) 「발해의 주민구성」] 그에 반하는 사료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유취국사(類聚國史)』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 주현과 관역이 없고 곳곳에 마을이 있는데 모두 말갈인의 부락이다. 백성들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土人)들은 적다. 모두 원주민으로 촌장을 삼는다. 큰 마을은 도독, 그 보다 작은 규모는 자사ㆍ수령으로 부른다. 날씨가 극히 추워 수전 농사가 안 된다.(渤海國者 高麗之故地 … 無州縣舘驛 處處有村里 皆靺鞨 其百姓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 皆曰 首領 土地極寒 不宜水田 : 『類聚國史』卷193)”
위의 글은 8세기 당나라에 유학했던 영충(永忠) 스님이 보고한 것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은 말갈인이 많고 원주민(土人)들은 적다.”고 하고 있죠? 오히려 말갈인과 토인(土人 : 원주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시대 사람이 같은 시대의 사정을 그린 것이고 비행기를 타고 다닌 것도 아닌데다 여러 지역을 직접 통과하면서 적은 기록이니 비교적 정확한 기록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학자들은 영충이 발해의 변두리를 보고 온데서 이 같은 말을 했다고 봅니다(북한 사회과학원, 앞의 책. 143쪽). 하지만 영충스님 글의 전체적인 서술 내용으로 보면 특정한 지역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고 발해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즉 “백성들은 말갈인들이 많다”라고 하는 것은 일반론적인 서술로 볼 수가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전체 주민이 말갈이고 일부가 그 지역 사정을 잘 아는 그 지역 토착민(정착민)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영충 스님의 글로 보면 고구려인이라는 말은 어디로 가고 말갈과 토인만이 있어서 고구려인이라고 별도로 분리한다는 것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오히려 말갈이 고구려인과 동일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북한 학자들의 연구방식도 결국은 ‘소중화의식’, 즉 ‘새끼중국인’의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죠.
하기야 한국 지식인들의 ‘새끼중국인’ 근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런 식이니 과거 세종대왕께서 친히 민중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시는데도 사리사욕(계급적 이익)을 위해 반대할 수가 있는 것이죠. 세종대왕께서는 집현전 학사들의 간섭을 피해 왕자·공주들과 비밀리에 한글을 만들어 기습적으로 반포하셨다고 합니다(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세계 문화유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한 아름다운 문자를 사용하고 있지요). 이런 자들을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한마디로 수천 년을 유리(羑里)에 빠져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직도 미망(迷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갈 길이 멀어도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갑시다. 이제 자가당착적인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 즉 ‘새끼중국인’ 근성은 그만 버리자는 겁니다. 몽골ㆍ만주족과 우리의 뿌리가 같은데도 남북한 학자들 모두 이들을 오랑캐 취급을 하고 민족사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려는 일들을 이제는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이 어둠 속에 갇히고 190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 요동 만주 지역 쥬신역사 말살정책)도 자초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해결책은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논리를 도와주고 있을 뿐입니다.
숙신ㆍ물길ㆍ여진 등이 실제로는 고구려ㆍ발해와 같은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논문(1933)이 발표된 이후 “발해(渤海)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만주사(滿洲史)의 대부(代父)격이라 해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봐야하는데 남북한의 사학자들이 아직도 이 사고 범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식민사학[植民史學 :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대부(代父)라고 핏대를 높인 사람들도 남북한의 사학자들입니다.
발해의 지배층만이 고구려 유민이라니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말갈이라는 명칭 자체가 중국인들이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부른 소리인데 ‘말갈인 = 고구려인 = 발해인’인 상태에서 누가 지배층이 되고 누가 피지배층이 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소린지 알 수가 없군요.
영충스님의 기록을 보세요. 그가 다녀간 곳은 과거 고구려 지역이죠? 그리고 그 지역이 이제는 발해가 되었고 그 대부분 백성이 이전에는 고구려백성이었던 말갈이고 나머지는 소수의 토착민이라는 것이죠.
고구려나 발해는 위ㆍ오ㆍ촉과 같은 정치적인 국가명칭이고 말갈은 중국인들이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종족을 부른 이름이 아닙니까? 실제로 발해의 피지배층으로 알려지고 있는 말갈계 족장들도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은 존재들이 아니지요. 이들은 국제무역은 물론이고 외교에 있어서는 독자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李成市, 「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만들어진 고대』(삼인 : 2001) -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이 책 자체는 비밀이 많은 일본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학자 특유의 현학적 횡설수설이 많지만 발해 관계부분만은 비교적 객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갈인들은 7개의 부로 나눠져 있었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일부 말갈들은 당나라로 들어가고 일부는 세력이 미약하여 흩어지고 나머지는 발해로 들어갔는데 오직 흑수지역의 말갈, 즉 흑수말갈만이 강력하였다고 합니다(『신당서(新唐書)』권 219 「말갈전」).
이같은 분석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사가들이 말갈인들과 고구려 유민이라는 것에 아직도 집착한다면 다시 분석을 해봅시다.
만약 발해를 구성한 주민들을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인으로 본다면 이 들 사이의 종족적 문화적 차이는 있을까를 냉정히 물어봅시다.
발해에 있어서는 말갈인들을 위한 2원체제가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말갈인들과 고구려 유민들 사이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죠. 제가 보기엔 그 차이라는 게 도시민과 지방민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발해의 백성이 된 말갈인과 편입되지 못한 말갈인은 정착 - 비정착 단계의 차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참고로 말씀드린다면,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산골에는 화전민(火田民)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학교에서 화전민은 산(山)을 망치는 매우 나쁜 사람들로 배워서 그런지 이들이 제게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실제의 한국 정부의 통제 밖의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저 자신에 대해 놀라기도 했습니다. 같은 한국인끼리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즉 발해의 지방통치제도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을 뿐 이민족(異民族)을 다스리는 별도의 부서나 제도가 없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과의 문화적 차이가 거의 없다는 말이죠. 북한의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말갈인이 없었기 때문에 이원적 통치구조가 없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153쪽].”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서에 발해 민족의 대부분이 말갈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실은 발해에는 (대부분) 말갈인만 있었기 때문에 이원적 통치구조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입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본다면 한규철 교수의 지적과 같이 “말갈이란 어느 특정의 종족명이 아닌 넓은 지역 이민족을 통칭하여 부르는 범칭(한규철,『발해의 대외관계사』)” 으로서 일종의 욕설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코쟁이·짱꼴라 등으로 외국인들을 묘사하듯이 한 말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범칭으로 부르는 말갈은 과연 어떤 공간적 범위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말갈의 영역은 지나치게 광대하여 지금껏 말씀드린 범쥬신 영역을 대부분 포괄하고 있습니다. 6세기말 수ㆍ당 시대 이후 많은 학자들은 발해의 영역의 주민들을 말갈로 통칭하였고 그래서 시라토리 쿠라키치도 “말갈이란 이름은 넓은 동북 지방의 여진 민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白鳥庫吉, 「塞外民族」『東洋思潮』12, 1935 ; 『白鳥庫吉全集』卷4 ).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만주에서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이 바로 물길, 또는 말갈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이 옥저는 물론이고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쉽게 말하면 물길, 또는 말갈은 쥬신족을 불렀던 명칭이라는 말입니다. 즉 과거에 숙신이라고 하다가 나중(수나라ㆍ당나라)에는 요동ㆍ만주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물길, 또는 말갈족으로 불렀다는 것이죠. 이 점은 쥬신족의 실체에 대한 것이므로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말갈에는 크게 7부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견해가 다소 복잡하고 논쟁도 심하지만 결국 이들이 예맥계(濊貊系)냐, 숙신계(肅愼系)냐 하는데 국한되어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논쟁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림 ③] 말갈의 7부. ⓒ김운회
왜냐하면 숙신계와 예맥계의 차이가 궁극적으로 없지 않습니까? 예맥계든, 숙신계든간에 이들은 모두 말갈의 7부에 속한 민족입니다. 그러면 말갈로 부르면 되지, 왜 무슨 근거로 이들을 나눕니까? 중국인들은 이들을 포괄하여 그저 ‘말갈’로 부른 것이지요. 중국인이 입장에서는 “그놈들이 그놈”이라고 생각하여 ‘재수 없는 놈’이라고 하여 물길(勿吉)로 한 것 아닙니까?
더구나 중요한 것은 예맥이라는 말은 말갈이 등장할 즈음에는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예맥이 한순간에 증발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말갈계니, 읍루계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단기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용어인가 말이죠. 다 따지고 보면 숙신(숙신=예맥=동호)이라는 민족 그 자체는 그대로 있고 그것을 부르는 방식이 이리저리 바뀌고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고조선과 고구려는 예맥계이고 발해의 주민은 말갈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예맥과 숙신이 분명히 다르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까지 본 대로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그 근거를 알 수가 없네요.
러시아 학자 엘 에르 꼰체비찌는 ① 고대 조선족과 숙신(물길ㆍ말갈의 선민족)의 인구분포가 사료와 지리상으로 일치하고 ② 이들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토템이 공통적으로 새[鳥]라는 점, 종족 발상지가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점, ③ 그리고 이들을 묘사하는 말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동일 종족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안호상 선생은 예맥ㆍ숙신ㆍ동호를 하나의 범주로 봅니다. 중국인 학자 슈이 이푸는 『삼국지』와 『후한서』를 분석한 후 중국 대륙의 동부에 거주했던 모든 민족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유엠뿌진, 『고조선』(소나무 : 1997)]. 앞서 본대로 숙신ㆍ조선ㆍ변한도 하나의 범주로 보는 것은 고려시대까지는 일반적인 관행들 가운데 하나로 볼 수도 있죠.
(3) 물길과 말갈, 고향과 형제의 이름
이상한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나 백제가 고구려와 접경지에서 말갈의 침입을 받았다는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침입하지 않고 왜 말갈이 침입하냐는 거죠?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무녕왕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502년 백제의 무녕왕은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공략하였고 다음해(무녕왕 3년) 5천명의 군대로 마수책(馬首柵)을 불태우고 고목성(高木城)으로 침입해오는 말갈군대를 쳐서 물리쳤다고 합니다(三年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冬無氷). 506년 다시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파괴하고 6백여 명의 주민을 죽입니다(六年秋七月 靺鞨來侵, 破高木城, 殺虜六百餘人). 507년에는 말갈군대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목성 남쪽에 목책을 세우는 동시에 장령성을 축조합니다(七年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그러자 그해 겨울 고구려의 장수가 말갈과 함께 한성을 공격하기위해 횡악에 주둔하자 왕이 군대를 보내 이들을 격퇴하였다고 합니다(冬十月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말갈의 영역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죠? 그 동안 배운 역사에서는 말갈은 현재의 흑룡강변이나 하바로프스크에 있어야지 함경도나 평안도 남부에는 왜 나타나느냐 말이죠.
그래서 정약용 선생은 이를 두고 말갈이 아닌데 말갈로 잘못 사용했다고 하였습니다. 즉 동예(東濊)를 말갈로 착각하여 기록했다는 말이죠. 현대의 사학자들도 이런 견해를 수용하거나 아니면 말갈이 고구려의 속민 또는 식민지(부용국)이니 백제나 신라의 정벌에 말갈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고구려가 백제ㆍ신라와의 한창 전쟁 중이던 거의 1백여 년간 말갈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죠. 말갈병의 전투력이 대단하므로 이 때가 오히려 더 많은 말갈병이 필요할 터인데 나오지를 않고 있으니 더욱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말갈병들이 몽땅 증발한 듯이 말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이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진 한규철 교수는 말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변경 피지배 주민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초기에는 단순히 피지배계층(통치의 대상)으로만 보던 말갈을 후기에 갈수록 하나의 동일한 국가구성원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한규철 교수의 글을 직접 보시죠.
“고구려지배층들은 평소에는 변경의 피지배 주민들을 ‘촌사람’의 뜻을 갖는 ‘말갈’로 생각하다가, 삼국 항쟁의 위기 아래에서는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에 그들을 포함하여 편제하였다는 것이다. … 고구려는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어 지방 세력가의 발생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대외적으로는 당과의 관계에 있어 반독립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말갈’이라는 이름을 남기었고, 대내적으로는 도시의 지배층으로부터 다시금 ‘말갈’의 변방 사람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삼국사기』 편찬자는 598년부터 고구려 피지배 주민의 비칭이자 범칭인 ‘말갈’을 『수서』, 『구당서』등에서 다시 차용하여 썼다고 생각한다.[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신서원 : 1994) 제1장]”
즉 말갈이라는 것이 고구려의 주류 민족과 다른 민족이 아니라 고구려의 지방민들을 두루 일컬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래 전에는 역사 서술이 왕조 중심적이고 도시 중심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또 도시 사람과 시골(지방) 사람 및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차별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지방민을 그저 ‘말갈’로 불렀다는 얘깁니다. 몇 가지를 제외하면 상당히 타당한 지적이죠?
이같은 현상은 비단 고구려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그 풍속에 성을‘건모라’라 하고, 읍은 안쪽에 있는 것을 ‘탁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을 ‘읍륵’이라 하는데, 역시 중국의 말로 군현이라는 것이다. 나라에는 6탁평과 52읍륵이 있다.(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 :『南史』「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이란 신라어로는 잔머라[健牟羅(jianmuluo)]이고 그 성안을 쥬핀(啄評[zhuoping])으로 불렀으며 성 밖의 사람들을 일러서 이루(邑勒[yile])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읍루(挹婁)와 거의 같은 발음이 나타나고 있지요. 아직까지 정확한 의미를 고증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중앙민과는 달리 지방민을 비하한 표현으로 ‘읍루(아이누)같은 촌놈’ 정도로 생각됩니다.
이런 경우는 흔히 나타납니다. 즉 신라가 경주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는 것이나 발해의 경우에도 국인(國人 : 나라사람들)이란 지배층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우리는 흔히 발해인의 구성인 대부분이 말갈인이었다고 하는데 발해인들이 그 스스로를 말갈로 불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죠.
다시 봅시다. 한국의 사학계가 흔히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위의 논리대로 하면 결국은 ‘발해 = 고구려’라는 의미가 되지 않습니까? 발해의 지배층은 또 발해의 수도에 살겠지요? 그 수도에 사는 사람이 고구려인이죠? 그 나머지는 고구려 시대에나 발해시대에는 역시 말갈인이죠? 그래서 저는 발해라고 하지 말고 대고구려(대고려), 또는 후고구려(후고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과거로 갈수록 관존민비(官尊民卑)뿐만 아니라 왕경(王京 : 수도), 즉 중앙과 지방의 격차는 매우 심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도시(都市), 즉 왕경을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겠죠? 가령 고구려(또는 발해)에서 평양(상경)을 중심으로 할 터이고 그러면 평양(상경) 이외의 지역은 ‘고구려’, 또는 다른 종류의 범칭(凡稱)이 필요하니 이것을 중국인들은 다소 욕설에 가까운 “버선발과 가죽신 입은 놈[말갈(靺鞨)]”이나 “기분 나쁜 놈[물길(勿吉)]”으로 불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가지는 뉘앙스는 한규철 교수의 지적대로 ‘(재수 더러운) 촌놈’에 가장 가까웠을 것입니다. 단 이러한 말들은 고구려(또는 발해)의 입장이 아니라 중국의 입장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한규철 교수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물길이라는 말 자체가 ‘촌놈’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물길이니 말갈이라는 말은 아무렇게나 나온 말은 아니고 범쥬신 지역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 즉 ‘와지’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이 ‘와지’라는 말은 숲이나 삼림, 또는 ‘해 뜨는 곳[日出地]’이라는 쥬신에게는 다소 성스러운 삶의 터전, 또는 그 민족을 가리키는 말인데 한족(漢族 : 중국인)이 이것을 ‘재수 더러운 놈[勿吉]’이라는 욕설로 만든 것입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새끼중국인’들이 더욱 가증스럽죠. 결국 물길(勿吉)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짱꼴라’, 또는 ‘코쟁이’ 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심한 욕설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봅시다. 중국인들에게는 설령 고구려라는 거대 국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책과 의사결정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은 왕경(수도)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근대적 국가와는 달리 수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민, 즉 지방민이란 통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불과했던 것이니까요. 따라서 실제로 중국인들과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사람들은 왕경인들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말로 대충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한족(漢族)들은 고구려의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을 고구려인으로 판단하고 그들을 고구려인으로 부르지만 나머지 사람들을 대충 ‘말갈’로 비하하여 불렀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이상하게 보였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이라는 표현이 잘못되지 않았을 수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말갈이 침입했다는 말은 고구려의 지방군이 공격했다는 말이 된다는 말이죠. 결국 고구려군이 침입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후에는 말갈병이 침입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군이 침입한 것이니 기록에 남을 리가 없는 것이죠. 한규철 교수의 지적처럼 중앙과 지방민의 인식변화라기보다는 아마도 통일전쟁이 가속화되고 치열해짐으로써 중앙과 지방 사이의 군사적 협력과 연계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됩니다. 그 결과 중앙과 지방민의 인식도 바뀐 것이겠죠. 즉 순서가 틀렸단 말입니다.
그리고 정약용 선생의 경우도 말갈을 너무 천한 오랑캐라는 편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분석했기 때문에 말갈이 백제를 침입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천하의 석학(碩學)이라도 수천 년 동안 지나친 관념의 유리(羑里) 속에 갇히게 되면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국호(國號)에만 나타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과거에 노비(奴婢)도 그렇지요. 노비는 성(姓)이 없었고 이름도 단지 구별을 위한 것입니다. 요즘의 예를 들면 드라마 작가가 시나리오를 쓸 때 ‘행인 1’, ‘행인 2’, ‘포졸 1’, ‘포졸 2’ 등으로 엑스트라들은 그저 구별을 위한 말만 필요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큰눈이·분이· 끝딸이·분통이·섭섭이·점순이·돌이 등등이 그 예입니다. 근대 시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일반인들은 성(姓)이 없이 살았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봉건 왕조체제와 유사한 북한을 보세요. 북한의 수도인 평양(平壤)은 아무나 거주할 수 없는 곳이 아닙니까? 그 뿐인가요? 남한도 서울(Seoul) 지역의 사람들은 은연중에 지방인들을 깔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에서는 인구 4백만이 넘는 국제항구 부산(釜山)도 시골이라고 합니다(부산 사람들 들으면 사흘 정도는 밥을 먹지 못할 일이죠).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죠. 프랑스도 파리사람을 부르는 별칭이 있고 일본도 마찬가지지요.
(4) 발해는 후고구려
저는 앞에서 ‘발해 = 고구려’이니 발해라고 하지 말고 대고구려(대고려), 또는 후고구려(후고려)라고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봅시다.
숙신은 한나라 때에 이르면 ‘읍루’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사람의 모습은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고구려나 부여와는 다르다.”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삼국시대 말기의 기록에는 읍루가 또다시 숙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三國志』「魏書」상도향공기). 이것은 앞에서 본대로 숙신이 읍루(아이누·길랴크 같은 고아시아족)라는 말이 아니라 읍루와 교류를 하는 극소수의 숙신(또는 옛 읍루지역에 사는 숙신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북위시대에 숙신은 물길(또는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교섭하고 있습니다(『魏書』「孝文帝紀」). 『신당서(新唐書)』에는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다시 발해에 종속된다고 합니다(『新唐書』「黑水靺鞨傳」). 이 때는 흑수말갈만이 따로 떨어져 존재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이들도 발해에 속하게 됩니다(『金史』本紀 1). 그런데 대부분의 중국 사서에는 발해는 말갈의 국가라고 하고 있죠.
제가 같거나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많은 사서들이 같은 민족을 이리저리 부르고 있기 때문이죠. 간단히 보면 물길ㆍ말갈ㆍ숙신은 같은 민족의 다른 표현이며 이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국민이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발해 = 고구려’를 좀 복잡하게 표현한 것뿐이죠. 사실 뻔한 얘기인데 사학자들이 무슨 이유인지 너무 복잡하게 꼬아놓아서 일반인들의 접근을 못하게 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표현이 복잡하든 말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① 정치적 계승의식과 통치 영역의 면, ② 인적 구성의 면, ③ 문화적인 일체감 등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발해는 후고구려로 보는 편이 적당할 것입니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도처에 “발해는 국토가 고구려와 일치하며 산물(産物)들도 고구려와 일치(『오대사(五代史) 』74 「고려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국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했다”고 하고 (『속일본기(續日本記)』10 聖武天皇 新龜四年),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武經總要』 前16 下).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서도 “발해의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신당서(新唐書)』219 「발해전」, 『구당서(舊唐書)』199 「발해말갈전」).『속일본기(續日本記)』에서는 발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하면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유지한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 : 續日本紀 권10)”라고 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일본에서도 그를 고려국왕으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발해 = 고구려’라고 보는데 하등의 이론이 있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고구려의 구장(新羅古記云 高麗舊將 祚榮姓大氏 : 『三國遺事』)이라는 기록이 있죠.
그리고 발해왕이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니[『속일본기(續日本記)』권23]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발해는 그 스스로 고려라고 칭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측에서나 일본 측에서도 ‘발해 = 고구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발해가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그 문화나 사회전반에 걸친 이데올로기까지도 고구려를 완벽히 계승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대등하게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국왕의 묘호를 제정하였다는 점에서 쥬신의 역사에 큰 중요성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발해를 발해로 부르기보다는 후고구려(후고려, 또는 대고려)라고 부르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림 ④] 발해. ⓒ김운회
그리고 발해는 아예 ‘발해 말갈’로도 지칭이 되는 나라입니다[『구오대사(舊五代史)』,『오대회요(五代會要)』,『구당서(舊唐書)』,『삼국사기(三國史記)』]. 또 “발해는 본래 말갈(靺鞨)이라고 불렀는데 고려(高麗 : 고구려)의 별종(『五代史』74 「高麗傳」)”, “발해 말갈은 본래 고려종(高麗種)(『五代會要』30 「渤海」)”, “고려의 별종인 대조영(大祚榮)(『자치통감(資治通鑑)』210)”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기존 한국 사학계의 여러 저명한 선생님들처럼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제대로 구별이 됩니까?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통(正統) 사학도(史學徒)가 못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해보아도 그 민족이 그 민족입니다. 즉 예맥 - 조선 - 숙신 - 물길 - 말갈 - 고구려 - 발해 - 거란 등의 민족들이 모두 하나의 범주로 포괄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당시의 발해에 대하여 북적(北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사방의 오랑캐를 부를 때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은 완전히 다른 듯이 말하곤 했지요.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발해를 북적(北狄), 또는 적국인(狄國人)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들도 동쪽 오랑캐인 주제에 참으로 딱하기도 합니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들이 임의로 쓴 말은 아닐 것이니 북적과 고구려ㆍ부여ㆍ읍루 등을 지칭하는 동이(東夷)와의 차이를 찾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쉽게 말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동이(東夷)를 북적(北狄)으로 같이 부르고 있으니 그것이 구별이 되겠는가 말입니다.
참고로 한 마디만 더 합시다.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기의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됩니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습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아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죠.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보면 숙신과 그의 다른 이름인 물길과 말갈은 만주 지역에 광범위하게 거주했던 사람들의 총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예맥이라는 말이 없어진 자리에 숙신ㆍ물길ㆍ말갈 등의 명칭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예맥은 소멸하고 물길이나 말갈이 성장한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이 그 민족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맥과 숙신ㆍ동호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이들은 요동ㆍ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끝없이 뭉치고 흩어진 하나의 역사 공동체이자 문화공동체라는 말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쥬신의 뿌리를 찾아서 긴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맥 - 동호 - 숙신 등에 이르는 민족에 대한 분석을 마쳤습니다. 쉽게 말하면 쥬신의 뿌리에 대한 총론(總論)을 마친 셈이지요. 동아시아 고대사의 영역 가운데 가장 어렵고 지루한 부분이 마무리된 것이지요. 필자의 입장에서는 내용 자체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미있게 쓰려고 해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음 장부터는 쥬신의 보다 재미있고 역동적이면서 구체적인 모습들을 찾아갑니다. 즉 쥬신의 신화(神話)와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몽골ㆍ금ㆍ일본 등 구체적인 나라들이 쥬신의 역사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하는 점들을 살펴봅니다. 여기서는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일본의 건국과정, 몽골과 금의 건국과 역사를 쥬신의 관점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주몽, 영원한 쥬신의 아버지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2>
2005-06-15 오전 9:46:52
어느 날 뉴스를 보는데 기자가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진 알타이, 끝없이 펼쳐진 숲과 멀리 만년설로 뒤덮인 산봉우리, 마을 입구에는 나무에 헝겊을 매달아 놓은 성황당이 보이고 베틀과 절구, 맷돌 같은 살림살이는 우리에게 너무 낯익은 것들입니다. 특히 신성한 곳을 두고 흰 천을 매달고 제사를 지내는데 영락없는 우리의 서낭당입니다.”
이어서 기자가 알타이 전통 가옥으로 들어가자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노인과 어린 손녀가 손님을 맞는데 부모 양쪽으로 수백 명은 돼 보이는 조상들의 이름이 깨알처럼 적혀 있는 족보를 소중하게 꺼내놓습니다. 알타이인들은 부모 양쪽으로 적어도 6대조까지는 알고 있어야 하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닭과 말은 우리말 이름과 발음까지 똑같습니다.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아빠와 삼촌,밥과 옷 등 우리말과 같은 단어가 4천여 개나 되어 같은 알타이어족임을 실감나게 합니다. 이곳 알타이에서 말을 타고 출발하면 우리 민족의 고대영토였던 만주 일대까지 불과 2주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먼 옛날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한반도로 향했을 조상들의 흔적은 지금도 알타이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MBC 『뉴스데스크』2004.09.07 : 우리는 한뿌리 - 최창규기자).”
[그림 ①] 알타이 산의 풍경들. ⓒ김운회
맞습니다. 알타이 멀지 않지요. 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나 몽골의 자르갈란트 쪽으로 가면 갈 수 있는 곳이죠.
쥬신의 뿌리였던 유목사회는 씨족 사회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공동조상(한 아버지)에 대한 개념이 매우 뚜렷합니다. 『몽골비사』를 비롯한 수많은 몽골문헌에서 칸(汗 : kahn)의 가계도는 물론 각 부족의 자손들까지 일일이 기록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죠. 족보(族譜)는 원래 유목민의 유산이지 정주민의 유산이 아닙니다. 수많은 유교경전 가운데 몽골에 전해 내려오는 것은 오직 효경(孝經)뿐이라고 합니다[박원길,『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민속원 : 1999) 186쪽]. 그 만큼 한족(漢族)과는 공통성이 없는 것이죠.
(1) 알타이, 그 영원한 생명의 언덕
알타이, 오래 전에 두고 온 우리들 ‘마음의 고향’입니다. 알타이 산맥은 고고학의 보고(寶庫)로 5만년 전 이곳에 현생인류가 시베리아에서는 처음으로 정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이들이 만든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등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고분들과 암각화·미라·동굴 유적 등이 수없이 발굴되고 있다고 합니다.
알타이산맥은 대표적인 한민족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흔히 ‘아시아의 진주’라고 하지요. 이 산맥은 러시아로부터 몽골·카자흐스탄·중국 등의 국경지대를 따라 대략 2,000km에 걸쳐 남동쪽으로 뻗어있습니다.
한민족의 ‘알타이-사얀산맥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는 주채혁 교수에 의하면, 알타이와 그 동쪽의 사얀산맥의 유목 민족이 만주 싱안(興安)령 쪽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2003년 1월, 아메리카 인디언도 알타이-사얀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요. 일리아 자하로프 교수(모스크바대학 : 유전학)는 러시아 내 유목민족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비교해 보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은 1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2만5천년∼4만 년 전 시베리아 사얀지방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알타이, 동쪽으로는 바이칼호 일대에 살다가 베링해를 건너갔다”고 주장합니다.
알타이 지역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키타이 유적인 파지리크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은 적석목곽분으로 최몽룡 교수(고고학)에 의하면 고신라의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최몽룡 교수는 알타이 지역에 사는 투르크계와 몽골계 원주민은 우리 민족과 사촌관계라고 단언합니다.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뻗어 내려 형성된 대쥬신은 지난 수천년 동안 흉노제국, 북위 및 고구려제국, 몽골제국, 금, 후금(청) 등과 같은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아시아 대륙을 통솔하였습니다.
여기서 제가 알타이 동부라고 굳이 말하는 이유는 알타이 서부 지역인들은 유럽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즉 유럽 세계를 뒤흔든 훈족이 몽골계인가 투르크계인가 하는 점 말입니다. 시라토리 쿠라키치 등은 언어적 연구를 통해 흉노가 투르크 계열이 아니라 몽골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만, 최근에는 몽골계라기보다는 투르크계라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몽골의 ‘왕후의 산[노인 울라(Noin Ula)]’ 고분군 제25호에서 출토된 흉노의 인물 자수화는 흉노를 투르크 계열로 추정하는 주요한 증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저는 흉노ㆍ돌궐ㆍ훈족이 초기에는 같은 형제들이겠지만 알타이 서부지역에서는 유럽으로 진출하고 알타이 동부지역은 주로 중국이나 허베이-요동-요서-만주 등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알타이산맥의 주변 지역에서 나타난 많은 설화와 신화를 담고 있는 『알타이 이야기』(정신세계사)를 보면 이 지역의 신화나 설화가 우리의 그것과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소원을 들어주는 댕기’는 우리의 ‘나무꾼과 선녀’와 ‘금와왕 이야기’를 합쳐놓은 것 같고, ‘하늘로 간 별이, 즐드스’(한 여자아이가 새엄마와 언니의 구박을 받다 죽지만 다시 환생한다는 이야기)는 ‘콩쥐팥쥐’와 거의 유사합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소원을 들어주는 댕기’로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탄자왕(개구리왕이란 뜻)이란 노인이 개구리의 생명을 구해주고 보답으로 아내를 얻어 알타이의 후손을 넓게 퍼뜨린다는 내용입니다. 알타이는 ‘황금’을 의미하는 단어로 금와왕 = 황금 개구리왕 = 알타이 개구리왕 = 탄자왕 등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2) 신화의 세계
20세기에 들어 신화에 대한 연구는 다양해져서 ① 제의학(祭儀學 : 제사의식에서 신화를 보는 관점 : Durkheim, Frazer, Malinowski), ② 정신분석학(Nietzsche, Freud, Jung), ③ 상징주의, ④ 비교신화학(Cambell), ⑤ 구조주의(Levi-Strauss, Levi-Bruhl, Dumezil) 등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어느 한쪽으로만 신화를 보는 것은 오히려 신화의 실존적인 의미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죠. 특히 쥬신과 관련된 신화를 이해하려면 말이죠.
엘리아데(Eliade, 1907~1986)는 신화는 성(聖)스러움에 대한 탐구이며 신화적 진리는 신성하기 때문에 변하기 쉬운 학문의 진리보다 큰 구속력을 갖는다고 합니다. 신화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 보려고 하는 신화는 주로 건국신화이므로 엘리아데의 신성(神聖)에 대한 체험으로서의 신화라는 관점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말리노프스키(Malinowski, 1884~1947)는 멜라네시아의 트리브리앙 섬의 원주민 사회에 대해 현지 조사를 통해 신화는 모든 문명의 기본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사회 결속과 공동체 의식 유지가 신화의 목적이며 기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융(Jung, 1875~1961)에 따르면, 신화는 집단적 무의식의 산물로 영적 삶의 원형(archetype)이나 구조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형이란 개인적 구원이나 형제간의 불화, 암흑세계로의 모험 출발, 우주의 형상 등 집단적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기본구성 요소를 말하지요. 융은 이 같은 원형을 통하여 구성원들은 과거와 미래를 이해하며 주변 세계와의 조화를 이루어 의식의 경직과 같은 정신 질환에 빠지지 않게 보호해 준다고 말합니다.
구조주의의 지평을 연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1908~1991)는 신화를 암호체계로 보았고 신화 연구는 이 암호체계를 푸는 일로 보았습니다. 즉 레비스트로스는 신화 속에서 암호의 단위를 분리하고 그 단위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죠.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의 사건을 단문(simple sentence)으로 축소하고 이것을 암호의 단위로 ‘신화소(mytheme)’라 불렀지요. 이 신화소라는 개념은 쥬신의 신화 분석에 매우 유용한 것일 뿐만 아니라 쥬신의 일체성을 판정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조셉 캠벨(Joseph Cambell, 1904~1991)은 전 세계의 인류는 생물학적으로만 동일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동일하다고 보고 신화 연구를 통해 (서로 다른 양식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인류 공통의 정신적 구조가 있음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캠벨은 신화의 기원과 전파과정, 신화들 간의 상호 작용 등을 주요한 과제로 보았습니다.
이 같은 신화의 이론들이 쥬신의 건국신화와 신화의 전파과정 및 그 변용과정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듯도 합니다. 특히 말리노프스키·융·레비스트로스의 이론들은 쥬신 신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가 ‘쥬신을 찾아서’라는 주제에서 민족의 탄생에 관한 건국신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보기엔 건국신화(建國神話)는 다른 신화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건국신화는 그 민족의 뿌리와 관련되어 있어 성(聖)스러운 면이 강하고 어떤 신화보다도 원형이 잘 유지되는 특징이 있죠. 이것은 그 민족의 원형을 유지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1908~1991)가 말하는 암호체계의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점은 이미 제가 단군신화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많이 나타났지요?
한국 사학계의 일부에서는 신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봅니다. 가령 단군조선이라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실체인데 신화나 전설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려는 식민사학자들의 음모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신화를 통해서 오히려 광범위하게 흩어져 사라져 가고 있는 쥬신의 뿌리와 실체를 찾아가기에 더욱 적합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제 쥬신의 건국신화(建國神話)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현재를 기준으로 본다면 쥬신족들 가운데 가장 알타이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몽골 쥬신(몽골)입니다. 북방 유목민 가운데 오직 몽골만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남겼는데 그것이 유명한 『몽골비사』입니다.
칭기즈칸이 몽골 쥬신을 통일하기 전까지 몽골에는 기록된 신화가 없었습니다. 칭기즈칸이 몽골 쥬신을 통일한 후 그 손자인 원나라 세조에 의해 선조들 이야기가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몽골비사』입니다.
『몽골비사』에는 알랑-고아의 설화가 있지요. 알랑-고아는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딸이라고 합니다. 그 설화의 내용을 보시죠.
“밤바다 밝은 금빛을 띤 사람이 겔(몽골인의 천막집)의 에루게(천막 위로 난 창문)의 창문을 통해 빛처럼 들어와 나의 배를 비치자 그 빛이 내 뱃속으로 들어왔다. … 뱃속의 아이는 하늘의 아들이다 … 이 아이가 우리 모두의 칸이 되면 일반 사람들은 이 아이의 내력을 알게 되리라 (『몽골비사』)”
어떤가요?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한 이야기지요. 바로 고구려의 유화부인(柳花夫人 : 버들꽃아씨) 설화의 몽골버전(Mongol version)이죠. 여기서 나오는 알랑-고아(Alan-Go'a)라는 분은 몽골민족의 성녀(聖女)로 알랑 미인(美人)이라는 말입니다. 이 분의 이름 가운데 ‘알랑’이란 우리가 자주 들어온 아랑 설화의 그 아랑이고 ‘고아’는 곱다(beautiful)는 뜻입니다. 그리고 알랑-고아의 12대 손이 바로 칭기즈칸입니다.
알랑-고아의 아버지는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라고 합니다. 이 뜻은 코리족의 선사자(善射者)라는 의미입니다. 이 선사자라는 말을 알기 쉽게 고치면 주몽(朱蒙)이라는 말이죠.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알랑-고아의 아버지는 고주몽(高朱蒙 : 코리족의 명궁)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메르겐에서 신라의 마립간[(麻立干 : 마루(宗) + 칸(汗)]이 나왔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다시 『몽골비사』를 봅시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고주몽)은 사냥을 즐겨했는데 이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따로 떨어져 나와 코릴라르(Khorilar)라는 씨족을 만들었다. 보르칸칼돈 산은 사냥감이 많아서 오랑캐들인 신치-바얀의 땅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딸인 알랑-고아는 아리ㄱ-오손(아리수)에서 태어난 것이다.”
코릴라르는 몽골학자 가담바에 의하면 코리족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의 명칭이라고 합니다. 이 명칭은 주몽이 코리 부족에서 일단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운 뒤 국명을 코리의 한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고(高 : 으뜸) 구려(Kohri)라고 부른 것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그림 ②] 칭기즈칸. ⓒ김운회
신기한 일입니다. 몽골의 건국신화와 부여나 고구려·백제의 건국신화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 말입니다. 나중에 분석하겠지만 칭기즈칸이 처음으로 받은 칭호가 바로 자오드 코리입니다. (코리족의 ?) 소족장이라는 뜻인데 아마도 코리와 무관한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신화는 여러 민족이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난생신화(卵生神話)나 기아신화(棄兒神話 : 아기를 버림)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알랑-고아가 다섯 아들을 불러 앉힌 후 화살을 하나씩 주면서 분질러 보라고 했다는 신화(화살을 하나씩 주니까 쉽게 분질러지지만 화살 다섯을 단으로 묶어서 아들들로 하여금 차례로 분질러 보게 하니 능히 분지르는 아들이 없었다. 그러자 알랑-고아는 “너희 다섯은 이 화살과 같다. 따로 놀면 따로 꺾일 터이나 하나로 뭉치면 누구도 너희를 꺾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다른 신화의 여러 군데에서 발견됩니다. 선비족의 이야기 가운데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고 그리스 이솝의 이야기(B. C. 6세기)에도 이런 이야기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왕자 유리가 기둥 밑에 감추어둔 검을 찾아서 아버지 주몽을 찾아가는 내용은 중국의 신화(『搜神記』干將ㆍ莫邪說話)와도 유사하고 그리스 아테네의 건설자인 테세우스(Theseus)의 신화와도 비슷합니다(『플루타크 영웅전』).
그러나 몽골의 기원과 관련이 있는 몽골의 이동 설화는 몽골 고유의 것입니다.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몽골비사』에는 세 개의 몽골 기원설화가 실려 있습니다. 맨 앞에 있는 늑대 설화는 돌궐의 것을 모방한 것이지만 나머지 두 개, 즉 ①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이동설화와 ② 알랑 고아의 설화는 몽골 고유의 설화라고 합니다(박원길, 『북방민족의 샤머니즘과 제사습속』1998).
그런데 몽골 기원에 관한 몽골만의 신화가 부여ㆍ고구려의 그것과 같다는 것은 부여ㆍ고구려ㆍ몽골의 민족적 연계가 초기에는 대단히 견고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화의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 민족의 집단 무의식이 숨어있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같은 형태의 집단 무의식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민족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매우 중요한 코드(code)이기도 합니다.
제가 앞으로 사용하게 될 이 코드(code : 암호)라는 말은 민족적 코드(ethnic code)를 줄인 말입니다. 이 말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소(神話素 : mytheme - 신화의 사건을 단문으로 축소한 신화에 내재된 암호의 단위)’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오히려 신화소의 주체(主體 : entity)로 저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호학[Science of Signs : 모든 사회 현상을 기호(sign)로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내는 작업]에서 말하는 기호(sign)와 신화소(mytheme)의 중간적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림 ③]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1908~1991). ⓒ김운회
코드·신화소·기호 등의 용어들은 가장 본질적(本質的 : essential)인 용어로 표현되어있지만 그 내면에는 실존적(實存的 ; existential)인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해가 잘 안 되실 수도 있습니다. 말이 지나치게 어렵기는 하지만 신화(神話)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조금이라도 알아두고 넘어갑시다.
현실의 세계는 매우 복잡합니다(연속적·아날로그적·실존적). 그러나 그 현실을 묘사하는 언어의 세계는 매우 단편적이고 파편화되어 있습니다(분절적·디지털적·본질적). 현실의 세계,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나 “존재 그 자체(物自體 : thing itself)”를 우리가 인식의 한 가운데로 끌어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인식이나 표현의 도구가 한계가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실존(實存)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 실존의 상태를 이해해야 하는 딜레마에 항상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언어(language)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언어는 수치적(數値的)이고 정량화(定量化)되어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묘사할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일상을 언어로 표현하다보니 언어가 가진 함정에 쉽게 함몰될 수가 있습니다. 『노자(老子)』에도 “도(道)를 도(道)라고 하면 이미 도(道)가 아니라(道可道非常道)”는 말과도 같은 맥락이죠(너무 어려우면 모르셔도 됩니다. 아래의 내용을 아시는 데는 큰 지장은 없으니까요).
우리가 현실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언어로 표현된 현실은 복잡하고 실존적인 형태의 현실로부터 언어가 묘사하는 단편적이고 본질적인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언어는 끝없이 바뀌는 것을 본질로 하는 현실의 세계(실존 : existence)를 언어가 묘사하는 단순한 세계(본질 : essence)로 다시 태어나게 함으로써 우리 주변을 쉽게 안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죠.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적인 언어생활을 하면서는 현실세계의 복잡성과 그것에 대한 언어적인 표현은 크게 다르다고 느끼지는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어로 묘사된 상황이 실존(實存)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전 문자도 없는 상태에서 수천 년간 민족에게 전승되어야 하는 신화는 다릅니다. 문자도 없는 상태에서 민족의 뿌리에 대한 역사를 자자손손 끊임없이 기억시켜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까요? 역사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역사를 긴 문장으로 전달할 수 없으므로 함축적으로 표현해야 하고 구성원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한 것이 바로 신화로 볼 수 있죠. 그러니 신화에는 그 민족의 집단무의식이 투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역사를 그 역사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알기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되, 중요한 키워드(key word)를 심어두는 것이죠. 그러면 다른 것은 바뀌어도 이 키워드는 바뀌지 않는 것이죠. 씨앗을 품은 과일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이와 같이 어떤 신화 속에 숨어있는 변하지 않는 민족적 상징물과 독특한 민족적 행동양식을 ‘민족적 코드(ethnic code)’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코드들이 다른 신화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또 어떤 형태로 변형되는가를 봄으로써 민족 간의 연계성을 파악한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신화의 분석을 통해서 민족의 이동 시기나 건국 시기도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쥬신의 신화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들 신화가 가진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 그 변형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요?
(3) 고주몽, 영원한 쥬신의 아버지 : 쥬신 신화
쥬신의 신화를 보려면 단군신화를 보고, 그 다음으로는 부여를 중심으로 봐야 합니다. 고구려나 몽골이 결국은 부여를 기반으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지요. 단군신화는 우리가 이미 보았기 때문에 부여ㆍ고구려 신화를 봅시다.
먼저 부여의 건국신화의 내용을 요약하겠습니다. 자, 신화의 세계로 한번 빠져봅시다.
"옛날 북방에 고리(槀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시녀가 말하기를 닭 알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자기에게 내려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시녀가 아이를 낳게 되자 왕이 이 아이를 돼지우리에다 버렸으나 돼지들이 따뜻하게 해주었고, 마굿간에 버렸는데도 따뜻하게 해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그 아이가 하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그 시녀에게 기르게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동명(東明)이라고 했는데 동명은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왕이 이를 우려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동명은 남쪽으로 몸을 피하여 시엄수(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놓아서 동명은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다. 그리고 고기와 자라들은 흩어졌고 동명을 추격하던 군대가 더 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 이후 동명은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를 다스렸다."(『삼국지』「위서」부여전 주석)
위의 글은 『삼국지』에 배송지가 달아놓은 주석의 내용입니다. 원래는 위나라 명제 때 어환(魚豢)이 지은 『위략(魏略)』에 나오는 것을 인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는 훨씬 더 상세히 나타나고 있습니다[위서』는 남북조 시대의 사서(史書)로 북제(北齊)시대의 위수(魏收)가 저술].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여기저기에 다양하게 나오는데 반하여 부여의 건국신화는 잘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서기 1세기경의 기록인 『논형(論衡)』의 부여 건국신화에 따르면 동명(東明)은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동명을 죽이려하자 남쪽으로 몸을 피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고, 그 후 동명은 도읍을 정하여 부여(夫餘)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論衡』2卷 吉驗篇). 그 외에도 3세기경으로 책인 『위략(魏略)』, 4세기의 『수신기(搜神記)』, 5세기의 『후한서(後漢書 : 432)』등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부여의 신화에 구성하는 코드(code)를 모아보면 ① 하늘(天孫族), ② 기아(棄兒 : 아이를 버림), ③ 활의 명인(주몽), ④ 큰물과 관련된 지지자들의 존재, ⑤ 건국 등으로 요약됩니다. 다만 부여의 신화에서는 동명의 어머님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보지요.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부여의 신화()에 윤색을 가해 탄생됩니다. 한번 보세요.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인데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하백의 따님은 부여 왕에 의해 방안에 갇혔는데 햇빛이 그의 몸을 비추어 이를 피하였지만 그 빛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곧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 알을 하나 낳았는데 그 크기가 곡식의 닷 되 정도였다. 부여왕은 이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는데 개는 이 알을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거리에 내다 버렸으나 마소가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자 새들이 이를 보호해주었다. 마침내 왕은 그 알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이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字)를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그곳 풍속에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었다."(김부식,『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 본기」)
위의 두 신화를 비교해보면 고구려는 분명히 부여에서 나온 종족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국신화, 또는 출자설화는 고대국가에서 왕실(王室)의 정통성(正統性)에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부여ㆍ고구려 건국신화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왕실의 정통성이 부계는 천제(天帝 : 하느님)의 핏줄을 잇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고구려는 여기서 한발 나가서 모계는 경제적 풍요를 보장하는 물의 신, 즉 농업신[하백녀]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① 토착세력과의 유대의 강화 및 민족적 융합, ② 민족적 신성함을 고양시키려는 의도 등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실려 있는 책이나 자료는 ① 한국 측 자료로는 『三國史記』,『三國遺事』,『東明王篇』(『東明王篇』의 주석에 실려 있는 『舊三國史』에도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있음), ② 중국 측 자료로는 『위서(魏書)』,『양서(量書)』,『주서(周書)』,『수서(隨書)』,『북사(北史)』등이 있습니다(오늘날까지 전하는 동명왕신화의 기록들은 거의 대부분 고구려에 관한 것이며, 부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여의 경우 북부여의 신화는 해모수신화이고, 동부여신화는 해부루 · 금와에 관한 신화라는 정도만 남아있습니다). 저는 일단 가장 일반적으로 고구려 건국신화로 인식되는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 본기」의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삼국사기』의 주몽신화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인용되어 있는 『구삼국사(舊三國史)』의 주몽신화를 요약한 것인데 『위서』와 거의 같습니다. 다만 주몽이 남으로 내려올 때 『위서』는 두 사람(오인ㆍ오위)이고 『삼국사기』는 세 사람(오이ㆍ마리ㆍ협보) 등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중국 측 사서의 경우와 한국 측의 자료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 측의 기록에서는 다만 왕의 시비(侍婢 : 시녀)가 하늘에서 기운을 받아 아이를 낳는다든가 하백녀가 햇빛[日光]에 의해 잉태되어 알을 낳는 형태로만 신화가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한국 측의 기록에서는 해모수와 ‘버들꽃아씨’, 즉 유화(柳花) 부인을 등장시킴으로써 건국시조인 주몽의 부모를 더욱 신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해모수는 하늘나라의 아들이고 ‘버들꽃아씨’(유화부인)는 물의 신[水神]인 하백의 딸로써 유목민인 천손족(天孫族)과 지상의 토착민이 결합되는 과정을 함께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후대에 내용이 다소 변형 보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삼국사기』에는 『위서』에 없는 내용인 해모수신화(解慕漱神話)와 해부루신화(解扶婁神話)가 있다는 것이죠. 즉 『삼국사기』에는 부여왕 해부루가 자식이 없어 고민하다가 곤연(鯤淵)에서 금와(金蛙)를 얻은 후 동부여를 건국하는 해부루 신화(解扶婁神話)와 유화 부인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관계하여 주몽을 잉태하는 해모수신화(解慕漱神話)가 나타나있는데 중국 측에는 이런 기록이 없지요. 이것은 ① 사관이 이를 누락시켰거나, 아니면 ② 후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삼국유사』에는 “『단군기』에서 말하기를 단군께서는 서하 하백의 따님과 함께하여 아이를 낳으시니 그 이름이 해부루이다(檀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解扶婁 : 『三國遺史』卷1 「 高句麗」)”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단군신화와 부여ㆍ고구려 신화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유화부인(버들꽃아씨)과 함께한 천제(天帝)의 아드님이 바로 단군(檀君)이니 주몽(동명)은 단군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부루와 해모수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록으로 보면 전후가 바뀌기도 하고 기록이 왔다 갔다 하는 등 혼란스럽지만 단군과 고구려의 신화가 연계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국 주몽(동명), 대쥬신의 영원한 아버지는 바로 단군의 아드님이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단군신화 - 부여 신화 - 고구려ㆍ몽골ㆍ백제 신화 등이 하나의 범주로 통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단군이나 주몽(동명)이라는 개념이 왕건(王建 : 고려 건국시조)이나 이성계(李成桂 : 조선 건국시조)와 같은 하나의 실존인물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단군이나 주몽은 실존인물이 아니라 쥬신의 집단 무의식의 일부입니다. 즉 단군과 주몽(동명)은 쥬신의 집단 무의식에 내재한 민족적 정체성(ethnic identity)의 표상, 쉽게 말하면 쥬신의‘한 아버지(공동의 조상)’라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의 관심은 부여와 고구려의 변용 과정이며 동시에 쥬신 역사에서 어떤 형태의 일체성을 가지는 것인지를 찾아가는 것이죠.
고구려의 신화에서 기본적인 코드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요? 기아(棄兒)와 활의 명인 등은 이전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보다 분명한 햇빛으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고, 주몽의 신변 위협이 더욱 커져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주몽의 어머님의 역할이 훨씬 강화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위서』나 『삼국사기』에 보다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단 『위서』를 보도록 하죠.
“부여 사람들은 주몽이 사람이 낳은 존재가 아니므로 그가 역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고 그를 죽이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 그래도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하자 주몽의 어머니는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하므로 너는 지혜와 재주가 있으니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업을 도모하도록 해라’라고 했다(『위서』「고구려전」).”
『삼국사기』에는 『북사(北史)』의 기록을 인용하여 주몽과 하백녀는 신묘(神廟)가 있어 신성하게 섬겼다고 합니다. 즉 고구려의 건국시조와 그 어머님인 ‘버들꽃아씨(유화부인 : 하백의 따님)’가 시조신으로 숭배되고 있었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고구려가 멸망할 때 유화의 조각상에서 피눈물을 흘렸다는 기록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버들꽃아씨(유화부인)’은 나라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신성하게 모셔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맹이라는 국가적 제전에서도 수신제(水神祭 : 수신을 수혈에서 모시고 나와 국내성 동쪽의 압록강으로 옮겨 물 위에 설치한 신좌에 두고 제사)가 있어서 동맹제의 한 축을 이루었습니다(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于國東[水]上祭之 置木隧於神坐 : 『三國志』「魏書」高句麗).
이와 관련하여 보면, 고대 몽골인들은 조상의 영혼도 자신이나 씨족을 지켜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하여 경배하였다고 합니다[박원길,『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민속원 : 1999) 216쪽]. 그래서 『몽골비사』에는 성모(聖母) 알랑-고아의 샤먼적(예언자적) 성격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코드로 보면 우리가 앞에서 본 몽골신화는 부여보다는 고구려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신화의 코드를 통해서 몽골은 부여에서 나왔지만 고구려와 비슷한 시기에 분화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됩니다. 몽골의 시조신인 성모(聖母) 알랑-고아는 ‘버들꽃아씨(유화부인)’의 몽골버전(Mongol version)인 셈이지요.
물론 민족 신화가 다른 민족의 신화에 영향을 미치거나 전파되는 예는 많이 있어 신화만 가지고 동일한 종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든지 아무런 까닭 없이 이웃의 신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지요. 특히 건국신화는 경우는 민족적ㆍ정치적인 신화(ethnic and political myth)이므로 더욱 그러합니다. 어떤 신화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형태의 계승의식의 반영일수도 있고 민족적 정체성(ethnic identity)의 구현일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죠. 그리고 그것은 신화의 코드 속에 숨어있게 됩니다.
이 코드는 복잡한 현실 세계를 안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문화적 기능(cultural function)을 하는 것이지요. 이 점에 있어서 신화는 모든 문명의 기본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사회 결속과 공동체 의식 유지가 신화의 목적이며 기능이라고 주장한 말리노프스키(Malinowski)의 혜안(慧眼)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지요.
이런 관점에서 몽골의 경우를 봅시다.
몽골은 다른 민족의 신화 일부를 차용하기도 하지만 ⓐ 코릴라르타이-메르겐(고주몽) 신화와 ⓑ 알랑-고아 신화는 천년 이상 벌판을 떠돌면서도 견고하게 가지고 다닌 신화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자신의 뿌리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마치 집을 떠난 어린 소년이 한 장 남은 엄마 사진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이것은 버리거나 잊어서는 안 되는 민족의 코드이지요.
그래서인지 대부분 몽골인들은 한국에 와본 경험이 없으면서도 한국에 대해서 매우 좋게 생각합니다(한국에 와 보면 상황이 달라지지요. 한국인들은 미국이나 중국 등에는 얼마나 잘해 줍니까? 그리고 자기들보다 조금 못 하다 싶으면 얼마나 가혹합니까?). 그리고 한국은 몽골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들로 생각한답니다. 몽골은 중국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의 부리야트족들은 바이칼 일대를 코리(Khori)족의 발원지로서 보고 있으며 이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재승 선생에 따르면 이런 얘기는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적인 전설이라고 하지요. 심지어 동명왕을 코리족 출신의 고구려칸(Khan)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본 대로 그 방향이 다른 것 같습니다. 즉 몽골의 기원은 코리족의 바이칼 방향으로의 이동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몽골비사』가 기록된 것보다도 수백 년 전의 중국 사서들은 코리족들이 아리ㄱ 오손 → 오난 강 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고올리 성터들의 유적들이 그 방향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 다시 부여와 고구려로 돌아갑시다. 고구려가 부여와 동족이었다는 것은 “동이(東夷)들 사이에서 전하는 옛말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의 다른 일파이므로 대부분이 같았으나 의복(衣服)이나 기질(氣質)이 달랐다(『삼국지』「위서」 고구려전)”라고 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신화를 보면 동명과 주몽에 대한 다소의 혼란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아마 그 이유는 부여와 고구려가 같은 종족에 의해 세워진 국가였기 때문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부여의 시조인 동명과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동일하게 취급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주몽은 동명성왕이라고 하지만 주몽을 동명이라고 쓴 예는 없습니다. 즉 중국의 사서 가운데 「고구려전(高句麗傳)」이 있는 책(『魏書』, 『周書』, 『隨書』)은 고구려의 시조를 주몽이라고 합니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경우 즉위 3년에 ‘동명묘(東明廟)’를 세우는데 이것은 주몽의 사당인 ‘시조묘(始祖廟)’가 아니고 부여족이 숭배하는 ‘동명(東明)’에 관한 사당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습니다(李志映 「三國史記 所載 高句麗 初期 王權說話 硏究」). 즉 주몽과 동명은 다르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주몽과 동명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비록 고구려 신화에서 주몽을 동명(東明)이라고 하진 않았지만 그보다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더욱 높인 것으로 보아 부여의 신화에 나타나는 ‘동명’과 고구려의 신화에 등장하는 ‘주몽’이 외형적으로는 다르게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은 같은 존재를 지칭하고 있다고 봐야한다는 말이지요. 물론 부여의 건국 주체세력과 고구려의 건국 주체세력은 다르겠지요. 마치 왕건(王建)과 이성계(李成桂)가 다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부여나 고구려에 있어서 건국의 아버지가 지닌 표상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쥬신이라는 민족의 집단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건국 시조에 대한 원형(archetype)에 대한 코드(ethnic code)라는 것입니다.
즉 『삼국사기』에는 부여의 왕실에서 서자로 태어난 주몽이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면서 신변의 위협을 받다가 탈출하여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三國史記』高句麗本紀 第一) 그 신화의 구조는 부여의 동명 신화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부여의 신화에 “동명은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라는 말이 나오고 고구려 신화에서는 “그 아이가 자라서 자(字)를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그곳 풍속에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명과 주몽의 삶의 역정은 거의 동일합니다. 따라서 주몽 - 동명 - 건국시조 등은 마치 하나의 수레의 바퀴처럼 엮여서 돌아가고 있지요.
[그림 ④] 동명성왕릉(북한 소재). ⓒ김운회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광개토대왕비에서는 추모(鄒牟[저우무])로 나와 있고 『위서(魏書)』고구려전(권 100), 『주서(周書)』고려전(권 49), 『수서(隋書)』고려전(권 81)에는 주몽(朱蒙[주멍]),『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 본기(문무왕 10년)와 『일본서기(日本書紀)』덴지(天智) 천왕 7년 10월조에는 주부(仲牟[チュウボウ])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성이 고(高)씨이고 이름이 주몽(朱蒙)이다(고구려 본기).”는 기록이 있습니다(그러니 동명과 주몽은 하나의 존재를 일컫는 말이지요). 이렇게 동명이란 이름은 부여의 시조뿐 아니라 고구려 왕실과 백제의 시조에서도 사용한 흔적이 보입니다[서병국『高句麗帝國史』(혜안 : 1997) 30쪽]. 백제에서 시조의 묘를 동명묘(東明墓)라고 했다고 하죠. 그래서 저는 주몽이나 동명성왕은 쥬신이라는 민족이 의지하고 기대는 하나의 민족 기원의 코드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주몽과 동명을 같은 존재라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기도 합니다.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의미이고 동명은 하늘의 자손, 또는 개국(開國)을 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물론 외형적으로만 보면 그 뜻은 달라 보일수도 있지만 주몽이란 개인적인 역량과 카리스마의 표현이고 동명이란 개국이라는 중요한 영웅적 행위를 표현하는 것으로 한 인물 속에 체현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고 고구려의 신화에서는 하나로 융합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동명(東明)이라는 말은 동쪽[東], 밝음[明] 등을 뜻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상징하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앞에서 해모수, 해부루 등의 말을 보았는데 ‘부루(夫婁)’나 ‘비류(沸流)’도 동명(東明)과 마찬가지로 밝거나 신성함을 의미합니다. 일찍이 양주동 선생은 ‘()’은 ‘광명(光明)ㆍ국토(國土)’의 뜻으로 ‘발(發)ㆍ벌(伐)ㆍ불(弗)ㆍ비(沸)ㆍ불(不)ㆍ부리(夫里)ㆍ화(火)ㆍ원(原)ㆍ평(平)ㆍ평(坪)ㆍ평(評)ㆍ혁(赫)ㆍ명(明)ㆍ백(白)ㆍ백(百)ㆍ백(伯)ㆍ맥(貊)ㆍ박(泊)ㆍ박(朴)ㆍ호(瓠)’ 등의 글자를 빌려서 표현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쥬신에게 있어서 불[火]이란 신성함의 상징인 동시에 가계나 씨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코드입니다. 몽골의 경우에도 “불씨를 꺼뜨리고 불을 없앤다.”라는 말은 가장 흉악한 저주의 말로 가족의 씨[種]를 말린다는 의미이죠. 오늘날 한국에서 집들이를 할 때나 개업식을 할 때 성냥을 선물로 주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요.
한마디로 동명이란 태양을 숭배하는 천손족(天孫族 : 범쥬신족)의 대표적 코드(code)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국가적 행사를 동맹(東盟)이라고 불렀는데(『삼국지』「위서」) 이것이『양서(梁書)』에서는 동명(東明)으로 전하고 있습니다(『梁書』「高句麗傳」). 결국 동맹이나 동명은 같은 말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동명이란 태양을 숭배하는 천손족이 나라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통하여 민족적 단합과 결속을 도모하여 민족 역량을 최대로 결집시키기 위한 국가적 행사라는 것이죠. 이것은 그대로 예맥의 전통, 곧 쥬신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개천절(開天節) 행사를 국가적으로 성대하게 치른 것이 동맹이라는 말이지요. 오늘날 이 동맹의 원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몽골의 나담 축제를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고구려와 근원이 같은 선비 탁발부(拓拔部)의 경우 이 같은 범민족적 행사에 참가하지 않으면 대인(大人 : 부족장)을 처형하기도 하였으니 고구려도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즉 각 부족들은 동맹이라는 국가적 제전에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죠. 동맹은 국왕이 직접 주재하여 그 스스로가 천제와 물의 신의 후손으로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움으로써 시조의 신성(神聖)함이 이 국가적 행사를 주관하는 현재의 국왕에게 현재화(現在化)하고 국왕은 신성한 존재가 되어 통치의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건국 신화(시조 신화)는 단순히 과거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건국 신화는 그런 과거 지향적 기능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고 그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둔다는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현재의 상황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며 미래의 방향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건국신화는 고대국가에서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이지요.
이 모든 통치의 정통성과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의 한 가운데 바로 동명성왕 고주몽(동명), 단군의 아드님, 쥬신의 아버지가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잠시 천손(天孫)이라는 의미를 유목민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사실 천손(天孫)이라는 의미는 비단 유목민만이 강조하는 것은 아니죠. 중국의 경우에도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하지요?
그렇지만 자연을 개척하기보다는 자연에 오로지 순응만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유목민족에게 있어서 하늘은 모든 권력이나 역량의 원천으로 인식됩니다. 『몽골비사』의 첫 구절에 “칭기즈칸은 이미 하늘로부터 그 운명을 타고 났다.”로 시작됩니다.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아기를 가졌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유목민족에게 ‘하늘의 뜻[天意]’이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도덕과 같은 것이지요. 예를 들어 쿠빌라이칸이 “당태종이 친히 정벌하고도 정복하지 못한 고려의 세자(世子)가 스스로 짐에게 귀의하다니 이는 진정 하늘의 뜻이로다.(『高麗史』)”라고 하는 등 쥬신은 유달리 하늘의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위엄을 높이기 위해 하늘과의 연계를 강조하는 중국인들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몽골(몽골쥬신)은 원래 반항적이지 않고 매우 복종적이라고 합니다. 복종이 미덕이지요. 이 같이 맹종하는 습속들은 지금까지도 한국ㆍ일본ㆍ몽골 등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몽골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평등하게 둥글게 둘러앉아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고 용인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의 뜻’과 같기 때문이죠. 그러나 평화제의가 거절당하면 중국인처럼 여러 가지 전략적인 행동으로 움직이지 않고 바로 무력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참가자들의 대다수는 죽을 때까지 투쟁하며 항복하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박원길,『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민속원 : 1999) 183쪽]. 마치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죠?
이제는 백제의 신화와 위의 신화들을 비교해 봅시다. 『북사(北史)』에는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애기합니다.
"색리(索離)라는 나라의 왕이 지방에 나간 사이에 궁중에 남겨진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돌아와서 그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하기를 ‘왕께서 아니 계시는 동안 달걀만한 양기(陽氣)가 내려와서 제 입으로 들어와 아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왕은 수상하게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시녀를 살려두기로 했다. 후에 시녀가 아이를 낳자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김을 불어 얼어 죽지 않았고 말 우리에 버리니 말도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왕은 이 아기가 아마 신이 보낸 것 같다고 여겨 주워 기르고 그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동명은 자라서 활의 명수가 되었다. 왕은 동명을 두려워하여 다시 죽이려 하자 동명은 남쪽으로 몸을 피하고 도중에 엄체수(淹滯水)라는 강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때리니 물속에서 고기 떼, 자라 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은 그 다리를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질고 신의가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처음에 백(百) 집의 사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濟] 까닭에 백제(百濟)라고 한다. 동쪽에는 신라와 고구려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가 있다(『북사(北史)』94권 「백제」).
백제의 건국시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 한국측 자료로는 『삼국사기』(권23 백제본기 1, 시조 온조왕 즉위조), 『삼국유사』(권2 기이 2, 남부여조) ② 중국측 자료로는 『주서(周書)』(卷49 「列傳」百濟傳), ③ 일본측 사서로는 『속일본기(續日本記)』(卷40, 桓武天皇 9年 秋七月) 등이 있습니다. 백제의 건국과정에서 상세히 분석하겠지만 여기서는 쥬신 전체의 신화와의 연계성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일본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둡시다. 『속일본기』에는 “백제의 태조(太祖)가 도모대왕(都慕大王)이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백제의 건국신화는 부여ㆍ고구려와 대동소이하지만 유심히 보면 동명(東明)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훨씬 부여적(夫餘的)이라는 것을 감지해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도 부여의 신화를 거의 복제해낸 것입니다.
이상하죠? 건국시기를 본다면 부여 → 고구려 → 백제의 순서일 터인데, 그 신화는 부여와 고구려는 조금 다르고 백제의 신화는 오히려 부여의 복제품이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렇지요. 이 안에는 수많은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백제의 건국신화에는 부여의 신화에 구성하는 코드(code), 즉 ① 하늘, ② 기아(棄兒 : 아이를 버림), ③ 활의 명인, ④ 큰물과 관련된 지지자들의 존재 등이 그대로 있으며 주몽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동명이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고구려와는 차별화하면서 보다 ‘부여의 재생’에 역점을 두고 있지요. 제가 백제를 남부여, 또는 반도부여라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죠. 그러면서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분을 등장시킴으로써 혈통적으로는 부여에 더 가까우면서 실질적으로 건국의 시조가 되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는 점에서 고구려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이것은 부여가 더욱 강력하게 부활하기를 염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강화된 어머니의 역할이 다시 감소되고 맙니다.
결국 같은 기원의 신화라도 미묘한 코드의 차이나 변용이 나타나고 그것은 실제적인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보여주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백제의 건국신화와 그 건국과정은 쥬신의 다른 신화나 건국과정들에 비하여 아직도 미해결된 문제가 많습니다. 일단 저는 백제의 건국과 시간적인 거리가 가장 가까운 『북사(北史)』의 기록을 인용한 것입니다.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 동명설(東明說), 온조설(溫祚說), 비류설(沸流說), 구태설(仇台說), 도모설(都慕說) 등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부여에서 지속적으로 여러 무리가 반도 쪽으로 내려온 것을 알 수가 있죠?). 이 부분은 ‘백제편’에서 충분히 다루겠습니다. 그 때쯤이면 여러분들의 의문도 풀릴 것입니다.
부여 - 고구려ㆍ몽골 - 백제의 건국신화를 보면 코드의 변용은 있었지만 결국 전체적인 코드는 대동소이하며 이것은 민족적 일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들 건국신화는 민족의 일체성을 암시하는 많은 코드들이 있으며 그것으로 판정해보면 부여 - 고구려ㆍ몽골 - 백제 등은 하나의 민족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신화는 명백히 한족(漢族)에게서는 나타나지가 않기 때문이죠.
(4) 쥬신의 코드, 활(弓)
쥬신의 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코드가 있습니다. 하나는 태양, 즉 하늘에서 내려온 빛에 의해 회임(懷妊)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국시조들이 대부분 활의 명인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늘, 또는 그 하늘의 자손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단군신화의 환웅만이 아니라 부여의 해모수(解慕漱), 일본의 니니기(瓊瓊杵) 등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쬐이는 햇빛에 의해 건국시조가 태어난 예를 들면 부여의 동명과 부여계의 신화들, 고구려의 주몽, 신라ㆍ일본의 아메노히꼬(天日槍), 몽골의 알랑-고아 신화, 거란의 야루아버지(耶律阿保機 : 야율아보기), 선비의 투바귀(拓跋珪 : 척발규) 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천손(天孫)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쥬신 신화의 가장 일반적인 코드입니다. 단군신화가 전형적인 예이지요. 그런데 단군의 계승자인 주몽의 신화는 단군신화와는 달리 보다 땅위에 사는 인간을 중심으로 묘사된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역할을 더욱 강화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천손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알타이계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코드(code)입니다. 이것은 신령스러운 산, 신령스러운 나무 등과 더불어 북방 유목 민족의 수직적인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건국 시조들이 활의 명인이라는 점을 살펴봅시다. 부여(夫餘)나 백제의 동명이나 고구려의 주몽(동명성왕)이나 몽골의 메르겐(Mergen) 등을 봅시다. 활은 쥬신 신화의 대표적인 코드죠. 그렇다면 이 코드를 풀어야만 이 신화가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겠죠?
쥬신의 신화 속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내용은 쥬신족들은 활의 명인을 매우 우대하고 칭송하는 관습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활의 명인들이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조선(朝鮮)의 건국도 마찬가지죠?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대표적인 명궁이죠). 도대체 왜 그럴까요?
넓은 초원을 무대로 살아가야 하는 쥬신족들에게 있어서 활은 생명의 동아줄 같은 것입니다. 수렵과 유목에 의해 삶을 꾸려 나가는 사람들에게 활은 매우 중요한 삶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지요. 아무리 그렇다고 활만 잘 쏜다고 그저 왕으로 삼아요? 좀 지나친 것은 아닐까요?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쥬신에게 있어서 활과 화살은 단순히 사냥을 위한 살상용 무기만이 아니죠. 화살은 ① 사회적 맹약, ② 왕의 권위, ③ 명(命)의 전달자로서 사절(使節)의 불가침성(不可侵性), ④ 소유권의 표시, ⑤ 부족내의 통일과 평화 등의 심볼로서 사용되는 것으로 대단히 신성한 것이죠[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민속원 : 2001) 213쪽].
간단히 말하면 활은 바로 쥬신의 심볼(symbol)입니다. 요즘도 반도쥬신(한국인)은 활로 세계를 정복하고 있지요. 한국에서 양궁 선수가 되는 것이 올림픽 금메달 따는 것보다 어렵다고들 합니다.
활의 기능을 좀 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봅시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오르도스 지역 쥬신족 장수 여포(呂布)가 유비(劉備)와 원술(袁術)의 부하 장군인 기령(紀靈)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자기가 화극(畵戟 : 창)의 작은 가지에 활을 쏘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포는 ‘내가 저 창 끝에 있는 작은 가지를 한번 쏘아 명중시키면 전쟁을 중단하고 아니면 계속 싸우시오’라고 하더니 활을 쏘았다. 여포가 쏜 화살은 창 끝의 작은 가지에 명중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은 놀라서 ‘장군께서는 하늘이 위세를 갖추고 있소이다.’ 라고 경탄하였다(『三國志』「魏書」呂布傳).”
마치 황당한 무협지의 한 장면 같이 들립니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가 힘들죠. 제가 나관중 『삼국지』(소설『삼국지』)에서 이 장면을 보았을 때는 지어낸 이야기로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그대로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있어서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고로 여포는 무예의 명인이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차이나드림을 이루려했으나 한족(漢族)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인맥(人脈) 구축의 실패로 비운(悲運) 속에 생을 마감한 사람이었죠[김운회,『삼국지 바로읽기』(삼인 : 2004) “여포를 위한 아리랑” 참고].
[그림 ⑤] 몽골의 전사 (원나라때 비단에 그린 그림). ⓒ김운회
위의 기록을 보면 여포가 화살을 사용한 것은 흔히 나관중 『삼국지』마니아들이나 한족(漢族)이 생각하듯이 무예를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죠. 평화의 상징으로 화살이 사용되고 있으며 하늘로부터 어떤 신령스러운 힘이 활의 명인에 내려서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죠.
따라서 활은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주요한 매개체이며 활의 명인이란 결국 하늘의 뜻을 실행하는 그 대리자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하늘은 궁극적으로 평화를 원하고 그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천명을 받은 자이지요. 주몽(동명성왕)은 바로 그런 분이며 칭기즈칸의 조상이지요.
그리고 이 같은 사고는 바로 천손사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활로써 적을 공격하여 죽이더라도 그것은 천명(天命)에 의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나라 때도 서양 사람들은 ‘천하의 도살꾼’으로 알았던 몽골인(몽골쥬신)들을 직접 보고서는 그들의 부드럽고 겸손하며 순박하고 소탈한 성품에 많이 놀랐다는 것이죠. 칭기즈칸의 원(元)나라는 일단 세계를 정복한 후 철저히 교통로를 보호하고 가장 안전하게 상인들을 보호합니다. 세계 역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죠.
세계의 그 어떤 민족과 정부도 원(元)나라만큼 동서양의 교역을 아무 탈 없이 유지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아시아에 팔다리도 여러 개인 괴물들이 산다고 믿어 가기를 꺼리던 유럽인들이 원나라 이후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울란바트로 - 대도(大都 : 현재의 베이징)까지 들어옵니다. 세계가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는 이른바
‘세계화시대(The Age of Globalization)’ 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열리게 됩니다.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세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이기도 합니다.
다시 쥬신의 심볼 활로 돌아갑시다.
쥬신에게 활이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이유 이상의 활과 관련된 쥬신 특유의 집단 무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쥬신에게서 활은 악령(惡靈)을 제거하는 신성한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악령을 물리치는 것이라면 쥬신에게 있어서 활은 악령으로부터 쥬신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민속원 : 2001) 213쪽].
결국은 쥬신에게 있어서 활의 명인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군장과 종교적인 수장을 겸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단군왕검(檀君王儉)도 종교수장(단군 : 샤먼)과 정치적 군장(왕검)을 함께 나타내는 말이지요]. 이것이 활과 활의 명인이 가지고 있는 코드(code)의 내용입니다.
이 같은 샤마니즘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쥬신의 왕조가 최초의 정복왕조라고 할 수 있는 거란(契丹)이었습니다. 『요사(遼史)』에 따르면, 요나라의 태조는 “(천명을 받은 군주는 마땅히 하늘을 섬기고 신을 경배한다(受命之君 當事天敬神 :「耶律倍傳」)”라고 하여 샤마니즘을 아예 국교(國敎)로 숭상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島田正郞, 『遼朝官制の硏究』(1979) 321쪽]
이상의 분석을 통해서 부여 - 고구려ㆍ몽골 - 백제의 건국신화를 보면 코드의 변용은 있었지만 결국 전체적인 코드는 대동소이하며 이것은 쥬신이라는 하나의 민족의 일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씨족 사회를 근간으로 하는 유목 사회는 공동조상에 대한 개념이 매우 뚜렷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이전까지 저는 중국의 사서(史書)를 고증하거나 현대 생물학적인 방법으로 부여 - 고구려ㆍ몽골 - 백제 등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증명해왔습니다. 이제 신화를 통해서 이를 다시 검증하여 보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건국신화는 민족의 일체성을 암시하는 많은 코드들이 있으며 그것을 분석해보면 부여 - 고구려ㆍ몽골 - 백제 등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이지요. 이번이 이야기가 여러분들이 범쥬신(Pan-Jüsin)을 폭넓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열도쥬신(일본)의 신화는 어떤지 한번 분석해봅시다.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일본 신(神)들의 고향, 경상남도 거창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3>
2005-06-21 오후 6:32:11
연오랑ㆍ세오녀(延烏郞·細烏女) 이야기 아시죠? 금슬 좋은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이 이야기가 일본의 건국신화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죠. 먼저 한번 보시죠.
"동해 연안에 연오랑ㆍ세오녀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서 해조를 따는데, 홀연 바위 하나가 나타나, 이것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국 사람들이 그를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 왕으로 모셨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겨 그를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역시 그 바위에 올라타니 역시 일본으로 갔다. 세오녀를 본 일본 사람들이 놀라 왕에게 바치니 부부가 상봉하여 세오녀는 왕비가 되었다. 이때부터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천문을 맡은 자가 아뢰어 말하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다가 이제 일본으로 간 까닭에 이러한 변괴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신라왕은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돌아오게 하였으나 연오랑이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어찌 돌아갈 수 있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가 짠 가는 명주를 줄 터이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하면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일본으로 간 사신이 신라에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내니 해와 달이 옛날같이 빛났다. 그 명주를 어고에 두어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고,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 하였다(『三國遺事』卷1, 奇異 延烏郞細烏女)."
이 이야기는 신라 8대 임금 아달라(阿達羅) 왕 4년의 때의 일이라고 하는데 일월신화(日月神話), 건국신화와 포항 지역의 영일(迎日)이란 지명과 뭔가 관련이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원래 이 이야기는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에 실려 있었던 것으로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문헌에 전하는 거의 유일한 천체 신화(天體神話), 일월 신화(日月神話)라고 합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日月無光)"는 말이 있는데 이것을 일식(日蝕)현상이라고 보면 아달라왕 13년 춘정월조에 일식 기록을 비롯하여 고구려 차대왕 4년(149), 13년(158), 20년(165)과 백제 개루왕 38년(165) 소고왕 5년(170) 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신영식, 『삼국사기연구』(일조각 : 1981) 200~204쪽] 대체로 2세기 중 후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해와 달이 빛을 잃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겠지요.
지금 영일만(포항)의 호미(虎尾)곶에는 연오랑과 세오녀가 상봉하는 장면이 아름다운 조각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연오랑 세오녀(포항 호미곳). ⓒ김운회
마치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가슴 아픈 사랑과 그리움을 담고서 서로 부둥켜안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만남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을까요?
그나저나 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나니 태양이 빛을 잃죠? 그러면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태양신은 여자인가요? 일단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본 신화에서도 태양신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御神)도 여성입니다. 이 아마테라스(天照大御神)가 세오녀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요?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일본의 이야기에 신라(新羅)의 왕자 아메노히보꼬[천일창(天日槍)]의 아내가 일본에 건너가자 자신도 일본으로 갔다는 내용이 있죠. 즉 아메노히보꼬가 해의 정기를 받은 처녀가 낳은 알을 빼앗자, 그 알(태양의 정기)이 처녀로 변합니다. 그래서 아메노히보꼬는 그녀(알에서 나온 처녀)와 함께 살았는데 아메노히보꼬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니 그녀는 일본으로 와버립니다. 그러자 아메노히보꼬도 일본으로 따라 건너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메노히보코, 즉 천일창(天日槍)이란 '하늘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천손족(天孫族)으로 태양신(日)을 믿는 창(槍)을 든 사람'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고, 일본에 철기를 전해 준 신라의 왕자라는 것이지요. 천일창은 신라에서 이즈모(현재 일본의 시마네현)를 거쳐 타지마(현재 일본의 효고현) 지역으로 이주하여 원주민의 땅을 빼앗아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아메노히보꼬의 이야기는 연오랑ㆍ세오녀와 거의 비슷한 내용 같기도 한데, 어째 부부간의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요. 마치 비밀이 많고 복잡한 일본의 신들과 일본의 역사처럼 말입니다.
(1) 일본 신들의 이야기
일본 건국신화는 다른 신화들에 비하여 매우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일반인들이 제대로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신화들은 누구나 알기 쉽게 씌어져 있는데 유독 일본 신화만큼은 난해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아마 그만큼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겠지요. 어쩌면 일본 신화만 제대로 해독해도 동북아시아의 역사의 많은 부분을 해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건국신화가 기록된 책은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입니다. 신화의 내용을 먼저 한번 봅시다. 이름들이 너무 복잡하니 같은 레벨(level)의 이름들에 ⓐ, ⓑ 등으로 표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매우 복잡하니 대부분 간단하게 약칭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령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御神)는 아마테라스로, 스사노오노미고또(建速須佐之男命)는 스사노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먼저 『고사기』를 보겠습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겨났을 때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에 나타난 신은 ⓐ아메노미나까누시노가미(天之御中主尊)이고 이어서 ⓑ이자나끼노가미(伊耶那岐神)라는 남신과 ⓑ이자나미노가미(伊耶那美神)라는 여신이 생겨납니다. 남신인 이자나끼가 왼쪽 눈을 씻을 때 태어난 신의 이름은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御神), 오른쪽 눈을 씻을 때는 쓰꾸요미노미고또(月讀令) , 코를 씻을 때는 스사노오노미고또(建速須佐之男命) 등이 신이 나타납니다(『古事記』제1장, 제2장).
『일본서기』는 약간은 다르지만 훨씬 상세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혼돈 속에서 하늘과 땅이 생기고 그 가운데 일물(一物)이 생겼는데 갈대싹[葦牙]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득 변하더니 신(神)이 됩니다. 이렇게 변한 신을 ⓐ쿠니도코다씨(國常立尊)라 불렀고 두 신이 더 생겨 세 신이 생깁니다. 다음으로 4대의 여덟 신이 생겼는데 그 마지막이 ⓑ이자나기(伊奘諾尊 :イザナミ)ㆍ이자나미(伊奘冉尊 : イザナミ)였지요. 이자나기(伊奘諾尊)는 이자나미(伊奘冉尊)와 결혼합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에 앉아서 "어디 마땅한 나라는 있을까?"하면서 옥으로 된 창[天瓊矛]으로 이리저리 긋더니 섬을 얻습니다(『日本書紀』神代 上 1-3).
그 후 이자나미는 곡식의 신, 바람의 신, 항구의 신, 바다의 신을 낳지만 불의 신을 낳다가 타죽고 맙니다. ⓑ이자나기는 아내를 찾아 죽음의 나라까지 갔다사 도망쳐 나왔는데 이 때 부정한 몸을 씻기 위해 목욕을 하니 왼쪽 눈을 씻을 때,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의 여신이, 오른쪽 눈을 씻을 때 ⓒ츠쿠요미 노미코토[月讀命]라는 달의 여신이, 코를 씻을 때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라는 바다의 남신(男神)이 생겨납니다(『日本書紀』神代 上).
그런데 이 남신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는 난동을 부리다가 추방됩니다. 스사노오는 진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이즈모노쿠니(出雲國)로 내려가 사람들을 괴롭히던 머리가 여덟 개 달린 큰 뱀을 죽이고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日本書紀』神代 上 8). 그 후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烏尊)의 직계 후손인 ⓓ오쿠니누시노카미(大國主命)는 다른 형제들이 물려준 나라까지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지상세계는 천손(天孫)이 다스려야 한다고 하여 ⓓ오쿠니누시의 아들에게 나라를 요구하며 '태양의 신'의 손자인 ⓔ니니기[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를 내려 보냈고 그의 직계 증손자인 ⓖ와카미케누 노미코토(若御毛沼命)가 까마귀의 인도를 받아 가시하라(橿原)에 나라를 세우고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 천황이 되었다고 합니다(『日本書紀』神代 下).
일단 외형적으로만 보면 일본의 신화는 쥬신의 다른 신화들과는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첫째, 일본의 신화는 앞부분은 중국 신화 내용의 일부를 끌어다 차용한 듯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중국신화에 나타나는 천지개벽(天地開闢)과 반고(盤古)식의 이야기와 비슷하게도 들립니다(혼돈 속에 음양이 있다가 갈라져서 싹이 되고 그 싹은 반고라는 사람이 됩니다. 반고가 죽어서 만물이 생성되지요). 이것은 일본의 신화가 다소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중국 문화가 동아시아에 보편적인 문명으로 확장이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늦게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중국 신화의 흐름과 일본 신화의 흐름 자체는 완전히 다릅니다. 중국신화는 철저히 인간(人間) 중심의 신화이지요.
둘째, 이전의 쥬신 신화와는 달리 토착민들의 신화가 먼저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니니기(瓊瓊杵尊) 이후의 전개되는 과정은 단군신화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죠(뒤에서 상세히 분석합니다). 이것은 일본 초기의 지배세력과 후기의 지배세력이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일본의 신화는 쥬신의 다른 신화와는 달리 건국 관련 지역이 '신라(新羅)'라고 하여 지명(地名)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지요.
여기서 잠시 여기서 중국신화의 전체를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혼돈 상태[태역(太易)]에서 맑고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흐리고 무거운 것은 가라앉아 흙이 되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어우러져 사람이 되었다(『列子』天瑞 第一). 이 사람의 이름은 반고인데 그가 죽어서 온갖 만물이 되었다(五運歷年紀). 하늘에는 오궁(五宮)이 있고 그 왕은 태일(太一)인데 천극성(天極星 : 북극성)에 있다(『史記』27卷 天官書). 땅의 북쪽 끝에는 천지(天池)라는 바다가 있고 그 곳에는 몇 천리가 되는 큰 고기 곤(鯤)이 살고 바다가 움직이면 곤이 변해서 붕(鵬)이 되어 남쪽 끝 바다로 날아간다(『莊子』逍遙篇). 천지개벽 후 사람이라고는 복희씨와 곤륜산의 여와(女,와는 女 + 卨 글자임)의 두 남매뿐이었다. 이들은 남매라서 결혼하기가 부끄럽지만 연기로 화합하는 방법으로 결혼하여 사람의 씨를 퍼뜨려 사람들이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淮南子』覽冥訓)."
중국의 신화를 보면 쥬신의 신화와 비교해 볼 때, 그 구성이나 흐름이 전체적으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철저히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요. 그러니까 일본 신화가 중국 신화를 일부 모방하기는 했지만 전체 흐름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천신(天神)이 이자나기(伊奘諾尊 :イザナキ)에게 세상을 창조해보라고 보석으로 장식된 마법의 창을 줍니다. 그래서 이자나기는 창으로 바다 속을 휘저어 바닷물 몇 방울이 응결되었고, 이것이 오오야시마(おおやしま)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일본 열도라는 것이지요. 이자나기는 아내인 이자나미(伊奘冉尊 : イザナミ)와 더불어 다른 섬들을 낳는데 이것이 혼슈(本州)·시코쿠(四國)·큐슈(九州) 등의 다른 섬들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제 이 일본 신화의 세계를 좀 더 깊이 분석해 봅시다.
(2) 일본 신들의 고향, 경남 거창
『일본서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중요한 지명이 있습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에 앉아서"라는 대목을 봅시다.
이 대목을 보면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는 태초의 일본 신들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등의 신들이 태어난 후 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처음 나타나는 말이니까요. 따라서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는 최초의 일본 신들이 상정하는 하늘나라인 셈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고천원의 위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천원은 하늘나라가 아니고 실재하는 땅으로서 한반도의 어느 산간분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어학자 김종택 교수(한국지명학회 회장)는 이 고천원이 대한민국 경상남도 거창(居昌)의 가조면(加祚面, 加召面)이라고 단언합니다. 처음에는 황당하게만 들리는 이 말이 김종택 교수의 분석을 보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김종택 교수는 고천원(高天原)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이 지역(거창)에서 쓰이고 있고, 가조의 옛 이름이 벌인데 말은 가시하라(橿原) 또는 가시벌과 같은 의미라는 점, 아직도 가조에는 궁궐터가 있고 그것을 나타내는 지명(궁배미)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서 거창의 가조 지역이 바로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라고 보고 있습니다(김종택, "일왕가의 본향은 경남 거창 가조"『신동아』2004.10).
거창과 가조면 위치(군관광안내도 재구성). ⓒ김운회
실제로 거창을 가보면 이상하리만큼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요즘은 사방으로 고속도로가 뚫려 있지만 거창은 해발고도도 높은 고원 분지지역입니다. 마치 티베트 같다고나 할까요? 산세도 험하여 만약 과거 나라를 이곳에 세웠으면 다른 종족이 침략하기는 매우 어려운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의 다른 지역으로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는 일단 이 정도로 해두고 다시 『일본서기』로 돌아가 보면 이자나기의 소생들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의 여신, ⓒ츠쿠요미 노미코토[月讀命]라는 달의 신,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라는 바다의 남신(男神) 등이 있는데 ⓒ스사노오(素戔嗚尊)는 난동을 부리다가 추방된 후 이즈모노쿠니(出雲國)로 내려가 사람들을 괴롭히던 머리가 8개 달린 큰 뱀을 죽이고 나라를 세웠다고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즈모노쿠니(出雲國)에 대해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첨부합니다.
"스사노오의 행실이 좋지 못해서 여러 신들이 그를 벌하여 쫓아내니, 스사노오는 아들들인 50여 명의 날래고 용감한 신[猛神]들을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으로 가서 소시모리(曾尸茂梨)에 있다가 진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이즈모노쿠니(出雲國)의 파천(簸川)상류에 있는 조상봉(鳥上峯)으로 가서 사람을 잡아먹는 뱀을 죽였다(『日本書紀』神代 上 8)."
바로 이 대목에서 오랫동안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스사노오가 일본에서 신라를 정벌하러 갔다는 근거로 제시하기는 했습니다만 지금까지 본 대로 그것은 아니지요. 다만 여기서 스사노오의 행실이 좋지 못해서 여러 신들이 그를 벌하여 쫓아내는 과정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아름답고 아늑한 경남 거창의 전경. ⓒ김운회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사노오의 행실에 화가 난 아마테라스는 하늘나라의 바위굴[天石窟]로 들어가 버립니다. 태양신이 동굴로 들어가 버렸으니 세상은 온통 암흑천지가 되었죠. 그래서 하늘나라 모든 신들이 아마테라스가 나오게 할 궁리를 하는데 오모히가네(思兼神)는 수탉들을 모아서 길게 울게 하여 아마테라스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스사노오에게서 머리털과 손톱·발톱을 뽑고 쫓아 버립니다.
그런데 바로 바로 경남 거창 가조면에 닭뫼, 즉 비계산(해발 1,126m)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지역은 수탉이 날개를 펼치고 동북쪽으로 나는 산세 때문에 왕기(王氣)가 일본 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문제는 언제 이 거창 지역을 떠나서 일본으로 갔는가 하는 점이지요. 이 부분은 『일본서기』해석의 가장 골치 아픈 부분입니다. 다시 『일본서기』로 들어가 추적해 봅시다.
비계산(거창)의 전경. ⓒ김운회
위의 인용된 글에서는 스사노오가 신라국의 소시모리에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 그리고 스사노오의 그 다음 행로는 진흙의 배로 이즈모노쿠니(出雲國)로 향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즈모노쿠니(出雲國)는 신라와 가까운 일본 지역이었겠지요.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먼저 신라(新羅)는 사로·서라벌·계림 등으로 불리어지다가 307년 신라 15대 기림왕 때에 이르러 신라를 국호로 삼기 시작했으며 신라가 국호로 확정된 것은 지증왕 4년(503년)의 일입니다. 그래서 김종택 교수는 스사노오가 신라에 도착한 시기는 대체로 4세기 이후라고 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이 보다 훨씬 이전인 1~3세기경에 신라 - 일본으로 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4세기 후반이면 이미 반도부여(백제)의 근초고왕이 이 지역을 정벌하고 영향력을 확대합니다. 그리고 일본열도에서도 반도부여(백제)와 가야 연합세력들이 4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열도정벌에 나서게 되지요. 그렇다면 그 이전에 이미 한반도의 상당한 세력들이 일본 쪽으로 진출해있었다는 말입니다. 『일본서기』에서 비록 사로(斯盧)라든가 하는 신라의 옛말은 나오지 않지만 『일본서기』가 편찬될 당시에는 같은 지역 이름인 신라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보세요. 저도 지금 3~4세기의 이야기를 하면서 7세기경에 나온 말인 일본(日本)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서기』에 따르면, 근초고왕(?~375)은 마한(馬韓)을 경략하고 가야를 정벌할 때 일본에서 온 장군 아라다와께(荒田別)·목라근자(木羅斤資) 등과 함께 했으며 치구마나히코(千熊長彦)은 근초고왕과 함께 벽지산(현재 전북 김제로 추정)에 올라 맹세하였다고 합니다(『日本書紀』神功 49조). 여기에 나오는 목라근자의 아들인 목만치(木滿致)는 구이신왕(久爾辛王 : 420~427) 때 전권을 장악한 사람입니다. 목만치는 백제가 정복한 가야 땅의 지배자이기도 했습니다. 이 일들은 4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일이므로 이미 4세기 이전에 반도부여(백제)와 가야 연합세력이 일본 열도로 진출했음을 의미하죠. 그렇다면 이들보다 선주민인 스사노오는 1~3세기 이전에 일본열도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스사노오는 어떤 갈래의 사람들이었을까요?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거창 지역의 정치세력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가야연맹이 있던 지역이죠.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낙동강의 동쪽은 사로국(후일 신라), 서쪽은 가야연맹이 있었습니다. 당시 거창의 남부에는 금관가야(김해)와 고령가야(진주)가 있고 북부에는 대가야(성주)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거창에도 가야연맹의 소국이 있었던 것이지요. 가조가야, 또는 갓 가야라고나 할까요? 가야연맹은 2~3세기에는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중심으로 5세기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번성합니다. 따라서 스사노오는 가야계이긴 하지만 주류(메이저 그룹)가 아닌 방계(마이너 그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사노오는 흔히 '우두천왕(牛頭天王 : 소머리천왕)'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이 말은 소시무리(曾尸茂梨)와 유사하지요. 그렇다면 소머리산, 즉 우두산(牛頭山)을 신라지역에서 찾으면 상당한 비밀이 밝혀지겠죠? 그 우두산이 있는 곳이 바로 경남 거창이지요. 영남 땅에서 우두산이라고 부르는 곳은 가야산 밖에는 없죠. 가야산(伽倻山)은 예로부터 소의 머리와 모습이 비슷하다고 하여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불렀으며 주봉을 우두봉(牛頭峯), 또는 상왕봉(象王峯)이라고 합니다.
왜 이 산을 가야산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곳은 옛날 가야국이 있었던 곳이고 이 산이 가야국에서 가장 높고 훌륭한 산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야의 산, 가야산이라 불려지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답니다. 특히 가야산(伽倻山)에서 쓰이는 야(倻)라는 글자는 우리나라에만 쓰는 한자로 가야국, 즉 나라이름에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국어학자인 김종택 교수는 소시무리를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소시(sosi)는 원형과 방언의 중복표기로 봅니다. 즉 앞의 말이 고어이거나 외래어일 경우 그 다음 말을 고유어를 붙여 말을 강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so)는 쇼[牛]로 중앙어이자 고어인데 남부 사투리(남부지역 고유어)인 시(si)를 덧붙인 것이라는 얘깁니다. 일본어로 소를 우시(usi)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소라는 원래 말에다가 한반도 남부 사투리 또는 같은 계통의 일본 말인 우시가 붙어서 소시(sosi)가 된 것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무리는 뫼[山]의 선행 형태이므로 결국 소시무리는 쇠뫼[牛山]로 해독이 됩니다. 아직도 그 곳 사람들은 쇠산, 소산으로 부른다고 합니다(김종택, "일왕가의 본향은 경남 거창 가조"『신동아』2004.10).
그렇지 않다면 쇠머리를 하나의 글자로 표현하기가 어려우니 풀어서 소시머리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지요. 어떤 경우라도 쇠머리, 또는 쇠머리산을 나타내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소시머리가 『일본서기』에 따른다면 신라국에 있어야 하겠는데 거창에 가깝다니 다소 난감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일본서기』가 편찬될 당시에는 한반도 전체가 신라(통일신라) 땅이었으니 꼭 경주가 아니라도 틀린 분석은 아닐 수도 있겠지요.
거창 우두산의 전경. ⓒ김운회
스사노오의 이동로 분석을 위해 일단 『일본서기』를 봅시다. 『일본서기』에는 누나인 아마테라스에 의해 쫓겨난 스사노오는 다시 아마테라스에게 갑니다. 그러자 아마테라스가 나라를 빼앗으러 왔다고 매우 화를 내니, 스사노오는 "저는 본래 사심이 없습니다. 저는 멀리 근국(根國)을 가려고 합니다. 누님을 뵙고 싶어 구름 안개를 헤치고 왔는데 이렇게 누님께서 화를 내실 줄은 몰랐습니다.(『日本書紀』神代 上 6)"라고 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스사노오는 가야산을 지나 현재의 부산 쪽인 김해로 가려고 했는데 아마테라스에게 쫓겨 경주(신라) 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신라에 투항했다는 말일 수도 있죠).
이 과정을 좀 더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아마테라스는 당시 가야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金官伽倻) 세력이고 이들의 세력이 2~3세기 거창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거창지역의 가조 가야인(스사노오)들이 금관가야(아마테라스)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고(그러니 스사노오의 행실이 나빠서 추방된 것으로 표현되고 있죠) 부산으로, 경주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다 결국은 신라에 투항했다가 영일현(포항) 쪽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입니다[여기서 제가 스사노오를 가조 가야인으로 표현한 것은 그런 기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붙인 이름입니다].
금관가야는 기원 전후로 김해를 중심으로 성장한 가야연맹의 한 국가로 대가야, 구가야(舊伽倻), 남가야(南伽倻) 본가야(本伽倻)라고도 합니다. 1세기 경 수로왕이 김해지방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금관가야를 건국했으며 2~3세기경에 낙동강 유역에 널리 퍼져있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여 가야연맹체를 결성했습니다. 스사노오의 이야기는 바로 이 시기의 일로 가조가야(스사노오)는 이 금관가야 연맹에 흡수되기를 거부한 세력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스사노오는 거창(居昌)을 떠나 가야산을 거쳐 김해(金海 : 부산)로 갔다가 김해의 아마테라스에게 쫓기어 다시 경주(慶州)를 거쳐 포항(浦項)으로 갔다가 일본(日本)으로 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일본서기』에 나타난 스사노오의 이동 경로를 요약해봅시다.
㉠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 가조가야?] → ㉡ 신라국(新羅國) 소시모리(曾尸茂梨) → ㉢ 이즈모노쿠니(出雲國) → ㉣ 네누쿠니(根國)
여기서 말하는 이즈모노쿠니(出雲國)나 네누쿠니(根國)는 일본 내의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즈모노쿠니(出雲國)는 지금도 이즈모 시(出雲市)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시마네현(島根縣)에 있습니다. 이 시마네(島根 : 엄청나게 큰 섬이라는 의미)현에서 한자를 보세요. 섬의 뿌리라는 뜻으로 근(根)이 나오지요? 최근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조례를 정하여 한국 전체를 시끄럽게 만든 바로 그 곳입니다. 신기하고도 아이러니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의 갈등은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가야의 소국들 간의 대표적인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시마네현의 위치(일본 시마네현 홈페이지 소개자료). ⓒ김운회
쉽게 이해하자면 이 전쟁은 이 지역에서 세력의 확장을 추진하던 금관가야(김해)와 이에 반발하는 골포국(마산ㆍ창원), 고사포국(고성), 칠포국(칠원ㆍ진동) 등 포상팔국(해변 지역)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스사노오가 바다의 신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즉 스사노오는 이들 포상팔국의 연합세력이었다는 말이지요.
포상팔국의 난은 『삼국사기』에는 209~212년까지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야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위기를 맞아 이들을 제대로 물리치지 못하고 갈팡질팡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일본서기』에 "스사노오의 행실에 화가 난 아마테라스는 하늘나라의 바위굴로 들어가 버린다."라는 표현과 관계가 있겠지요.
그래서 가야 연맹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일본서기』에는"세상은 온통 암흑천지가 되어 하늘나라 모든 신들이 아마테라스가 나올 궁리를 꾸미다가 수탉들을 모아서 길게 울게 하여 아마테라스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스사노오에게 머리털과 손톱·발톱을 뽑고 쫓아 버렸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닭 울음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계림(鷄林), 즉 경주(신라)를 상징하지요. 신라의 도움으로 사태를 수습한 금관가야는 이후 왕자를 신라에 인질로 보내야했고, 신라는 손쉽게 경상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당시 포상팔국의 군대는 해로(海路)를 통해 울산까지 진출했다고 합니다.
이 포상팔국의 난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의 갈등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스사노오가 신라방면으로 들어간 것은 스사노오(포상팔국) 세력의 일부가 신라에 귀부(歸附)한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3) 연오랑(延烏郞)ㆍ세오녀(細烏女)
스사노오와 관련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동해안에 살던 연오랑ㆍ세오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연오랑ㆍ세오녀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죠.
주의 깊게 보세요. 연오랑ㆍ세오녀라는 말에는 계속 까마귀를 나타내는 '오(烏)'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까마귀와 관련된 사람들이 왕이 되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실 왕은 아무나 되는 일은 아니죠. 왕이 되려고 수십만, 수백만을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왕이 되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천운(天運)이 있어야 되겠지요. 이 의문을 한번 풀어봅시다.
연오랑ㆍ세오녀에는 까마귀[烏], 해[日]에 대한 제사의식 등이 나타난다는 점이죠. 까마귀는 쥬신의 숭배 대상인 태양의 사자이자 샤먼의 조상입니다. 또한 까마귀는 죽은 사람의 인육(人肉)을 먹기 때문에 새들의 왕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원래 인간의 생명은 하늘에서 새를 통하여 내려온 것이고 육신이 죽고 나면 영혼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겠지요(김병모, 『고고학 여행』)
진수의 『삼국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변진(弁辰 : 변한과 진한)의 사람들은 죽으면 큰 새의 날개를 같이 묻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들이 날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三國志』(「魏書」弁辰)."
다시 말해서 사람이 죽으면 그들의 영혼이 원래의 고향이었던 하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새의 날개를 같이 묻었다는 의미가 되죠.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검은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가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죠. 이런 까닭으로 풍수에서도 금오(金烏)는 태양을 상징하고 제왕을 은유하는 말입니다. 까마귀[烏]의 어원은 [烏]으로 추정이 되는데, 이 말은 신(神)을 의미하는 [神]과 발음이 거의 같죠? 그런데 우리가 앞에서 분석한대로 태양의 자손들(천손족) = 철의 제련기술을 가진 민족이라고 본다면 결국 신의 메신저(messenger)인 까마귀도 철의 제련기술을 가진 민족전체를 상징하는 코드(code : ethnic code)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연오랑ㆍ세오녀가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말은 어떨까요? 제철기술을 가진 쥬신족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열도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는 말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스사노오(素戔嗚尊)나 연오랑ㆍ세오녀는 결국 같은 무리가 될 것입니다. 스사노오(素戔嗚尊)에 나타난 오(嗚 : 口 + 烏 - 까마귀가 우는 소리)라는 말이 자꾸 눈에 걸리지 않습니까?
일본의 고어사전에 보면'존(尊)'은 미고또[mikoto]라고 읽는데 '명(命)', '신(神)'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스사노오(素戔嗚尊)는 결국 까마귀의 신을 의미하죠[그리고 김종택 교수는 이 미고또란 본향(本鄕), 본국(本國)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인 밑(本) + 곳(所, 또는 國)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법화경언해에 "믿고대(本鄕) 잇더니"라는 구절도 있지요. 다시 봅시다.
철이란 매우 귀한 금속일 뿐만 아니라 최강의 첨단 무기이기 때문에 이것을 잘 관리하는 것은 부족(민족)의 번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철을 만드는 과정은 마치 밀교(密敎)처럼 그 후계자들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이죠. 물론 그 후계자들은 그 사회의 지도자들입니다. 힛타이트(Hittite)의 수도인 하투사(Hattusa)의 궁전에서 철을 녹이던 용광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철은 왕이 직접 관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재원 교수(외국어대)는 석탈해왕,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도 대장장이라고 단언합니다. (유재원,「신화를 통해 본 그리스 선사시대 대장장이 부족」)
사정이 이와 같으니 초기의 금속 제조기술에 대한 진보는 대단히 느리게 진행됩니다. 그래서 철을 생산할 수 있는 민족들이 이웃 민족을 쉽게 정벌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민족의 우두머리가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실제로 금관가야(아마테라스)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이 풍부하여 철을 중국이나 일본에 수출하거나 중개무역을 통해서 성장한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 세력이 신라의 성장과 함께 반도부여(백제)와 연합하고 결국은 일본으로 이주해 간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초기에는 가야(가야 마이너 그룹)ㆍ신라 세력에 의해 후기에는 가야(가야 메이저 그룹)ㆍ반도부여(백제)의 연합세력에 의해 건설되는 나라가 됩니다.
천 년 이상 한국과 일본 양국 역사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 온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바로 이 반도부여(백제)ㆍ가야 연합을 지탱하는 임시행정관청이나 연락사무소(또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사관ㆍ영사관)였던 셈이죠. 쉽게 말해서 성장해가는 일본가야와 사실상 와해되고 있는 본국가야(금관가야ㆍ대가야)와 강력한 대륙세력으로 한반도에 남하한 반도부여(백제)를 연결하는 임시 행정기관이라는 말입니다. 참고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일본서기』교토꾸(孝德) 천황 원년(645) 고구려에 보낸 일본 왕의 교서에 "명신인 천하를 다스리는 일본천황(明神御宇 日本天皇)"이라고 지칭한 곳에 처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와 같은 조직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수백 년의 천적관계인 고구려ㆍ백제의 갈등과 신라ㆍ가야의 세력다툼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가 점점 강대해지고 신라도 가야연맹의 갈등을 이용하여 강성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백제(반도부여)와 가야는 고구려와 신라 세력이 강대해짐으로써 그 긴밀도가 매우 깊어져서 결국은 하나의 형제 왕조와 같은 형태로 발전하게 되지요. 당시의 상황을 본다면 고구려는 한족(漢族) 세력들을 한반도와 요동에서 축출(313)하는데 이것은 남해의 가야국들과 중국 문화의 연결고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가야의 중심이 대가야(성주ㆍ고령) 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특히 광개토대왕이 5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가야ㆍ왜 연합군에게 침략을 받던 신라를 구원했고 고구려는 '임나가라'(김해, 고령)의 성을 빼앗고, '안라(함안)'를 격파합니다(400).
다시 연오랑ㆍ세오녀가 왕이 되었다는 문제로 돌아갑시다. 이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은 이들의 정체가 바로 대장장이라고 볼 수 있죠. 겉으로 보면 연오랑ㆍ세오녀는 아름다운 선남선녀로 보이지만 사실은 금속을 잘 다루는 민족으로 결국 강한 생산력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철의 생산과 관련된 비밀들이 대장장이 집단에 의해서만 은밀히 전수되었기 때문에 철을 만드는 과정이 천년 이상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 자체가 워낙 귀중한 물건으로 바로 돈이 아닙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휴대폰이나 디지털 TV라고 보시면 됩니다. 철 광맥을 발견한다거나 용광로에서 철을 녹이는 매우 위험한 작업을 하기 전에는 하늘이나 또는 수호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의례가 되니 자연스럽게 '대장장이 = 왕 = 샤먼' 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됩니다. 결국 단군왕검도 이 같은 대장장이 왕이자 샤먼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 부분은 '똥고양이와 단군신화'편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리라고 봅니다.
연오랑ㆍ세오녀에 대해 제사를 지낸 곳은 영일현(迎日縣 : 현재의 경북 포항시)입니다. 이곳에는 오천(烏川)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왜 그리 잘 아냐고요? 바로 이곳은 제 아내의 고향이자 제가 한 십년 산 곳이거든요. 처음에는 이 동네에 웬 까마귀 이름을 가진 땅이름이 있어 의아했지요. 이를 보면 땅이름, 함부로 바꾸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땅이름이라는 게 수천 년을 살아있군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卷23)에 따르면 영일(迎日)의 옛날 이름이 오랑우(烏良友), 또는 오천(烏川), 또는 근오지현(斤烏支縣)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근오지현(斤烏支縣)이라는 말은 '큰 까마귀의 마을'이라는 뜻이죠. 그러면 이 말은 철 제련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라는 의미도 함께 가질 수 있겠지요. 놀랍게도 여기엔 세계 최고의 제철소(POSCO : 포항종합제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땅 이름이 혹시 어떤 예언적 기능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스사노오는 거창을 출발해서 김해로 내려갔다가 아마테라스에게 쫓겨 경주와 영일(현재의 포항)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는 말이지요. 무얼 찾아서요? 바로 새로운 다까마노하라[고천원(高天原)]을 찾아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벌(?原 : ??벌, 또는 가시벌), 또는 가시하라(橿原)를 찾아서 말입니다.
김종택 교수에 따르면 『고사기』, 『일본서기』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벌(橿原)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시벌은 다름이 아닌 가조(경남 거창 가조면)의 옛 이름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스사노오는 새로운 거창을 찾아서 일본으로 간 것이고, 그 곳에서 새로운 가조가야(거창가야)를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스사노오가 영일쪽으로 와서 일본으로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김해를 거쳐 대마도를 경유하여 규슈로 가면 훨씬 빠르고 안전할 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김해를 거쳐 부산방면으로 빠져나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이겠죠. 왜냐하면 스사노오가 다른 신들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기 때문입니다. 즉 스사노오의 벌가야(거창)는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금관가야(김해), 고령가야(진주), 소가야(고성), 아라가야(함안) 등의 가야연맹으로부터 이지메(따돌림)를 당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가야연맹을 통해 한반도를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확인이 될까요? 물론입니다. 다시 『일본서기』를 보세요.
일본 신들의 이동경로와 관련된 지도. ⓒ김운회
"스사노오가 풀을 엮어 도랑이 삿갓을 하고 여러 신에게 잘 곳을 빌려고 하였지만 여러 신(神)들이 '너는 행실이 나빠서 쫓겨 다니는 주제에 어떻게 우리에게 잠잘 곳을 마련해달라고 하느냐'라고 모두 다 거절하였다.(『日本書紀』神代 上 7)"
이 시기에는 장마가 심하게 져서 스사노오가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또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무리 과거지만 영일 쪽에서 일본 쪽으로 가는 항로(航路)가 있는가 말입니다.
당시의 항로(航路)를 분석한 논문들을 보면 이 항로가 일본으로 가는 주요항로 중이 하나라는 것이죠. 이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윤명철 교수의 글을 보면 이 점이 확연해집니다. 오래 전 고대엔 반도(한국)와 열도(일본)는 험난한 자연조건 때문에 대규모의 주민이동이나 군사력의 진출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윤명철 교수는 한반도의 정치세력들은 통합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진출 활동은 쉽지 않아서 초기에는 점령보다는 자발적 이주에 의한 개척의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단언합니다. 그리고 지역별로도 항해자들이 여러 가지 다양한 정치적ㆍ경제적 특성을 가지면서 열도로 이동했으며 가야계 · 백제계 · 신라계 · 고구려계가 지역적 특성을 가지면서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야계는 규슈 북부(남해동부 - 대마도 경유 - 규슈북부 항로)를 중심으로, 신라계는 혼슈 중부 이남(동해남부 출발—혼슈 중부 이남 항로)을 중심으로, 백제계는 초기에는 큐슈 서북부지역(남해서부—규슈 서북부 항로)이었으나 점차 북부지역으로, 그리고 고구려는 혼슈 중부 지역으로 정착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윤명철,「고대 東아시아의 역사상에 있어서 해양의 문제—고대 한일 관계를 중심으로—」『인문연구논집』 제2집 (1997.3). 89~121쪽].
위에서 말하는 것을 본다면 스사노오의 항로는 신라계의 항로로 추정되죠. 즉 동해 남부를 출발하여 일본 혼슈 중부 이남의 항로 말입니다. 즉 포항(영일), 또는 울산 지방에서 동해의 해안에 연한 혼슈우 남단의 이즈모(出雲)와 중부의 쓰루가(敦賀) 등을 잇는 항로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현재까지도 포항ㆍ영일 지역 사람들의 옛말에 "왜(倭 : 일본)로 가는 배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옛날에 폭풍우에 대비하여 줄줄이 배를 엮어서 일본으로 간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최근 노성환 교수(울산대 문화인류학)는 우리나라 동남해안에서 표류한 1백여 건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 경우 일본 시마네 현으로 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홍하상, 『진짜 일본 가짜일본』(비전코리아 : 2001)].
그러면 가야 계통의 스사노오는 일본에 성공적으로 진출을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구요? 이 부분은 해석이 매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고대 일본 역사의 비밀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하죠.
이 비밀을 찾아가는 열쇠는 바로 스사노오가 이즈모노쿠니(出雲國)로 내려가 사람들을 괴롭히던 머리가 8개 달린 큰 뱀을 죽이고 궁궐을 지었다는 기록입니다.
스사노오는 이즈모노쿠니(出雲國)의 국신(國神)인 노부부가 소녀를 가운데 놓고 울고 있는데 그 사연을 물으니 딸이 여덟이 있었는데, 머리와 꼬리가 여덟 달린 뱀이 매년 와서 잡아먹어 이제는 마지막 남은 딸 이나다히메(奇稻田姬)도 잡으러 오니 그게 서러워 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사노오는 큰 항아리 여덟에 독주를 담아 뱀을 취해 잠들게 하여 칼을 뽑아 단칼에 이 뱀을 죽입니다.
이 뱀은 이즈모(이즈모쿠니)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홍수로 인한 강물의 범람 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큰 경제적 손실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비밀은 스사노오가 살려준 아가씨의 이름인 이나다히메(奇稻田姬)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홍수가 매년 빼앗아간 것이 이즈모 사람들이 추수한 벼[稻]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장 드라마틱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뱀 꼬리 부분에서 보검(寶劍)이 발견되었다"는 대목입니다. 이 뱀은 매우 거대하여 마치 용처럼 생긴 것이죠? 『일본서기』에는 "뱀이 나온 곳이 여덟 언덕과 여덟 골짜기"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꼬리 부분에서 칼이 발견되지요. 스사노오는 아마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8개의 작은 댐을 만들면서 상류로 올라간 것 같습니다) 골짜기까지 갔다가 광산을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요? 『고사기』에 "그 뱀의 몸에는 넝쿨나무와 노송나무가 돋아나있고 … 그 배를 보면 언제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라고 합니다. 즉 산화된 철이 물기에 스며 밖으로도 붉게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지요. 철의 전문가인 스사노오가 이것을 지나칠 리가 있겠습니까? 바로 '심봤다'지요.
계속『일본서기』를 보시죠. 스사노오가 "그 뱀을 죽이니 칼날에 이가 빠졌고 그 안에서 칼이 나왔는데 이것이 천총운검(天叢雲劒 : 하늘나라에서 나 있을 법한 보검)이다." 라고 합니다. 이상하죠? 스사노오의 칼날은 당시로는 첨단 제품이었을 텐데 날이 상하다니 말이죠. 그러니 그만큼 고급 철이 발견되었다는 말이지요. 이에 스사노오는 "이는 신비스러운 칼이구나. 내가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구나."하더니 천신(天神)에게 헌상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걸작입니다. 이 칼 이름은 "이른바 초치검(草薙劍)이라"고 합니다(故割裂其尾視之 此所謂草薙劍 : 『日本書紀』神代 上 8). 초치검이라는 말은 그럴 듯하지만 '풀 베는 작은 칼' , 즉 '낫'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 복잡한 이야기는 결국 스사노오는 이 지역에서 질 좋은 철광산을 발견하여 그것으로 낫을 만들어 다시 대륙으로 수출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게 만들어진 낫을 자급용으로 쓴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 대량생산하여 한반도나 중국 쪽에 내다 팔았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중국과 한반도 남부지역의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보면 스사노오는 세계적인 비즈니스맨의 기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 따지고 보면 한국과 일본이 세계적인 무역대국이 된 것도 다 이 가야 신들의 핏줄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죠.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저도 원래 전공이 국제경제(무역 - 국제인터넷 비즈니스)입니다.
여기서 연오랑ㆍ세오녀가 신라를 떠난 후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돌아오게 하였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는 북으로는 고구려의 위협이 증대되고 남으로 금관가야의 세력이 다소 약화되었다고는 해도 항상 신경이 쓰이는 상태이니 신라는 또 다른 곤란에 빠지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와중에 신라를 도울 수 있는 세력 하나가 일본으로 가버린 데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아니면 철 생산자들의 이탈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겠지요). 일본의 연오랑ㆍ세오녀가 명주를 준 것은 아직도 신라와의 관계가 견고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현재에도 시마네현의 이즈모 지역은 야스기의 금속, 이즈모 ·마스다(益田)의 방직 등이 유명한 지역입니다.
지금도 시네마현 이즈모市 해안에는 히노미사키(日御崎) 신사(神社)가 있고 신사의 산 정상에는 등대가 있습니다. 그 등대 옆에 작은 신사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스사노오의 무덤입니다. 스사노오는 이곳의 사다 마을(町)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홍하상, 『진짜 일본 가짜일본』(비전코리아 : 2001)].
이 마을 사람들은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스사노오가 한산(韓山 : 한국의 어느 산간지대)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스사노오를 신라(新羅)의 신이라고 믿는데 사실은 가야(伽倻)의 신이지요. 어쨌든 고단하고 파란만장한 스사노오의 삶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4) 초기엔 신라ㆍ가야, 후기엔 백제, 결국은 쥬신의 신화
그러면 스사노오와 그의 직계가 일본을 지속적으로 다스리나요? 그것은 아닙니다. 다시 신화를 봅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하늘에서는 지상세계는 천손(天孫)이 다스려야 한다고 하여 오쿠니누시의 아들에게 나라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태양의 신', 즉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를 내려 보냈고 그의 직계 증손자인 ⓖ와카미케누 노미코토(若御毛沼命)가 까마귀의 인도를 받아 가시하라(橿原)에 나라를 세우고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가 되었다고 합니다(『日本書紀』神代 下).
즉 스사노오의 직계가 일본을 다스리고 있는데 후일 아마테라스의 손자(니니기)가 다시 하늘(가야지역)로부터 일본으로 내려가서 왕권을 내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아마테라스의 직계가 일본을 정벌하고 새로이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같은 가야지방의 사람들이라도 스사노오는 훨씬 이전에 열도로 가서 보다 평화적으로 통치하였고 그 후 아마테라스는 강력한 군사적인 힘으로 일본을 정벌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스사노오계가 아마테라스계로부터 아무 탈 없이 그대로 권력의 이양한 듯이 묘사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 실상은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고 하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사노오는 매우 나쁘게 악신(惡神)으로 묘사되어 있고 아마테라스는 매우 부드럽고 평화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화의 세계도 결국은 승자(勝者)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지요.
'태양의 신'의 손자인 ⓔ니니기의 존재를 보면 일본은 분명히 태양의 아들, 즉 천손(天孫)이 건국했다는 말인데요. 이것은 다른 쥬신의 신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 건국 과정을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해 다시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 하늘에서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를 땅으로 내려 보냄 → 땅에서 다스리고 있던 오호쿠니누시(스사노오의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 달라고 요청함.
㉯ ⓔ니니기는 땅에서 미인[아다쓰히메(田吾津姬)]와 결혼하여 세 아들[호느스소리ㆍ히코호호데미ㆍ호노아카리]이 태어남 → ⓕ히코호호데미(彦火火出見尊)은 바다의 신의 딸[도요다마히메(豊玉姬)과 결혼하여 ⓖ나기사다께가 태어나고 그는 이모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낳음.
㉰ 나기사다께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인 ⓗ이하레히코(盤余彦)는 바다를 건너 구마노(熊野)에 도착하였는데 ⓒ아마테라스가 (꿈에 나타나) 까마귀[야다가라스(頭八咫烏)]를 보내어 인도하여 소호고호리(層富縣)에 도착하여 가시하라(橿原)에 서울을 세우고 이하레히코가 첫 나라님이 되셨다. 이 분이 일본의 초대 임금(야마도 왕조)이신 진무천황(神武天皇)이시다(『日本書紀』神代 下 요약)."
좀 더 자세히 보면 ㉮에서 ㉯의 과정은 부여ㆍ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그 구조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하늘의 아들이 물의 신, 즉 해신(海神)의 딸과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그 후손이 여러 가지 역경을 이기고 가서 나라를 건국하고 있습니다. 강이나 바다를 건넌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고구려의 신화에서는 강의 신의 따님이었던 유화부인(버들꽃아씨)이 여기서는 바다의 신으로 둔갑한 정도겠지요. 일본이 섬나라인 점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이지요.
특히 니니기의 강림부분을 보세요.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를 흔히 호노니니기(天孫)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니니기는 아마테라스의 지시에 따라 옥구슬·거울·신검 등의 신령스러운 물건 세 가지를 들고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일본 사람들은 이를 천손강림(天孫降臨)이라 합니다.
어떻습니까? 단군신화와 완전히 같은 내용이 아닙니까?
일본 남부 큐슈로 내려온 호노니니기는 꽃을 뜻하는 미녀인 고노하나(木花)와 그녀의 언니인 추녀(醜女) 이와(岩 : 바위라는 뜻)라는 두 여인을 사랑하나 결국은 아름다운 고노하나(木花)를 택함으로써 영생의 존재가 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꽃은 열흘을 붉지 못하는(花無十日紅)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일본의 천황(덴노)은 신이면서도 영원히 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호노니니기와 고노하나의 아들인 우가야 후키아에즈는 그의 이모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두는데 그 막내아들이 바로 일본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입니다. 그로부터 현재의 125대 천황인 아키히토 덴노(1989년 즉위)까지 2600여년이 이어져 이것을 열도 쥬신(일본) 사람들은 만세일계 (萬世一係)라고 합니다(사실은 2600년은 아니지요. 제가 보기엔 대략 1600년~1700년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일본 신화의 특이한 점은 형제간의 갈등이 묘사되어 있어서 오히려 백제신화의 영향도 깊이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즉 위에서는 ㉯부분에서 형제간의 갈등이 나타나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은 소호고호리(層富縣)나 가시하라(橿原) 등의 일본 건국과 관련된 지명입니다. 평생을 알타이 문화연구에 몸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에 따르면 이 말은 서울이나 부여와도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즉 진무천황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소호고호리(層富縣)는 소호리 → 수리와 같으며 이 말은 해뜨는 곳 즉 서라벌, 벌, 새벌[東夫餘]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시하라(橿原)와 부여의 가셥벌도 다 같이 가시벌, 아시벌(始林), 새벌[東野, 또는 東夫餘] 등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박시인,『알타이신화』307쪽).
위에서 말하는 이하레히코[盤余彦 : 진무천황(神武天皇)]가 까마귀[야다가라스(頭八咫烏)의 인도받아 나라를 세웠다는 문제도 전체 쥬신의 신화의 맥락에서 다시 검토합시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나라를 세우려 이동할 때 같이 같던 오인(烏引), 백제의 시조인 온조와 비류가 나라를 세우러 갈 때 함께 같던 오간(烏干), 신라의 박혁거세가 세운 나라의 임금들을 섬긴 대오(大烏) 밀 소오(小烏) 등도 모두 까마귀가 나타나고 있지요? 박시인 선생은 이것이 바로 태양의 전령사인 샤먼이라고 합니다(박시인, 『알타이신화』279쪽).
결국 일본의 신화는 단군신화 + 부여(고구려ㆍ백제)ㆍ가야 신화이며 그 부여계가 가야 지역까지 진출해서 일본으로 가서 건국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일본의 신화도 전체 쥬신의 큰 흐름에서만 보다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요.
(5) 다시 연오랑ㆍ세오녀로
지금까지 일본의 신화를 통해서 보면 고대 일본의 건설은 가야인과 반도부여인(백제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초기에는 스사노오(가야 마이너 그룹)가 주축이 되어 동해를 건너 시마네(島根)의 이즈모노쿠니(出雲國) 등에서 일본 초기의 야요이 문화(彌生文化)를 주도했으며 후기에는 반도부여인(백제인)ㆍ아마테라스(가야 메이저 그룹)들을 중심으로 규슈를 정벌하고 그 여력을 몰아서 내해의 세토나이까이(瀨戶內海) 지역으로 동쪽으로 정벌해 나아가 야마도 시대를 열어갑니다. 사실 가야계는 제대로 된 거대국가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으므로 후에 백제계가 일본의 건국을 주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일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다시 '일본편'에서 해드리지요).
이로써 일본의 역사는 ① 죠몬문화(繩文文化) → ② 야요이문화(彌生文化) → ③ 고분시대(古墳時代) → ④ 아쓰카 문화(飛鳥文化 : 스이코조) 등으로 발전합니다. 이 가운데 관련된 부분만 좀 구체적으로 봅시다.
야요이 문화(B. C 200년~A. D 300년)는 일본의 농경문화가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로부터 북부 규슈에 전래된 벼농사와 금속기 문화는 열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나라가 출현하기 시작하죠. 이전의 죠몬(繩文) 토기를 대신해서 야요이 토기가 이용되었으므로 이 시대를 야요이 문화라 합니다. 야요이 중기가 되면 군 단위 정도 크기를 가진 1백여 개의 작은 나라들이 생겨납니다(한반도에서 사람들이 엄청 갔겠지요). 이 들 나라들이 이합집산하여 30여 개국이 되는데, 이들 나라들의 우두머리들이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卑彌呼)를 맹주로 추대하여 연맹 왕국이 탄생합니다. 히미코 여왕은 239년 중국의 위에 사자를 파견하여 위의 황제로부터 친위왜왕이라는 칭호와 금인자수와 동경 100매를 하사받기도 합니다.
그 후 3 세기말, 4 세기 초에서 7세기 초까지의 시대를 고고학상에서는 고분시대(古墳時代)라 부르고, 문헌학상으로는 야마토(大和)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에는 이상하리만치 세토나이까이(瀨戶內海) 내의 각 지역에 고분이 출현하고 그것은 이후 전국적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초기의 대부분의 고분은 전방후원분이라고 하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면서 그 규모도 점차 거대화 되어 왕권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그만큼 정치적인 압박과 인명의 희생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지요.
신화로만 이야기 하자면 스사노오는 야요이(彌生) 시대를 주도했으며 반도부여(백제)ㆍ아마테라스는 고분시대(야마도 시대)를 주도하는 것이죠.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瓊瓊杵尊)의 강림신화(천손강림신화) 부분은 단군신화와 유사할 뿐 아니라 그 구체적인 내용은 가야의 신화들과 흡사합니다. 마치 단군신화와 가야신화를 합쳐 놓은 형태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니니기가 하늘로부터 다카치오(高千穗) 산의 구지 후루다께(久土布流多氣) 봉우리에 내려왔다 … '여기에 나라가 있는가'라고 물어보자 그 곳의 우두머리가 '나라가 있으니 천손께서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 (『日本書紀』神代 下 9)." 라고 하는데 가야(伽倻) 신화에서는 "구지봉(龜旨) 봉우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누가 있느냐'라고 물으니 몰려든 사람들은 '저희들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김해 김씨의 족보(族譜)에 따르면, 2세기 경 김수로왕의 왕자 열 명 가운데 일곱 명이 구름을 타고 떠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같은 시기에 남부 규슈 가고시마(鹿兒島) 유적에 시치구마라는 곳에 일곱 명의 지배자가 웅거했다는 유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가야신(伽倻神)을 모시는 7개의 신사(神祀)도 있는데 이 지방에서는 옛날 가야국의 일곱 왕자가 이곳으로 와 세력을 뻗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왕가의 사학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씨는 "일본신화는 가야신화와 흡사하며 연고가 깊다"라고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최성규,「가야인의 진출」『부산일보』2000).
이제 일본 신화에 대해서 조금은 아시겠습니까? 물론 제가 분석한 것이 충분하지는 않을지라도 고대 일본과 반도 쥬신이 어떤 방식으로 교류가 있었는지는 충분히 아셨으리라 봅니다.
여기서 연오랑ㆍ세오녀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보고 넘어갑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연오랑이 먼저 가고 세오녀가 갔습니다. 이들은 부부(하나의 민족)였지요. 그런데 일본에 전해져온 아메노히보꼬[천일창(天日槍)]의 이야기를 보면 부부의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연오랑과 세오녀도 부부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떠난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다시 일본 신화로 돌아가 봅시다.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는 원래 남매지만 사이가 나빠서 스사노오가 추방당하여 일본으로 갑니다. 그리고 난 뒤 한참 있다가 다시 아마테라스의 후손들이 일본으로 가서 왕권을 장악합니다. 이 과정은 스사노오를 대신하여 연오랑을 집어넣고 아마테라스 대신에 세오녀를 집어넣으면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됩니다. 신기하지요?
결국 일본의 고대왕국이 어떻게 건국되었는지를 우리는 『일본서기』와 연오랑ㆍ세오녀의 설화를 통하여 알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래서 결국 연오랑ㆍ세오녀의 이야기는 젊고 아름다운 부부의 깊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형제간의 처절한 피의 전쟁(戰爭)을 그린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최근 저는 호미곶에 들렀습니다. 호미곶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연오랑ㆍ세오녀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았죠. 그래서 사진도 찍고 동해의 바다 바람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건너 일본을 생각했습니다. 우리와는 한 없이 가까운 나라인데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 일본을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연오랑ㆍ세오녀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조각상을 보면서도 참담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 암담한 쥬신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아름답게만 그려져 있는 연오랑ㆍ세오녀의 사랑이야기 속에 얼마나 많은 피의 냄새가 묻어 나오는지 말입니다.
결국 연오랑ㆍ세오녀의 이야기는 몽골ㆍ고려 연합군의 일본침공(1274, 1281), 임진왜란(1592), 병자호란(1616), 한국전쟁(1951)과 같은 처절한 동족상잔을 그린 이야기일 뿐입니다. 먼 훗날 한국전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도 언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둔갑할지 누가 압니까?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사라진 ‘영원한 신라’의 꿈 : Millennium Shilla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4>
2005-06-28 오후 4:49:57
옛날 금강산 기슭에 한 나무꾼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생활이 어려워 나무를 해다 팔아서 살아갑니다. 어느 날 나무꾼은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고 사슴은 그 보답으로 선녀와 혼인하는 방법을 일러 줍니다. 나무꾼은 사슴이 알려준 대로, 구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는 선녀의 옷을 감추어 하늘로 가지 못한 선녀를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사슴은 나무꾼에게 아이를 네 명 낳기 전에는 선녀 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했지만 나무꾼은 선녀가 하도 간청하는 바람에 아이 셋을 낳았을 때 날개옷을 돌려줍니다. 그러자 선녀는 아이들을 양팔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하늘로 올라가고 맙니다. 슬픔에 잠긴 나무꾼은 사슴의 도움으로 금강산 연못에서 목욕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나무꾼은 지상에 두고 온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선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용마(龍馬)를 타고 하강하여 어머니를 만납니다. 선녀는 나무꾼에게 “절대 용마에서 내리지 말라.”고 합니다. 나무꾼은 어머니가 끓여주는 호박죽을 먹다가 용마의 잔등에 엎지르자 깜짝 놀란 용마가 펄쩍 뛰는 바람에 나무꾼은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맙니다. 용마는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나무꾼은 죽어 수탉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설화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나무꾼과 선녀’입니다. 이 설화는 여러모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꾸어보았을 이야기이기도 하겠지요. 마치 여자가 ‘신데렐라 신드롬’을 가지고 있듯이 남자도 ‘온달 신드롬’이나 ‘나무꾼과 선녀 신드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나무꾼과 선녀’에는 이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아름다운 하늘의 여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여자가 알몸으로 물에서 멱을 감음으로써 남성들의 성적(性的) 자극은 말할 것도 없고 성적인 유혹의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광경을 보고 참을 수 없던 나무꾼이 이들의 옷을 감춤으로써 그 하늘의 여자를 아내로 삼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설화는 문학에서는 오랫동안 연구의 주제였고 끝없이 사람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나무꾼과 선녀’에서의 주요 연구 주제는 지상과 하늘나라의 사랑 문제, ‘금기’를 지키지 못한 나무꾼의 심리적 문제, 여성을 붙잡아 두고 싶은 남성들의 욕망 등등이 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나무꾼과 선녀’는 뭔가 좀 이상합니다.
첫째, 선녀라면 세상 최고의 여자이고 나무꾼은 세상에서 아주 지위가 낮은 천민(賤民) 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결혼을 해요? 신분이나 지위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는 게 아닐까요? 마치 요즘 세계적 재벌의 귀한 딸이 날품팔이와 결혼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둘째, 하늘나라의 선녀라면 상당한 정도의 힘과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너무 맥없이 나무꾼의 장난에 놀아납니다. 선녀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저 나무꾼이 하자는 대로 합니다. 도대체 이 선녀들의 출신이 하늘인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셋째, ‘나무꾼과 선녀’에서 나타나는 선녀의 이미지는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선녀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선녀가 나중에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우리 이웃의 아줌마나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모르죠. 결혼하기 전에는 모두 선녀였다가 결혼 후에는 그저 평범한 아줌마나 ‘바가지 꾼’이 되는 것이 여자의 운명인지(백마 탄 왕자가 ‘배불뚝이 아저씨’로 변하는 거랑 같은 이치겠죠).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관계가 있는 바이칼 호수 부근에 사는 부리야트족(칭기즈칸의 종족)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의 설화에는 옛날 사냥꾼이 새를 잡으러 갔다가 호수에서 깃옷[羽衣]을 벗고 여자가 되어 헤엄을 치고 있는 백조 세 마리를 보고 깃옷 하나를 감추어 여자와 함께 삽니다. 아이를 여섯이나 낳고 살던 어느 날 아내는 술을 빚어 남편을 취하게 한 후 깃옷을 얻어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비단 바이칼이나 한반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에도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는 전혀 엉뚱하게도 민족 기원과 관련된 신화라는 것입니다. 즉 부리야트의 신화에는 백조가 지상에 딸 하나를 남겨두고 하늘로 가지요? 바로 이 딸로부터 부리야트족이 시작된다는 것이지요. 몽골 부리야트족의 신화를 다시 한 번 봅시다.
“호리이도는 노총각으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이칼 호수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는데 아름다운 백조 한 마리가 호수로 내려와 아름다운 선녀로 변하여 옷을 훌훌 벗더니 목욕을 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호리이도가 살금살금 다가가 선녀의 옷을 숨겼다. 잠시 뒤 목욕을 마친 선녀는 옷이 없어 하늘나라로 올라가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호리이도는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그녀를 데리고 자기의 집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선녀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의 미희(美姬)였던 텡거리 고아(天美)가 변해서 된 선녀였다. 호리이도와 선녀 부부는 호리라는 성을 가진 11개 부족의 선조가 되었다.”
[그도리야프체프,『부리야트 蒙古民族史』(東京 : 1943) 55~56쪽]
부리야트 삶의 터전 바이칼호의 사계(四季). ⓒ김운회
우리가 앞서 본 알랑고아가 민족 전체의 시조 여신을 의미한다고 하면 부리야트 부족의 전설은 그 하위의 씨족 시조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무꾼과 선녀’는 매우 성스러운 건국신화, 또는 민족 기원 신화였군요. 그런데 그 동안 우리는 너무 선정적(煽情的)으로만 이 신화를 보아왔습니다.
그 원인은 한반도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새끼 중국인’ 근성 때문이지요. 이 쥬신의 신화를 오랑캐의 신화로 비하하는 전체 사회적 분위기가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툭하면 발해의 지배층만 고구려인이라고 하지를 않나, 만주 쥬신을 북적(北狄)이라고 하지를 않나 말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새끼 중국인’ 근성에 푹 빠져 공맹(孔孟)의 도(道)를 배우고 익힌다는 선비라는 작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인) 한글을 오랑캐의 글이라고 천시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저는 앞에서 부여 - 고구려ㆍ몽골 - 백제 - 일본 등의 건국신화를 보면 코드의 변형은 있었지만 결국 전체적인 코드는 대동소이하며 이것은 쥬신이라는 하나의 민족의 일체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신화의 세계는 그 민족의 ‘집단 무의식’이 숨어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같은 형태의 집단 무의식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민족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매우 중요한 코드(code)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이 코드(code : 암호)라는 말은 민족의 코드(ethnic code)를 줄인 말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소(神話素 : mytheme)’와 기호학(Science of Signs)에서 말하는 기호(sign)의 중간적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참고로 기호학이란 모든 사회 현상을 기호(sign)로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내는 작업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행위들은 ‘무의미한’ 것이란 없습니다. 매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부여하는 기호라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의미의 표상이라는 얘깁니다. 만약 내가 만든 기호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고 나라는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일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거꾸로 말하면 그 기호 속에는 내 존재의 정체성(identity of my existence)을 밝힐 수 있는 의미들이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1) 선녀 코드의 비밀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핵심적인 코드는 무엇보다도 선녀(仙女), 즉 천녀(天女)입니다. 이 천녀(선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낸다면 ‘나무꾼과 선녀’의 해석도 쉬운 일이겠죠.
민족의 시조신화, 또는 건국신화와 관련하여 천녀가 나오는 신화는 아무래도 고구려와 민족적 기원이 같다고 하는 북위(北魏)의 신화입니다. 그래서 일단 이 신화를 봅시다. <북사(北史)>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무황제[聖武皇帝 : 북위의 시조인 신원황제(神元皇帝)의 아버지]가 사냥을 나가 산 속 호수가에 있는데 하늘에서 천녀(天女)가 내려왔다. 천녀는 천제(天帝)의 명으로 성무황제와 인연을 맺기 위해 왔다고 하였다. 이에 성무황제는 천녀와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다음날 천녀는 하늘로 올라가면서 다음 해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약속한 날이 되자 천녀는 하늘에서 내려와 아들을 맡기면서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이 아이는 자라서 후일 위(북위)나라 시조 신원황제가 되었는데 이름을 역미(力微 : [리웨이?])라고 하였다(<北史> 卷1 魏本紀 1)”
위의 신화는 북위(北魏 : 386∼534)의 건국신화입니다. 북위는 고구려와 근본이 같은 쥬신 계열의 국가인데 요즘은 완전히 한족(漢族)의 정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민족사학자라고 자부하는 이들도 북위를 아예 한족의 정권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북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도 있고 북위 자체도 책임이 있습니다. 마치 조선왕조처럼 북위는 지나치게 중국화(中國化)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북위가 중국의 역사의 일부라고 하면 됩니까? 그러면 결국 조선 왕조도 중국사의 일부가 되겠죠? 정신 차립시다.
북위의 신화를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쥬신 신화와는 달리 남녀의 역할이 바뀐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이전까지의 쥬신 신화는 하늘을 상징하는 존재가 남성적이었는데 반하여 북위의 신화는 천녀(天女 : 선녀)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북위. ⓒ김운회
그렇지만 북위의 신화는 전체적으로는 천손사상을 강조하는 쥬신의 큰 흐름은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타나는 천녀는 고구려 고주몽의 어머님과 몽골 성모 알랑고아와 사실상 거의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건국시조의 어머니, 즉 민족의 시조모(始祖母)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일본 신화의 경우에도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라는 태양의 여신이 건국을 주도합니다.
천녀(선녀)를 시조모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제가 보기엔 여신(女神)이 종족신이 되는 것은 그만큼 가부장제(家父長制)의 성립이 늦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요.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선사시대에는 여성이 남성보다는 더 우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모계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 로마 지역에서는 여신 숭배의 전통이 강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 최초의 신도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Gaia)이지요. 그러나 제우스가 등장하면서 여신들은 주체성을 상실하면서 남자 신들의 연인이나 배우자, 혹은 딸의 자리로 밀려나게 됩니다. 즉 가부장 사회가 나타나면서 여신들이 힘을 잃게 된다는 말입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 이미지(조각). ⓒ김운회
이 분야의 대표적인 저서는 메를린 스톤(Merlin Stone)의 『신이 여자였을 때(When God was a Woman)』(NY : A Harvest / HBJ Book, 1976)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위대하고 강력한 태양신은 남성으로, 부드럽고 감정과 사랑의 상징인 달은 여성일 것 같은데 이 책은 그것이 고정관념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메를린 스톤 자신도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했는데 연구를 하면 할수록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와서 많이 놀랐다는 것이지요. 그녀의 말을 직접 들어보시죠.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나는 가나안(Canaan), 아나톨리아(Anatolia), 아라비아(Arabia),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등의 지역에서도 태양신이 여신으로 기록된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에스키모인, 일본인, 인도의 카시스인 사이에는 여신인 태양신이 달로 상징된 부하 형제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최초의 인류뿐만 아니라 하늘나라는 물론이고 땅 전체를 낳은 것으로 믿어지는 신들은 바로 여성 창조주들이었다. 이러한 여신들에 대한 기록들은 수메르, 바빌론, 이집트,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등에도 남아 있다.”
[Merlin Stone 『When God was a Woman』(NY : A Harvest / HBJ Book, 1976). 2~3쪽]
즉 인류 역사상에 나타난 최초의 신들은 대부분 여성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선사시대가 모계(母系)를 중심으로 한 사회였기 때문에 나타난 일일 것입니다. 왜 선사시대는 모계인가라고 물으시겠죠? 인류 초기의 역사에서는 집단혼(集團婚)이나 군혼(群婚)의 상태이므로 어머니는 분명한데 아버지는 불분명하니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현재 폴리네시아라든가 일부 남아있는 신석기시대 문화수준에 머물러 있는 종족들의 생활상으로 유추해볼 때 신석기시대인들은 모든 행위가 공동생산ㆍ공동소유ㆍ공동분배에 기초를 두고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산 활동에 있어서도 여성의 역할이 커서 자연히 모계 씨족사회에 바탕을 둔 사회조직체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원시 부족들의 혼인 및 가족제도가 모계(母系)이거든요. 이런 모계사회는 농경이 본격화하는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남성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부계(父系)사회로 넘어갔을 것으로 일반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화부인(버들꽃아씨)나 알랑고아, 나아가 웅녀(熊女)도 가이아(Gaia)와 같은 존재에서 그 지위를 지속적으로 상실해갔다고 생각할 수 있겠군요.
이 분야에서 탁월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조현설 교수(동국대)의 논문[『건국신화의 형성과 재편에 관한 연구』(동국대 박사논문 : 1997) 3장]을 보면 이 점 대단히 명쾌해집니다. 조현설 교수에 따르면, 유화부인이나 웅녀는 원래는 어떤 집단의 시조신격을 가졌으나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건국신화 속으로 재구성되어 들어오면서 시조신격으로서의 지위를 일정 부분 상실하고 아울러 자신의 신화도 제거 당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신화의 원래 모습을 보려면 이렇게 모습이 바뀌기 이전의 신화를 봐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조현설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시죠.
남성의 상징 제우스와 그의 아내 헤라. ⓒ김운회
“건국신화는 시조신화가 국가 권력의 이념으로 변형되면서 재구성된 서사(敍事)라는 것, 그리고 이 건국신화는 온 나라가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에서 서사시(敍事詩)의 형식으로 음송(吟誦)되고 음송의 결과가 구전(口傳)됨으로써 그 이념과 당위가 신화공동체 속으로 내면화된 서사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건국신화를 구성한 권력은 남성권력이라는 것이 그 인식의 내용이다.”
[『건국신화의 형성과 재편에 관한 연구』(동국대 박사논문 : 1997) 3장]
결국 우리가 건국 신화에서 남성지배의 제도화(공식화)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남성 지배의 제도화 이전의 신화의 원형을 탐구하는 작업도 민족의 정체성을 밝혀내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신화학(神話學)에 남겨진 숙제입니다.
신화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 승리자들의 기록입니다. 신화는 모계사회로부터 가부장 사회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내부적 투쟁을 하지만 외부적인 공격으로 인하여 하나의 부족이 다른 부족에 정치경제적ㆍ문화적으로 흡수되면서 그 원래 신화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설화 수준으로 지위가 격하되어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런저런 책에 수록되거나 다른 신화를 장식(粧飾)하는 데 사용되게 됩니다. 결국 어떤 신화를 가진 집단이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계속 패배하여 그 역사적 실체가 소멸된다면 그들의 신화조차도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화의 운명이자 그 민족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쥬신의 신화를 발굴하고 그 신화의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체(political entity)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중국의 철학과 신화와 소설에 열광하는 사이에 우리의 신화는 자꾸 우리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그리고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도 사라져가는 것이지요. 마치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교포 3세나 4세들이 그 피부거죽만 한국인이고 그 내부의 모든 구성물은 한국의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국인이듯이 말입니다. 반도 쥬신으로부터 멀어져 간 대표적인 신화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나무꾼과 선녀’입니다. 오죽하면 쥬신의 신성한 시조신화가 선정적인 섹스 이야기로 전락했겠습니까?
이제 다시‘나무꾼과 선녀’로 돌아갑시다. 이 선녀[천녀(天女)]는 혈통은 하늘의 사람이지만 하늘의 신처럼 강한 카리스마와 물리력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즉 선녀는 출신은 하늘이기는 하나 별로 힘이 없는 사람이죠. 나무꾼 정도가 옷을 숨기고 희롱하는 데도 속수무책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선녀라는 것은 천손족(天孫族)이기는 해도 그 일부이거나 아니면 주류(主流)가 아니라 방계(傍系) 그룹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죠.
즉 북위나 앞으로 볼 몽골·만주의 신화에 나타나는 선녀[천녀(天女)]라는 말이 가진 의미는 ① 원래의 천손사상을 가진 민족 집단의 일부가 토착민들과 융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일 수도 있고, ② (천손족의 국가가 소멸되었을 경우) 원래 문명이 높은 천손족의 유이민(流移民)이 극심한 물리력의 충돌 없이 흘러 들어와 서서히 권력을 장악했거나, ③ 천손족의 방계그룹이 흘러들어와 권력을 장악했을 경우 등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가 아니라도 모계사회의 전통이 깊이 남아있을 경우도 있으며, (여성이 귀하므로)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유목사회의 문화가 반영되었을 수도 있고 가부장 사회의 성립이 늦었을 경우 등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녀(천녀)라는 코드(code)가 가진 의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위의 선녀 신화도 결국은 북위의 모태가 된 세력 즉 고조선 또는 부여ㆍ고구려의 방계 그룹들이 이동해 와서 이룩한 국가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나무꾼과 선녀 : 영원한 신라의 꿈
저는 앞에서 ‘나무꾼과 선녀’가 부리야트의 시조신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무꾼과 선녀’가 시조신화로서 가장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구성된 것은 바로 만주 쥬신(만주족)의 신화입니다.
만주 쥬신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의 건국신화를 봅시다. 만주 쥬신의 신화는 다소 길어서 그 내용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분석하도록 합시다[아래의 전설은 『청실록(淸實錄 : 中華書局 影印本)』태조실록(太祖實錄), 『청사고(淸史稿 : 1927)』, 장기탁(張其卓)ㆍ동명(董明)의 『만족삼노인고사집(滿族三老人故事)』과 이마니시하루아끼(今西春秋)『滿和對譯滿洲實錄』(최학근 대역)(서울 : 1975) 1권 박시인 『알타이신화』(청노루 : 1994) 등에 있는 내용을 순서에 맞게 체계적으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옛날 하늘 위에 세 명의 아리따운 압캐 살간[선녀(하늘의 여인 : 天女)], 즉 선녀 세 자매가 살았다는데 은꾸륜(恩固倫), 정꾸륜(正固倫), 뿌꾸륜(佛固倫)이었다. 세 선녀는 하늘 생활이 싫증나 있는데 지상에 궤리만싸엔아린[果勒敏珊延阿林山 : 만주어로 장백산(長白山 : 백두산)을 가리킴)]에 천지(天池)가 있어 그 연못은 물이 맑고 온갖 꽃들이 피어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놀고 싶어 했다. 막내 선녀 뿌꾸륜은 총명하여 흰 구름으로 깃털을 만들고 깃털을 걸친 팔을 날개로 삼아 몸을 흔드니 한 마리 새하얀 백조로 변했다. 두 언니도 그녀를 따라 천지 옆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 광경을 사냥꾼 삼형제가 목격하고 백조들을 따라 갔는데 백조는 선녀 세 자매로 변하여 옷을 벗고 천지의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위의 글은 만주 쥬신 신화의 첫 머리입니다. 일본신화와 비교해 볼 때 이해가 쉬워서 좋지요? 그리고 몽골의 부리야트 신화와는 거의 일치하지요?
그런데 이 첫 대목에서 두 가지 중요한 코드(ethnic code)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녀, 즉 천녀(天女)이고 다른 하나는 장백산(長白山 : 백두산)이라는 쥬신의 영산(靈山)입니다. 선녀는 이미 분석했으니 장백산을 봅시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장백산은 쥬신의 제2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산입니다. 위에서 나오는 궤리만싸엔아린(山)이란 만주어인 궤리만(長 : 크거나 길다) 싸엔(白 : 희다)이라는 말에다 아린(山)을 합친 말인데 이것을 과륵민산연아림산(果勒敏珊延阿林山)이라는 한문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장백산은 모든 쥬신의 성산(聖山) 부르항산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동과 만주를 터전으로 하는 쥬신에게 있어서 가장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는 산이지요. 원래 쥬신의 시원(始原)은 알타이지만 긴 세월이 흐른 뒤 장백산을 중심으로 다시 민족 부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시조신화가 시작되는 장소가 쥬신의 영산(靈山)인 장백산(백두산)임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만주쥬신과 반도쥬신의 성산 장백산. ⓒ김운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갑시다. 앞으로 가급적 백두산이라는 말보다는 장백산(長白山), 또는 태백산(太白山)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민족(民族)의 성산(聖山)에 웬 ① ‘대머리 산’, 또는 ②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이 산’, 또는 ③ ‘벼슬이 없는 백수건달의 산’이라는 의미인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가 없군요.
반도 쥬신의 지식인들은 입으로는 늘 백두산을 성산이라고 하면서도 그 땅이 한반도의 변방에 있음으로 의도적으로 비하(卑下)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으로 이 한반도에는‘새끼 중국인 근성’이 왜 이렇게 뿌리가 깊은지 알 길이 없군요. 그러면서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이겨내겠다는 그 용기가 가상합니다.
장백산은 요동ㆍ만주 쥬신(만주족)이나 반도 쥬신에게나 모두 성산(聖山)입니다. 이것은 금나라나 후금(청)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만주 쥬신들이 공식적으로 장백산에 신성한 이름을 부여한 것은 금나라 때(1172)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사(金史)>에 따르면 “1172년 장백산을‘흥왕의 땅(興王之地)’으로 높이고 나라를 흥하게 하는 신령스러운 왕(興國靈應王)이라는 작위를 주고 사당(廟宇)도 세웠다(大定十二年 有司言 長白山在興王之地 禮合尊崇 議封爵 建廟宇 十二月 禮部·太常·學士院奏奉勅旨封興國靈應王 卽其山北地建廟宇(金史 「禮志」長白山神條)”라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요(遼)나라 때에도 요나라 황실은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백의관음(白衣觀音)이라 하여 황실(皇室)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장백산 하나만 보더라도 요(遼)나라, 금나라 그리고 한반도의 쥬신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요나라나 원나라를 동호(東胡) 계열로 보고 만주 쥬신을 숙신(肅愼) 계열로 서로 다르게 보았지요. 그러나 민족적인 고증을 해도 그렇고 신화나 장백산에 대한 신앙을 봐도 별 차이가 없죠?
지금도 장백산에는 이 선녀들이 목욕한 장소로 알려진 곳이 있습니다. 소천지(小天池)가 그 곳이죠. 그림을 보세요.
어떻습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지 않습니까? 마치 지금 당장에라도 선녀들이 물을 뚝뚝 흘리며 사진 밖으로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노총각들의 마음이 설레겠군요. 다시 만주 쥬신의 신화로 돌아갑시다.
장백산 소천지의 모습. ⓒ김운회
“삼형제가 선녀들의 옷을 감추어버리자 목욕이 끝난 선녀는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냥꾼 큰 형은 자신의 옷을 벗어 언꾸륜의 몸에 걸쳐주었고, 둘째는 정꾸륜의 몸에 걸쳐주었으며, 막내는 뿌꾸륜의 몸에 걸쳐주었다. 그래서 세 형제는 세 자매를 데리고 각자 자신의 작은 움막으로 들어갔다. 세 자매는 인간 생활이 즐거워 아예 눌러 앉아 살게 되었고 그 사이 2년이 흘렀다. 그러자 선녀 세 자매는 하늘의 벌이 두려워 남편이 숨겨놓은 옷을 찾아 각자 어린 핏덩이(세 아이)를 놓아둔 채 다시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이 세 아이들은 자라 송화강(松花江)을 따라 목단강(牡丹江)과 만나는 곳까지 가서 정착했고 후손들이 번성하여 모두 자신의 성(姓)이 있어 세 가지 성으로 나뉘었다. 그래서 이 지방을 ‘삼성[三姓 : 지금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이란현(依蘭縣)]’이라고 불렀다.”
이 내용은 우리나라의 ‘나무꾼과 선녀’와 거의 같은 내용인데 이 세 아이가 헤이룽강(黑龍江 : 아무르강) 쪽으로 이동해 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헤이룽강이 주요 근거지였다는 말인데요. 즉 하늘의 피를 이어받은 어린 아이가 북으로 이동하여 삶의 터전을 잡은 것이죠. 그러나 좀 깊이 생각해보면 망국의 백성들이 다시 뿔뿔이 흩어져 부족 상태로 돌아간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왜냐하면 조선이 망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이동했지요?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나 발해(渤海) 등이 망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겠죠. 계속 보시죠.
“한편 하늘로 간 세 선녀는 땅에 두고 온 아기와 인간세상의 생활이 그리워 신장(神將)의 수비가 삼엄하지 않을 때를 틈타 구름으로 깃털을 만들어 세 마리 백조가 되어 궤리만싸엔아린(장백산) 위에 도착했다. 하지만 남편과 아이를 찾았으나 모두 보이지 않아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송화강(松花江)을 따라가다가 삼성(三姓)이라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후손(後孫)임을 알았다. 그런데 삼성의 후손들이 천성이 싸우는 걸 좋아해 칼부림이 나고 원한은 갈수록 깊어져 있었다. 이 문제를 고민하던 중 선녀들은 목욕을 했는데 막내 선녀는 까치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날아와 천지의 상공 위로 날아와서는 입안에 물고 있던 것을 그녀의 옷에 뱉는 것을 보고 올라왔다. 옷소매 위에 잘 익은 붉은 열매가 놓여 있어 입에 물고 있다가 그만 삼켜버렸다. 그러자 막내는 몸이 무거워져 날 수가 없었고 나머지 선녀들은 먼저 하늘로 가버렸다. 막내 선녀는 목마르면 천지의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짐승을 잡아먹고 열매를 따먹었으며, 추우면 불을 피우고 하여 12개월이 지나 눈썹이 짙고 눈이 큰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낳자마자 바로 말을 하고 며칠이 지나자 17~8세의 아이처럼 되었다.”
신화만으로 본다면 선녀들이 2차로 강림(降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선녀들의 1차 강림으로 주류 만주 쥬신이 형성되었지만 다시 이 나라는 멸망하고 민족은 뿔뿔이 흩어져 민족의 장래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2차 강림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분열된 민족을 새롭게 통일하는 자의 등장을 나타내는 것이죠. 그렇지만 신화에서 같은 선녀들이 내려온다는 것은 1차 강림 때의 천손족이나 2차 강림 때의 천손족이 그 근본(ethnic entity)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알듯이 똑똑하고 문명화된 천손족이 무지랭이에 가까운 만주족을 규합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천손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만주 쥬신들을 같은 천손의 아들이 와서 화합과 통합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단군(檀君)과 웅녀(熊女)의 결혼과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타나는 은(殷)나라 시조인 설(契, 또는 卨)의 탄생신화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기>에는 설의 어머니가 두 사람과 같이 목욕하러 갔다가 현조(玄鳥)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주워 삼켜 임신을 해서 설을 낳았다(<史記>「殷本紀」)고 합니다. 이 은나라는 쥬신의 국가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殷曰夷周曰華 :『史記』). 이렇게 본다면 만주 쥬신은 쥬신 신화의 원형을 매우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殷)나라는 수도인 은허(殷墟)를 중심으로 번성하였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은허의 위치가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허는 현재의 뤄양(洛陽)에 가까운 곳으로 중국 중부지역에서 베이징(北京)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쥬신은 은나라 때인 대략 기원전(B. C.) 10세기 이전에 뤄양[낙양(洛陽)] 부근에서 터전을 잡았다는 말이 되지요. 그런데 이 신화의 원형을 가진 만주 쥬신들은 이미 헤이룽강(아무르강)과 장백산으로 광범위 퍼져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쥬신이 대체로 어떻게 이동했는지 알 수 있죠. 이것은 제가 이전에 분석해드린 쥬신의 이동 경로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위의 글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민족적 특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관된 정치조직이나 통치 질서가 없이 부족 연합처럼 살아가는 만주 쥬신들은 부족 간에 많은 분쟁들이 발생하고 그것이 이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 이들은 서로들 간에 이해가 얽혀있기 때문에 한족(漢族)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항상 놀아날 수밖에 없지요. 제가 보기엔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나 만주와 반도의 갈등을 중국이 부추기는 경우가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관찰해 보세요. 그러면 이내 아시게 될 테니까요. 계속 보시죠.
“그래서 막내 선녀는 이것은 분명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아이에게 말했다. '얘야, 네 성은 아이신자오뤄(愛新覺羅 : 만주어로 금)로 하렴.’ 선녀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금(金)인 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또 눈앞에 펼쳐진 뿌꾸리(布庫里)산을 보며 말했다. ‘네 이름은 뿌꾸리 융순(布庫里雍順)이라고 하자.’[여기서 융순은 용손(龍孫), 즉 용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온종일 싸우고 있는 삼성(三姓)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면서 아들에게 ‘하늘이 너를 낳은 것은 네가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을 중지시켜 백성들을 통솔해 평화롭게 살게 만드는 거야. 알겠니?’라고 하였다. 선녀 엄마는 아들에게 송화강을 가리키며 ‘이 강을 따라 내려가거라!’라고 하더니 그녀는 한 마리 백조로 변해 하늘로 날아갔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아이신자오뤄라는 성, 즉 ‘김씨(金氏)’ 성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이 김씨라는 성은 박씨(朴氏), 고씨(高氏), 해씨(解氏) 등과 더불어 쥬신들의 가장 근본이 되는 성씨입니다. 여기서 나타난 아이신자오뤄는 금(金)나라나 후금(後金), 즉 청나라의 황제의 성(姓)인 ‘아이신자오뤄(愛新覺羅)’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신라(新羅)를 사랑하고(愛) 잊지 말라(覺)’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원래 우리가 보아온 ‘아이신’, 즉 금(金)을 뜻하는 알타이어이지만 그 말을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라는 한자음을 빌려서 표현 한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의 음과 뜻을 합해서 해석해 보면‘경주 김(金)씨’라는 의미이죠.
금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은 금나라의 실록인 『금사(金史)』에서는 “금나라 시조는 그 이름이 함보이다. 처음 고려에서 나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 『金史』本紀第一「世紀」)”고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이 남송(南宋) 때 저술된 북방사(北方史)인 서몽신(徐夢莘)의『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 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다”] 에도 있고 남송 때 금나라 견문록인 홍호(洪皓)의『송막기문(松漠紀聞)』에는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이란 중국어로 왕이라는 뜻(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 측의 자료인 『고려사(高麗史)』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합니다.
1778년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황명(皇命)으로 펴낸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금나라의 시조 합부[哈富 : 또는 힘보(函普)]께서는 원래 고려에서 오셨다. 『통고(通考)』와 『대금국지(大金國志)』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시조께서는 본래 신라로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대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이 서로 섞여 있어 요(遼)와 금의 역사를 보면 이 두 나라가 종종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金之始祖諱哈富[舊作函普] 初從高麗來[按通考及大金國志 皆云本自新羅來姓完顔氏考新羅與高麗舊地相錯遼金史中往 往二國呼稱不爲分別 : 『欽定滿洲源流考』卷7, 部族 7 完顔)”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금(金)일까요? 물론 쥬신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금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죠. 일단 당사자이신 금나라 태조(아골타)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요(遼)나라는 쇠를 나라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쇠가 단단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삭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세상에 오직 애신(금 : 金)은 변하지도 않고 빛도 밝습니다. 우리는 밝은 빛[白]을 숭상하는 겨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이름을 아이신[金]이라고 합니다(遼 以賓鐵爲號 取其堅也 賓鐵雖堅 終亦變壤 惟金不變不壤 金之色白 完顔部色尙白 於是國號大金 : 『金史』2卷 太祖紀).”
즉 금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국가(만주의 ‘영원한 신라’)를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로시터(Rossiter)나 포콕(Pocock)의 지적처럼 미국인들이 ‘영원한 영국(England)’을 건설하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듯이 말입니다.
금ㆍ후금의 황실이 신라를 유난히 강조하면서 신라왕의 성을 족성(族姓)으로 삼은 데에는 천년왕국 신라의 부활을 꿈꾸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록에는 때로는 고려, 때로는 신라로 나타나있는데 그것은 신라는 이미 망해 없어졌고 고려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혼동일 뿐입니다. 따라서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의 망국민(亡國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의문이 생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라가 망하고 다른 나라가 세워지면 대체로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같은 민족이 건국했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지요. 신라에서 고려로 바뀐들 무슨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함보라는 분은 굳이 고려를 떠나고 그 후손들은 나라 이름을 또 금(경주 김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 분이 신라의 왕성(王姓)과 그 원형을 지켜야만 한다는 어떤 사명감을 가진 듯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엔 이 분이 신라의 왕족이었거나 아니면 신라의 귀족계층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분의 일대기에 나타난 것으로 봐서 상당한 학식의 소유자인 듯한데 당시의 상황에서 본다면 귀족 이상의 계급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죠.
만약 귀족이라면 왜 고려를 떠나야 했겠는가 하는 문제도 남아있습니다. 신라의 귀족들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고려의 호족화(豪族化)되는 과정에서도 굳이 고려를 떠나야할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이 분의 형님은 중이 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김함보의 신분이 높고 고려에는 적응하여 살아가기 힘든 상태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요.
비슷한 시대의 기록인 홍호(洪皓)의『송막기문(松漠紀聞)』에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인데 완안씨라고 불렀다. 완안이란 중국어로 왕이라는 뜻(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김함보가 신라 왕족이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만주 쥬신은 반도 쥬신과도 강한 형제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금나라의 태조가 고려에 보낸 국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있습니다.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과거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고려사(高麗史)』).”
여기서 말하는 여진(女眞)이 바로 쥬신에 가까운 발음이 나는 말이지요.
이와 같이 만주 쥬신은 ‘영원한 신라의 꿈(Millennium Shilla)’을 꾸고 있는 것이지요. 즉 처음에 천년의 제국 신라가 망할 때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들은 영원한 신라를 꿈꾸었겠지요. 마치 스사노오가 ‘영원한 가야(Millennium Kaya)’의 꿈을 꾸었듯이 말입니다.
아무튼 만주 쥬신들은 유달리 자기들은 신라와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거부하고 중국만을 짝사랑하는 반도 쥬신이 문제지요. 일단 계속 신화를 봅시다.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愛新覺羅ㆍ布庫里雍順)은 99일의 표류를 거쳐 삼성 지방에 도착했다. 뿌꾸리융순은 마을사람들에게 ‘나는 선녀가 낳은 천동(天童)인데 당신들을 다스리러 왔소’ 하고 자기를 가장 먼저 발견한 물 긷던 처녀와 결혼하였다. 몇 명의 목곤달(穆昆達 : 만주어로 족장)의 주도로 그날로 혼례를 치르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예를 올리고 밤새도록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이때 이후로 다시는 싸우지 않았다. 뿌꾸리융순은 삼성 지방에 정착하여 살면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씨족끼리 분쟁이 발생하면 그를 통해 화해하여 모두들 화목하고 즐겁게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여 부락의 우두머리로 추천하였다. 뿌꾸리융순은 삼성지방의 사람들을 인솔하여 어뚜리성(鄂多哩城)을 건설했다.”
바로 이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愛新覺羅ㆍ布庫里雍順)이란 분은 만주족의 조상이 되는 분입니다. 먼 훗날 청나라를 건설한 태조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는 이 분의 직계 후손이라고 합니다. 즉 『청조실록』에는 뿌구리융순이 “너희는 내게 복종하라. 나는 천녀의 아들이고 성은 아이씬자오뤄, 이름은 뿌꾸리융순이다. 하늘이 나를 낳게 한 것은 그대들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부족들의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만주라 했고 누루하치는 바로 그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이지요[『청실록(淸實錄 : 中華書局 影印本)』태조실록(太祖實錄)].
이 내용은 『청사고(淸史稿)』의 내용(姓愛新覺羅氏,諱努爾哈齊.其先蓋金遺部.始祖布庫里雍順母曰佛庫倫相傳感朱果而孕.稍長,定三姓之亂,衆奉爲貝勒,居長白山東俄漠惠之野俄染里城,號其部族曰滿洲.滿洲自此始)과도 대동소이합니다. 즉 이들 기록들이 청 태조의 선조들은 모두 금나라가 남긴 부족이라는 것이지요. 만주 쥬신들에게 있어서 장백산(백두산)은 야루(鴨綠 : 압록강), 훈퉁(混同), 아이후(愛滹) 등 세 무렌(江 : 강)의 근원이며 만주 구룬(國 : 나라)의 선조는 장백산(백두산) 동쪽 보구리의 볼후리 호수가에서 나셨다고 합니다. 뿌구런 이라는 이름의 압캐 살간(하늘의 여인 : 天女)의 자손들이죠.
만주 쥬신의 시조는 특이하게도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다기보다는 부족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화합을 도모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화는 단지 신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건국 시조이신 김함보의 일대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시죠.
“금나라 시조는 휘(황제, 또는 왕의 이름을 높여 부르는 말)가 함보(函普)이고 원래는 고려로부터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세였다. 시조(함보)의 형님인 아고내(阿古迺)는 불교에 심취하여 고려에 남으려고 하면서 ‘먼 훗날 자손들이 다시 만나는 자리가 있을 것이니 나는 가기가 어렵겠네.’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조는 아우인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갔다. 시조는 혼돈강[混同江 : 지금의 헤이룽강(黑龍江)]의 완안부(完顔府)로 들어가 복간수(僕幹水)에 자리를 잡으시고 보활리는 야라에서 살았다. 그 후 호십문(쥬신의 10여 부족)이 갈소관으로써 태조(아골타)에게 귀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 선조 세 분이 서로 이별하여 떠났는데 자신은 대략 아고내의 후손이고 석토문(부족명)과 적고내(부족명)는 보활리의 후손’이라고 하였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余矣。兄阿古乃好佛,留高麗不肯從曰 后世子孫必有能相聚者,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顔部僕幹水之涯,保活里居耶懶 其后胡十門以曷蘇館太祖,自言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盖自謂阿古乃之后 石土門迪古乃 保活里之裔也 : 『金史』本紀第一 世紀).”
여기서 보면 금나라의 시조이신 김함보의 형제가 세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화에서는 하늘로 올라갔던 세 선녀들이 다시 내려왔다가 두 언니는 그대로 올라가고 막내 선녀만 아이신자오뤄 뿌꾸리융순을 낳는 장면만 나오지요. 이것은 김함보의 형제들 가운데 김함보만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삼성(三姓)의 땅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신화라는 것이 현실을 자로 잰 듯이 정확히 반영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신화에서는 시간의 압축이나 변형도 자주 일어나죠.
여기서 다시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愛新覺羅ㆍ布庫里雍順)은 자기를 가장 먼저 발견한 물 긷던 처녀와 결혼하였다.”는 대목을 봅시다. 이것은 금나라의 시조 김함보가 혼돈강[混同江 : 지금의 黑龍江]의 완안부(完顔府)로 들어가 그 지역의 현녀와 결혼한 것과 부합됩니다. 물론 신화에서 결혼한 사람은 물 긷는 처녀인데 역사서에 나타난 실제의 사실은 환갑(60세)이 넘은 노처녀와 결혼합니다. 『금사』에는 “부족에 한 현숙한 여인이 있어 나이가 60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마땅히 서로 배필을 삼아서 같은 부족이 되겠다고 하니 시조가 좋다고 허락하였다(部有賢女 年六十而未嫁 嘗以相配 仍爲同部 始祖曰諾 : 『金史』本紀第一 世紀).”라고 되어있죠.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한 면이 있긴 합니다.
과거에 민족적 영웅의 그릇을 가진 사람은 어린 처녀와 결혼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미 60이 넘은 노파와 결혼을 하다니요? 그래서 제가 보기엔 여기서 말하는 현녀(賢女)라는 것은 샤먼이자 강력한 정치세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김함보는 이 세력을 발판으로 하여 흩어진 부족을 통합해내는 힘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녀와의 결혼 후 김함보는 드디어 여러 부족들의 염원대로 부족들의 현안 문제인 부족간의 갈등을 수습하기 시작합니다. 삼성의 사람들이 비록 용감하지만 화목하지 못하여 그 전쟁이 매우 처절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이들은 전투력이 강하여 어느 한 부족이 압도적으로 이겨내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피해가 날로 커갈 수밖에요. 이 과정에서 부족 통합의 분위기가 일어나있게 되고 이 시기에 김함보가 송화강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신화에서는 같은 형제들 간의 싸움을 안타까이 여긴 만주 쥬신의 성모(聖母) 뿌구런께서는 자신의 아들이자 천손인 아이신자오뤄ㆍ뿌꾸리융순을 보내어 이 문제를 수습하려 합니다.
실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금사(金史)』에서는 이 과정이 매우 상세히 묘사되어있습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상세히 보도록 하죠.
“시조가 완안부에 이르러 거처한 지 오래되었는데 그 부족 사람이 서로 죽였고 이로 말미암아 두 부족이 서로 미워하여 싸움이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었다. 부족에 한 현숙한 여인이 있어 나이가 60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마땅히 서로 배필을 삼아서 같은 부족이 되겠다고 하니 시조가 좋다고 허락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깨우쳐 말하기를 ‘한 사람을 죽여서 싸움이 풀리지 않는다면 손상이 더욱 클 것이다. 사건을 일으킨 주모자 한 사람을 죽이는데 그치고 부내에 있는 재물로서 보상을 하면 싸움도 없이 득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설득하니 피해자 집에서도 이에 따랐다. 그래서 ‘무릇 사람을 살상한 자는 그 집에서 사람 1명, 말과 소 각 10마리씩 황금 6량을 징발하여 피해자 집에다 보상하면 이내 양측은 화해해야 하고 사사로이 싸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여진의 풍속에서 살인하면 말 30마리로 보상하는 것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始祖至完顔部,居久之,其部人嘗殺它族之人,由是兩族交惡,哄斗不能解。完顔部人謂始祖曰 若能爲部人解此怨,使兩族不相殺,部有賢女,年六十而未嫁,嘗以相配,仍爲同部。始祖曰諾 乃自往諭之曰 殺一人而斗不解,損傷益多。曷若止誅首亂者一人,部內以物納償汝,可以无斗 而且獲利焉怨家從之。乃爲約曰 凡有殺傷人者,徵其家人口一、馬十偶、牸牛十、黃金六兩,與所殺傷之家,卽兩解,不得私鬪。曰謹如約。女直之俗,殺人償馬牛三十,自此始 : 『金史』本紀第一 世紀).”
그래서 금나라 시조가 살인 사건으로 깊어진 부족간의 갈등을 물질적인 보상을 통하여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부족 통합의 기회가 열리게 됩니다. 금나라의 시조이신 김함보는 쥬신의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평화(平和)의 중재자로서 부족 통합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위대하고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남성신(男性神)보다는 부드러운 여성신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 과정은 신화에서 말하는 “뿌꾸리융순은 삼성 지방에 정착하여 살면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씨족끼리 분쟁이 발생하면 그를 통해 화해하여 모두들 화목하고 즐겁게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여 부락의 우두머리로 추천하였다.”라는 말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들에서 만주 쥬신은 매우 신라적(新羅的)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대적으로 익숙한 편인 데다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신라의 신화나 역사를 보거나 각기 다른 성의 왕들이 평화롭게 정권교체를 한다든가 가야 세력과 쉽게 융합하는 등의 과정을 보면 이 점이 명확합니다. 일단 하나의 민족으로 융합되었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차별이 거의 없어집니다(이것은 유목민의 특성이죠).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金庾信) 장군도 그 근본은 가야세력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신 장군은 백제 정벌군ㆍ고구려 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합니다(참고로 청나라 황제들은 몽골 왕공의 딸을 후비로 삼고 공주와 왕자들은 몽골 왕공의 자제들과 결혼합니다). 뿐만 아니라 김유신 장군의 조카(김법민 : 문무왕 - 김유신 장군의 누이인 문명왕후의 소생)가 바로 신라왕이 되지요. 그리고 김유신 장군은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존됩니다. 이와 같이 외부에서 온 사람을 이만큼 출세시켜주는 왕조가 달리 있겠습니까? 이런 점들은 한마디로 유목민적인 특성입니다. 물론 같은 천손족(天孫族)이라는 의식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요.
이 같은 현상이 농경민인 중국에서는 결코 나타나기 힘듭니다. 오히려 오랑캐로 찍혀서 경계 대상 1호가 될 뿐만 아니라 고선지 장군과 같이 여차하면 모함하여 죽여 버릴 것입니다. 뒤에 몽골 쥬신이나 만주 쥬신, 환국(桓國)과 한국(韓國 : 汗國) 등을 분석할 때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죠.
그러므로 북위 - 금나라 - 후금(청) 의 신화에 이르는 과정이 쥬신이라는 민족적 특성을 가지면서 확장ㆍ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나라와 후금의 황제들은 영원한 금의 제국, 즉‘영원한 신라(Millennium Shilla)’를 꿈꾸고 있었고 그것이 금나라·청나라의 건국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금나라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중시하는 유목민의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있죠[사실 당시 삼국(고구려ㆍ백제ㆍ신라) 가운데 여왕(女王)이 나라를 다스린 곳은 신라뿐이죠].
(3) 신라인 김함보에서 청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까지
만주 쥬신의 시조이신 김함보는 금나라 태조(阿骨打)의 조상으로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는 신라(新羅)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김함보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주 김씨이자 안동(安東) 김씨의 시조인 경순왕(敬順王 : 김부)의 후예라고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후손들이 일부는 금강산으로(마의태자 이야기), 또는 강원도 철원 땅으로, 일부는 장백산(백두산)으로 들어가서 후일을 기약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시기적으로 봐서는 신라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잔여세력들이 장백산으로 만주로 이동해갔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지요.
결국 금나라와 후금(청)의 건국신화는 신라에서 장백산을 거쳐 만주로 들어간 김함보라는 신라의 왕손(?), 또는 신라 귀족(?)의 일대기와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세 선녀는 결국 김함보의 형제분들을 말하고 아이신자오뤄뿌꾸리융순이 만난 물 긷는 처녀는 바로 환갑(60)이 넘은 현녀(賢女)였던 것이지요.
신화에 따르면 이 처녀는 김함보의 배(작은 뗏목)가 좌초된 것을 가장 먼저 보고 마을로 달려가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던 분입니다. 그리고 김함보는 무력(武力)이나 카리스마보다는 깊은 학식으로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화합을 이루는데 큰 공헌을 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 삼성 지역의 만주 쥬신들은 김함보를 부족장으로 모시게 됩니다(衆奉爲貝勒 : 『淸史稿』本紀一). 이러한 화합의 힘이 이 분을 만주 쥬신의 시조로 만든 것이지요.
즉 이 김함보라는 분은 12세기 초 금나라를 건국(1115)하신 금나라 태조[아골타(阿骨打)]의 직계조상이라는 것입니다.
금나라 태조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만주 쥬신을 규합하여 금(金)나라를 세웠고 세력을 확장하여 한족(漢族)과 가까웠던 요(遼)나라와 북송(北宋)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南宋)과 대치합니다. 13세기 초에 원나라가 금을 멸망시키지만 그들의 풍속을 최대한 존중합니다. 15세기 초에는 명나라가 만주쥬신의 분포지역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합니다. 금나라가 멸망(1234)한 이후 청나라가 건국(1616)될 때까지 상당한 시련이 이들 만주 쥬신을 엄습합니다. 명나라 때 만주 쥬신은 크게 건주(建州 - 건주여진), 해서(海西 - 해서여진), 동해(東海 - 동해여진) 등의 3부로 나누어졌고 이 가운데서 백두산 주변을 근거지로 삼은 건주여진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까지도 이들 사이에는 참혹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만주 쥬신들 사이에는 또 다시 민족 통합의 염원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을 신화는 어떻게 묘사할까요? 계속해서 만주 쥬신의 신화를 보시죠. 이마니시 하루아끼(今西春秋)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뿌꾸리융순은 장백산 동쪽 밝은 벌판의 어뚜리(鄂多理)라는 성을 서울로 삼았다. 그러나 여러 대가 지나자 한[王]들이 백성을 학대하므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족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오직 반차라는 한 아이만이 까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 때 이후 만주 구룬의 한[王]은 까치를 수호신이라고 보호하여 죽이지 않는다. 그 후 반차의 후손인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가 한[王]이 되어 구룬(나라)의 이름을 아이신(금)이라고 했다[今西春秋『滿和對譯滿洲實錄』(최학근 대역)(서울 : 1975) 1권].” 여기서 말하는 금나라는 흔히 뒤에 나왔다고 해서 후금(後金)이라고 합니다.
즉 후금을 건국(1616)하신 청나라 태조(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는 금나라의 멸망(1234) 이후 4백여 년간의 민족 분열과 한족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이겨내고 마침내 통일 대업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쥬신 신화의 일반적인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살펴봅시다.
청나라의 건국신화에 나타나는 쥬신 신화의 일반적인 특성은 ① 땅의 지배자와 하늘과의 연계, 즉 천손사상(天孫思想)과 ② 새 토템 사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손사상은 다만 남성과 여성이 역할이 바뀌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 분석해 드린 천녀(선녀) 신화로 충분히 이해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새 토템 사상으로 나타나는 까치는 만주와 한국 어느 곳에서도 길조(吉鳥)입니다.
청나라(만주 쥬신 : 만주족)의 건국신화는 여러 면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동안 동호계열의 몽골과 숙신계열인 만주족은 결코 같을 수가 없는 민족으로 배우고 가르쳐왔는데 신화를 보면 북위(동호계)의 신화와 몽골의 신화가 융합하여 만주 쥬신의 신화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달리 만주쥬신의 신화가 통합을 강조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그 만큼 통합하기 힘든 것이 유목민족이기 때문이겠지요. 유목민들은 (삶 자체가 훈련이라고 하듯이) 농경민과는 달리 바로 무장군인 그 자체이기 때문에 물리력으로 복종시킨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목민들의 바로 이런 특성으로 인하여 한족(漢族)의 시각에서 보면 여러 개의 서로 다른 민족으로 보이게 됩니다. 나라가 되었다가 이내 해체되기도 하고 또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되풀이하기도 하니 이해가 될 리 없겠죠.
유목민들이 통합을 강조하는 측면은 만주 쥬신의 창세신화(創世神話)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만주 쥬신의 창세기를 한번 요약해봅시다.
“태초에 물거품 속에서 아부카허허가 탄생한 후, 그의 몸으로부터 땅의 신 바나무허허와 태양의 신 와러두허허가 생겨났다. 두 번에 걸쳐 인간 세상에 대홍수가 일어나고 이어 남신인 아부카언두리가 등장하는데 그는 사람을 만들어 지상(地上)에 가서 살도록 보내었다. 날씨가 매우 추웠기에 인간들이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브카언두리는 그 도제들에게 4개의 태양을 만들게 했으나 그들이 9개를 만들어 대지가 메마르게 되었다. 이 때 와지부(窩集部)의 산인베이지가 있었다. 그는 장백산 주인(長白山主)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아브카언두리가 하늘제사 때에 아름다운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지상의 인간과 관계하여 난 아들이다. 산인베이지는 9개의 태양에게 1개만 남고 가라고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이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고 장백산 부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산인베이지는 부왕이 일러 준대로 물의 신(河神)과 땅의 신의 도움을 얻어 드디어 여러 태양을 없앤다.”
[傅英仁 搜集整理, 滿族神話故事(北方文藝出版社 : 1985) 95~99족]
이 신화는 천신(天神) 예(羿)의 신화와 동이족의 조상으로 알려지고 있는 유궁국(有窮國) 군주 활의 명인 후예(后羿)의 신화와 대부분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태양을 활로 떨어뜨린다는 내용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주 쥬신의 창세 신화에 나타난 여러 개의 태양으로 인하여 서로 다친다는 말은 하나의 민족이 여러 개의 부족으로 난립하여 서로 싸우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산인베이지가 이들을 통일한다는 내용이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늘과 닿아있는 장백산신(長白山神)의 도움, 물의 신, 즉 하백(河伯)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만주쥬신은 하늘 - 장백산 - 하백의 도움 - 여러 부족이 통합과 화합 등의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하늘과 장백산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바로 선녀(천녀)입니다. 그 선녀(천녀)의 후손이 바로 아이신자오뤄, 즉 경주 김씨 집안입니다. 이 경주 김씨는 후에 금태조(아골타) - 후금태조(누루하치)로 이어져서 중국을 정벌하여 쥬신 천하를 열게 됩니다.
금나라와 청나라 황실은 유난히도 정신적으로 신라와 가까웠습니다. 마치 금나라 시조이신 김함보가 꿈꾸던 ‘신라(新羅) 영생(永生)의 꿈[Millennium Shilla]’을 끝없이 현실에서 이루려했다는 하나의 뚜렷한 증거로 볼 수 있죠(자손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성장하잖아요). 마치 일본의 스사노오가 ‘영원한 가야(伽倻)[Millennium Kaya]’를 꿈꾸고 아마테라스가 ‘영원한 부여(夫餘)의 꿈[Millennium Puyou]’을 꾸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만주 지역에서는 한족과 만주족의 구분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거의 호적을 봐야만 ‘만인(滿人)’이라는 표시가 있을 뿐이지요. 만주 말과 글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만주의 말이나 글은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배울 수도 없지요. 그러나 중국 정부는 외부적으로는 만주어를 보존하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만주어를 가르치는 곳은 단 한 곳뿐입니다. 그것도 만주 시골 벽촌에 낡고 초라한 초등학교에서 너덜너덜한 시험지 교재로 열 명 남짓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수준입니다[2004 KBS 특별기획『위대한 여정 한국어』(2004)]. 그러면서 중국정부는 만주 문화를 보존한다고 떠들어 댑니다. 쥬신의 말과 글, 그리고 문화 전체를 말살하려는 이 같은 만행(蠻行)은 세상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장차 이 일을 어찌 해야 합니까? 만주 쥬신이 꿈꾸어 온 찬란한 ‘천년 신라’의 꿈도 사라져갑니다. 수천 년을 지켜온 전통이 어찌하여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져갑니까? 현대의 황제(黃帝) 모택동과 그가 이끈 현대 중국 공산당 정부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역사학을 공부한다는 작자들은 침묵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 같은 역사의 문외한(門外漢)들이 전공 공부는 안 하고 역사 문제에 대해 핏대를 높이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잠시, 거란(契丹)의 시조 신화도 한번 간단히 보고 넘어갑시다.
“옛날에 한 신인(神人)이 백마(白馬)를 타고 마우산(馬盂山)에서 토하(土河)를 따라 동으로 내려가고 아가씨 하나는 청우차(靑牛車)를 타고 황하를 따라 내려왔다. 목엽산(木葉山) 아래,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신인과 아가씨는 만나서 부부가 되었고 이들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 후 이 자손들이 번성하여 거란의 8부가 되었다. 거란 사람들이 전쟁이나 봄과 가을의 제사 때 백마와 청우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간직하기 위함이다(『遼史』37卷「地理志」)”
이상이 거란의 시조신화인데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결혼 이야기 같지만 백마(白馬)와 청우(靑牛)라는 코드(code)가 숨어있습니다. 알타이와 우리 민족의 시원에 관한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1921~1990)에 따르면, 백마와 청우는 오랜 옛날부터 알타이 어족이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백마는 신남(神男), 청우차(靑牛車)는 천녀(天女)가 탔다는 것이지요(박시인, 『알타이 신화』344쪽).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거란(契丹)이란 이 분야의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바로 쇠[철(鐵)]를 의미한다고 합니다[愛宕松男,『契丹古代史の硏究』(京都大 : 1959)].
이상의 신화들을 보면 고구려ㆍ몽골 - 북위ㆍ거란 - 금ㆍ후금 등의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분리하기조차도 힘든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들의 신화를 보더라도 숙신(만주) - 예맥(요동 만주) - 동호(몽골)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연계성을 가진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북위의 신화와 몽골의 신화가 융합하여 만주 쥬신의 신화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바탕에는 고구려ㆍ부여ㆍ신라는 물론이고 단군신화가 흐르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리국 - 부여 - 고구려ㆍ몽골 - 백제 - 거란 - 일본 등에 이르는 여러 쥬신들의 신화가 결국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으며 신화를 통해서 봐도 이들(몽골쥬신ㆍ만주쥬신ㆍ반도쥬신ㆍ열도쥬신)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신화를 공유하는 것이 하나의 민족(쥬신)이라는 범주로 끌어들이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한족(漢族)이 중심이 된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아시아 역사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종족을 범쥬신(Pan-Jüsin)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통합하는 데 무리는 없는 것이지요.
이제 기나긴 쥬신 신화의 분석도 끝이 났습니다. 원래 이 부분은 역사학계나 국문학계 모두에서 다루고 있지만 제가 보기엔 사학계는 신화적인 특성에 대한 분석이 불충분하고 국문학계는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어서 신화의 참모습과 묘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새로이 분석을 시도하였습니다. 쥬신 신화에 대한 많은 이해가 있으셨기를 기대해봅니다.
다음에는 고구려·백제·일본·몽골·만주 신라 등의 구체적인 사실 분석으로 들어갑시다.
ⓒ프레시안
김운회/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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