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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 2. 금.
어릴적 부터 지구의 여러 나라를 가 보고 싶은 게 꿈이었던 나는
가능한 가 보지 못한 나라를 한 나라라도 더 보고 싶다는 욕심에서
가능한 새로운 나라를 여행하려고 하는데 이번에 우연히 값싼
터키의 여행상품이 나와 있기에 친구들과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귀국하는 날이 바로 명절인 음력 설날이어서 망설여졌다.
결국 두 친구는 예약을 취소하고 여자 친구 3명이 함께 가기로 하였다.
터키라는 나라는 정말 다양한 볼 거리와 즐길거리가 있어서
꼭 다시 가고 싶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번에 드디어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터키로 떠날 가방을 정리하고 옛추억을 더듬어서 검색을 하여 다시 올려본다.
* * * *
2006. 5월 30일
그동안 간절히 바랬던 터키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가슴은
벅차기만 하였다.
생각날 적마다 하나씩 챙겨 넣은 가방은 부풀대로 부풀어 더 이상 빈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이곳 마산에서 인천까지 가는 길은 시외버스를 이용하였다.
4시에 가이드와 3층 만남의 장소에서 제일 늦게 체크하고, 곧바로
5시 30불발 이스탄불행 대한항공에 올랐다.
이스탄불.
뽀죡한 첨탑과 지중해의 푸른바다위를 떠 다니는 유람선, 이슬람 사원.
나에게 너무나 호기심을 주던 그 이스탄불로 내가 정말 가는 것인가?
창가의 자리에 앉게 되어 인천항을 내려다 보니
공항은 안개속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부터 시간을 6시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구나.
(7시 차이지만 지금은 섬머타임 기간이라 6시차)
12시간의 비행이 끔찍하기만 하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 제일 힘든 것은 장시간 비행기 속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잠자리가 바뀌면 거의 잠을 못자는 편이라 조금 졸다가는 또 깨곤한다.
그동안 잘 하지 않았던 묵주기도를 계속 하면서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어느새 활짝 개이고 하얀 구름이 동동 떠 다닌다.
유독 한덩이 구름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마치 외로이 떠도는 내 영혼을 만난 듯 하다.
아래를 바라보니 중국의 칠리만의 푸른 물결이 반짝인다.
내팔에 있는 시계는 7시가 넘었는데도 하늘의 해는 아직 중천에서 약간 비껴 있을 뿐이다.
전광판을 바라보니 시속 830킬로미터/h
고도 10820m위의 상공을 날고 있다.
창밖을 내다 보니 끝없는 사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벌써1시간을 넘게 이런 사막을 날아온 것 같다.
비행기로 나르는 이길을 전에는 낙타를 타고 다녔구나.
사막속의 캐러반 대열을 생각하니, 난 참 편하게 이 사막을 건너는 구나. 생각된다.
아마도 고비 사막인 모양이다.
지도위의 우리 비행기는 우랄산맥을 넘고 있는 듯 하였다.
서쪽으로 향하는 비행기였으므로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었다.
곧 약간 도톰해진 초승달이 나타났다.
하늘에 떠 있으면서 바라보는 초승달은 또다른 감회였다.
사랑스런 달아, 안녕. 고마워. 혼자서 달을 보고 인사를 건냈더니
초승달도 날 알아보는 듯 파르르 떠는 웃을을 보내주었다.
캄캄한 흑해를 나르면서 저녁 식사를 하고, 1시간 후
드디후 이스탄불도착.
아~! 이곳이 그렇게 가슴 설레던 그 이스탄불인가?
옆좌석에 앉은 인연으로 67세 부인과 한방을 쓰게 되었다.
이스탄불은 구시가 전체가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에 도로를 넓힐 수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투숙하기로 한 호텔입구가 차들로 막혀 있어, 하는 수 없이 큰도로에서
내려 짐을 끌고 호텔로 들어가야만 하였다.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구름
외로이 떠도는 내영혼을 닮은 구름 한송이.(아래는 끝없이 펼쳐진 고비 사막)
아름다운 일몰의 시각 하늘빛이 너무 아름다웠다.(아래는 우랄 산맥)
호텔 계단마다 있는 성소피아 성당의 성모자상 모자이크 그림과 나자르부적.
이곳에서 종교의 혼합을 벌써 느낄 수 있었다.
이 좁은 도로를 전철과 버스 자동차,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혼란속의 질서를 보는 듯. 다음날 새벽에 나가본 호텔앞 도로.
* * * *
2006.5.31.
지난 밤 잠자리가 바뀌어 오래동안 뒤척였다.
룸 메이트 언니는 곧 잠이 들어, 코고는 소리 요란하였는데
때로는 저러다 숨이 막히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로컬 가이드 이영애씨가 이스탄불은 위험한 곳이니 절대
혼자 아침 산책이나, 저녁 늦게 쇼핑 다니는 일은 하지 말라고
주의를 하였는데, 어떻게 내가 아침 산책을 빼먹겠는가?
디지털 카메라와 10$를 호주머니에 챙기고 6시에
호텔 안내서 한장을 들고 산책을 나섰다.
이스탄불은 터키 인구의 1/5, 1700만이 사는 제일 큰 도시이다.
수도는 앙카라로 옮겼으나, 긴 세월동안 수도였기에
지금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도시이다.
전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던 세계사속의
바로 그 도시이다.
골목의 도로는 로마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듯, 벽돌 모자이크였다.
이스탄불은 흑해, 마르마라해, 보스포르스해협, 골든혼.
바다로 둘려 쌓인 도시였다.
호텔을 나서자 바로 영화 '오리엔탈 특급열차'에 나왔던 그 역앞이다.
이른 아침이기에 상점은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고,
도로변에 신문을 나누고 배부 준비를 하는 사람만 보인다.
가이드가 위험하다고 하였기에, 될 수 있는 한 시선을 먼곳에 두고 걸었다.
그러나, 그곳의 사람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먼저 인사를 건네기에
나도 지난밤 배운대로 "구나이든!"하고 인사 하였더니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는다.
어제 저녁 조명을 받고 있던 그 첨탑을 찾아서 갔다.
비둘기떼만 가득하고 조용한 그곳에, 한 무슬림이 계단위 문앞에서
절을 하며 기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사원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까?
그 사원 앞은 바로 강처럼 보이는 바다였다.
아직 청소전인지 사방이 지저분하다.
나중에야, 그곳이 바로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다리역활을
하는 여객선 터미널이라는 걸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배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낮에는 많은 인파로 넘쳐나는 그곳이, 새벽에는 갈매기만 나르는 곳이었다.
너무 호텔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다시 되돌아 걸어나와
도로를 건너 아까 그 사원(이레네사원)으로 돌아갔다.
사원 옆구리에는 수도꼭지가 주루룩 달려 있었는데,
한 청년이 커다란 생수통에 물을 받고 있었다.
이곳은 석회분이 많아, 생수를 마실 수 없다고 하였는데, 저 병의
물은 왜 받아가는 것일까?
가까이 다가가니 환하게 웃는데, 아주 미남 청년이었다.
나보고 이렇게 꼭지를 틀어라고 가르쳐 준다.
그곳에서 사원에 들어가기전 몸과 마음을 씻는 장소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거의 한시간 가까이 지났기에 호텔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이 안된다.
한국에서도 '길치'였기에 몇번씩이나 확인하고 걸었는데.....
역까지는 찾았는데 그다음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하는 수 없이 호텔 안내서를 길가는 차도르 차림여인에게 물었더니 모른다고 한다.
어쩌나.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차를 탄 남자분이
차를 세우고 안내서를 보여 달라고 한다.
우리가 묶은 호텔은 아주 조그만 호텔이고, 그런 조그만 호텔이
역 주변에 수없이 많았다.
차속의 남자가 이쪽으로 쭉~가라고 가르쳐 준다.
조금 더 가서 뚱둥한 남자에게 물었더니,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가면서
길을 안내해 주었다.
무섭다고 한 터키 사람들이 이렇게 친절하다니!
나는 "싸올!" 인사를 건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안 도로 바닥은 이렇게 모자이크 벽돌로 단단하게 만들어 졌다.
아침 햇살아래 서서히 깨어나는 성이레네 사원.
이 뽀죡 첨탑들이 바로 나를 터키로 이끌었던가?
건너편이 아시아라고 한다. 이른 시간이어서 조용하기만 한 여객선 터미널.
걸음을 되돌려 다시 찾아간 이레네 사원, 한쪽 첨탑은 보수 공사 중인 모양이다.
이곳에 앉아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모양이다.
이 청년이 나에게 보여준 환한 미소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사원,
막 출근준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모습.
2006.6.1.
아침 식사를 끝내고 터키의 수도 앙카라로 떠나기 전 톱카프 궁전관광을
먼저 하기로 하였다.
매주 화요일이 휴일이기에 (우리가 이스탄불 관광하기로 한 날이 바로 화요일이기에)
먼저 들르고 앙카라로 향한다고 하였다.
톰카프 궁전은 오스만 터키의 술탄이 거주하였던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궁전이었다.
슐탄 1세 부터 34대까지의 궁전이었다고 하던가?
(오스만 터키는 1923년 터키로 다시 독립하기전 36대 슐탄까지 이어 내려온
왕조라고 현지 가이드가 설명하였는데, 내 기억이 맞는지?)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와 너무나 흡사하다고 한다.
톱카프궁전이 경복궁이라면, 돌마바흐체궁전은 덕수궁과 같다고 할까?
백성들은 과중한 군역과 세금에 허덕이었을테고,
권력을 잡은 슐탄을 자기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형제들을 죽이기까지 하면서
환락과 방탕에 젖어 지냈을 것이다.
궁전 내부에 부장된 그 영롱하고 화려한 보석들은 다 어디에서 나왔을까?
우리들이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는 화려한 장신구와 집기들은
백성들의 눈물과 한숨인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찻잔, 장신구, 보석이 박힌 칼,...모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 안의 보석만 제대로 팔아도 터키는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어떤 왕국도 가장 번성한 시기를 지나면 곧 몰락으로 치닫는 모양이다.
왕국의 말기로 오면서 더욱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부패해지기 쉬운 법인가?
슐탄 36대 멸망과 함께 국부 아타 투르크가 독립돤 터키를 세우고
부패한 이스탄불이 지긋지긋하여 앙카라로 수도를 옮겼다고 하였다.
곳곳에 국부의 동상이 서 있었고, 그들의 새 화폐에도 아타 투르크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케말 파샤 아타 투르크는 터키인에게 거의 신적인 존재라고 한다.
터키문자를 새로 만들고(알파벳을 본딴 문자 같았다),
성을 만들었으며, 세제개혁을 하여 백성의 부담을 들어 주었다고 한다.
가난한 산골 소년이 자라서 아타 투르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가이드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 가이드는 29살의 아가씨인데, 어찌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열심히 귀기울여 듣고, 메모까지 하였으나, 며칠 지나니 아물아물 하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까지 6시간의 버스 이동(약 380Km)을 하여야 했다.
보스포르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가는 길에는 다리가 두개 놓여 있는데
우리는 제2다리를 통행료를 내고 건너갔다.
1988년 터키와 일본의 기술 합작으로 현수교를 만들었는데
폭이 가장 좁은 (700m)곳, 물살이 가장 빠른 곳위로 지나갔다.
이 다리 하나를 건넘으로써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겨가는 셈이었다.
톱카프 궁전 입구.
이곳의 학생들도 견학을 온 모양이다. 교복을 입고 재잘대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어찌나 반가워 하면서 "코레아"를 연발하는지....
초등학생들은 더욱 친근하게 우리에게 손까지 흔들면서 반겨 주었다.
궁전 입구
금으로 도금된 궁전내부의 천장.
회랑을 지나서 부엌과 식당이 연결되어 었다.
차도르를 쓰고 긴의자에서 쉬고 있는 이곳의 여인들은 거의가 뚱둥한 몸이었다.
혹시 이곳은 미인이 뚱뚱한 여인이 아닐까?ㅎㅎ
골든 혼을 바라보며 스카프를 두른 여인들도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화려한 터키의 타일. 거의가 푸른빛( 페르시안 블루)
아름다운 타일로 장식된 방문앞.
나의 룸메이트 부인(아주머니, 언니라고 불려주기를 바람)
궁전앞의 장미꽃밭.
바그다드 궁전.
금으로 도금된 창살문.
입구를 지키는 경비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였더니 흔쾌히 포즈를 취해 주었다.
궁전앞의 히포드럼광장의 8각지붕 독일의 분수.
궁전앞의 기념품가게.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이곳 궁전앞 히포드럼 광장에 서 있었는데, 아래 부분과 윗부분이 따로
운반하여 이곳에서 연결한 모양이었다.
오벨리스크와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는 또 다른 기념탑.
이집트에 잇는 줄 알았던 오벨리스크앞에서.
2006.6.2.
세계문화유산인 갑바도키아의 암굴괴석과 지하 동굴 도시(데린구유)로
가는 길은 참으로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척박해 보이는 그 땅은 들꽃들의 차지인 것 같았다.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속의 들꽃잔치.
특히 새빨간 양귀비 꽃들이 어찌난 아름다운지, 그곳에 내려서
꽃밭을 좀 거닐어 보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조금 후 바다같은 호수가 나타났는데, 호수주변이 하얀빛깔이었다.
바로 소금 호수라고 하였다.
이곳의 천일염으로 터키국민의 소금으로 다 사용할 수 있는 양을
채취한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염전만 보아왔던 나에게는 정말 자연의 선물같았다.
이곳의 들판에는 일하는 농부를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넓은 들판을 모두 기계로 농사를 짓는 모양이었다.
새삼 집약형인 우리 농촌의 농민들의 생활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이곳은 그냥 씨만 뿌려 놓아도 곡식이 저절로 자라고
밀이 잡초와 함께 자라도, 그걸 일일히 제거 하지 않고
추수때 그냥 기꼐로 수확을 하는 모양이었다.
데린구유란 깊은 우물이란 뜻이라고 했다.
그 지하 동굴 도시속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었을까?
깊이가 20층의 높이로 파 들어 갔는데,
관람을 할 수 있는 곳은 1/10정도라고 하였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동굴속에서 생활하였다 하니
신앙의 힘은 얼마나 강한가?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지하에서 나오니, 조잡한 인형을 만들어 파는 아이들이 우리를 에워싼다.
전혀 예쁘지 않은 그들의 인형을 하나 사들고 버스에 올랐다.
그 다음 우리가 간 곳은 용암과 화산재가 굳어 만든 기암괴석이
즐비한 괴뢰메 야외 공원.
정말 신의 예술작품을 우리앞에 펼쳐 놓은 듯 하였다.
이곳에서 난 미아가 될 번하였다.
기념품 가게안에 들어가 딸의 셔츠와 내 셔츠를 15$에 흥정하고 나왔더니
우리가 타고온 버스와 일행이 나만 남겨두고 떠나 버렸다.
눈앞이 캄캄하였다.
가게에는 그곳 주민인 남자들뿐.
내 상황을 눈치챈, 주인이 오토바이를 타라고 하였다.
순간 망설였다.
이러다가 내가얼마전 뉴스에 나온 그 여학생 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끌려 가서 돈과 목숨을 빼앗기는 게 아닐까?
그냥 그곳에서 기다리려고 하는데, 묘한 모험심이 생겼다.
그냥 그들을 믿고 싶었다.
그 남자의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조금 달리니 낯익은 푸른빛 버스가 되돌아 오는게 보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한쪽팔을 휘저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참 아찔한 순간인 것 같았다.
어쩌자고 난 위험하게 그남자의 오토바이를 탔을까?
그들의 순진한 눈빛과, 알라신의 가호를 믿은 탓이었을까?
이 모험담은 가족에게는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할 특급비밀이다.ㅎㅎ
동굴을 파 들어가 만든 데린구유.
먼지가 풀풀 날리기만 하는 밭사이로 오래만에 파란 강줄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가롭기만 한 들판.
수많은 성화가 그려진 암굴교회.
괴뢰메 야외공원안의 수도자들이 수도를 하였던 곳.
괴뢰메는 너희가 볼 수 없는 곳이란 뜻.
한국에서 같이 간 가이드와 함께.
참 예쁜 목소리, 차분한 성격의 친절한 아가씨였다.
척박해 보이는 곳에도 들꽃들은 예쁘게 피어 있었다.
바로 저끝의 가게에 들어가 나는 미아가 될뻔 하였다.
괴뢰메 암굴교회 앞의 파란 버스가 나를 버리고 떠나간 버스다.
나를 떨쳐놓고 간 버스는 터키 보석 판매장으로 달려갔고, 뒤늦게 도착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버드나무 아래에서 현지인 아저씨와 팔짱을 끼고 즐겁게
웃으며 무사 귀한을 자축하였다.
눈앞에 펼쳐진 신의 예술작품들.
나를 다시 찾아 차를 되돌려 온 마음씨 좋아보이는 운전 기사 아저씨.
뒤로 낙타바위를 등지고 기념 사진.
요정 스머프의 집들처럼 보인다.
사막같은 땅에서 이렇게 포도나무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자꾸 되돌아 보고 싶은 하늘을 향해 있는 물개모양의 암석들.
어느 수도자가 만든 교회의 입구인지?
첫댓글 잘보고 있습니다
앤 공주님 댓글 감사합니다.
잘보구갑니다.
노적봉님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읽어 보았습니다.
정말 여행광이시군요.
10년전 모습이 넘 애때 보이시네요.
긴 비행시간 질릴만도 한데 참 대단 하십니다.
좋은 여행으로 이여 지시기를...
저도 그즈음에 터키를 갔다왔습니다
구경할게 많은 나라 많은 감동을 받고 왔었지요
카파도키아의 발룬투어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
즐거운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구정 전 후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타아갈려고 합니다
친구가 있어 같이 여행할수있어 행복하시겠어요.
저는 같이갈 친구없어 혼자간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