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족들 간의 불화는 시초부터 영국의 유산의 한 부분으로 자리 매김해 왔다. 정복왕(the Conqueror) 윌리엄 1세(William I)는 그들 사이에 다툼을 시작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벌족 앞에서 1066년 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겨우 주장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막내 아들인 헨리 1세(Henry I)와 감옥에 갇힌 또 다른 아들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는 28년 동안이나 비극적인 사냥 여행인 '사고'로 잘 배합된 것을 꾸민 혐의를 가졌고 그 사고로 셋째 아들인 윌리엄 2세(William II)가 1100년에 죽었다. 훗날 왕관을 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면서 정복왕의 손주들 중 두 명인 스티븐(Stephen)과 마틸다(Matilda)는 왕국을 맹렬한 시민 전쟁으로 몰아 넣었다. 이는 1154년 마틸다의 아들이 국왕 헨리 2세(Henry II)가 되었을 때 안정될 수 있었다. 불쌍한 헨리는 그들의 어머니에 의해 전적으로 강권당하는 욕심 많은 아들들에 의해 4개의 모반보다 적지 않은 것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아키텐 여공 엘레오노르는 그녀의 오랜 기간 동안의 감금 생활에서 기인해 헨리로부터 통렬한 불화를 겪은 사람이었다.
광대한 영토의 통치자는 모든 영국의 영토와 프랑스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헨리 2세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아들들 사이에 영토를 분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의 장자인 젊은 헨리에게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역시 왕위를 존속하면서 영국의 왕위를 이어받게 하기까지 했다. 만약 헨리가 이는 소년을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일임을 희망하고 그의 사후에 평화로운 이행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는 비극적인 실수를 저지른 셈이 된다. 아이는 왕위에 걸맞게 권력을 원했고, 그가 그만 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헨리가 지적했을 때 모반을 일으켰다. 다양한 연조합으로 그리고 아연실색할 음모로 그들은 아버지에 대항해서 봉기를 했다. - 그리고 서로 서로 봉기한 일이다.
그 당시에 웨스트민스터의 왕실의 방에 벽걸이 융단을 걸어놓은 것이 있었다. 4마리의 새끼 독수리들이 부모 독수리를 잡아 먹는 것으로 4번째 새끼 독수리는 부모의 목 둘레에 태연히 자세를 잡고 눈을 파 먹기 위해 있었다.
"네 마리의 새끼 독수리들은 내가 죽었을 때조차도 나를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않는 네 명의 자식들이다."
헨리 국왕은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현재 큰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는 그들 중 가장 어린 것은 언젠가는 끝에 가서 나에게 모욕을 주고 다른 어떤 자식보다 보다 가혹하게 대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로 다가왔다.
네 번째 새끼 독수리는 아버지의 눈에 욕설을 퍼부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는 헨리의 사랑스런 막내 아들로 변했다. 이는 수치스런 미래에 마그나카르타로 명성을 얻은 무지왕 존(John Lackland)이었다. 헨리 왕은 존의 행운을 더욱 나아가기 위해 힘써 노력했다. 특히 그는 모든 땅을 그의 형제들에게 물려 주지 않은 이래로(향후 걸지왕은 종종 그의 이름 앞에 따라 다녔다)그랬다. 그러나 배은망덕하게도 존은 형인 리처드와 결합하여 그들의 아버지에 대항해 마지막 모반을 일으켰다.
적어도 리처드는 아버지와 함께 합법적인 속박을 가졌다. 헨리가 아들인 리처드의 약혼녀와 성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회상할 수 있는 소문으로 최소한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존의 배반은 그의 아버지가 견디기에는 너무나 컸다. 그가 그의 사랑스런 아들을 보았을 때 아들은 암암리에 충성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음모자의 목록 중에서 현재 목을 벨 사람의 이름에 있었다. 헨리는 마침내 공격을 받게 되었고 파멸하게 되었다. 자랑스런 군주는 그의 침대에 누워 절망으로 눈을 감고 죽었다. 존은 다음에 이어서 다음 대의 치세동안 그 자신을 지키느라 분주했다.- 사자왕 리처드 1세(Richard I)는 - 신왕이 십자군 원정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그의 동생의 왕좌를 빼앗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그의 시대에 로빈 훗 전설은 형제 간의 역심의 배경에 대항해서 나온 것이었다.
왕실의 가족 유대 관계는 이사벨라 왕후였을 때인 훗날 몇 세대가 흘러도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에드워드 2세(Edward II)의 서먹서먹한 부인으로 1326년 그녀의 애인과 함께 남편의 왕국을 급습해서 왕을 무시무시한 죽음으로 몰아 넣은 장본인이다. 그들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Edward III)는 그 후에 가족의 조상이 되어 후손들이 30년 이상 동안을 유지하는 혈연적인 불화에 종사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얀 장미를 대표하는 요크 가(House of York)와 붉은 장미를 대표하는 랭카스터 가(House of Lancaster) 사이의 15세기 말엽의 사악한 불화를 위해 장미 전쟁은 훗날 붙여진 공상적인 이름이었다. 이는 플랜타제넷 왕조(House of Plantagenet)의 혈통이 영국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했다. 세 명의 왕들, 웨일즈의 왕자들과 셀 수 없이 많은 왕실의 귀족들은 살해되었고, 처형되었거나 이러한 타고난 술책의 암흑기 동안의 전장에서 죽었다.
확장된 왕실극은 셰익스피어에게 호기심을 자아내게 해서 그는 인생의 절반을 역사물을 쓰는데 바쳤다. 이는 에드워드 3세의 손자로 헨리 4세(Henry IV)가 되어 랭카스터 왕조(House of Lancaster)를 열기 시작할 당시의 14세기 말경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는 그의 사촌인 리처드 3세(Richard Ⅲ)의 왕좌를 빼앗았고 그를 암살했다. 왕의 시해자는 어쨌든 혈연 관계를 고무시키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일들은 랭카스터의 왕들에게 공정하고 순조롭게 지나갔다. - 적어도 그 당시에는 말이다. 비록 헨리 4세가 일련의 역모에 직면했다 해도, 그의 아들은 평화롭게 왕좌를 계승했고 아젱코트의 프랑스군을 무찌르고 100년 전쟁동안 다른 어마어마한 전투에서 유럽에서의 영국의 강력한 힘을 거듭 주장하면서 헨리 5세(Henry V)는 역사상의 영웅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기양양한 왕은 젊은 나이로 죽었고, 그렇긴 하지만 멀지 않아 고무적인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헨리 6세(Henry VI)는 1422년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아직 충분히 나이가 든 것은 아니었고 다소 어리버리에다 친절하고 신앙심이 깊은 남자로 성장했다. 검소하고 주제 넘지 않은 그는 왕관에 모직의 셔츠를 입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전쟁과 유혈극을 질색했다. 그는 오늘날 여전히 유명한 소년 학교인 이튼스쿨과 왕실 대학교인 캠브리지의 설립자로 존경스런 인물이다. 선량한 사나이는 비록 그렇다 해도 무능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강력한 통치자가 압도적인 혼란시대를 때때로 정복하기 위해 필요했을 때 중세의 세계에서 헨리 6세는 야만적인 평야에서 이빨 없는 사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교황 비오 2세가 묘사하기를, "여자보다 더 소심한 남자, 순전히 기지나 기백이 결여된 사람" 이라고 했다. 성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매우 부끄럼을 타고 성모 마리아처럼 성령에 의해 자식을 배게 되었다고 진실되게 믿었던 헨리는 봉건적인 먹이사슬을 지배하기 위한 유형으로 보기 힘들었다.
흠집 없는 귀중품으로 선발된 그를 둘러싼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조언자들에게 헨리는 서서히 영국이 무질서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었고, 부채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왕관을 쓴 프랑스의 통치자는 마찬가지로, 그는 광대한 영국인 소유물과 같이 서 있던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점차로 성녀 잔 다르크에 의해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강탈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유효성을 훼손시킴은 광기의 쇠약하게 하는 발작이었다.
영국이 파멸의 길을 걸음에 따라 프랑스는 헨리의 소심한 통치 하에 누설되었다. 왕의 강력한 사촌인 요크 공작(Duke of York) 리처드(Richard)는 동요가 증가되는 가운데 이를 지켜보았다. 둘 다 그의 양친 쪽으로부터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에서 두 사람이 후손이었고 요크는 거의 틀림없이 헨리에 비해 우월한 왕좌를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완전한 낭패 외에, 그는 단언하기 위해 움직이고자 했다. 추한 가족 간의 충돌은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었다.
요크 공작은 사촌 헨리가 광기로 인한 이른 조병 중의 하나로 고통받고 있는 동안 왕국을 책임지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재빨리 국왕이 지각을 되찾은 후에 감퇴했다. 더한 통제를 얻기 위한 갈구로 - 그리고 특별히 헨리의 탐욕스런 총애자, 그들의 상호적인 사촌, 서머셋 공작을 내쫓기 위해 - 요크는 1455년 세인트 알반스에서 무력에 의해 헨리와 대결했다. 서머셋은 죽임을 당했고 왕은 스치는 화살로 목에 부상을 당했다. 이는 장미 전쟁의 첫 번째 전투였다. 아직 요크가 사람들이 그 당시에 앞서가 있는 동안, 국왕 헨리 6세의 제거는 아직 그들의 계획의 일부분이 아니었다. 그 일은 나중에야 오고 말았다.
유순한 군주는 평화를 얻으려고 했고 그 밖에 다른 것보다 화해를 하고자 했지만 그의 사나운 프랑스인 왕후인 앙주의 마가렛(Margaret)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크를 진압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녀가 모든 기개를 가지고 결혼에서 부부가 된 이래로, 마가렛은 잠시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당시의 런던 시는 동요한 지지자들로 떼를 지어 들끓고 있었는데 그 양쪽은 요크 공작과 랭커스터의 헨리 왕으로 지배권과 같이 그들의 차이점을 숙고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까지 믿을 만한 활기로, 왕은 용기를 복둗이고 왕족들 간의 유대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사랑의 날' 행사를 각색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마가렛 왕후는 같이 일을 진척시켰다. - 그녀의 공공연한 적 요크와 함께 행렬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일조차도- 그녀는 이를 악 물고 그렇게 했다.
왕후 마가렛은 요크가 남편인 헨리의 왕좌를 훔쳐갈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고 그 혐의는 헨리가 그의 일련의 증상들 중의 다른 하나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는 세인트 알반스 후에 더욱 더 견딜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그리고 왕실의 공작은 왕국을 다시 한 번 통제하는 척 했다. 군대를 일으켜서, 화난 왕후는 1459년 루드로우의 전투에서 남편의 사촌을 무찔렀고 그를 아일랜드로 종종걸음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 후에 그를 반역자로 선포할 법령을 도입했다. 이러한 행위는, 아주 미묘하게 요크의 가장 악마적인 불친절함과 비참한 부러움을 개탄하지는 않았고 그의 지긋지긋하고 가장 혐오할 만한 세인트 알반스에서의 업적은 그 후에 악마들의 의회로 알려진 한 무리의 영국 귀족들에 의해 지나갔다.
법안이 있든 없든, 현재는 법률 밖에 놓여진 요크 공작은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그의 무력은 노덤버랜드에 있는 왕에게 루트를 정했고 헨리는 런던에 죄수로서 돌아왔다. 요크 자신이 도시로 들어왔을 때, 그는 공식적으로 왕좌를 천명하는 것을 제기했다. 한 번은, 헨리 6세는 그 자신을 위해 서 있었다. 그의 사촌인 요크의 주장의 도전에서 그는 귀족들을 모으는 것을 선포했다.
"내 아버지는 왕이었고(헨리 5세), 그의 아버지 또한 왕이었다(헨리 4세). 나는 요람에서부터 40년 동안 왕관을 써 왔다. 그대는 나에게 모든 그대의 영주국으로서 충성을 맹세했고 그대의 아버지들은 내 아버지들한테 했던 것처럼 그렇게 했다. 어떻게 그 후에 내 권리를 논쟁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기름을 부은 왕을 낙마시키기 위해 준비하지 않은 반면, 요크는 지금 권력을 붙잡았다. 의회는 일종의 타협안으로 주저하며 마지못해 공작은 헨리의 외아들인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를 대신해 왕좌를 이어받을 제 1선상에 있을 것을 선포했다. 이제 마가렛 왕후는 완전히 미쳤다. 1460년 다른 군대를 일으켜서, 그녀는 무력으로 웨이크필드의 전투에서 요크를 공격했고 공작은 죽었다. 그의 매정한 머리는 종이 왕관을 붙여서 요크 시의 입구에 전시해 놓았다 -그의 왕으로서의 권리를 조롱하는 일종의 중세풍의 방식으로 재밌는 일이었다.
남쪽으로 향해서, 왕의 승리에 찬 랭카스터 가의 무력은 그 후에 세인트 알반스의 두 번째 전투에서 요크 가의 잔당들을 공격했다. 헨리 국왕은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전적으로 사소한 충돌로 웃고 노래를 부르는 시간을 가진 후 그의 가족들과 재집결을 했다고 한다. 마가렛 왕후는 그러는 사이, 그들의 아들을 작은 전쟁 후의 여흥으로 다루었다. 그녀는 7세 된 웨일스의 왕자가 요크 가 사람의 우두머리에게 유죄 판결을 하게 하고 그 후에 처형을 보는 것을 허락했다. 왕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못 흡족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작은 시간을 가지고자 했다. 요크 공작은 죽었지만, 그의 만만치 않은 17세 난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는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확실히 그는 그의 아버지의 머리가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인 아슬아슬한 곡예를 찾지 않았다.
남쪽으로 향하면서 런던 시민들은 또한 약탈하고 전리품을 획득한 헨리 왕의 모든 무력이 이루어짐에 의해 놀라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도시의 입구를 차단했고 왕실의 가족들과 그들의 랭카스터 군대에 대해 문을 닫아 걸었고 그 대신 그 자신이 에드워드 4세(Edward IV)라고 천명한 요크의 아들을 환영했다. 다소 소란스런 선언을 발표하면서 에드워드는 탄식하기를 "우리의 반대자, 그는 자신을 6번째 헨리 왕으로 일컫는다." 라고 그 당시 말했다. 거기에는 존재하기를 "풍족함과 평화와, 정의, 선의 지배, 정책과 고결한 대화가 아닌, 쉬지 않는, 내부로의 전쟁과 고통, 분별 없음과 결백한 피의 발산과 유출, 법의 남용, 편파적임, 폭동, 강탈, 살인, 약탈과 타락한 삶은 영국의 귀족의 왕국의 길잡이와 앞잡이가 되어 왔다."
이는 100년보다 덜한 가족 구성원에 의한 두 번째 왕위 찬탈을 위한 정교한 정당화였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이 아니었다.
에드워드 4세는 현재 군주가 되었지만, 여전히 헨리 6세는 살아 있었다. 영국의 새 군주는 길고도 끔찍한 가족 불화의 가장 잔인한 교전의 타우톤에서 전왕의 무력을 만났고 무찔렀던 곳인 북쪽으로 구세력을 추적했다.
"이 전투는 비통한 싸움이었다."
한 기록자는 차가운 겨울 날의 교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생의 희망을 위해 모든 부분의 곁에 놓여졌고 붙잡힌 포로들은 위대한 공격을 선언했다."
설원은 수천으로 난도질 당하거나 화살로 꿰뚫어져 흘린 피로 희미하게 빛났다. 이것은 에드워드가 즉시 그들을 사로잡은 후 전장에서 목을 베라고 명령한 랭카스터의 42명의 기사들을 포함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새 왕은 토우톤에서 승리에 찬 전사로 증명을 했다. 금박을 입힌 갑옷에서 그의 몸집이 큰 뼈대와 그의 투구는 보석의 관으로 장식했다. 그는 그의 전투가 한창일 때 그들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무력에 대해 고취시켰다. 사촌인 헨리는 반면에, 특징적으로 밤 기도에 시간을 보냈다. 황폐한 손실이 있은 후에, 퇴위한 왕실 가족은 스코틀랜드로 야반 도주를 했고,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운반을 했다.
전 왕인 헨리 6세는 교묘히 피하는 그림자가 되어, 올 때까지 수년 동안을 잃어버린 왕국 둘레를 쓸쓸하게 공중 정지했다. 1465년,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며 방랑 생활을 한 그는 마침내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그는 그를 보호하고 있었던 수사에 의해 배신을 당했다.
"그는 그의 치명적인 적들인 그 자신의 백성들의 피에 젖은 손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의 작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경멸로 배합하기 위해, 영국의 전 국왕은 - 그의 말의 복부 밑에 등자 가죽 끈으로 그의 발은 묶여 있었고, 밀짚 모자를 썼다. - 런던 탑 안에 감금되기 위한 그의 길을 가면서 몇몇 도시를 거쳐 행진을 했다. 의회는 그러는 사이, 선포하기를 당사자 헨리는 찬탈자로 반역자라고 했고, 그러는 사이 그의 공식적인 대관식 후에 에드워드의 왕좌의 요구를 열정적으로 확립했다.
몰래 감춘 랭커스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는 질리지 않는 전 왕후 마가렛에 의해 이끌었는데, 에드워드 4세의 요크 가의 체제는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 장미 전쟁은 그렇긴 하지만, 끝나기에는 아직 멀었다. 에드워드 국왕은 왕관은 썼지만 이는 다른 가까운 친척인 워릭 백작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덕분이었다. 역사상 국왕 제조자로 알려진 워릭 백작은 영국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남자였다. 문제는 그가 첫 번째로 강력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는 데 있었다. 왕과 그의 강력한 백성을 넘어선 이 사이의 최후의 대립은 헨리 6세의 어안이 벙벙한 복위로 결과를 짓고자 했다. 가족 사에 나타난 대로, 에드워드는 사건의 전환에 의한 놀라움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었다.
백작과 국왕과의 유대 관계는 백작이 뭐든지 에드워드가 왕관을 차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교환으로 왕실의 친척을 통제하기 위해 그가 꾀함에 따라 점차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왕이 전 왕후 마가렛의 시녀였던 엘리자베스 우드빌(Elizabeth Woodvile)과 결혼할 때, 두 사람 간의 관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워위크는 새 왕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는데, 제일 큰 이유는 신분 상승을 위해 그녀가 벼락 출세한 친척의 짐을 짊어지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왕의 지지로, 그들은 순조롭게 결혼을 했고, 어마어마한 금전적인 상을 보답으로 받았고, 의회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가 주어졌다. 강력한 백작은 이러한 악착같은 벼락 출세자들에 의해 협박을 받고 있음을 느꼈고, 맹렬한 공격을 했다.
그의 첫 번째 이동은 1469년 켄트에서 대중적인 모반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고,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친척에 관한 불만족스런 소문을 전역에 퍼뜨렸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는 일찍이 반란의 희생양이 되었고, 노섬벌랜드의 명령에 대한 재판 없이 목이 베였다. 이는 불행한 사촌 에드워드 4세에게 백작이 보내는 미묘한 전갈은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남동생인 클라렌스 공작을 포함한 노섬벌랜드의 군대는 모반을 퍼뜨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행동했다. 이는 그 시점에서 왕을 사로잡기까지 했다. 에드워드는 반역하는 친척과의 어떠한 우정의 구실을 포기하기 위해 강요를 받게 되었고 전쟁을 선포했다. 비록 그가 노섬벌랜드와 남동생 클라렌스를 모반자와 반역자로서 비난을 하면서 1470년의 봄에 선포를 유포했다고 해도, 그는 떨어진 왕관을 놓치고자 했다.
노섬벌랜드는 그가 에드워드를 원하는 대로 결코 통제할 수 없음을 확신했다. 그는 또한 영국인들이 결코 그의 동맹자 클라렌스 공작을 군주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권력을 휘두르기를 원한다면, 그의 한 가지 선택은 소박한 마음을 가진 유순한 헨리 6세를 제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었다. 프랑스로 항해를 해서 노섬벌랜드는 그의 이전의 적이었던 마가렛 전 왕후와 쉽지 않은 평화 관계를 만들었고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후에 그는 영국을 침략했다. 에드워드는 백작의 무력이 런던에 떼를 지어 오기 전에 탈출할 시간이 거의 없었고 옹립자는 그가 9년 전 나가 떨어지게 하는데 일조했던 같은 군주를 왕좌에 되돌려 놓기 위해 움직였다.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런 헨리 6세는 런던 탑에서 풀려나오게 되었다. 그 곳은 기록되기를 그가 결정적으로 왕실의 대우를 받지는 않았던 죄수와 같이 보았고 냄새를 맡았다고 되어 있다. 연대기 기술자에 따르면, 그들은 새롭게 그를 성장을 시키고, 크나큰 경외심을 그에게 바쳤고, 그를 웨스트민스터 궁전으로 데리고 갔다. 누군가가 기록한 바와 같이, 왕관을 쓴 멍청이와 같은 벙어리라고 한것처럼, 유약하고 단순한 헨리는 그의 예전의 책무를 받아들였다. 그 당시 그는 노섬벌랜드의 꼭두각시가 되고자 했다.
헨리 왕은 에드워드 왕이 1471년 군대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가 새롭게 앉은 왕좌를 재조정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노섬벌랜드는 바넷의 전장에서 죽었고 마가렛 왕후는 몇주 후 튜크스버리의 전장에서 적을 막았다. 그녀의 17세 된 아들, 왕좌의 후계자이자 랭카스터 가문의 마지막 희망인 랭카스터의 에드워드는 죽었다. 다시 한 번 탑에 머무르게 된 헨리 6세는 그 곳에서 다시 한 번 에드워드 4세가 된 그의 사촌으로 인해 조용히 죽임을 당했다. 죽은 왕의 유해는 랭커스터 가문이 끝났다는 것을 의심할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런던에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
이리하여, 장미 전쟁은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다. 아무도 싸움터에 남겨 놓지 않은 채, 요크 가문은 간단히 서로 간에 바뀌었다. 마침내는 에드워드에 의해 처형이 된 클라렌스 공작 외에도 왕은 또 하나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글루세스터 공작인 리처드로 랭카스터의 적과 충돌하는 동안 그를 잘 섬긴 사람이었다. 리처드는 그렇긴 하지만, 좋은 삼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증명했다.
에드워드 4세가 1483년 죽은 후, 그의 장남은 모든 권리에 의해 에드워드 5세(Edward V)로 그를 계승해야 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의 친애하는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덕분에 그는 왕관을 쓸 수 없었다.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의 유지에 따라 후견인으로 이름을 얻어 왔는데, 그는 13세 된 소년왕이 그의 대관식을 위해 런던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강탈을 해 그를 즉시 런던 탑에 가두어 놓았다. 에드워드는 곧 그의 남동생인 요크 공작과 연합을 하게 되었는데, 삼촌 리처드를 웨스트민스터의 성역 밖으로 불러 들였다. 후견인은 그 후에 그의 조카 둘 다 사생아임을 알리는 것을 착수하고 그 자신을 왕 리처드 3세(Richard Ⅲ)로 왕관을 썼다.
탑 안의 어린 소년들은 결코 다시는 보거나 들을 수 없었다. 비록 어떤 리처드 3세의 일당들이 논쟁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탈권한 왕이 그들을 암살했다고 믿는다. - 어떤 의견에 따르면, 그들이 자고 있는 동안 질식사 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범죄로 가장 어두운 암흑기의 영국 국민들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리처드의 죄악은 그들에 맞서서 야기된 것으로 음침하고 억누를 수 없는 것을 남겨 놓은 이 나라의 도처에 깔린 증오이다."
윈스턴 처칠은 그의 저서 <영어를 말하는 국민의 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고 아무도 수여된 은전을 입지 않았고, 아무도 채책된 현명함을 측정하지 않았고, 아무도 행정상의 성공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는 죄악을 저지른 군주에게 유용한 일이었다."
2년 후, 사악한 삼촌이 리처드 3세로 왕이 되고자 했을 때, 장미 전쟁이 간단히 재개되었다. 1485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헨리 7세(Henry VII)가 된 랭카스터의 후계자가 그가 죽은 보스월스 평야에서 리처드 3세를 무찔렀다. 마지막 요크 가의 왕이 죽자 헨리는 그가 에드워드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때, 분쟁하는 요크 가문과 랭카스터 가문을 연합했고 튜더 왕조(House of Tudor)를 세웠다. 1487년 스토크에서 마지막 요크 가의 반란이 일어난 후에, 장미 전쟁은 마침내 종결되었다. 어마어마한 왕족들 간의 충돌인 피에 젖은 유산은 다음 세기에 잘 누설하고자 했다.
헨리 7세는 효율적으로 왕좌와 너무 가까이 밀접한 요크 가의 친척들을 대부분 처형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친척들에 대한 권리를 사람들이 주장함으로서 결국 괴롭힘을 당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뱃사공의 아들인 퍼킨 워벡으로 그는 삼촌인 리처드 3세에 의해 런던 탑에서 살해당한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의 남동생으로 권리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워벡은 여러 유럽의 군주들과 죽은 소년의 숙모를 비롯한 살아 남은 요크 가 사람들의 후원으로 그의 대담한 연기를 배웠을 때, 심각한 위협을 위해 성가신 세관원에서 출발한 사람이었다. 리처드 4세임을 선포하면서, 워벡은 그가 마침내 사로잡히고 드디어는 목 매달기 전에 영국의 침입을 착수했다.
다음 대의 통치 동안에, 헨리 8세(Henry VIII)의 다양한 결혼들은 평화롭게 대를 이을 아들에 의해 이전 세기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열망의 한 부분으로 자극받게 되었다. 그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한 후에도, 비록 그렇긴 하지만, 헨리는 여전히 위험한 요크 가의 적과 직면하고 있었다. 그의 69세 된 살리스버리 백작 부인인 친척 마가렛이 그 예이다. 비록 국왕이 클라렌스 공작의 딸을 거의 어머니와 같이 존경한 적이 있긴 했지만, 통치 말년에 가서 그녀가 참을 수 없는 위협임을 느끼고 갑자기 처형을 결심했다. 헨리는 1541년 늙은 부인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지만, 그녀는 조용하게 가 주지 않았다. 사형수의 도끼를 피하는 것을 꾀하려고, 백작 부인은 그를 피하기 위해 단두대 주위를 뛰어다니려고 했다. 사형수가 맹렬히 추적해서 그녀는 죽음으로 난도질 당했다. 튜더 왕조는 서로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한 이복 형제들인 그들의 마지막 군주들을 위해 그 당시 안전했다.
글이 너무기네요 원글은 3개로 나눠져있었찌만 편의상 1개에 몰았습니다
원출처는 로얄하우스이고 http://cafe.daum.net/byzantine2차 출처입네다
첫댓글 다들 읽고있는 중인가요>?? 댓글이 없네요
읽기는 했습니다만, 어째 글의 가독성이 떨어지네요. 영문의 직역인건지 내용 파악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선량한 사나이는 비록 그렇다 해도 무능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심각한 위협을 위해 성가신 세관원에서 출발한 사람이었다'
'생의 희망을 위해 모든 부분의 곁에 놓여졌고, 붙잡힌 포로들은 위대한 공격을 선언했다'
'요크 가문은 간단히 서로간에 바뀌었다'
무작위로 대충 뽑은게 이 정도니.. 난해하네요.
아 그런가요??
직역하신거란 느낌이 매우 강하네요. 혹시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출처는 적혀있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