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1개 신문사당 1500여명이 응모하여 7000 내지 10000여편이
접수된 것 같다.
물론 종합적인 역량등을 평가했겠지만 눈에 띄는 것은 문화적인
자의식을 노래한 작품들이 한국일보(조정,이발소 그림처럼),
조선일보(최영신,우물), 문화일보(김규진,집 속엔 길이 없다)에서
당선작으로 나왔다. 시인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은 특히 모두 황
동규 시인이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 외에 중앙일보의 박성우(거미)는 동물 상징시,세계일보의
최용수(낙엽 한 잎 - 용역 사무실을 다녀와서)는 IMF시를(?),
동아일보의 이승수(고래)는 IMF+textual+서정추상+동물상징시를
썼다.
특히 조선일보에서는 51세의 최영신 시인에 대한 특집 기사도
잊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이승수의 '고래'가 감동적이다.
'아까부터 내 옆에 앉은 사내가/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전철 바닥에
/누런 갈매기들을 토해낼 때마다/그가 멸치떼를 쫓아다녔는지
/오징어를 잡으러 다녔는지는/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과녁을 맞히려면 과녁 위를 겨냥하라1〉는/구절에 이르러 나는
/마구 흩어지고 있는 활자들을/애써 끌어 모아야 했다 그는/과녁
대신 자신의 다리를 찌른 듯이/한참을 절룩대다 앉았기 때문이다
/그가 유일하게 피워낼 수 있는 것은/솔기가 다 닳아 구지레해진
바지 주머니에서/떨리는 손으로 꺼내어 간신히 입에 문/〈장미〉
담배가 전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그의 성한 무릎 위에는 어린
계집 아이가/마지막 남은 영토를 지키듯 그렇게 매달려 있었고/
뒤돌아 노려본 창문의 하늘엔 새들이 잠시/내뱉아진 침으로 흘렀다
그의/두눈에선 독기오른 작살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기어이
나는 책을 떨어뜨리고 또 활자들은 모조리/바닥 위에 쏟아졌지만
한남, 옥수, 응봉/세 개의 海域을 지나는 동안 웬일인지 그의/시선은
바닥에 꽂혀 있었다/기침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크르릉대며 전철이
서고/혈흔 같은 그의 딸이 손도 잡아 주지 않는/아비의 발자국을
지우며 뒤따라 나간다/병들고 괴팍한 선장과 헤어졌으니/선원들의
불만 섞인 술렁임도 이제 더는 없으리/저 사내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인천 바다를 아주 떠나고 싶은 것일까/책을 주우며 무심코
올려다 본 전철의 천장은/묘하기도 하지, 궁륭 모양으로 부풀며/
제 흰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시간은 자정을 향해 조금씩 깊어
가는데/남겨진 사람들/출렁이는 물살에 이리저리 내몰리다가/
몇몇은 토해지고 몇몇은 그대로 잠이 든다/나는 가만히 책을
주웠다*(1에머슨)(이승수.고래)'
응모작을 다 읽어보면 더 잘 알겠지만, 일단 이 시만으로 볼 때 그는
수백개의 창문을 가진 화려한 저택 쯤 되는 것 같다. 매쓰게임을 하
듯이 그는 그가 원하는 대로 창의 불을 켜놓으며 마술을 부리리라.
(뭔말인지)
조정의 '이발소 그림'을 읽을 때 몇 달 전에 읽었던 책 <일상속의
미술-이발소 그림>(박석우,동연)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인사동이나 현대미술관과는 다른 용산이나 동두천 미군기지는 대한민
국의 몽마르트이다.백남준이나 이우환처럼 일본,유럽 예술계를 등에
업고 있는 국제적인 작가를 제외하고 외국인들에게 유명한 명화(?)의
산실은 '이발소 그림'들이 만들어지는 이곳 미군기지 근처이다. 그곳의
쟁이들은 정식 미술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 고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적으로 그림그리는 일을 전수받은 사람들이다. 미군들 특히 흑인들은
월급을 털어서 이곳에서 그림을 주문한다.그림의 주제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장례행렬이라고 한다. 또 사람들이 그냥
재미로 그려보는 혁필화라든지 그 밖의 대중적인 '이발소 미술'에 대해서
역사라든지 장르를 개략적으로 소개한다. 요즘은 중국 등지로 이러한 '이발소
그림'의 수출이 뜸해졌다고 한다.(주로 인건비 상승 때문)
우리의 생활 곳곳에 '만종' 등의 이발소 그림이 살아 숨쉬는데 대중문화가
화두인 오늘날에도 대중문화론에서조차 상론을 안하는 '이발소 그림'.조정
시인은 이러한 이발소 그림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풀은 한 번도 초록빛인 적이 없다 /새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해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치자꽃은 한 번도 치자나무에 꽃 핀
적이 없다 / 뒤통수에 수은이 드문드문 벗겨진 / 거울을 피해 /
나무들이 숨을 멈춘 채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중략)/삶이 나를 /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조정.이발소 그림처럼)
결국 이발소 그림은 지루하다는 것이다. 이발소 그림들은 모두 사실
주의적인 그림이다. 가령 드뷔페의 그림이 이발소에 걸려 있다면 면도
받는 사람은 짜증을 낼 것이다. 물론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희귀한 예외도
있지만. 마티스나 피카소의 그림도 알고 보면 키치이다. 최대의 키치예술은
베토벤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루하다는 것에 대해서 앙리 르페브르처럼
해박한 사람이 있을까? 현대의 일상성에 대해서 그는 한권의 책을 쓰고 또
여러편의 논문을 보탰지 않은가? 예술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꿈꾼다. 그러나
현대의 일상성 속에서 인간은 진선미의 모든 영역으로부터 소외받는다. 여기서
분열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적어도 시인은 될 수 없다.
방에 복제화를 걸어놓는 행위, 미술관에 가는 행위, 생활미술을 실천하는 행위,
피씨통신에 시를 쓰는 행위는 이러한 분열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하지만 그것은 물론 성취될 수 없는 꿈이다. 진정한
해방과 사물과의 합일은 기호들의 세계 속으로 해소되고 나는 영원한
교환가치의 회로를 겉돌뿐이다. 나는 볼 수 없다. 시인은 그것을 꿈으로
표현한다.
'나는 다시 잠에 들어 두 편의 꿈을 꾸었다/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고 /티베트 상인에게서 사온 테이블보를 들추고/
식탁 아래 몸을 구부렸다 /자꾸만 어디다 무엇을 흘리고 오는데/
목록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자동차를 타고 되짚어 가는
꿈은 유용하다 / 탱자나무 가시에 심장을 얹어두고 /돌아온 날도
/나는 엎드려 자며 하루를 보냈다'(같은 시)
여기서 꿈은 이발소 그림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다른 행의 명료한
비유법과는 달리 몇가지 전통적인 모호한 은유를 추가했을뿐이지만
여전히 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는다. 더욱이
'되짚어'도 갈 수 있는 조작가능성은 상품화된 꿈의 '유용성'을 암시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출근하지 않는 것이다. (김규진,집 속엔 길이 없다.) 김규진의
시는 장정일의 '쉬인'(또는 '조롱받는 시인') 계열의 자의식적인 시를
연상시킨다. 월부판매원의 수금을 피해 어쩔 주 몰라하던.(시인 조정도
구독도 안한 한국일보 구독료를 걱정하더라.)
21세기의 화두는 '미쳐나가는 시인'이다. (그리니치 천문대의 발표에
의하면 아직 20세기라고 한다.)
김규진 시인은 상술한 오늘의 상황을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한다.
'-우리 시대에 존재의 집은 철거되었다. / 가격의 단지(團地)가 서 있을
뿐이다.(집 -)'
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거부의 몸짓을 보인다.펑키하다.
'신발을 숨겨버리고 전화도 끊어 버리고 종일 집 속에서 뒹군다.' (집 - )
그리고 엄청난 진리를 폭로한다.
'행복했으리라 존재의 집마저 짓지 않았던 그들은.'(집- : 예수와
석가를 말한다.)
그러니까 그가 침거한 곳은 집이 아니라
'하루종일 수도꼭지로 마시고 솥과 냄비로 끓여내고 변기의
똥구멍으로 쏟아'(집 - )내는 비존재의 집이다. 그래서 그는 나그네만이
문을 열 수 있는 (문을 여는 행위가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56번
도로 내 가슴속에 영원히 포장되지 않은 길'을 나선다. 거기서 그가 만나는
것은
'악셀을 북북 밟으며 간신히 한 굽이 돌아 아, 보았다. / 끝도 없이 펼쳐진
연보라색 도라지꽃. / 비안개 속에서 수천, 수만의 길을 열고 있던 꽃무리들.
/ 하늘도 언덕도 뭉개버리고 비안개를 타고 놀며 저들끼리 축제를 벌이고 있던
꽃무리들. / 함께 비안개를 타고 놀며 교접의 뿌리마저 내던져 버리고 싶던
산비탈의 꽃무리들. /모든 길이 걸어 들어간 바닷가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발을
씻는다. / 넘어온 수많은 들과 산을 물위에 띄워 보내며 꽃잎처럼 하나 둘.'(집-)
라는 '바다의 밑바닥', 가슴속의 황야'이다.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술기운을 빌어 묘사된 '자연'치고는 꽃무리들의 풍경이 너무 평범하다.
격정이 언어를 넘어서면서 긴장이 풀어지는데도 전체적인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스토리가 이미지를 넘어서는 것을 심사위원들은 높이 평가할 것일까? 어쨌든 시인이
제시하는 '바다의 밑바닥'과 '가슴 속의 황야'는 재미없다. 출근 안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재미없는 데는 안가겠다.
최소한 그 흔한 이미지 조작도 안한 그런 꽃밭에 (나는 가지 안으리.)
오히려 그 부분에 나라면 최영신(우물)의 현란하고 어지럽고 뽕맞은 듯한 수사를
오려 붙이겠다. 나는 우물을 읽고 하재봉의 '안개와 강'의 현란하고 화려한 팬시를
연상했다. 만연체의 구사는 '시신경을 누'ㄹ러 버린다. 일주일의 금연 끝에 화장실에서
한대 피고 픽 쓰러질 듯한 그런 느낌이다. 이러저러한 나의 툴툴거림에 시인은 -
그래 다 알어 임마 - 하며 ('인적이 끊어지고 잡초만 무성타한들 그 아래 퍼올려지고
내려지던 환영들, 물그리메의 허사로 증말하는가')묻는다. 그녀의 생을
보여준다.
'그대 우물은 아직도 갈증의 덫에 걸려 있는가? '(우물)
알았어요 아줌마. 그러나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그러나
시인의 격정이나 연륜이 시인의 나르시즘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순간. 나는 늙어 버린다. 그런
말은 30년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세계는 생각보다 젊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고민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 나는 미쳐나가는 시인이
아니라 다른 시인을 보고 싶다. 술취해서 격정에 말도 잊어버리는 시인도 싫고, 은은한
해탈의 눈길과 잔소리를 보내는 꼰대도 싫다. 그렇다고 지루함 속에 매몰된 일상을
지루하게 나열하는 것도 짜증난다. 분열을 분열로 받아들이고 앗 무언가 이거다
하고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시인이 있다면 좋겠다. 그럼 정말 짝짝짝 박수도 치고
팬클럽도 만들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