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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뒤에 숨겨 놓은 것
-탈, 탈, 탈.
이른 새벽, 무언가 터는 소리에 리아는 눈을 떴다. 어젯밤 케스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든 것이었다. 리아는 돈도 내지 않고, 더군다나 여인의 침실에서 잤다는 생각에 잠시 얼굴이 빨개졌다가 계속해서 나는 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을 갈아입었는지 침대의 끄트머리에는 어제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걸려 있었다. 리아는 그것을 집어 들고 차곡차곡 개켜 침대 위에 얹어놓고는 자신의 머리 뒤에 끈이 꽉 묶여 있나 확인하고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약간 밝은 곳에서 소리가 계속 흘러 나왔다. 리아는 케스너가 확인시켜 주지 않은 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곳엔 이른 시각부터 팔 빵과 쿠키를 만들고 있는 케스너가 있었다. 리아는 말을 시키지 않고 조용히 그녀가 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과연 술을 마실 때가 그녀의 진짜 모습인지, 아니면 어제의 그 차분한 여성이 진짜 케스너의 모습인지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밀가루를 모두 그릇에 넣은 그녀는 보지도 않고 옆에 있던 계란 두 개를 집어 들더니 한 번에 깨서 그릇에 넣었다. 그리고 계란이 퍼지기 전에 바로 앞에 있는 기구를 집어 들고 휘젓기 시작하였다. 금세 밀가루와 계란이 합쳐졌다. 케스너는 이번에도 역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허리춤에 묶여 있는 하얀 천 안에서 소금과 설탕을 꺼내더니 아무렇게나 부어 넣기 시작했다. 리아는 수저나 어떤 기구에 넣어 재지도 않고 쏟아 붓는 그녀가 약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검지 손가락으로 반죽을 살짝 찔러 보더니 그것을 혀끝으로 맛을 보곤 미소를 지었다.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쟁반을 꺼내고선 옆에 있는 작은 틀을 꺼내어 귀여운 코끼리 모양으로 반죽을 찍어내었다. 순식간에 20여개의 코끼리 모양의 반죽이 완성되었다. 케스너가 허리를 구부리더니 아래쪽에서 어떤 통에 들어 있는 알록달록한 초콜릿 가루를 꺼내들었다. 그 중에서 검은 색 초콜릿을 꺼내더니 하나하나 코끼리의 눈 쪽에 붙여주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던 그녀는 빙긋 웃으며 그들에게 미소 짓는 입을 붙여주었다. 리아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쟁반은 뒤에 위치해 있던 오븐으로 들어갔고 그녀는 다시 다른 것을 만드는데 열중하였다.
- 턱.
이번엔 거대한 틀에 미리 만들어 놓았던 동그란 모양의 빵을 꺼내더니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생크림을 집어 들었다. 어디서 꺼내었는지 손에는 벌써 날카로운 작은 칼이 들려 있었다. 그 위에 크림을 살짝 얹더니 빵에 바르기 시작하였다. 크림을 살살 밀어 빵을 뒤덮었다. 깔끔하게 발라진 크림은 마치 언덕 위에 하얀 눈이 쌓인 것 같았다. 구멍에 모양이 있는 곳에 크림을 넣더니 빵 주위로 장식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별 모양의 크림이 조금씩 떨어졌고 노란색의 달 모양 초콜릿이 빵의 중심에 얹어졌다. 그리고 그 주위로 다시 알록달록한 별 모양의 초콜릿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도 아직 허전했는지 케스너는 딸기와 바나나, 그리고 사과를 꺼내더니 모양을 내어 깎았다. 칼놀림이 어찌나 신기했는지 리아는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빨간 딸기는 반으로 잘라 별 모양 크림 바로 옆에 붙어 있었고 바나나는 칼집을 내어 빵 위에 얹었다. 그리고 메론은 껍질을 살짝만 도려내어 아래를 별 모양으로 만들어 모양을 내었다. 그 후 가운데에 딸기 시럽으로 무슨 글씨를 쓰는 케스너였다. 케스너가 그것을 만들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몰래 자신이 케이크를 만들고 있던 것을 보고 있는 리아를 발견하고는 손짓을 하였다. 무언가 잘 못을 한 건 아니지만 몰래 보고 있었기에 리아는 들켰다는 생각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그에게 케이크를 건네주었다.
"자, 이거. 저기 바깥에다가 진열 좀 해줄래? 저기는 냉동시키는 곳이니깐 넣어 놔줘. 그래야만 시원하게 보관할 수 있으니깐. 시간이 된다면 유리도 좀 닦아주고."
바빠 보이는 케스너를 보며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케이크를 건네받았어도 여전히 그의 시선은 그녀의 빠르고, 화려하게 움직이는 손에 꽂혀 있었다. 도대체가 인간의 손놀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아무렇게나 만드는 것도 아니었고 모두 하나같이 예쁘고 맛있어 보였다. 길고 가는 막대 과자에 줄무늬를 넣어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과자 안에 갈은 초콜릿을 쑤셔 넣더니 아기 곰 모양의 초콜릿과 함께 케이크 위에 얹어 주었다. 마치 진짜 곰이 대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리아가 시선을 떼지 못 하는 것을 보자 케스너는 빙긋 웃더니 오븐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자마자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던져 주었다.
"왜? 그렇게 맛이 궁금해?"
리아는 자신의 손에 얹어진 코끼리 모양의 쿠키를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다가 긴 코끝을 조금 베어 물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바삭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고 무얼 넣었는지 달콤하고 상큼한 과일 맛이 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끝엔 짭짤한 소금 맛이 나기도 하였다. 도통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맛에 리아는 보랏빛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맛 봤으면 얼른 케이크 가져다 놔야지!"
그녀의 호통에 리아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들고 있는 케이크를 빤히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 예쁜 케이크를 어떻게 먹을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 먹을 것도 아니었는데도 괜히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예쁜 나머지 먹지 않고 썩히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케이크가 아깝기만 하였다. 맛있는 크림과 빵을 한 입도 대보지 못 하고 버린다는 것은 정말 아까웠다. 리아는 이렇게 자신과 전혀 관련 없는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어느 새 길거리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벌써 활동 할 시간이 된 것이었다.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케스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앞에 걸려 있던 뒤집어져 있는 사람 모양의 쿠키 간판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았다. 아마 개점을 했다는 뜻이리라 하고 리아는 짐작하였다. 그 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 딸랑.
귀엽게 만들어 놓은 고양이 모양의 종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개점하자마자 손님이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좋은 케스너의 가게였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케스너가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였다.
"오늘도 변함없네. 벌써 아침 일 하러 나가?"
"아유, 아침 일찍이라도 나가야 좋은 일거리가 잡힐지 아나."
"힘 내. 그래도 일주일 동안 한 번 정도는 잘 잡히잖아."
케스너가 빙긋 웃으며 일상처럼 대화를 하더니 언제 만들었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진갈색 커피를 하얀 컵에 담고 롤 케이크를 가지고 나왔다. 케스너와 반갑게 대화를 나누던 남성 역시 마치 일상과도 같이 그것들을 받아 들더니 먹기 시작하였다. 한 입 먹은 후 커피를 마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그 말을 들으면 어쩐지 리아, 자신 역시 마음이 흔들리고 울렸다.
"언제 먹어도 맛있네. 이러니깐 끊고 싶어도 끊을 수가 없지."
"어라? 여기 발길 끊으면 내 단골손님 한 명이 주는 거잖아. 안 돼."
케스너가 장난스럽게 말하더니 손을 탁탁 털며 하얀 천을 더욱 조여 맸다. 리아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가면이 순식간에 바뀌는 마술처럼 케스너의 표정은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 그녀의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취해 있는 그녀와 성숙한 여인, 그리고 포근한 이미지. 하지만 리아는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표정이 다양하다는 것은 감정이 풍부하다는 뜻과 같기 때문이었다. 롤 케이크를 다 먹은 후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던 남성이 리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선반 위에 쿠키가 담긴 분홍색 상자를 얹는 케스너에게 물었다.
"케스너, 이 아이는……?"
"아아? 생명의 은인이라고나 할까."
"또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생명의 은인을 두기까지 하셨을까."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키득거리며 말하자 케스너는 쿠키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지고 놀더니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리곤 그의 등을 떠밀며 바깥으로 내쫓았다. 다정한,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서로에게 거부감이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리아는 멍 하니 있었다. 부럽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였다. 그렇게 가만히 있던 리아가 신경 쓰였는지 케스너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하였다.
"할 거 없니? 꼬.마.아.가.씨?"
"강조하지 마세요. 할 게 딱히 있진 않아요."
"후훗, 귀엽지 않은 녀석. 음~ 그럼 오늘 하루만 나 좀 도와줄래? 오늘은 특별히 생일이나 다른 행사가 있는 집이 많아서 할 게 많거든. 네가 카운터 같은 거 좀 봐줄래? 일 잘하면 시간 당……음. 어쨌든 적당히 줄게. 하지 않을래?"
약간 얼버무리는 그녀를 보며 리아는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안 그래도 남의 집에서 돈도 내지 않고 숙박 했다는 것에 대해 갚을 방법이 없던 리아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그러겠다고 동의 하였다. 리아의 동의를 얻자마자 그녀는 자신의 침실로 뛰어 올라가더니 어디선가 하얀 셔츠와 타이를 준비해 왔다. 그리고 리아에게 건네주며 검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하듯 말하였다.
"항상 손님이 들어오면 인사를 해야 해. 뭐, 너는 귀엽고 예쁘니깐 살짝만 인사해 줘도 만족해 해 줄 거야. 가격은 쿠키는 무게에 따라 다르고 케이크는 다 일정해. 한 마디로 돈 계산은 쉬울 거란 얘기야."
"그것만 하면 되나요?"
"그럼."
리아가 되묻자 금세 낮던 목소리가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오고 표정도 온화해졌다.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스너는 다시 수 많은 케이크와 쿠키를 굽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종소리가 나더니 리아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들어왔다. 리아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보이며 잠시 기다리라는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잠시 어느 곳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타이를 꽉 묶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지 약간 여성용 같긴 했지만 크기에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군말 않는 리아였다.
"뭘 드릴까요?"
"케스너 누난 없나요?"
"지금 안에서 바삐 뭘 하고 계세요. 계산 같은 것은 제가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리아가 자신의 눈을 살짝 찌르는 긴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말하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리아를 보며 그 남자 아이는 약간 당황해 하더니 헛기침을 한 번 하곤 구석에 있는 쟁반을 집어 들었다. 상당한 양의 빵을 고르려는 생각 같았다. 리아의 예상대로 그는 처음부터 큰 빵을 집어 들더니 나중에는 수많은 토핑이 얹어진 빵을 쟁반에 얹었다. 덤으로 리아의 옆에 있던 초콜릿 쿠키를 약 10개 정도 넣었다.
"이, 이렇게 많이 사시게요?"
"돈은 될 거 에요. 얼만가요."
리아는 심히 무게가 걱정되는 그 양을 보며 저울에 얹어 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울에 표시된 숫자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양에 비해 훨씬 가벼웠다. 리아는 저울이 고장 났나 싶어 아래 있던 저울로 바꾸어 재 보았다. 하지만 어떤 저울을 쓰더라도 무게는 똑같았다. 그리고 여전히 가벼웠다. 남자 아이는 이미 계산을 할 기세로 돈을 손에 쥐고 있었다. 리아는 당황스러웠지만 작은 손바닥을 펴 그에게서 돈을 받았다.
"아, 안녕히 가세요."
돈을 내자마자 바람 같이 사라지는 소년을 뒤로 하고 리아는 다급하게 케스너에게 달려갔다. 케스너는 여전히 여러 가지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리아는 그 가벼운 무게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아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케스너 씨, 빵과 쿠키의 양에 비해 무게가 심각하게 가벼운데요? 저울이 전부 고장 난 건가요?"
"푸훗, 하하하하!"
그녀가 리아의 말을 듣더니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더니 동작을 멈추었다. 리아는 어리둥절하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약간 바보가 된 것 같은 생각에 리아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케스너는 완성된 케이크 하나를 가지고 나오며 저울을 살펴보았다. 지극히 평범한 저울이었다. 고장 난 흔적이라든지 부서진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리아가 보란듯이 쿠키와 빵 여러 개를 집어 저울에 얹었다. 저울에 얹자마자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던 바늘이 갑자기 주르륵, 낮은 숫자로 미끄러져 가듯 가서 멈춰 섰다.
"여기에 오는 손님들은 전부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돈을 강요 할 수 있겠어? 저울은 항상 일정한 곳을 가리키게 되어 있어. 그러니깐 걱정하지 마."
그런 것도 모르고 저울이 고장 났다고 생각했던 리아는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자신에게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는데도 겨우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 정도로 행동하는 케스너가 존경스러웠다. 또한 이 세상에 아직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였다. 험난하고 무서우며 정이 메말라 버린 곳이 아니었다.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케스너를 따라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리아 보다도 작은 여자 아이와 그 보다 더 작은 남자 아이가 손을 잡고 들어왔다. 귀여운 꼬마 손님을 보며 리아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키에 맞춰 다리를 구부렸다. 케스너 외의 다른 사람이 자신들에게 다가오자 약간 겁을 내며 뒤로 물러서던 두 아이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리아의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에 용기를 내었다. 아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은 것 같았다.
"뭘 사러 오셨나요?"
"쿠~키. 쿠~키."
남자아이가 리아의 등 뒤에 있는 선반을 가리키며 입술을 들썩였다. 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여자아이가 손가락으로 '쿠키'라고 손바닥에 쓰자 그제서야 알아채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분홍색 딸기크림의 모자를 쓰고 하얀 크림의 우산을 들고 있는 고양이 모양의 쿠키였다. 리아는 그것을 두 주먹 집어 봉지에 넣은 후 저울에 재는 시늉만 하곤 손을 내밀었다. 두 아이는 리아가 돈을 내라는 뜻으로 알고선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리아는 그들이 돈을 꺼내기도 전에 손을 거두더니 위아래로 주먹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안에는 한 눈에 보아도 맛있어 보이는 초록색의 동글동글한 사탕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 둘은 놀라는 한편 빨리 먹고 싶은 생각에 발을 동동 굴렀다. 리아는 그것을 잡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한 손으로 휙 던져 자신의 입으로 넣었다. 리아의 입속으로 사라진 사탕을 보며 남자아이가 먼저 울먹거렸다. 리아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벌려 사탕이 없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두 손가락을 튕기며 두 아이의 주머니를 각각 가리켰다. 리아가 가리키는 대로 그 둘은 손을 쑥 찔러 넣었다. 그러자 돈 이외의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돈이라고 치기엔 컸기 때문에 소녀는 주머니에서 쑤욱, 그것을 꺼내 보았다. 리아의 입속으로 떨어졌던 사탕이 어느 새 그들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와아."
"맛있게 먹어요."
리아가 봉지를 소녀의 손목에 걸어주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며 소녀가 따라 웃다가 자신이 들고 있던 사탕 껍질을 벗기더니 리아의 셔츠를 잡아 당겼다. 리아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눈과 소녀의 눈이 같은 위치에 도달했을 때 소녀는 조그만 손가락으로 리아의 입술을 쿡 찔렀다. 계속해서 찔러대는 소녀의 행동에 리아는 조용히 물었다.
"왜 그러……."
- 톡.
리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소녀는 자신이 깐 사탕을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흔들며 남자 아이의 손을 붙잡고 문을 활짝 열고 종종 걸음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리아는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향기와 아직도 입술에 묻어 있는 소녀의 온기를 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따뜻하였다.
"이야, 어린 아이한테 사탕도 얻어먹고. 좋겠네?"
"아, 아니요. 이건!"
"푸훗, 알아."
케스너가 어느 새 다른 고소한 빵을 만들어 가지고 나오며 입술을 만지고 있는 리아를 보며 짓궂게 말하였다. 그녀가 놀리는 바람에 당황하여 모르고 사탕을 으드득, 씹어 버리고 말았다. 조금 더 오랫동안 그 달콤함을 맛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끈적거리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느낌이 입에서 녹아 내렸다. 리아는 사탕이 모두 녹아내리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4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한 눈에 보아도 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와 그 옆을 지키는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내와 건장한 아들이었다.
"케스너, 우리 왔어요."
"어머나, 여전히 멋쟁이시네요. 할머니."
"아이구, 아들 놈이 잘 입혀주니깐 그렇지."
케스너가 넌지시 말을 던지자 할머니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흉해 보일 그 주름들이 어째서인지 그녀에겐 풍요롭고 화목함의 상징으로만 보였다. 그녀의 옆에 있던 아버지 역시 나이가 지긋하여 할머니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주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이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 보였다. 멀뚱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아는 다시 씁쓸한 기분과 함께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웃었던 것이 언제인지. 케스너는 오븐에 넣어두었던 빵이 다 익은 것을 보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그곳엔 리아와 네 가족만이 남아 있었다.
"케스너가 일손이 딸리는 모양이네. 아이를 고용하고."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케스너의 손맛과 친절함은 누구보다 뛰어나니깐 사람이 많은 거겠지. 그러니깐 일손이 부족할지도 몰라."
리아는 자신을 보고 얘기하는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아버지의 말이 그치자마자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뭘 찾으시나요?"
"오늘 할머니의 생신이어서 케이크하고 쿠키, 그리고 그 외에 것들 좀 사려고 왔습니다."
"케이크는 어떤 걸로 주문하셨나요?"
"저기에 있는 초콜릿 케이크로."
리아는 자신보다 약간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들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에 갈색 초콜릿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하트 모양의 케이크가 있었다. 초콜릿을 아무렇게나 뿌려서인지 왠지 모르게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리아는 그저 그들의 주문을 받았다. 케스너 답지 않게 깔끔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케이크를 들고 온 리아는 포장을 하기 위해 상자를 꺼내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부축을 하고 있던 여성이 리아의 손을 꼭 붙잡더니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푸근했는지 리아는 가슴과 입술이 떨릴 정도였다.
"여기서 먹고 갈 거 에요. 내버려 두세요."
"그러신가요? 초는 몇 개가 필요하세요?"
"큰 것 8개, 작은 것 6개."
그들의 주문에 리아는 케이크를 큰 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손끝이 케이크에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가져갔다. 리아가 케이크에 손을 대려 하자 아들로 여겨지는 남성이 그를 말리려 하였지만 다음 순간 벌어진 일에 행동을 멈추었다.
- 사르륵, 화악!
리아가 케이크 위로 손을 휘젓자 금세 14개의 초에 불이 붙은 채로 꽂혀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맞춰 놓기라도 했던 것처럼 조금이라도 빗나간 곳은 보이지 않았다. 리아의 갑작스럽고도 놀라운 행동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리아가 손짓으로 할머니에게 불기를 권하였다. 할머니는 검은 눈동자로 리아를 바라보다가 '후' 하고 한 번에 초를 꺼 버렸다. 불이 꺼진 후 리아는 그들이 주문했던 나머지 쿠키와 빵, 그리고 포크를 가져왔다. 리아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인사를 한 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 하자 할머니가 그를 불러 세우더니 그녀의 옆에 앉혔다.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고 하지? 자, 먹어보렴."
"아니요, 괜찮습니다. 초면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신에 끼어들 순 없습니다."
리아는 거듭 거절해 보았지만 할머니 역시 쉽게 그를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리아는 옆에 있던 단단하고 네모난 쿠키를 하나 집어 들고 그들의 옆에 앉았다. 할머니의 옆에서 수중을 들던 여성이 리아가 쿠키를 먹으며 케이크를 바라보자 안에 있는 케스너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그에게 말하였다.
"케이크가 약간 지저분해 보이죠?"
"아, 네……."
"이건 저희가 특별히 케스너에게 주문한 거 에요."
"아니, 특별히 주문을 하신 거라면 좋은 것으로 하시지 왜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하셨나요?"
리아는 이 즐거운 날 왜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특별하고 예쁜 케이크라면 기분이 더 좋을 것인데. 케스너의 모습이 창으로 보이지 않자 여성은 리아를 가까이 오라고 한 후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찌나 조심스럽고 작았는지 겨우 알아 들을 정도였다.
"케이크를 먹어 보세요."
그녀의 명령에 리아는 쿠키로 케이크의 한 부분을 푹 찔러 먹었다. 그는 케이크를 입에 넣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맛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루 동안 먹어 본 케스너의 모든 음식들은 맛있었다. 그러나 그가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은 맛 때문이 아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아무렇게나 뿌려진 초콜릿 시럽 안에는 빨간 딸기를 갈아 폭신폭신하고 부드럽게 만든 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초콜릿은 겉모양에 불과하였다. 가족들이 모두 겉을 먹고 나자 안은 새빨간 하트 모양의 케이크였다.
"이건 도대체……."
"저희는 케스너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살고 있었어요. 오래 전에 먼 나라에서 어렸을 적부터 가족을 잃었다고 하네요. 부모님이 안 계셔서인지 완전히 제멋대로에 말괄량이였지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남달리 문제를 많이 일으켰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 리아는 마음이 쓰라린 한 편 의아하기만 하였다. 어떻게 그 말괄량이가 저토록 맛있는 빵과 쿠키를 만들 수 있단 말인지. 리아의 마음을 읽었던 것인지 여성은 포크로 붉은 케이크를 한 번 푹 찌르더니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부모님이 없었기 때문에 물건을 살 돈이 없었지요. 그러니 빵 한 조각 먹을 수도 없겠지요? 그런 그녀가 배고픔에 굶주려 허덕이고 있을 때 따뜻한 빵을 내 주었던 분이 계셨어요. 바로 이 제과제빵 점의 주인이었지요."
"케스너 씨는 이곳의 원래 주인이 아니었군요."
"그렇지요. 그에게서 받은 빵은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맛이 되었지요. 부모님이 없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음식을 내주었던 사람이니깐요. 그렇게 해서 케스너는 그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리고……그는 케스너가 성인이 되고 본격적인 제과제빵사로 인정하기 더없이 깨끗하고 하얀 천을 구하러 바깥으로 나갔지요. 하지만 그는 하얀 천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그것도 바로 이 집 앞에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어요."
비극은 좋아하지 않았다. 리아는 마지막 '살해'라는 단어에서 숨이 멎는 듯하였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리아는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역시 감정을 억누르기란 무엇보다 힘들었다. 길게 자란 앞머리를 쭉 잡아 당겼다. 한 쪽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보랏빛 눈동자가 머리칼에 가렸다. 그 검은 머리칼 사이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렇게 케스너는 부모님보다도 더 한 존재를 잃어 슬픔에 잠겼어요. 케스너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요? 아니, 술을 마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녀는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녀는 술을 좋아하는 척을 하는 거 에요. 그는 술을 매우 좋아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녀는 술을 마시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그와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마시는 거 에요."
"그, 그렇군요……."
"이 얘기를 한 이유는 바로 이 케이크 때문이지요. 저는 항상 무언가 축하할 일이 있으면 그녀에게 부탁해요. 당신이 처음 만든 케이크를 달라고 하지요. 이것이 바로 그거에요. 그를 위해 만든 케이크. 겉은 충격의 도가니에 휩싸인 그녀의 마음을 뜻하지요, 그리고 안에 있는 붉은 빵은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케이크는 더 이상 접시 위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맛있게 먹어준 덕분이었다. 이 즐거운 생일 파티가 끝나자 케스너는 안에서 다른 파이를 가지고 나왔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가 어쩐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리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에 제발 빨리 밤이 찾아왔으면 하였다. 그는 만났다. 자신과 같은,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행복이라는 가면으로 위장하고 있는 또 한 명의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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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하는 아이는 매 주 일요일에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첫댓글 케스너 행복한 여자일거같았는데... > < 마음속에는 깊이 간직한 추억과 슬픔이 ,,,,, 있었네요 ㅜㅜ
누구든 하나 쯤 그런게 있지 않을까요~?ㅎ 감사합니다 :)
아,, 잘 보고 가요, 조만간 사람 이름좀 잘 외워야죠,, 너무헷갈려요,ㅠㅠ
네에, 잘 외워주세요(?) 그리고 정말 감사드려요~ㅎ
의외의 슬픔을 가진 케스너, 그리고 그녀와 비슷한 과거를 가진 리아인가요??ㅎ 담편이 기대되요~ 둘이서 같이 가게 꾸려나가면 더 번창할것 같고.. 돈도 더 많을텐데!!+0+
둘이 뭉치면...금전 문제는 해결인가요 :) 감사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