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안도성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듣고 문득 마음이 밝아져 안도성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안도성이 말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 동빙무산에서 오조 홍인대사님을 예배하였는데 그곳의 문하생이 천 명이 넘는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대사께서 승려와 속인들에게 이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라고 하였다. 혜능은 안도성에게 은 100냥을 보시받아 어머니께 드리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대사를 예배하였다.
홍인대사께서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느냐? 또 내게서 새삼스레 구하려는게 무엇이냐?"
하니 혜능이 말했다.
"제자는 영남사람인데 지금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하려 할 뿐입니다."
"너는 영남사람이요,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홍인대사는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좌우에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것을 보고 더 말하지 않고 그를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혜능은 한 행자승이 이끄는대로 방앗간에 가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었다.
하루는 홍인대사께서 문하생들을 다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각기 반야의 지혜를 써서 게송 한 수씩을 지어 나에게 가져오거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을 보고 만약 큰 뜻을 깨친 자가 있으면 그에게 가사와 법을 부촉하여 육대 조사가 되게 하리라."
사람들은 물러나와 의논했다.
"신수(神秀) 화상은 우리들 중의 대사형이므로 굳이 우리들이 게송을 지어 큰스님에게 바칠 필요가 없다. 신수 사형이 법을 얻은 후에 육조가 되면 되지 않겠는가?"
신수는 혜능보다 먼저 오조 홍인의 문하로 들어와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사람으로 혜능에게는 대선배라 할 수 있다. 신수는 이것을 알고 심한 부담감을 느껴 번민을 하다가 사람들이 다 잠이 든 삼경(三更)에 남쪽의 복도에 몰래 게송을 적었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몸은 보리의 나무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나니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티끌과 먼지 않게끔 말지니라.
오조 홍인대사는 아침에 게송을 보고 신수가 쓴 것임을 즉각 알아보고 신수에게 말했다.
"네가 지은 이 게송은 소견(所見)은 당도했으나 다만 문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범부들이 이 게송에 의지하여 수행을 하면 삼악도에 떨어짐은 면하리라."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고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혜능이 그것을 들었다. 혜능은 한 번만 듣고도 단번에 이 게송이 큰 뜻을 알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은 본래 글을 쓰지 못하는지라 그 동자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읊는 게송을 복도에 쓰게 했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니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묻으리오.
오조 대사께서 이 게송을 보시고는 흡족하셨지만 대중들이 시기를 할까 염려하여,
“이것도 견성구(見性句)가 아니다.”
하면서 그 게송을 지워 버렸다. 나중에 아무도 모르게 혜능이 방아를 찧고 있는 곳을 찾아가서,
“방아는 다 찧었느냐?”
하고 한 마디 말을 거니,
“방아는 찧은 지가 오래됩니다만 아직 택미(擇米)를 못했습니다.”
라고 혜능이 답을 했다. 그래서 오조 대사는 주장자로 방앗대를 세 번 치고는 돌아와 버렸다. 삼경(三更)이 되면 아무도 몰래 찾아오라는 신호였다.
그래서 밤중에 혜능이 방으로 찾아 들어오니, 오조 대사께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가사(袈裟)를 가지고 휘장을 쳐서 은밀하게 금강경을 설하는데,
‘응당히 주(住)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하는 여기에 여지없이 대오(大悟)를 했다.
하기자성본자청정(何期自性本自淸淨)
하기자성본불생멸(何期自性本不生滅)
하기자성본자구족(何期自性本自具足)
하기자성본무동요(何期自性本無動搖)
하기자성능생만법(何期自性能生萬法)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이 본래 만법이 구족함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이 본래 동요도 없는 줄 어찌 알았으며
자성을 좇아 만법이 나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요.
이렇게 게송을 지어 바치니 여기에서 오조(五祖) 선사께서는 혜능이 크게 깨달은 것을 아시고 의발(衣鉢)을 전(傳)하여 육대조(六代祖)로 봉(封)하셨다.
법을 전해 받은 육조혜능대사께서는 시절 인연이 도래하여 납자들을 제접하면서 어느날 법문을 하시기를.
“나에게 가사 한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는 땅을 받치고 밝기로는 일월(日月)보다도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검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되 일상 동용(日常動用) 중에, 가고 오고 말하는 가운데 쓰고 있으면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 무엇인고?”
이렇게 물으니 하택 신회(荷澤神會) 스님이 일어나서 답을 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라고 답하니, 육조 대사께서,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고 했는데 함부로 제불(諸佛)의 본성이며 신회의 불성이라 하느냐! 너는 장차 출세(出世)를 하더라도 지해(知解)의 종도(宗徒)밖에는 못 되리라.”
하고 호통을 쳤다.
그 후 7년 만에 회양(懷讓) 선사가 찾아와서 답하기를,
“설사 일물(一物)[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
하니, 육조 선사가 말씀하셨다.
“그러면 닦아 증득(證得)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아니하나 오염될 순 없습니다.”
육조혜능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이 오염되지 않음은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시는 바라 네가 벌써 이러하고 나도 또한 이러하니라.”
하니, 흡족하시어 제자로 봉(封)하셨다.
제79조 진제법원 대선사(제33조 육조혜능대사의 현신)
선사께서는 경남 남해 삼동면에서 출생하시어, 20세 되던 해인 1954년 정월에 출가하셨습니다. 불공(佛供) 드리러 절에 자주 다니던 친척을 따라서 동네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던 해관암(海觀庵)이라는 조그마한 사찰에 우연히 가셨다가, 조계종 초대 종정이셨던 설석우(薛石友) 선사를 친견한 것이 출가의 인연이 되셨습니다. 석우 선사께서 스님을 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생활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값진 생활이 있으니, 그대가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무엇이 그리 값진 생활입니까?" "범부(凡夫)가 위대한 부처가 되는 법이 있네.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수행의 길을 가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스님께서는 몇 일간 해관암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생활을 유심히 살펴보시게 되었는데 세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청정한 수행생활을 하는 스님들의 삶에 큰 환희를 느껴 그길로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허락을 얻은 후 출가하시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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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조그마한 암자에서 시작된 행자 수업(行者修業)은 큰스님 시봉에다가 공양주 소임, 나무를 해오고 채소를 가꾸는 등 해야 할 일들이 종일 연속이었습니다. 그러한 행자 생활을 6~7개월 한 뒤 하안거(夏安居) 해제일(解制日)이 되어 제방 선방에 다니면서 십여 년간 수행해오던 선객 스님 몇 분이 석우 선사께 인사드리러 왔다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석우 선사께서는, "오늘 내가 자네들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 보게. 옛날 중국의 삼한(三漢) 시절에는 글자 운자(韻字) 하나를 잘 놓음으로 인해서 과거에 급제하던 때가 있었네. 이것은 그 당시 시험에 나왔던 문제인데, '일출동방대소(日出東方大笑), 즉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크게 웃는 모습이 어떠하더라.' 하는 이 글귀에 운자 하나를 놓아보게." 하시고는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은 나 '아(我)'자를 놓아서 재상에 등용되었는데 자네들은 어떤 자(字)를 놓아보겠는가?"
선객 스님들 중에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자 석우 선사께서는 신출내기 행자였던 진제 스님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네가 한마디 일러보아라." 이에 스님께서 대뜸 답하셨습니다. "저는 없을 '무(無)'자를 놓겠습니다." 해가 동쪽 하늘에 떠올라 밝은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지만 그 모습에는 호리(豪釐)의 상(相)도 없다는 뜻으로 '무(無)'자를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석우 선사께서는, "행자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시며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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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관암에서 열 달 가량 지내신 뒤 석우 선사께서 해인사 선방 조실스님으로 가시게 되자, 스님 역시 해인사로 가서 사미계를 받고 강원(講院)에서 경전(經典)을 익히셨습니다. 그 후 다시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동화사로 가시게 되었던 석우 선사의 부름을 받고 동화사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석우 선사를 시봉하던 중에 한 번은 대중스님 이십여 분과 함께 팔공산 상봉을 오르셨다가, 우연히 빈 토굴을 발견하고 대중스님 몇 분과 함께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고 돌아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석우 선사께서는 당장에,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온갖 것을 다 하려고 든다." 하시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참학의지(參學意志)로 가득 차있던 스님의 심중을 간파하시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화두를 주셨습니다.
그 후 스님께서는 동화사를 떠나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에 오르셨는데, 그때가 스님의 세수 24세였습니다. 처음 머무르셨던 곳은 태백산에 위치한 동암(東庵)이라는 한 작은 암자였습니다. 모든 반연(攀緣)을 끊고 단신(單身)으로 각고정진(刻苦精進) 해보겠다는 각오로 그 빈 암자를 택하여 자잘한 피감자로 하루 세 끼를 때우면서 정진생활을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두 달을 지내셨는데 마침 그 밑에 있는 큰 절 각화사의 주지를 맡게 된 도반스님이 와서 보고는 하루 세 끼 끼니 꺼리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어려운 생활을 걱정하여 함께 내려가자고 자꾸만 청하는 바람에 다시 바랑을 짊어지고 선산 도리사(桃李寺)로 옮겨가셨습니다. 도리사에서 일고여덟 분의 수좌스님들과 여법(如法)히 정진하시면서 동안거 한 철을 나시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견성(見性)해야겠다는 일념에 마음이 달아, 오로지 정진에만 힘을 쏟으셨습니다. 저녁 9시에 방선(放禪)하면 대중들이 다 잠들기를 기다리셨다가 살며시 혼자 일어나 두어 시간 더 정진하시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빈틈없는 수행생활을 하신지 두 달이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참선 도중에 반짝 떠오르는 조그만 지견(知見)을 가지고서 '알았다'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참구하던 것을 다 놓아버리고는 해제일만 기다리셨는데 해제하면 가서 점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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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석우 선사께서 열반(涅槃)에 드셨다는 부고가 날아와서 동화사로 가 다비(茶毘)를 치르셨습니다. 그 후 경남 월내(月內) 묘관음사(妙觀音寺)에 주석하시고 계시던 향곡(香谷)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향곡 선사는 대뜸, "일러도 삼십방(三十棒)이요 이르지 못해도 삼십방이니, 어떻게 하려느냐?"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시자 향곡 선사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남전(南泉) 선사의 '참묘(斬猫) 법문'에 조주(趙州) 선사께서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가신 것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보아라." 스님께서는 그 물음에도 답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알았다'고 자신만만해 있었는데 그만 여지없이 방망이를 맞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스님께서도 선지식(善知識)에 대한 신(信)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때라 자신의 생각을 쉽게 놓아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방(諸方)을 행각(行脚)하시면서 당시 선지식으로 이름이 나있던 고승(高僧)들을 거의 모두 참방(參訪) 해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선지식은 아니라고 하시지만, 또 어느 선지식은 긍정하는 듯이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모두 한결같이 불긍(不肯)했었더라면 직하(直下)에 '알았다'는 망념(妄念)을 놓아버리시고 다시 참학인(參學人)의 자세로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탓에 '너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하는 잘못된 인식이 박혀 2년여 세월을 어정쩡하게 허비해 버리셨습니다.
그러다가 26세 때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冬安居) 정진을 하시던 어느 날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는 마루 끝에 앉아 자신을 반조(返照)해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인(古人)들과 같이 당당하여 낱낱의 법문을 확연명백하게 아는가? 누가와서 묻는다고 하더라도 의기당당(意氣堂堂)하고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답을 할 수 있는 그러한 혜안(慧眼)이 열렸는가?' 하고 스스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대답은 여지없이 부정이었습니다.
'도둑을 잘못알아 자식으로 삼고 돌덩어리를 금으로 삼는다면 결국 내 손해가 아니겠는가?' 하며 거짓에 사로잡혀 허송세월 해왔던 자신을 반성하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잘못된 소견(所見)을 놓아버리고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리라는 결심이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밝은 선지식을 의지하여 공부해야만 한다는 인식을 분명히 갖게 되었습니다.
선사께서 제방 선지식들을 참방(參訪)하시던 과정에서 향곡 선사만은 제방의 다른 선지식들이 쓰지 못하는 '언하(言下)에 흑백을 분명히 가려내는 법(法)'을 쓰시던 것을 보셨기 때문에 향곡 선사에게 의지하여 스승으로 삼고 공부를 하시기로 마음을 정하고 해제하자마자 향곡 선사 회상을 찾아가시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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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께 예배드리며,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스님을 의지해서 공부하려고 왔습니다." 하시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이 심오하고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대도(大道)를 네가 어찌 해결할 수 있겠느냐?" "신명(身命)을 다 바쳐서 해보겠습니다." 라고 스님께서 대답하니 향곡 선사께서 새로 '향엄상수화' 화두를 주셨습니다.
※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 어떤 사람이 아주 높은 나무 위에서 입으로 나무가지를 물고 손으로 가지를 잡거나 발로 가지를 밟지도 않고 매달려 있을 때, 나무 밑에서 어떤 사람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었다. 답하지 않으면 묻는 이의 뜻에 어긋나고, 만약 대답한다면 수십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자기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해야겠느냐?
이 화두를 들고 2년여 동안 신고(辛苦)하셨습니다. 결제와 해제를 상관하지 않고 일체 산문출입(山門出入)을 하지 않으시면서 화두 참구 외에는 그 어떤한 것도 용납하지 않고 궁구(窮究)하셨던 것입니다.
화두일념으로 두문불출하고 정진을 하셨는데 28세 때 되던 어느 날, 새벽 예불을 드리러 법당에 올라가시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일어서는 찰나에 화두가 타파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종전의 동문서답(東問西答)하던 미(迷)함이 걷혀지고 비로소 진리의 세계에 문답의 길이 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오도송을 지어 향곡 선사께 바치시기를,
這箇拄杖幾人會 (자개주장기인회) .......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三世諸佛總不識 (삼세제불총불식) .......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함이로다. 一條拄杖化金龍 (일조주장화금룡) .......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빛 용으로 화해서 應化無邊任自在 (응화무변임자재) ....... 한량없는 용의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이에 향곡 선사께서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너 문득 금시조(金翅鳥:용을 잡아먹고 사는 전설의 새)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려느냐?" "몸을 움츠리고 당황해서 뒤로 세 걸음 물러가겠습니다[屈節當胸退身三步]." 라고 답을 하자 향곡선사께서, "옳고 옳다."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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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송고백측(頌古百則)으로 유명한 설두(雪竇) 선사께서도 다른 공안(公案)에는 다 확연명백하셨으나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공안에 막혀 다시 20년을 참구하셨는데, 스님도 이 공안에는 막혔습니다.
※ 일면불 월면불(一面佛月面佛) : 하루는 마조 선사에게 원주(院主)가 아침에 문안(問安)을 드리며, “밤새 존후(尊候)가 어떠하십니까?” 하니, 마조 선사가 “일면불(一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공안(公案). 일면불은 수명이 1천8백세지만 월면불은 불과 일일일야(一日一夜)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구하여 5년여 동안 온갖 전력(全力)을 다 쏟다가 해결하니, 마침내 고인들께서 중중(重重)으로 베풀어 놓으신 온갖 차별법문(差別法門)에 걸림이 없이 상통되었습니다. 오도송을 읊으시기를,
一棒打倒毘盧頂 (일봉타도비로정) ....... 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정상 무너지고 一喝抹却千萬則 (일할말각천만측) ....... 벽력같은 일 할에 천만 갈등 흔적없네 二間茅庵伸脚臥 (이간모암신각와) ....... 두 칸 토굴에 다리펴고 누웠으니 海上淸風萬古新 (해상청풍만고신) .......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그 후 스님의 세수 33세이던 1967년 정미년(丁未年) 하안거 해제법회일에 월내 묘관음사 법당에서 향곡 선사께서 법문을 하시기 위해 상당(上堂)하시어 묵좌(默坐)하고 계시는데 스님이 나와 여쭈었습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을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선사님께서 일러 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그것은 불조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이에 스님이 아무 말 없이 예배드리고 물러가니,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법상에서 내려오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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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위의를 갖추고 다시 선사님을 찾아가 여쭙기를,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입니까?" 하니, 향곡 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師姑元來女人做]" 그러자 스님이, "오늘에야 비로소 선사님을 친견했습니다." 하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關)!" 스님이 이렇게 답하자, 향곡 선사께서 "옳고, 옳다." 하시며, 태고 보우 선사로부터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이어져온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을 부촉하시고 '진제(眞際)'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를 내리셨습니다.
付眞際法遠丈室 (부진제법원장실) ....... 진제 법원 장실에 부치노라
佛祖大活句 (불조대활구) .......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無傳亦無受 (무전역무수) .......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今付活句時 (금부활구시) .......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收放任自在 (수방임자재) .......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 뜻에 맡기노라.
그 후 1971년에 해운대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장수산 기슭에 해운정사(海雲精寺)를 창건하시고 상·하선원(上·下禪院)을 개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최상의 진리인 선법(禪法)이 많은 사람에게 널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시변(市邊)에다가 선원을 세워 선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주창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40년 이상 회상(會上)을 열고 계시는 것은 지음자(知音者)를 만나 부처님의 최상승법인 임제정맥의 법등을 부촉하시기 위함입니다. |
첫댓글 _()_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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