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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史 원문보기 글쓴이: 퀼라비아노스
1. 서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로 이탈리아 내에서의 문화의 발전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 내에 여러 신생 소국들이 탄생하였다.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였지만, 동로마 제국인 비잔티움(Byzantium)은 큰 위기에도 불구하고 천년 동안 지속되었다. 비잔틴은 주변 세계들(페르시아, 아라비아)과의 관계에서 탁월한 외교 자세와 기술을 발전시켰다
비잔티움의 외교는 13세기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더욱 더 진보하게 되었다. 그 까닭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외교를 배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공화국이 외교와 외교 제도를 훨씬 더 정교화ㆍ체계화하였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의 외교는 그 주변 국가들로 확산되었고, 현대 외교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거친 베네치아의 해상 무역의 활약사에 대해 논하기로 하겠다.
2. 본론
중세와 근세 사이(14-16세기)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역사 시기와 그 시대에 일어난 문화 운동으로서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헬라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고대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 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암흑 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암흑 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 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볼테르는 14-15세기의 이탈리아에 학문과 예술이 부활했음을 지적했으며, J.미슐레는 16세기의 유럽을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대라고 하여 처음으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문화는 시대와 사회를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다. 곧 시대와 사회가 변천하면 문화도 변하게 마련이다. 중세의 약 1000년 동안 유럽 문화의 중심은 그리스도교였다. 따라서 중세의 문화는 교회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십자군 원정 이후, 중세 사회를 지배해 오던 교권이 흔들리고 상공업이 발달하여 시대의 변천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상공업의 발달은 도시의 발달을 촉진하여 시민 생활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에 시민들 사이에서 더 새롭고 인간다운 문화를 요구하는 기운이 움텄다. 인간다운 문화에 대한 요구는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고대 헬라스와 로마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문화의 새 기운을 르네상스(문예 부흥)이라고 하고, 르네상스 운동을 일으킨 학자들을 인문주의자라고 한다. 르네상스는 재생, 부활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 즉 인간 중심의 문화를 재생하고 부활시킨다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고전 문화는 중세 후반에 그 일부가 사라센으로부터 전해졌으나 그것은 그리스도교 도그마의 테두리 안에서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봉건 사회가 무너지고 도시와 시민 계급이 성장하여 절대적 국가가 일어남과 동시에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 15-16세기에 걸쳐 전 유럽에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신(神) 중심이던 중세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문화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1) 르네상스의 역사적 배경
르네상스는 다면적인 복잡한 국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간단히 개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대한 논의는 이탈리아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다른 곳으로까지 파급된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이래 오랜 역사가 축적되어 온 곳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혜택으로 이슬람 세계 및 비잔티움 제국과의 접촉을 항상 유지하여, 이들과 서유럽을 연결시키는 소임을 맡아 왔다.
특히 11-12세기의 상업의 부활과 십자군 원정의 참여를 통하여 도시가 활성화 하기 시작하였고, 12세기에는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 도시로 조직되었다. 이들 자치 도시들은 주위의 농촌 지대도 지배하여 도시 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또, 기존 봉건 귀족층과 토지 소유자 계층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도시의 경제 활동과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13세기 후반의 경제적 발전기에는 사회 계층의 변화도 심하여, 상인의 현실적인 감각이 사회의 모든 면에 침투함으로써 이탈리아 특유의 시민 문화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인 조건과 상업상 교류의 필요에 따라, 이슬람과 비잔틴 문화와의 접촉 가능성이 가장 많았고, 또 실제로 그런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전통 면에서도 스콜라 철학으로 대표되는 서유럽 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와는 달리 그들 나름의 독자적 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이들의 정치는 도시 국가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헬라스-로마의 고대 문화 역시 도시 국가에서 발생ㆍ발전한 것이었다.
물론 고대의 도시 국가와 이탈리아의 코무네(자치 도시)와는 사회적인 기초 구조에서 크게 다르지만, 형태 등의 면에는 공통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과 정치 이론이 코무네에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와 같이 특수한 사회 구조와 독자의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잔티움과 이슬람 문화권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코무네가 르네상스 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또 가장 활발하였다. 십자군 원정 후, 이탈리아는 해상 무역으로 상공업과 화폐 경제가 발달하여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등의 도시 국가들이 번영하였다.
상공업의 발달로 생활은 윤택해지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자유로운 창조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각 도시 국가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서로 경쟁하였다. 그리하여 도시의 군주와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보전하기 위해 축적된 부를 학문과 예술에 바쳤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는 이 시대에 학문과 예술을 장려한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또한 일찍부터 비잔틴 문화와 접촉하고 있었던 이탈리아에는 1453년에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자 많은 제국의 학자들이 헬라스 고전을 가지고 망명해 왔다. 그들을 중심으로 헬라스 고전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르네상스 기운은 무르익었다.
문예 부흥기에는 미술에서도 새 경향이 나타났다. 미술가들은 미술의 소재를 인간에서 구하여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종교화도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화풍은 중세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경향이었다.
이탈리아의 문예 부흥은 미술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여 뛰어난 미술가가 많이 나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이 세 사람은 당대의 천재 미술가로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은 16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에스파냐, 영국 등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로 번져 나가 나라마다 독특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3) 이탈리아가 르네상스를 선도한 이유
이탈리아가 르네상스를 선도한 이유는, 우선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이전에 봉건 제도가 쇠퇴하고 도시 상인들이 세력을 장악한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지리적 위치로 인해 십자군 원정기에 항구 도시들, 예컨대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등이 발전하였고 또한 동양과 서양을 이어 주는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다는 점에 있다.
무역에 의해 큰 세력을 키운 도시들과 그 지배층인 상인들이 바로 르네상스를 가능케 하였다. 물론 이들 외에도 이탈리아가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많은 옛 유물을 간직하였고 비잔틴,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알프스 이북 유럽 지역에 비하여 가깝게 받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래서 자유의 정신이 강하고 봉건적 굴레가 비교적 약하였던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정신은 먼저 자랄 수 있었고 이 정신이 곧 르네상스 정신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가장 근본적 이유는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는 전 유럽에서 도시가 가장 발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귀족 계급은 부유한 상인 계급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많은 도시 거주 귀족들은 금융이나 상업에 종사했고, 수많은 부유한 상인 가문들은 앞다투어 귀족 계급의 예법을 모방했으며, 14세기와 15세기에 이르러서는 귀족 계급과 상류 부르주아 계급을 구별하기가 매우 모호해졌다. 그러나 프랑스나 독일의 경우 귀족들은 그들의 영지로부터 얻어지는 수입으로 생활했고,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부르주아)은 상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가 지적ㆍ예술적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전 시대에 대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부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경제는 14-15세기 보다 13세기에 더욱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이탈리아는 유럽의 여타 지역에 비해 한층 부유했다.
이런 사실은 이탈리아의 저술가와 예술가들이 외국에 나가 일감을 찾기보다는 고국에 머물기를 더 좋아했음을 뜻한다.
더욱이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에서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고 부가 편중된 결과, 문화에 대한 투자가 이례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에 의하면 도시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문화에 대한 후원이 강화된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1240년 경부터 1400년 경 또는 1450년 경까지였고 그 후로는 거의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후원이 이루어졌다.
(4)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한계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성을 존중하고 개성을 강조하였지만, 르네상스 운동이 뿌리내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는 노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교황이나 세속 군주의 보호 아래 만족하고 있었다.
교황과 세속 군주도 자기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사회 개혁을 원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문예 부흥을 자기들의 권세를 장식하는 데 이용하였다. 결국 르네상스 문화는 일반 민중 사이에 널리 퍼지지 못하고 일부 지식층과 상류 사회의 교양과 취미에 그쳤다.
르네상스 운동의 선구 역할을 한 이탈리아는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정치ㆍ경제적으로 반목과 대립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의 침입을 받아 도시가 황폐해졌다.
게다가 지리상의 발견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로 넘어가자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쇠퇴 요인으로는 1494년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입으로 200여 년 동안 영광스러운 시기를 누렸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1550년 경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이러한 쇠퇴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원인은 1494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침략과 그 후에 계속된 전쟁일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경제적 쇠퇴, 정치적인 재앙과 더불어 경제도 기울어 갔다. 이탈리아는 15세기에 아시아와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고, 그것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가 자라는 데 중요한 경제적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1500년경의 지리상의 발견으로 통상로 가 지중해로부터 대서양 지역으로 서서히 옮겨감에 따라 이탈리아는 세계 교역의 중심지로서의 우월한 지위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빼앗기게 되었다. 또한 16세기의 끊임없는 전쟁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고, 에스파냐가 밀라노와 나폴리의 재정을 고갈시킨 까닭에 예술을 후원할 여유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공화국들과 그 지배자들은 근대 외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이탈리아 공화국들 가운데 가장 번창했던 베네치아는 비잔티움의 외교 제도를 정교화 하였다. 이탈리아 공화국들 사이의 외교 관행은 현대 외교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16세기에 들면서 이탈리아 공화국들보다 더 강하고 집중화 된 영토 국가들이 서서히 서유럽에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군주가 지배한 절대주의 국가들은 그리스도교 왕국에 대항하여 대내외적으로 주권을 주장하였고, 중세적인 유럽 통일 국가는 단지 이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외교 제도와 기술을 대부분의 유럽의 절대주의 국가들이 도입하였다. 16세기경 유럽 국가들 사이의 외교망이 형성되었다. 주권 국가들로 분리된 새로운 근대 유럽 체계에서 현대 외교가 구체화 되었던 것이다.
(5) 바다의 여왕 베네치아
그런 이탈리아에 있던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지형학상 가장 특이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찬란한 역사, 도시 구조상의 특이함, 그림같이 아름다운 미관은 베네치아만이 갖고 있는 독창적인 성격이다.
베네치아는 5세기 중엽 외적의 침입을 피해 브렌타 평야의 주민들에 의해 말뚝으로 지반을 다진 수백 개의 섬들 위에 건설되었다.
카날레로 불리는 작은 수로는 일반 도시의 도로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이 사이로 각종 배들이 다닌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 대부분이 롱고바르도의 지배 하에 있었던 반면, 베네치아 시의 발전은 비잔티움 제국의 보호 하에 이루어졌다.
바다에 접한 지리적인 이점과 제국과의 친분을 이용해 베네치아는 활발한 해상 무역을 펼칠 수 있었고,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동양과의 활발한 교역과 예술의 발전의 극치를 이루는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대상인들은 무역 활동으로 큰 재산을 축적하였고 호화스로운 저택들과 셀 수 없이 많은 성당들을 건립하는 데 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15-17세기에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반도인 육지까지 진출하고 오스만 투르크를 점령하는 등 국가 권력이 최고로 절정에 이르렀다.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자 수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은 피렌체 뿐 아니라 베네치아로도 대거 피신하였는데,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고딕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서유럽 문화와 동유럽 문화의 완벽한 용해의 결과물이 되었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베네치아 화풍은 전통 이탈리아 화풍을 완전히 개혁하는 혁신이었고 화가 벨리니, 카르파치오, 죠르지오네, 티치아노, 틴토렛토, 베로네제 등을 배출하게 된다.
1600년-1700년대의 짧은 회복기를 제외하고는 경제적이나 정치적으로 다른 유럽의 열강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한 베네치아는 1797년 오스트리아령에 속했다가 1866년 마침내 이탈리아 왕국에 포함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베네치아의 찬란한 역사는 도시의 구석 구석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눈부시게 화려한 저택들을 차지하고라도, 곤돌라가 스쳐 가는 운하들, 좁은 골목길, 시장, 서민들의 축제, 고풍스러운 카페, 극장, 문화 행사 등등 어디서나 항상 역사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다.
(6) 베네치아의 탄생과 성장
로마 제국 말기 야만족의 침입이 ‘팍스 로마나’에 친숙해져 있던 유럽인들을 공포의 밑바닥으로 처 넣고 있던 때이다. 그 중에서도 훈족은 그 광포함 때문에 다른 어떤 야만족들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북동쪽에 위치한 베네토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교좌 교회가 있는 아퀼레이아가 이 무서운 훈족에게 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 결심을 하기에 이르른다. 그 일대는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몇 개의 하천에 의해서 생긴 평야 지대로 그 훨씬 저쪽에 있는 산으로 달아나려고 해도 그 곳에 당도하기 전에 붙잡힐 것이고, 앞은 바다였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것은 썰물 때라 군데 군데가 노출되어 있는 소택 지대(沼澤地帶)였다. 갈대가 전면에 우거져 있을 뿐인 개펄에는 나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 땅으로 옮겨갔다. 가지고 있는 금은보화나 가구를 가지고 이동한 다른 지방의 사람들과 사정이 달랐던 점은, 이들 베네치아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주거를 만들 목재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이다.
그로부터 약 1세기 동안은 이탈리아어로 ‘라구나’라 부르는 개펄 지대 또는 석호(潟湖)라 해야 할 이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평온한 세월이었다. 제국의 멸망 후에도 야만족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지만 인간이 생존하기에 너무나도 불리한 지역이었르므로 습격하기도 좀처럼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야만족의 침입 욕을 북돋울 정도의 부(富)를 당시의 베네치아인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고트족도 소택 지대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 평화는 30년이 계속 되지 못했다. 랑고바르드족이 쳐들어온 것이다. 베네치아인은 아무리 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개펄 지대로의 이주 초기인 이 무렵에는 되도록 육지에 가까운 소택 지대에서 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랑고바르드족은 그들의 주교좌 교회가 있었던 그라도나 에라크레아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소택 지대로 난을 피했다고 안심하고 있던 사람들도 다시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랑고바르드족은 파도바로부터 이스트리아까지, 즉 아드리아 해 연안과 그 부근의 도시들을 서쪽에서 동쪽에 이르기까지 반원형으로 완전히 파괴한 것이다. 개펄 지대에는 지난 번의 이주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않은 사람들이 난을 피해서 옮겨왔다.
그렇지만 아무리 소택 지대라도 육지에 가까운 곳은 반드시 안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주자(先住者)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소택 지대의 중앙으로, 다시 말해서 육지와는 되도록 멀리 떨어진 장소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토르첼로나 부라노 섬에는 북쪽으로부터 도망쳐 들어온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살게 되었고, 베네치아의 소택 지대를 외해(外海) 호부터 차단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펠레스트리나와 마라모코에는 서쪽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그 동안 막 탄생한 이 작은 나라는 라벤나에 거점을 두고 이탈리아를 지배한 비잔티움 제국의 형식적인 속국이 되어 지냈다. 베네치아가 실질적인 독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물자의 수송을 맡겨도 좋을 정도의 배와 선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배는 커지고 그 숫자도 늘어났다. 선원도 보다 숙련되어 지고 그 숫자도 많아졌다. 소금과 생활 필수품의 교환에서 시작된 그들의 상업도 자기들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물건도 팔고 사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을 것이다. 베네치아인은 조금씩 이탈리아 내부의 하천 교역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또 몇 차례에 걸친 본토로부터의 이주로 인구도 증대되었다. 사제를 중심으로 교구(敎區)마다 모여서 살고 있던 사람들도 그것을 통합한 공동체를 필요로 했으며, 또 그것을 이끌 우두머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697년에 베네치아인은 처음으로 시민 투표에 의해서 국가 원수를 선출했다. 이것은 1797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붕괴될 때까지 끊기는 일 없이 계속되었다. 곧 선거에 의한 선출 방식과 종신 관리직의 성격을 갖춘 이 제도의 첫 출발이었다. 난민에 의해서 성립된 이 조그만 나라도 조금씩 국가로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그로부터 겨우 1세기가 지난 무렵에, 막 태어난 국가로서 그 존망이 걸린 중대사에 직면하게 된다.
800에 프랑크의 왕 샤를마뉴는 교황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대관(戴冠)했다. 고대 로마 제국의 후계자라고 자임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영토에는 당연히 이탈리아 전역도 포함된다. 샤를마뉴의 아버지 페팽은 베네치아에게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기 지배 아래로 들어 오라고 요구해 왔다. 게다가 위협의 속셈으로 하천역 교역에 종사하고 있는 베네치아 상인을 축출하는 책략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베네치아는 페팽의 요구를 거절했다.
베네치아인의 의리를 존중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전에 일어난 성화상 공경 문제 때도 비잔티움 제국 내의 이런 움직임을 베네치아인은 완전히 무시하고 여전히 성화상을 배례하고 있었다. 바로 후세에 유명해지는 베네치아인의 상인적인 냉정한 타산의 결과였다.
그들에게는 통상의 자유를 침범하려고 하지 않는, 형식상의 지배로 만족하고 있는 제국 쪽이 더 편리했던 것 뿐이었다.
그렇지만 페팽은 강경했다. 라벤나 바로 근처에서 베네치아를 공격할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동안 이민족들의 침입에 대비해서 들어간 소택지를 아무도 침략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베네치아도 방어전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잔티움으로부터 구원군이 파견된다 하더라도 콘스탄티노플은 너무나 멀었다. 그렇다고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쳐 온 곳이니 이 곳 밖에 도망쳐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때 비로소 그들은 달아나는 것을 그만 두고 방위를 위해 힘쓰게 된다.
베네치아인들은 배가 통행할 수 있는 장소를 가리키기 위해 바닷 속 여기 저기에 세워 두었던 말뚝을 전부 뽑았다. 소택 지대이므로 밀물 때라도 어지간히 숙련된 뱃사람이 아니면 배는 금방 얕은 곳에 걸려버린다. 썰물 때에도 항로를 잘못 잡으면 작은 배까지도 위험할 정도이다. 이런 방법으로 프랑크 군사들의 배가 앝은 곳에 빠지게 발을 묶어서 화전(火箭)법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진짜 승리는 그 후 1년이 지나서 베네치아인에게 주어졌다. 서쪽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샤를마뉴와 동쪽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사이에 조인된 조약에 의해서이다. 그 조약에서 샤를마뉴는 공식적으로 베네치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베네치아인이 비잔티움 제국 영내에서의 교역의 자유와 함께 베네치아 상인에게, 그리고 이미 교역에 나라의 장래가 걸려 있다고 내다 보고 있던 베네치아에게 이만큼 큰 승리는 없다고 해도 좋을 만한 일이었다.
포 강을 거슬러 올라가 프랑크 왕국의 수도인 차비아 거리에 열리는 시장에 모습을 나타내는 베네치아 상인들은 무엇이든지 팔았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전용 공장에서 짜고 황제의 하사품이라 하여 유명했던 홍색의 비싼 피륙까지도 파비아의 시장에 가면 베네치아 상인으로부터 살 수가 있다고 할 정도였다.
외지에서의 동포의 활약이 한층 활발해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본국의 베네치아인은 처음으로 본격적이고 항구적인 나라 만들기에 착수하고 있었다.
수도를 마라모코로부터 리알토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마라모코는 프랑크군의 내습이 실중했듯이, 국토 방위에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첫째로 아드리아 해에 직접 면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함대를 편성하고 공격해 올 경우, 잠시도 지탱하지 못하고 함락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로 적이 키오지아를 함락시키기만 하면 육지를 따라 공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사리에는 밀물 때에만 생기는 수로가 통하고 있을 뿐이다. 배를 늘어 놓아 연결하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까는 식의 고대 로마 이래의 급조(急潮) 다리만 만들면 상당한 수의 병사가 이동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프랑크라는 강대한 적에 대한 승리에도 눈이 흐려지는 일이 없었다. 이기면서 그들은 달아났던 것이다. 개펄 지대의 한가운데로, 육지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먼 곳으로 말이다.
이 무렵 리알토에는 어부들이 살고 있었다. 개펄의 다른 섬에 비하면 훨씬 외진 곳이었다. 밀물 때도 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몇 개서의 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리알토는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첫째는 개펄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육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둘째는 소택 지대에 있으므로 외해와는 직접 접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안전한 땅인 동시에 리도(베네치아 개펼 동부쪽 외곽에 있는 모래 서들)의 수로를 항구의 입구처럼 정비만 하면 장소에 따라서는 대형 선박도 바싹 댈 수가 있었다.
그것은 다른 어느 나라의 해군보다도 강력한 해군만 가지고 있다면 적의 습격을 막을 수가 있으며, 동시에 그들의 발인 선박에 의한 교역의 장래가 열린다는 것이기도 했다. 안전한 곳만 찾아서 도망쳐 다녔던 조상들과 9세기 초의 베네치아인들은 달랐다.
제 10대 원수인 안젤로 파르티치파치오가 선두에 나서서 베네치아인들은 나라 전체를 몽땅 옮기는 마지막 이주를 했다. 배수진을 친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베네치아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장소에 건설된 것이다.
(7) 베네치아의 무역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다. 그런 베네치아가 오리엔트와 교역하려고 하면 아드리아 해를 빠져 나가는 길밖에 없다. 아드리아 해의 동안에 해적들이 많았지만 굳이 이 항로를 가야 했던 지중해에서는, 그리고 그 일부인 아드리아 해에서도 무역풍이란 일정 방향의 바람이 장기간 부는 대양과 달라서 바람이 자주 변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해역에서는 순풍에 돛을 달고 며칠이나 항해를 계속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다. 자주 기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바로 순풍을 기다리기 위해서다. 그 때 문에도 연안 항로를 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서안보다도 섬이 몇 겹으로 겹치고 도처에 뒤얽힌 후미를 가지고 있는 동안 쪽이 역풍을 피하면서 순풍을 기다릴 수가 있기 때문에 절대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연안 항로인 이상, 해적에게 유리한 지형은 뱃사람들에게도 유리한 지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네치아에게 있어서 해적 퇴치는 단순히 해적을 퇴치해서 자기들 상선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기항지, 다시 말해서 기지를 확보하는 일로 이어졌다. 이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호기가 서기 1000년 전후에 찾아왔다.
991년에 원수로 취임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는 국내외 정세가 안정된 나라를 인계받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유럽 세계는 고대 로마 제국의 후계자라고 자임하고 사사건건 다투는 비잔티움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두 세력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 베네치아는 정치적으로는 비잔티움 쪽에 속하면서, 지리적으로는 신성 로마에 가깝다고 하는 특수한 처지에 있었다. 이 무렵의 베네치아는 오랜 세월이 걸리기는 했지만 해상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이런 베네치아를 두 세력이 모두 자기 편으로 끌어넣으려고 획책하는 것은 당연했다. 비잔티움 제국도 신성 로마 제국도 베네치아 국내의 자기들 동조자들에게 적극적인 공작을 시작했다.
지리적인 이유와 정치적ㆍ경제적인 이유로 베네치아 국내에서는 원래 친 비잔티움파와 친 신성 로마파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니 외부로부터의 선동에 고무되어 내부 항쟁에 불이 붙는 것은 간단했다.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가 취임하기 전에 반 세기는 이 양파 사이에서 피비린 내 나는 항쟁이 끊이지 않았다. 추방당한 원수가 있는가 하면 살해당한 원수도 있었다.
외부 세력과 내부 반대 세력 간의 끊임없는 항쟁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특색이었다. 만약 베네치아가 이 시기에 내분의 씨를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베네치아 역시 다른 나라와 같은 고민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도 후년의 성공을 이루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원수 피에트로는 젊은 혈기에 따라 즉각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해적 퇴치는 단지 해적을 쫓아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상선의 기지를 확보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지를 완성해야만 비로소 해적 출몰도 근절할 수가 있는 것이다.
취임 1년 후인 992년 비잔티움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에 하나의 조약이 맺어졌다.
그것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베네치아 공화국은 그 자주성을 완전히 인정받는 대신 비잔티움 제국에 속한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내용으로 경제 면에서는 비잔티움 제국 영내에서 베네치아 상인은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존의 것 말고 또 다른 중요한 것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항구에 입항하는 베네치아 상선은 입항할 때 2솔디 금화(이탈리아의 옛 금화. 20분의 1리라)를, 출항할 때는 15솔디 금화를 기항 요금(寄港料金)으로 지불하면 된다는 항목이었다. 제노바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상선들은 베네치아도 종전에 물어 왔던 그대로 30솔디 금화의 기항 요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해양 교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기반 중의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매우 유리한 이 조항의 대한 베네치아 측의 의무라는 것이 또한 베네치아로서는 은근히 바라고 있던 일이었다. 제국은 서쪽의 방위에 베네치아 해군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쪽은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 남쪽은 사라센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네치아로서는 슬라브와 사라센의 해적을 쫓아버리고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확립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런 판에 아드리아 해의 경찰 역할을 하라는 의무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베네치아로서는 안성맞춤의 대의명분을 얻은 것이 되었다.
먼 곳에 자기 편을 갖는다는 그의 외교는 베네치아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만약 베네치아가 신성 로마 제국의 편에 붙어 있었더라면 그후의 서유럽을 동란의 땅으로 만든 교황파와 황제파 간의 싸움에 말려 들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은 지리적으로 베네치아에 가까웠다. 그 뿐 아니라 오리엔트로부터 가지고 들어온 상품을 많이 사 주는 단골 손님이었다. 자기 편으로 만들지 않아도 좋지만 적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오르세올로 2세는 비잔티움 제국과 조약을 맺은 지 2개월 후에 국내의 친 서유럽파의 어깨 너머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다시 말해서 서유럽에서의 베네치아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했다. 샤를마뉴 이래 이따금 단기적으로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쭉 받아 오고 있었던 자유 보장을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것에는 의무가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베네치아를 필요로 하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조약에 비해서 불안정한 협정이라는 것도 틀림 없었다.
원수 오르세올로 2세는 빈틈 없는 준비를 했고 기회가 왔다. 연공금을 바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황제의 승인을 구실로 삼아 강경한 태도로 나오는 베네치아 상선과의 대결을 피하면서, 연안을 털고 다니는 것으로 전술을 바꾼 슬라브 해적의 행패에 연안의 소도시들이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비잔티움령에 속하고 있었다. 게다가 남하해 온 슬라브족과는 달라서 자기들은 라틴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보호가 미치지 않는다면 같은 라틴민족인 베네치아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비잔티움 황제로부터 서방의 방위를 위임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상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베네치아는 해적 퇴치는 물론이고 근절을 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 오랫동안 아드리아 해 연안 사람들은 해적의 습격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좋은 조건이 되면 유럽의 다른 지방이라면 곧 정복으로 이어진다. 완전하게 영유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10만 명 미만의 시민들 밖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상대방으로부터 제의가 있었든, 혹은 이쪽 군사력으로 굴복시켰든 간에 획득한 아드리아 해 동안의 여러 도시들이 표시한 공순과 복종서약에 대해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허용하는 것으로써 답하였다.
베네치아의 의무는 해군의 힘으로 이들 도시를 지키는 일이고, 그것에 대한 여러 도시의 의무는 베네치아에게 상업 기지를 제공하는 것과 뱃사람의 조달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스키아보니라고 불리는 이 지방 출신의 뱃사람은 수가 많으며, 베네치아 시가의 한 부두는 리바 델리스키아보니(스키아보니의 강가)라고 오늘날에도 불리고 있다.
(8) 베네치아의 상인
1100연대 후반~1204년 사이를 산 베네치아 상인들은 상용 여행만 하고 거의 모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유형의 상인은 중소 상인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12세기부터 13세기를 통해서 상인 겸 선원인 이 타입은 상층 계급까지 포함해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것은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럴 생각만 있으면 해외무역에 참가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재산을 이루는 것도 가능했다는 점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제 발전에 대단한 공헌을 하게 된다. 이것을 도운 것이 해상 융자와 한정 합자 회사의 제도였다.
해상 융자는 보통 단기간의 융자를 위한 제도이며 이자는 연 20%였다. 지독하게 비싼 이자이지만 당시의 유럽에서는 이것이 보통이었다. 그래도 무사히 항해를 마치고 화물을 만재하고 귀향아여 그것을 처분한 돈으로 이자와 함께 원금을 다 갚으면 나머지는 전부 자기 것이 되었다. 높은 이자만큼이나 장사 방법에 따라 이익도 컸다.
또 하나의 융자 제도는 ‘콜레간차’ 라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베네치아 뿐만 아니라 제노바에서도 피사에서도 1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던 융자 제도이며, 계약 방법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어느 방식이건 배를 만드는 데도, 국유선을 빌리는 경우의 입찰에서도, 상품의 구입에서도 적용되었다.
첫 번째 방식은 자본가는 전 자본의 3분의 2를 출자한다. 경영자는 나머지 3분의 1을 출자한다. 이익은 필요 경비를 공제한 다음의 금액을 자본가와 경영자가 반분하는 규칙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방식은 자본가가 자본의 전액을 출자하는 케이스다. 이 경우 경영자는 자금이 없어도 상관 없다. 그리고 항해가 끝나고 짐을 팔아 치워서 얻은 이익은 자본가가 4분의 3, 경영자가 4분의 1의 비율로 나누는 것으로 되어 있다.
콜레간차를 베네치아인들이 오래 활용한 것은 이 제도가 모든 면에서 유리한 제도였기 때문이다. 우선 자본가로서는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데다가 제각기의 목적지로 향하는 경영자와 연대함으로써 다각 경영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목재를 제각기의 항로를 취하는 배에 실음으로써 알렉산드리아로부터의 향신료, 시리아부터의 견직물이 같은 시기에 손에 들어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일은 돈을 내는 것과 오리엔트로부터 도착한 상품을 베네치아의 시장에서 유럽의 상인들에게 파는 것이었다.
경영자 쪽도 이점은 충분히 있었다. 무자본이라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과 복수의 자본가와 연대함으로써 이익을 보다 많이 늘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가로서도, 경영자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잘게 분산된 투자 형식이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국내에서도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해외 무역에 직접 종사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약간의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투자의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이런 일반 사람들로부터 모이는 자금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는 대단한 액수가 아니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상당한 것이 되어 베네치아 경제의 발전에 대단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1204년의 제 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약탈로부터 시작되는 반 세기를 베네치아가 동지중해를 그들의 독점 체제 하에 두었던 시대라고는 할 수 없다.
확실히 제 4차 십자군에 대한 투자는 충분히 본전을 뽑았다. 베네치아로부터 콘스탄티노플,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를 잇는 길이 완성되었고, 베네치아 상인은 자기 나라 영토나 아니면 우호국에 설치한 기지를 징검돌을 밟듯이 기항하면서 항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길이 완성되었어도 완전히 육지에 난 길처럼 이용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징검돌처럼 흩어진 영토일 지라도 지중해 최대의 섬인 크레타를 비롯해서 네그로폰테 등 전부를 합치면, 베네치아의 해외 영토는 본토보다 훨씬 광대해졌다. 그것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정치적ㆍ군사적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게다가 라틴 제국은 통치의 무능도 겹쳐서 창립 당시부터 약체여서 베네치아의 해군에 의한 지원 없이는 방위조차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도 해안 지방은 그럭저럭 베네치아 해군의 덕택으로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내륙은 허술했다. 그것을 노리고 북쪽으로부터는 신흥 불가리아 왕국, 동쪽으로부터는 비잔티움 제국의 잔존 세력인 니카이아, 서쪽으로부터는 에페이로스의 참주가 라틴 제국을 죄어오고 있었다. 남쪽만이 평온했던 것은 베네치아가 지배하고 있는 에게 해에 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적 자원이 빈약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베네치아는 이들 육지형 국가에 쓸데 없는 싸움을 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지조도 아무 것도 없다는 비난을 받는 것도 개의치 않고, 라틴 제국이 창설된 지 12년 후에 에페이로스의 참주와 우호 통상 조약을 맺고, 다시 그 3년 후에는 니카이아와 같은 조약을 맺었다. 에페이로스는 두라초로부타 파트라소스에 이르는 지역, 즉 아드리아 해의 출구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니카이아는 소아시아 연안과 흑해 연안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 위의 강적은 베네치아와 같은 해양 국가인 제노바였다. 우선 베네치아인과 달라서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그 때문에 공동체의 이익 따위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라틴 제국 창립 당시의 협약에 베네치아가 적국으로 간주하는 나라의 상인들은 라틴 제국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항목을 넣었다. 사실상 이것에 의해서 베네치아의 라이벌인 제노바와 피사의 상인들은 축출당하게 되었다. 라틴 제국이 아무리 약체라 하더라도 콘스탄티노플과 거기서 흑해로 통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하고 있었다. 오리엔트 교역의 주축의 하나에서 제노바 상인들은 장사를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게릴라 작전에 힘을 쏟게 되었다.
베네치아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독점 체제가 주는 실속과 시라아나 팔레스티나에서 받는 손해를 비고, 검토한 결과 라이벌 축출을 이 이상 계속하는 것은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1206년에 우선 피사의 상인들을 받아 들이고, 마침내 1218년에 제노바인들에게도 통상을 허가했다.
제 4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 콘스탄티노플을 서유럽 세력이 손에 넣음으로써 일어난 가장 획기적인 상업상의 변화는 흑해 연안에 처음으로 서유럽 상인들이 진출한 일일 것이다. 그 때까지는 비잔티움 제국은 아무리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특권을 주더라도, 아무리 서유럽의 상인에게 콘스탄티노플거리에서 통상을 시키더라도 그들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서 흑해 연안의 여러 도시와 직접 교역하는 것만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서유럽 상인들은 헬라스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까지 실어 온 상품을 그들로부터 사서 그것을 이집트나 서유럽으로 가지고 가서 장사를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해금된 것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에는 이탈리아 해양 도시 국가의 깃발이 나부끼는 상선대가 북적거렸다. 흑해 연안과의 직접 교역은 당시의 상인들로서는 대단히 매력 있는 장사였다.
그러나 그 다음 시기부터는 제노바와의 대결과 혼란한 국제 정세에 의해 이것도 흔들리게 된다.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대립은 매우 우연한 사건에 의해서 나타났다. 팔레스티나 지방의 아콘에 거주하고 있던 베네치아 상인이 우연한 일로 제노바의 한 상인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제노바인 거주구는 극도로 흥분했고, 복수심에 불탄 제노바인들은 무기를 들고 제노바인 거주구와는 경계를 접하는 베네치아인 거주구를 습격했다. 허를 찔린 베네치아인은 저항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상관은 몽땅 타버리고 집은 짓밟혔으며, 창고 속의 물건은 약탈당했다.
제노바인의 이 같은 행동은 그전부터 그들의 가지고 있던 생각으로 반 세기 전의 제 4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에 의해서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헬라스 각지에 기지를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교역에서 경쟁 상태인 피사와 제노바의 상인들을 몰아냈던 것이다.
얼마 후에 그들도 통상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헬라스와 중근동에서의 베네치아의 우위는 변하지 않았다. 베네치아에 대한 그들의 대항의 식은 불타오르기만 해서 일촉 즉발의 상태가 되어있었다. 특히 아콘은 동지중해의 여왕이라고 불리고 있던 베네치아로서는 비교적 자파 세력이 약한 도시였다.
당초부터 십자군 원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제노바 쪽이 더 강력한 위치를 유지해 온 도시였던 것이다. 자기 나라 사람이 살해당한 것을 잠자코 못 본 체 하고 넘길 수는 없었다. 또 두 거주구의 경계에 있는 수도원의 소유를 둘러싸고 양쪽 거주구 사람들이 반목하고 있었던 사정도 겹쳤다.
그래서 아콘은 세력이 강한 두 거주구가 적대시하는 대로 도시 전체도 양분되었다. 베네치아 쪽에는 성당 기사단과 피사, 프로방스, 마르세유의 상인들이 붙었다. 제노바 쪽을 편드는 것은 십자군 원정으로 그 곳에 와서 정주하고 있는 프랑스 귀족들이었다. 우세한 제노바파는 항구를 봉쇄해버려 베네치아 선박의 입항을 저지하는 행동으로 나왔다.
이렇게 되자 베네치아 본국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1257년에 베네치아 정부는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가는 정기 항로에 취항하는 상선단에 마치 전시라도 된 것처럼 14척의 갤리 군선으로 된 호위 함대를 붙여서 출항시켰다. 시리아, 팔레스티나 항로의 최종 기항지는 오리엔트 물산의 중요한 집결지인 아콘이었다.
베네치아의 군선이 단숨에 항구를 점령하였다.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제노바 선박은 차례로 불탔고, 제노바 상인용 창고는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베네치아인의 습격을 받았다. 제노바인 거주구가 이런 사태 속에서 피해를 면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중근동에서는 최대의 제노바 상업 기지인 아콘에서 그 때까지는 치외 법권을 제멋대로 남용하고 있던 제노바인 거주구도 그 위세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아콘에 살고 있던 제노바인들은 근처인 틸로스로 달아났다. 아콘에서의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지위는 이렇게 해서 하루 사이에 역전되었다.
물론 제노바 본국이 이것을 못 본 체 잠자코 있을 리가 없다. 이듬해 1258년 항해기인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오리엔트로 대함대가 출항했다. 물론 베네치아 쪽도 이것에 대한 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콘에 도착해서 전투를 벌였다. 반나절의 격전 끝에 해전은 베네치아 쪽의 압승으로 끝났다. 제노바 군은 불타 버리든가 침몰하던가 해서 함대의 반을 잃었다. 임명 손실도 전사자와 포로를 합쳐 1천 700여명이나 되었다. 남은 배도 사람도 틸로스로 도망쳤다. 육지 쪽의 싸움도 성당 기사단의 활약과 그 때까지의 제노바인의 전횡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던 지방민의 도움으로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프랑스 기사들도 고전하고 있었으나 해전이 베네치아 쪽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 알려지자 제노바인들은 공격을 멈추고 틸로스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아콘은 완전히 베네치아의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완승으로 끝난 서전(緖戰)으로부터 겨우 3년 후인 1261년에 제노바는 멋지게 베네치아인에게 보복을 하는 데 성공한다. 베네치아 상인의 오리엔트의 최대 근거지인 콘스탄틴노플을 베네치아로부터 탈취해버린 것이었다.
1261년부터 1300년까지의 시기는 1261년의 라틴 제국의 멸망, 1268년의 안티오키아의 몰락, 1291년 아콘 함락이라는 정치상의 3대 사건에 나타나듯이 서유럽 상인들, 특히 베네치아에게는 교역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상당히 힘든 시기였다.
1261년의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에 의한 비잔티움 제국의 재건, 라틴 제국의 멸망은 베네치아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그것도 은밀히 제노바와 밀약을 맺은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이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를 활용해서 베네치아 함대가 멀리 외해를 항해 중인 틈을 타 콘스탄티노플을 점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서둘러 되돌아온 베네치아 함대도 이렇게 완전히 기정 사실화 된 일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시내 거주구의 동포들을 배로 피난시켜 네그로폰테의 기지까지 데리고 올 수가 있었을 뿐이다.
팔라이올로고스 가와 제노바 상인들 사이에 맺어진 밀약이란 제노바가 베네치아 해군과의 대결을 떠맡아 베네치아 함대를 콘스탄티노플로 접근시키지 않도록 하는 대신, 제국은 그 때까지 베네치아 상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를 제노바 상인들에게 준다는 내용이었다. 콘스탄티노플 시내가 금각만을 사이에 두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낀 갈라타가 제노바인에게 주어졌다. 베네치아인은 시내는 물론이고 제국 영내 전역에서 배제당하게 된다.
여전히 베네치아는 에게 해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흑해 연안과의 교역에서 배제된 것인 뼈아픈 일이었다. 더구나 1258년의 바그다드 약탈 후 초기에는 파괴를 좋아하다가 이후 평화적으로 바뀌어 서유럽 상인들을 환영하기 시작하고 있던 몽골족이 진출한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비잔티움 제국이 약속된 제노바의 원조도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간단히 성공했기 때문에 제노바의 은혜를 그다지 느끼지 않았고, 그래서 제노바 상인만 우대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베네치아 정부의 기민하고도 유연한 외교의 효과도 있었다.
7년 후인 1268년에 베네치아인은 다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장사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전과 같은 유리한 입장은 이젠 누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펠라에는 라이벌인 제노바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1255년부터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쟁은 그 후 100년이나 계속되었다.
7년 만에 콘스탄티노플로 복귀했을 때 베네치아 상인들은 거주구가 전의 절반 이하로 접어졌고, 피사 상인과 이웃하는 장소여서 금각만 전체를 그들 전용 항구처럼 쓰고 있었던 때를 생각하면 전과 같은 유리한 입장은 이젠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복귀할 무렵부터 동지중해에서의 제노바 선박의 해적 행위는 한층 더 심해졌다. 7년만에 겨우 장사를 재개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베네치아 상인에게는 어려운 재출발이었다.
그 후에도 제노바와 베네치아 간의 싸움은 계속됐다. 잦은 싸움으로 이것으로 피해가 더 큰 쪽은 베네치아 쪽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휴전을 바란 것도 베네치아 쪽이었다. 이 이상의 타격은 베네치아의 경제 활동에 불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는 제노바는 휴전 따위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억지로 수락하게 한 것은 때마침 십자군 원정을 준비 중이었던 프랑스 군주 성 루이 9세의 힘이었다.
많은 함대를 군의 수송에 꼭 필요로 했던 프랑스로서는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싸우고 있어서는 매우 곤란했다. 성왕 루이는 베네치아 선박에 대한 해적 행위를 그만 두고 베네치아와 휴전하지 않는다면 프랑스에 살고 있는 제노바인 전부를 잡아서 죽이겠다고 제노바를 협박했던 것이다. 이것에는 제노바도 굴복하고 베네치아와의 휴전을 승낙했다.
그 후 25년 간 지중해는 제노바인과 베네치아인의 세계였다. 베네치아의 경제 발전도 두드러졌지만 제노바의 경제는 파죽지세였을 만큼 좋았다. 이 시기에 제노바는 전성 시대를 맞았던 것이다.
제노바는 1284년의 멜로리아 해전에서 서지중해의 경쟁 상대인 피사를 완전히 전열에서 밀어내고 말았다. 지브롤터 해협 통행의 자유를 획득해서 대서양 항로에 대한 길도 열었다.
휴전 중에도 자주 사고가 일어나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공공연한 싸움이 된 것은 1295년, 제 1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이 휴전을 한 지 25년 째였다.
제 2차도 제 1차와 같은 원인, 즉 시장 쟁탈전이었다. 제 1차 때는 팔레스티나의 아콘을 둘러싼 싸움에서 시작되었지만, 제 2차 전쟁은 흑해 연안의 시장이 쟁점이 되었다.
이보다 4년 전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맹공으로 십자군이 정복한 땅 중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부분인 아콘이 함락되었다. 이것은 프랑스인을 주체로 한 십자군 세력은 팔레스티나로부터 일소된 셈이지만 타격을 받기로는 이탈리아의 해양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리스도교 세력의 패퇴에 분노한 교황청은 서유럽 국가들에게 이슬람교도와의 교역을 금지했다. 제노바도, 베네치아도 시리아나 팔레스티나, 이집트의 어디 하고도 교역을 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동양으로부터 실려 오는 향신료를 비롯한 물산을 서유럽의 상인이 살 수 있는 장소로는 흑해 연안만이 남게 되었다.
흑해 연안은 제노바 상인이 개척한 시장이라고 해도 좋았다. 두 나라가 휴전했을 무렵부터 베네치아 상선도 본격적으로 흑해로 진출해 왔다. 더구나 아콘이 함락된 직후에 베네치아 정부는 흑해 연안을 지배하고 있던 몽골족의 칸과 정식으로 통상조약까지 맺어버렸다. 시장이 좁아진 데다가 남은 하나까지도 베네치아에 뺏길 것 같은 느낌에 제노바는 베네치아를 흑해로부터 쫓아내려고 했다. 1294년 봄에 키프로스와 소아시아의 라이아초로 가는 정기 상선단이 함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베네치아를 떠나 아드리아 해를 남하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서 항로를 동쪽으로 잡고 크레타에 들렀다가 키프로스로 가는 베네치아 상선단의 항해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활로를 동쪽으로 잡은 시점에서 이미 제노바인들에 의해 탐지당하고 말았다.
통지를 받은 콘스탄티노플의 제노바 거주구는 당장 함대를 편성했다. 금각만의 제노바 선착장으로부터 함대가 출발한 것을 맞은편 해안의 베네치아 거주구도 알았으나 동포들에게 위험을 알리려고 해도 시간이 없었다. 제노바 함대는 그 길로 에게 해를 남하했다. 라이아초 항구를 향해서 항해중인 베네치아 상선단을 확인했다. 갤리선만의 제노바가 함대는 모든 배가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허를 찔린 베네치아 선단은 돛을 올리고 항해 중이었기 때문에 우선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제노바 측의 승리는 완벽했다. 베네치아 측은 20척이나 되는 배를 포획당하고, 타고 있던 사람들도 뺏겼고, 호위 함대의 사령관은 전사했다.
이 패전은 베네치아로서는 불명예스럽기 그지없는 사건이었다. 상인들이 급히 만든 사제(私製) 함대에 국가가 편성한 함대가 패배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제노바인으로서는 이만큼 기세가 오르는 쾌거도 없었다.
기분이 좋아진 제노바는 여기서 단숨에 라이벌을 밀어내려고 이듬해인 1295년에 165척의 갤리선과 3만 5천 명의 승무원으로 된 전대미문의 대함대를 만들어냈다. 베네치아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전국의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는 병역에 언제든지 소집할 수 있도록 등록되고 귀족이나 부자 계급은 그 밖에 갤리선을 무장하는 비용으로서 임시 목적세를 징수당했다. 그러나 제노바의 함대는 오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제노바의 함대의 제독인 도리아가 자기가 없는 사이에 본국 정부를 반대파가 노리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모처럼 기세가 올라 있던 제노바인의 전의는 라이벌인 베네치아에게로 돌려지지 않고 내국인끼리의 싸움에서 소비되었다.
베네치아는 이 사이를 이용해서 제노바의 전술을 흉내내서 상선을 호위 함대 없이 항해하게 하고 함대는 함대대로 독자적인 순수 군사 행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베네치아인도 해전의 재능에서는 제노바인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1298년이 되자 내부 항쟁이 일단락 되어 본격적인 함대를 바다로 내보낼 수 있게 된 제노바가 베네치아에게 결전을 도발해 왔다. 이 싸움은 완벽할 만큼의 제노바의 승리로 끝났다. 베네치아 선박으로 침몰되거나 포획된 배는 실로 84척이나 되었다. 본국으로 도망쳐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6척에 지나지 않았다. 전사자는 7천 명이었다.
제노바군도 최선을 다한 싸움이었으나 이겼다고는 해도 받은 타격이 컸다. 전사자, 부상자의 수에서는 베네치아와 같은 정도였다고 한다. 배의 손해도 컸다. 포획한 베네치아 선박을 끌고 갈 힘이 제노바에겐 없었다. 배도 사람도 이미 없었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기기는 했지만 이런 상태로는 제노바군도 이긴 여세를 몰아 적의 본거지인 베네치아를 공격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제노바 함대는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지도 않고 그대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렇더라도 베네치아 국민으로서는 참으로 굴욕적인 패전이었을 것이다.
베네치아에서나 제노바에서나 강화할 분위기가 지배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해전에 완전히 자신을 잃고 있었으며, 한편 제노바는 내부 갈등에 에너지를 지나치게 쓰고 있었다. 1300년에 맺어진 강화 조약은 동지중해에서의 양 국의 세력 부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대립을 해소하는 데 조금도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강화였다.
두 나라는 싸움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제 1차 전쟁이 군사적으로는 베네치아가 우세했는 데도 그것을 살리지 못했던 것에 비해서 제 2차는 제노바가 스스로의 우세를 활용하지 못하고 끝났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싸움은 참으로 기묘한 전쟁이었다. 승부가 결정되기까지의 125년 간을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실제로 싸움을 벌인 것은 통산해서 20년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5년을 싸우고는 그만 두었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되풀이한 것이었다. 두 나라의 세력이 백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도 제노바도 상대를 완전히 이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양 국의 대립은 순수하게 경제상의 이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싸움이지, 인종적ㆍ종교적인 대립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경제적 인간끼리의 대립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 정도로 완전한 경제적 인간이 되고 보면, 경제사의 이익을 둘러싸고 싸우더라도 그 싸움이 자기들의 경제상 이익을 너무 손상시킨다고 판단하면 일시적이나마 싸움을 중지한다는 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5년 간 싸우고는 25년이나 휴전하게 된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와의 싸움은 이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 베네치아가 굴욕적인 패배를 하기도 하고 또 베네치아가 싸움에 대승해서 제 3의 전성기를 맞기도 한다. 120년 이상이나 계속된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오랜 결투는 베네치아의 부전승으로 볼 수가 있다. 전쟁의 결과 베네치아는 재기할 수 있었는데 제노바는 끝내 재기할 수가 없었다.
베네치아에서 ‘무다’라고 불리는 정기 상선로 제도가 창설된 것은 1255년이었다. 동지중해 지역에서 비교적이나마 누리고 있던 베네치아의 독점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여 라이벌인 제노바와의 대결이 표면화 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우선 초기에는 사유 갤리선, 얼마 뒤에는 국유 갤리선이 되지만 이런 배들은 보통 5척, 때로는 10척으로 선단을 편성했다. 선단의 우두머리는 선단장이라고 불리며 정부가 임명했다. 사유 갤리선으로 편성되던 시기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전시중의 항해에는 호의 갤리선대가 경호를 맡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갤리선은 설사 상선이라도 노젓는 사람이 끼기 때문에 전투원의 수는 많으며 그것 자체로 방위력은 충분히 있었다.
항로에 관해서는 목적지도 도중의 기항지도 정부가 결정했다. 그 때 그 때의 정정을 감안하여 각 선단마다 결정하는 것이었다. 선단은 봄에 출항해서 가을에 귀항하기로 되어 있었다. 8월에 출항한 선단의 경우는 해외에서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봄에 귀항했다. 이것은 13세기말까지 바뀌지 않았다.
항로는 그 때 그 때의 해외 정세에 따라서 중단되거나 또 목적지를 바꾸거나 하는 일도 있었지만, 다음의 네 개가 강으로 비유하면 대하에 해당하는 항로였다.
첫째, 헬라스 항로-콘스탄티노플에서 흑해로 선단의 일부가 본대와 갈라져서 가는 일이 많았다.
둘째, 키프로스, 시리아, 팔레스티나 항로.
셋째, 알렉산드리아 항로.
넷째, 플랑드르 항로-영국의 사우샘프턴에 들르는 일이 많았다.
이런 무다, 즉 몇 척인가로 구성된 갤리 상선 선단이 항해의 해금을 기다렸다가 잇따라 베네치아의 항구를 떠났을 것이다. 한 계절에 내보낸 선단의 수는 30에서 50이었다고 한다. 선단은 플랑드르 항로 이외의 것은 모두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인 마타판 곶을 통과할 때까지는 모두 같은 항로를 취했다.
이렇게 무다들이 정해진 이유는 먼저 항로 별로 베네치아의 수출품과 수입품 때문이다.
우선 헬라스 항로에서의 수출품은 플랑드르의 모직물과 피렌체산의 직물, 독일의 금속 제품과 베네치아의 유리 공예품이다. 수입품은 포도주, 올리브유, 과일, 그리고 스파르타와 테베에서 생산되는 비단, 설탕, 벌꿀, 납, 염료 등이었다. 흑해 지방의 산물로서 밀, 모피, 가죽이 있었지만 노예는 갤리선에 싣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사이를 왕복하는 범선이 사용되었다.
키프로스, 시리아, 팔레스티나 항로의 경우도 목재를 넣으면 수출품은 같은 물건이었다. 수입품은 향신료를 비롯해서 다마스커스산 견직물, 과일, 염료 등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항로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동양의 특산물인 향신료의 독점 시장 같은 수입 품목 들이었다. 수출품은 금속 제품과 모직물에 목재와 노예였다.
플랑드르 항로는 가장 늦게 1300년대 초기에 개설된 항로이지만, 수출품은 향신료, 설탕, 그리스산 포도주와 고급 직물이고, 수입품은 주로 양모와 모직물이었다. 이것을 보아도 베네치아 상업이 얼마나 중개 무역에 치중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정기 항로를 항행하더라도 번선으로 항행하거나 또 지류를 항행하는 배는 상품을 실을 때 이외는 정부의 행정 지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무다 방식이 채용된 것과 같은 해에,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해상법(海上法)도 제정되었다. 이것은 정기 항로에 관한 모든 것을 법제화한 것이었다.
규정을 위반한 승무원이 처벌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시의 항로 변경을 합의제에 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결정한 선장도 처벌당했으며,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들에게 형편이 좋도록 기항지를 바꾸거나 한 선장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증명되었을 경우, 하나의 재산에 상당할 정도의 엄청난 벌금으로 부과했던 것이다.
1300년 전후를 고비로 하여 첫째로 항해 기술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 다음에 배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상인 쪽에서도 상업 기술의 획기적인 개량을 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해서 상인의 유형도 달라진 것이다.
먼저 항해 기술의 변화에서는 나침반과 항해도와 ‘타볼라 디 마르텔로지오’라는 항로의 조견표가 항해에 필요한 세 가지 기구로서 큰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기술 혁신은 항해 가능한 시기를 대폭 확장하게 되었다. 비가 오든 안개가 자욱하든, 또 날씨가 흐리든 항해할 수 있게 된 거이었다. 종전처럼 육안으로 확인하고 항해할 때는 불가능했던 겨울철의 항해도 기술혁신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종래는 3월말에 개항하던 것이 1월로 앞당겨졌다. 정기 항로도 겨울에 출항한 선단은 5월에 귀항하도록 계획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때까지는 1년에 한 번 밖에 항해할 수 없었던 것이 1년에 두 번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것은 영국이나 플랑드르의 모직물, 독일의 금속 공업의 발달로 서유럽에 팔 물건이 늘고 그것에 따라서 갖고 싶은 물건을 보다 많이 살 수 있게 된 시기와 마침 일치했기 때문에, 오리엔트와 서유럽의 중개역을 하는 베네치아 상업으로서도 큰 비약의 기회가 되었다. 물론 베네치아는 이런 호기를 철저히 이용했다. 배의 개조가 그것이었다.
14세기 특색인 개혁의 두 번째는 상업 기술의 진보였다. 그것은 우선 부기의 보급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아라비아 숫자로 적은 복식 부기에 의해서 상인들은 자기가 직접 관여한 상거래의 전모를 알 뿐만 아니라 해외의 대리인을 통해서 하는 간접 거래도 포함한 장사 전반의 진행 상태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유형 변화에 큰 구실을 하게 된다.
그리고 베네치아인의 발명은 은행제도를 창설하게 된다. 그 때까지도 ‘방코’라고 불리는 은행은 있었지만 그것은 책상 위에 금화, 은화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점포 구조로 환전 업무를 주로 해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금업이었다. 한편 베네치아인이 만든 은행은 장부만 책상 위에 놓은 점포 구조였기 때문에 ‘방코 디 스크리타’라고 불렸다.
상인들은 거래가 성립되면 은행으로 갔다. 그들은 모두 계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의 계좌에 이만한 액수를 옮겨 달라고 은행가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은행가는 장부에 그것을 기입했다. 이것으로 돈은 움직인 것이다. 종전처럼 금화나 은화 자루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계좌로 돈을 옮겨도 은행가는 그것을 증명하는 영수증과 같은 것은 발행하지 않았다. 은행의 장부는 복사되어 정부의 그것을 담당하는 위원회의 감시를 항상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인은 보통 복수의 은행과 거래가 있었으며, 베네치아 상인과 거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각 국의 상인들은 그 대부분이 베네치아의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좌 간 돈의 이동은 보통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은행에 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의 상거래도 일단 성립되면 베네치아의 은행과 상대 은행 간의 조작으로 환어음에 의해서 먼 지방에서의 지불도 전혀 문제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상업 면에에서 뿐만 아니라 함대 편성이라든가 대사관의 비용 등으로 돈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는 국가로서도 대단히 합리적인 변혁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800년이나 전에 이 정도의 근대적인 은행을 생각해냈던 베네치아인은 은행 업무의 하나로서의 융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 방면에 있어서 주된 융자 대상은 국가였다. 마침 그 무렵은 제노바와의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가는 끝나고 휴전했다가는 시작되고는 하는 상태가 한창이던 시기여서, 국가는 전비 조달에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개개 상인에 대한 융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융자이지 투자는 아니었다. 그런 처지를 이용해서 기업경영으로까지 진출하는 일은 없었다.
국가에 3천 리라의 보증금을 적립하고서 다음에 개점을 했으면서도 돈을 너무 많이 빌려주어서 뒷처리하느라 고생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베네치아의 은행에서는 다른 나라의 왕에게 융자를 주었다가 그 왕이 싸움에 졌기 때문에 본전을 찾지 못하게 되어 도산하는 것 같은, 동시대의 피렌체에서 일어났던 현상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베네치아 경제계의 주역은 은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었으며, 은행은 상인의 일을 합리화하여 그것이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측면지원을 하는 역할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베네치아인은 그들 나라를 사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운영했다는 평을 듣는 국민이었다.
3. 결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거친 많은 국가들 중 베네치아에 대해 이렇게 쓰는 이유는 문화의 피렌체나, 무역의 제노바등 많은 나라들이 생기고 사라져도 베네치아는 그들 가운데서 꿋꿋이 1천년의 역사를 지탱하고 발전시켜 온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결국 무역에 의해 큰 세력을 키운 도시들과 그 지배층인 상인들이 바로 르네상스를 가능케 하였다. 물론 이들 외에도 이탈리아가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많은 옛 유물을 간직하였고 비잔틴,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알프스 이북의 유럽 지역에 비하여 가깝게 받았다는 점도 있지만, 베네치아가 그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가능케 했고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은 확실한 사실이기도 하다.
확실히 베네치아는 공화국의 시민들 모두의 노력이 낳은 산물이다. 베네치아 공화국만큼 반영웅(反英雄)으로 일관한 나라는 없다. 그러나 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이 놓여 있는 환경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놓여 있는 환경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행동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이해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는 결합되지 않는 법이다. 서민에게는 어떤 계기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6세기에 아틸라로부터 도망쳐서 갈대가 나 있을 뿐인 소택 지대에 정주했을 때도 계기가 있었다. 굉장한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 틀림없는 항구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무(無)에서 다시 시작한 베네치아인들은 앞은 바다이고 뒤는 야만족 내습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 한계적 역경에서 베네치아인 들은 불굴의 의지와 합리적 정신으로 바다의 일부인 개펄 지대(라구나)의 바닷물과 개펄을 잘 관리하여 안전하고도 건강하며 온갖 산업 활동과 공공 활동도 가능한 한 수상 도시를 건설한다.
자원이라고는 없는 자그만 나라 베네치아가 바다로 활로를 찾아 무역 입국으로, 지중해의 대국으로 성장하여 열강과의 갈등 속에서도 번영을 누리면서 수백 년을 버티는 과정은 정말 대서사시 같은 느낌을 같게 한다.
첫댓글 전 솔직히 베네치아를 존나 싫어 합니다4th 크루세이더 개?K끼
비잔틴이 망합니다.ㅈ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