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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19~26절/왜 복음은 분쟁을 가져오는가?
예수님처럼 많은 오해를 받은 분은 역사상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간디가 자신의 비폭력 평화주의 사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도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또 남미에서 일어난 해방 신학이 힘에 의한 혁명이라는 수단을 용인하면서 내세우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의 오해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평화주의자도 되셨다가, 힘에 의한 혁명가가 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예수님의 권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 증거는 그들이 자기들의 주장의 근거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밖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많은 오해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이런 많은 오해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가는 동안에 점점 불식되어 가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 외에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이런 오해들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성격을 가진 신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무지에 근거한 많은 오해들이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 있으면 있을수록 교회는 마귀의 손에 농락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왜 복음은 분쟁을 가져오는가?” 로 잡았습니다.1. 분쟁을 가져오시는 예수님이 질문은 복음이 분쟁을 가져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서도 복음이 평화를 가져와야지, 무슨 분쟁을 가져온다는 것인가 하고 질문을 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19절에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처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듣는 이들에게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예 모든 잘못된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36절에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 쉼 없이 전쟁하고 분쟁하는 인간 세상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집안 식구들이 원수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흘려듣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말씀은 우리가 듣기가 참 좋고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막중한 부담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씀 그대로 사람들이 분쟁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귀신들려 미쳤다고 말하면서 왜 그의 말을 듣느냐?(20절)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어떻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21절) 하면서 분쟁하고 있습니다.
2. 단기적인 분쟁, 종국의 심판, 영원한 평화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단기적으로는 분쟁이 초래됩니다. 그리고 그 분쟁은 역사의 종국에는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끝나게 됩니다. 마치 두 당사자 간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재판정에 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모든 옳고 그름의 문제들, 여기에는 우리의 인생과 영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은가?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 없는가?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들도 다 판결이 나게 될 것입니다. 단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으로 모든 신자와 불신자들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역사 속의 모든 분쟁을 종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원한 나라에서 평화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3. 거짓 평화 대 참된 평화이 세상에서도 계속해서 전쟁을 하는 것이 좋아서 전쟁을 하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평화를 얻어내기 위한 대가로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인류 역사 속의 분쟁의 시작은 사람이 하나님의 품을 떠남으로써 시작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갈등구조가 발생했습니다. 형제와 형제사이에도 적대감은 일어났고 그것은 가인의 형제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희구하게 된 평화가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바벨탑 건설에서 인간의 평화에 대한 갈망이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평화를 깨뜨려 버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식의 평화, 하나님 없이 인간이 자기의 노력과 힘으로 만들어내는 거짓 평화를 결코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거짓 평화는 설령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종국에는 심판과 멸망으로 마치게 될 것이며 영원한 평안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으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식의 거짓 평화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평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평화,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의도하셨던 평화는 이런 게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평화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이고, 결코 다시는 깨어지지 않을 평화이며, 하나님과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입니다.4. 먼저 하나님과 화평 하라.하나님과 평화를 얻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매우 전문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것은 진노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선인과 악인을 향해서 햇빛과 비를 똑같이 주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거짓 평화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없이 만들어내는 모든 평화의 시도는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밖에는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것도 이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로 주님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그 양들이 누리는 안전함과 보호와 평안은 잠시 있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것들입니다. 오직 참된 평화와 안식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화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보장된 평화입니다. 우리는 다 평화를 원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원하고 바라며 또 유지하고 싶어 하는 평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5. 관건은 십자가다.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많은 경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단지 지식이 없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가 하층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양식을 위해 임금 삼으려 하였기에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셨습니다.(요6;15) 주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중에는 니고데모와 같이 뛰어난 율법 학자도 있었고,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은 유대 지도자들은 다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반응 역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정댔고, 귀신이 들렸다고 했으며 미쳤다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든 곳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식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면, 그들의 기호 혹은 판단력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단지 이해는 했지만, 그것이 거짓이라고 판단을 내려서 주님을 반대한 것일까요? 하지만, 성경의 논지를 우리가 제대로 따라가 본다면 이것은 훨씬 더 깊은 다른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가 걸린 겁니다. 십자가가 분쟁을 일으킨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핵심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만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생명을 버리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11, 15, 17).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많은 말씀들이 주님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것들입니다. 결국 그들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걸렸고 이해할 수 없고 어렵다고 반응을 하게 된 문제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24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독촉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을 더 이상 헷갈리게 하지 말고 그리스도라면 밝혀 달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헷갈리게 만든 것입니까? 이만큼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엇이 부족합니까? 표적이 더 있어야 합니까? 비록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공공장소에서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종종 그 사실을 인정해주셨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시는 것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너무나 잘못된 이해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주요한 한 가지 이유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목말라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강대국들의 압제 아래 신음하고 살아온 이들의 소망은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정치적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해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메시야가 아니셨습니다.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듯이,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받고 죽으셔서 죄를 속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을 하나님께 화목한 자들로 만드시는 것이 메시야의 사역이었습니다. 이런 기대의 차이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게 만든 핵심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에서 십자가와 죽음을 빼버린다면, 어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좋아하고 메시야를 환영했을 것입니다.6. 십자가 없이 기독교 없다.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만 뺀다면 기독교는 정말 교양 있고, 점잖으면서도 이 세상에서의 요구들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종교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를 좋은 종교로 여기고 호의적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기독교를 사람들에게 힘들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2000년 전에 팔레스틴 땅에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처음부터 걸림돌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고전 1:18). 십자가는 어느 누구에게도 기분 좋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1세기에 십자가가 얼마나 무서운 사형 도구인지를 경험적으로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우리들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의 이해 속에서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회복할 존재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의 앞길에 걸림돌과 같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쫒으라는 말씀은 자신들이 소망하던 메시야가 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마8;34)기독교에서 십자가의 이야기를 빼버린다면, 기독교는 결코 분쟁이 아니라 평화와 일치 속에서 환영을 받는 종교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분쟁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회사에서의 승진이나 더 나은 직업, 부귀영화, 나의 성공과 자녀들의 성공 또는 마음의 평안이나 상처의 치유 등등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것들이 과연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죄,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 동기에 맞춘 이야기를 교회가 하기 시작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분쟁이 자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복음은 십자가 없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림돌을 다 제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없는 복음, 걸림돌이 제거된 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주님은 절도와 강도요, 삯군과 같은 무리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왜 그들이 절도요, 강도며 삯군입니까? 그들은 양들을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양을 이용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양무리는 단지 그들의 밥줄인 것입니다. 그들은 양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기는 하나님 믿는다고 교회 생활하면서 열심으로 봉사하고 살았는데, 나중에 주님 앞에 가니까 주님이 모른다고 하는 사람 아닐까요? 예수 믿는 줄 알고 살았다가 지옥 가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절도요, 강도며, 삯군들은 양들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들이 내게 어떤 이익을 주느냐? 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의 양들은 절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양들이 아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자신들의 영원한 삶에 미친 엄청난 변화가 무엇인지를 그들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의 부귀영화란 더 이상 매력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를 향한 애정을 가지고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다만 영원을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살아갈 때만이 우리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제대로 풀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7. 가정, Home! Sweet home!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는 십자가의 복음이 가정에 불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제도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가정이, 부부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분쟁이 일어난 것을 경험하셨습니까? 예수를 대충 믿고 살겠다고 생각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충 믿는 것은 안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 없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부부 두 사람이 같이 교회에 다녀도 한 사람이 제대로 십자가의 복음을 먼저 경험하게 되면, 부부 사이에 어려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은 아무리 부부라고 하더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참된 복음은 때때로 가정의 분쟁을 가져오는데, 그 첫째가 가정이라는 곳에 일어납니다. 가정은 우리의 행복의 장소이지만 참된 복음의 증인으로 살고자 할 때, 복음으로 인해 분쟁을 경험합니다. 누가 이런 일을 좋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0:34~36). 그리고 복음으로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된 복음 안에서 회복된 가정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복을 누림으로 사랑하는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말하면서 주님의 허락하신 천국을 세워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은 복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8. 십자가가 열쇠다.십자가가 열쇠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친구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이 서로가 십자가 아래서 하나가 되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에 만연한 복음은 십자가 없는 복음입니다. 우리의 불편한 마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 때 하나님의 백성에게 찾아오는 마음은 많은 경우에 십자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서, 주님이 주시는 완전한 평화와 영원한 평화를 얻기 위해서 거짓된 평화에의 꿈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충 잘 지내는 수준으로 만족하던 삶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자마다 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잠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