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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만수대표님의 카톡에서]
♣ 인생은 기차여행과 같습니다 ♣
인생은 기차여행과 같습니다.
역들이 있고, 경로도 바뀌고
간혹 사고도 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 기차를 타게되고, 그 표를
끊어주신 분은 부모님 입니다.
우리는 부모님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어느 역에선가 우리를 남겨
두고 홀연히 내려버립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승객들이 기차에 오르
내리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나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게 됩니다
우리의 형제자매 ,친구, 자녀,
그 외 인생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여행 중에
하차하여, 우리 인생에 영원한
공허함을 남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리도 없이
사라지기에 우리는 그들이
언제 어느역에서 내렸는지
조차도 알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기차여행은..
기쁨과 슬픔, 환상, 기대,
만남과 이별로 가득 차 있는
지도 모릅니다.
좋은 여행이란..
우리와 동행하는 승객들과
어울려 서로돕고 사랑하며
좋은관계를 유지하는것입니다.
그들의 여행이 즐겁고 편안
하도록 내가 할 수 있는한
최대한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행의 미스테리
우리가 어느 역에서 내릴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다른 이견을 조정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베풀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느 역에선가 우리가 내려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인생
이라는 기차를 함께 타고 여행
했던 이들과 아름다운 작별을
할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타고 가는 기차에 동승
한 소중한 승객 중의 한 분이
되어주신 당신에게 감사드리며
내가 내려야 할 역이 어딘지
모르기에
"고맙습니다"
라는 말 한 마디라도 미리
전하고자 합니다.
저와 인생여행을 함께 해
주셔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은 내게 참 귀한 분입니다.
~행복 글 편지함 중에서 ~
~ - ~
⚘ 늙어서도 행복하게 잘 사는법
늙어서도 돈이 부족하여도 부자
가 아니어도 인생에서 행복을 잃
지 않고 살아 가려면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비법이 몇가지가 있다.
️"첫 번째 " 분노를 참아야한다.
사람 나이 칠십 세가 넘으면 버럭 버럭 화를 내는건, 건강에 백해무 익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의학 저널에서 발표된 연 구에 따르면 화를 자주 내고 분쟁 을 많이 하는 사람일 수록 수명이 짧아진다고 한다.
또한 늙어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주 화를 내는 사람을 좋아할 사 람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곱게 익어간다.
는 소리를 들어야 친구들이나 지 인들로부터 대접을 받는다.
️ "두 번째 " 만족해야 한다.
칠십 대가 되면 이제는 없는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더 많이 가진다고 행복 지수가 비 례적으로 더 올라가지 않기 때문 이다. 소유한 만큼만 만족하며 살 면 된다.
오히려 소유에 대한 경쟁적인 집 착력 때문에 몸과 마음을 피곤하 게 하고 헁복감을 나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 자연을 사랑해야 한 다.
나이가 들면 게을러져서 안방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집에 들어 오면 TV만 켜 놓고 소파에 앉아 꼼짝도 안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방에 들어 앉아 있지 말고 산책을 하든 운동을 하든 밖으로 나가라. 그래야 건강에 좋다.
️ "네번째 " 자신의 몸을 학대하지 마라.
나이가 들어서 건강을 잃으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는 일 이다.
그런데 사고나 질병이 아니라 스스로 몸을 해치는 나쁜 생활 습관을 줄이지 않고 계속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많 이 본다.
대표적인 예가 흡연이나 과음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끊거나 줄여야 할 영 순위가 바로 흡연이나 과음이기 때문이다.
️ "다섯번째 " 좋은 친구를 많이 만들어라.
좋은 친구가 많은 사람들은 오래 살아갈 뿐 아니라 행복지수 도 높게 살아간다.
최근 한 의학 연구에 따르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둔 사람들이 20% 정도 수명이 긴 것으로 나타났다.
친구들은 나쁜 행동이나 잘못된 결정들을 막아주며 인생의 즐거움과 가치를 느끼게 하는 역할도 담당해주기 때문이다.
푸른 잎도 언젠가는 낙엽이 되고 예쁜 꽃도 언젠가는 떨어진 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좋은 친구들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즐겁게 갈 수 있다.
이별이 점점 많아져 가는 고적한 인생 길에 서로 서로 안부라 도 전하며 함께 동행하는 친구가 있어야 행복한 삶을 구가하 는데 활력이 될 것이다.
꽃잎 떨어저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창밖 바람 서늘해 '가을인가' 했더니 그리움이더라.
그리움, 이 녀석을 '와락 안았더니' 눈물이더라. 세월 안고 눈 물 흘렸더니 아~ 빛났던 사랑이더라.
친구 여러분들 나이 들어가면서 친구는 귀중한 자산이요, 삶 에 활력을 주는 원기소입니다. 좋은 친구와 오늘도 행복하세 요.
그리고 많이~많이 웃으십시요. 웃음은 바로 건강입니다.
https://m.blog.naver.com/sby5600/22288798109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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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오늘 불러보는 하나님의 느낌은 이제껏 불러오던 하나님과는 또 다른 느낌의 감동이 있습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알고 경험하고 만난 하나님은 말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어서 나의 모든 표현력을 동원해도부족함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온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자신의 부와 명예와 권세를 앞세우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신자들 가운데에도 구원의 확신이 없거나 흔들리는 사람도 있으며 한 순간에 믿음을 저버리는 안타까운 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믿음 하나는 자신있다고 말하시는 분들에게 질문 하나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당신은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 당장 죽더라도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즉시 “예”라는 대답을 할 수 없거나 생각하느라 머뭇거리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나 다른 이유로 지옥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스치듯 할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잘못된 믿음과 선택은 예수를 배신한 가룟유다의 비극적 불행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자신의 지혜나 선행 그리고 신념으로 얻을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부활 승천 하셨으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셔서 지금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어 영적 교통하심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주를 믿는 자들을 영생으로 인도하심을 온전히 믿는 믿음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성경말씀에는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KRV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2:18-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1-15)
믿음이 좋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셨습니까?
만나셨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하나님를 만나신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과 후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도 구원받은 믿음의 후손입니까?
스스로 자문자답 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은 간증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강도는 마지막 죽기전에 회개하여 예수님께 용서받고 낙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죽더라도 영혼은 낙원으로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 하시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구원받은 강도처럼 하늘 상급이 없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받아 맡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여 영생의 면류관을 쓰시겠습니까?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께 칭찬듣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할때에 믿고싶어서 믿는 것과 믿어지기에 믿는 것과는 차원이 틀립니다 성령의 은사도 받아서 체험하지 않고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체험하여 은혜를 누리며 은사를 ㅐ활용하여 덕을 세우는 것은 천지 차이 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비롯한 많은 은사들도 체험해 보지 못하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과 역사하심으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고 서로 돕고 섬기는 솔선 수범함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과거의 믿음만 자랑하지 말고 천성문을 향하여 날마다 믿음의 전진을 해야 합니다
성경: 빌립보서 3:10~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히브리서 11:6 KRV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성경말씀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여기에서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는 단순히 믿음의 시간적인 순서를 보여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9장30절은 19장16절로부터 30절까지가 한 단락입니다. 16절부터 29절까지의 스토리를 요약한 결론이 19장30절입니다. 16절로부터 29절까지의 내용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떠나 버리게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는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30절입니다. 먼저 된 자는 부자 청년입니다. 부자 청년은 구약의 율법을 배웠고 익힌 특권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자신은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과 구약의 율법, 성경을 먼저 접한 자였습니다. 먼저 된 자였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는 27절~29절에 나오듯이 자기의 소유를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9장25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부자청년과 구원의 문제를 직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자와 부자 청년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하였기에 부자 청년은 결론적으로 믿음이 없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주님을 구주로 믿는 구원 얻은 백성입니다.
먼저와 나중은 먼저 믿은 신앙의 시간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유무, 신자와 불신자를 가름하는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를 가름하는 가늠자인 것입니다누가복음 13장30절도 마태복음 20장16절, 마태복음 19장30절과 똑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고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집 주인이 문을 닫은 후에 와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집 주인은 그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너희는 밖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는 말씀의 결론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입니다.
이 본문에서 먼저 된 자와 먼저 될 자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누구인가 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자들입니다. 집 주인으로부터 쫓겨 난 자들입니다. 밖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누구인가 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집 주인이 문을 열었을 때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입니다.
누가복음 13장을 통하여 볼 때에도, 먼저와 나중은 신앙의 시간적인 차이가 아니라 주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본질적인 차이를 말씀하고 있는 표현임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신자이냐, 불신자냐?를 가름하는 표현이 바로 먼저 된 자와 먼저 될 자입니다.
마태복음19장과 누가복음13장을 통하여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라는 해석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는 구원의 믿음이 없는 불신 영혼들을 뜻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는 구원의 믿음이 있는 성도들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결론을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비유에 적용하게 되면, 오전7시부터 오후3시까지 와서 일한 품꾼들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들입니다. 주님을 믿은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반면에 오후5시에 와서 일한 품꾼들은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들입니다. 주님을 믿은 자들입니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이들은 똑같이 주님을 믿는 믿음을 소유했으나 열심이나 성숙도의 차이에서 먼저 되고 나중 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주님을 믿는 구원의 믿음이 있는 자들 또는 없는 자들 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 20:16의 ‘먼저’와 ‘나중’의 의미는 신앙의 시간적인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유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물이 흘러야 강이 썩지 않고
피가 돌아야 몸이 죽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흘러야 영혼이 살아납니다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
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최신 유행하는 값비싼 옷을 입고 과시적으로 돈을 쓰면서 하루하루를 허비했다. 나사로라는 가난한 사람이 그의 집 문 앞에 버려져 있었는데, 온몸이 종기투성이였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그 인생의 소원이었다. 그에게 다가와서 그 몸에 난 종기를 핥는 개들이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러다가 이 가난한 사람이 죽었고, 천사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혔다. 지옥에서 고통받던 부자가, 눈을 들어 멀리 있는 아브라함과 그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았다. 그가 외쳤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시원하게 해주십시오. 제가 이 불 속에서 몹시 괴롭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했다. '얘야, 너는 사는 동안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여라. 여기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그가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게다가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수렁이 있어서, 우리 쪽에서 너희에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너희 쪽에서도 아무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네요.부자와 거지의 인생역전을 대비시키는 이야기이지요.부자는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벌이는 사람이었습니다.반면에 나사로라는 거지는 비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그는 부자의 대문밖에 버려져 있었습니다.온 몸이 종기 투성이여서 일어날 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쓰레기라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지요.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마치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했지만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지요.개가 핥는 이런 모습은 부자의 냉담한 모습을 더욱 강조하게 되지요.
두 사람 다 죽었는데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나사로는 천국으로 갑니다.그리고 부자는 불 속에서 고통을 받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지요.부자가 물 한모금이라도 달라고 애원하지만 아브라함은 불가능하다며 거절합니다.
정말 인생역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자는 왜 지옥으로 갔을까요?문 앞에 있던 거지 나사로를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여기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우리의 지식은 잠시 내려 놓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약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약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그러므로 여기의 부자는 결국 맘몬을 섬기는 사람을 보여줍니다.'옳지 않지만 지혜로웠던 청지기'의 비유의 결론도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 아니었습니까?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나누지 않는 것은 맘몬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면 솔직히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우리의 집 앞에도, 우리가 지나다니는 길에도 굶주린 사람들이 있으니까요.눈을 조금 더 돌리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구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은 당연하며,
우리가 지금 굶주리지 않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혹시 허세로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선물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움켜쥐고 인색한 것은 아닌지,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채 날마다 잔치를 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물이 흘러야 강이 썩지 않고
피가 돌아야 몸이 죽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흘러야 영혼이 살아납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핵심은 나와 하나님의 1:1 관계가 어떠하냐는 자가신앙진단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교회는 넘쳐나는데 왜 세상은 천국으로 쉽게 바뀌지 않고 많은 사람이 지옥같은 생활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것일까요?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성찰해 볼 일입니다 한 자루의 촛불이 제 몸을 태우는 희생으로 어둠을 밝혀줍니다
보름달 하나가 온 세상의 어둠을 물리치고 밝혀 줍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수 많은 별들 중에 하나처럼 빛나고 있습니까?
나는 과연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에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살고 있는지?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산 떡이 되신 예수께로 나아오는 자는 주님의 살과 피의 성찬에 참여하여 영생의 삶으로 변화되는데 내 자신도 나눔과 희생과 헌신과 봉사와 그리스도의 사랑실천의 행함있는 믿음으로 참 구원을 받았는지? 예수믿고 죄사함받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거듭났는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 에베소서 4장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성숙하고 성화되고 있는지? 긴급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성경말씀: 시편 2:7~8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변함없는 자녀사랑으로 나를 인정하고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이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혹시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외면하거나 주저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너무나 기쁜 마음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시며 감사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실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지 확신이 덜할때 삼일 밤낮으로 기도굴에서 엎드려 기도드릴 때에 마지막 삼일째에 방언기도의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후에 지금까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몇번의 죽을 고비를 넘길때마다 하나님은 제게 더욱 가깝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기도원에서 “랄랄랄라” 소리내며 초보적입문한 성도들은 많이 보았지만 유창한 외국어방언을 구사하는 분을 만나볼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심야 졸음운전으로 고속도로에서 대형사고가 날뻔한 경험이 있었는데 눈을감은 찰나의 순간에 저의 입을 통하여 큰소리로 깨워 주심으로 눈떠서 브레이크를 밟고 밀리다가 중앙분리대 콘크리트벽에 부딪히기 1 미터 전에 극적으로 멈출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 할렐루야!
저는 만약 그대로 충돌했다면 결코 살아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나도모르게 쏟아져내리는 눈물을 주체 하지 못하고 갓길 안전한 곳으로 차를 이동한 후에 한참을 울먹였습니다 내가 필요할때만 다급히 찿던 하나님이었는데 이번엔 하나님께서 먼저 다급하게 나를 찿아주셨구나! 내가 만일 여기서 이대로 생을 마감했다면 젊은 나이에 얼마나 원통하고 비참한 인생인가를 생각할 때에 상상조차하기 싫은 소름 끼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 살아계심을 더욱 확신하며 방언기도에 힘을 썼으며 이제는 유창하게 방언기도를 하게되었으며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운사를 받은 저의 자랑을 하려는 목적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를 구원하시고 사명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며 봉사하는 것입니다 저의받은 달란트와 사랑을 나눔으로 미약하나마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만나 기도원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 받는 곳입니다”라는 밴드명으로 방언 중보기도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하기 힘든 호스피스 환자를 비롯하여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을 위한 영혼구원을 위한 영접기도와 치유기도등 저의 기도가 필요한 분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선착순번대로 무료로 방언 중보기도 해 드리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중보기도를 해드리는 이유는 벙언은 하나님과교제를나눌 수 있는 영적언어로서 우리의 감송과 이성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언어로서 인간의 말과 생각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고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긱적으로 미사여구 동원하여 기도하는데는 한계가 있지만 성령께서 대신 간구해주심을 알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보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의 감화 감동 역사하심을 따라서 좀처럼 지치지 않고 중보기도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저의 밴드명을 검색하시고 채팅 주시면 됩니다 출석교회와 나이 성별 이름을 정확히 기재하신 분을 우선적으로 기도해 드립니다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습니다(13절). 그러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 중의 하나” 라고 한다고 대답했습니다(14절).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말로 예수님을 호평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리 다양하게, 긍정적으로 평가를 내린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재차 물으셨습니다(15절).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따라서 이제껏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그들의 신앙적 수준이 평가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미래까지도 결정 지워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고백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른 신앙을 고백을 하는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만 할 뿐, 그 신앙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신앙고백 합니다(16절).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대하여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고 말씀한 것입니다(요 20:3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이 사실이 빠진다면 그것은 복음이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17절).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로 알았던 것은 그 스스로의 노력이나 다른 어떤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선물보다도 크고 값진 축복의 선물입니다. 이 축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함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보다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또한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까지 고백했던 것입니다(빌 3: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인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이 축복을 진정으로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2.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18절). 이 말씀은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의 토대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신앙고백의 토대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바른 신앙고백이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건물이 없을지라도, 또 체계적인 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있다면 그곳이 곧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바른 신앙고백을 회복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고백이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실된 신앙이 고백되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바른 신앙고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가장 바른 길입니다.
고린도전서 3:16-17 KRV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주 기도문대로 기도하며 사도신경대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0 KRV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3.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절).
여기서 ‘천국 열쇠’란 ‘복음’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문을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 열쇠, 곧 ‘복음’을 베드로 곧 교회에 맡기셨던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땅에서 푸는 것’이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하늘에서 풀린다’는 것은 곧 천국의 문이 열려 복음을 믿은 자들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 이와 반대로 ‘땅에서 맨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그럴 때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것’은 천국 문이 닫혀서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고백했습니다(고전 9:16).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바울을 본받아 열심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천국이 아닌 지옥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천국 열쇠를 위임받은 우리의 책임이자 본분입니다.
오늘, 천국열쇠를 소유한, 매여 있는 모든 것을 푸는 믿음의 삶을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5:1-11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1)취하리라 하시니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1. 배경설명-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자랐습니다. 청년이 된 베드로도 이젠 어부가 되어 갈릴리 바닷가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틈이 날 때는 바닷가에 나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어느날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왠 일인지 거의 잡히지 않았습니다(5). 허탈한 심정으로 그물을 거두어 호숫가로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 위에 올라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시몬에게 다시 호수 깊은 데로 배를 저어 나아가 그물을 던져 고기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져 그물이 찢어질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왠일인지 이것을 보고 베드로는 예수님 무릎에 엎드리어 자신은 죄인이라며 예수님보고 자기를 떠나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이상하게 그런 베드로를 보고 이제 후로 베드로 너는 사람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도 예수님께 자기를 떠나달라고 했던 베드로가 육지에 올라온 후 배와 고기는 상관 안하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내용입니다.오늘 이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들 각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제 설교를 듣기 전에 먼저 여러분이 성령님께 물어보는 마음을 갖기 바랍니다. 이 성경구절을 읽을 때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생각 없이 읽으면 이런 일이 있었구나! 그 정도로 끝날 이야기 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는 것처럼 어부에게도 고기를 못잡는 날도 있겠지 매일 그물에 차게 고기를 잡겠습니까? 맞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못잡은 것으로 그날 끝났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재수 옴붙은 날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고기를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그물이 찢어지게 잡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달라지게 됩니다베드로가 그 날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ㅏㅏㅓ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더 귀한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 의 인생에서 고기잡고 먹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사명을 주기 위해 베드로의 인생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에 속한 일을 맡기기 위해 잠시 땅에 속한 일이 안되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고기 잡이에 실패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들에게 적용해서 말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실직하게 만들고, 사업 실패하게 만들고, 주식 투자하다 쪽박 차게 만들고 돈 좀 벌어보려고 이 일 저 일 다해도 돈을 모으기는커녕 먹고 살기도 힘든 인생을 면치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물론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따라다니며 이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쓸만한 사람, 아니 꼭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인생에 개입해서 세상적으로 잘 나가지 못하게 이리 저리 막아 절망과 좌절하던 중에 주님을 만나고 인생의 목적이 바뀌어 복음을 위해 살고 교회를 섬기며 살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 인생이 계획대로 잘 안되고 뭔가 자꾸 막히고 그러면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따라다니며 간섭해서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는 사람은 세상에서 돈 벌고 편하게 폼 나게 살아보겠다는 꿈을 쪽박 깨버리듯 빨리 깨뜨려버리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 살기 바랍니다. 자기 인생에 예수님이 특별히 간섭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오늘 베드로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생을 그냥 남에게 구걸하면서 살도록 버려두실 것인가? 그 점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봅시다.예수님은 베드로가 밤새 헛수고만 하고 빈손 들고 나오게 만들었지만 조금 후엔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많이 잡게 도와주었습니다. 빈 그물, 빈 손, 쪽 박 인생 그렇게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그 말입니다. 그 날 잡은 고기를 다 내다 팔았으면 베드로는 상당한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일년만 예수님이 훈수를 해주셔도 큰 부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맘만 먹으면 누구든 부자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밤새 고기 잡지 못하게 만들어 헛수고한 시간과 노력을 단 번에 보상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보상을 받는데 베드로가 한 일은 뭐였습니까? 그걸 생각해봅시다.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안듣습니다. 특히 나름대로 자기가 프로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있으면 누가 훈수해주면 고마운 게 아니고 기분나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구나 전문가에게 전혀 관련도 없는 풋내기의 충고라니!. 예수님은 목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이고 베드로는 어부 아버지 밑에서 고기잡으며 자란 사람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물속을그런데 베드로는 말씀 대로 하겠다고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이 그물 가득 고기를 얻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실패한 자신의 경험에서 생기는 부정적인 생각을 이겨내고 예수님의 지시에 자신을 맡겨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의지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통해 나타납니다. 지금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느 시대든 믿음의 사람들은 주의 말씀을 등대로 삼았습니다.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져 베드로에게 말 잘 들으면 부자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뭔가 다른 특별한 목적이 숨어 있었습니까? 잠시 배를 빌려 쓴 대가로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신 것인가요? 우리는 베드로의 반응을 통해서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두 배에 가득 고기를 잡은 후 예수님께 나가서 무릎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오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백했습니다. 이 상황에선 고맙다고 말하는 게 상식인데 베드로는 왠 회개를 하고있습니까?여기서 베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리적 영적 분석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겉으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순종했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예수님의 지시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밤 새 허탕친 이곳에 고기가 갑자가 어디서 나타난다고 잡겠는가 소용없는 짓이지만 그래도 말한 분 체면을 생각해서 그물을 내리긴 했지만 고기를 잡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부인 자신의 예측과 달리 엄청나게 고기를 잡아 그물 한번 걷어 올리는 것으로 두 배에 가득채웠습니다. 한 번에 이렇게 많은 고기를 잡은 것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실제로 겪게 되자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실 때만해도 베드로는 예수님을“선생님”이라고 호칭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많이 잡고 난 후엔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죄인이라고 책망하고 회개하라고 다그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면서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은 이런 도덕성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에 가득찬 고기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살아온 자신의 죄를 자각한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과 옳다 그르다 논하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이렇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모두 죄 덩어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앞에 곧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회개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는 인생은 이처럼 남의 회사를 훔쳐서 자기 맘대로 경영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이 죄를 깨닫고 회개했던 것입니다.예수님은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바로 잡자 베드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람을 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10절). 이것이 베드로가 세상에 때어난 목적이었습니다. 사람마다 태어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왜 사는 지 모르면서 그냥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사람이 제일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는 이유, 인생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면 죄악 속에서 헛되이 살다갈 수 밖에 없습니다70년 혹은 80년 엄청나게 돈 벌어 놓고 자기는 그냥 지옥가는 것 그게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예수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이렇게 살라고 해도 살 수 없겠지만 교회다니는 사람 중에도 이런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그들이 아직 예수님은 만나지 못하고 종교생활만 하기 때문에 지옥의 멸망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그럼 어찌 예수님이 베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편안히 앉아서 말씀들으며 성령님께서 찾아오셔서 깨우쳐주시는 게 아닙니까?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을 통해서든, 그냥 마음에 감동돼서든, 간증을 듣고든,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만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굴복하여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고 마음을 열어 믿게 해주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베드로의 체험은 불신자보다 소위 교회 안에 있는 종교인에게 필요합니다.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교회 다니고 있지만 아직 하나님께 엎드려 굴복한 적이 없는 사람들. 현대 교회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보다 이런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따르지만 실 생활에서는 자신이 주인 노릇하며 살아가는 교인들. 자신의 뜻과 생각과 다른 것은 모두 걸러내고 자기 생각대로 한평생 교회생활 하다가 지옥 가는 사람들. 목사 중에도, 장로 중에도, 집사 중에도 그리고 우리들 중에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노라고 고백하기 전에 먼저 베드로의 회개를 본받아 해야 합니다.벌거벗은 듯 부끄러움과 수치와 가슴 쥐어 뜯는 심정으로 회개하며 이전의 삶을 내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는 회개가 없다면, 그래서 아직도 주님은 당신 인생의 절대적인 주인이 아니시라면 그 사람은 구원받아야 할 전도대상일 뿐입니다.베드로처럼 예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할 마음이 있는 분은 지금 그렇게 합시다
이사야 55:1 KRV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성 경: [요 6:50-59]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요 6:50-51]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 귀절들은, 33, 35절에 있는 말씀을 거듭한 셈이다.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중언체(重言體)는 역설체(力說體)이다.
"내 살"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임이 되시므로 그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요 6: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유대인들이 서로 다툰 원인은, 그들의 의견이 서로 다른데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예수님의 속죄 교훈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살이 세상 사람의 생명이 된다는 말씀(51절 끝)에 걸렸다.
(51절 끝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그들은, 메시야가 죽어서 속죄하시는 진리를 왜 믿지 못했던가?
그 진리는 이사야서 53장에 명백히 예언되지 않았는가?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세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여기서는, "인자의 살"이란 말에 "인자의 피"란 말을 더하여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1) 그것은, 살과 피는 인간성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간성 전체가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셨으니, 그것은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신 것이다.
(2) 피를 첨부하여 말씀하신 또 한가지 이유는,
피는 특별히 생명을 의미하는데
(창 9: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그것을 흘리셔서 속죄 제물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출 12:7-8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레 1: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문자적 의미보다 비유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은, 곧, 그의 살과 피를 먹으며 마시는 행위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나 자신의 분깃으로 만드는 실제적 행위이다.
신앙은 이론 뿐이 아니다.
이 말씀에 근거한 기독교 성찬 교리에 대하여,
불트만(Bultmann)은, 그것이 헬라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Theology of the New Testamant I, p.148).
그러나 헬라 신비 종교에서 그 의식에 참여한 자들이 신(神)을 먹는다고 한것(그들의 신으로 표상된 소위 고기 같은 것을 먹는 것)은, 범신론 사상과 마술적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 먹음에 참여하는 자가 신(神)이 된다는 그릇된 주장도 거기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찬은 그와 정반대로서 유신론적인 속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찬은, 구약에 있는 유월절 잔치의 후신(後身)이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에 바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그것을 성찬으로 변전시키신 것 뿐이다.
* 참조 : (눅 22:7-23).
요 6장에서 신자들이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실 필요성에 대하여, 그가 강조하신 때도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다(4절).
그 뿐 아니라, 유월절 잔치의 영적 의미가 성찬의 그것과 같다.
(1) 유월절 잔치를 먹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구속을 준 것처럼,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성찬을 먹는 것이 기독 신자에게 그런 의미를 가지며,
(2) 유월절의 만찬이 애굽을 떠나 먼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양식이 된 것처럼,
성찬은 기독자에게 영적 양식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면, 성찬과 헬라의 신비 종교와는 전연 관계가 없다.
헬라의 신비 종교들 중 다요니시스(Dionysys)란 신을 예배하는 제사에서는, 거기 참여하는 자들이 그들의 신을 상징하는 소의 고기를 생으로 먹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므로 그들 자신이 신화(神化)한다고 믿었던 것이다(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pp. 281-282). 이런 사상은 범신론(汎神論)으로서, 유신론(有神論)인 기독교와 반대된다.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헬라 원어에 의하면, 여기 "먹고"란 말이 이때까지 사용된 먹는다는 말과 다르다.
여기 사용된 말은 맛있게 먹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 누림에 대한 적합한 술어이다.
이 귀절 말씀은, 기독 신자가 이 세상에서부터 영생을 얻고 내세에는 몸의 부활까지 받는, 구원의 복락 전부를 가리킨다.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여기 "참된"이란 말이 사용된 목적은 이렇다.
곧, 만나와 같은 물질적 양식에 비교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속죄의 은혜)는 참되다는 것을 표시하려는 것이다.
곧, 물질적 양식은 그림자와 같고 불완전하나,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는 실물이요 영원히 살리는 효과를 가진 것이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은 자가 주님과 연합하게 됨을 가리킨다.
요한의 신학 사상대로 보아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1) 주님의 계명을 지킴,
(요일 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2)주님을 본받음,
(요일 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3) 열매를 맺음.
(요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4) 죄를 범치 아니함.
(요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5) 기도 응답을 받음.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6) 생명을 가졌음.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7)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담력을 가진다.
(요일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는 말은, 예수님에게서는 영원 자존의 생명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다만 중보자(中保者)로서의 그의 처지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위치에 계신 것 만큼, 그의 생명 주시는 역사는 아버지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영원 자존하신 것 만큼, 그도 그러하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먹는 것과 같이 실제적으로 믿어야 그의 생명을 받아 누린다.
고뎉(Godet)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자연계의 생명의 열매가 떡덩이로 나타날 때에 사람에게 섭취됨과 같이, 신적 생명(神的生命)도 그리스도로 화육(化肉)되어 나타났으므로 우리에게 접촉되어 받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 떡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떡도 먹어야 우리의 생명 영양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였다.
[요 6: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귀절은, 32-33 절 말씀 내용이 거듭 나온 셈이다.
같은 말씀을 거듭 하는 것은, 그 말씀을 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리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너희 안....즉 너희 마음속에 있다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질문한 바리새인에게 답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심인 제자들을 향해 답을 하고 계시며, 그 말씀의 뜻은 제자들인 너희들 공동체 가운데 이 나라가 세워질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은 이 나라가 세워지는 시기를 말씀하십니다.
22절에 예수님은 그 나라가 세워지는 그 날을 제자들은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므로...
그 나라(천국)는 마음 속에 있는 나라가 아닌것이지요.
그 나라(천국)는 인자가 이르는 그 나라의 첫날인 그 날을 못 본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그 나라(천국)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임하는 나라가 아니라,
장차 이 땅에 세워지는 재림하시는 바로 그 때의 나라(천국,메시아 왕국)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로 택한 자녀를 돌보시며 천국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껏 에벤에셀로 지켜 보호하신 참 좋으신 하나님 영원 무궁토록 감사와 찬양드리며 성령의 은사를 주시어 방언 중보기도 사역을 감당케 하셨아오니죽도록 충성할때에 생명의 면류관을 주사며 영생의 믿음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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